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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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소군은 전한 시대에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흉노의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간 궁녀이다. 흉노에 시집간 후 호한야 선우의 아내로 영호알씨라 불렸으며, 호한야 선우 사후에는 그의 아들인 복주류약제 선우의 아내가 되어 두 딸을 낳았다. 왕소군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흉노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그녀의 이야기는 중국 문화에서 아름다움과 희생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시, 소설, 연극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그녀의 묘는 '청총'으로 불리며, 현재 내몽골 자치구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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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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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 | |
칭호 | 흉노 화친의 여인 |
본명 | 왕장 |
출생일 | 기원전 50년경 |
사망일 | 알려지지 않음 |
가족 관계 | |
배우자 | 호한야 복주루이 |
자녀 | 왕자 이투지야시 딸 2명 |
2. 생애
전한 원제 시대에 남군 자귀현(현재 후베이성 이창시 싱산현)에서 태어나 궁녀로 선발되었다.[6] 기원전 33년,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에 화친을 청하며 한나라 여성을 알씨(閼氏, 선우의 부인)로 맞이하기를 원하자, 왕소군이 선택되어 흉노로 가게 되었다.[7] 당시 한나라가 변방 세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녀를 보냈다는 시각도 있다.
왕소군은 호한야 선우의 알씨가 되어 아들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를 낳았다.[8] 호한야 선우가 사망한 후, 당시 흉노의 풍습인 수계혼(형사취수제)에 따라 의붓아들인 복주류약제선우의 알씨가 되어 두 딸을 더 낳았다.[8] 한족의 문화에서는 부친의 처첩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을 금기시했기 때문에, 이러한 재혼은 후대에 왕소군의 비극적인 이야기로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후한서》에 따르면 왕소군은 한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성제는 "흉노의 풍속을 따르라(從胡俗)"고 명했다고 한다.[9]
황량한 흉노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했던 왕소군의 심정은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虬)의 시 "소군원"(昭君怨)에 담겨 있으며, 특히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라는 구절은 그녀의 애절한 그리움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유명하다.
이후 72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돌무덤에 묻혔다고 전해지며, 사람들은 이 무덤을 소군묘(昭君墓) 또는 청총(靑塚, 푸른 무덤)이라고 부른다.
2. 1. 한나라 궁녀 시절
왕소군은 서한(西漢) 남군 자귀현(현재의 후베이성 싱산현 자오쥔촌)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가 매우 나이가 많을 때 태어나 귀하게 자랐으며,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비파 연주에 능숙했고, 사예(고금, 바둑, 서예, 중국화)에도 소양이 있었다.기원전 36년, 원제는 전국에서 후궁을 선발했는데, 이때 왕소군도 뽑혀 궁궐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궁궐에서는 황제가 후궁들의 초상화를 보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하는 관습이 있었다. 전승에 따르면, 왕소군은 자신의 미모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궁녀들과 달리 화가 마오옌서우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다. 이에 앙심을 품은 마오옌서우는 왕소군의 초상화를 실제보다 훨씬 못생기게 그렸다고 한다. 후한 시대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는 마오옌서우가 왕소군의 초상화에 과부의 눈물 점을 그려 넣었다거나, 가장 보기 흉하게 그렸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이 때문에 왕소군은 황제의 눈에 들지 못하고 궁궐에서 시녀와 같은 생활을 하며 지냈다.[6][7]
전한 원제 시대에, 분열되었던 흉노의 지도자 중 한 명인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화친을 청하며 한나라의 사위가 되기를 요청했다. 원제는 궁녀 중에서 한 명을 골라 보내기로 결정했다. 《서경잡기》에 따르면, 원제는 후궁 중에서 가장 용모가 떨어지는 이를 보내려 했고, 초상화가 가장 흉하게 그려져 있던 왕소군이 선택되었다. 그러나 왕소군이 흉노로 떠나기 전 황제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리는 자리에서, 원제는 그녀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직접 보고 크게 놀라며 후회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흉노와의 약속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격노한 원제는 왕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가 마오옌서우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2. 2. 흉노와의 결혼
기원전 33년,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조공 체제의 일환으로 전한의 수도 장안을 방문하여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청했다.[7] 원제는 실제 공주 대신 후궁 중에서 한 명을 골라 보내기로 결정했다.후대에 쓰인 《서경잡기》(西京雜記)에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에 따르면, 원제는 후궁들의 초상화를 보고 가장 못생긴 여인을 선택하려 했는데, 궁중 화가였던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던 왕소군이 가장 추하게 그려져 선택되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원제가 후궁들에게 흉노로 갈 사람을 자원받았는데, 대부분의 궁녀들이 고향을 떠나 낯선 북쪽 초원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망설였지만 왕소군이 이를 받아들였다고도 한다.
원제는 초상화만 보고 왕소군을 보내기로 승인했으나, 떠나기 전 이별 인사를 위해 왕소군을 직접 만났을 때 그녀의 뛰어난 아름다움을 보고 크게 놀라며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흉노와의 약속을 되돌릴 수 없었기에 왕소군을 호한야 선우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원제는 자신을 속인 화가 모연수를 처형했다고 전해진다. 왕소군이 흉노로 간 뒤 한나라와 흉노의 관계는 한동안 평화롭게 유지되었다.
왕소군은 호한야 선우의 연지(아내)가 되어 영호알씨(寧胡閼氏)라 불렸으며, 아들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를 낳았다. 이도지아사는 훗날 우일축왕(右日逐王)의 지위에 올랐다.[8]
호한야 선우가 사망하자, 당시 흉노의 풍습이었던 형사취수제에 따라 왕소군은 의붓아들이자 새로운 선우가 된 복주류약제선우의 아내가 되었다. 이는 부친의 처첩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을 금기시하는 한족의 문화와 크게 달라, 후대에 왕소군의 이야기가 비극적으로 그려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후한서에는 왕소군이 호한야 선우 사후 한나라로 돌아가고 싶어 했으나, 성제가 "흉노의 풍속을 따르라(從胡俗)"는 명령을 내려 재혼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9] 왕소군은 복주류약제 선우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았다.[8]

머나먼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했을 왕소군의 심정은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虬)의 시 "소군원"(昭君怨)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시의 구절 중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는 흉노 땅의 봄이 고향의 봄과 달라 더욱 사무치는 그리움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며, 오늘날에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성어는 깊은 그리움을 나타내는 말로 널리 쓰인다.
왕소군은 72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돌무덤에 묻혔다고 전해지며, 사람들은 이 무덤을 소군묘(昭君墓) 또는 청총(靑塚, 푸른 무덤)이라고 부른다. 그녀의 이야기는 후한 시대의 《서경잡기》를 비롯하여 진(晉)나라 때의 왕명군사(王明君辭), 원나라 마치원(馬致遠)의 잡극 《한궁추》(漢宮秋) 등 여러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문학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2. 3. 흉노에서의 삶과 죽음
전한 원제 시대,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에 입조하여 한나라 여성을 알씨(閼氏, 선우의 부인)로 맞이하기를 청했다.[7] 이에 궁녀였던 왕소군이 선택되어[6][7] 흉노로 가게 되었다. 당시 한나라가 변방 세력을 달래기 위해 왕소군을 보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왕소군은 호한야 선우의 알씨가 되어 영호알씨(寧胡閼氏)라 불렸고,[8] 그의 총애를 받았다. 둘 사이에는 아들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와 딸 윈(雲), 당위 거차(当于居次)가 태어났다. 이도지아사는 훗날 우일축왕(右日逐王)이 되었고,[8] 딸 윈은 이모 공주로 봉해져 흉노 정치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기원전 31년 호한야 선우가 사망하자, 왕소군은 한나라로 돌아가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성제는 당시 흉노의 관습인 수계혼(형사취수제)을 따라야 한다며 "호속(胡俗, 흉노의 풍속)을 따르라"고 명령했다.[9] 부친의 처첩을 아들이 물려받는 수계혼은 한족 문화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왕소군의 이야기는 민간에서 비극으로 전승되었다.
결국 왕소군은 호한야 선우의 아들이자 다음 선우가 된 복주류약제선우의 알씨가 되어 두 딸을 더 낳았다.[8] 그녀는 닝후 옌즈(寧胡閼氏, "호를 평정하는 수장 부인")로 존경받았다.
황량한 초원 지대가 대부분이었던 흉노 땅에서 왕소군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했다. 당의 시인 동방규는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시에서 이러한 왕소군의 감정을 노래했는데, 특히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라는 구절은 흉노 땅의 봄이 고향의 봄과 달라 더욱 사무치게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애절한 심정을 잘 나타낸다. 이 시구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지금도 그리움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널리 쓰인다.

이후 왕소군은 72세에 병을 얻어 사망하여 돌무덤에 안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그 무덤을 소군묘(昭君墓) 또는 푸른 무덤이라는 뜻의 청총(靑塚)이라고 부른다.
3. 역사적 기록과 평가
《서경잡기》에 따르면, 원제는 흉노에 보낼 후궁을 고를 때 초상화를 기준으로 삼아 가장 용모가 떨어지는 여인을 선택하고자 했다. 당시 궁중 화가들은 후궁들에게 뇌물을 받고 초상화를 아름답게 그려주었는데,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않아 가장 추하게 그려졌다. 이 때문에 왕소군이 흉노로 보내질 인물로 선택되었다.
황제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원제는 왕소군의 실제 아름다움에 크게 놀랐으나,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 되돌릴 수 없었다. 그는 왕소군을 보낸 뒤 크게 분노하여 해당 화가를 처형했다고 전해진다.
왕소군은 흉노로 간 후 호한야 선우의 처가 되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는 당시 흉노의 풍습에 따라 그의 아들인 복주류약제 선우의 처가 되었다.
이러한 왕소군의 이야기는 후한 시대의 《서경잡기》를 시작으로, 진나라 때의 왕명군사(王明君辭), 원나라 마치원의 잡극인 《한궁추》(漢宮秋) 등 여러 문학 작품으로 각색되어 전해졌다.
4. 관련 작품
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부족하여 상세한 사실을 알기 어렵지만, 오히려 이 점 때문에 후세에 다양한 창작물이 만들어졌다.[4] 왕소군 이야기는 왕조와 이민족 사이에서 희생되고, 문화와 언어가 다른 변방에서 고생한 비운의 미녀로서 문학과 예술 작품의 소재로 즐겨 사용되었다. 특히 초상화가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추하게 그려졌다는 이야기는 『서경잡기』(3세기경)에 처음 등장하며[4], 이후 많은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왕소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한서』 흉노전에서 찾을 수 있다.
왕소군을 다룬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문학'''
- 시문
- 작자 미상, 「원시(怨詩)」 (「소군원(昭君怨)」, 「원광사유가(怨曠思惟歌)」라고도 함): 왕소군 자신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지었다고 전해짐 (『악부시집』 등 수록).
- 이백, 「왕소군」
- 두보, 「영회고적 오수(詠懷古跡 五首) 그 셋」 (명비촌(明妃村) 관련)
- 백거이, 「왕소군 이수(王昭君二首)」 및 「청총(青冢)」
- 왕안석, 「명비곡(明妃曲)」
- 소설 및 전기, 기록
- 채옹, 『금조(琴操)』 (2세기경, 비파 관련 언급 포함)
- 작자 미상, 『서경잡기』 (3세기경)
- 진나라 시대, 『왕명군사(王明君詞)』
- 명나라 시대 전기: ''하영기''[4]
- 작자 미상, 장편 소설: ''유풍기원''
- 안드레 노턴과 수잔 슈워츠, ''황실 부인'' (Imperial Lady, 1990)
- 우라딘 E. 불라그, ''The Mongols at China's Edge'' (2002)의 3장: 왕소군 전설 변형에 대한 논의 포함.
'''희곡 및 극본'''
'''회화'''
- 히시다 슌소, 『왕소군』 (1902년, 일본, 중요문화재)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 ''왕소군'' (1984년, 홍콩 아시아 텔레비전 방영). 웨이추이화(魏秋樺) 주연.
- ''왕소군'' (1988년, 대만 CTV 방영). 송강릉(宋岡陵) 주연.
- ''왕소군'' (2005년, 중국 CCTV 등 제작). 양미 주연. (다른 출처에서는 2007년작 ''왕비 왕소군''으로 표기되기도 함)
- ''소군출새(昭君出塞)'' (2006년, 중국 CCTV 제작). 리차이화(李彩樺) 주연.
- ''경성사연(母儀天下)'' (2008년, 중국). 바이칭린(白慶琳)이 왕소군 역으로 출연.
'''음악'''
- 아악 『왕소군』 (메이지 시대에 폐지된 성(聲)조의 곡)
- 량핑(梁萍), 「왕소군」, 「소군원」 (1946년, 중화민국)
- 양옌(楊燕), 「왕소군」 (1973년, 대만)
- 차이싱쥔(蔡幸娟), 「비파곡」 (1986년, 대만)
- 진페이산(金佩姍), 「일대기여자(一代奇女子)」 (1988년, 대만, 드라마 ''왕소군'' 주제곡)
- 양양, 「왕소군」
'''일본에서의 수용'''
- 『고금이야기집』 권 제10 제5: "한 전제후 왕소군 행호국어(漢前帝后王昭君行胡國語)"라는 제목으로 다루어짐.
- 오에노 아사쓰나: 왕소군을 노래한 한시가 『화한영영집』에 수록됨.
- 아카조메 에몬: 왕소군을 노래한 와카가 『후습유화가집』에 실림.
- 『겐지 이야기』: 스마 권에서 오에노 아사쓰나의 시를 인용한 후 왕소군이 언급됨.[10]
왕소군은 종종 말 위에서 비파를 든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한서』 등 초기 기록에는 왕소군이 비파를 연주했다는 내용이 없다. 서진의 부현이 지은 「비파부(琵琶賦)」(『초학기』, 『통전』 인용)에 오손공주를 위해 비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이 왕소군의 이야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5. 문화적 유산 및 영향
왕소군은 후대에 많은 문학 및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500명 이상의 작가들이 왕소군을 주제로 약 700편의 시와 노래를 썼으며, 40여 가지의 이야기와 민담이 전해진다. 여기에는 이백, 두보, 백거이, 왕안석 등 유명 문인들의 작품도 포함된다.
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후세 사람들의 상상력이 더해져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초상화가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불이익을 당했다는 이야기나, 스스로 흉노로 가기를 자원했다는 이야기, 혹은 자살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이는 후대에 각색된 내용으로 여겨진다. 특히 이러한 이야기들은 오호십육국 시대나 남북조 시대에 이민족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투영하여 만들어낸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하게 윤색된 왕소군의 이야기는 왕조와 이민족 사이에서 희생된 비운의 미녀라는 이미지를 형성하며, 진나라 시대의 『왕명군사』, 원나라 마치원의 잡극 『한궁추』 등 여러 작품으로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왕소군은 종종 말 위에서 비파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실제 역사 기록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 그녀의 무덤으로 알려진 청총 역시 여러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5. 1. 청총(靑塚)

왕소군의 묘 위치는 여러 곳이 전해지지만, 『통전』 권179 주군·선우부·금하조에 기록된 내용(소군묘 위치에 관한 가장 이른 문헌 기록)에 따라 현재 내몽골 자치구의 후허하오터 시에 있는 것이 유명하다. 능묘 주변에는 왕소군의 고향 집을 재현한 건물과 정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부지 내에는 흉노 박물관 등이 있어 관광 명소로 인기가 높다.
왕소군의 묘는 당나라 이후 "청총(青塚)"이라고 불렸다. 이백은 "살아서는 황금을 아껴 그림을 망치게 하고, 죽어서는 청총을 남겨 사람들로 하여금 슬퍼하게 한다"(「왕소군 2수 그 하나」)고 노래했고, 두보는 "한 번 자태를 떠나 삭막함이 이어지고, 홀로 청총을 남겨 황혼을 향한다"(「영회고적 5수 그 셋」)고 읊었다. 백거이나 장빈 등도 청총을 시제로 삼는 작품을 지으면서, '청총'은 왕소군 묘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가 되었다[11]. 둔황에서 발견되어 펠리오가 가져온 "왕소군변문(그림을 사용한 강설의 대본)"에도 "분묘 높이가 몇 자로 청총이라고 한다"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청총"이라는 명칭이 널리 퍼졌음을 보여준다[12].
"청총"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태평환우기』 권38 진무군·금하현조에 "청총, 현의 서북쪽에 있다. 한나라 왕소군이 이곳에 묻혔다. 그 위, 풀의 색깔이 항상 푸르므로, 청총이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한나라 채옹이 지었다고 전해지는(실제로는 남북조 시대 위작으로 추정됨) 『금조』(산실)에는 "호중(胡中, 흉노의 땅)에는 흰 풀이 많지만, 이 묘만 홀로 푸르다."[13]라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온통 흰 모래와 흰 풀뿐인 흉노의 땅에서 왕소군의 묘소만 푸른 풀이 무성하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유래했으며, 이는 "왕소군의 혼백이 푸른 풀처럼 재생하고 부활하기를 바라는 소망"[14]이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5. 2. 한중 관계에 대한 상징
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기록이 매우 적어 명확히 알기 어렵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후세의 창작이 풍부하게 이루어졌다. 널리 알려진 초상화가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불이익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서경잡기』에 처음 등장하며, 비슷한 내용이 『세설신어』 현원편에도 나타난다.이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궁녀들은 화가에게 뇌물을 주고 자신의 초상화를 아름답게 그리도록 했으나, 왕소군만이 뇌물을 주지 않았다. 이에 화가는 앙심을 품고 왕소군의 초상화를 일부러 추하게 그렸고, 이 때문에 왕소군은 빼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원제의 눈에 띄지 못했다. 마침 흉노의 선우가 한의 궁녀 중 한 명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요청하자, 원제는 초상화들 중 가장 못생긴 여인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왕소군이 선택되었는데, 떠나기 전 황제에게 작별 인사를 올리는 자리에서 원제는 처음으로 왕소군의 실물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크게 놀랐다. 하지만 이미 흉노와의 약속을 한 상태에서 이를 번복하면 외교적 문제가 생길 수 있었기에, 원제는 후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왕소군을 흉노로 보냈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궁녀들에게 뇌물을 받은 화가의 부정이 드러났고, 원제는 그 화가를 참수하고 시신을 거리에 내거는 기시형에 처했다. 당시 유명한 화가였던 모연수도 이 사건으로 사형당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당시 흉노는 한나라에게 있어 거의 유일한 대등국이자 가장 중요한 외교 상대였는데, 이러한 상대에게 일부러 용모가 떨어지는 여성을 보낸다는 것은 외교적 결례가 될 수 있어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은 낮다. 오히려 『후한서』와 『금조』에서는 왕소군이 후궁에 들어간 지 수년이 지나도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흉노로 가기를 자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금조』에는 왕소군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결혼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독약을 마셔 자살했다는 설도 전해지지만, 흉노의 풍습에도 친아들과 재혼하는 경우는 없었으며, 『후한서』 역시 이 설을 채택하지 않았다.
이러한 왕소군 이야기들은 오호십육국 시대와 남북조 시대에 선비족 등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한족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왕소군에게 투영하여 만들어낸 것으로 해석된다. 즉, 왕조와 이민족 사이의 관계 속에서 희생양이 되고, 문화와 언어가 다른 낯선 땅에서 고통받는 비운의 미녀라는 이미지가 강조되면서 다양한 이야기가 덧붙여진 것이다. 이렇게 각색된 왕소군의 이야기는 후대에 문학과 예술의 좋은 소재가 되어, 진나라 시대의 『왕명군사』, 원나라 마치원의 잡극 『한궁추』 등 여러 작품으로 형상화되었다.
일본에서도 왕소군 이야기는 일찍부터 알려져 『고금이야기집』 권 제10 제5화에 "한 전제후 왕소군 행호국어(漢前帝后王昭君行胡國語)"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화한영영집』에는 오에노 아사쓰나가 왕소군을 주제로 쓴 한시가 실려 있으며, 『후습유화가집』에는 아카조메 에몬이 지은 와카가 수록되어 있다. 『겐지 이야기』의 「스마」 권에서도 오에노 아사쓰나의 시를 인용한 뒤 왕소군에 대해 언급한다.[10]
왕소군은 종종 말 위에서 비파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한서』 등 주요 역사 기록에는 왕소군이 비파를 연주했다는 내용이 없다. 서진의 문인 부현이 지은 「비파부」(『초학기』, 『통전』에 인용됨)에 오손공주를 위해 비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보이는데, 이 이야기가 시간이 흐르면서 왕소군의 이야기로 잘못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5. 3. 한국에서의 인식
(해당 섹션 제목 '한국에서의 인식'에 대한 내용을 주어진 원본 소스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원본 소스는 왕소군 이야기의 형성 과정, 중국 및 일본에서의 인식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참조
[1]
웹사이트
王昭君简介
http://www.365zn.com[...]
www.365zn.com
[2]
웹사이트
Wang Zhaojun
http://people.wku.ed[...]
Western Kentucky University
2013-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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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egends of the Samurai
Overlook Duckworth
[4]
웹사이트
元明两代昭君戏比较研究_以_汉宫秋_与_和戎记_为例
http://wenku.baidu.c[...]
baidu
2010-11-0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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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yond The Great Wall
http://www.hkcinemag[...]
2022-02-18
[6]
문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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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源氏物語』における中国の美人たち
https://soka.repo.ni[...]
創価大学アジア研究所
1991-03
[11]
문서
[12]
서적
敦煌の絵物語
https://dl.ndl.go.jp[...]
東方書店
[13]
문서
[14]
간행물
唐詩に見える「青冢」をめぐって
國學院大學
198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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