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공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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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공 협정은 1936년 독일과 일본이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코민테른의 활동에 대응하고, 양국의 정보 교환 및 협력을 명시했다. 초기에는 5년 기한으로 체결되었으며, 비밀 부속 협정을 통해 소련에 대한 불원조 규정을 포함했다. 이후 이탈리아, 헝가리, 스페인 등이 가입하며 추축국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인해 효력이 약화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연장되었지만, 결국 추축국의 패배와 함께 효력을 잃었다. 이 협정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추축국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일본의 군국주의적 팽창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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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공 협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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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정보 | |
이름 | 방공 협정 |
원래 이름 | 독일어: Antikominternpakt 이탈리아어: Patto anticomintern 일본어: 防共協定 (Bōkyō kyōtei) 일본어 (정식 명칭): 共産「インターナショナル」ニ対スル協定 (Kyōsan "intānashonaru" ni taisuru kyōtei) |
유형 | 협정 |
초안 작성일 | 1936년 10월 23일 |
서명일 | 1936년 11월 25일 |
서명 장소 | 베를린, 독일 |
서명국 | |
초기 서명국 | 나치 독일 (1936년) 일본 제국 (1936년) |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 이탈리아 왕국 (1937년) 헝가리 (1939년) 만주국 (1939년) 스페인 (1939년) |
제2차 세계 대전 중 | 핀란드 (1941년) 루마니아 왕국 (1941년) 불가리아 왕국 (1941년) 슬로바키아 (1941년) 중국 (1941년) 덴마크 (1941년) 크로아티아 독립국 (1941년)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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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본은 국제적 고립을 피하고자 했다. 일본 육군 내에서는 독일, 이탈리아와의 협력 및 소련과의 협력 배제를 주장했다.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대일 접근론자였으며, 리벤트로프는 이 협정을 영국 견제를 위한 것으로 준비했다.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로서 독일과 일본 모두에게 가상의 적으로 여겨졌다.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세계대회에서 독일과 일본을 적국으로 규정하면서, 반소련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듯 보였다.[98] 주독 일본 대사관 부 육군 무관 오시마 히로시는 러일전쟁 당시 비외르케 밀약을 언급하며 유라시아에서 소련과 독일의 협력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외무성은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고 대일 접근에 소극적이었으며, 중독 협력으로 중화민국과도 관계가 있어 극동 정세에 불간섭 입장을 취했다.[98]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외무장관은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 국방군은 전통적으로 친중국 노선이었고, 정부와 독자적인 중화민국 지원 노선을 취했다. 중화민국은 쿵샹시를 독일에 파견하여 히틀러와 회담하는 등, 독일은 일본과 중화민국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리벤트로프를 차기 외무장관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그에게 "공적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리벤트로프는 "리벤트로프 사무소"를 설립하여 외무성과는 독립적으로 일본과의 협상을 진행했다. 이러한 상황은 히틀러 정권하의 외교가 다원화되고 복수 노선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된다.
2. 1. 나치 독일의 외교 정책
아돌프 히틀러는 반공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바탕으로 독일의 세력 확장을 추구했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의 협력을 추진했다. 반면 독일 외무성은 전통적으로 친중국 정책을 유지하며 일본과의 협력에 소극적이었다.[98]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외무장관은 "일본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고 평가하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이 연합국 측에 가담한 것을 언급하며 일본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독일 국방군은 독자적인 중화민국 지원 노선을 취하며 일본과의 협력에 대해 복잡한 태도를 보였다. 히틀러 정권하에서는 여러 기관이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외교 정책이 다원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리벤트로프는 "리벤트로프 사무소"를 설립하여 외무성과는 독립적으로 일본과의 협상을 진행했다.
2. 2. 일본 제국의 외교 정책
일본은 1933년(쇼와 8년) 국제연맹을 탈퇴한 후, 국제적 고립을 피하고자 독일 및 이탈리아와의 협력을 모색했다. 일본 육군은 소련을 가상의 적으로 간주하고 독일과의 군사적 협력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려 했다.[98] 반면, 일본 해군은 영국과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독일과의 군사 동맹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21]일본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 측에 가담했던 과거사 때문에 독일에 대한 불신감이 존재했다.[98] 그러나, 주독 일본 대사관 부 육군 무관 오시마 히로시 소장은 러일전쟁 당시 비외르케 밀약을 통해 러시아 제국과 독일 제국의 제휴가 성립될 뻔했던 사례를 언급하며, 소련과 독일의 협력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시마는 독자적인 대독 접근을 추진하며 협정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독일에서는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신임을 얻고 있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대일 접근론자였으며, 그는 이 협정을 통해 영국을 견제하고자 했다.[15][16] 그러나 독일 외무성은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고 중독 협력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협력에 소극적이었다.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외무장관은 일본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98]
이러한 상황에서 나치당 외교 전국 지도자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일독 접근이 영독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주저했다. 히틀러는 리벤트로프를 장래의 외무장관으로 평가했지만, 외무장관이 되려면 "공적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리벤트로프는 "리벤트로프 사무소"를 설립하여 외무성으로부터 독립하여 대일 협상에 임했다.
2. 3. 이념적 공통점과 모순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은 반공주의라는 공통된 이념을 공유했지만, 동시에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서로를 잠재적인 경쟁 상대로 보았다. 1935년 7월 코민테른 제7차 세계대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조언에 따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공산당이 취해야 할 방향을 극적으로 바꾸었다.[33] 이전까지는 민주당과 파시스트당을 정치적 동맹(''사회파시즘'')으로 보았지만, 이 대회 이후 공산주의 운동은 우익 세력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좌익과 중도 세력(''인민전선'')과 연합할 것을 장려했다. 외교적으로 제7차 세계대회는 소련의 '집단안보' 정책을 가져왔다. 소련은 파시스트 정권에 대응하기 위해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과 연합하려고 시도했다.[33] 제7차 세계대회는 특히 파시스트 독일과 일본을 폴란드와 함께 세계 전쟁의 주요 선동자로 선언했다.이 선언은 리벤트로프가 소련에 대항하는 독일-일본 동맹, 또는 한 국가가 소련과 전쟁을 할 경우 소련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가속화했다.[17] 코민테른 정책의 이러한 변화는 유럽 파시스트들에게 그들에 대항하는 좌익 인민전선의 강화를 막는 것이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34]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본에서는 국제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국제연맹을 탈퇴한 독일과 이탈리아에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본 육군 내부에서 제기되었다. 주독 일본 대사관 부 육군 무관 오시마 히로시 소장은 과거 러일전쟁 당시 비외르케 밀약에 의해 러시아 제국과 독일 제국의 제휴가 성립될 뻔했고, 후방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러시아가 병력을 극동에 파병할 우려가 있었던 사례를 들어, 유라시아에서 소련과 독일의 제휴를 단호히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 측에서는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고, 군축 문제 전권 대표의 지위에 있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대일 접근론자였다. 나치당에는 외무 전국 지도자 알프레트 로젠베르크가 있었지만, 일독 접근은 영독 관계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여 주저하고 있었다.
독일 외무성은 일본이 건국한 만주국을 승인하지도 않고 대일 접근에 소극적이었고, 중독 협력으로 중화민국과도 맺어져 있었던 탓에 극동 정세에 불간섭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외무장관은 일본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98]
독일 국방군은 전통적으로 친중국 노선이었고, 정부의 방침과는 독자적인 중화민국 지원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중화민국은 콩샹시를 독일에 파견하여 히틀러와 회담하는 등, 독일은 일본과 중화민국 사이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처럼 여러 관련 기관이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상황은 히틀러 정권하의 외교의 다두제와 복수 노선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2. 4. 기타 배경
프랑스의 국내 정치 상황은 불안정했고, 이는 반코민테른 조약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독일, 이탈리아, 소련이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면서 조약의 필요성이 증폭되었다.[19]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독일은 소련과 1922년 라팔로 조약, 1926년 베를린 조약 등 주요 조약을 체결했다.[21] 그러나 1935년, 독일은 소련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고, 헤르만 괴링은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 이후 폴란드에 소련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22]
1936년 11월 25일, 반 코민테른 조약이 체결된 날,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무샤노코지 긴토모에게 독일 정부가 비밀 추가 의정서에 따라 이 두 조약의 조항을 무효로 간주한다고 통보했다.[7]
영국은 일본, 그리고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이탈리아로부터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 제국에 대한 위협을 느꼈다.[62] 영국군은 독일, 일본과의 잠재적 군사 분쟁을 우려했고, 이탈리아가 협정에 가입하면서 이러한 우려는 더욱 커졌다.[40]
폴란드 제2공화국은 뮌헨 협정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점령에 독일과 협력했지만, 독일이 제시한 반코민테른 조약 가입 제안은 단치히의 독일 반환과 연계되어 있어 거절했다.[14][73]
1939년 1월, 추축국은 유고슬라비아에 반코민테른 조약 가입을 유도하려 했으나, 스토야디노비치 정부가 붕괴되면서 실패했다.[66][74]
1939년 2월, 독일 군부는 불가리아에 반코민테른 조약 가입 압력을 높였다.[59] 불가리아는 1941년 11월 25일까지 조약에 가입하지 않았다.[5]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 수립 전, 체코슬로바키아의 반코민테른 조약 가입은 히틀러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 중 하나였다.[14]
네덜란드는 일본이 반코민테른 조약에 포함시키기를 원했던 국가였다.[26] 그러나 네덜란드는 국내외 반발을 우려하여 일본과의 외교적 연대를 공식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26]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본에서는 일본 육군 내부에서 독일, 이탈리아와의 접근 및 소련과의 협력 배제를 주장했다.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대일 접근론자였으며, 리벤트로프는 이 협정을 영국 견제를 위한 것으로 준비했다.
독일 외무성은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고 대일 접근에 소극적이었으며, 중독 협력으로 중화민국과도 관계가 있어 극동 정세에 불간섭 입장을 취했다.[98]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외무장관은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 국방군은 전통적으로 친중국 노선이었고, 정부와 독자적인 중화민국 지원 노선을 취했다. 중화민국은 쿵샹시를 독일에 파견하여 히틀러와 회담하는 등, 독일은 일본과 중화민국 사이에서 크게 흔들렸다.
3. 협정 체결 과정
1935년 영국-독일 해군 협정과 코민테른 제7차 세계대회 이후, 독일의 리벤트로프 국장실은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반공 외교 체제를 구상했다.[35] 이 구상은 당시 베를린 주재 일본군 무관이었던 오시마 히로시의 지지를 받았다.[35] 독일어에 능통했던[18] 오시마는 나치당에 긍정적이었고, 이는 소련을 포위하려는 일본군의 북진론에 유용하게 작용했다.[17][18]
리벤트로프는 무기 중개상 프리드리히 하크를 통해 일본과 접촉했고,[43] 1935년 9월, 하크는 오시마에게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의향을 확인했다. 오시마는 외무성을 거치지 않고 육군과 리벤트로프 간 협상을 요청했고, 11월까지 예비 협상이 진행되어 소련을 대상으로 한 군사적 성격의 보장 협정을 제안했다.[99]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발발과 독일 국방군의 중화민국 지원 등으로 협상은 일시 정체되었다.[26] 독일은 스트레사 전선 재현을 우려하여 외교 정책을 재검토했고, 히틀러는 중재에 찬성,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오시마 히로시에게 일독 협정에 중화민국을 추가하는 방안을 타진하기도 했다.[13]
1936년 2·26 사건 이후 일본 육군의 발언권이 강화되면서 일본 외무성도 협상 체결 노선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15][16] 독일 국방군은 일본과의 제휴가 소련과의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영국 및 미국과의 적대 관계를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했으나,[14] 독일 외무성은 국방군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의 접근에 기울었다.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리벤트로프는 협상을 재개했고, 1936년 7월에는 방공협정 초안과 부속 의정서가 독일 측에서 일본에 제시되었다.[13] 1936년 10월 23일에는 가조인이 이루어졌다.[26]
일본 측은 협정의 공개 범위와 군사적 조항의 성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수정을 요구했다.[13] 일본 정부는 소련과의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반코민테른 협정을 정보 교환 수준으로 제한하고, 모든 직접적인 동맹을 피하며, 비밀 의정서에서도 공격을 받는 경우에만 협의를 요구할 것을 명시했다.[26] 또한, 소련에 대한 전쟁 발생 시 의무를 방어적인 것으로 명확히 하고, 비밀 의정서에서조차 소련을 명시하지 않도록 요청했다. 처음 두 가지 요청은 반영되었지만, 세 번째 요청은 조약의 공개 부분에서만 소련의 이름을 제외하고 비밀 의정서에는 여전히 소련을 명시했다.[26]
일본은 독일이 라팔로 조약 (1922년)과 베를린 조약 (1926년) 등 소련과의 기존 양자 조약을 유지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독일 정부는 반코민테른 협정이 베를린 조약 조건을 무효화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았고, 일본 정부는 이 설명이 조약에 비밀 부록으로 첨부되는 한 만족했다.[26]
일본 정부는 내부 문서에서 영국과의 관계 악화를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오시마 히로시는 히틀러에게 소련 반대 조항을 비밀리에 합의에 추가하면 외무성의 반대를 해결할 수 있다고 제안했고, 결국 외무성은 육군의 압력에 굴복하여 협정에 비밀 군사 부록에 동의했다.[17][18]
1936년 8월과 10월 사이에 조약이 공식적으로 서명될 때까지, 기간이 10년에서 5년으로 단축되는 등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일본 군부는 비밀 부록에서 합의하더라도 군사 조항은 방어적이어야 하며 공격적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비밀 추가 의정서 제1조는 소련의 "무자비한 공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고 공격 조항은 없었다.[13]
일본 측은 독일이 주장하고 일본이 피하려고 했던 조약 공개 문제는 결국 독일의 주장을 수용했다. 또한 비밀 의정서는 일본이 비효율적인 조항이라고 생각했던 소련을 명시적으로 목표로 삼았다.[17] 조약 초안은 1936년 10월 23일에 최종 확정되었다.[26]
1936년 11월 25일, 베를린에서 독일 특사 리벤트로프와 주독일 일본 대사 무사코지 공 간에 방공 협정이 체결되었다.[3][39][46] 조인식은 리벤트로프 사무소에서 거행되었다. 이 협정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활동에 대한 정보 교환, 협의 및 방위 조치 협력을 규정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같은 날 비밀 부속 협정도 체결되었는데,[39][7] 여기에는 소련의 공격 시 상호 불원조, 소련과의 단독 조약 체결 금지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48][6]
3. 1. 초기 협상
영국-독일 해군 협정과 코민테른 제7차 세계대회 이후, 독일의 리벤트로프 국장실(Dienststelle Ribbentrop)은 1935년 10월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반공 외교 체제를 구상했다.[35] 이 구상은 당시 베를린 주재 일본군 무관이었던 오시마 히로시의 지지를 받았다.[35]오시마는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18] 그의 나치당(NSDAP) 정부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소련을 독일과의 동맹을 통해 포위하려는 일본군의 반소련 계획(북진론)에 유용하게 작용했다.[17][18]
리벤트로프는 무기 중개상 프리드리히 하크를 통해 일본과 접촉을 시도했다.[43] 하크는 일본 해군과 거래 관계가 있었고, 1935년 1월에는 영국 런던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 군축 회의 전권과 리벤트로프의 회담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35년 9월 13일, 하크는 주독 일본 대사관 부속 육군 무관 오시마 히로시 소장에게 접촉하여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의향을 확인했다. 오시마는 외무성을 거치지 않고 육군과 리벤트로프 사이에서 협상을 진행하도록 요청했다. 11월 중순까지 하크와 오시마 사이에서 예비 협상이 진행되었고, 오시마는 소련을 대상으로 한 군사적 성격이 강한 보장 협정을 제안했다.[99]
3. 2. 협상 정체와 재개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발발과 독일 국방군의 중화민국 지원 등으로 인해 협상은 일시 정체되었다.[26] 독일은 스트레사 전선 재현을 우려하여 외교 정책을 재검토했고, 독일 국방군은 중화민국과의 협상을 진전시켜 장제스 등은 독일을 중재자로 한 일중 평화를 희망하게 되었다.[24] 히틀러는 중재에 원칙적인 찬성을 표했고,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오시마 히로시에게 일독 협정에 중화민국을 추가하는 방안을 타진하기도 했다.[13]1936년 2·26 사건 이후 일본 육군의 발언권이 강화되면서 일본 외무성도 협상 체결 노선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15][16] 히로타 고키 내각은 무샤코지 긴토모 주독 대사에게 양국 간 모호한 약속을 하는 지령을 내렸으나, 참모본부는 일소전쟁 발발 시 중립 조항을 요구했다.
독일 국방군은 일본과의 제휴가 소련과의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영국 및 미국과의 적대 관계를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14] 그러나 독일 외무성은 국방군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의 접근에 기울었다.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리벤트로프는 협상을 재개했고, 1936년 7월에는 방공협정 초안과 부속 의정서가 독일 측에서 일본에 제시되었다.[13] 1936년 10월 23일에는 가조인이 이루어져, 일본 추밀원의 심의만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26]
3. 3. 최종 조정
일본 측은 협정의 공개 범위와 군사적 조항의 성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수정을 요구했다.[13] 1936년 7월 24일, 일본 정부는 소련과의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반코민테른 협정을 정보 교환 수준으로 제한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또한, 모든 직접적인 동맹을 피하고, 비밀 의정서에서도 공격을 받는 경우에만 협의를 요구할 것을 명시했다.[26]일본 정부는 더 나아가, 한쪽이 소련에 대한 전쟁을 벌이는 경우의 의무를 방어적인 것으로 명확히 하고, 비밀 의정서에서조차 소련을 명시하지 않도록 요청했다. 처음 두 가지 요청은 반코민테른 협정 최종본에 반영되었지만, 세 번째 요청은 반영되지 않았다. 소련의 이름은 조약의 공개 부분에서만 제외되었고, 최종 반코민테른 협정의 비밀 의정서는 여전히 소련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26]
일본은 독일이 소련과의 기존 양자 조약, 특히 라팔로 조약 (1922년)과 베를린 조약 (1926년)을 유지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베를린 조약은 일본이 제안한 반코민테른 협정 조건과 모순된다고 여겨졌다. 독일 정부는 반코민테른 협정이 베를린 조약 조건을 무효화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았고, 일본 정부는 이 설명이 조약에 비밀 부록으로 첨부되는 한 만족했다.[26]
일본 정부는 내부 문서에서 협정으로 인해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반코민테른 협정이 영국의 반공 세력에게 호소하여 양국 관계를 개선할 수 있기를 바랐으나, 이는 잘못된 계산으로 판명되었다.[26]
오시마 히로시는 외무성에 대한 반항으로, 히틀러에게 소련 반대 조항을 비밀리에 합의에 추가하면 외무성의 반대를 해결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결국 외무성은 육군의 압력에 굴복하여 협정에 비밀 군사 부록에 동의했다.[17][18]
1936년 8월과 10월 사이에 조약이 공식적으로 서명될 때까지, 기간이 10년에서 5년으로 단축되는 등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일본 군부는 비밀 부록에서 합의하더라도 군사 조항은 방어적이어야 하며 공격적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에 휘말리면, 조약의 공격 조항이 일본을 소련과의 전쟁으로 몰아넣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비밀 추가 의정서 제1조는 소련의 "무자비한 공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고 공격 조항은 없었다.[13]
일본 측은 독일이 주장하고 일본이 피하려고 했던 조약 공개 문제는 결국 독일의 주장을 수용했다. 또한 비밀 의정서는 일본이 비효율적인 조항이라고 생각했던 소련을 명시적으로 목표로 삼았다.[17]
조약 초안은 1936년 10월 23일에 최종 확정되었다.[26]
3. 4. 협정 체결
1936년 11월 25일, 베를린에서 독일 특사 리벤트로프와 주독일 일본 대사 무사코지 공 간에 방공 협정이 체결되었다.[3][39][46] 조인식은 리벤트로프 사무소에서 거행되었다.이 협정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활동에 대한 정보 교환, 협의 및 방위 조치 협력을 규정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같은 날 비밀 부속 협정도 체결되었는데,[39][7] 여기에는 소련의 공격 시 상호 불원조, 소련과의 단독 조약 체결 금지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48][6]
4. 협정 체결 이후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외무부와 별개로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13] 그는 히틀러의 개인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대영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방공 협정을 활용하고자 했다.[19] 리벤트로프는 일본이 소련 대신 영국을 주적으로 삼도록 유도하려 했다.[19]
1939년 8월,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체결로 방공 협정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14] 일본은 이에 강력히 항의했고, 히라누마 내각은 총사퇴하였다.[75]
리벤트로프는 스탈린에게 방공 협정이 반소련이 아니라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일본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배신이었다.
4. 1. 국제 사회의 반응
中華民國중국어은 일본의 침략 위협에 직면하여 독일의 군사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방공협정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21]영국과 미국은 독일과 일본의 협력을 자국의 이익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했다. 특히 미국은 이 협정을 1931년 만주사변에서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독일이 군사 행동으로 영토 문제를 해결하려 할 수 있다는 징후로 해석했다.[50] 1937년 주일 미국 대사 조셉 그루는 반코민테른 조약의 반공산주의적 수사를 사실상 대영 제국의 세계 지배에 맞선 국가들의 연합을 위한 구호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15]
소련 정부는 공개적으로 이 조약의 중요성을 축소하려 했으나,[33] 내부적으로는 독일과 일본의 포위 시도로 간주했다.[6] 소련 외교관들은 이 조약이 특히 소련을 겨냥한 것이라고 빠르게 파악했다.[60] 도쿄 주재 소련 대사 콘스탄틴 유레네프는 이 조약이 그 허울 뒤에 소련에 대한 군사적 조항을 담고 있다고 믿었다.[60]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며 이 협정에 강한 우려를 보였다.
4. 2. 협정의 확대
1937년 11월 6일, 이탈리아가 "일본국과 독일국 간에 체결된 공산 인터내셔널에 대한 협정에 대한 이탈리아국의 참가에 관한 의정서"에 조인하며 방공 협정에 가입했다.[95][100][101] 이는 1937년 8월 21일 중화민국과 소련 간의 중소 불가침 조약 체결에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이탈리아의 참가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일본의 행동을 지지하고, 벨기에 9국 조약 회의에서 이탈리아 대표가 일본을 옹호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인 후에 이루어졌다.[100] 이로써 방공 협정은 일독이 삼국 협정으로 발전했고, 반(反)영국, 반(反)서유럽적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1939년에는 헝가리, 만주국, 스페인이 방공 협정에 가입했다. 헝가리는 1939년 1월 13일에 가입을 표명하고 2월 24일에 정식으로 가입했다.[68][5] 만주국은 1939년 1월 16일에 가입을 표명하고, 2월 24일 창춘에서 가입 의정서를 체결했다.[59][5] 독일과 일본은 헝가리와 만주국의 가입을 "볼셰비즘에 대한 전선의 확장"과 "세계 질서의 강화"로 선전했다.[71]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은]]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1939년 3월 27일 비밀리에 방공협정에 가입하였다.[102]
한편, 독일은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등에도 협정 가입을 압박했으나, 모두 성과를 보지 못했다. 특히 폴란드의 경우,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폴란드에 제시한 8개 항 계획의 일부로 방공 협정 가입을 제안했지만,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 사이의 외교적 균형 유지 및 독일의 압도적인 포위에 대한 군사적 우려 때문에 이를 거부했다.[14][90]
4. 3. 독소 불가침 조약과 협정의 무력화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 사이에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면서 방공 협정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이 조약은 방공 협정의 비밀 의정서 내용을 위반하는 것이었기에, 일본은 독일에 강력하게 항의했다.[14] 히라누마 내각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였다.[75]당시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요시프 스탈린에게 방공 협정이 반소련이 아닌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이는 용납할 수 없는 배신 행위였다.
4. 4.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협정
1936년 11월 25일, 독일과 일본 제국은 코민테른에 대항하기 위한 방공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서 독일은 소련과의 기존 조약들을 무효로 간주한다고 일본에 통보했다.[7]1935년 7월 코민테른 제7차 세계대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방향을 사회파시즘에서 인민전선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다.[33] 외교적으로 소련은 집단안보 정책을 통해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과 연합하여 파시스트 정권에 대응하려 했다.[33] 이 대회는 특히 파시스트 독일과 일본을 세계 전쟁의 주요 선동자로 선언했다. 이러한 상황은 독일이 소련에 대항하는 동맹을 구축하는 데 더욱 박차를 가하게 했다.[17]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은 국민파를, 소련은 공화파를 지원하면서, 독일은 소련의 공격에 대비한 군사 협정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40]
독일 외교 정책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의 외무부가 담당했지만,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수행하며 경쟁했다.[13] 리벤트로프는 대영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방공 협정을 활용하려 했고, 일본이 소련 대신 영국을 주적으로 삼도록 유도하려 했다.[19]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은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리벤트로프는 방공 협정이 반소련이 아니라 반서방 민주주의 국가를 겨냥한 것이라고 요시프 스탈린에게 설명했다. 일본은 이에 항의하여 히라누마 내각이 총사퇴했고, 협정은 사실상 무효화되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의 유럽 승리 이후, 일본은 독일이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식민지에 진출할 것을 우려했다. 리벤트로프는 일본의 남방 진출을 촉구하며 영국·미국과의 대립을 심화시켜 일본을 독일 측에 끌어들이려 했다. 1940년 9월 27일, 일·독·이 삼국 동맹이 성립되었다. 1941년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은 유라시아 동맹 구상을 실현하려 했으나, 독소전쟁 결정으로 무산되었다. 1941년 4월 13일, 일소 중립 조약이 체결되었다.
1937년 11월 6일, 이탈리아가 방공 협정에 가입했다.[14] 이는 스트레사 전선의 실패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탈리아의 가입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 간의 외교적 삼각 관계를 완성했으며, 이는 추축국으로 이어졌다.[5]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스페인은 1939년 3월 27일, 스페인 내전 종전과 함께 반코민테른 조약에 가입했다.[5]
5. 결론 및 역사적 의의
1941년 독소전쟁 발발 후 방공협정은 존속했지만, 일소중립조약으로 인해 소련에 대한 조약으로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941년 11월 25일, 베를린에서 협정을 5년간 연장하는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비밀 의정서는 폐지되었다.[103] 같은 날 불가리아 왕국, 핀란드, 루마니아 왕국, 슬로바키아 공화국, 크로아티아 독립국, 독일 점령 하의 덴마크가 협정에 참여했고, 일본의 지배 하에 있던 왕징웨이 정권도 협정 참여를 선언했다.[104]
1943년 코민테른이 해산되었지만, 일본 외무성 조약국은 코민테른이 실제로 해산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조약이 존속하고 있다고 보았다.[105]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 왕국이 항복하고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 협정 참가국이 되었지만, 1944년 이후 동유럽 참가국들이 잇따라 전쟁에서 이탈했고, 1945년 5월 7일과 8일 독일군이 항복하면서 나치 독일이 붕괴되었다. 조약국은 5월 7일을 기해 다른 삼국간 조약이 실효된 것을 확인한 후, 방공협정도 법률적인 의미에서 5월 7일에 실효되었다고 보고 있다.[105]
반코민테른 협정은 제2차 세계 대전의 기원 중 하나로, 추축국의 침략 정책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협정은 냉전 시대의 국제 질서와 이념 대립 구도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 이 협정은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팽창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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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取材班,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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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編 日本国ト枢軸諸国トノ条約関係/第三 防共関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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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o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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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o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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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次世界大戦の開戦直後にいったん日英同盟の不適用が日英間で了解されている。その後にイギリスは日本が中立国のままドイツの仮装巡洋艦を攻撃することを要請しては撤回するなどし、日本を参戦させることには積極的ではなかった。日本からすると、日清戦争後にドイツが三国干渉で日本の遼東半島獲得を阻んだこと、およびそのドイツが3年後に膠州湾を租借したことについて「臥薪嘗胆」するという前提で受容した経緯があり、大戦時の最後通牒でも膠州湾の返還が要求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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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ントは大島自身が行った表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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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12年事変下本年の回顧 (1)外交 (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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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1937年11月1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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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역사자료센터
御署名原本・昭和十四年・条約第四号・西班牙国ノ共産「インターナショナル」ニ対スル協定参加ニ関スル議定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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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역사자료센터
共産「インターナショナル」ニ対スル協定ノ効力延長ニ関スル日本国、「ドイツ」国、「イタリア」国、「ハンガリー」国、満洲国及「スペイン」国間議定書締結及右協定ノ秘密附属協定ノ廃止ニ関スル日本国、「ドイツ」国間秘密公文交換ノ件, 第二編 日本国ト枢軸諸国トノ条約関係/第三 防共関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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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역사자료센터
第二編 日本国ト枢軸諸国トノ条約関係/第三 防共関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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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역사자료센터
3.対独諸条約に対する措置/2 昭和20年5月18日から昭和20年6月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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