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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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비능은 선비족 출신으로, 용감하고 공정하며 백성의 지지를 받아 족장이 되었다. 만리장성 근처에 거주하며 세력을 키웠고, 한나라 군대의 지휘 방식을 모방했다. 207년 조조에게 조공하고 왕의 지위를 받았으며, 부두근과 경쟁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가비능은 조위 시대에도 세력을 유지하며 유주와 병주를 약탈했고, 235년 암살당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위의 동맹으로 묘사되며, 마초에게 격퇴당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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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자는 후한 말 장막의 부장으로, 조조를 알아보고 동탁 토벌을 지원했으며, 서영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가비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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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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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가비능 (軻比能) |
성 | 물길 (勿吉) |
부족 | 선비족 (鮮卑族) |
생몰년 | ? ~ 235년 |
활동 시기 | 후한 말기 ~ 삼국 시대 |
주요 활동 | 선비족 규합 및 독립 세력 구축 |
생애 | |
초기 생애 | 빈한한 집안 출신으로, 용맹하고 계략이 뛰어났음. 한어를 익혀 변경의 일을 통달함. |
세력 확장 | 195년 이후, 점차 세력을 키워 유력한 선비족 수장이 됨. 요동군의 공손도와 오환족과 연합하여 세력을 확장함. 218년, 오환족과 함께 오환자반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함. |
조조와의 관계 | 조조가 위왕에 오르자 사신을 보내 축하함. 조비가 즉위하자, 가비능을 왕으로 책봉하려 했으나 사양함. |
조위와의 관계 | 조진, 장합 등 조위의 장수들과 대립하며 여러 차례 전투를 벌임. 조예의 명으로 파견된 자객에게 암살당함. |
성품 및 평가 | |
성품 | 성격이 강직하고 용맹하며, 계략에 능통함. |
평가 | 진수는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에서 가비능이 비록 중국을 침략했지만, 스스로 사치를 억제하고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기꺼이 따랐다고 평가함. 배송지는 삼국지에 주석을 달면서 가비능이 강족과 흉노족의 추장을 죽이고 그 무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을 인용하며 그의 잔혹성을 비판함. |
가계 | |
출신 | 물길 (勿吉)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공손도 오환족 오환자반 조조 조비 조진 장합 조예 |
2. 생애
가비능은 원래 작은 선비족 출신이었으나, 용감하고 공정하며 탐욕스럽지 않아 백성들이 족장으로 선출했다. 그의 부족은 만리장성 근처에 거주했고, 원소가 허베이를 장악하자 많은 사람들이 가비능에게 합류했다. 이들은 부족에게 무기와 갑옷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고, 글쓰기를 소개했다. 가비능은 한나라 군대 지휘 방식을 모방하여, 사냥 시 깃발을 세우고 북을 사용하여 전진 또는 후퇴 신호를 보냈다.[1]
207년 백랑산 전투에서 오환의 족장 타둔이 조조에게 패배하자, 가비능과 여러 선비 부족 지도자들은 조조의 통제를 받는 한나라 조정에 조공을 바쳤다. 이 공로로 가비능과 다른 족장들은 왕의 지위를 받았다.[2] 가비능은 정직하고 진실하며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대부분의 선비 부족의 지지를 얻었다. 가비능의 가장 큰 경쟁자는 탄시회의 손자인 부두근이었다. 가비능이 부두근의 형제 부루한을 함정에 빠뜨려 죽인 후, 부두근과 가비능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부두근의 씨족은 이 싸움으로 힘이 약해졌고, 가비능의 세력은 삼국 시대 조위의 지원에 힘입어 크게 성장했다.
조비 시대, 가비능은 위나라와 교역하고 조공을 바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위나라 내부에서는 가비능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여, 전예, 견초, 양습 등의 장수들이 가비능을 여러 차례 공격했다.
조예 시대에도 가비능과 위나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228년 전예는 가비능의 사위 울축건을 공격했고, 가비능은 3만 기병으로 전예를 포위했으나 염지의 설득으로 물러났다.[2] 231년에는 촉한의 제갈량과 연계하여 위나라를 위협하기도 했다.[4] 233년 가비능은 부도근과 화친을 맺으려 했으나, 병주자사 필궤의 공격을 받아 실패했다.
235년, 가비능은 왕웅이 보낸 자객 한룡에게 암살당했고, 그 후 선비족과 한족 사이에는 상대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다.[1]
2. 1. 초기 활동과 세력 확장
가비능은 원래 세력이 없는 선비족 출신이었으나, 용감하고 재판이 공정하며 재물을 탐하지 않아 사람들의 추대로 대인이 되었다. 그의 부족은 만리장성 근처에 거주했는데, 원소가 하북을 점령하자 많은 중원 사람들이 가비능에게 도망쳐 의탁했다. 이들은 가비능의 부족에게 무기, 갑옷, 방패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고 글쓰기도 소개했다. 그 결과 가비능은 한나라의 군대 지휘 방식을 모방하여, 사냥 시 깃발을 세우고 북을 쳐서 진퇴 신호를 보냈다.[1]2. 2. 조조 시대
건안 12년, 조조가 유성으로 원정하여 오환의 답돈선우 등을 참하고 유주를 평정하자, 가비능은 보도근 등과 함께 호오환교위인 염유를 통해 조정에 헌물을 바쳤다.[1]건안 16년, 후한의 승상이 된 조조가 서쪽으로 군대를 움직여 관중을 정벌하자 (동관 전투), 전은이 하간에서 반기를 들었다. 가비능은 3천여 기를 이끌고 염유를 따라 전은을 공격하여 이를 격파했다.[1]
건안 23년, 대군 오환의 능신저 등은 한의 지배에 반하여, 처음에는 부라한에게 귀속되기를 통지하였고, 부라한은 1만여 기를 이끌고 맞이하러 나섰다. 그러나 상건까지 왔을 때, 능신저 등은 부라한의 부하들이 그의 명령에 충분히 복종하지 않으니 결국 그곳에 몸을 의탁할 수는 없을 것이라 의논하고, 별도로 사자를 보내 가비능에게 연락했다. 가비능은 즉시 1만여 기를 이끌고 오자, 능신저와 부라한은 함께 회맹을 열었다. 가비능은 그 회맹 자리에서 부라한을 죽이고, 부라한의 아들인 설귀니와 그 부하들은 모두 가비능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가비능은 설귀니의 아버지를 죽였기에, 설귀니에게 특별히 신경을 썼다. 보도근은 이 일로 인해 가비능을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능신저와 손을 잡은 가비능은 오환과 힘을 합쳐 침공하여 한에 손해를 입혔다. 이에 대해, 위왕이 된 조조는 예릉후 조창을 효기장군으로 임명하여 북쪽으로 공격하게 했고, 조창은 가비능을 크게 격파했다. 가비능은 도망쳐 장성 밖으로 나갔지만, 후에 다시 사자를 보내 헌물을 바치게 되었다.[1]
2. 3. 조비 시대
220년 연강 초, 가비능은 사신을 보내 말을 헌상했고, 조비는 가비능에게 부의왕(附義王) 지위를 수여했다.[1]황초 원년(220년), 문제가 즉위하여 위나라가 건국되자, 전예가 호오환교위(護烏桓校尉)에 임명되어 절(節)을 가지고 호선비교위(護鮮卑校尉)를 겸임하며 창평에 주둔했다. 보도근은 사신을 보내 말을 헌상했고, 문제는 보도근에게 왕 지위를 수여했다. 가비능과 보도근은 이후 자주 전투를 벌였지만, 보도근의 부하가 점점 줄어 약화되었기에 그 휘하의 1만여 호를 이끌고 태원군과 안문군으로 들어가 안전을 도모했다. 보도근은 그 후 사신을 보내 가비능에게 있던 설귀니에게 유혹을 걸었고, 설귀니는 그 부족민들을 이끌고 도망쳐 보도근에게 의탁했다.
황초 2년, 가비능은 위나라 사람들 중 선비로 도망쳐 온 자들 500여 가를 돌려보내 대군으로 이주시켰다.
황초 3년, 가비능은 그 부족의 어른과 휘하의 자들, 대군 오환의 수무로 등 3천여 기를 이끌고, 소와 말 7만여 마리를 몰고 와서 위나라와 시장을 열어 교역을 했다. 또한, 위나라 사람들 천여 가를 돌려보내 상곡으로 이주시켰다. 그 후, 동부선비의 소리(素利)와 보도근의 휘하 삼부족이 가비능과 다툼을 일으켜 서로 공격을 가했다. 호선비교위 전예가 중재하여 서로 침략하는 것을 그만두게 했다.
동부선비 수십 부족을 옹호하는 가비능, 소리, 미가(弥加) 등은 영지를 분할하여 지배하고 각각 경계를 두었으나, 서로 계약하여 모두 말을 위나라 시장에 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전예는 오랑캐가 하나가 되는 것은 위나라의 이익이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먼저 수단을 마련하여 그들을 분리시키고, 원수지간으로 만들어 서로 공격하게 했다. 소리는 맹약을 위반하고 말 천 필을 내놓았기에 가비능에게 공격을 받게 되었고, 전예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전예는 정예병만을 이끌고 적지에 침입하여 마성에서 적을 크게 격파했다.[1]
우중랑장 안문태수인 견초는 이민족의 결속을 없애기 위해 이간계를 썼고, 그 결과 보도근, 설귀니 등이 가비능과 사이가 벌어져, 부락 3만여 호를 이끌고 군에 출두하여 국경 지대에 종속되었다. 견초는 명령을 내려 보도근 등으로 하여금 가비능을 공격하게 했다. 보도근 등은 가비능의 동생 저라후와, 반역한 오환의 귀의후 왕동, 왕기 등을 살해하여, 완전히 원수지간이 되었다. 견초는 스스로 출격하여, 설귀니 등을 지휘하여 원래의 운중군 땅에서 가비능을 토벌하여 크게 격파했다.[2]
황초 5년, 가비능이 다시 소리를 공격하자, 전예는 경무장 기병을 이끌고 달려와 배후에서 견제했다. 가비능은 작은 부대를 선택하여 그 대장 쇄노에게 전예의 공격을 막게 했지만, 전예는 적극적으로 공격을 가해 쇄노를 패주시켰다. 이 일로 인해, 가비능은 위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지만, 보국장군 선우보의 중재로 양자는 우호 관계를 맺었다. 가비능은 더욱 세력을 키워 재물을 약탈해 왔을 때, 반드시 균등하게 분배하고, 모두 앞에서 모든 것을 정하여, 결코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은 없었다. 그런 까닭에 휘하의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위해 힘썼고, 다른 부락의 어른들도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래도 과거의 단석괴에는 미치지 못했다.
황초 6년, 병주 자사인 양습이 가비능을 토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3]
2. 4. 조예 시대
오환의 족장 타둔이 207년 백랑산 전투에서 군벌 조조에게 패배한 후, 가비능과 다른 여러 선비 부족 지도자들은 조조의 통제를 받고 있던 한나라 조정에 조공을 바치기로 결정했다. 이 공로로 가비능과 다른 족장들은 왕의 지위를 받았다.[2] 가비능은 정직하고 진실하며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대부분의 선비 부족의 지지를 얻었다. 가비능의 가장 큰 경쟁자는 탄시회의 손자인 부두근이었다. 가비능이 부두근의 형제 부루한을 함정에 빠뜨려 죽인 후, 부두근과 가비능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부두근의 씨족은 이 싸움으로 힘이 약해졌고, 가비능의 세력은 삼국 시대 조위의 지원에 힘입어 크게 성장했다.부두근이 한나라 조정에 조공을 바치러 간 후, 가비능은 선비족의 동부 지파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한나라 조정은 가비능을 위협으로 여기고 전우에게 한나라 군대를 이끌고 가비능의 후방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 사건 이후 가비능이 이끄는 선비족과 후한(그리고 나중에는 조위)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전우가 가비능의 장인을 포위하러 갔을 때, 가비능은 수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와서 전우를 격파할 뻔했지만, 염지의 설득으로 휴전을 요청했다. 가비능 부족의 힘은 그의 죽음까지 크게 약해지지 않았고, 그는 죽기 전에 유주와 병주에 여러 차례 파괴적인 약탈을 시작했다.
태화 2년(228년), 전예는 통역인 하사를 가비능의 사위인 울축건의 부족에게 보냈지만, 하사는 울축건에게 살해당했다. 그해 가을, 전예는 서부 선비의 포두와 설귀니를 이끌고 장성을 나와 울축건을 크게 격파했다. 그 귀환 도중에 마성까지 이르렀을 때, 가비능이 스스로 3만 기를 이끌고 전예의 군대를 포위했으며, 그 포위는 7일에 걸쳐 이어졌다. 염지가 가서 설득했기 때문에, 가비능은 곧바로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그 후, 유주자사 왕웅은 교위의 직을 겸임하며, 은상과 신의로 선비들을 회유했다. 가비능도 자주 장성에 들어가 유주의 관청에 와서 헌상물을 바쳤다.
같은 해(228년), 호오환교위 전예가 마읍성에서 가비능에게 포위되자, 견초는 급히 구원에 나서 전예를 구출하고, 가비능을 격파했다. 그 후, 촉한의 제갈량과 연계하는 가비능을 완전히 토벌하기 위한 전략 및 대책을 추진하던 중, 견초가 사망했다.[2]
태화 5년(231년), 촉의 제갈량은 기산을 포위하자, 가비능을 초빙했다. 가비능 등은 원래의 우북평군 석성현까지 진출하여 제갈량에게 호응했다.[4] (기산 전투)
청룡 원년(233년), 가비능은 보도근을 유인하여, 병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친의 약속을 맺자, 스스로 1만 기를 이끌고 그 처자·친족을 형북까지 맞이하러 나갔다. 병주자사 필궤는 장군 소상·동필 등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다. 가비능은 자신의 아들에게 기병을 이끌게 하여 파견하여, 소상 등과 누번에서 회전하여, 그 전투 중에 소상과 동필을 살해했다. 명제는 표기장군 진랑을 정벌에 보냈다. 선비군은 사막 북쪽으로 도주했다. 겨울 10월, 보도근 휘하 부족의 어른인 대호아랑니 등이 병주를 방문하여 항복했기 때문에, 진랑은 귀환했다. 설귀니는 가비능에게 반역하여, 그 부족민을 이끌고 조정에 항복하자, 귀의왕의 지위를 수여받고, 원래대로 병주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보도근은 가비능에게 살해당했다.
청룡 3년(235년)이 되자, 왕웅은 용맹한 자객 한룡을 보내 가비능을 암살하게 하고, 대신 그 동생을 세웠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가비능은 라이벌 국가인 촉한에 대항하여 조위의 동맹이었다. 가비능은 위나라의 매수로 촉나라를 공격하려 했지만, 촉나라의 장수 마초가 그를 막기 위해 파견된 군대를 지휘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주했다. 그가 도망친 이유는 가비능 군대의 주력 부대를 이루는 강족 사이에서 마초가 뛰어난 무장으로 명성이 높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1]
소설 《삼국지연의》 제85회에서 촉나라의 유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위나라는 그 틈을 노려 촉을 공격해야 한다고 사마의가 제안한다. 중원의 병력만으로는 촉을 함락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선비족 왕 '''가비능'''의 10만, 남만왕 맹획의 10만, 오나라 군 10만, 맹달 군 10만, 위나라 대장군 조진의 10만, 이렇게 다섯 부대로 촉나라에 진군시켰다. 그러나 이 다섯 부대는 제갈량에 의해 쉽게 격퇴되었고, 가비능 또한 마초에게 격퇴당했다. 여기에서 가비능은 강족 왕으로 묘사되며, 강족을 이끌고 있다.[1]
참조
[1]
서적
『三国志』魏書 田豫伝
[2]
서적
『三国志』魏書 牽招伝
[3]
서적
『三国志』魏書 文帝紀
[4]
서적
『三国志』蜀書 諸葛亮伝にある裴松之が引く『漢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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