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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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루백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아버지를 죽인 호랑이를 잡아 죽이고 시신을 수습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한 효행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1124년 염덕방의 딸인 염경애와 결혼하였으며, 관직으로는 우정언 지제고, 좌사간, 시어사, 청주부사 등을 역임했다. 1153년 금나라에 사절로 다녀왔으며, 국자감좨주를 지내다 시류에 어긋나는 자들을 배척할 것을 주장하다 사직하고 은둔했다. 1205년에 사망했으며, 조선 시대에 효자로 정려되고, 효암이라는 바위가 세워지는 등 그의 효행은 여러 문헌에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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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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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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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관 | 삭녕 최씨 |
자 | 백온(伯溫) |
호 | 간이재(簡夷齋) |
출생 | 1284년 |
사망 | 1340년 (57세) |
관력 | |
주요 경력 | 사헌부 장령 전법사 총랑 밀직사 부사 |
봉작 | 삭녕군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최문적(崔文迪) |
어머니 | 계성군부인 김씨 |
배우자 | 해주 오씨 |
자녀 | 최해(崔瀣) 최윤(崔潤) |
2. 생애
최루백은 15세에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비극을 겪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호랑이를 잡아 복수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효심을 보였다.[1] 벼슬길에 오른 후에는 1145년(인종 23년)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1] 1146년(의종 즉위년) 우사간, 좌사간, 1147년(의종 1년) 시어사(侍御史) 등을 역임했다.[1] 1153년(의종 7년)에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3] 1154년 과거 시험관을 맡았다.[4]
1146년(인종 24년) 부인 염경애가 사망하고,[1] 국자감좨주 시절에는 의종에게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에서 물러나 은둔 생활을 하였다. 1205년(희종 1년) 사망했으며,[6] 조선시대에는 그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세종대왕이 그가 시묘살이하던 바위에 효암(孝巖)이라는 이름을 내리기도 했다.
2. 1. 출생과 가계
최루백은 경기도 수원에서 호장을 지낸 최상저(崔尙翥)의 아들이다. 증조부는 호장 보윤(甫尹)을 지낸 보량(輔良) 또는 보천(輔泉)이고, 할아버지 이름은 묘지명 글자가 지워져 알 수 없으며, 아버지는 최상저이다. 그의 집안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으며, 묘지명에 따르면 용성현(龍城縣) 사람이라고 한다. 용성현은 수원 남부와 평택 일대에 있던 행정구역이었다. 어머니의 성씨와 본관은 전해지지 않는다. 최루백의 출생 연도는 1104년이라는 설과 1110년이라는 설이 있다.15세 때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최루백이 호랑이를 잡아 아버지의 뼈와 살을 호랑이 배 안에서 찾아내어 개울가에 묻었다.[1] 그리고 홍법산(弘法山) 근처에 아버지의 묘를 만들고, 3년간 묘 옆에서 시묘살이를 했다. 어느 날 밤 꿈에 죽은 아버지 최상저가 나타나 다음과 같은 시를 읊고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숲을 헤치고 효자의 여막에 이르니 정이 많으매 느끼는 눈물이 다함이 없도다. 흙을 져서 날마다 무덤 위에 보태니 소리를 아는 것은 명월과 청풍뿐이로다. 살아서는 봉양하고 죽어서는 지키니 누가 효가 시종이 없다 하는가."
1124년(인종 2년), 최루백은 검교상서 우복야 대부소경(檢校尙書右僕射 大府少卿) 염덕방(廉德方)의 딸 염경애(廉瓊愛)와 결혼했다.[2] 염경애는 재상 염제신의 누이였다.
2. 2. 호환과 복수
최루백은 15세 때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호랑이를 잡아 아버지의 뼈와 살을 찾아내어 홍법산 근처에 장사 지내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1] 1124년(인종 2년), 염덕방의 딸이자 염제신의 누이인 염경애(廉瓊愛)와 결혼했다.[2] 그러나 1146년(인종 24년) 1월 28일 부인이 사망했다.[1] 최루백은 직접 부인 염경애의 묘지명을 작성하여 함께 매장했는데, 이 묘지명은 20세기에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에게 복수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한 효행은 조선 시대에 알려져 효자로 정려되고,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에 그 사실이 수록되었다. 조선 세종대왕은 최루백이 시묘살이하던 곳 옆의 바위에 효암(孝巖)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2. 3. 관직 생활
최루백은 경기도 수원 향리로 호장을 역임한 최상저(崔尙翥)의 아들이다. 그의 선계는 미상이며, 묘지명에 의하면 용성현(龍城縣) 사람이라 한다. 용성현은 수원 남부와 평택 일대에 존재하던 행정구역이었다.1124년(인종 2년)에 검교상서 우복야 대부소경(檢校尙書右僕射 大府少卿) 염덕방(廉德方)의 딸인 염경애(廉瓊愛)와 결혼했다.[2] 염경애는 재상 염제신의 누이였다.
1145년(인종 23년)에 사직(司直)에서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로 자리를 옮겼다.[1]
1146년(인종 24년) 1월 28일에 부인이 사망했다.[1] 그 뒤 간의대부로 옮겨 지제고(知制誥)를 겸하였다.
1146년(의종 즉위년) 여름에 우사간에 올랐고 12월에는 좌사간으로 옮겼다.[1]
1147년(의종 1년) 봄에 시어사(侍御史)로 옮겼다가 겨울에 예부원외랑으로 좌천되었으며, 1148년(의종 2년) 봄에 예부 낭중(禮部郎中)으로 옮겼다가 다시 청주부사(淸州副使)에 임명되었다.[1]
1153년(의종 7년)에 금나라에 사절로 가서 용흥절(龍興節)을 하례하게 하고[3], 귀국했다. 1154년 승보시의 시험관으로 과거를 주관하였다.
1155년(의종 9년)에 왕이 최자영, 양원준, 최루백 등에게 국정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4]
1158년(의종 12년)에는 국자좨주(國子祭酒) 염직량과 함께 윤돈서 등 16명을 뽑았다.[5] 이후 국자감사업 등을 거쳐 한림원학사를 역임했다. 조산대부 국자감좨주에 이르러 의종에게 시류에 어긋나는 옳지 않은 논리를 주장하는 자들을 배척할 것을 여러번 상언하였으나 의종이 듣지 않자 사직하고, 향리에 내려가 은둔하며 여생을 보냈다.
2. 4. 사망
1205년(희종 1년) 12월 1일에 사망했다.[6] 그보다 앞서 예빈주부(禮賓注簿)를 지낸 장남 최돈인, 위녹사를 역임한 차남 최돈의가 먼저 사망했다.3. 사후
광제사(廣濟寺)에 빈소가 마련되어 분향 후, 그해 12월 18일 대덕산(大德山) 기슭에 안장되었다. 이후 발견된 묘지명은 일부 글자가 마멸되어 판독이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
최루백의 호랑이 사살과 부친 시신 수습 이야기는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고려사 열전,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 소개되었다. 1432년(조선 세종 14년)에는 자헌대부 예조판서(資憲大夫 禮曹判書)로 추증되었다.
조선 숙종 때 효자비 정려가 세워졌다. 최루백의 정려비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수기리에 있다가 후에 봉담읍 분천리로 이전되었다. 1986년 5월 20일 화성시 향토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10월 23일 향토문화재(유형) 제2호로 변경되었다. 최루백 효자각 정려는 화성시 봉담읍 분천리 165-1에 있다.
4. 작품
1148년에 첫 번째 부인인 염경애를 위한 묘지명인 「염경애 묘지명」을 직접 지었다.[1]
5. 가족 관계
최루백은 부인 염경애와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두었고, 염경애가 죽은 후 유씨(柳氏)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다.[6]
- 처부: 염덕방(廉德方) - 본처 염경애의 친정아버지
- 장모: 의령군대부인 심씨(宜寧郡大夫人 沈志義, 1083 - 1162) - 본처 염경애의 친정어머니
참조
[1]
서적
고려사 열전34 최루백
[2]
논문
염경애 묘지명
[3]
서적
고려사 세가18 의종 7년(1153) 11월
[4]
서적
고려사 세가18 의종 9년(1155) 9월 2일(병오)
[5]
서적
고려사 지28 [선거2] 과목2 승보시, 1158년(의종 12년) 9월
[6]
문서
최루백 묘지명
[7]
문서
아들의 이름은 「최루백 묘지명」에 따른 표기이며, 먼저 죽은 부인 염경애의 묘지명인「염경애 묘지명」에는 각각 단인(端仁), 단의(端義), 단례(端禮), 단지(端智)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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