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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모로코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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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모로코 위기는 1911년 프랑스가 모로코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자, 독일이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함을 아가디르에 파견하며 발생한 국제적 위기이다. 이 사건은 1905년 제1차 모로코 위기 이후 프랑스와 독일 간의 갈등이 재발한 것으로, 독일의 무력 시위에 영국이 프랑스를 지지하면서 양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결국 프랑스는 모로코에 대한 보호령을 확립하고, 독일은 프랑스령 콩고의 일부를 얻는 것으로 협상이 타결되었으나, 이는 유럽 열강 간의 불신을 심화시키고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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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모로코 위기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명칭아가디르 위기
다른 명칭제2차 모로코 위기
시기1911년 7월 – 1911년 11월
장소아가디르, 모로코
결과모로코-콩고 조약
영토 변경프랑스가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영토를 카메룬(노이카메룬)에 할양
독일이 카메룬의 작은 영토를 프랑스령 차드에 할양
관련 분쟁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제3공화국
대영제국
스페인
교전국 2독일 제국
지휘관
지휘관 1에드워드 그레이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지휘관 2알프레트 폰 키더렌-베히터
독일 황제빌헬름 2세
독일 총리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독일 해군 장관헤르만 빌베르크
영국 국왕조지 5세
프랑스 대통령아르망 팔리에르
프랑스 총리조제프 카요
스페인 국왕알폰소 13세
스페인 총리호세 카날레하스
시각 자료
SMS 판터
SMS 판터 호, 아가디르 만에 정박

2. 배경

1905-06년의 제1차 모로코 위기 이후, 1906년 알헤시라스 회의를 통해 모로코에서 프랑스의 우위가 유지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은 1909년 2월 9일에 프랑스가 배타적인 정치적 통제권을 갖는 한편, 양국이 모로코에서 서로의 경제적 이익을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911년, 독일은 술탄에게 프랑스의 승인 없이는 다른 조약을 체결하지 않겠다는 새로운 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는데, 이는 이전의 합의를 위반하는 것이었다.[3]

독일의 이러한 움직임은 영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 간의 관계를 시험하고, 어쩌면 영국을 독일과의 동맹으로 위협하려는 것이었다.[4] 또한 독일은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실질적인 통제를 수용하는 대가로 보상 청구를 강제했다.

1902년 8월, 베르베르인 아부 루마라가 술탄을 자칭하며 현 왕조에 반기를 들었고(1907년 진압), 20세기 초 모로코에서는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프랑스는 진압을 위해 종종 출병했는데, 이는 실질적인 종주국으로서 프랑스의 지위를 확인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1907년 8월에는 페스에서 술탄 물레이 압델아지즈 4세 (Mulai Abd-al-Aziz IV)의 폐위를 요구하는 민중 운동이 발생했고, 이에 호응한 물레이 압델하피드 (Mulai Abd-al-Hafiz)는 1908년 1월 형을 폐위시키고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thumb 이러한 중앙의 혼란은 프랑스의 진출을 더욱 부추겼다.

제1차 모로코 사건에서의 긴장은 알헤시라스 회의로 인해 표면적으로는 해소되었고, 프랑스는 모로코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2. 1. 1차 모로코 위기 (탕헤르 사건)

1906년 알헤시라스 회의를 통해 제1차 모로코 위기 이후 모로코에서 프랑스의 우위가 유지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은 1909년 2월 9일에 프랑스가 배타적인 정치적 통제권을 갖는 한편, 양국이 모로코에서 서로의 경제적 이익을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1908년 9월, 프랑스 외인 부대 병사 3명이 카사블랑카에서 독일 선박을 타고 도주하면서 독불 간의 충돌이 일어났지만, 이때는 독일의 양보로 인해 1909년 2월 양국 간 모로코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 인해 독일은 모로코에서 경제 활동만을 수행하고, 모로코에서의 프랑스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독일의 야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2. 2. 프랑스와 독일의 협정 (1909)

1905-06년 제1차 모로코 위기 이후, 1906년 알헤시라스 회의를 통해 모로코에서 프랑스의 우위가 유지되었다. 1909년 2월 9일, 프랑스와 독일은 프랑스가 배타적인 정치적 통제권을 갖고, 양국이 모로코에서 서로의 경제적 이익을 지지하기로 합의했다.[3] 그러나 독일은 모로코에서 경제 활동만을 수행하고, 모로코에서의 프랑스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했지만, 독일의 야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2. 3. 모로코 내부의 혼란

1902년 8월, 베르베르인 아부 루마라가 술탄을 자칭하며 현 왕조에 반기를 들었고(1907년 진압), 20세기 초 모로코에서는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22] 프랑스는 질서 유지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종종 군대를 파견했는데, 이는 실질적인 종주국으로서 프랑스의 지위를 확인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1907년 8월에는 페스에서 술탄 물레이 압델아지즈 4세 (Mulai Abd-al-Aziz IV)의 폐위를 요구하는 민중 운동이 발생했고, 이에 호응한 물레이 압델하피드 (Mulai Abd-al-Hafiz)는 1908년 1월 형을 폐위시키고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이러한 중앙의 혼란은 프랑스의 모로코 진출을 더욱 부추겼다.[22]

1911년, 베르베르족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같은 해 4월, 프랑스는 진압을 위해 모로코에 출병했다. [22]

3. 전개

1911년 7월 1일, 독일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함 SMS Panther|판터de아가디르 항구에 파견했다.[7][22] 이는 사실상 프랑스에 대한 무력 시위였다. 며칠 후, 더 큰 규모의 순양함 SMS Berlin|베를린de이 판터 호를 대체하며 독일의 군사적 압박은 더욱 강화되었다.[7]

7월 3일, 주영 프랑스 대사 캉봉은 영국 외무 장관 그레이에게 아가디르에 공동으로 군함을 파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독일 총리 베트만 홀베그는 주영 독일 대사에게 영국이 강경 조치에 나설 경우 "판터 호의 파견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알헤시라스 의정서 위반에 따른 경과 조치에 불과하다"라고 변명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독일-프랑스 관계는 강한 적대 상태가 되었고, 양국의 전면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져 Berliner Börse|베를린 증권 거래소de에서 패닉이 일어날 정도였다.

런던의 초기 반응은 신중했으나, 대서양에 독일 해군 기지가 들어설 가능성이 생기자 영국은 즉각 프랑스 지지 의사를 표명하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그레이는 7월 21일, 영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독일 대사에게 알리도록 내각의 승인을 얻어냈다. 영국은 전쟁 발발에 대비해 전함을 모로코로 보냈다. 제1차 모로코 위기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 대한 영국의 지원은 영불 협상의 강점을 보여주었다.[13]

1911년 7월 21일, 영국 재무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대독 강경 연설(맨션 하우스 연설)을 통해 독일의 행동을 비판하고 프랑스와의 군사적 협력을 강화할 것임을 천명했다.

아가디르 위기 속에서 독일은 재정적 혼란에 휩싸였다. 주식 시장은 하루 만에 30% 폭락했고,[9] 대중들은 통화를 금으로 바꾸기 시작했으며, 은행에는 예금 인출 사태가 발생했다. 독일 제국 은행은 한 달 만에 금 준비금의 5분의 1을 잃었다. 금본위제에서 이탈할 가능성에 직면한 카이저는 물러섰고, 프랑스가 모로코 대부분을 장악하도록 내버려 두었다.[10]

3. 1. 독일의 포함 외교

1911년 7월 1일, 독일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함 SMS Panther|판터de아가디르 항구에 파견했다.[7][22] 이는 사실상 프랑스에 대한 무력 시위였다. 며칠 후, 더 큰 규모의 순양함 SMS Berlin|베를린de이 판터호를 대체하며 독일의 군사적 압박은 더욱 강화되었다.[7] 독일 민간인 헤르만 빌베르크는 판터호 도착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아가디르에서 북쪽으로 110km 떨어진 곳에서 아가디르로 보내졌지만, 배가 도착하고 사흘 후에야 도착했다.[8]

7월 3일, 주영 프랑스 대사 캉봉은 영국 외무 장관 그레이에게 아가디르에 공동으로 군함을 파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독일 총리 베트만 홀베그는 주영 독일 대사에게 영국이 강경 조치에 나설 경우, "판터호의 파견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알헤시라스 의정서 위반에 따른 경과 조치에 불과하다"라고 변명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독일-프랑스 관계는 강한 적대 상태가 되었고, 양국의 전면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져, Berliner Börse|베를린 증권 거래소de에서 패닉이 일어날 정도였다.

3. 2. 영국-프랑스의 연대 강화

런던의 초기 반응은 신중했다. 프랑스가 위기를 촉발한 주된 책임이 있으며, 따라서 프랑스가 양보하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내각의 자유당 정부는 생각했다.[13] 영국 정부는 프랑스가 성급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억제하고, 군대 파견을 만류하려 했다. 4월에 외무부 장관 에드워드 그레이 경은 "프랑스가 하려는 것은 현명하지 않지만, 우리의 협정에 따라 간섭할 수는 없다"라고 썼다.[13]

그러나 대서양에 독일 해군 기지가 들어설 가능성이 생기자, 영국은 즉각 프랑스 지지 의사를 표명하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그레이는 7월 21일, 영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독일 대사에게 알리도록 내각의 승인을 얻어냈다. 영국은 전쟁 발발에 대비해 전함을 모로코로 보냈다. 제1차 모로코 위기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 대한 영국의 지원은 영불 협상의 강점을 보여주었다.[13]

1911년 7월 21일, 영국 재무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대독 강경 연설(맨션 하우스 연설)을 통해 독일의 행동을 비판하고 프랑스와의 군사적 협력을 강화할 것임을 천명했다.

3. 3. 독일의 재정 위기

아가디르 위기 속에서 독일은 재정적 혼란에 휩싸였다. 주식 시장은 하루 만에 30% 폭락했고,[9] 대중들은 통화를 금으로 바꾸기 시작했으며, 은행에는 예금 인출 사태가 발생했다. 독일 제국 은행은 한 달 만에 금 준비금의 5분의 1을 잃었다. 프랑스 재무 장관이 이 위기를 조작했다는 소문이 돌았다.[9] 금본위제에서 이탈할 가능성에 직면한 카이저는 물러섰고, 프랑스가 모로코 대부분을 장악하도록 내버려 두었다.[10]

4. 협상과 결과

7월 9일 이후 독일과 프랑스는 문제 해결을 위해 교섭을 거듭했다. 영국데이비드 로이드 조지7월 21일 런던의 맨션 하우스에서 국가의 명예가 평화보다 소중하다는 강경 연설을 통해 독일이 프랑스에 불합리한 합의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경고를 보냈다.[11]

11월 4일, 조제프 카이요와 독일 간의 비밀 협상을 통해 프랑스-독일 협정이 체결되었다.[12] 독일은 모로코-콩고 조약에 명시된 대로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식민지 중앙 콩고(현재 콩고 공화국)의 영토 275000km2를 받는 대가로 모로코에서 프랑스의 지위를 수용했다. 이 영토는 노이카메룬으로 알려졌으며 독일 식민지인 카메룬의 일부가 되었다. 독일은 프랑스 식민지인 차드에 포트 라미 남동쪽의 작은 영토를 양도했다(현재 차드의 일부).

프랑스 총리 카이요의 독일과의 협상이 유출되면서 그는 7개월 만인 1912년 1월 21일 사임했다. 독일에서도 프랑스-독일 협정은, 특히 민족주의 언론에서 독일에게 너무 적은 것을 주었다며 비판을 받았다.

1912년 3월 30일 프랑스는 술탄과 페스 조약을 체결하여 모로코를 타국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2]

4. 1. 프랑스-독일 협상

7월 9일 이후 독일과 프랑스는 문제 해결을 위해 교섭을 거듭했다.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7월 21일 런던의 맨션 하우스에서 국가의 명예가 평화보다 소중하다는 강경 연설을 통해 독일이 프랑스에 불합리한 합의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경고를 보냈다.[11]

11월 4일, 조제프 카이요와 독일 간의 비밀 협상을 통해 프랑스-독일 협정이 체결되었다.[12] 이 협정에서 독일은 모로코-콩고 조약에 명시된 대로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식민지 중앙 콩고(현재 콩고 공화국)의 영토 275000km2를 받는 대가로 모로코에서 프랑스의 지위를 수용했다. 이 영토는 노이카메룬으로 알려졌으며 독일 식민지인 카메룬의 일부가 되었다. 노이카메룬 지역은 부분적으로 아프리카 수면병이 만연한 늪지대였지만, 독일에게 콩고 강으로의 출구를 제공했다. 독일은 프랑스 식민지인 차드에 포트 라미 남동쪽의 작은 영토를 양도했다(현재 차드의 일부).

프랑스 총리 카이요의 독일과의 협상이 유출되면서 그는 7개월 만인 1912년 1월 21일 사임했다. 독일에서도 프랑스-독일 협정은, 특히 민족주의 언론에서 독일에게 너무 적은 것을 주었다며 비판을 받았다.

4. 2. 페스 조약 (1912)

1912년 3월 30일 프랑스는 술탄과 페스 조약을 체결하여 모로코를 타국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2] 이에 따라 모로코 북부의 세우타, 멜리야 등과 스페인령 사하라에 접하는 남부는 스페인의 보호령이 되었고, 나머지 대부분의 국토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2] 탕헤르와 그 주변 373km2는 국제 관리 도시로 지정되어 열강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2]

5. 영향

런던은 초기에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으나, 대서양에 독일 해군 기지가 건설될 가능성이 제기되자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독일 대사에게 경고했다. 영국은 전쟁에 대비해 전함을 모로코로 파견했으며, 제1차 모로코 위기 때처럼 프랑스를 지원하여 영불 협상의 굳건함을 보여주었다.[13]

이 사건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비밀 해군 협정을 맺었다. 왕립 해군이 독일 해군으로부터 프랑스 북부 해안을 방어하고, 프랑스는 지중해 서부에 함대를 집중시켜 영국의 이익을 보호하기로 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와의 통신을 보호하고, 영국은 본국에 더 많은 병력을 집중시켜 독일 공해 함대에 대응할 수 있었다.[17] 영국은 또한 대륙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신속하게 군대를 동원하기 위해 철도 집행 위원회를 설치했다.[18]

압드 알 하피드가 항복하고 페스 조약 (1912년 3월 30일)이 체결되면서, 프랑스는 모로코에 완전한 프랑스 보호령을 수립하여 형식적인 독립의 잔재를 없앴다. 영국이 프랑스를 지원한 것은 양국 간 협력을 강화하고 영국과 독일 간의 관계를 악화시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분열을 심화시켰다.[15] 1912년 3월 30일 프랑스가 술탄과 페스 조약을 체결하여 모로코가 타국의 보호를 받게 되자, 보호국화에 반대하는 모로코 국민은 프랑스와 스페인에 맞서 항쟁을 벌였다.

미국의 역사학자 레이먼드 제임스 손택은 1933년에 이 사건을 제1차 세계 대전의 비극적인 서막을 알리는 우스꽝스러운 실수들의 연극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위기로 프랑스와 독일, 독일과 영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군비 경쟁이 가속화되었으며, 유럽 지배 계층 사이에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고 주장했다.[14]

아프리카 분할. 1913년 유럽 식민 강대국의 아프리카 통제 지역: 벨기에 (노란색), 영국 (연어색), 프랑스 (파란색), 독일 (청록색), 이탈리아 (녹색), 포르투갈 (보라색), 스페인 (분홍색). 독립 국가는 라이베리아에티오피아뿐이었다. (회색).

5. 1. 국제 관계의 긴장 고조

런던은 처음에 신중한 반응을 보였으나, 대서양에 독일 해군 기지가 건설될 가능성이 제기되자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독일 대사에게 경고했다. 영국은 전쟁에 대비해 전함을 모로코로 파견했다. 제1차 모로코 위기 때처럼, 프랑스를 지원하여 영불 협상의 굳건함을 보여주었다.[13]

이 사건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는 비밀 해군 협정을 맺었다. 왕립 해군이 독일 해군으로부터 프랑스 북부 해안을 방어하고, 프랑스는 지중해 서부에 함대를 집중시켜 영국의 이익을 보호하기로 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와의 통신을 보호하고, 영국은 본국에 더 많은 병력을 집중시켜 독일 공해 함대에 대응할 수 있었다.[17] 영국은 또한 대륙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신속하게 군대를 동원하기 위해 철도 집행 위원회를 설치했다.[18]

압드 알 하피드가 항복하고 페스 조약 (1912년 3월 30일)이 체결되면서, 프랑스는 모로코에 완전한 프랑스 보호령을 수립하여 형식적인 독립의 잔재를 없앴다. 위기 동안 영국이 프랑스를 지원한 것은 양국 간 협력을 강화하고 영국과 독일 간의 관계를 악화시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분열을 심화시켰다.[15]

미국의 역사학자 레이먼드 제임스 손택은 1933년에 이 사건을 제1차 세계 대전의 비극적인 서막을 알리는 우스꽝스러운 실수들의 연극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 위기로 프랑스와 독일, 독일과 영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군비 경쟁이 가속화되었으며, 유럽 지배 계층 사이에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고 주장했다.[14]

5. 2. 모로코의 저항

1912년 3월 30일 프랑스가 술탄과 페스 조약을 체결하여 모로코가 타국의 보호를 받게 되자, 보호국화에 반대하는 모로코 국민은 프랑스와 스페인에 맞서 피비린내 나는 항쟁을 벌였다.

참조

[1] 웹사이트 Agadir Incident European history https://www.britanni[...] 2021-04-12
[2] 서적 The Sleepwalkers http://worldcat.org/[...] HarperCollins
[3] 문서 GP XXIX, number 140, Affaires du Maroc VI, 332 ff
[4] 서적 Diplomacy Simon & Schuster 1995-04-04
[5] 문서 Fay (1930) 278–284.
[6] 문서 Affaires du Maroc VI, 372 ff
[7] 서적 The War that Ended Peace: The Road to 1914 Random House
[8] 서적 The War that Ended Peace: The Road to 1914 Random House
[9] 서적 Lords of Finance Windmill Books
[10] 학술지 Liaqust Ahamed Lords of Finance: The Bankers Who Broke the World 2014-09-30
[11] 학술지 The Agadir Crisis, the Mansion House Speech, and the Double-Edgedness of Agreements https://www.jstor.or[...] 1972
[12] 학술지 L'accord franco-allemand du 4 novembre 1911 au sujet du Maroc et du Congo https://www.persee.f[...] 1912
[13] 서적 British Policy During the Agadir Crisis of 1911 F.H. Hinsley
[14] 서적 European diplomatic history, 1871–1932 http://worldcat.org/[...] McGraw-Hill
[15] 서적 From Agadir to Armageddon : anatomy of a crisis http://worldcat.org/[...] Weidenfeld and Nicolson
[16] 서적 The Prize : The Epic Quest for Oil, Money & Power https://archive.org/[...] Free Press 1993-01-01
[17] 학술지 The 'Wild Talk' of Joseph Caillaux: A Sequel to the Agadir Crisis https://www.jstor.or[...] 1987
[18] 서적 Catastrophe 1914: Europe goes to war https://www.worldcat[...] 2013
[19] 서적 Prophet of Decline : Spengler on world history and politics http://worldcat.org/[...] Louisiana State University Press 2001
[20] 문서 Neba 4–5.
[21] 웹사이트 Morocco History, Map, Flag, Capital, & Facts https://www.britanni[...] 2021-04-12
[22] 문서 「パンテール」と表記した文献もある。ドイツ語でヒョウの意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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