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조창 (조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창은 조조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하고 용맹하여 여러 차례 정벌에 참여했다. 북방 정벌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조조 사후 조비가 황위에 오르면서 임성왕으로 봉해지고, 이후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조창의 죽음에 대해서는 조비에 의한 독살설이 전해진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9년 출생 - 게타 (황제)
    게타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이자 카라칼라의 동생으로, 공동 황제였으나 형과의 불화로 암살당하고 기억말살형을 당했다.
  • 189년 출생 - 제갈균
    제갈균은 삼국시대 촉한의 관료이자 제갈량의 동생으로, 형이 유비에게 등용될 때 촉한에 출사하여 장수교위를 지냈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그를 제갈량으로 착각하는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 223년 사망 - 유비
    유비는 후한 말 평민 출신으로 시작하여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여러 세력을 거치며 활동하다 제갈량을 영입하여 촉한을 건국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으나, 이릉 전투 패배 후 병사하였다.
  • 223년 사망 - 가후
    가후는 후한 말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전략가로, 여러 군주를 섬기며 뛰어난 책략과 통찰력으로 활약하여 위나라 건국에 공헌했고 사후 숙후에 추증되었다.
  • 조조의 아들 - 조곤
    조곤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황족으로 조조의 아들이며, 문장력이 뛰어나 조비와 조예 시대에 여러 왕에 봉해졌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여 조예의 칭송을 받아 사후 공왕으로 추증되었다.
  • 조조의 아들 - 조비
    조비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로, 조조 사후 위왕과 승상 자리를 이어받아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즉위하여 구품관인법을 시행하는 등 내정을 정비했으나 오나라 정벌에 실패하고 요절했으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문장경국 사상을 내세우기도 했다.
조창 (조위)
인물 정보
이름조창
한자 표기曹彰
로마자 표기Cao Zhang
자문(子文)
작위
생전 작위연릉공(鄢陵公)
임성왕(任城王)
시호위왕(威王)
생애
출생189년 추정
사망223년 8월 1일
사인병사
묘지미상
가족 관계
아버지조조
어머니무선황후 변씨
배우자손씨 (손분의 딸)
자녀조해
왕창의 아내(조씨)
관직
주요 경력월기장군
기타
조창
조창

2. 생애

조조가 아들들에게 좋아하는 것을 물었을 때, 조창은 장수가 되기를 좋아한다고 답했다. 조조는 “장수가 되어서 어찌하겠느냐?”라고 다시 물었고, 조창은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어려움을 만나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사졸들의 앞에 서겠습니다. 상은 반드시 행하고 벌은 반드시 분명히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조조는 크게 웃었다.[4]

216년(건안 21년), 조창은 언릉후에 봉해졌다.[5] 218년 4월, 대군과 상곡군의 오환족 무신저 등이 모반을 일으키자 북중랑장이 되었고 효기장군을 대행했다.[5] 전예와 함께 모반을 진압하면서 무명을 떨쳤는데, 선비족 대인 가비능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자청해서 귀순해왔을 정도였다. 이 북방 정벌로 인해 조창은 의기양양했는데, 조비는 북방 평정의 보고를 위해 조조를 만나러 가는 조창에게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처신하라고 충고했다. 조창은 조조 앞에서 공로를 주변 장수들에게 돌려 조조는 그의 겸손한 모습에 매우 기뻐했다.

《위략》에 따르면, 조조가 한중에서 유비와 싸울 때 유봉으로 싸움을 돋우게 했다. 조조는 유봉을 매도하고 조창을 불렀는데, 조창이 장안에 왔을 때 이미 조조는 한중에서 돌아왔다. 조조는 조창을 월기장군에 임명하여 장안에 두었는데, 조조는 낙양에서 병에 걸려 조창이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다. 《위략》에서는 이때 아우 조식에게 조조의 뒤를 이을 것을 암시했으나 조식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조조 사후 조비가 왕위에 오르면서 조창은 수도를 떠나 자신의 영지로 가게 되었다.[10] 조비는 조창의 공적을 인정하여 식읍을 5천 호 가까이 늘려 1만 호에 이르게 했고, 작위도 공(公)에서 왕(王)으로 올려주었다. 이듬해 조창은 수도에 와서 조비를 알현한 후 병에 걸려 수도 관저에서 사망했다.[10] 조비는 조창의 장례에 천자용 수레, 용 깃발, 근위병 백 명을 하사하며 후하게 장례를 치렀다. 《세설신어》에서는 조비가 조창을 독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1]

2. 1. 어린 시절과 성장

어려서 활쏘기와 수레 몰기를 잘 했고, 근력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으며, 손으로 맹수를 때려잡았다. 여러 차례 정벌을 좇았다. 조조는 이를 마땅치 않게 여기고, 《시경》과 《서경》을 읽게 했는데, 조창은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조조가 아들들에게 좋아하는 것을 물었을 때, 조창은 장수가 되기를 좋아한다고 답했다. 조조가 다시 물었다. “장수가 되어서 어찌하겠느냐?” 조창이 답했다.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어려움을 만나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사졸들의 앞에 섭니다. 상은 반드시 행하고, 벌은 반드시 분명히 하겠습니다.” 조조는 크게 웃었다.[4]

자라면서 수염이 나기 시작했는데 그 수염이 금빛이라 사람들은 조창을 황수아(黃鬚兒)라 불렀다. 187년(조비의 출생년)부터 192년(조식의 출생년) 사이에 태어났다. 궁술과 마술에 뛰어나고, 남다른 완력을 지녔으며, 맹수와 격투할 수 있었고, 험준한 곳에서도 끄떡없었다. 조조의 정벌에 따라다니며 격렬한 기질을 보였다.

조조는 조창의 기질을 경계하기 위해 학문을 가르쳤지만, 조창은 측근에게 위청·곽거병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박사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2. 2. 북방 정벌과 무훈

216년(건안 21년), 조창은 언릉후에 봉해졌다.[5] 218년 4월, 대군과 상곡군의 오환족 무신저 등이 모반을 일으키자 북중랑장이 되었고 효기장군을 대행했다.[5] 이때 전예와 함께 모반을 진압하면서 무명을 떨쳤는데, 선비족 대인 가비능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자청해서 귀순해왔을 정도였다.[5]

218년 당시, 조창은 호군 북중랑장 직책을 맡고 있었고, 사기장군의 권한으로 중앙 정부의 보병 1,000명과 기병 수백 명을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섰다.[5] 출발에 앞서 조조는 조창에게 "우리는 집에서는 부자 관계이지만, 임무가 주어지면 감독관과 부하 관계이다. 만약 실수를 한다면 법이 엄격하게 적용될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도록 해라."라며 경고했다.[6]

전장에 도착했을 때, 조창의 부대는 계획대로 지방 정부의 부대와 합류하지 못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조창은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며 중요한 관문과 통로를 방어했다. 반란군은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조창은 그 후 부대를 이끌고 추격에 나서 용맹함을 과시했다.[6] 조창은 직접 적군과 근접전을 벌여 많은 적 기병을 화살로 쓰러뜨렸다. 반나절 동안의 전투가 끝나자 그의 갑옷에는 여러 개의 화살이 박혔다.[7]

부하들은 대군을 넘어 추격을 계속하는 것은 조조의 지시에 반한다고 주장했지만, 조창은 "승리에 전념해야 하며, 지금이 그 호기이며, 지시에 따라 적을 방치하는 것은 훌륭한 장수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추격을 속행하여 대파했다. 조창은 통상적인 두 배에 해당하는 은상을 장병들에게 주었으므로, 기뻐하지 않는 장병은 없었다. 선비가비능이 수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형세를 살피고 있었는데, 조창이 적대 세력을 모두 격파하는 것을 보고, 조조에게 복종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부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첫 승리 이후 추격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참모 중 한 명이 나와 조조의 명령은 군대가 대(代)의 관할 구역을 넘을 수 없으며, 더 이상의 추격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8] 그러나 조창은 유능한 장군은 따분한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며, 추격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24시간 동안 질주하여 오환 기병을 따라잡았고,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타격을 입혔다. 선비족의 지도자 가비능은 조위와 오환족 간의 전쟁을 관찰하기 위해 근처에 1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있었다. 조창의 눈부신 승리를 본 가비능은 그에게 항복했다. 그 후 북쪽 변경의 불안은 진압되었다.

이 북방 정벌로 인해 조창은 의기양양했는데, 북방 평정의 보고를 위해 조조를 만나러 가는 조창에게 조비가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처신하라고 충고하여, 조조 앞에서 공로를 주변 장수들에게 돌리게 되며, 조조는 그의 겸손한 모습에 매우 기뻐했다.

장안의 조조에게 불려진 조창은, 업을 지날 때 조비로부터, 공적을 세운 것을 자랑하지 않고 겸손하게 대답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조창이 조비의 조언대로 행동하자, 조조는 조창의 수염을 잡고 "'''황수'''"(황수, 호랑이 수염을 기른 듯한 용자의 칭호)라고 부르며, 그의 성장을 기뻐했다.

조조가 임종할 때 장안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아버지로부터 급한 말로 불려졌지만, 그의 죽음에 임하지 못했다.

2. 3. 조조 사후와 죽음

조조 사후, 조비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조창은 수도를 떠나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게 되었다.[10] 조비는 조창의 공적을 인정하여 식읍을 5천 호 가까이 늘려 1만 호에 이르게 했고, 작위도 공(公)에서 왕(王)으로 올려주었다.

다음 해, 조창은 수도에 와서 조비를 알현한 후 병에 걸려 수도 관저에서 사망했다.[10] 조비는 조창의 장례에 천자용 수레, 용 깃발, 근위병 백 명을 하사하며 후하게 장례를 치렀다. 《세설신어》에서는 조비가 조창을 독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1]

세설신어에 따르면, 조조가 사망한 후 조비는 조창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조창은 형에게 옥새를 볼 수 있는지 물었고, 이에 조비는 동생이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고 의심하여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조비는 어머니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 조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창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몇 주 후, 조비는 어머니의 생일날 동생을 초대하여 바둑 대국을 벌였다. 대국 중반, 조비의 시종들이 가져온 자두 중 일부에는 독이 들어 있었고, 조비는 독이 없는 자두를 먹으며 동생에게도 자두를 권했다. 조창은 독에 중독된 것을 깨닫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변부인이 물을 찾으려 했을 때는 이미 조비가 모든 물건을 치워둔 뒤였다. 결국 조창은 형에게 죽임을 당했다.[11]

그러나 예가령 교수는 이 이야기에 몇 가지 허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223년, 조창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낙양에서 급사했고,[16] 시호는 '위왕'(威王)으로 정해졌다. 허난성 쉬창 시 옌링 현에는 조창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으며, "조조지자, 조창지령"이라고 새겨진 석비가 있다.

3. 가족 관계

4. 평가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는 삼국 시대 이전과 삼국 시대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작가는 조조 사후 조창과 그의 형 조비 사이의 긴장감을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4. 1. 현대

현대 매체에서 조창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 14세기 역사 소설인 ''삼국지연의''는 삼국 시대 이전과 삼국 시대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낭만적으로 묘사하였다. 작가는 조조 사후 조창과 그의 형 조비 사이의 긴장감을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 조조의 장남이자 적통 후계자인 조비는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조창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에서 수도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조비는 그의 형이 그가 가진 군사력으로 상속을 다툴까 두려워했다.

  • 가규는 조비의 조언자였는데, 조창을 설득하여 물러나게 하겠다고 자원했다. 가규는 조창을 만나기 위해 성 밖으로 나가 그가 조문객으로 온 것인지 아니면 왕위를 다투는 경쟁자로 온 것인지 물었다. 조창은 "저는 다른 의도 없이 조문객으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가규는 "그렇다면 왜 군사들을 데려왔는가?"라고 말했고, 조창은 그의 군대에게 성 밖에서 대기하라고 명령한 후 혼자 들어갔다. 형제는 만나 포옹하며 울었다. 조창은 그의 군대의 지휘권을 조비에게 넘기고 자신의 봉토로 돌아갔다. 이로써 조비의 입지는 어느 정도 굳어졌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Tai'shi
[3] 문서 Cao Zhang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문서 Cao Cao's order
[9] 웹사이트 拾遺記/卷七
[10] 웹사이트 Cao Pi, Cao Zhang and Cao Zhi http://www.yutopian.[...]
[11] 서적 Shishuo Xinyu
[12] 서적 曹操魏の武帝による 新人物往来社
[13] 서적 文選 (書物) 魏略
[14] 서적 太平御覧 襄陽耆旧記
[15] 서적 三国志 (歴史書) 魏氏春秋
[16] 서적 三国志 魏氏春秋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