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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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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는 1956년 4월에 개최되었으며, 소련 공산당의 탈스탈린화 정책의 영향으로 김일성이 집단지도체제 구축을 언급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여 1인 지배 체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대회에는 소련과 중국 대표단이 참석했으며, 당 규약 개정과 중앙위원회 구성 변화가 있었다. 대회 이후 김일성의 집단지도체제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는 8월 종파 사건으로 이어졌고, 김일성은 이를 통해 반대파를 숙청하며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당시 당원 수는 116만 명 이상이었으며, 조선로동당 제3기 중앙위원회는 총 14번의 전원회의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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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종파 사건은 1956년 김일성의 권력 집중을 비판하며 일어난 사건으로, 김일성은 숙청을 통해 반대파를 제거하고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했으며, 남북 간의 이념 대립을 심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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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
개요
조선로동당 당기
조선로동당의 기
참가자916명의 대표
위치평양, 북한
날짜1956년 4월 23일 ~ 29일 (7일간)
결과제3기 중앙위원회 선출
제3기 중앙감사위원회 선출

2. 배경

1955년 12월 3일, 제2차 중앙위원회 제17차 전원회의에서 1956년 4월에 제3차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쇼프스탈린 격하 운동과 탈스탈린화 정책 채택은 조선로동당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용건은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와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했다. 김일성은 흐루쇼프의 노선을 따르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집단지도체제를 언급했지만, 실제로는 1인 지배 체제를 강화하였다.

2. 1. 국내외 정세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탈스탈린화가 공식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최용건은 제20차 당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와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했다. 김일성은 소련의 새로운 정책에 대한 소식을 듣고, 조선로동당 당원들에게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여 한 지도자의 권한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개인 영웅주의"를 발휘하고 집단지도 절차를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박헌영이승엽과 같은 과거 인물들을 질책했다. 그러나 집단지도에 대한 논의는 김일성의 최고 권력 집중과는 관련이 없었다. 그는 당 최고 직위인 조선로동당 위원장직과 정부 수반으로서 국가 최고 직위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김일성은 소련의 탈스탈린화 정책을 언급하지 않았고 요시프 스탈린의 지도력을 비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스탈린 측근들(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게오르기 말렌코프, 니콜라이 불가닌 등)의 활동을 비판했다.

3. 대회 진행

제2차 중앙위원회 제17차 전원회의는 1955년 12월 3일, 소련 공산당의 제20차 당대회가 끝나고 두 달 뒤인 1956년 4월에 제3차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대회에서 탈스탈린화가 소련의 공식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최용건은 제20차 당대회에 참석하여 돌아와 김일성에게 그 활동에 대해 직접 보고했다. 김일성은 소련의 새로운 정책에 대한 소식을 듣고 신속하게 반응하여, 조선로동당 당원들에게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여 한 지도자의 권한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나아가 "개인 영웅주의"를 발휘하고 집단지도 절차를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박헌영이승엽과 같은 과거 인물들을 질책했다. 그러나 집단지도에 대한 논의는 김일성의 최고 권력 집중과는 관련이 없었다. 그는 당 최고 직위인 조선로동당 위원장직과 정부 수반으로서 국가 최고 직위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김일성은 소련의 탈스탈린화 정책이나 요시프 스탈린의 지도력을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스탈린 측근들의 활동을 비판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김일성은 장황한 연설을 했는데, 서대숙에 따르면 그의 경력에서 최악의 연설 중 하나였다. 그는 연설에서 국내파 지도자들을 비난하고, 경제 상황, 국제 문제, 일제강점기 항일 투쟁을 장황하게 이야기했지만, 집단 지도 체제와 탈스탈린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 전쟁 실패 책임을 국내파에게 돌리는 한편, 항일 투쟁이 북한 문화와 이념의 근본이라고 주장했다. 김규식, 김구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을 애국자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종원은 김일성의 연설 후, 항일 투쟁가와 김일성이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북한 검찰소 이성운 검찰총장은 국내파 중 자기 비판을 거치지 않거나, 당 지도부 전복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당 규약이 개정되었으며, 박정애가 대회에 개정안을 발표했다. 그녀는 이 개정안이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개정안의 세 가지 이유는 "사회주의 건설"을 용이하게 하고, 당 조직에 기여하고 강화하며, 다른 형제 정당에 맞춰 변경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되었다. 그녀는 새로운 개정안이 고위 간부들로부터 일반 당원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대해 발표했는데, 김열과 박성삼이 당원들을 괴롭혔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에 따르면 당은 제2차 대회 이후 상당히 성장하여, 제3차 대회에서는 58,529개의 세포에 1,164,945명의 당원을 보유하게 되었다. 한국 전쟁 중에도 당은 성장했으며, 제2차 대회에서 439,183명의 당원과 28,496개의 세포가 증가했다. 전체 당원 수는 북한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했다.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의 결정에서 비롯된 혼란은 제3기 중앙위원회 선거에서 느껴졌다. 박창옥을 포함한 여러 소련 국적의 한국인들과 연안파 주요 인물들이 재선되었다. 박헌영과 가까운 허성택과 북만규와 같은 국내 공산주의자들도 재선되었다. 김일성은 자신의 측근들을 중앙위원회에 많이 재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중앙위원회 최고위 간부 6명 중 4명이 항일 투쟁가(김일성, 최용건, 김일, 박금철)였다. 제3기 중앙위원회에는 28명만이 재선되었고, 43명이 신규 위원이었으며, 후보위원에서 정위원으로 승진한 사람은 5명이었다. 46명의 후보위원 중 2명이 재선되었다. 제2기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중 아무도 제3기 중앙감사위원회에 재선되지 못했다.

3. 1. 대표단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원수 녜룽전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대표단 등 형제 정당 대표단이 대회에 참석했다. 브레즈네프는 대회 연설에서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 개최를 축하하며,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결정된 새로운 정책을 전달했다. 그는 당을 강화하기 위해 당 내 상하를 막론하고 레닌주의 집단 지도 체제를 시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녜룽전은 한국 전쟁 이후 국가 재건에 기여한 조선로동당과 한국 인민의 노력을 함께 치하했다.

4. 주요 결정 사항

조선로동당은 제3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및 중앙검사위원회 선거를 진행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측근들을 중앙위원회 요직에 앉히며 권력을 강화했다. 특히 중앙위원회 최고위 간부 6명 중 4명이 김일성을 비롯한 항일 투쟁가 출신(김일성, 최용건, 김일, 박금철)이었다.

김일성은 대회 연설에서 국내파를 비난하고, 경제 상황, 국제 문제, 항일 투쟁 노력을 장황하게 이야기했지만,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집단 지도 체제와 탈스탈린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 전쟁의 실패 책임을 국내파에게 돌리고, 김규식, 김구와 같은 한국 민족주의자들을 애국자라고 언급했다.

4. 1. 당 규약 개정

박정애가 대회에 당 규약 개정안을 발표했다. 그녀는 이 개정안이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고 대표자들에게 말했다. 개정안은 사실상 새로운 당 규약이었다. 개정안의 세 가지 이유는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을 용이하게 하고, 당 조직에 기여하고 강화하며, 다른 형제 정당에 맞춰 변경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되었다. 박정애는 새로운 개정안이 고위 간부들로부터 일반 당원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대해 발표했는데, 김열과 박성삼이 당원들을 괴롭혔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과오를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항들은 일반 당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당 규약에는 그러한 보호를 뒷받침할 만한 내용이 거의 없었다. 당 규약은 상징적인 것에 불과했고, 김일성과 그의 항일 투쟁 동지들은 이를 준수하지 않았다.

4. 2. 중앙위원회 구성 변화

제3기 중앙위원회에는 28명만이 재선되었고, 43명이 신규 위원이었으며, 후보위원에서 정위원으로 승진한 사람은 5명에 불과했다. 46명의 후보위원이 제3기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었으며, 이 중 2명이 재선되었다. 제2기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중에서는 아무도 제3기 중앙감사위원회에 재선되지 못했다.

이러한 변화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의 영향으로, 조선로동당 내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박창옥을 비롯한 여러 소련 국적의 한국인들과 연안파 주요 인물들이 여전히 높은 당직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박헌영과 가까운 인물들도 재선되는 등, 김일성의 권력은 여전히 공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자신의 측근들을 중앙위원회에 많이 재선시키는 데 성공했는데, 11명의 정위원과 6명의 후보위원이 항일 투쟁가 출신이었으며, 중앙위원회 최고위 간부 6명 중 4명이 항일 투쟁가였다.

5. 결과 및 영향

김일성은 제3차 대회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 1인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김일성은 이 대회를 소련파연안파 등 반대파를 숙청하는 계기로 삼았다. 제3차 대회는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김일성 유일 지배 체제의 기틀을 마련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5. 1. 8월 종파 사건

집단 지도 체제와 탈스탈린화 정책을 공식적으로 지지하지 않은 것은, 소련파연안파김일성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려 했던 8월 종파 사건으로 이어졌다.

6. 통계

항목내용
당원 수1,164,945명
당세포 수58,259개
대의원 수916명
대의원 구성로동자 439명, 농민 192명, 인텔리겐챠 246명, 기타 39명
불참 대의원 수2명
당원의 인구 비율10%


7. 조선로동당 제3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조선로동당 제3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다음과 같다.

개최일회의 종류
1956년 8월 30일-31일8월 전원회의
1956년 9월 23일9월 전원회의
1956년 12월 11일-13일12월 전원회의
1957년 4월 18일-19일4월 전원회의
1957년 10월 17일-19일10월 전원회의
1957년 12월 5일-6일12월 확대 전원회의
1958년 6월 5일-7일6월 전원회의
1958년 9월 26일-27일9월 전원회의
1959년 2월 23일-25일2월 전원회의
1959년 6월 27일-30일6월 전원회의
1959년 12월 1일-4일12월 확대 전원회의
1960년 8월 8일-12일8월 전원회의
1960년 12월 20일-23일12월 확대 회의 및 전원회의
1961년 3월 20일-22일3월 전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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