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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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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마야과는 온두라스의 도시로, "오래된 도시"라는 뜻의 'La Antañona'로 알려져 있으며, 온두라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렌카족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건설되어 수도 역할을 했으며, 현재까지도 식민지 시대 건축물과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 주요 명소로는 코마야과 무염시태 대성당, 산 프란시스코 교회, 카사 레알 등이 있으며, 세마나 산타와 같은 전통 문화가 유명하다. 코마야과 국제공항과 소토 카노 공군 기지가 있으며, 히스파노 FC라는 축구 클럽이 있다. 2012년에는 교도소 화재로 35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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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야과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명칭산타마리아데라누에바바야돌리드데코마야과
코마야과 시가지
코마야과 시가지
코마야과 시 깃발
코마야과 시 깃발
코마야과 문장
코마야과 문장
위치혼두라스
주변 대도시테구시갈파
산페드로술라
산살바도르
시장카를로스 미란다
건립1537년 12월 8일
면적834km2
고도594m
인구 통계
2023년 추정 인구184694명
도시 인구127018명
시간대
시간대CST
UTC 오프셋-6
기타 정보
웹사이트comayagua.hn

2. 어원

코마야과는 오늘날 온두라스인들에게 "La Antañona|오래된 도시es"로 알려져 있다. 온두라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식민지 시대의 건축적 가치를 지닌 건물들을 여전히 많이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인 중심지는 "전국에서 가장 잘 복원되고 보존된 곳"이다.

스페인인들은 이 지역을 "바야돌리드" 또는 "País de las Higueras|무화과나무의 나라es"라고 불렀지만, 이 도시는 공식적으로 원래의 토착 이름을 유지했다. 어원에 대해 이견이 있지만, 대부분은 이 이름이 ''koma'' (렌카어로 '엄청난 양의 땅'을 의미)와 ''jawa'' ('물'을 의미)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진정한 의미는 '물이 풍부한 땅'이라고 한다.

3. 역사

코마야과는 1537년 스페인 선장 알론소 데 카세레스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는 "두 대양의 중간에 도시를 형성할 명백한 상황을 찾으라"는 프란시스코 데 몬테호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 도시는 원래 "''산타 마리아 데 라 콘셉시온 데 코마야과''"라고 불렸다.[1]

1542년 스페인 펠리페 2세는 ''레알 아우디엔시아 데 로스 콘피네스''를 과테말라에 두도록 명령했지만, 1543년 인디아스 평의회는 코마야과에 본부를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비야 데 라 누에바 바야돌리드 데 코마야과''"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1]

결국, 청문회 소재지는 그라시아스 렘피라 마을로 이전되었다. 1557년 펠리페 2세는 이 도시에 도시 칭호를 부여했다. 1561년 트루히요에 있던 주교좌가 코마야과로 이전되었다. 1585년에 첫 번째 대성당이 건설되었고, 현재 대성당은 1634년에 시작되어 1715년에 완공되었다.[1]

코마야과는 식민지 시대 동안 온두라스의 수도였다.


코마야과는 식민지 시대 내내 온두라스의 수도였다. 코마야과는 온두라스 최초의 수도교 시스템을 갖춘 도시였다. 그러나 테구시갈파는 광업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17세기 중반부터 수도 지위를 놓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1768년 테구시갈파는 마을 칭호를 받았다.[1]

18세기 코마야과. 오늘날 사라진 건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1788년 코마야과는 테구시갈파를 흡수하여 하위 대표부로 만들었지만, 이는 테구시갈파의 반발을 샀다.[1] 1812년 테구시갈파에 시장실이 재설립되었으나, 코마야과는 19세기 초까지 쇠퇴하여 소수의 스페인 사람과 유럽인 가족만이 자선에 의존해 살아가는 한적한 마을이 되었다.[1]

1821년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라 메르세드 광장에 세워진 기념물.


독립 시기, 중앙 아메리카 전역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 온두라스에서는 테구시갈파에서 이러한 운동이 일어났으며, 디오니시오 데 에레라, 프란시스코 모라산 등이 주도했다.[1]

1821년 9월 21일, 중앙 아메리카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했고, 코마야과는 9월 28일 독립을 수용했다.[1]

1821년 11월 28일,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서신에 따라 중앙 아메리카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의 합병이 제안되었다. 코마야과는 합병을 지지했지만, 테구시갈파는 반대했다. 1822년 8월 22일, 중앙 아메리카는 멕시코에 합류했으나, 1823년 7월 1일 최종적인 독립을 선포했다. 코마야과는 중앙 아메리카 연합 주의 일부가 되었다.[1]

온두라스의 초대 국가 원수였던 디오니시오 데 에레라


1824년, 디오니시오 데 에레라가 온두라스 초대 국가 원수로 선출되었다. 1827년, 코마야과는 포위, 약탈당했고, 에레라는 과테말라로 끌려갔다.[1]

마르코 아우렐리오 소토는 수도를 테구시갈파로 옮긴 대통령이었다.


코마야과와 테구시갈파 사이의 경쟁은 계속되었고, 1880년 10월 30일, 마르코 아우렐리오 소토 대통령이 수도를 테구시갈파로 이전하면서 코마야과의 인구, 상업, 중요성은 감소했다. 그러나 코마야과는 온두라스 교구의 소재지로 남았다.

3. 1. 선 콜럼버스 시대

메소아메리카 고전 시대의 렌카 도기


코마야과가 위치한 계곡은 선 콜럼버스 시대에 온두라스에 아직도 생존해 있는 메소아메리카 원주민 문화인 렌카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야루멜라와 같은 고고학적 유적은 이들이 기원전 1,000년경부터 이 계곡에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평평한 지형과 아열대 기후는 이들이 번성하여 자체적인 사회와 도시를 건설하는 데 기여했으며, 경제 활동의 대부분은 카리브해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무역로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화 시대에 스페인 정복자들은 다양한 렌카 마을이 있는 풍요로운 계곡을 발견했는데, 이 마을들은 대부분 사회 계층이 잘 조직되어 있었다. 이들은 온두라스 정복 동안 잘 조직된 저항을 보여준 원주민들이었다.[1]

3. 2. 스페인 식민지 시대

알론소 데 카세레스 스페인 선장이 1537년에 코마야과를 건립했다. 이는 히부에라스(현재의 혼두라스)의 초대 총독이자 선구자인 프란시스코 데 몬테호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원래 이 도시는 "''산타 마리아 데 라 콘셉시온 데 코마야과''"라고 불렸다.[1]

1542년 11월 20일, 스페인 펠리페 2세는 ''레알 아우디엔시아 데 로스 콘피네스''가 산티아고 데 로스 카바예로스 데 과테말라에 거주하도록 명령했지만, 인디아스 평의회는 1543년 9월 13일에 콘셉시온 데 코마야과 마을에 본부를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같은 조항에서 스페인의 바야돌리드를 기리기 위해 "''비야 데 라 누에바 바야돌리드 데 코마야과''"라는 이름이 부여되었다.[1]

결국, 청문회 소재지 지정은 효력이 없어 1544년 5월 16일에 그라시아스 렘피라 마을로 이전되었다. 1557년 12월 20일, 펠리페 2세는 이 도시에 도시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당시 이 도시에는 1553년 프라이 제로니모 클레멘테가 설립한 메르세데리안 수도원과 1551년에 15000USD의 비용으로 지어진 석조 교회가 있었다. 1558년에는 첫 번째 자치 의원이 선출되었다. 1561년, 트루히요에 있던 주교좌는 더 유리한 조건, 즉 국토 중앙에 위치하고 금과 은 광산 지역에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1585년에 첫 번째 대성당이 건설되었고, 현재 있는 (무염시태) 대성당은 1634년에 시작되어 1715년에 완공되었다.[1]

코마야과는 식민지 시대 내내 온두라스의 수도로 남았다. 스페인 당국이 교회, 대학, 수도원, 집, 분수와 같은 다양한 건축물을 도시에 기증했을 때, 코마야과의 저수조와 분수 시스템은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온두라스 최초의 수도교 시스템을 갖춘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테구시갈파는 광업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17세기 중반에 그 지위를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성장하는 중요성을 인정받아 1768년에 마을이라는 칭호를 받았다.[1]

하지만 1788년에 테구시갈파의 발전은 무시되었다. "코마야과는 관할 구역이 되었고 정치적으로 테구시갈파를 흡수하여 하위 대표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명은 코마야과에서 이루어졌고, 이는 두 개의 가장 중요한 도시 사이의 기존 경쟁을 부추기며 테구시갈파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몇 년 후, 일부 분개한 테구시갈파 사람들은 이러한 결정으로 인해 이 지역의 경제가 쇠퇴했다며, "새로운 시장들이 광업 발전에 관심이 없고, 코마야과에만 이익이 되는 인디고, 설탕, 가축과 같은 농산물에 지방세를 부과했다"고 주장했다.[1]

테구시갈파 주민들이 제출한 불만 사항의 결과로, 과테말라 청문회 의 고문인 호세 세실리오 델 바예의 권고에 따라, 1812년에 시장실이 재설립되었다. 코마야과에 관할 구역이 설치된 것은 테구시갈파의 성장을 지연시켰을 뿐만 아니라 코마야과의 지속적인 쇠퇴를 막을 수 없었다. 이는 주의 수도에서 19세기 초에 소수의 스페인 사람과 약 30개의 유럽인 가족만이 있었고, 모두 자선에 의존하여 살아가야 하는 한적한 마을로 변모했다. 더욱이 이 도시는 경제 쇠퇴로 인해 건강하지 않다는 평판을 얻었다.[1]

"도시의 쇠퇴 이유는 농업과 상업의 쇠퇴였으며, 이는 종종 원주민들의 게으름 탓으로 여겨졌다. 1802년 도시의 두 교구의 총 인구는 5,369명이었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수도를 테구시갈파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수도는 식민지 시대 내내 코마야과에 남아 있었다.[1]

3. 3. 독립 이후



중앙 아메리카 전역에서 여러 친독립 운동이 일어났으며, 온두라스에서는 테구시갈파에서 이러한 운동이 일어났다. 미겔 부스타만테, 마티아스 주니가, 시몬 구티에레스, 파블로 보르하스, 안드레스 로자노, 디에고 비질, 디오니시오 데 에레라, 프란시스코 모라산 등이 친독립 운동과 관련된 인물들이다. 테구시갈파의 애국자들은 코마야과 당국에 의해 식민 정권에 반대하는 사상을 선동하려는 음모자들로 간주되었다.[1]

코마야과 당국은 친독립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이미 식민 정권은 붕괴되었다. 1821년 9월 21일, 중앙 아메리카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코마야과는 9월 28일 이른 아침에 그 문서를 받았고, 의회 구성원들과 함께 정부는 그 결정을 받아들여 독립을 수용했다.[1]

1821년 11월 28일,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 장군의 서신이 과테말라에 도착하여 중앙 아메리카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이 이괄라 계획과 코르도바 조약을 토대로 거대한 제국을 형성할 것을 제안했다. 멕시코와의 합병 문제는 각 지방 내에서 분열을 일으켰는데, 일부 도시는 이를 찬성했고 다른 도시는 반대했다.[1]

온두라스에서 코마야과는 호세 티노코 데 콘트레라스 총독을 통해 합병을 지지했지만, 테구시갈파는 이 아이디어에 반대했다. 결국, 이투르비데의 합병 제안이 승리하여 1822년 8월 22일, 중앙 아메리카는 멕시코에 합류했다. 멕시코 제국으로의 합병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이투르비데가 1823년 3월 19일에 퇴위했고, 1823년 7월 1일 중앙 아메리카는 최종적인 독립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코마야과와 온두라스는 중앙 아메리카 연합 주의 일부가 되었다.[1]

온두라스가 중앙 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일부가 된 후 코마야과는 그 수도로 남았다. 1824년, 온두라스는 디오니시오 데 에레라를 초대 국가 원수로 선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세 니콜라스 이리아스 민덴세 신부의 주도하에 공화국 대통령인 마누엘 호세 아르세 장군의 지원을 받은 반동이 일어났다. 아르세는 에레라를 자신의 계획 발전에 심각한 장애물로 여겼다.[1]

아르세 대통령은 연방에 속한 담배를 산타 로사에 보관한다는 구실로 자신의 연방군을 후스토 미야 대령의 지휘 아래 보냈고, 그 목적은 디오니시오 데 에레라를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1827년 4월 4일, 미야의 군대는 코마야과에 도달하여 포위했다. 코마야과는 상당 부분 불에 타고 약탈당했다. 방어군 지휘관인 스페인 출신 안토니오 페르난데스 대령이 에레라를 배신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고, 5월 9일에 항복 협정을 맺은 미야 대령과 내통하지 않았다면 승리했을 것이다.[1]

에레라는 과테말라로 끌려갔으나 독단적인 행위로 기소되지 않았다. 후스토 미야는 잠시 온두라스 지방의 지휘를 맡았으나, 1827년 11월 11일에 라 트리니다드 전투에서 프란시스코 모라산 장군의 군대에 패했다. 이후 모라산은 코마야과로 진군하여 미겔 에우세비오 부스타만테에게서 온두라스 주를 접수했다. 1828년 6월, 모라산은 디에고 비질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1]

3. 4. 수도 이전



급진적인 코마야과와 자유주의적인 테구시갈파 사이의 경쟁은 독립 시기와 1825년 첫 헌법이 발효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당시 수도를 매년 교체하자는 아이디어가 세드로스 광산에서 정치적 접근 방식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는 의도로만 남았다.

1849년 6월, 돈 펠리페 야우레기가 의장을 맡은 제헌 의회에서 후안 린도 박사가 온두라스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수도를 테구시갈파로 이전하는 법령을 발표했지만, 법적 모순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고 코마야과는 계속해서 국가 권력의 소재지였다.

18세기 동안 테구시갈파는 코마야과의 이점을 활용했다. "현재 온두라스 국립 자치 대학교의 기원인 문학 아카데미"와 같은 중요한 기관의 여러 건물이 그곳에 세워졌다. 1880년 10월 30일, 마르코 아우렐리오 소토 대통령은 "경제적 또는 사회적 이유로 코마야과에서 테구시갈파로 온두라스의 수도를 이전하기로 결정했고, 마르코 아우렐리오 소토 마르티네스 박사는 짐을 챙겨 고향으로 이사하여 두 도시 간의 적대감을 종식시켰다."

수도가 테구시갈파로 이전된 후, 코마야과의 인구, 상업, 중요성은 현저하게 감소했다. 19세기 초, 좁고 불규칙한 거리는 제대로 포장되지 않았다. 또한 공공 건물 상태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 도시는 계속해서 온두라스 교구의 소재지였다.

4. 지리

코마야과 시가 위치한 계곡은 산악 지형으로 둘러싸여 있다. 몬테시요스 산맥은 라파스 주 서쪽에 위치해 있다. 코마야과 산맥은 주의 동쪽에 있으며, 에스키아스 산맥과 연결되어 미나스 데 오로까지 뻗어 있다. 남쪽에는 레파테리케, 물라과, 포토테리케 산맥의 지류가 있다.

4. 1. 기후

코마야과는 쾨펜 기후 구분에 따르면 열대 몬순 기후( ''Am'')를 보이며 열대 사바나 기후( ''Aw'')와 경계를 이룬다.[5]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연간
최고 기온 기록 (°C)36°C36.1°C37.2°C38.4°C36.7°C34.6°C34.5°C35.1°C33.3°C35.6°C35.3°C35°C38.8°C
평균 최고 기온 (°C)30.8°C32.9°C34.9°C34.9°C34.7°C32.1°C30°C30°C29°C29.5°C29.9°C30.2°C30.8°C
일 평균 기온 (°C)22.8°C23.6°C24.2°C25°C24.6°C23.9°C23.5°C23.5°C23.3°C22.3°C22°C22.8°C22.1°C
평균 최저 기온 (°C)15.9°C14.6°C18.4°C19.8°C20.4°C19°C19.5°C19.7°C19.6°C19.3°C14.4°C14.2°C17.1°C
최저 기온 기록 (°C)8.9°C11°C13°C12°C12°C15.5°C13.5°C12.2°C15°C12.5°C10.1°C12°C
강수량 (mm)23mm20mm14mm55mm106mm120mm150mm250mm256mm108mm79mm39mm
평균 강수일수 (≥ 0.1mm)111513202020201642
평균 상대 습도 (%)55565660676882838683767270


5. 주요 명소

산 프란시스코 교회. 1560년 도시의 프란치스코 수도원 부지로 건설되었으며, 오늘날 온두라스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이다.


광장 바로 앞에는 여러 차례 재건축된 시청이 있다. 이 건물은 19세기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코마야과의 무염시태 대성당은 온두라스 식민지 시대에 건설되었으며, 1711년 12월 8일에 봉헌되었다. 이 대성당에는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시계가 있는데, 이는 스페인을 점령한 아랍인들이 1100년경에 제작한 것이다. 이 시계는 식민지 시대에 카를로스 3세 국왕의 선물로 옮겨졌다.

코마야과 고고학 박물관. 이 건물은 누에바 에스파냐의 스페인계 크리오요 가옥의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또 다른 명소는 산 프란시스코 광장으로, 공원과 식민지 시대의 교회가 있으며, 중앙 광장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교회는 안토니나 종을 소유하고 있는데, 1460년 스페인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주조된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다. 도시의 가옥들은 18세기의 스페인 식민지 건축 양식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으며, 그중 많은 수가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가장 중요한 예로는 식민지 종교 미술 박물관, 선사 시대 렌카족의 유물을 소장한 고고학 박물관, 공화국 박물관이 있다. 구시가지의 또 다른 광장은 라 메르세드 광장으로, 오벨리스크로 알려진 기념물이 있고 그 앞에는 이글레시아 데 라 메르세드가 있는데, 이곳은 현재의 대성당이 1711년에 완공되기 전 도시의 첫 번째 대성당이었다.

Caxa Real, 옛 스페인 창고.


카사 레알은 1739년에서 1741년 사이에 스페인 건축가 바르톨로메 데 마라디아가에 의해 건설된 식민지 가옥이다. 이곳은 스페인 왕관에 대한 조공이 보관되는 중심지로 개발되었으며, 온두라스의 광산에서 추출한 금, 은, 석고를 가공하여 나중에 유럽으로 운송했다. 건물 1층에는 중앙 아메리카 건축에서 흔히 사용되지 않았던 몇 가지 요소가 도입되었다. 그것은 순전히 공식적인 구역, 법정, 회계 사무소, 재무부, 아소게스 룸 사이에서 매우 좋은 차이를 만든다. 다섯 번째 은 조각; 이 구역은 기병들이 타고 있던 큰 홀을 통해 들어갔으며, 이 홀은 치키토 강이 마요르 광장으로 솟아오르는 거리에 있었다. 1774년에는 구조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지진이 발생했지만, 몇 달 안에 수리되었지만 건물은 더 약해졌다. 1809년 또 다른 지진으로 건물이 손상되었다.

2013년에 재건되었으며 현재는 스페인의 레티시아 여왕, 멕시코 전 대통령 엔리케 페냐 니에토와 같은 중요한 국제 정치 인사가 온두라스를 방문했을 때 행사를 주최하는 행사 센터이다. 산 프란시스코 광장은 대성당에서 몇 미터 떨어진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장소로, 16세기 중반 프라이 알론소 데 라 세르다 주교에 의해 지어진 온두라스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이며, 코마야과에서 두 번째로 지어진 교회로, 도시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교회이다. 교회에는 5개의 종이 있는데, 모두 스페인에서 수입한 것이다.

6. 문화유산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주교 궁전은 산 아구스틴 대학교로도 알려져 있었다.


코마야과는 거대한 건축, 문화, 예술 유산을 가지고 있다. 16세기 중반에 지어진 건물 중 일부는 중앙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온두라스의 도시들은 스페인 전통을 처음 도입된 방식 그대로 여전히 실천하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이다.

6. 1. 건축

건축물건설 연도
라 메르세드 교회1550년
산 프란시스코 교회1560년
산 세바스티안 교회1580년
라 카리다드 교회16세기
코마야과 고고학 박물관16세기 후반
잉마쿨라다 콘셉시온 대성당1634년
종교 미술 박물관/성 아구스틴 대학1678년
파세오 라 알라메다(레스토랑으로 개조된 오래된 크리오요 주택)
카바냐스 하우스 박물관18세기
산토스 과르디올라 하우스 박물관18세기
카사 레알1739년
카디스 헌법 기념비1812년
정부 궁전1880년


6. 2. 문화

성주간은 아마도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휴일일 것이다.


'''세마나 산타'''(성주간)는 코마야과에서 기념되는 유명한 로마 가톨릭교 축일이며, 16세기에 도입된 스페인 방식 그대로 현재까지 행해지고 있다. 매년 성주간마다 사람들은 예수의 삶의 한 부분과 성모 마리아, 성령과 같은 다른 성경적 인물들을 묘사한 톱밥으로 만든 유명한 "'''알폰브라스 데 아세린'''"(alfombras de aserrín) 또는 색색의 카펫을 만든다. 또한 사도 유다와 같은 많은 가톨릭 성인들도 카펫에 묘사된다. 이 전통은 스페인 남부에서 유래되었으며 식민지 시대에 과테말라온두라스에서 주로 행해졌다. 온두라스의 '''세마나 산타'''는 토착민들에게 가르쳐진 오래된 스페인 가톨릭 전통과 놀라운 유사성 때문에 세비야와 같은 도시의 안달루시아 스페인에서 기념되는 행사와 비교되어 왔다.

코마야과의 다른 유명한 전통으로는 토착 요소와 스페인 요소가 혼합된 '''엘 바일 데 로스 디아블리토'''(el baile de los diablito, 작은 악마의 춤)가 있는데, 춤을 추는 사람들은 동물, 사람 또는 신화 속의 생물과 같은 것을 나타내는 다채로운 옷과 가면을 착용한다. 이 전통은 토착민들이 종교 의식을 가톨릭 의식과 혼합했던 17세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6. 3. 예술

코마야과에는 다양한 시대의 예술 작품들이 있다.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선 콜럼비아 시대의 렌카 예술 도자기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시대의 예술 작품들이 있으며, 일부는 16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염시태 대성당의 제단화는 17세기에 하엔 (스페인)에서 제작되었다.

이는 온두라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지며, 도시의 다른 많은 교회에 있는 제단화와 그림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예술 작품은 현재 종교 미술관과 같은 도시의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다른 예술 작품으로는 전국 각지의 다양한 온두라스인들의 미술 작품을 보여주는 고고학 박물관의 국내 화가들의 전시가 있다.

종교 미술관

7. 교통

코마야과 국제공항은 테구시갈파톤콘틴 국제공항보다 더 큰 수용 능력을 갖춘, 온두라스에서 가장 중요한 공항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 새로운 공항은 코마야과뿐만 아니라 톤콘틴의 성장 제약으로 인해 테구시갈파 주민들에게도 서비스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6][7] 소토 카노 공군 기지(구 팔메롤라 공군 기지)는 코마야과에서 10km 떨어진 곳에 있는 온두라스 군사 시설로, 온두라스 공군 사관학교와 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7. 1. 코마야과 국제공항

코마야과 국제공항은 테구시갈파톤콘틴 국제공항보다 더 큰 수용 능력을 갖춘, 온두라스에서 가장 중요한 공항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 새로운 공항은 코마야과뿐만 아니라 톤콘틴의 성장 제약으로 인해 테구시갈파 주민들에게도 서비스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6][7] 2021년 10월부터 톤콘틴의 부분적인 폐쇄가 있을 경우, 특히 수도의 주요 공항이 될 수 있다.[7]

새로운 공항은 20대의 항공기를 수용할 수 있으며, 터미널은 테구시갈파의 톤콘틴보다 약 4배 큰 39000m2 이상으로 건설될 것이다. 이 공항은 또한 산 페드로 수라의 라몬 비예다 모랄레스 국제공항과 라 세이바의 골로손 국제공항에 이어 온두라스에서 세 번째로 긴 활주로를 갖게 될 것이다.[8]

7. 2. 소토 카노 공군 기지

소토 카노 공군 기지(구 팔메롤라 공군 기지)는 코마야과에서 10km 떨어진 곳에 있는 온두라스 군사 시설이다. 폭 3km, 길이 10km인 이 공군 기지에는 온두라스 공군 사관학교가 있다. 미국은 소토 카노 공군 기지에 약 550명의 미군과 650명 이상의 미국 및 온두라스 민간인으로 구성된 브라보 합동 임무 부대(Joint Task Force Bravo)를 주둔시키고 있다. 이 공항은 코마야과 국제공항으로 민간인에게도 개방되어 있다.

8. 스포츠

카를로스 미란다 축구 경기장


코마야과는 온두라스 전국 축구 리그의 클럽 히스파노의 본거지이다. 이 클럽은 2004-05년에 처음으로 전국 리그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축구 리그에서 단 한 시즌 만에 다시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사진은 촐루테카의 클럽 무니시팔-발렌시아로부터 1부 리그 프랜차이즈를 인수했다. 클럽은 현재 약 10,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시립 경기장 '카를로스 미란다'에서 홈 경기를 치른다.

코마야과는 2012년 9월에 최초의 국제 기독교 운동선수 교류회 모토크로스 캠프를 개최했다. 미국 프로 선수인 지미 포볼니, 숀 클락, 라이언 메융을 비롯한 60명의 남녀가 캠프에 참여했다. 이 캠프 후에는 콜모토스 엔듀로가 후원하는 경기가 열렸고, 전년도에 트랙에서 목숨을 잃은 미국 선수 딜런 퍼스트를 기렸다. 현재 이 행사는 코마야과에서 매년 열리며 미국 출신 강사와 온두라스 지도자들이 참여한다.

9. 사건/사고

2012년 2월 14일 밤, 코마야과 시내 교도소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로 정원의 약 2배인 852명의 수용자 중 355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는 교도소에서 발생한 화재로는 세계 최악의 사건이다.[1]

참조

[1] 웹사이트 Programa Comayagua Colonial 1996–2006 http://www.aecid.es/[...] 1996–2006
[2] 웹사이트 Population of departments and municipalities in Honduras https://www.citypopu[...]
[3] 웹사이트 Population of the major cities in Honduras https://www.citypopu[...]
[4] 블로그 Oldest Clock in the Americas to Ring In New Year http://hondurascultu[...]
[5] 웹사이트 Santa Rosa C. Climate Normals 1961–1990 https://es.climate-d[...] Climatedata.org 2022-03-21
[6] 웹사이트 Aceleran construcción para que Palmerola tome vuelo https://www.elherald[...] 2021-11-06
[7] 웹사이트 Gráfico: Palmerola será el segundo aeropuerto más lejano de su capital en América Latina https://www.elherald[...] 2021-11-06
[8] 웹사이트 Plataforma de Aeropuerto de Palmerola tendrá capacidad para 20 aviones https://www.elherald[...] 2021-11-06
[9] 뉴스 ホンジュラス刑務所火災、死者355人に。遺族から怒りの声 https://www.afpbb.co[...] AFP.BB.News 201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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