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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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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도교는 19세기 한국에서 동학에서 유래한 종교로, 서구의 침략과 천주교의 확산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유교, 불교, 도교를 기반으로 동양적 이상을 추구하며 농민들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되었고,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 존중과 평등을 강조했다. 3.1 운동에 참여하는 등 민족 운동에도 기여했으나 일제강점기 탄압을 받았다. 광복 이후 남북 분단으로 인해 남한과 북한에서 다른 양상을 보이며, 북한에서는 천도교청우당을 통해 정치적으로 대표되고 김일성이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약 6만 5천 명의 신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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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천도교
천도교 깃발
천도교를 상징하는 깃발
기본 정보
한글천도교
한자天道敎
로마자 표기Cheondogyo
한국어 로마자 표기Cheondogyo
문자 그대로하늘의 길의 종교
종교
종류범신론 종교
문화
관련 문화한국 문화
역사
기원동학 (1860년)
창시자최제우
창립일1860년
주요 신앙
주요 가르침인내천 (사람이 곧 하늘이다)
주요 경전동경대전, 용담유사
조직
지도자교주
신자 수110만명
기타
관련 단체천도교중앙총부
기념일천도교 창도 기념일 (4월 5일)
관련 뉴스천도교 창립 기념일
참고 문헌
참고 도서한국사 편지 4 - 개정판,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 성립까지
참고 서적An Introduction to Confucianism

2. 역사

천도교는 19세기 한국에서 서구의 침략, 특히 천주교의 확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종교 운동인 동학에서 유래했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했으며, 유교, 불교, 도교 등 기존 종교를 기반으로 동양적 이상을 대표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에 농민들 사이에서 빠르게 널리 받아들여졌다.[9][10] 이 운동은 신성함이 지상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가르쳐 지방 지주들과 이 운동을 금지하려 했던 외세의 눈 밖에 났고, 1864년 최제우는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11]

천도교는 3대 지도자인 손병희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종교가 되었다.[12] 1905년 보호 조약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될 때까지 동학 신자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다. 1905년 12월 1일, 손병희는 당시 한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일본의 눈에 종교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동학의 이름을 천도교("하늘의 길의 종교")로 공식적으로 변경하고 종교를 현대화했다. 이후 헌법과 중앙총부가 마련되어 종교가 중앙 집중화되고 대중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12]

2. 1. 동학의 창시와 발전 (1860-1905)

동학 농민 운동이 진압되고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이 1898년 순교한 뒤, 3대 교주가 된 손병희는 교정일치론을 강조하며 조직을 재정비하고 여러 개혁을 시도하였다.[20] 그러나 조선 정부의 탄압으로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인식을 얻었다.[20] 그는 국내와의 연락을 통해 교인들을 규합하여 동학을 재정비하였으나, 손병희의 일본 체류는 결과적으로 동학교도들의 민족적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20] 이에 손병희는 정교분리 원칙을 내걸고 종교로서의 동학을 지키고자 1905년 12월 1일 교명을 ‘천도교’로 바꾸었다.[20]

천도교는 19세기 한국에서 천주교의 확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동학에서 유래했다.[9]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했으며,[9] 유교, 불교, 도교 등 기존 종교를 기반으로 동양적 이상을 대표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에 농민들 사이에서 빠르게 널리 받아들여졌다.[10] 그러나 이 운동은 지방 지주들과 외세의 탄압을 받았고, 1864년 최제우는 처형되었다.[11]

천도교는 세 번째 지도자인 손병희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종교가 되었다.[12] 동학 신자들은 1905년 보호 조약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할 때까지 심한 박해를 받았다.[12] 1905년 12월 1일, 손병희는 종교를 현대화하고 개방과 투명성의 시대를 열기 위해 동학의 이름을 천도교("하늘의 길의 종교")로 공식적으로 변경했다.[12]

2. 2. 천도교로의 개칭과 근대화 (1905-1910)

손병희동학 농민 혁명이 진압되고 2대 교주 최시형이 순교한 뒤 3대 교주가 되어 조직 재정비와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탄압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 중인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인식을 얻고, 국내와 연락하며 동학을 재정비했다. 하지만 손병희의 일본 체류는 동학교도들의 민족적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고, 동학교도들이 조직한 진보회는 친일단체화되었다. 이에 손병희는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20]

1906년 귀국한 손병희는 '천도교대헌'을 반포하고 새로운 교단 조직을 확립했다. 서울에 중앙총본부를 두고 대도주가 관할하게 했으며, 지방을 72개 대교구로 나누어 교령이 담당하게 했다. 또한 정당 활동을 금지하고, 교리, 교체, 교제, 오의(주문, 청수, 시일, 성미, 기도)를 제정하고, 다수의 교서를 발간하여 동학 이래의 사상 체계를 확립했다.

천도교는 19세기 한국에서 천주교 확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동학에서 유래했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했으며,[9] 유교, 불교, 도교 등 기존 종교를 기반으로 동양적 이상을 대표하여 농민들에게 빠르게 확산되었다.[10] 그러나 이 운동은 지주와 외세의 탄압으로 1864년 최제우가 처형되었다.[11]

천도교는 3대 지도자인 손병희 때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종교가 되었다.[12] 1905년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손병희는 종교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헌법과 중앙총부를 마련하여 종교를 중앙집권화하고 대중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12]

서울 천도교 중앙대교당

2. 3.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과 수난 (1910-1945)

3·1운동에서 천도교는 기독교, 불교와 더불어 민족대표로 참여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많은 교도들이 옥고를 치르고 일제의 탄압을 받았으나, 1919년 9월 천도교 청년교리강연부를 설립하고 이듬해 이를 천도교청년회로 개편하여 전국지부를 결성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20]

1920년에는 종합잡지 《개벽》을 비롯하여 《신여성》, 《학생》, 《어린이》 등의 월간잡지를 간행하였는데, 특히 《개벽》은 일제의 탄압으로 1926년 통권 72호로 폐간될 때까지 천도교 교리를 통해 민중의 주체적 자각과 근대 문물 섭취에 크게 이바지하였다.[20] 의암 손병희 선생의 사위인 소파 방정환 선생도 천도교 교당에서 동화구연을 하고, 《어린이》를 발행하는 등 어린이 교육 사업에 헌신하였다.

세계일보에 따르면 천도교는 협동조합, 농민교육 등의 농민운동을 했다.[21]

천도교 청년당은 1908년 일제가 토지조사령 등 명목으로 토지 수탈을 감행하자 농민부를 비롯한 7부문 운동을 전개하면서 농민운동에 적극 대처했다. 1925년에는 조선농민사를 창립한 뒤 월간 ‘조선농민’을 발간해 농민교양사업에 힘썼다. 농민사는 1931년 농민공생조합을 결성, 전국적으로 공동경작을 시행하는 한편 평양에 농민고무공장을 만들어 고무신을 염가에 공급했다. 1937년 일제의 대륙 침략(중일전쟁)으로 국내 모든 자생적 농민운동이 막을 내리기 전까지 천도교 농민운동은 당시 사회주의 계열인 조선농민총동맹보다 더 큰 규모로 농민운동을 이끌어 갔다.[21]

1923년 천도교청년회를 개편하여 천도교청년당을 세우고 학술연구부를 두어 〈자수대학강의(自修大學講義)〉를 발행함으로써 한국 청년의 지적 향상을 도모하였다. 1931년 신파측의 천도교청년당과 구파측의 천도교청년동맹이 합쳐 천도교청우당을 발족하였고 이후 교회조직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1934년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려다 230명이 검거된 천도교오심당사건이 일어났고, 1937년 천도교청우당이 해체당하는 등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20]

2. 4. 광복 이후의 시련과 발전 (1945-현재)

광복 후 남북 지역 교도 간의 연락이 어려워졌고, 1948년에 남한에서는 신구파가 합쳐졌으나 북한의 교회 활동은 위축되었다. 남한에서는 1953년 서울 수복 후 중앙총부를 서울로 이전하였고, 1961년 최시형·손병희의 법설이 포함된 〈천도교경전〉이 간행되었으며, 1972년 천도교의 중심 역할을 하는 수운회관(水雲會館)이 준공되었다.[20]

북한에서는 천도교가 독자적인 한국 혁명 종교로 인정받고 있으며, 국가적으로 지원을 받고 있다.[11] 천도교도들은 북한 정치에서 소규모 정당인 천도교청우당을 통해 명목상으로 대표되고 있다.

북한 지도자 김일성의 회고록에는 공산당 동지들을 설득하여 천도교 신자를 받아들이려고 했던 노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15] 김일성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한국의 종교에 대해 가볍게 비판하고 있지만, 동시에 천도교가 한국식 공산주의에 가깝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16] 특히 김일성의 회고록은 천도교가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다.[17] 김일성에 따르면 천도교는 그 원칙의 참신성, 저항 정신, 의례와 관습의 단순성, 그리고 본질적으로 대중적인 성격으로 특징지어지는 "진보적인 종교"이다.[18]

2005년 기준으로 천도교는 대한민국에 약 4만 5천 명의 신자와 280개의 교회를 두고 있었다.[13]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천도교 신자 수는 약 6만 5천 명이었다.[14]

3. 교리 및 사상

천도교(Cheondogyo)는 "하늘의 도(道)의 종교"라는 뜻으로,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천(하늘)을 숭배하며, 이를 하늘님이라 존칭한다. 여기서 "천(天)"은 단순한 하늘이 아닌 전체 우주, 즉 "일원성"을 나타내며, 인간과 사물이 초자연적 신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에 존재하는 신성에 의해 "생성"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늘을 "교사"로 암시한다.[5][6][7]

천도교는 유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자기 수양을 통해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향상시켜 하늘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존재와 신과의 관계는 타고난 신성에 대한 근접성 또는 거리로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2] 최시형은 이러한 타고난 신성을 바탕으로 만물의 일체성, 즉 "사람을 섬기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라는 핵심 원리를 확립했다.[8]

롤랜드 보어는 천도교가 한국 문화에 사회적·종교적 평등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남겼다고 평가했다.[8]

3. 1. 인내천(人乃天) 사상

천도교는 "하늘의 도(道)의 종교"를 의미하며, "천(天)"은 하늘, "도(道)"는 도, "교(gyo)"는 종교, 가르침을 뜻한다. 천도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도교, 불교 등 다른 한국 종교 전통의 요소들을 수용해 왔다.[5]

천도교는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궁극적인 선과 정의의 원리로서 천(하늘)을 숭배하며, 이를 존칭하여 하늘님이라 부른다. 교리에 따르면, "하늘"은 단순히 하늘뿐만 아니라 전체 우주, 즉 "일원성"을 나타낸다.[6] 이러한 명칭은 하늘의 속성을 "교사"로 암시하는데, 이는 인간과 사물이 초자연적인 신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에 존재하는 신성에 의해 "생성"된다는 믿음을 의미한다.[7]

천도교는 유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자기 수양을 통해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향상시켜 하늘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즉, 모든 존재와 신과의 관계는 타고난 신성에 대한 근접성 또는 거리로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2] 천도교 경전을 출판한 지도자 최시형은 이러한 타고난 신성의 존재를 바탕으로 만물의 일체성이라는 핵심 원리를 확립했다.[8] 이 원리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녔다.[8]

롤랜드 보어는 천도교가 한국 문화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8]

3. 2. 기타 주요 교리

천도교는 "하늘의 도(道)의 종교"를 뜻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교와 불교 등 한국 종교 전통의 요소들을 수용해 왔다.[5]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천도교는 궁극적인 선과 정의의 원리로서 천(하늘)을 숭배하며, 하늘님이라는 존칭으로 불린다. 교리에 따르면, "하늘"은 단순히 하늘뿐만 아니라 전체 우주 또는 "일원성"을 나타낸다.[6] 이러한 명칭은 하늘의 속성을 "교사"로 암시하는데, 이는 인간과 사물이 초자연적인 신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에 존재하는 신성에 의해 "생성"된다는 믿음을 의미한다.[7]

천도교는 유교적 배경을 유지하면서 자기 수양에 중점을 둔다. 이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향상시킴으로써 하늘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즉, 모든 존재의 신과의 관계는 타고난 신성에 대한 근접성 또는 거리로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2] 천도교 경전을 출판한 지도자 최시형은 이러한 타고난 신성의 존재를 바탕으로 만물의 일체성이라는 핵심 원리를 확립했다.[8] 이 원리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녔다.[8]

롤랜드 보어는 천도교가 한국 문화에 남긴 영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8]

  •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라는 원칙: 다른 사람들과 "하늘" 모두를 가리킨다.
  • "인간을 신처럼 대하라"는 원칙: 유교적 계층 제도에 대한 도전이다.
  •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라"는 원칙: 외세와 관련된 한국을 명확히 언급한다.
  • "모든 사람은 하나됨을 향해 발전한다"는 원칙: 남북 분단으로 인해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 "지상 천국"이라는 원칙

4. 조직 및 현황

천도교의 최고 지도자는 교령이라고 불리며, 대의원 회의에서 선출된다. 교령의 임기는 3년이고 단임제이다. 현 교령은 제35대 송범두 교령이다.[1] 1920년대에는 신도 수가 300만 명에 이르렀으나, 1922년 손병희 교조가 사망하면서 신·구파 간의 갈등으로 교세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22] 1930년에 두 교파는 잠시 통합되었다가, 1932년 다시 분리되었고, 1940년에 다시 통합되었다.[22]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으로 용담정이 복구되고 수운회관도 건립되었으나, 외무장관까지 지냈던 최덕신 교령이 북한으로 넘어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23] 1997년에는 오익제 교령까지 월북하면서 어려움이 더해졌다.[23] 현재 신도 수는 10만 명 정도로 추정되며, 전국에 100여 개의 교구가 있다.[24]

천도교 중앙대교당

4. 1. 조직 구조

천도교의 최고 지도자는 교령이라고 불리며, 천도교 대의원 회의에서 선출된다. 교령의 임기는 3년이고, 한 번만 역임할 수 있는 단임제이다. 현 교령은 2019년 3월 15일에 열린 제39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당선된 제35대 송범두 교령이다.[1]

4. 2. 교세 현황

1920년대에는 신도 수가 300만 명에 이르렀으나, 1922년 손병희 교조의 죽음으로 신·구파로 갈리며 교세가 하락하기 시작하였다.[22] 1930년에 두 교파는 잠시 결합했다가, 1932년 다시 갈라서고, 1940년에 다시 합쳐진다.[22] 1970년대 초 천도교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을 받고, 용담정이 복구되고 수운회관도 세워졌으나, 당시 외무장관까지 지냈던 최덕신 교령이 월북하는 사건이 벌어진다.[23] 이어 1997년에는 오익제 교령까지 월북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23] 현재 신도 수는 10만 명 정도로 추정되며, 100여 개의 교구가 있다.[24]

2005년 기준으로 천도교는 대한민국에 약 4만 5천 명의 신자와 280개의 교회를 두고 있었다.[13]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천도교 신자 수는 약 6만 5천 명이었다.[14]

북한에서는 천도교가 독자적인 한국 혁명 종교로 인정되고 있으며, 국가적으로 지원을 받고 있다.[11] 천도교도들은 북한 정치에서 소규모 정당인 천도교청우당을 통해 명목상으로 대표되고 있다.

북한 지도자 김일성의 회고록에는 공산당 동지들을 설득하여 천도교 신자를 받아들이려고 했던 노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15] 김일성의 회고록에서는 자신이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한국의 종교에 대해 가볍게 비판하고 있지만, 동시에 천도교가 한국식 공산주의에 가깝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16] 특히 김일성의 회고록은 천도교가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다.[17] 김일성에 따르면 천도교는 그 원칙의 참신성, 저항 정신, 의례와 관습의 단순성, 그리고 본질적으로 대중적인 성격으로 특징지어지는 "진보적인 종교"이다.[18]

5. 북한의 천도교

북한에는 천도교 신자가 상당수 존재하며, 이들은 주로 천도교청우당이라는 정당을 통해 대표된다. 천도교청우당은 한국 전쟁 이후 북한에서 명목상으로 유지되어 온 정당 중 하나이다.[20] 김일성은 천도교가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의 가치를 강조하며, 원칙의 참신성, 저항 정신, 단순한 의례와 관습, 대중적인 성격을 가진 "진보적인 종교"라고 평가했다.[17][18]

5. 1. 천도교청우당

1931년 신파 측의 천도교청년당과 구파 측의 천도교청년동맹이 합쳐져 천도교청우당이 발족되었고, 이후 교회 조직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1934년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려다 230명이 검거된 천도교오심당사건이 일어났고, 1937년 천도교청우당이 해체당하는 등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20]

5. 2. 김일성과 천도교

북한 지도자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공산당 동지들을 설득하여 천도교 신자를 받아들이려 했던 노력을 자세히 기록했다.[15] 김일성마르크스-레닌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한국의 종교에 대해 가볍게 비판하면서도, 천도교가 한국식 공산주의에 가깝다고 강조했다.[16] 특히 천도교가 모든 사람, 그중에서도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했다.[17] 김일성에 따르면 천도교는 원칙의 참신성, 저항 정신, 의례와 관습의 단순성, 그리고 본질적으로 대중적인 성격을 특징으로 하는 "진보적인 종교"이다.[18]

참조

[1] 웹사이트 Anniversary of Chondoism Observed, KCNA http://www.kcna.co.j[...] 2012-06-23
[2] 서적 An Introduction to Confucian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간행물
[4] 간행물
[5] 웹사이트 韓國 近代宗敎의 三敎融合과 生命·靈性 – 원불교사상연구원 http://wth.or.kr/pap[...] 2014-12-25
[6] 웹사이트 천도교개관(영문)-천도교 http://www.chondogyo[...] 2015-09-23
[7] 간행물
[8] 서적 Red theology: on the Christian Communist tradition https://www.worldcat[...] Haymarket Books 2019
[9] 간행물
[10] 간행물
[11] 서적 Red theology : on the Christian Communist tradition https://www.worldcat[...] Haymarket Books 2019
[12] 논문 Young, Carl F. pp.113–121
[13] 웹사이트 Consulate General of the Republic of Korea in Toronto http://www.koreancon[...] 2012-06-23
[14] 웹사이트 2018년 한국의 종교 현황 http://www.chondogyo[...] 2020-07-22
[15] 서적 Red theology : on the Christian Communist tradition https://www.worldcat[...] Haymarket Books 2019
[16] 서적 Red theology : on the Christian Communist tradition https://www.worldcat[...] Haymarket Books 2019
[17] 서적 Red theology : on the Christian Communist tradition https://www.worldcat[...] Haymarket Books 2019
[18] 서적 Red theology : on the Christian Communist tradition https://www.worldcat[...] Haymarket Books 2019
[19] 웹인용 한국사 편지 4 - 개정판,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 성립까지 http://www.aladin.co[...] 2018-01-02
[20] 간행물 천도교 글로벌 세계 대백과
[21] 뉴스 “천도교 몰락은 일제탄압보다 내부분열 때문”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18-01-02
[22] 뉴스 천도교 몰락은 일제탄압보다 내부분열 때문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06-03-29
[23] 뉴스 한국의 창종자들 - 남북 분단 후 교세 급격히 하락 http://newsmaker.kha[...] 주간 경향 2008-08-12
[24] 뉴스 임운길 천도교 교령 "구제역·대지진, 인간이 만든 재앙"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11-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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