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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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동오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후에는 남북통일을 위한 노력을 펼쳤다. 1892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으며, 천도교 손병희의 제자로 3·1 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내무부 참사, 지방국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만주 지역에서 정의부, 조선혁명당 등에서 활동했으며, 민족혁명당 창당에도 참여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의 푸대접을 받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으며,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협상에 참여했으나 6.25 전쟁 중 납북되었다. 납북 후 재북평화통일촉진회 간부로 활동하다 1963년 사망하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일제의 감시와 억압으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1919년 10월 천도교 파견으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1]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다 광복을 맞이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의 '모시기 공작'으로 납북되어, 남북 분단 상황에서 그의 월북 행적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1] 그러나 독립운동과 민족 통합을 위한 그의 노력은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1]
저널
기구한 참으로 기구한…
http://h21.hani.co.k[...]
한겨레21
2000-08-23
2. 생애
1945년 11월 3일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상해를 거쳐 김포비행장으로 귀국했으나, 미군정의 푸대접으로 개인 자격으로 환국해야 했다.[1] 해방 후 민족대통합을 바탕으로 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매진,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 부의장을 맡았고, 7월 좌우합작위원회의 우측위원으로 활동했다. 12월 과도입법의원이 구성되자 관선의원으로 뽑혀 부의장에 선출되었다.[1]
그러나 미·소 냉전 심화와 이승만 세력의 단독정부 수립 추진에 맞서, 1948년 4월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여했다.[1]
6.25 전쟁 발발 후,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과 북측 정치일꾼들은 ‘모시기 공작’을 통해 김규식 등 남북협상 참여 인사들과 출옥인사들을 북으로 데려갔다. 최동오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자 남북협상 참여, 김일성과의 인연으로 이 공작의 핵심 대상이었다.[1]
결국 ‘모시기 공작’으로 납북된 최동오는 재북평화통일촉진회의 간부로 활동하며 장관급 대우를 받다가, 1963년 9월 16일 심장마비로 별세하여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2] 대한민국에서는 납북 행적 때문에 1990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천도교 활동 (1892~1919)
1892년 6월 22일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용운리에서 독실한 천도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해주 최씨로 일명 최학원(崔學源), 호는 의산(義山)이다. 당시 의주는 동학농민혁명 실패 후 탄압이 덜해 3대 교주 의암 손병희가 선교에 역점을 둔 지역이다. 최동오는 손병희의 직접 지도를 받았다. 1903년 동학에 입도했고 천도교 중앙종학원 고등사범과와 법정과를 졸업한 후 강도사로 임명돼 의주대교구에서 활동하다 3·1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일본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됐다.[1]
2. 2.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1919~1945)
1919년 10월, 천도교의 파견으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1월에 임시정부 내무부 참사 및 국내 조사원으로 임명되었고, 1920년 3월에는 내무부 지방국장으로 승진하여 국내 천도교 세력과의 연계를 담당했다.[1] 상하이와 베이징에 천도교 종리원을 설립하여 망명한 천도교인들을 규합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으며, 이때 독립군 맹장이자 훗날 사돈이 되는 같은 천도교인 류동열과 함께 일했다.[1]
1924년에는 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서 김동삼, 현익철, 김이대, 김원식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25년 초에는 정의부 산하 화성의숙을 건립하여 숙장을 맡아 교육 사업에도 참여하였다.[1]
1929년, 정의부·신민부·참의부가 불완전하게 통합된 국민부의 외교위원장을 맡았고, 이후 조직 개편으로 독립운동사업을 전담하게 된 조선혁명당의 국제부장을 역임했다. 1931년 7월 2일, 일제가 조·중 이간책으로 조작한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자, 길림한교만보산사건토구회(吉林韓僑萬寶山事件討究會)를 조직하여 진상 조사와 중국 관민과의 교섭을 지휘했다.[1]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독립군에 대한 일제의 공격이 거세지자, 1932년 11월 관내로 이동하여 베이징과 상하이를 중심으로 류동열, 현익철, 양기탁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 이름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1935년 7월에는 김원봉, 김규식 등과 좌우합작으로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당했으나, 애초의 대동단결 노선에서 이탈하자 1937년 지청천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재건하기도 했다.[1]
이후 우파 중심의 한국독립당 상무위원 겸 비서주임, 1939년 11월 임시의정원 부의장, 1943년 임시정부 법무부장 재임명 등 1945년 8월 광복으로 귀국할 때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위원 등 다양한 직책으로 활동했다.[1]
2. 3. 해방 이후 활동과 남북 협상 (1945~1950)
1945년 11월 3일, 최동오는 김구, 김규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1진으로 상해를 거쳐 김포비행장으로 귀국하였다.[1] 그러나 미군정은 이들을 푸대접했고,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해방 후 최동오는 민족 대통합을 바탕으로 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힘썼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 부의장을 맡았고, 7월에는 좌우합작위원회의 우측 위원으로 활동했다. 12월에는 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으로 선출되어 부의장으로 활동했다.[1]
그러나 미·소 냉전이 심화되고 이승만 세력이 유엔 감시하 남한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자, 최동오는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남북협상)에 참여하여 민족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1]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 분단과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은 기정사실화되었다.
2. 4. 한국전쟁과 월북 (1950~1963)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을 점령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시기 공작'을 통해 김규식 등 남북협상에 참여한 인사들과 출옥인사들을 북으로 데려가는 작업을 서둘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자 남북협상 참여, 김일성과의 개인적인 인연도 있었던 최동오는 이 '모시기 공작'의 핵심 인물이었다.[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모시기 공작'으로 최동오는 납북되었다. 이후 납북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회의 간부로 활동하며 장관급 대우를 받았다. 1963년 9월 16일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전까지 13년을 더 살았다.[2] 최동오는 평양 서남쪽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2]
3. 가족 관계
4. 평가
참조
[2]
저널
'[3·1 운동 100주년 연중기획-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⑪] 최동오, 아들까지 북으로 간 천도교 대표'
http://www.labortoda[...]
매일노동뉴스
2019-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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