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보의 식인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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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차보의 식인사자 사건은 1898년 케냐 차보 강에서 영국-우간다 철도 건설 중 발생한 사건으로, 두 마리의 갈기 없는 수사자가 9개월 동안 수십 명의 노동자를 공격하여 잡아먹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철도 건설을 방해하고, 결국 패터슨 중령에 의해 사자들이 사살되면서 종결되었다. 사건 이후, 철도 공사는 재개되었고, 사살된 사자는 박제되어 전시되었다. 사건의 원인으로는 우역으로 인한 먹이 부족, 부상으로 인한 사냥 능력 저하, 인간 시체의 유기 등이 제시되었으며, 희생자 수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사건은 영국 의회에서 논의되었으며, 소설, 영화, 만화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로 제작되어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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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보의 식인사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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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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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 | 1898년 3월 - 12월 |
발생 장소 | 영국령 동아프리카, 차보 강 부근 |
원인 | 수해 사건 |
사망자 | 28명 이상 (이견 있음) |
관련 정보 | |
관련 인물 | 존 헨리 패터슨 |
2. 사건의 배경
1896년 영국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우간다 철도 건설을 계획했다.[23] 인도양에 면한 몸바사를 기점으로 공사가 시작되어 1901년 빅토리아 호 기슭의 키스무까지 철도 부설이 완료되었고, 1903년에 운행이 시작되었다. 사건의 무대는 해안에서 약 210킬로미터 내륙으로 들어간 차보였다.[23][26] 이 지역을 흐르는 차보 강은 유량이 많고 흐름도 빨라, 이 강에 영구적인 철교를 가설하는 공사 중에 사건이 일어났다.[26]
존 헨리 패터슨은 철도 현장 총감독으로, 차보 강 철교 건설 및 강의 양쪽에 각각 50킬로미터 정도의 구간의 부대 공사를 완성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1898년 차보에 부임했다.[26] 차보의 철도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영국령 인도에서 온 인도인 계절 노동자가 주력이었다.[23][27][28] 공사는 순조롭게 시작된 것처럼 보였지만, 곧 두 마리의 식인 사자가 나타나면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26][28]
19세기 말 차보는 미개척지였기 때문에, 인도에서 온 노동자들은 말라리아나 황열병과 같은 질병과 혹독한 환경에 시달려야 했다.[28] 많은 노동자들이 사망했고, 우역으로 인해 아프리카물소의 수가 급감하면서 굶주린 사자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22][18][49][28]
2. 1. 우간다 철도 건설
1896년 영국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우간다 철도 건설을 계획했다.[23] 인도양에 면한 몸바사를 기점으로 공사가 시작되어 1901년 빅토리아 호 기슭의 키스무까지 철도 부설이 완료되었고, 1903년에 운행이 시작되었다. 사건의 무대는 해안에서 약 210킬로미터 내륙으로 들어간 차보였다.[23][26] 이 지역을 흐르는 차보 강은 유량이 많고 흐름도 빨라, 이 강에 영구적인 철교를 가설하는 공사 중에 사건이 일어났다.[26]존 헨리 패터슨은 철도 현장 총감독으로, 차보 강 철교 건설 및 강의 양쪽에 각각 50킬로미터 정도의 구간의 부대 공사를 완성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1898년 차보에 부임했다.[26] 부임 초기에는 킬린디니 항에 있는 본부에서 파견된 노동자들과 도구, 물자 등이 잇달아 도착했다.[26] 차보의 철도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영국령 인도에서 온 인도인 계절 노동자가 주력이었다.[23][27][28] 공사는 순조롭게 시작된 것처럼 보였지만, 곧 두 마리의 식인 사자가 나타나면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26][28]
2. 2. 노동자 동원과 차보의 환경
1898년 3월, 영국 제국은 우간다와 인도양의 킬린디니 항구를 잇는 철도 건설의 일환으로 케냐의 차보 강에 철교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건설 현장은 여러 캠프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 인도에서 온 수천 명의 계절 노동자들을 수용했다.[1][23][27]19세기 말 차보는 미개척지였기 때문에, 인도에서 온 노동자들은 말라리아나 황열병과 같은 질병과 혹독한 환경에 시달려야 했다.[28] 많은 노동자들이 사망했고, 우역으로 인해 아프리카물소의 수가 급감하면서 굶주린 사자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22][18][49][28]
3. 식인 사자의 출현
패터슨과 화차에서 조우한 후, 식인 사자는 잠시 동안 차보를 피했다. 패터슨은 이 기간 동안 2~3명의 노동자를 미끼로 사용할 수 있는 덫을 고안하여 제작에 착수했다. 덫은 침목, 트로코 레일, 전선, 쇠사슬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인간용 방과 사자용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두 방 사이에는 철창이 설치되었고, 사자용 입구는 쥐덫과 같은 방식으로 설계되었다.[34] 패터슨은 덫 위에 텐트를 치고 주변을 보마로 둘러쌌으며, 처음 2~3일은 자신이 직접 미끼 역할을 했다.[34]
다른 캠프는 여전히 식인 사자의 습격을 받았지만, 차보는 공격 대상에서 벗어나 노동자들은 안심하고 생활했다.[34] 그러나 많은 노동자들이 시원함을 찾아 텐트 밖에서 잠을 자던 밤, 사자가 다시 차보를 습격했다.[34] 사자는 보마에 침입하여 노동자 1명을 붙잡았고, 다른 사자와 합류하여 텐트에서 3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 노동자를 먹기 시작했다.[28][34]
패터슨은 일주일 넘게 사자를 잠복했지만, 사자는 매일 밤 캠프를 습격하여 노동자들을 희생시켰다.[34] 패터슨은 사자가 "악마"이며 "불사신"이 아닐까 생각하기까지 했다.[23][34][30] 그는 낮 동안 밀림 속에서 사자를 추적했지만 실패했고, 관료나 군 장교들의 도움도 소용없었다.[34]
심지어 사자는 역에서 노동자를 납치하여 패터슨의 캠프 근처에서 먹는 일까지 벌였다.[34] 패터슨은 사자가 뼈를 씹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고, 무력감에 시달렸다.[34][30]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사자들은 더욱 대담하게 두 마리가 함께 보마에 들이닥쳐 노동자를 한 명씩 습격하기까지 이르렀다.[34]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습격의 확산과 공포" 하위 섹션에서 이미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요약만 제시한다.
- 11월 마지막 주, 스와힐리족 운반 노동자 2명이 습격당하고, 차보역 근처 최대 규모의 노동자 캠프가 습격당했다.[34]
- 노동자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작업을 포기하고 차보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23][34]
3. 1. 초기 습격
1898년 3월, 존 헨리 패터슨 중령이 영국의 우간다 철도 건설 현장에 부임하면서 식인 사자의 습격이 시작되었다.[26] 초기에는 한두 명의 노동자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패터슨은 돈을 노린 범죄를 의심했다.[29] 그러나 시크교도 노동자 우두머리 웅간 싱이 텐트 안에서 사자에게 끌려가 잡아먹히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식인 사자의 존재가 명확해졌다.[29]패터슨은 즉시 사자 추적에 나섰고, 웅간 싱의 처참한 시신을 발견했다.[29] 그날 밤 패터슨은 사자를 기다렸지만, 사자는 다른 텐트를 습격하여 노동자 한 명을 끌고 갔다.[29] 당시 노동자들의 캠프는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식인 사자는 차보 주변 12-13킬로미터 정도의 행동 범위를 가지고 매일 밤 다른 캠프지를 습격하는 전술을 사용했다.[29]
3. 2. 습격의 확산과 공포
1898년 3월, 영국은 우간다와 인도양의 킬린디니 항구를 잇는 철도 건설의 일환으로 케냐의 차보 강에 철교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공사 기간 동안 갈기가 없는 수컷 차보 사자 두 마리가 캠프를 따라다니며 밤에 텐트에서 노동자들을 끌고 나와 잡아먹었다.[1]사자들은 밤마다 텐트를 습격하여 노동자들을 끌고 갔으며,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꼴로 희생자가 발생했다. 노동자들은 공포에 휩싸여 캠프 주변에 보마라 불리는 가시 울타리를 설치하고 불을 피우는 등 방어 노력을 기울였지만, 사자들은 이를 뚫고 침입했다. 패터슨은 사자들이 살해 행각 초기에는 한 번에 한 명씩 희생자를 잡았지만, 나중에는 더욱 뻔뻔해져 함께 들어가 각각 희생자를 잡았다고 기록했다.[1]
공격이 증가하면서 수백 명의 노동자가 차보에서 도망쳤고, 다리 건설이 중단되기도 했다. 심지어 지방관 화이트헤드 씨조차 사자에게 죽을 뻔했고, 그의 조수 압둘라는 죽임을 당했다.[1]
11월 마지막 주에는 스와힐리족 운반 노동자 2명이 습격당했다.[34] 한 명은 즉시 사자에게 먹혔고, 다른 한 명은 중상을 입었지만,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34] 2~3일 후에는 차보역 근처에 있던 최대 규모의 노동자 캠프가 습격당했다.[34] 두 사자는 한밤중에 캠프에 들이닥쳐 겁에 질린 노동자들을 습격하여 희생자를 낚아채 캠프 바로 옆에서 게걸스럽게 먹었다.[34]
연속된 참극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34] 12월 1일 오후, 캠프로 돌아온 패터슨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작업을 포기한 노동자 일행이었다.[23][34] 그들은 패터슨에게 『더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차보에 머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34]
4. 패터슨의 사투
1898년 12월 9일 새벽, 화이트헤드와 파커 등이 돌아간 지 1~2일 후, 패터슨은 "심바! 심바! (사자다! 사자다!)"라고 외치는 스와힐리인의 다급한 보고를 받았다.[36][37] 사자가 강가 근처 캠프에서 노동자를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당나귀를 죽여 잡아먹고 있다는 내용이었다.[36][37]
패터슨은 파커가 남겨둔 연발총으로 무장하고 스와힐리인을 따라갔다.[36][37] 덤불 너머로 사자를 발견했지만, 안내인이 나뭇가지를 꺾는 소리를 내는 바람에 사자는 숲으로 도망쳤다.[36][37]
패터슨은 즉시 캠프로 돌아가 노동자들을 모아 북, 양철통 등 소리 나는 물건을 들고 사자가 숨은 덤불을 포위하게 했다.[36][37] 그는 덤불 반대편 개미집 근처에 숨어, 노동자들이 소리를 내며 포위망을 좁혀오자 짐승 길로 나온 갈기 없는 사자를 발견했다.[36][37] 사자는 노동자들의 소리에 정신이 팔려 패터슨을 알아채지 못했다.[36][37]
패터슨은 14m~15m 거리에서 사자를 조준했다.[36][37] 사자가 패터슨을 발견하고 으르렁거렸지만, 첫 발은 불발이었다.[36][37] 당황한 패터슨은 두 번째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잊었다.[36][37] 사자는 숲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패터슨은 침착하게 두 번째 총탄을 발사하여 사자에게 맞혔다.[36] 하지만 사자는 도망쳤고, 패터슨은 발자국을 놓치고 말았다.[36]
이러한 거듭된 불운에 패터슨은 의기소침해졌고, 인도인 노동자들은 사자를 "악령"이라고 믿게 되었다.[23][36]
4. 1. 사자 사냥의 어려움
패터슨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덫을 설치하고, 밤에는 나무 위에서 매복하기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1] 사자들은 매우 영리하게 패터슨의 함정을 피했으며, 심지어 패터슨을 피해 다른 캠프를 공격하기도 했다.[35]1898년 12월 3일, 경찰청장 파커가 세포이 20명을 이끌고 차보에 도착하여 사냥을 도왔다.[35] 패터슨이 설치한 덫에 인도 병사 2명을 미끼로 넣어 사자를 유인하려 했지만, 인도 병사들은 사자가 덫에 들어오자 당황하여 제대로 사격하지 못했고, 결국 사자는 도망치고 말았다.[23][35]
이후에도 패터슨은 사자를 추적했지만, 사자는 번번이 패터슨을 따돌렸다.[35] 이러한 실패가 계속되자, 사람들은 사자가 "악마"나 "불사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23][36]
4. 2. 첫 번째 사자 사살
결국 다른 관리들이 도착했고, 사냥을 돕기 위해 무장한 세포이 20명 정도가 증원되었다.[1] 패터슨은 덫을 놓고 나무에서 밤에 사자를 여러 번 매복하려 했다. 여러 차례 실패한 시도 끝에, 1898년 12월 9일 첫 번째 사자를 사살했다. 처음 사살된 사자는 코에서 꼬리 끝까지 2.9m였다. 시체를 야영지로 옮기는 데 8명의 남자가 필요했다.[1]패터슨은 자신의 기록에서 고구경 소총으로 첫 번째 사자에게 한 발을 쐈다고 썼다. 이 총알은 사자의 뒷다리에 맞았지만, 사자는 도망쳤다. 나중에 사자는 밤에 돌아와 패터슨이 사냥하려 할 때 그를 몰래 따라다녔다. 그는 더 강력한 소총으로 사자의 어깨를 관통시켜 심장을 꿰뚫었고, 다음 날 아침 자신의 플랫폼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1]
화이트헤드와 파커 등이 돌아간 지 1~2일 후인 12월 9일 새벽, 패터슨이 보마에서 나가려던 참에 "심바! 심바! (사자다! 사자다!)"라고 외치며 스와힐리인 한 명이 달려왔다.[36][37] 그의 보고에 따르면, 사자가 강가 근처의 캠프에서 노동자를 잡아 가려다 실패하고 대신 당나귀 한 마리를 습격해 죽였다고 한다.[36][37] 사자는 지금 그 당나귀를 바로 그 자리에서 먹고 있다는 것이었다.[36][37]
패터슨은 즉시 캠프로 돌아가 파커가 만약을 대비해 남겨둔 연발총으로 무장하고, 안내역이 된 스와힐리인을 따라갔다.[36][37] 사자가 그 자리에 있기를 바라면서 가까이 다가가자, 덤불 너머로 사자의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까지 갈 수 있었다.[36][37] 그러나 안내역인 스와힐리인이 마른 나뭇가지를 꺾는 소리를 냈고, 이를 눈치챈 사자는 으르렁거리며 근처의 숲으로 도망쳤다.[36][37]
또 도망갔다고 생각한 패터슨은 급히 캠프로 돌아가 그 자리에 있던 노동자들을 모았다.[36][37] 패터슨은 북이나 양철통과 같은 소리 나는 물건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가져오도록 명령하고, 사자가 숨어 있는 덤불을 반원형으로 에워싸도록 노동자들을 배치했다.[36][37] 패터슨이 덤불의 반대편으로 돌아간 즈음에 소리 나는 물건들을 일제히 울리도록 노동자들에게 일러두고, 그는 혼자 덤불을 돌아다니며 개미집 근처에 몸을 숨겼다.[36][37]
노동자들은 포위망의 원을 조금씩 좁혀 전진했고, 그 소리는 패터슨의 귀에도 들려왔다.[36][37] 그때, 갈기가 없는 거대한 사자가 짐승 길까지 나왔다.[36][37] 사자는 천천히 걸으며 2~3초마다 주위를 살폈지만, 노동자들이 내는 소음에 정신이 팔려 패터슨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36][37] 패터슨은 사자가 14~15미터 거리까지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린 후, 총의 조준을 맞췄다.[36][37]
사자는 마침내 패터슨의 존재를 알아채고 으르렁거렸다.[36][37] 패터슨은 사자의 머리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불발이었다.[36][37] 이 상황에 당황한 패터슨은 왼쪽 총신에서 발포하는 것을 잊었다. 사자는 아직 노동자들이 내는 소리에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에, 패터슨을 공격하지 않고 도로 옆의 숲으로 도망치려 점프했다.[36][37] 침착함을 되찾은 패터슨은 왼쪽 총신에서 발포했고, 그것은 사자에게 맞았지만,[36] 사자는 그럼에도 도망치는 데 성공했고, 뒤쫓던 패터슨은 이내 발자국을 놓치고 말았다.[36]
거듭된 불운은 패터슨을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36] 인도인들은 사자가 어떤 무기도 통하지 않는 "악령"이라고 더욱 굳게 믿게 되었다.[23][36] 패터슨은 캠프로 돌아가기 전에 죽은 노새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36][37] 노새는 엉덩이 부분을 조금 뜯어먹힌 정도였기 때문에 패터슨은 사자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36][37]
다음 날(12월 10일), 패터슨은 사자를 맞이할 준비에 들어갔다.[23] 가까이에 서 있는 나무가 없었기 때문에 패터슨은 노새로부터 3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3.5미터 정도의 발판을 만들어 그곳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36][37] 노새는 근처 그루터기에 튼튼한 철사를 사용하여 단단히 묶어 총격 전에 사자가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36][37] 패터슨은 해질녘, 혼자서 이 발판에 올라갔다.[36] 사용인인 총잡이 마히나는 단독 행동에 난색을 표했지만, 이를 뿌리쳤다.[36][38] 패터슨도 사실 그를 데려가고 싶었지만, 마히나는 그날 심하게 기침을 했기 때문에 소리를 내어 사냥을 망칠까 두려웠던 것이다.[36][38]
어스름한 밤은 어둡고 깊었으며, 주변은 완전한 정적에 휩싸였다.[36][38] 파터슨은 긴장하며 대기하고 있었지만, 이윽고 반쯤 잠든 상태가 되었다.[36][38] 파터슨의 의식을 깨운 것은 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였다.[36][38] 파터슨이 주변 기척에 의식을 집중한 결과, 큰 동물이 덤불 속에서 도망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인간을 잡아먹는 사자"라고 판단했다.[36] 사자는 분명히 배가 고프다는 것을 나타내는 깊고 긴 한숨을 쉬며, 덤불 속을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했다.[36][38] 얼마 안 있어 사자는 파터슨의 존재를 알아채고, 화난 듯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36][38]
또 도망갈까 봐 패터슨은 걱정했지만, 사자는 도망가는 대신 패터슨을 공격하는 것을 선택했다.[36][38][30][39] 사자는 파터슨이 있는 발판 주변을 2시간 정도 천천히 돌며 그를 겁먹게 했다.[38][39] 급조된 발판의 다리가 부러지거나, 혹은 사자가 파터슨이 있는 지상 3미터 부근까지 뛰어오르면 어쩌나 하는 끔찍한 생각이 들어 패터슨은 후회했다.[38][39]
절박한 상황을 견디며 패터슨은 가능한 한 부동의 자세를 유지하도록 주의를 기울였다.[39] 한밤중쯤 무언가가 날아와 파터슨의 뒤통수를 강타했다.[38][39] 순간 사자의 공격인가 하고 동요한 파터슨은 발판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정체는 올빼미였다는 것을 알았다.[38][39] 일련의 행동으로 파터슨이 몸을 움직였기에, 사자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다시 냈다.[38][39]
사자는 조금씩 살금살금 다가와 파터슨과의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38][39] 사자는 풀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파터슨은 대략적인 짐작을 할 수 있었다.[38][36] 사자가 더 이상 다가오기 전에 패터슨은 조준하고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38][39][30] 직후 사자는 끔찍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부림치는 소리가 파터슨의 귀에 들렸다.[38][39] 사자의 모습 자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파터슨은 사자가 도망간 방향으로 계속 발포했다.[39] 큰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낸 후, 사자의 소리는 고통에 찬 깊은 신음 소리로 바뀌었고, 이윽고 소리 자체가 멎었다.[38][39]
파터슨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 중 한 마리를 쓰러뜨렸다는 소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주변 캠프 일대에 퍼졌다.[38][39] 캠프에 있던 사람들은 환희하며 파터슨이 있는 발판을 에워싸고 "마바락! 마바락!"(신, 혹은 구세주라는 뜻)이라고 외치며 땅에 엎드렸다.[38][39] 그날 밤, 신중을 기한 파터슨은 사체를 찾으러 가는 것을 멈추고, 사람들과 함께 캠프로 돌아가 그곳에서 밤새 성대한 축제를 열었다.[38][39]
날이 밝기를 기다려 파터슨은 어젯밤 장소로 향했다.[38][39] 여러 번 파터슨에게서 도망쳤던 사자가 또다시 사라졌을까 봐 불안했지만, 사자는 틀림없이 죽어 있었다.[38][39] 따라온 사람들은 파터슨을 어깨에 메고 사자 주위를 돌며 크게 기뻐했다.[38][39] 파터슨이 사자를 조사해 보니, 두 발의 총알이 명중되어 있었다.[39] 한 발은 왼쪽 어깨 뒤에서 심장을 관통했고, 다른 한 발은 오른쪽 뒷다리에 맞았다.[39] 이 사자는 코끝에서 꼬리 끝까지의 길이가 2.9m, 일어섰을 때의 높이는 1.15m를 측정했고, 8명이 캠프까지 옮겼다.[38][30][39] 하지만 여러 번 가시투성이 보마를 돌파하여 사람들을 습격했기 때문에 그 모피는 상처투성이였다.[39] 게다가, 이전에 유개 화차에서 쏜 총알이 이 사자의 어금니를 손상시켰다는 것도 밝혀졌다.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 중 한 마리가 죽었다는 소식은 곧 전국에 알려졌다.[23][39] 많은 축전이 도착했고, 각지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의 모피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차보를 방문했다.[23][39]
4. 3. 두 번째 사자 추격과 사살

첫 번째 사자가 사살된 후에도, 남은 한 마리의 사자는 계속해서 노동자들을 습격했다. 12월 29일, 패터슨은 여러 차례의 추격과 총격 끝에 두 번째 사자를 사살했다.[40][42]
두 번째 사자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10일 이상 전에 패터슨이 쏜 총알에 맞은 상처를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40][42]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패터슨에게 달려들었다.[40][42][30] 패터슨은 여러 번 총을 쏴서 사자를 쓰러뜨렸는데, 확인 결과 6개 이상의 탄흔이 발견되었다.[40][42] 등에는 10일 이상 전에 패터슨이 쏜 산탄이 얕게 박혀 있었다.[40][42]
두 번째 사자의 크기는 전체 길이 2미터 85센티미터, 높이 1미터 19센티미터였다.[40][42] 이 사자 역시 첫 번째 사자와 마찬가지로 보마(가시덤불)를 통과하며 생긴 깊은 상처가 털 곳곳에 나 있었다.[40][42]
두 번째 사자의 죽음 소식은 곧 각지에 퍼졌다.[40][42] 현지인들은 기차를 타고 와서 전리품이 된 사자와 "악마 사냥꾼" 패터슨을 보러 왔다.[40][42] 패터슨에게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차보에서 도망쳤던 노동자들이 일제히 돌아온 것이었다.[23][40]
5. 사건의 종결과 그 후
인간 사자의 위협이 사라진 후,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23][43]
패터슨은 자재 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된 어느 날, 마히나와 무타라는 펀자브인 노동자들과 함께 차보 남서쪽 구릉 지대로 갔다.[44] 그는 코뿔소가 낸 짐승의 길을 따라가다가 우연히 "으스스한 동굴"을 발견했는데, 그 입구와 구멍 안에는 많은 인골이 있었다.[44] 패터슨은 이 동굴을 식인 사자의 은신처로 추정했다.[44][45] 그러나 사자는 굴에서 사는 습성이 없기 때문에, 이 동굴이 실제로 식인 사자의 은신처였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있었다.[45] 필드 자연사 박물관 연구팀은 동굴을 조사한 결과, 이곳이 사자의 굴이 아니라 고대 타이타 족의 매장 장소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45] 하지만 연구팀 내에서도 인골이 사자의 희생자라는 설과 하이에나가 끌고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45] 패터슨은 동굴 안에 총을 쏘았지만, 박쥐 떼만 나왔을 뿐이었다.[44]
패터슨은 1899년 3월에 차보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케냐 남부의 마차코스 로드로 부임했다.[46] 그는 1899년 말경 영국으로 돌아갔는데, 그를 따르는 키쿠유족 사람들 400여 명이 영국에 동행해 줄 것을 간청하여 설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47] 패터슨은 충실한 부하들과 함께 해안까지 여행한 후, 인도로 돌아가는 그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다음 날 배로 영국으로 떠났다.[47]
5. 1. 노동자들의 귀환과 철교 완공
두 식인 사자가 모두 사살되자, 차보에서 도망쳤던 노동자들이 돌아와 철도 공사가 재개되었다.[2][3] 1899년 2월, 차보 강 철교가 완공되어 선로가 부설되고 기차가 다니게 되었다.[20][43] 철교가 완성되고 임시 교각을 철거한 지 2, 3일 후, 맹렬한 폭우가 차보를 덮쳤지만 철교는 끄떡없었다.[43]위기 종료 후, 영국 총리 솔즈베리 경은 귀족원에서 차보 식인 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1]
5. 2. 사자 가죽과 박제
25년 동안 패터슨의 바닥 깔개로 사용된 사자 가죽은 1924년 필드 자연사 박물관에 5000USD에 판매되었다. 가죽은 매우 열악한 상태로 박물관에 도착했다. 사자는 재구성되었으며 현재 두개골과 함께 영구 전시되어 있다.[23][43]6. 사건의 원인과 분석
차보 강 철교 가설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패터슨은 강 수량 조사와 측량 등을 마치고 교대와 교각 위치를 선정, 기초석 설치를 시작했다. 이 공사는 어려웠지만, 단단한 기반을 찾지 못해 말뚝 공법으로 변경하려 할 때 운 좋게 단단한 바위를 발견했다.[32]
다리에 사용할 석재를 찾는 것도 문제였다. 주변 암석은 많았지만 가공이 어려운 돌뿐이었다. 패터슨은 며칠간 খুঁজে 찾지 못하다가 블록과 새 사냥을 나간 곳에서 발견, 트롤리로 운반했다.[32]
패터슨은 본부에 석공 증원을 요청했다.[33] 파견된 석공 대부분은 파탄족 숙련공이라 자칭했지만, 진짜는 극히 일부였고 나머지는 12루피 대신 45루피를 받으려던 노동자들이었다.[33] 패터슨은 석공 임금을 성과급으로 변경, 능력에 따라 45루피 이상 지급하고 가짜 석공들 임금은 삭감했다. 가짜 석공들은 유능한 석공들을 협박해 성과급 제도를 없애려 했지만 실패했다.[33]
노동자들의 문제는 사보타주 소동으로 이어졌다. 패터슨은 밤샘 감시 후 채석장에 들렀는데, 석공들은 모두 쉬고 있었다. 그는 총으로 위협해 작업을 재개시켰고, 전원 벌금 및 책임자 강등 처분을 내렸다.[33]
이후 노동자들은 패터슨을 제거하기로 결정, 다음 날 살해 후 "사자에게 잡아먹혔다"고 위장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회합 참석자 중 한 명이 패터슨에게 알렸다.[33]
다음 날, 석공 우두머리 헤라 싱은 패터슨에게 채석장 문제를 경고했다. 채석장은 평온했지만, 노동자들은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패터슨을 계곡 위로 유인, 함정임을 알면서도 동행했다. 계곡 위에서 노동자들이 달려들자 패터슨은 "살해 시 많은 사람이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고, 거짓말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 설득, 모두 작업으로 돌아갔다.[33]
패터슨은 위기를 모면했지만, 노동자들은 다시 그날 밤 살해 계획을 세웠다. 노동 시간 기록 담당자가 이를 알렸고, 패터슨은 철도 경찰과 지방관 화이트헤드에게 전보를 쳤다. 화이트헤드와 부하들이 달려와 습격을 막았다. 2~3일 후 철도 경찰도 도착, 주동자 일당을 체포했다. 주동자들은 뭄바사로 연행, 심문 끝에 음모가 밝혀져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패터슨은 노동자 반란에 시달리지 않았다.[33]
6. 1. 환경적 요인
19세기 후반, 차보 지역에는 우역(소 페스트)이 발생하여 사자의 주요 먹이인 아프리카물소가 급감했다.[22][18][49] 이로 인해 사자들은 대체 먹이를 찾아야 했다.같은 시기, 동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중심지였던 잔지바르로 향하는 노예 상단이 차보 강을 건너면서, 죽은 사람의 시신이 강가에 버려지는 일이 잦았다.[1] 이는 사자들이 인간의 시신을 접하는 기회를 늘렸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자들이 인간을 먹이로 삼게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3]
6. 2. 사자의 특성
차보의 식인 사자는 두 마리 모두 갈기가 없거나 매우 짧은 수사자였다.[53] 이들은 유전적 형질이 유사하여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일 가능성이 높다. 사자는 유아기 사망률이 높고, 두 사자가 함께 행동했다는 점도 형제일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차보 지역은 아프리카에서도 기온이 매우 높아, 이곳에 서식하는 사자들은 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갈기를 퇴화시킨 것으로 보인다.[50][51] 또한, 차보의 사자는 먹이가 적어 무리 규모가 작으며, 수사자도 사냥에 참여한다.[53]두 사자가 언제부터 사람을 잡아먹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차보 지역의 아프리카물소 등 초식 동물이 줄어들면서 많은 사자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이 두 마리는 차보에 남았다. 이들은 독수리나 하이에나가 먹다 남은, 병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는 것에 익숙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사자의 박제는 시카고 필드 자연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18][20] 오하라 히데오는 이 박제가 솜씨가 좋지 않다고 평가했다. 두 사자는 1924년 패터슨에 의해 5000USD에 필드 자연사 박물관에 팔렸으며, 박제는 1925년에 전시되었다.[55][30] 패터슨이 오랫동안 깔개로 사용했기 때문에 모피 상태가 좋지 않아 박제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고, 전시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55]
사건 발생 100년 후, 필드 자연사 박물관의 과학자들은 두 사자가 사람을 공격한 이유를 밝히기 위해 정밀 조사를 진행했다.[18][53] 브루스 패터슨(존 헨리 패터슨과는 무관)[53]이 이끈 연구팀은 유전적 요인으로 인해 건강한 사자가 사람을 먹이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제시했다.[53]
연구 결과, 두 사자는 패터슨의 기록처럼 젊었고, 건강에 문제가 없었다. 따라서 노령이나 질병 때문에 사냥이 어려워져 사람을 공격했다는 가설은 부정되었다.[28][18] 그러나 2017년 연구에서는 사자 중 한 마리가 송곳니 뿌리에 감염이 있어 사냥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16][17] 사자는 보통 턱을 사용하여 얼룩말이나 누와 같은 먹이를 잡고 질식시킨다.[16][17]
6. 3. 희생자 수 논란
패터슨은 인도인 노동자만 28명 이상, 아프리카 원주민까지 포함하면 수십 명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21][40] 다른 자료에서는 135명이 희생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21][18] 그 근거는 불분명하다.캘리포니아 대학교 학자들은 사자들의 털과 뼈에서 샘플을 채취해 동위체 분석을 실시한 결과,[21] 두 마리의 사자가 먹은 인간의 수는 35명 정도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먼저 사살된 사자(FMNH 23970)는 24.2명, 나중에 사살된 사자(FMNH 23969)는 10.5명 분의 인간을 먹은 것으로 추정된다.[21]
학자들은 135명이라는 숫자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실제 희생자 수는 35명 정도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지적했다.[21] 다만, 희생자 수는 4명에서 72명 사이일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21]
7. 사건의 영향과 대중문화
차보 식인 사자 사건은 영국 의회에서 논의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18][40] 당시 총리였던 솔즈베리 후작은 우간다 철도 건설 지연에 대한 질문에 식인 사자의 출현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답변했다.[40]
패터슨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차보의 식인 사자》라는 책을 출간했으며,[21][22] 이 책은 여러 영화의 원작이 되었다.[30]
7. 1. 영국 의회에서의 논의
차보 식인 사자 사건은 영국 의회에서도 다루어졌다.[18][40] 당시 총리 솔즈베리 후작은 우간다 철도 건설 지연에 대한 질문에 "그 지역에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가 출현하여, 인부들을 즐겨 잡아먹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에, 철도 건설 공사가 3주 동안 전면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그는 또한 "결국 인부들이, 쇠 울타리로 보호받을 것을 요구하며, 작업을 지속하는 것을 굳게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 공사를 속행하는 것은 곤란하며, 정열적인 사냥꾼이 이 사자들을 쓰러뜨릴 때까지, 작업은 현저하게 방해받았습니다"라고 덧붙였다.[40]7. 2.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패터슨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차보의 식인 사자》라는 책을 출간했다.[21][22] 이 책은 여러 영화의 원작이 되었다.[30]- 1952년, 아치 오볼러는 입체 영화 《부와나의 악마》(Bwana Devil)를 제작했다.[70] 이 영화에서 패터슨 역은 로버트 스택이 연기했다.[71]
- 1997년, 스티븐 홉킨스 감독의 영화 《고스트 앤 다크니스》가 제작되었다.[18][72][73] 발 키머가 패터슨 역을, 마이클 더글러스가 가상의 인물인 프로 사냥꾼 레밍턴 역을 연기했다.[72][73] 이 영화는 제69회 아카데미상에서 아카데미 음향 편집상을 수상했다.[72]
(변경 사항 없음 - 모든 지시 사항 및 허용된 문법 준수 확인 완료)
7. 3. 영화
이 사건은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30] 1952년에는 아치 오볼러(Arch Oboler)가 입체 영화 《부와나 데블》(Bwana Devil)을 제작했다.[70] 이 영화는 완성도가 좋지 않았지만 크게 흥행하여, 할리우드에서 영화 산업을 구할 구세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전 세계에 입체 영화 붐을 일으켰다.[70] 이 영화에서 헤이워드(역사 속 패터슨에 해당) 역은 로버트 스택이 연기했다.[71]1997년에는 영화 《고스트 앤 다크니스》가 제작되었다.[18][72][73] 스티븐 홉킨스가 감독을 맡았고, 발 킬머가 패터슨 역을, 마이클 더글러스가 프로 사냥꾼 레밍턴(가상의 인물) 역을 연기했다.[72][73] 이 영화에서 브루스 스탬블러(Bruce Stambler)는 제69회 아카데미 음향 편집상을 수상했다.[72] 한편, 발 킬머는 제17회 골든 라즈베리상 최저 남우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72]
7. 4. 소설
소설가 토가와 유키오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장편 소설 《식인 철도》를 집필했다.[22][19] 토가와는 1966년에 처음 동아프리카를 방문하여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껴, 이듬해 7월부터 8월까지 다시 동아프리카를 방문하여 자세한 취재를 했다.[19][60][61] 이토추 상사의 나이로비 주재원 및 차보 국립 공원의 자연 보호관 등의 협력을 얻어 당시 이야기를 듣고, 우간다 철도에 관한 자료와 패터슨의 실록 《''The Tsavo Man-Eaters''》를 수집했으며, 차보에 방문하여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오두막 등도 보았다.[19][61]두 번째 동아프리카 여행에는 만화가 이시카와 큐타도 동행하여, 두 사람은 약 1개월에 걸쳐 광대한 사바나를 지프를 타고 다니며 취재를 했다.[60][61] 토가와는 《식인 철도》를 1967년 11월부터 1968년 10월까지 《선데이 매일》에 연재했다.[62] 이 작품에서는 식인 사자를 10여 마리로 구성된 한 무리로 설정하고, 리더격인 "흑갈기", "잘린 귀", "세 손가락"이 존재하는 등의 창의성과 패터슨의 실록에서 다른 사건의 기술을 이야기 속에 삽입하는 등의 재구축 시도가 이루어졌다.[63] 문예 평론가 오자키 히데키는 《식인 철도》에 대해 "풍부한 구성력의 뒷받침으로 이루어진 창작"이라고 평하며, "인간들의 행동뿐만 아니라 사자 측의 심리까지 무리 없이 따라가면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마음가짐과 같은 것을 말하고 있으며, 거기에 토가와 유키오다운 시점이 느껴진다"라고 칭찬했다.[19] 이 작품은 나중에 《토가와 유키오 동물 문학 전집》 제2권 (고단샤 간행)에 수록되었고, 오분샤 문고, 랜덤하우스 고단샤 문고에서도 간행되었다.[62][64]
이시카와는 토가와의 소설을 바탕으로 《식인 철도》를 만화화하여 주간 소년 선데이의 1969년 3호부터 같은 해 22호에 연재했다.[65][66][67] 현지에서 면밀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그 박력과 현장감으로 당시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61][65] 만화판 《식인 철도》는 2007년에 만화 숍에서 완전판이 발행되었으며, 이 완전판에는 이시카와의 연재 당시 표지 그림도 수록되어 있다.[65][66][67]
7. 5. 만화
이시카와 큐타는 토가와 유키오의 소설 『식인 철도』를 바탕으로 동명의 만화를 주간 소년 선데이 1969년 3호부터 22호까지 연재했다.[65][66][67] 이 만화는 현지에서의 면밀한 취재를 바탕으로 박력과 현장감을 살려 당시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61][65] 2007년에는 만화 숍에서 완전판이 발행되었으며, 여기에는 이시카와가 그린 연재 당시의 표지 그림도 수록되었다.[66][6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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