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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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쩐 순종은 쩐 왕조의 제12대 황제이다. 예종의 아들로, 1388년 사촌 형 쩐 폐제가 호꾸이리에게 살해된 후 호꾸이리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호꾸이리의 전횡 속에서 3세의 아들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으며, 유배 중 호꾸이리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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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 순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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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휘 | 쩐응웅 (Trần Ngung/陳顒) |
별호 | 첨정왕 (Chiêu Định Vương/詹定王) |
묘호 | 순종 (Thuận Tông/順宗) |
능호 | 안생릉 (An Sinh Lăng/安生陵) |
연호 | 광태 (Quang Thái, 1388–1398) |
묘호 (사후) | 순종 (Thuận Tông/順宗) |
존호 | 태상원군황제 (Thái Thượng Nguyên Quân Hoàng Đế/太上元君皇帝)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378년 |
출생지 | 탕롱, 베트남 |
사망일 | 1399년 4월 |
사망지 | 대월 |
매장지 | 옌신릉 |
가족 관계 | |
부친 | 쩐 예종(Trần Nghệ Tông) |
모친 | 숙덕황후 |
배우자 | 성응황후 |
정치 | |
왕조 | 쩐 왕조 |
재위 기간 | 1388년 12월 27일 – 1398년 3월 15일 (9년 78일) |
선대 군주 | 쩐 폐제 |
후대 군주 | 쩐 소제 |
퇴위 후 | 태상황 (1398–1399) |
선임자 (태상황) | 쩐 예종 |
후임자 (태상황) | 없음 |
기타 | |
종교 | 불교 |
시대 | 광태 (光泰, 1388–1398) |
풀네임 | 쩐응웅 (Trần Ngung) |
2. 생애
예종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쩐 순종은 1388년 사촌 형인 쩐 폐제가 호꾸이리에게 살해당한 후 황제로 추대되었다. 순종의 재위 기간은 호꾸이리의 전횡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1389년, 순종은 호꾸이리의 장녀 호타인응어우(Hồ Thánh Ngâu|호성우vi)를 황후로 삼았다.[3]
1389년 10월, 체봉아가 대월을 공격했을 때, 호꾸이리가 이끄는 대월군은 큰 패배를 당했다. 이후 호꾸이리는 군 지휘관직에서 물러났고, 쩐카트찬이 참파를 진압하여 체봉아를 죽이고 남쪽 국경을 안정시켰다.[5] 한편, 국내에서는 기근과 체봉아의 자극으로 인한 여러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1389년 12월, 승려 팜서온이 이끄는 반란이 일어나 탕롱을 공격하자, 예종과 순종은 박장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후 부세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반란을 진압하고 팜서온을 처형했다.[7]
1395년 예종이 사망하자 호꾸이리의 전횡은 더욱 심해졌다. 호꾸이리는 왕족과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들을 숙청했고, 순종은 이를 막지 못했다.[10] 1397년 1월, 호꾸이리는 순종에게 수도를 타인호아로 옮기도록 강요했다.[11]
결국 1398년, 호꾸이리는 순종에게 자신의 외손자인 쩐 소제에게 양위하도록 압박했고, 순종은 이를 받아들여 퇴위했다. 이후 순종은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했지만, 유배를 당했고, 유배지로 가는 도중 호꾸이리의 밀명을 받은 장군 범가영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으로 쩐 왕조는 사실상 멸망했다.[16]
2. 1. 출생과 즉위
예종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즉위 전 작위는 '''소정왕'''(Chiêu Định Vương|소정왕vie)이다.[1]1388년 12월 5일(1389년 1월 3일), 사촌 형인 황제 쩐히엔이 호꾸이리(胡季犛)에게 살해되었다. 12월 27일(1월 24일), 호꾸이리에 의해서 황제로 추대되었다.[1] 순종 즉위 초기에는 호꾸이리가 전횡을 휘두르는 것을 방관하였다.
2. 2. 호꾸이리의 전횡과 퇴위
1388년 12월 5일(1389년 1월 3일), 사촌 형인 황제 쩐히엔이 호꾸이리(胡季犛)에게 살해되었다.[1] 같은 해 12월 27일(1월 24일), 호꾸이리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순종 즉위 초기에는 호꾸이리가 전횡을 휘두르는 것을 방관하였다.1389년 1월, 호꾸이리의 장녀인 호타인응어우(Hồ Thánh Ngâu|호성우vi)를 황후로 삼았다.[3]
1395년 12월, 쩐 왕조를 간신히 유지하던 태상황 예종이 사망하자, 호꾸이리는 오히려 전횡을 멈추지 않았다.[10] 호꾸이리는 순종 재위 기간 내내 명망있는 왕족이나 자신과 대립하는 신하들을 숙청하였고, 순종은 이를 막지 못했다.
1398년 3월 15일(4월 2일), 성인이 된 순종은 호꾸이리에게 더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었고, 호꾸이리는 자신의 외손자인 장남 쩐안에게 양위하도록 요구했다.[12] 순종은 호꾸이리의 요구를 받아들여 퇴위하였다.
1399년 4월,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하였고, 동시에 유배에 처해졌다. 며칠 후, 유배지로 가는 도중 호꾸이리의 밀명을 받았던 장군 범가영(范可永)에게 살해당했다.[16] 향년 22세였다.
2. 3. 유배와 죽음
1398년 3월 15일(4월 2일), 성인이 된 쩐 순종은 호꾸이리에게 더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었고, 호꾸이리는 자신의 외손자인 장남 쩐안(陳𤇼)에게 양위하도록 요구했다. 순종은 호꾸이리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퇴위하였다.[12]1399년 4월,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하였고, 동시에 유배에 처해졌다. 며칠 후, 유배지에 가는 중에 호꾸이리의 밀명을 받았던 장군 범가영(范可永)에게 살해당했다. 향년 22세였다.[16]
살해에 대해서는 많은 전설이 전해진다. 감시 역할을 맡았던 원근이 처음에는 독약을 먹였으나 죽지 않았다. 다음에는 음식과 물을 일절 주지 않고 굶겨 죽이려 했으나, 체옹을 불쌍히 여긴 자들이 몰래 도왔기에 굶어 죽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범가영이 교살하여 마침내 죽였다는 것이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부친 | 예종 황제 (쩐푸, Trần Phủ/陳暊/진부) |
모친 | 숙덕황후(Thục Đức Hoàng Hậu/淑德皇后) 진씨(Trần Thị/陳氏) |
황후 | 흠성황후(Khâm Thánh Hoàng Hậu/欽聖皇后) 호타인응어우(Hồ Thánh Ngâu/胡聖偶/호성우)[3] |
아들 | 쩐안(Trần An/陳𤇼/진안) - 쩐 왕조의 제13대 황제 소제(少帝).[15][13] |
4. 연호
순종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11년 |
---|---|---|---|---|---|---|---|---|---|---|---|
서력 | 1388년 | 1389년 | 1390년 | 1391년 | 1392년 | 1393년 | 1394년 | 1395년 | 1396년 | 1397년 | 1398년 |
간지 | 무진(戊辰) | 기사(己巳) | 경오(庚午) | 신미(辛未) | 임신(壬申) | 계유(癸酉) | 갑술(甲戌) | 을해(乙亥) | 병자(丙子) | 정축(丁丑) | 무인(戊寅) |
연호 | 광태(光泰)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11년 |
5. 쩐 왕조와의 관계 및 평가
쩐 순종은 쩐 왕조의 황제였지만, 실권은 쩐예종과 호귀리가 장악하고 있었다.[1] 1389년, 순종은 호귀리의 장녀와 결혼하여 성고황후가 되었다.[3]
순종 재위 기간 동안, 호귀리는 왕실 내 반대 세력을 점진적으로 제거했다. 응웬다푸엉은 1389년에 자살을 강요당했고,[7] 쩐악은 1391년에, 쩐낫장은 1392년에 살해되었다.[8][9] 1394년 쩐예종이 사망하자, 왕실은 호귀리의 완전한 통제하에 들어갔다.[10]
1398년, 호귀리의 압력으로 순종은 3세의 아들 쩐안(쩐티에우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12] 결국 호귀리는 장군에게 순종을 살해하도록 명령했고, 순종은 연생릉에 묻혔다. 순종의 죽음으로 쩐 왕조는 사실상 멸망했다.[13]
리 왕조의 공신이면서 황족을 모두 죽이고 쩐 왕조를 세운 쩐수도와, 쩐 왕조의 공신이면서 쩐 왕조를 버리고 황족을 모두 죽이고 호 왕조를 세운 호귀리는 매우 닮은꼴이라 할 수 있다.
참조
[1]
논문
[2]
논문
[3]
논문
[4]
서적
The Champa Kingdom
White Lotus Co., Ltd.
[5]
논문
[6]
논문
[7]
논문
[8]
논문
[9]
논문
[10]
논문
[11]
논문
[12]
논문
[13]
논문
[14]
논문
[15]
서적
Khâm định Việt sử Thông giám cương mục
[16]
서적
大越史記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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