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구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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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동 전구 (제2차 세계 대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중동 지역에서 일어난 일련의 군사적 사건들을 포괄한다. 1940년 독일과 일본은 중동을 분할하여 침공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1942년 독일의 2차 엘 알라메인 전투 패배와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일본군 타격으로 무산되었다. 영국은 독일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의 라시드 알리의 쿠데타에 대응하여 이라크를 침공, 친영파 정부를 복귀시켰다. 또한, 비시 프랑스 정부에 속한 시리아와 레바논을 점령했으며, 독소전쟁 발발 후 소련과의 보급로 확보를 위해 이란을 침공하여 팔라비 왕조를 축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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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전구 (제2차 세계 대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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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전구 (제2차 세계 대전)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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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지중해 및 중동 전구 |
장소 | 중동 |
날짜 | 1940년 6월 10일 ~ 1943년 10월 |
결과 | 연합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
교전국 2 | |
지휘관 | |
지휘관 1 | |
지휘관 2 |
2. 추축국의 중동 분할 구상
1940년 독일과 일본이 방공 협정을 맺은 후, 양국 육군은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경계로 세계를 분할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42년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하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타격을 입으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1]
2. 1. 독일의 인도-중동 침공 계획
1940년 독일과 일본이 방공 협정을 맺은 후, 독일 육군과 일본 육군은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경계로 세계를 분할하는 것에 협의했다. 독일은 다음 세 가지 경로를 구상했다.[1]- 제1 진로: 이집트의 카이로를 넘어 수에즈 운하를 장악한 후 인도로 진격.
- 제2 진로: 마다가스카르를 점령한 후 북상 및 동진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및 스리랑카를 점령.
- 제3 진로: 캅카스산맥을 넘어 동맹국 팔레비 왕조와 연합하여 발루치스탄을 공격.
그러나 1942년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하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타격을 입으면서 추축국의 계획은 무산되었다.[1]
2. 2. 일본의 인도-중앙아시아 침공 계획
1940년 독일과 일본이 방공 협정을 맺은 후, 독일 육군과 일본 육군은 중동의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경계로 세계를 분할하는 것에 협의했다. 일본은 미얀마를 점령한 후 아삼 지방에서 서쪽으로 진격해 인도를 장악하는 1로, 충칭 지역을 점령한 후 티베트 및 신장 지역을 침공해 카스피해 및 아랄해로 진출하는 2로, 호주 폭격을 통해 독일군과 만나는 3로를 구상하였다. 그러나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타격을 입으면서 추축국의 계획은 무산되었다.2. 3. 계획의 좌절
1940년 독일과 일본이 방공 협정을 맺은 후, 독일 육군과 일본 육군은 중동의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경계로 세계를 분할하는 것에 협의했다. 그러나 1942년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독일군이 패배하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타격을 입으면서 추축국의 계획은 무산되었다.[1]3. 영국-이라크 전쟁 (1941)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후, 이라크에서는 라시드 알리가 독일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친영파를 축출했다. 영국 공군이 주둔하던 하바니야는 포위되었다.[1]
그러나 영국은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여 독일 공군이 모술에 파견될 것과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조치를 취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영국군은 트랜스요르단과 쿠웨이트를 통해 하바니야와 바그다드로 파병하여 이라크군을 격퇴했다. 바그다드 함락 이후 이라크는 항복했고, 친영 정부가 복귀했다. 라시드 알리는 이란으로 망명했으며, 영국은 키르쿠크에서 하이파까지 이어지는 송유관의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다.[1]
3. 1. 라시드 알리의 쿠데타와 친영파 축출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이후, 이라크에서는 독일의 지원을 받아 라시드 알리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친영파 인사들을 축출하고 영국 공군이 있는 하바니야를 포위했다.[1]3. 2. 하바니야 포위와 영국의 반격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이후, 이라크에서는 독일의 지원을 받은 라시드 알리가 쿠데타를 일으켜 이라크를 장악했다. 그리고 친영파를 내쫓고 영국 공군 기지인 하바니야를 포위했다.[1]하지만,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한 영국은 독일이 공군을 모술에서 파견하고 군대가 오기 전에 먼저 트랜스요르단과 쿠웨이트를 통해 하바니야와 바그다드로 파병함으로써 하바니야를 포위하는 이라크군을 격퇴했다.[1] 바그다드가 함락되자 이라크는 항복하고 다시 친영파 정부가 들어섰다. 라시드 알리는 이란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영국은 키르쿠크에서 하이파까지의 송유관의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다.[1]
3. 3. 이라크의 항복과 친영 정부 복귀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이후, 이라크에서는 독일의 지원을 받아 라시드 알리가 쿠데타를 일으켜 이라크를 장악했다. 그리고 친영파를 내쫓고 영국 공군이 있는 하바니야를 포위했다.[1]하지만,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한 영국은 독일이 공군을 모술에서 파견하고 군대가 오기 전에 먼저 트랜스요르단과 쿠웨이트를 통해 하바니야와 바그다드로 파병함으로써 하바니야를 포위하는 이라크군을 격퇴했다. 바그다드가 함락되자 이라크는 항복하고 다시 친영파 정부가 들어섰으며, 라시드 알리는 이란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영국은 키르쿠크에서 하이파까지의 송유관의 안전을 보장받게 된다.[1]
4. 비시 프랑스령 시리아·레바논 점령 (1941)
프랑스 항복 이후 중동의 시리아와 레바논은 비시 프랑스 정부에 속했으나, 영국은 중동 지역의 안전을 위해 이 지역을 침공했다. 시리아와 레바논 주둔 프랑스군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다마스쿠스와 베이루트가 함락된 후 항복했고, 6,000여 명은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1]
4. 1. 시리아·레바논 침공 배경
프랑스 항복 이후 중동의 시리아와 레바논은 비시 프랑스 정부에 속하게 되었으나, 영국은 중동 지역의 안전을 위해 이 지역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1] 시리아와 레바논의 프랑스군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6월 21일 다마스쿠스가 점령당하고 7월 6일 베이루트가 점령당하자 항복하고 6,000여 명은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1]4. 2. 프랑스군의 저항과 다마스쿠스, 베이루트 함락
프랑스가 항복한 이후, 중동의 시리아와 레바논은 비시 프랑스 정부에 합류했다. 그러나 영국은 중동 지역의 안전을 위해 시리아와 레바논을 침공하였다. 시리아와 레바논의 프랑스군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6월 21일 다마스쿠스가 점령당하고 7월 6일 베이루트가 점령당하자 항복하였다. 이후 6,000여 명의 프랑스군 병력이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4. 3. 자유 프랑스 합류
프랑스 항복 이후, 중동의 시리아와 레바논은 비시 프랑스 정부에 편입되었으나, 영국은 중동 지역의 안전을 위해 시리아와 레바논을 침공하였다. 시리아와 레바논의 프랑스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6월 21일 다마스쿠스가 점령되고 7월 6일 베이루트가 점령되자 항복했다. 항복한 프랑스군 중 6,000여 명은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1]5. 영국-소련의 이란 침공 (1941)
레자 샤 팔라비는 쿠데타를 일으켜 이란을 선포하고, 영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치며 이득을 취했다. 그러나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소련과의 보급로 확보를 위해 이란을 침공해야 했다.[1]
5. 1. 이란의 중립 정책과 영국의 이권
이란은 본래 영국의 보호령이었으나, 레자 샤 팔라비가 쿠데타를 일으켜 이란을 선포하였다. 그는 영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치며 이득을 취했다.5. 2. 영국-소련의 이란 침공과 팔라비 왕조 축출
레자 샤 팔라비는 쿠데타를 일으켜 이란을 선포하고, 이란은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팔라비는 영국과 소련 사이를 이간질하여 이득을 보았으나,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소련과의 보급로를 확보해야 했다. 이를 위해 영국과 소련은 이란을 침공하였고, 연합국의 압력으로 팔라비 왕조는 축출되었다.[1]6. 중동 전역의 결과와 영향
제2차 세계 대전의 중동 전역에서 연합국이 승리하면서 중동 지역에서 추축국의 영향력은 제거되었다. 특히 이란은 연합국의 주요 보급로로 활용되었다.
6. 1. 이란의 전략적 중요성 부각
이란은 본래 영국의 보호령이었으나, 레자 샤 팔라비가 쿠데타를 일으켜 이란을 선포하였다. 그는 영국과 소련 사이를 이간질하여 이득을 보았으나,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소련과의 보급을 위해 소련과 함께 이란을 점령하였다. 연합국의 압력으로 팔라비는 쫓겨나게 된다.[1]7. 한국의 관점에서 본 중동 전역
제2차 세계 대전 중 중동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전후 한국의 외교 및 안보 정책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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