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 (전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진영은 전한 초기의 인물로, 동양의 영사를 지내고 현에서 존경받았다. 항량과 연합하여 초나라 부흥에 기여했으며, 한나라 건국 후에는 예장·절강 일대를 평정하고 열후에 봉해졌다. 초나라 원왕의 재상으로 11년간 재임했으며, 그의 손자 진오는 관도장공주의 부마가 되어 무제의 황후를 배출하는 등 가문이 번성했으나, 이후 몰락했다.
진영은 동양(東陽)의 영사(令史)를 지내고 현에서 장자로 불렸다. 이후 항량과 연합하여 초나라에서 관직을 얻었다. 고제 6년(기원전 201년), 항우 사후 한나라로 귀순하여 예장·절강 일대를 평정하고, 스스로 왕이 된 장식(壯息)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당읍(堂邑) 땅을 받아 열후가 되었고, 고조의 공신 중 86위로 1800호를 받았다. 초나라 원왕의 재상으로 11년간 재임했다. 고후 4년(기원전 184년)에 죽어 시호를 안이라 했고, 아들 진녹이 작위를 이었다.[2]
주어진 원본 소스에 진영(전한)의 가계 정보가 없으므로, 이전 출력은 정확합니다. 따라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1]
서적
사기 권7 항우본기제7
2. 생애
2. 1. 초기 활동과 항량과의 연합
동양(東陽)의 영사(令史)를 지내고 현에서 장자로 불렸다. 동양의 소년들이 현령을 죽이고 수천 명이 모였으나 우두머리를 정하지 못하자, 진영에게 청을 하였다. 진영은 거절했으나 억지로 추대되어 현에서 따르는 사람이 2만 명이었다. 소년들은 진영을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귀한 선조를 두지 않고 갑자기 유명해진 것이라는 이유로 어머니의 만류를 받아 사양했다.[1]
마침 이 무렵 회계에서 거병한 항량이 장초 세력의 잔당에게서 상주국으로 임명돼 장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진영이 동양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자 항량은 진영에게 함께할 것을 권했다. 진영은 항씨가 명망 있는 초나라의 세족이므로 의지할 만하다고 하고 자신이 거느린 무리를 데리고 항량에게 속했다. 나중에 항량이 의제를 찾아 초회왕으로 세우면서 상주국이 되고 다섯 현을 받았다.[1]
2. 2. 한나라 건국에 기여
진영은 동양(東陽)의 영사(令史)를 지냈으며 현에서 장자로 불렸다. 동양의 소년들이 현령을 죽이고 수천 명이 모였으나 우두머리를 정하지 못하자, 진영에게 우두머리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진영은 거절했으나 억지로 추대되어 현에서 따르는 사람이 2만 명에 달했다. 소년들은 진영을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귀한 선조를 두지 않고 갑자기 유명해진 것이라는 이유로 어머니의 만류를 받아 사양했다.[1]
이 무렵 회계군에서 거병한 항량이 장초 세력의 잔당에게서 상주국으로 임명돼 장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진영이 동양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들은 항량은 진영에게 함께할 것을 권했다. 진영은 항씨가 명망 있는 초나라의 세족이므로 의지할 만하다고 하고 자신이 거느린 무리를 데리고 항량에게 속했다. 나중에 항량이 의제를 찾아 초회왕으로 세우면서 상주국이 되고 다섯 현을 받았다.[1]
고제 6년(기원전 201년), 항우 사후 한나라로 가서 예장·절강 일대를 평정했고, 스스로 왕이 된 장식(壯息)을 평정했다. 이 공으로 당읍(堂邑) 땅을 받아 열후가 되었으니, 고조의 공신 중에서는 86위였고, 1800호를 받았다. 전한의 제후국이 된 초나라 원왕의 재상으로 11년을 재임했다.[2]
2. 3. 초나라 재상 시절
진영은 동양(東陽)의 영사(令史)를 지냈고 현에서 장자로 불렸다. 동양의 소년들이 현령을 죽이고 수천 명이 모였으나 우두머리를 정하지 못하자, 진영에게 우두머리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진영은 거절했으나 억지로 추대되어 현에서 따르는 사람이 2만 명에 달했다. 소년들은 진영을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진영은 귀한 선조를 두지 않고 갑자기 유명해진 것이라는 이유로 어머니의 만류를 받아들여 이를 사양했다.[1]
마침 이 무렵 회계에서 거병한 항량이 장초 세력의 잔당에게서 상주국으로 임명되어 장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진영이 동양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들은 항량은 진영에게 함께할 것을 권했다. 진영은 항씨가 명망 있는 초나라의 세족이므로 의지할 만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거느린 무리를 데리고 항량에게 합류했다. 이후 항량이 의제를 찾아 초회왕으로 세우면서 상주국이 되고 다섯 현을 받았다.[1]
고제 6년(기원전 201년), 항우 사후 한나라로 가 예장·절강 일대를 평정했고, 스스로 왕이 된 장식(壯息)을 평정했다. 이 공으로 당읍(堂邑) 땅을 받아 열후가 되었으니, 고조의 공신 중에서는 86위였고, 1800호를 받았다. 이후 초나라 원왕의 재상으로 11년을 재임했다.[2]
2. 4. 가문의 번영과 몰락
진영은 동양(東陽)의 영사(令史)를 지냈고 현에서 장자로 불렸다. 동양의 소년들이 현령을 죽이고 수천 명이 모였으나 우두머리를 정하지 못하자, 진영에게 우두머리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진영은 거절했으나 억지로 추대되어 현에서 따르는 사람이 2만 명에 달했다.[1] 소년들은 진영을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귀한 선조를 두지 않고 갑자기 유명해진 것이라는 이유로 어머니의 만류를 받아 사양했다.
마침 이 무렵 회계에서 거병한 항량이 장초 세력의 잔당에게서 상주국으로 임명돼 장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진영이 동양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자 진영에게 함께할 것을 권했다. 진영은 항씨가 명망 있는 초나라의 세족이므로 의지할 만하다고 하고 자신이 거느린 무리를 데리고 항량에게 속했다. 나중에 항량이 의제를 찾아 초회왕으로 세우면서 상주국이 되고 다섯 현을 받았다.[1]
고제 6년(기원전 201년), 항우 사후 한나라로 가서 예장·절강 일대를 평정했고, 스스로 왕이 된 장식(壯息)을 평정했다. 이 공으로 당읍(堂邑) 땅을 받아 열후가 되었으니, 고조의 공신 중에서는 86위였고, 1800호를 받았다. 전한의 제후국이 된 초나라 원왕의 재상으로 11년을 재임했다. 18년 후, 고후 4년(기원전 184년)에 죽어 시호를 안이라 했고, 아들 진녹이 작위를 이었다.[2] 손자 진오는 관도장공주를 아내로 모셔 황실의 사위가 되었고, 둘은 무제의 첫 황후인 폐황후 진씨를 낳았다.
3. 가계
참조
[2]
서적
사기 권18 고조공신후자연표제6
[3]
서적
[4]
문서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문서
원래는 항양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