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철 (바둑 기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남철은 1923년 전라북도 부안군 출생으로, 한국 바둑의 선구자이자 프로 바둑 기사이다.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미노루의 내제자가 되었으며, 1941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기원 프로 기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귀국 후, 한국기원을 설립하고 한국 바둑의 체계적인 발전과 보급에 힘썼다. 1950년대와 1960년대 국수전 9연패를 포함하여 주요 기전을 석권하며 한국 바둑계의 최고 기사로 활약했다. 또한 김인, 조상연, 조치훈, 조훈현 등 후배 기사들의 일본 유학을 지원하여 한국 바둑의 국제 경쟁력 강화에 기여했다. 1983년 9단으로 승단하고, 1989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2006년 사망 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19년에는 일본기원 바둑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부안군 출신 - 김상협
김상협은 삼양그룹 창업주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의 조카로, 도쿄대 졸업 후 고려대 교수와 총장, 문교부 장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교육자이며, 친일 행적 논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요구된다. - 부안군 출신 - 김상만 (언론인)
김상만은 동아일보 창립자의 장남으로, 동아일보 사장, 회장, 명예회장을 역임하며 동아방송 개국, 잡지 재발간 등 사세 확장에 기여했고,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전개하여 국제신문발행인협회 '자유의 금펜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언론, 교육, 국제 교류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 서울교동초등학교 동문 - 윤석중
윤석중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로서, 아동문학 운동을 이끌고 수많은 동요와 동시집을 발표하며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 서울교동초등학교 동문 - 박태원 (1909년)
박태원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로, 모더니즘 소설을 주로 썼으며,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다 사망했다. - 풍양 조씨 - 조순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인 조순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한국은행 총재, 민선 1기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고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 풍양 조씨 - 조남풍
조남풍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야전군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특수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베트남 전쟁 참전, 공수특전부대 육성, 한국형 기갑무기 개발 등에 기여하고, 예편 후에는 동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국제 외교 및 안보 분야에서 활동했다.
조남철 (바둑 기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한글) | 조남철 |
이름 (한자) | 趙南哲 |
출생일 | 1923년 11월 30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부안군 |
사망일 | 2006년 7월 2일 |
사망 원인 | 노환 |
국적 | 대한민국 |
소속 | 한국기원 |
스승 | 기타니 미노루 |
제자 | 김수영 |
단 | 9단 |
프로 입단 | 1941년(일본기원) |
은퇴 | 2006년(사망) |
타이틀 | |
타이틀 획득 횟수 | 국수 9기 명인 2기 패왕 4기 최고위 7기 왕좌 2기 |
2. 생애
조남철은 한국 현대 바둑의 아버지로 불리며, 1945년 한성기원 설립을 시작으로 한국기원을 창립하여 한국 바둑의 기틀을 다졌다. 국수전 9연패를 달성하는 등 1950~60년대 한국 바둑계 최고 기사로 활약하였고, 김인, 조상연, 조치훈, 조훈현 등 후진 양성에 힘썼다. 저서로는 《위기개론》, 《사활의 기초》, 《행마의 급소》, 《흑백의 발자취》, 《정석정해》, 《포석의 요령》, 《일본명인기사전집》, 《바둑에 살다》 등이 있으며, 회고록 《세 번의 눈물》이 있다.[6]
2. 1. 유년 시절 및 일본 유학
풍양 조씨이며, 전라북도 부안군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바둑을 배워 눈부신 성장을 보였다. 1934년 기타니 미노루가 중국을 방문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울에 들렀을 때 조남철의 소문을 듣고 지도 바둑을 두었다. 기타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문하에 입문을 권하였고, 조남철은 1937년 14세의 나이로 일본에 건너가 기타니의 첫 번째 내제자(insei)가 되었다. 1941년 17세의 나이로 일본기원 초단이 됨에 따라 한국인 최초로 일본기원 프로 기사가 되었다.[4]2. 2. 한국기원 설립 및 활동
1943년에 귀향하여 일제강점기 조선 땅에 있다가 2년 후 해방을 맞이하였다.[4] 전후 일본 기원을 모델로 하여 바둑 조직 설립을 목표로 1945년에 한성기원을 설립하였고, 1948년 조선기원, 1949년 대한기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54년 사단법인 한국기원, 1969년 현재의 재단법인 한국기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4] 1950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실시된 승단 결정전을 통해 3단으로 인정받았다. 그 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1954년 《위기개론》(圍碁槪論)을 펴내 일본식 바둑용어를 우리말로 고치는 데 큰 공헌을 했다.[4] 종전 후 다시 바둑 단체 설립을 진행하여, 1955년에 한국기원을 설립하였다.2. 3. 국내 기전 석권 및 후진 양성
1956년부터 시작된 국수전에서 제1기부터 9연패를 달성하는 등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 바둑계에서 최고 기사로서 활약하였다.[4] 김인, 조상연(조치훈의 형), 조치훈, 조훈현 등의 일본 유학을 지원하여 한국 바둑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4]한국에서는 그전까지 사전 접바둑 방식의 순장바둑이 주류였지만, 조남철이 일본에서 두어지던 자유 포석 바둑을 보급하여 한국 바둑의 현대화에 앞장섰다.
2. 4. 말년 및 사후
1983년 9단으로 승단하였고, 1984년 한국기원 명예이사장이 되었으며 일본기원으로부터 오쿠라상을 받았다.[5] 같은 해 일본기원대창상(日本棋院大倉賞)을, 1989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1994년 바둑문화상 감투상을, 1998년 제4회 운경상 문화언론부문상을 받았다.[5] 동아일보는 1995년 명예 국수 칭호를 수여했는데, 명예 국수는 조남철 9단이 유일하다.[5] 2006년 노환으로 84세에 사망하자, 노무현 대통령은 조화를 보내 애도했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한국기원과 동아일보는 영결식장에서 고인에게 대한민국 최초의 대국수(大國手) 칭호를 헌정하였다.[5] 2019년에는 일본기원의 제16회 바둑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장남 | 조송연 |
조카 | 조상연 (바둑 기사) |
조카 | 조치훈 (아명 조풍연, 바둑 기사) |
조상연 기사·조치훈 기사 형제의 아버지는 조남철 기사의 형이다. |
4. 업적 및 평가
조남철은 한국 현대 바둑의 아버지로 불린다.[4] 1945년 한성기원을 설립하고, 1954년 사단법인 한국기원으로 발전시키는 등 한국 바둑의 기틀을 마련했다.[4] 1956년부터 시작된 국수전에서 제1기부터 9연패를 달성하는 등 1950~60년대 한국 바둑계에서 최고 기사로 활약하였다.
김인, 조상연(조치훈의 형), 조치훈, 조훈현 등 후진 양성에 힘써 한국 바둑의 국제 경쟁력을 강화했다.[4] 또한, 1954년 《위기개론》(圍碁槪論)을 펴내 일본식 바둑용어를 우리말로 고치는 데 공헌하는 등 한국 바둑의 정체성을 확립했다.[4]
1984년 일본기원으로부터 오쿠라상을 받았고, 1989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94년 바둑문화상 감투상, 1998년 제4회 운경상 문화언론부문상을 받았다. 동아일보는 1995년 명예 국수 칭호를 수여했는데, 명예 국수는 조남철 9단이 유일하다.[5] 2006년 사망 후 노무현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 애도했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한국기원과 동아일보는 영결식장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대국수(大國手) 칭호를 헌정하였다.
5. 수상 및 서훈
1984년 일본기원으로부터 오쿠라상을 받았다.[4] 1989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4] 1994년 바둑문화상 감투상을 받았다.[4] 1998년 제4회 운경상 문화언론부문상을 받았다.[4]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 애도했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4]
6. 저서
《圍碁槪論중국어》, 《사활의 기초》, 《행마의 급소》, 《흑백의 발자취》, 《정석정해》, 《포석의 요령》, 《일본명인기사전집》, 《바둑에 살다》, 회고록 《세 번의 눈물》 등이 있다.[6]
7. 타이틀 기록
조남철은 대한민국 기전 최다 타이틀 보유자 순위에서 7위를 기록했다.[1] 그는 국수전에서 9번, 최고위전에서 7번, 패왕전에서 4번, 명인전에서 2번, 왕좌전에서 2번, 전국기사선수권전에서 6번, 최강자전에서 1번 우승했다.
다음은 조남철의 준우승 기록이다.
7. 1. 타이틀 보유
기전 | 보유 년도 |
---|---|
현역 | 9 |
국수전 | 1956–1964 |
폐지 | 13 |
명인전 | 1968, 1970 |
최고위전 | 1959–1962, 1964-1966 |
패왕전 | 1959–1962 |
왕좌전 | 1958, 1969 |
전국기사선수권전 | 1948-1955 (1950-1952년 미개최) |
최강자전 | 1973년 |
국수전 9연패(1956-1964), 최고위전 7회(1959-1962, 1964-1966), 패왕전 4회(1959-1962), 명인전 2회(1968, 1970), 왕좌전 2회(1958, 1969), 전국기사선수권전 6회(1948-1955, 1950-1952년 미개최), 최강자전 1회(1973) 우승으로 대한민국 기전 최다 타이틀 보유자 순위에서 7위를 기록했다.
7. 2. 준우승
참조
[1]
웹사이트
조남철
https://terms.naver.[...]
2019-06-10
[2]
웹사이트
풍양 조씨
https://www.joongang[...]
1982-01-30
[3]
일본기원
坂田栄男、趙南哲が囲碁殿堂入り(第16回囲碁殿堂表彰)
https://www.nihonkii[...]
日本棋院
2019-10-26
[4]
웹인용
조남철 선생의 7가지 업적
http://www.tygem.com[...]
tygem.com
2012-02-20
[5]
웹인용
별세한 조남철 9단…현대바둑 터닦은 반상의 개척자
http://news.donga.co[...]
news.donga.com
2012-02-20
[6]
웹인용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
2018-06-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