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서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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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서릉은 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 바오딩 시에 위치한 청나라 황제와 황후의 능묘군이다. 옹정제의 태릉을 시작으로 가경제의 창릉, 도광제의 모릉, 광서제의 숭릉, 동치제의 혜릉 등 5명의 황제와 다수의 황후가 안장되어 있다.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8개국 연합군에 의해 훼손되었으며, 이후 도굴과 중화민국 수립 후 관리 소홀로 어려움을 겪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청서릉유물보관소가 설립되어 보호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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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릉은 허베이성 쭌화시에 위치한 청나라 황실 능묘군으로, 순치제의 효릉을 시작으로 역대 황제, 황후, 비빈들의 능묘가 조성되어 있으며 건륭제의 유릉과 서태후의 정동릉은 화려한 장식으로 유명하고 동릉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 중국의 황릉 - 소릉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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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서릉 | |
|---|---|
| 개요 | |
![]() | |
| 위치 | 허베이성 이현 |
| 지정 구분 | 명·청 황릉의 일부 |
| 좌표 | 39.368395 |
| 유네스코 ID | 1004ter-003 |
| 지정 연도 | 2000년 |
| 확장 | 2003년, 2004년 |
| 면적 | 1,842 헥타르 (ha) |
| 완충 구역 | 4,758 헥타르 (ha) |
| 웹사이트 | 청서릉 공식 웹사이트 |
| 명칭 | |
| 중국어 간체 | 清西陵 |
| 병음 | Qīng Xī Líng |
| 만주어 | (wargi ergi munggan) |
| 영어 | Western Qing Tombs (서청릉) |
| 위치 정보 | |
| 거리 | 베이징에서 140 km 떨어져 있음 |
2. 역사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한 뒤 순치제와 강희제는 지금의 쭌화시에 안장되었다. 이후 강희제의 아들 옹정제가 청서릉 건설을 시작하면서, 청서릉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옹정제는 아버지의 능 근처에 장지를 찾았으나 선정된 능지에 돌이 많다는 이유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첫 번째 능인 태릉은 옹정제의 재위가 끝난 2년 후인 1737년에 완공되었다.[1]
이후 황제들의 안장 방식은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건륭제는 청동릉에 묻히기로 결정하고, 그 이후로는 동서릉을 번갈아 매장해야 한다고 명령했지만, 이는 일관되게 지켜지지 않았다. 마지막 황제 매장은 1913년 광서제가 숭릉에 안치되면서 이루어졌다.[1] 푸이는 청서릉 근처 민간 묘지에 안장되었다.
1900년 의화단 운동 진압을 명목으로 8개국 연합군이 청나라를 침공하면서 청서릉을 공격하여 능침이 크게 파괴되고 재물을 약탈당했다. 중화민국 시기에도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도굴이 발생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청서릉유물보관소가 설립되어 청서릉을 다시 보호하게 되었다.[1]
2. 1. 청 제국 시기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의 능 근처에 장지를 찾았으나, 선정된 능지에 돌이 많다는 이유로 1729년(옹정 7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이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 곁에 묻힌다는 자수부장(子受父葬)의 원칙을 어기게 되었고, 옹정제의 태릉이 청서릉의 시발점이 되었다.[1] 아들 건륭제는 존경하던 할아버지 강희제의 곁에 묻히길 원했고, 중국 전통의 종묘 제도인 소목(昭穆) 제도를 차용하여 강희제의 경릉을 중심으로 아들은 청서릉에, 손자는 청동릉에, 다시 그 아들은 청서릉에, 손자는 청동릉에 안장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한편, 옹정제는 능침 관리의 편의를 위해 1733년 산시성 대동부 울주의 18개 마을을 역주(易州) 관할로 편입시켰고, 역주(易州)를 직예주로 승격시켰다.하지만 도광제 때에 와서 소목 제도가 무너졌다. 도광제는 순서상 청동릉에 안장되어야 했으나, 선정된 능지가 자주 침수되고 돌이 많이 나오자 결국 새 능지를 청서릉에서 정했다. 이후 아들 함풍제가 아버지 대신 청동릉에 안장되었고, 함풍제의 정릉은 도광제의 능지를 조성할 때 사용된 원료들을 재활용했다. 이후 동치제는 다시 청서릉에 안장되어야 했지만, 동치제의 모후인 서태후가 동치제를 청동릉에 안장했고, 대신 동치제의 후임인 광서제가 청서릉에 안장되었다. 광서제의 숭릉은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완공되지 않아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공사가 진행되다가 1914년에서야 완성했다. 마지막 황제 푸이도 죽은 뒤 아버지가 있는 청서릉 근처의 민간 묘지 화룡황원(華龍皇園)에 안장되었다. 청동릉과 마찬가지로 청서릉도 일반인들은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었다.[1]
1900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겠단 명목으로 8개국 연합군이 청나라를 침공했다. 이들은 진군하면서 청서릉을 공격했고, 이때 능침이 크게 파괴되고 재물을 약탈당했다. 이후 빼앗긴 재물의 대부분은 반환되었지만 일부는 여전히 반환되지 않았다. 훼손된 능침은 1902년에 가서야 모두 복구했다. 1910년(선통 2년) 숭릉 서북쪽에 푸이의 능지를 마련하여 공사를 시작했으나, 신해혁명의 여파로 청나라 정부가 무너지면서 공사도 중단되었다. 숭릉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으나 푸이의 능은 공사가 완전히 중지되어 결국 푸이는 다른 곳에 묻히게 된다.[1]
2. 2. 근현대
1900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겠단 명목으로 8개국 연합군이 청나라를 침공했다. 이들은 진군하면서 청서릉을 공격했고 이때 능침이 크게 파괴되고 재물을 약탈당했다.[1] 이후 빼앗긴 재물의 대부분은 반환되었지만 일부는 여전히 반환되지 않았다.[1] 훼손된 능침은 1902년에 가서야 모두 복구했다.[1] 1910년(선통 2년) 광서제의 숭릉 서북쪽에 푸이의 능지를 마련하여 공사를 시작했으나 신해혁명의 여파로 청나라 정부가 무너지면서 공사도 중단되었다.[1] 숭릉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으나 푸이의 능은 공사가 완전히 중지되어 결국 푸이는 다른 곳에 묻히게 된다.[1]중화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청서릉을 보호하는 기관이 대부분 해체되고 다만 호릉대신(護陵大臣)만이 유지되었다.[1] 1925년 직계 군벌이 청서릉을 점거하여 주변의 나무를 벌채하여 팔았으며[1] 1937년 일본 제국이 중국을 공격하여 청서릉을 점령한 뒤 호릉경(護陵警)을 만들어 청서릉을 보호했다.[1] 이후 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이 청서릉을 관리하지 못하자 몇 차례 도굴이 일어났으며,[1] 전쟁 이후 국공 내전의 와중에도 많은 유물이 도굴되었다.[1]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뒤인 1954년 청서릉유물보관소가 설립되어 청서릉을 다시 보호하게 되었다.[1]
3. 주요 능묘
청서릉에는 황제릉, 황후릉 외에도 비빈, 왕공 귀족 등 청나라 황실 가족들이 묻혀있다.
청서릉은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었으나, 의화단 운동, 8개국 연합군의 침공, 중일 전쟁, 국공 내전 등을 거치며 훼손되고 도굴되는 피해를 입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청서릉유물보관소가 설립되어 다시 보호받고 있다.
3. 1. 황제릉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의 능 근처에서 장지를 찾았으나, 선정된 능지에 돌이 많다는 이유로 1729년(옹정 7년) 지금의 능지로 옮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 곁에 묻힌다는 자수부장(子受父葬)의 원칙을 어기게 되었고, 이후 옹정제의 태릉이 청서릉의 시발점이 되었다.[1] 아들 건륭제는 존경하던 할아버지 강희제의 곁에 묻히길 원했고, 중국 전통의 종묘 제도인 소목(昭穆) 제도를 차용하여 강희제의 경릉을 중심으로 아들은 청서릉에, 손자는 청동릉에, 다시 그 아들은 청서릉에, 손자는 청동릉에 안장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도광제 때에 와서 소목 제도가 무너지게 되었다. 도광제는 순서상 청동릉에 안장되어야 했지만, 선정된 능지가 자주 침수되고 돌이 많이 나오자 결국 새 능지를 청서릉에서 정하게 된다. 이후 아들 함풍제가 아버지 대신 청동릉에 안장되었고, 함풍제의 정릉은 도광제의 능지를 조성할 때 사용된 원료들을 재활용했다. 이후 동치제는 다시 청서릉에 안장되어야 했지만, 동치제의 모후인 서태후가 동치제를 청동릉에 안장했고, 대신 동치제의 후임인 광서제가 청서릉에 안장되었다. 광서제의 숭릉은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완공되지 않아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공사가 진행되다가 1914년에서야 완성했다.[1] 마지막 황제 푸이도 죽은 뒤 아버지가 있는 청서릉 근처의 민간 묘지 화룡황원(華龍皇園)에 안장되었다.
3. 2. 황후릉
| 황후 | 능호 | 순장 시기 |
|---|---|---|
| 효경헌황후 | 태릉 | 1737년 |
| 효성헌황후 | 태동릉 | 1777년 |
| 효숙예황후 | 창릉 | 1821년 |
| 효화예황후 | 창서릉 | 1853년 |
| 효목성황후 | 모릉 | 1852년 |
| 효신성황후 | 모릉 | 1852년 |
| 효전성황후 | 모릉 | 1852년 |
| 효정성황후 | 모동릉 | 1857년 |
| 효정경황후 | 숭릉 | 1915년 |
3. 3. 기타
1900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8개국 연합군이 청나라를 침공했다. 이들은 진군하면서 청서릉을 공격했고, 이때 능침이 크게 파괴되고 재물을 약탈당했다. 이후 빼앗긴 재물의 대부분은 반환되었지만 일부는 여전히 반환되지 않았다.[1] 훼손된 능침은 1902년에 모두 복구되었다.[1] 1910년(선통 2년) 숭릉 서북쪽에 푸이의 능지를 마련하여 공사를 시작했으나, 신해혁명의 여파로 청나라 정부가 무너지면서 공사도 중단되었다.[1] 숭릉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으나 푸이의 능은 공사가 완전히 중지되어 결국 푸이는 다른 곳에 묻히게 된다.[1]중화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청서릉을 보호하는 기관은 대부분 해체되고 호릉대신(護陵大臣)만이 유지되었다.[1] 1925년 직계 군벌이 청서릉을 점거하여 주변의 나무를 벌채하여 팔았으며,[1] 1937년 일본 제국이 중국을 공격하여 청서릉을 점령한 뒤 호릉경(護陵警)을 만들어 청서릉을 보호했다.[1] 이후 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이 청서릉을 관리하지 못하자 몇 차례 도굴이 일어났으며,[1] 전쟁 이후 국공 내전의 와중에도 많은 유물이 도굴되었다.[1]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뒤인 1954년 청서릉유물보관소가 설립되어 청서릉을 다시 보호하게 되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光绪尸骨历史隐秘:崇陵曾被盗掘 盗走数百文物
http://www.chinanews[...]
[2]
서적
満漢大辞典
[3]
웹사이트
河北省保定市清西陵景区
https://www.mct.gov.[...]
中華人民共和国文化観光部
202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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