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지 공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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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질지 공성전은 기원전 36년에 전한의 감연수와 진탕이 서흉노의 질지선우를 공격하여 벌어진 전투이다. 흉노가 분열된 후, 전한에 적대적인 질지선우는 강거와 연합하여 세력을 확장했고, 이에 전한은 질지선우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진탕은 조서를 위조하여 군대를 동원했고, 질지성 전투에서 한나라는 승리하여 질지선우를 죽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동아시아 세력 균형이 변화하고, 한-흉노 관계가 재정립되었으며, 전한 내부의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또한, 이 전투에 로마 군단병이 참전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으나, 현대에는 부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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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지 공성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질지 공성전 |
부분 전쟁 | 한–흉노 전쟁 |
날짜 | 기원전 36년 10월~12월 |
장소 | 카자흐스탄 탈라스강 유역 질지성 |
결과 | 한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흉노 강거 동맹 |
교전국 2 | 한나라 오손 타림 분지 도시 국가들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질지 선우 |
지휘관 2 | 진탕 감연수 |
병력 규모 | |
병력 1 | 흉노 기병 및 보병 3,000명과 강거 기병 10,000명 증원군 |
병력 2 | 40,000명 |
피해 규모 | |
피해 1 | 막대한 손실, 1,518명 사망, 1,000명 이상 항복, 145명 포로 |
피해 2 | 미미하거나 보고되지 않음 |
2. 배경
기원전 56년, 흉노는 중부의 호한야선우, 동부의 질지골도후선우(이하 질지선우), 서부의 윤진선우로 삼분되었다. 기원전 54년, 질지선우가 윤진선우를 멸망시키고 호한야선우도 무찌르고 선우정을 장악하자, 궁지에 몰린 호한야선우는 전한에 투항한다. 원래 동쪽에 있던 질지선우가 나중에 서쪽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질지선우의 세력을 서흉노, 호한야선우의 세력을 동흉노라고 한다.[6]
동흉노와 서흉노 모두 전한에 선우의 아들을 입조시키고 공물을 바치는 등 전한과 우호를 맺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미 한나라에 신속한 동흉노가 유리했다. 이에 질지선우는 전한에 입조한 아들 구우리수를 귀국시키고, 호송한 전한의 사자 곡길을 살해해 전한과의 우호를 결딴냈다. 이후 전한과 동흉노의 연합 공격을 두려워해 서쪽으로 옮겨가서, 전한과 우호적인 오손을 치려는 강거와 연합해 오손을 몇 차례 쳤다. 그러나 강거와의 우호 관계도 오래가지 못해 파기하고, 오히려 강거의 귀인들을 학살하고 강거의 병력을 이용해 주변에서 세력 확장을 꾀했다. 그리고 강거의 백성들을 동원해 도뢰수 유역에 질지성을 지어 새 수도로 삼았다.
전한 조정에서는 곡길의 시체를 돌려받기 위해 세 차례 서흉노와 교섭했으나, 질지선우는 사자들을 모욕하고 도리어 서역도호에게 전한을 조롱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서역도호기도위 감연수와 부교위 진탕은 서흉노가 장차 전한의 서역 경영에 위협이 되리라고 여기고, 서흉노 공격 계획을 짜게 된다.[6]
2. 1. 흉노의 분열과 서흉노의 등장
기원전 56년, 흉노는 중부의 호한야선우, 동부의 질지골도후선우(이하 질지선우), 서부의 윤진선우로 삼분되었다. 기원전 54년, 질지선우가 윤진선우를 멸망시키고 호한야선우도 무찌르고 선우정을 장악하자, 궁지에 몰린 호한야선우는 전한에 투항하기에 이른다. 원래 동쪽에 있던 질지선우가 나중에 서쪽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질지선우의 세력을 서흉노, 호한야선우의 세력을 동흉노라고 한다.동흉노와 서흉노 모두 전한에 선우의 아들을 입조시키고 공물을 바치는 등 전한과 우호를 맺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 경쟁은 이미 한나라에 신속한 동흉노가 유리했다. 이에 질지선우는 전한에 입조한 아들 구우리수를 귀국시키고, 호송한 전한의 사자 곡길을 살해해 전한과의 우호를 결딴냈고, 이후 전한과 동흉노의 연합 공격을 두려워해 서쪽으로 옮겨갔다. 그는 전한과 우호적인 오손을 치려는 강거와 연합해 오손을 몇 차례 쳤다. 그러나 강거와의 우호 관계도 오래가지 못해 파기하고, 오히려 강거의 귀인들을 학살하고 강거의 병력을 이용해 주변에서 세력 확장을 꾀했다. 그리고 강거의 백성들을 동원해 도뢰수 유역에 질지성을 지어 새 수도로 삼았다.
전한 조정에서는 곡길의 시체를 돌려받기 위해 세 차례 서흉노와 교섭했으나, 질지선우는 사자들을 모욕하고 도리어 서역도호에게 전한을 조롱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서역도호기도위 감연수와 부교위 진탕은 서흉노가 장차 전한의 서역 경영에 위협이 되리라고 여기고, 서흉노 공격 계획을 짜게 된다.[6]
2. 2. 질지선우와 한나라의 갈등
기원전 56년, 흉노는 중부의 호한야선우, 동부의 질지골도후선우(이하 질지선우), 서부의 윤진선우로 삼분되었다. 기원전 54년, 질지선우가 윤진선우를 멸망시키고 호한야선우도 무찌르고 선우정을 장악하자, 궁지에 몰린 호한야선우는 전한에 투항한다. 원래 동쪽에 있던 질지선우가 나중에 서쪽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질지선우의 세력을 서흉노, 호한야선우의 세력을 동흉노라고 한다.동흉노와 서흉노 모두 전한에 선우의 아들을 입조시키고 공물을 바치는 등 전한과 우호를 맺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 경쟁은 이미 한나라에 신속한 동흉노가 유리했다. 이에 질지선우는 전한에 입조한 아들 구우리수를 귀국시키고, 호송한 전한의 사자 곡길을 살해해 전한과의 우호를 결딴냈다.[6] 이후 전한과 동흉노의 연합 공격을 두려워해 서쪽으로 옮겨가서, 전한과 우호적인 오손을 치려는 강거와 연합해 오손을 몇 차례 쳤다. 그러나 강거와의 우호 관계도 오래가지 못해 파기하고, 오히려 강거의 귀인들을 학살하고 강거의 병력을 이용해 주변에서 세력 확장을 꾀했다. 그리고 강거의 백성들을 동원해 도뢰수 유역에 질지성을 지어 새 수도로 삼았다.
전한 조정에서는 곡길의 시체를 돌려받기 위해 세 차례 서흉노와 교섭했으나, 질지선우는 사자들을 모욕하고 도리어 서역도호에게 전한을 조롱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서역도호기도위 감연수와 부교위 진탕은 서흉노가 장차 전한의 서역 경영에 위협이 되리라고 여기고, 서흉노 공격 계획을 짜게 된다.
3. 질지 전투
기원전 36년, 서역 도독 감연수와 그의 부관 진탕은 질지선우가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판단하여 선제공격을 제안했다. 감연수는 반대했지만 병에 걸렸고, 진탕은 감연수의 이름으로 칙령을 위조해 군대를 동원했다. 결국 감연수도 이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일은 원제의 허락 없이 이루어졌다.[1]
한나라와 서역 성곽국가의 병사 4만여 명이 소집되어 타림 분지 양쪽으로 진군하여 카슈가르 근처에서 재결합한 후 발하쉬 호수 서쪽 기슭에 도착하여 강거 지역을 통과했다. 이 과정에서 오손을 침략하고 돌아오던 수천 명의 강거 기병대가 한나라 군대의 후미를 공격하여 많은 식량과 무기를 빼앗았으나, 진탕은 호족 군대를 보내 강거를 격파하고 460명을 살해했으며 470명의 오손 포로를 석방했다.[1]
한나라 군대는 도뢰수 근처에 진영을 쳤고, 질지성은 이중 성벽 구조로 되어 있었다. 바깥쪽은 나무 성벽, 안쪽은 토성이었다. 흉노군은 성벽 위에 오색 깃발을 꽂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배치하여 방어했다. 성문 밖에서는 보병과 기병이 어린진을 치고 훈련을 했다.
감연수와 진탕은 흉노 군을 쫓아 질지성을 포위하고 참호를 파고 문을 막았다. 방패병을 앞세우고 극병과 쇠뇌병이 뒤따라 성벽 위의 흉노군을 공격했다. 흉노군은 나무 성벽에서 활을 쏘며 저항했지만, 한나라 군은 불을 질러 나무 성벽을 무너뜨렸다.
밤에 흉노 기병 수백 기가 성 밖으로 나왔으나 한나라 군의 공격으로 죽었다. 질지선우는 달아나려 했으나 강거가 한나라와 내통했을 것을 의심하고, 오손 등 서역 국가들이 함께 왔으므로 달아날 곳이 없다고 판단하여 궁궐로 돌아가 저항했다. 질지선우는 화살에 코를 맞았고, 부인들도 많이 죽었다. 결국 나무 성벽이 뚫리고 한나라 군이 토성 안으로 진입했다.
강거 기병 만여 명이 흉노를 지원하려 했으나 한나라 군에게 격퇴되었다. 한나라 군은 방패를 들고 토성으로 진입하여 궁궐에 불을 질렀고, 질지선우는 백여 명과 함께 궁궐로 달아났으나 결국 부상을 입고 죽었다. 두훈이 질지선우의 머리를 베었고, 한나라 사절 곡길 등이 외교문서를 획득했다. 연지와 태자, 명왕 이하 1,518명의 머리를 베었고, 포로 145명을 잡았으며, 1,000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노획물은 함께 종군한 서역 성곽국가의 열다섯 왕에게 주었다.
3. 1. 진탕의 출진과 초기 전개
진탕은 흉노가 쇠뇌를 쓰는 농성전에 익숙하지 못하니 서역에서 둔전하는 한나라 병사와 오손의 도움을 받으면 질지성을 함락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획했고, 감연수도 이에 동의했다. 그런데 감연수가 조정에 주청하려 하자 진탕은 조정이 원정에 반대할 것이라며 주청을 반대했다. 그러던 중 감연수가 병들자, 진탕은 조서를 위조해 서역의 성곽국가들과 거사무기교위(車師戊己校尉)와 둔전병을 동원했다. 감연수가 이를 알고 그만두게 하려 했으나, 진탕은 칼을 끼고 감연수를 협박해 자신을 따르게 했다. 세 부대를 따로 만들어 양위(揚威)·백호(白虎)·합기(合騎)교(校 - 부대의 단위)를 두고, 한나라와 서역 성곽국가의 병사를 합하니 총 4만여 명이었다. 감연수와 진탕은 조서를 위조한 것을 자백하고 병사의 정황을 보고하는 상소를 올렸다.이후 바로 출진해 군대를 여섯 교로 나누어, 세 교는 천산 남로를 따라 총령을 지나 대완으로 가게 하고, 세 교는 도호가 직접 지휘해 온숙국에서 출발해 천산 북도로 가서 오손의 수도 적곡성을 지나 오손과 강거의 국경을 넘어 전지(闐池)의 서쪽에 이르렀다. 마침 강거의 부왕(副王) 포전(抱闐)이 적곡성을 약탈하고 대곤미 치하의 천여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고 많은 가축을 몰아가고 있었는데, 그 후미가 한나라 군대와 마주쳤다. 진탕은 서역인들의 군대를 풀어서 포전의 군대를 쳤고, 460명을 죽이고 잡혀갔던 사람 470명을 구해 대곤미에게 돌려보내는 한편 가축은 군량으로 썼다. 또 포전의 귀인 이노독(伊奴毒)을 사로잡았다.
강거의 동쪽 국경에 이르러서는 약탈을 금지하고 은밀하게 강거의 귀인 도묵(屠墨)과 접견해, 회유하고 맹약을 맺어 돌려보냈다. 선우성 60리에 못 미쳐 숙영하고 강거의 귀인 패색(貝色)과 그 아들 개모(開牟)를 사로잡았는데, 패색의 아들은 도묵의 외삼촌이었다. 이들은 모두 질지선우를 원망하여 질지선우의 정황을 상세히 알렸다.
기원전 36년경, 서역의 도독은 감연수였다. 그의 부관인 진탕은 질지가 대제국을 건설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선제 공격을 제안했다. 감연수는 반대했지만, 곧 병이 들었고, 그가 부재중인 동안 진탕은 감연수의 이름으로 칙령을 위조하여 군대를 동원했다. 감연수는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일은 원제의 허락 없이 이루어졌다. 4만 명의 한나라 군대와 호족 군대가 소집되었다. 그들은 타림 분지 양쪽으로 서쪽으로 진군하여 카슈가르 근처에서 재결합한 후 발하쉬 호수 서쪽 기슭에 도착하여 강거 지역을 통과했다. 이 시점에서 오손을 침략하고 돌아오던 수천 명의 강거 기병대가 중국군의 후미와 마주쳐 공격하여 많은 양의 식량과 무기를 빼앗았다. 진탕은 호족 군대를 보내 강거를 격파하고 460명을 살해했으며 470명의 오손 포로를 석방했다.[1]
3. 2. 질지성 전투
다음날, 한나라 군대는 도뢰수 가까이 와서 질지성 3 리 밖에 진영을 쳤다.[7][8]질지성 위에는 오색 군기를 쳤고, 수백여 명은 갑옷을 입고 성에 올라서 수비했다. 백여 기는 성 아래를 왕래하고, 보병 백여 명은 문을 끼고 어린진을 치고 훈련을 했다. 성 위에서 싸움을 돋우는 소리를 내며 백여 기가 한나라 진영으로 달려갔으나, 한나라 진영의 쇠뇌를 당해내지 못하고 물러났다. 한나라 군은 성문의 기병과 보병을 쏘아, 성문의 기병과 보병도 성 안으로 들어갔다.
감연수와 진탕은 달아나는 흉노 군을 쫓아 질지성을 4면으로 포위했다. 각자 자리를 지키고, 참호를 파고, 문을 막고, 방패를 앞세우고 극과 쇠뇌가 뒤따라 성의 누각 위의 사람을 쏘니, 누각 위의 사람들은 아래로 달아났다. 질지성은 토성 밖에 나무 성이 있는 이중 구조로, 바깥의 나무 성에서 활을 쏴 포위군을 많이 죽거나 다치게 했다. 포위군은 나무 성에 불을 질렀다.
밤에 성에서 수백 기가 출전하자, 포위군은 활을 쏴 죽였다.
질지선우는 원래 달아나려 했으나, 강거가 자신을 원망해서 한나라와 내통했을 것을 의심했고, 또 오손 등 서역 국가들이 함께 왔으므로 달아날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돌아와 "굳게 지키는 것만 못하다. 한나라 병사는 멀리서 왔으니 오래 공격하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친히 누각에 올라갔다. 연지와 부인들 10여 명은 포위군에 화살을 쐈다. 그러나 질지선우는 화살에 코를 맞았고, 부인들도 많이 죽었다. 질지선우는 내려와 말을 타고 궁궐 근처에서 전전했다.
밤이 되자 나무 성이 뚫리고 포위군은 토성으로 들어왔다. 이때 강거의 기병 만여 명이 와서 10여 곳으로 나뉘어 성을 에워싸니, 흉노와 강거 병사는 호응해 한나라 포위군을 여러 번 들이쳤으나 이기지 못했다. 날이 밝아 사면으로 불이 오르니, 한나라 군대는 강거 군대를 쫓아냈고 강거 군대는 물러났다. 한나라 군대는 방패를 들고 4면에서 토성으로 들어왔다. 질지선우는 남녀 100여 명과 함께 궁궐로 달아났는데, 한나라 군대가 불을 놓고 다투어 들어왔다. 질지선우는 부상을 입어 죽었다. 군후가승 두훈이 선우의 머리를 베었고, 한나라 사절 곡길 등이 가져온 외교문서를 획득했다. 연지와 태자와 명왕 이하 1,518명의 머리를 베었고, 포로 145명을 잡았고, 1,000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노획물은 함께 종군한 서역 성곽국가의 열다섯 왕에게 주었다.
3. 3. 전투의 결과
기원전 35년, 전한 원정군이 질지선우의 머리를 베어 전한의 수도 장안으로 보내자, 전한 조정에서는 외국 사신의 숙소 정문(만이저)에 내걸었다. 전한 원제는 질지선우를 죽인 것을 종묘에 고하고 제사를 드렸으며,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15] 전한 조정에서는 황제의 조서를 위조한 감연수와 진탕의 공을 표창할지를 두고 오랫동안 다투었으나, 유향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결국 둘의 공적을 치하하였다. 기원전 33년, 질지선우를 죽인 공로로 감연수는 열후에 봉해졌고, 진탕은 관내후에 봉해졌다. 진탕은 이후 행적에 문제가 있어 관내후를 박탈당했으나, 왕망에게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왕망이 집권한 이후 원시 5년(5년), 질지선우를 죽인 공로로 진탕의 아들 진빙이 열후에 봉해졌다. 그리고 이때 질지선우의 수급을 취한 두훈도 열후에 봉했다.질지선우가 죽자, 이미 서흉노의 이동으로 인해 선우정을 회복해 그곳에 있던 호한야선우는 기뻐하면서도 두려워해, 기원전 33년에 입조하고 한나라의 사위가 되기를 청했다. 이에 왕소군이 호한야선우와 결혼하게 된다.[16] 그리고 질지선우를 주살하고 호한야선우가 한나라에 순종하는 것을 기념해, 연호를 경녕으로 정했다.[15]
이 전투에서 1,518명의 흉노인이 사망했으며, 여기에는 질지와 질지의 아내들도 포함되었다. 145명이 포로로 잡혔고, 1,000명이 넘는 흉노인이 항복했다. 병사들은 전리품을 소지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항복한 흉노인들은 전투에 참여한 15개 왕국에 분배되었다. 이듬해 봄, 감연수와 진탕이 장안에 도착하여 한나라 원제에게 질지의 잘린 머리를 바쳤다. 질지의 머리는 성벽에 열흘 동안 전시된 후 매장되었다. 질지는 중국인에 의해 살해된 유일한 흉노 선우였다.
4. 전투의 의의 및 영향
기원전 35년, 전한의 원정군이 질지선우의 머리를 베어 수도로 보내자, 전한 조정에서는 외국 사신의 숙소 문에 내걸었다. 전한 원제는 질지선우를 죽인 것을 종묘에 고하고 제사를 드렸으며, 큰 사면을 행했다.[15] 전한 조정에서는 황제의 조서를 위조한 감연수와 진탕의 공을 표창할지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했으나, 유향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결국 둘의 공적을 치하하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33년, 질지선우를 죽인 공로로 감연수는 열후에 봉해졌고, 진탕은 관내후에 봉해졌다. 진탕은 이후 행적에 문제가 있어 관내후 작위를 빼앗겼으나, 왕망에게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왕망이 집권한 이후 원시 5년(5년), 질지선우를 죽인 공로로 진탕의 아들 진빙이 열후에 봉해졌다. 그리고 이때 질지선우의 머리를 가져온 두훈도 열후에 봉해졌다.
질지선우가 죽자, 질지와 질지의 아내들을 포함하여 1,518명의 흉노인이 사망했고, 145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1,000명이 넘는 흉노인이 항복했다. 병사들은 전리품을 가질 수 있었으며, 항복한 흉노인들은 전투에 참여한 15개 왕국에 분배되었다. 이듬해 봄, 감연수와 진탕이 장안에 도착하여 한나라 원제에게 질지의 잘린 머리를 바쳤다. 질지의 머리는 성벽에 열흘 동안 전시된 후 매장되었다. 질지는 중국인에 의해 살해된 유일한 흉노 선우였다.
4. 1. 한-흉노 관계 재정립
기원전 35년, 전한의 원정군이 질지선우의 머리를 베어 수도로 보내자, 전한 조정에서는 외국 사신의 숙소 문에 내걸었다. 전한 원제는 질지선우를 죽인 것을 종묘에 고하고 제사를 드렸으며, 큰 사면을 행했다.[15] 전한 조정에서는 황제의 조서를 위조한 감연수와 진탕의 공을 표창할지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했으나, 유향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결국 둘의 공적을 치하하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33년, 질지선우를 죽인 공로로 감연수는 열후에 봉해졌고, 진탕은 관내후에 봉해졌다. 진탕은 이후 행적에 문제가 있어 관내후 작위를 빼앗겼으나, 왕망에게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왕망이 집권한 이후 원시 5년(5년), 질지선우를 죽인 공로로 진탕의 아들 진빙이 열후에 봉해졌다. 그리고 이때 질지선우의 머리를 가져온 두훈도 열후에 봉해졌다.질지선우가 죽자, 이미 서흉노의 이동으로 선우정을 회복해 그곳에 있던 호한야선우는 기뻐하면서도 두려워하여, 기원전 33년에 입조하고 한나라의 사위가 되기를 청했다. 이에 왕소군이 호한야선우와 결혼하게 된다.[16] 그리고 질지선우를 죽이고 호한야선우가 한나라에 순종하는 것을 기념해, 연호를 경녕으로 정했다.[15]
질지와 질지의 아내들을 포함하여 1,518명의 흉노인이 사망했다. 145명이 포로로 잡혔고, 1,000명이 넘는 흉노인이 항복했다. 병사들은 전리품을 가질 수 있었으며, 항복한 흉노인들은 전투에 참여한 15개 왕국에 분배되었다. 이듬해 봄, 감연수와 진탕이 장안에 도착하여 한나라 원제에게 질지의 잘린 머리를 바쳤다. 질지의 머리는 성벽에 열흘 동안 전시된 후 매장되었다. 질지는 중국인에 의해 살해된 유일한 흉노 선우였다.
5. 논란 및 재해석
주어진 원문에 질지 공성전과 관련하여 논란이나 재해석에 대한 내용은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는 관련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
5. 1. 로마 군단병 참전설
로마 군단병이 이 전투에서 한나라 군대와 충돌했고, 그 후 리첸이라는 중국 마을에 재정착했다는 중국학자 호머 H. 덥스의 가설은[9] 고대 자료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마을 사람들의 최근 DNA 검사를 근거로 현대 역사가들과 유전학자들에 의해 기각되었다.[10][11] 하지만, 이 가설은 레프 구밀료프에 의해 지지받았다.[12]오스트레일리아 가톨릭 대학교의 크리스토퍼 앤서니 매튜 박사가 2011년에 발표한 새로운 가설(''고대 중국 공성전에서의 그리스 호플리테스'', Journal of Asian History)에 따르면, 이 기이한 전사들은 로마 군단병이 아니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 후계 국가 중 하나인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 또는 다유안으로도 알려진 페르가나 왕국의 호플리테스였다고 한다.[14]
참조
[1]
서적
Artisans in early imperial Chin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
서적
Northern Frontier: The Policies and Strategies of the Later Han Empire
https://books.google[...]
Faculty of Asian Studies,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1984-01-01
[3]
서적
Imperial Chinese Armies:200 Bc-589 Ad
https://books.google[...]
Osprey Publishing
2013-01-27
[4]
서적
Soldiers of the Dragon: Chinese Armies 1500 BC-AD 1840
https://books.google[...]
Osprey Publishing
2013-01-27
[5]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6]
문서
[7]
서적
The Amazons: Lives and Legends of Warrior Women across the Ancient World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09-22
[8]
서적
Social Biology and Human Affairs
https://books.google[...]
British Social Biology Council
[9]
논문
"An Ancient Military Contact between Romans and Chinese"
[10]
간행물
The Origins of Roman Li-Chien
[11]
논문
"[https://www.ncbi.nlm.nih.gov/pubmed/17579807 Testing the Hypothesis of an Ancient Roman Soldier Origin of the Liqian People in Northwest China: a Y-Chromosome Perspective]"
[12]
문서
[13]
웹사이트
Australian Catholic University - Dr Christopher Anthony Matthew
http://corner.acu.ed[...]
2013-11-29
[14]
웹사이트
History of the Ancient World - Descendants of Alexander the Great’s army fought in ancient China
http://historyofthea[...]
[15]
문서
[1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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