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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나크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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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나크사 전투는 기원전 401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키루스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키루스는 그리스 용병을 고용하여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 심장부를 향해 진격했으며, 양군은 바빌론 북쪽의 쿠낙사에서 대치했다. 전투는 키루스 군의 그리스 용병 부대의 돌격으로 시작되었지만, 키루스가 전사하면서 그의 군대는 퇴각했다. 이후 그리스 용병대는 고립되었으나, 페르시아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흑해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 과정은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에 기록되었다. 쿠낙사 전투는 페르시아의 군사적 취약점을 드러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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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나크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쿠나크사 전투
관련 캠페인해당 없음
전투 그림
장 아드리앵 기네의 쿠나크사 전투에서의 만 명의 귀환 그림
시기기원전 401년 9월 3일
장소아케메네스 제국 유프라테스 강변 (현재의 이라크 바그다드 근처)
결과전술적 무승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전략적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소(小) 키루스 지지 세력
교전국 2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지지 세력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소(小) 키루스
클레아르코스
케리소푸스
아리아에우스
지휘관 2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고브리아스
티사페르네스
오론테스
병력 규모
병력 110,400명의 용병 중장보병
700명의 스파르타 중장보병
2,500명의 그리스 경장보병
페르시아 보병 (수 불명)
1,600명의 기병
20대의 낫 전차
병력 240,000명
보병 수 불명 (키루스 군대보다 많음)
6,000명의 기병
200대의 낫 전차
사상자 규모
사상자 1미미함
사상자 2알려지지 않음

2. 배경

기원전 401년, 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아닌 자신이야말로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키루스는 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그리스인 용병을 고용하고, 자신의 군대와 합쳐 페르시아의 심장부를 향해 사르디스를 출발했다. 한편 아르타크세르크세스도 군대를 동원하여 요격하러 나섰다. 그리고 양군은 바빌론 북쪽 70km에 위치한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는 쿠낙사에서 대치했다. 참고로, 『아나바시스』에는 양 군의 병력에 대한 묘사가 있지만, 명백히 과장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군대는 90만 명 이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키루스는 스파르타인 장군 클레아르쿠스 휘하의 10,400명의 호플리테스(그리스의 중장보병)와 2,500명의 페르타시스(그리스의 경장보병)로 이루어진 그리스 용병 부대를 모집했다.[3] 그는 또한 그의 부사령관 아리아에우스 휘하에 징집된 대규모 아시아 군대를 편성하였다.[3] 아케메네스 왕조 군대의 규모는 4만 명이었다.[3]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초상화.


키루스는 그의 형인 대왕(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이 군대를 이끌고 접근한다는 것을 알고 전투 대형으로 군대를 배치했다. 그는 그리스 용병을 강 근처 오른쪽에 배치했다. 이 외에도 당시 전투 대형의 전통에 따라 1,000명의 기병대가 그들의 오른쪽에 배치되어 지원했다. 그리스인들에게 이곳은 명예로운 자리였다. 키루스 자신은 600명의 근위병과 함께 그리스 용병의 왼쪽에 위치한 중앙에 있었다. 페르시아 군주가 전통적으로 전투 대형에서 자신을 배치하는 곳이었다. 키루스의 아시아 군대는 좌익에 있었다.[4]

반대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그의 좌익을 강에 배치했으며, 기병대 부대가 또한 이를 지원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그의 대열 중앙에 있었고, 6,000개의 페르시아 기병대 부대가 키루스의 왼쪽에 있었으며, 그의 대열이 훨씬 더 길었다.[5]

키루스는 오른쪽에 주둔한 팔랑크스를 지휘하던 그리스 지도자 클레아르쿠스에게 중앙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클레아르쿠스는 이를 꺼려했고, 크세노폰에 따르면 키루스에게 "모든 것이 잘 되도록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5] 클레아르쿠스가 이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은 키루스가 그의 군대에 대한 통제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이다.[5]

최종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크세노폰은 키루스에게 접근하여 모든 적절한 명령과 배치가 이루어졌는지 확인했다. 키루스는 그들이 그랬고, 전투 전에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희생이 성공을 약속한다고 말했다.[5]

2. 1. 키루스의 반란 준비

키루스는 스파르타인 장군 클레아르쿠스 휘하의 10,400명의 호플리테스(그리스의 중장보병)와 2,500명의 페르타시스(그리스의 경장보병)로 이루어진 그리스 용병 부대를 모집했다.[3] 그는 또한 그의 부사령관 아리아에우스 휘하에 징집된 대규모 아시아 군대를 편성하였다.[3] 아케메네스 왕조 군대의 규모는 4만 명이었다.[3]

키루스는 그의 형인 대왕(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이 군대를 이끌고 접근한다는 것을 알고 전투 대형으로 군대를 배치했다. 그는 그리스 용병을 강 근처 오른쪽에 배치했다. 이 외에도 당시 전투 대형의 전통에 따라 1,000명의 기병대가 그들의 오른쪽에 배치되어 지원했다. 그리스인들에게 이곳은 명예로운 자리였다. 키루스 자신은 600명의 근위병과 함께 그리스 용병의 왼쪽에 위치한 중앙에 있었다. 페르시아 군주가 전통적으로 전투 대형에서 자신을 배치하는 곳이었다. 키루스의 아시아 군대는 좌익에 있었다.[4]

반대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그의 좌익을 강에 배치했으며, 기병대 부대가 또한 이를 지원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그의 대열 중앙에 있었고, 6,000개의 페르시아 기병대 부대가 키루스의 왼쪽에 있었으며, 그의 대열이 훨씬 더 길었다.[5]

키루스는 오른쪽에 주둔한 팔랑크스를 지휘하던 그리스 지도자 클레아르쿠스에게 중앙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클레아르쿠스는 이를 꺼려했고, 크세노폰에 따르면 키루스에게 "모든 것이 잘 되도록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5] 클레아르쿠스가 이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은 키루스가 그의 군대에 대한 통제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이다.[5]

최종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크세노폰은 키루스에게 접근하여 모든 적절한 명령과 배치가 이루어졌는지 확인했다. 키루스는 그들이 그랬고, 전투 전에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희생이 성공을 약속한다고 말했다.[5]

2. 2.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대응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키루스가 군대를 이끌고 접근한다는 것을 알고, 이에 맞서 전투 대형으로 군대를 배치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자신의 좌익을 강가에 배치하고 기병대의 지원을 받도록 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대열 중앙에 위치했으며, 6,000명 규모의 페르시아 기병대가 키루스의 좌측에 위치하여, 그의 대열이 더 길게 늘어섰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대열은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기에 키루스의 대열과 상당 부분 겹쳐졌다.[5] 아케메네스 왕조 군대의 규모는 4만 명이었다.[3]

키루스는 스파르타인 장군 클레아르코스 휘하의 그리스 용병대를 강 근처 오른쪽에 배치했다. 키루스는 그리스 용병의 왼쪽에 위치한 중앙에 600명의 근위병과 함께 자리잡았다. 키루스의 아시아 군대는 좌익에 있었다.[4]

전투가 시작되기 전, 쿠낙사에서의 사건을 기록한 크세노폰은 키루스에게 접근하여 모든 명령과 배치가 적절하게 이루어졌는지 확인했다. 키루스는 희생 의식이 성공을 약속한다고 말했다.[5]

3. 전투

전투는 키루스 군 우익의 그리스 용병 부대의 돌격으로 시작되었다. 그리스 용병 부대는 전면의 페르시아 왕군 좌익을 압도하고, 이를 추격했다. 이어서 다른 부대도 교전했고, 키루스도 휘하의 기병 600기를 이끌고 검극에 몸을 던져 스스로 싸웠다. 처음에는 키루스가 적을 압도했지만, 적을 추격하다가 부대가 분산되어 키루스 주변이 허술해졌다. 그 때문에 그는 적의 창을 맞고 전사했다. 이렇게 지휘관을 잃은 키루스 군은 퇴각으로 전환했다.

그리스인들은 키루스의 우익에 배치되어 수적으로 불리했으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좌익에 대해 돌격하였고, 그들은 그리스군이 화살 사정거리에 도달하기 전까지 도망쳤다.[5][6] 그러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와 키루스 사이에 벌어진 페르시아군 우익에서의 싸움은 어렵고 더 까다롭게 시간을 끄는 싸움이 되고 있었다. 키루스는 그의 형의 경호부대에 직접 돌격을 감행했다가 투창에 맞아 사망하였고,[5][6] 이는 그의 부대를 퇴각으로 몰아넣었다. 오직 키루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그 자리를 지킨 중무장한 그리스 용병대만이 견고하게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클레아르코스는 많은 수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군 우익과 싸우면서 진군하였고, 그들을 물러나게 하였다. 그러는 동안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군대는 그리스군 진영을 점령하고 그들의 식량 보급을 차단하였다.[5][6]

3. 1. 양측 군대 배치

키루스는 그리스 용병을 강 근처 오른쪽에 배치했다. 1,000명의 기병대가 그들의 오른쪽에 배치되어 지원했다.[4] 키루스는 600명의 근위병과 함께 중앙에 위치했으며, 그의 아시아 군대는 좌익에 있었다.[4]

반대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그의 좌익을 강에 배치했으며, 기병대 부대가 이를 지원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대열 중앙에 있었고, 6,000개의 페르시아 기병대 부대가 키루스의 왼쪽에 있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대열은 훨씬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키루스의 대열과 상당히 겹쳤다.[5]

키루스는 오른쪽에 주둔한 팔랑크스를 지휘하던 그리스 지도자 클레아르쿠스에게 중앙으로 이동하여 아르타크세르크세스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클레아르쿠스는 이를 거부했다.[5]

3. 2. 전투 경과

그리스 용병대는 키루스의 우익에 배치되어 수적으로 불리했으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좌익에 대해 돌격하였고, 그들은 그리스군이 화살 사정거리에 도달하기 전까지 도망쳤다.[5][6] 그러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와 키루스 사이에 벌어진 페르시아군 우익에서의 싸움은 어렵고 더 까다롭게 시간을 끄는 싸움이 되고 있었다. 키루스는 그의 형의 경호부대에 직접 돌격을 감행했다가 투창에 맞아 사망하였고,[5][6] 이는 그의 부대를 퇴각으로 몰아넣었다. 오직 키루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그 자리를 지킨 중무장한 그리스 용병대만이 견고하게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클레아르코스는 많은 수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군 우익과 싸우면서 진군하였고, 그들을 물러나게 하였다. 그러는 동안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군대는 그리스군 진영을 점령하고 그들의 식량 보급을 차단하였다.[5][6]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크세노폰에 따르면, 그리스 중장갑 부대는 그들의 적들을 두 번이나 궤주시켰다고 한다. 이 와중에 오직 한 명의 그리스인만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바로 전투가 끝난 후에야 그리스군은 키루스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들의 승리가 무의미해졌으며, 원정은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식량도, 고용자도, 믿을 만한 친구도 없이 광대한 제국의 중심부에 버려졌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동맹자 아리아에우스(Ariaeus)를 왕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고귀한 혈통이 아니기 때문에 페르시아 인들로부터 성공을 위한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을 근거로 그리스인들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리스 용병단은 페르시아의 태수인 티사페르네스에게 자신들을 고용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는 그들을 거절하였고, 그리스 용병대 역시 그에게 항복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티사페르네스는 커다란 문제를 남겨 놓았다. 그것은 바로 처음의 돌격으로 패하지 않은 많은 중무장 군대를 남겨놓은 것이다. 그는 그리스 인들에게 식량을 지원하였고, 어느 정도 기다린 후에 그리스 용병대를 그들의 고향이 있는 북쪽으로 이끌었다. 그러는 동안 티사페르네스는 아리아에우스와 그의 우익 경무장 부대를 그들 나름의 이유로 그리스 용병대와 떼어놓았다.

그리스의 사령관들은 어리석게도 축연을 위한 티사페르네스의 초대를 수락하였다. 그들은 포로가 되어 왕에게 보내졌고, 그곳에서 목이 베어졌다.

사트라프 티사페르네스는 그리스 장군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체포하고 처형했다.


그리스인들은 새로운 사령관들을 뽑고 쿠르디스탄과 아르메니아를 통해 흑해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들, 1만인의 행군의 최종적인 승리는 크세노폰의 저작 《아나바시스》에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세계에 페르시아가 나약하다는 생각을 빠르게 알렸으며, 결과적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에 부분적으로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4. 1. 그리스 용병대의 귀환 (만 명의 행군)

그리스의 군인이자 작가 크세노폰에 따르면, 그리스의 중무장 부대가 그들의 적들을 두번이나 궤주시켰다고 한다. 이 와중에 오직 한명의 그리스인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전투가 끝난 후에야 그리스군은 키루스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들의 승리가 무의미해 졌으며, 원정은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식량도, 고용자도, 믿을 만한 친구도 없이 광대한 제국의 중심부에 버려졌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동맹자 아리아에우스(Ariaeus)를 왕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고귀한 혈통이 아니기 때문에 페르시아 인들로부터 성공을 위한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을 근거로 그리스인들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리스 용병단은 티사페르네스에게 자신들을 고용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는 그들을 거절하였고, 그리스 용병대 역시 그에게 항복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티사페르네스는 커다란 문제를 남겨 놓았다. 그것은 바로 처음의 돌격으로 패하지 않은 많은 중무장 군대를 남겨놓은 것이다. 그는 그리스 인들에게 식량을 지원하였고, 어느 정도 기다린 후에 그리스 용병대를 그들의 고향이 있는 북쪽으로 이끌었다. 그러는 동안 티사페르네스는 아리아에우스와 그의 우익 경무장 부대를 그들 나름의 이유로 그리스 용병대와 떼어놓았다.

그리스의 사령관들은 어리석게도 축연을 위한 티사페르네스의 초대를 수락하였다. 그들은 포로가 되어 왕에게 보내졌고, 그곳에서 목이 베어졌다.

그리스인들은 새로운 사령관들을 뽑고 쿠르디스탄과 아르메니아를 통해 흑해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들, 1만인의 행군의 최종적인 승리는 크세노폰의 저작 《아나바시스》에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세계에 페르시아가 나약하다는 생각을 빠르게 알렸으며, 결과적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에 부분적으로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4. 2. 장기적 영향

쿠낙사 전투는 페르시아 제국의 군사적 취약점을 드러냈다. 그리스 중장갑 보병은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을 압도했으며, 단 한 명의 그리스인만이 부상을 입었다. 이는 그리스인들에게 페르시아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비록 키루스가 전투에서 사망하여 원정 자체는 실패했지만, 그리스 용병대는 페르시아 제국 중심부에서 고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티사페르네스의 계략과 배신을 이겨내고 코르두에네와 아르메니아를 거쳐 흑해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크세노폰은 그의 저서 《아나바시스》에 이 "만 명"의 귀환 과정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세계에 페르시아 제국이 취약하다는 인식을 빠르게 확산시켰고,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에 부분적인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평가된다.

5. 기타

5. 1. 크테시아스의 기록

카리아 출신의 크테시아스는 쿠낙사 전투에서 아케메네스 제국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왕의 측근으로, 왕의 부상을 치료하는 의료 지원을 제공했다.[7] 그는 전투 후 그리스인들과의 협상에 참여했으며, 처형되기 전 스파르타 장군 클레아르쿠스를 돕기도 했다고 한다.[8] 크테시아스는 강에 관한 논문, 페르시아의 수입에 관한 논문, 《인디카/Ἰνδικάgrc》라는 제목의 인도에 대한 기록, 그리고 헤로도토스에 반하여 이오니아 방언으로 쓰여졌으며, 페르시아 왕립 기록 보관소에 기초했다고 주장하는 23권의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역사인 《페르시카/Περσικάgrc》를 저술했다.

5. 2. 대중 문화

쿠낙사 전투는 다양한 대중 문화에서 다뤄졌다. 1979년 영화 《워리어스》의 시작 부분에서 언급된다. 발레리오 마시모 만프레디의 소설 《잃어버린 군대》(The Lost Army, 2007)에 주로 등장하며, 콘 이글던의 소설 《스파르타의 매》(The Falcon of Sparta, 2018)의 기반이 된다.

참조

[1] 서적 Xenophon's Anabasis Books I–IV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2] 웹사이트 Anabasis http://perseus.uchic[...] 2020-11-11
[3] 웹사이트 Welcome to Encyclopaedia Iranica http://www.iranicaon[...]
[4] 서적 Alexander: A History of the Origin and Growth of the Art of War from Earliest Times to the Battle of Ipsus, B. C. 301 https://books.google[...] Houghton, Mifflin & Comp.
[5] 서적 Alexander: A History of the Origin and Growth of the Art of War from Earliest Times to the Battle of Ipsus, B. C. 301 https://books.google[...] Houghton, Mifflin & Comp.
[6] 서적 Darius in the Shadow of Alexander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7] 서적 The Greek World in the 4th and 3rd Centuries BC: Electrum vol. 19 https://books.google[...] Wydawnictwo UJ 2014
[8] 서적 The Greek World in the 4th and 3rd Centuries BC: Electrum vol. 19 https://books.google[...] Wydawnictwo UJ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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