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칼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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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칼레 전투는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 전쟁의 일환으로 벌어진 전투이다.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 대한 보복으로 시작된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과정에서, 테르모필레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 이후 페르시아군이 아테네를 점령한 상황에서 벌어졌다. 미칼레 전투에서 그리스는 승리하여 이오니아에서 페르시아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그리스 본토에 대한 페르시아의 위협을 종식시켰다. 이 전투는 플라타이아 전투와 함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균형을 그리스 쪽으로 기울게 했으며, 이오니아의 재건과 델로스 동맹 결성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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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이아이 전투는 기원전 479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로,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군을 격파하여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을 종식시킨 사건이다.
| 미칼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개요 | |
| 전투 명칭 | 미칼레 전투 |
| 전쟁 |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및 그리스의 반격 |
| 날짜 | 기원전 479년 8월 27일 |
| 장소 | 이오니아 미칼레 (현재의 아이딘, 튀르키예) |
| 결과 | 그리스의 승리 |
| 영향 | 페르시아, 에게해 제도 상실, 이오니아, 페르시아 통치에 대한 2차 반란 시작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그리스 도시 국가 |
| 교전국 2 | 아케메네스 제국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그리스 연합군 | 레오티키데스 크산티포스 페릴라오스 |
| 아케메네스 제국군 | 아르타인테스http://www.ancientlibrary.com/smith-bio/0382.html 마시스테스 이타미트레스 마르돈테스 티그라네스 |
| 병력 규모 | |
| 그리스 연합군 | 40,000명, 군함 110-250척 |
| 아케메네스 제국군 | 60,000명, 군함 300척 |
| 피해 규모 | |
| 그리스 연합군 | 상당한 피해 발생헤로도토스에 따르면 |
| 아케메네스 제국군 | 대부분의 군대와 모든 함선 파괴 |
| 추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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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기원전 499년부터 기원전 494년까지 아테나와 에레트리아는 페르시아 제국을 상대로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했지만 실패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비교적 젊었고, 속국 백성들 사이에서 반감이 컸다.[83][84] 다리우스 1세는 왕위를 강탈했고, 통치 기간의 상당 부분을 반란 진압에 사용했다.[83] 이오니아 반란은 제국의 통합을 위협했고, 다리우스는 관련자들을 응징하고자 했다.[85][83] 다리우스는 이 상황을 고대 그리스 세계로 제국을 확장할 기회로 보았다.[86]
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원정 선발대가 그리스로 접근할 수 있는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출정하여, 트라키아를 재점령하고 마케도니아를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삼았다.[87] 기원전 490년에는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가 이끄는 기동부대가 파병되어 낙소스섬과 에레트리아를 약탈하고 아테네로 진격했다.[88] 그러나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가 승리하면서 페르시아 군대는 아시아로 철수했다.
다리우스는 그리스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새로운 병력을 모병했지만, 침공을 시작하기 전에 사망했다.[89] 왕위는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넘어갔고, 그는 그리스 침공 준비를 재개했다. 여기에는 헬레스폰투스를 가로지르는 2개의 부교 건설도 포함되었다.[90] 기원전 481년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에 특사를 보내 항복의 표시로 ‘흙과 물’을 요구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의도적으로 제외했다.[91] 두 도시 국가는 상호 협력을 시작했고, 기원전 481년 가을 코린토스에서 만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연합체인 동맹을 결성했다.[92] 이는 각자 독립적으로 항전하던 그리스 세계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93]
그리스 연합군은 처음에는 그리스 남부에서 접근하는 해로와 육로를 봉쇄하는 전략을 채택했다.[94] 기원전 480년 8월, 크세르크세스가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1세가 이끄는 소규모 연합군이 테르모필레를 봉쇄하고, 아테네 중심의 해군이 아르테미시온 해협으로 나아갔다. 그리스 연합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 군대를 맞아 6일을 견뎠지만, 우회 산악로로 측면 공격을 당했다. 대부분의 그리스 연합군이 후퇴했지만, 스파르타와 테스피아이 분견대로 구성된 후위병들은 포위되어 전멸당했다.[95] 아르테미시온 해전도 교착 상태로 끝났다.[96] 테르모필레 전황을 입수하자, 그들도 아르테미시온 해협을 봉쇄하는 것이 실익이 없었기 때문에 퇴각했다.[97]
테르모필레 이후, 페르시아군은 항복하지 않은 보이오티아 도시인 플라타이아이와 테스피아이를 불태우고 약탈한 후, 아테네를 점령했다. 한편, 동맹군은 코린트 지협을 방어할 준비를 했다.[19] 크세르크세스는 동맹군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 그리스 정복을 마무리하길 원했고, 동맹군은 페르시아 해군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모색했다.[20] 살라미스 해전은 동맹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고, 이 분쟁의 전환점을 이루었다.[21]
살라미스 해전 이후, 크세르크세스는 군대 대부분과 함께 아시아로 퇴각했다.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이 헬레스폰트로 가서 부교를 파괴하여 군대를 유럽에 가둘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22] 그는 마르도니우스를 남겨 다음 해에 그리스 정복을 완료하도록 했다.[23] 마르도니우스는 아티카를 철수시키고 테살리아에서 겨울을 보냈고,[24] 아테네인들은 파괴된 도시를 다시 점령했다.[21] 겨울 동안, 동맹군 사이에 긴장이 있었고, 특히 아테네인들은 다음 해에 동맹군이 북쪽으로 진격할 것을 요구했다.[1] 동맹군이 동의하지 않자, 아테네 함대는 봄에 동맹 해군에 합류하기를 거부했다. 레오티키데스가 지휘하는 해군은 델로스에서, 페르시아 함대의 잔존 세력은 사모스에서 숨어 다녔으며, 양측 모두 전투를 원치 않았다.[25] 마르도니우스는 테살리아에 머물렀고, 동맹군은 펠로폰네소스 밖으로 군대를 파견하는 것을 거부했다.[21]
마르도니우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1세를 통해 아테네를 설득하려 했고, 평화, 자치, 영토 확장을 제안했다.[25]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 사절단도 그 제안을 듣도록 했고, 거부했다. 페르시아인들은 다시 남쪽으로 진격했고, 아테네는 다시 대피했다. 마르도니우스는 살라미스에 있는 아테네 난민들에게 평화 제안을 반복했다. 아테네는 메가라 및 플라타이아이와 함께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고, 그렇지 않으면 페르시아 조건에 동의하겠다고 위협했다.[26] 히아킨토스 축제를 기념하고 있던 스파르타인들은 테게아의 킬레오스가 아테네인들이 항복할 경우의 위험을 지적할 때까지 결정을 늦추었다.[27] 아테네 사절이 다음날 스파르타인들에게 최후 통첩을 전달했을 때, 이미 부대가 '가는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스파르타 군대는 페르시아군을 만나기 위해 진격하고 있었다.[28] 그리스 도시 국가 동맹은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을 향해 북쪽으로 진격했고, 두 군대는 결국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마주하게 되었다.[29]
한편, 크산티푸스 휘하의 아테네 해군은 델로스 인근에서 동맹 함대에 합류했다. 사모스에서 온 사절단은 이오니아 도시들이 동맹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와 성공적으로 교전할 경우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제안했다.[30] 또한 페르시아 함대의 사기와 감소된 항해 능력을 지적했다.[1] 레오티키데스는 이를 시도하기로 결정하고 사모스로 항해했다.[31]
2. 1.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기원전 499년부터 기원전 494년까지 아테나와 에레트리아는 페르시아 제국을 상대로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했지만 실패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비교적 젊었고, 속국 백성들 사이에서 반감이 컸다.[83][84] 다리우스 1세는 왕위를 강탈했고, 통치 기간의 상당 부분을 반란 진압에 사용했다.[83] 이오니아 반란은 제국의 통합을 위협했고, 다리우스는 관련자들을 응징하고자 했다.[85][83] 다리우스는 이 상황을 고대 그리스 세계로 제국을 확장할 기회로 보았다.[86]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원정 선발대가 그리스로 접근할 수 있는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출정하여, 트라키아를 재점령하고 마케도니아를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삼았다.[87] 기원전 490년에는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가 이끄는 기동부대가 파병되어 낙소스섬과 에레트리아를 약탈하고 아테네로 진격했다.[88] 그러나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가 승리하면서 페르시아 군대는 아시아로 철수했다.
다리우스는 그리스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새로운 병력을 모병했지만, 침공을 시작하기 전에 사망했다.[89] 왕위는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넘어갔고, 그는 그리스 침공 준비를 재개했다. 여기에는 헬레스폰투스를 가로지르는 2개의 부교 건설도 포함되었다.[90] 기원전 481년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에 특사를 보내 항복의 표시로 ‘흙과 물’을 요구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의도적으로 제외했다.[91] 두 도시 국가는 상호 협력을 시작했고, 기원전 481년 가을 코린토스에서 만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연합체인 동맹을 결성했다.[92] 이는 각자 독립적으로 항전하던 그리스 세계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93]
그리스 연합군은 처음에는 그리스 남부에서 접근하는 해로와 육로를 봉쇄하는 전략을 채택했다.[94] 기원전 480년 8월, 크세르크세스가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1세가 이끄는 소규모 연합군이 테르모필레를 봉쇄하고, 아테네 중심의 해군이 아르테미시온 해협으로 나아갔다. 그리스 연합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 군대를 맞아 6일을 견뎠지만, 우회 산악로로 측면 공격을 당했다. 대부분의 그리스 연합군이 후퇴했지만, 스파르타와 테스피아이 분견대로 구성된 후위병들은 포위되어 전멸당했다.[95] 아르테미시온 해전도 교착 상태로 끝났다.[96] 테르모필레 전황을 입수하자, 그들도 아르테미시온 해협을 봉쇄하는 것이 실익이 없었기 때문에 퇴각했다.[97]
2. 2.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동맹
기원전 499년부터 기원전 494년까지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는 페르시아 제국을 상대로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했지만 실패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비교적 젊은 국가였고, 속국 백성들 사이에서 반감이 자주 일어났다.[83][84] 다리우스 1세는 그의 통치 기간 상당 부분을 반란 진압에 사용했다.[83] 이오니아 반란은 제국의 통합을 위협했고, 다리우스는 관련자들을 응징하고자 했다.[85][83] 다리우스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제국을 고대 그리스 세계로 확장하려 했다.[86]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원정대가 그리스로 가는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출정하여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재점령하고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삼았다.[87] 기원전 490년에는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가 이끄는 기동부대가 파병되어 낙소스와 에레트리아를 약탈하고 아테네로 진격했다.[88] 그러나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가 승리하면서 페르시아 군대는 아시아로 철수했다.
다리우스는 그리스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새로운 병력을 모병했지만, 침공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망했다.[89] 왕위는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넘어갔고, 그는 그리스 침공 준비를 재개했다. 여기에는 헬레스폰투스에 부교 2개를 건설하는 것도 포함되었다.[90] 기원전 481년,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에 특사를 보내 항복의 표시로 ‘흙과 물’(γῆ καί ὕδωρ|게 카이 휘도르grc)을 요구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의도적으로 제외되었다.[91]
이 두 도시 국가를 중심으로 협력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481년 가을, 코린토스에서 이 두 도시 국가의 민회가 만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연합체인 동맹을 결성했다.[92] 이는 각자 독립적으로 항전하던 그리스 세계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고, 특히 참여한 많은 도시 국가가 여전히 실질적으로 서로 전쟁 상태였기 때문이다.[93]
그리스 연합군은 처음에는 그리스 남부에서 접근하는 해로와 육로를 봉쇄하는 전략을 채택했다.[94] 기원전 480년 8월, 크세르크세스가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 1세가 이끄는 소규모 연합군이 테르모필레를 봉쇄하고, 아테네 중심의 해군이 아르테미시온 해협으로 이동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 군대를 맞아 6일 동안 버텼지만, 우회 산악로로 측면 공격을 당했다. 비록 대부분의 그리스 연합군이 후퇴했지만, 스파르타와 테스피아이 분견대로 구성된 후위병들은 포위되어 전멸했다.[95] 아르테미시온 해전도 교착 상태로 끝났지만,[96] 테르모필레 전황을 듣고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여 퇴각했다.[97]
2. 3. 초기 전투와 전황
기원전 499년부터 기원전 494년까지 아테나와 에레트리아는 페르시아 제국을 상대로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했지만 실패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비교적 젊은 국가였기에, 속국의 백성들 사이에서 반감이 잦았다.[83][84] 다리우스 1세는 이러한 반란을 진압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83] 이오니아 반란은 제국의 통합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다리우스는 반란 관련자들을 응징하고자 했고,[85][83] 더 나아가 그리스 세계로 제국을 확장할 기회로 삼으려 했다.[86]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원정대가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재점령하여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만들었다.[87] 기원전 490년에는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가 이끄는 부대가 낙소스와 에레트리아를 약탈하고 아테네로 진격했다.[88] 그러나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가 승리하면서 페르시아 군대는 아시아로 철수했다.
다리우스는 그리스 정복을 위한 대규모 병력을 모병했지만, 침공을 시작하기 전에 사망했다.[89]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그리스 침공 준비를 재개했고, 헬레스폰투스에 2개의 부교를 건설했다.[90] 기원전 481년,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에 특사를 보내 항복의 표시로 ‘흙과 물’을 요구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를 거부했다.[91] 두 도시 국가는 협력하여 코린토스에서 동맹을 결성했다.[92] 이는 당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서로 전쟁 상태였던 점을 고려하면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93]
그리스 연합군은 그리스 남부의 해로와 육로를 봉쇄하는 전략을 채택했다.[94] 기원전 480년 8월, 레오니다스 1세가 이끄는 소규모 연합군이 테르모필레를 봉쇄하고, 아테네 중심의 해군이 아르테미시온 해협으로 이동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 군대에 맞서 싸웠으나, 측면 공격을 당해 패배했다. 비록 대부분의 그리스 연합군이 후퇴했지만, 스파르타와 테스피아이 분견대는 전멸했다.[95] 아르테미시온 해전은 교착 상태로 끝났고,[96] 테르모필레 전황을 들은 그리스 해군은 퇴각했다.[97]
테르모필레 이후, 페르시아군은 플라타이아이와 테스피아이를 불태우고 아테네를 점령했다. 한편, 동맹군은 코린트 지협을 방어할 준비를 했다.[19] 크세르크세스는 동맹군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기길 원했고, 반대로 동맹군은 페르시아 해군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모색했다.[20] 그 후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에서 동맹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전쟁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21]
살라미스 해전 이후, 크세르크세스는 군대 대부분과 함께 아시아로 퇴각했다. 그는 그리스인들이 헬레스폰트로 가서 부교를 파괴할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22] 그는 마르도니우스에게 남은 병력을 주어 다음 해에 그리스 정복을 완료하도록 했다.[23] 마르도니우스는 아티카를 철수시키고 테살리아에서 겨울을 보냈고,[24] 아테네인들은 파괴된 도시를 다시 점령했다.[21]
겨울 동안 동맹군 사이에 긴장이 있었고, 특히 아테네인들은 억울함을 느껴 다음 해에 동맹군이 북쪽으로 진격할 것을 요구했다.[1] 동맹군이 동의하지 않자, 아테네 함대는 봄에 동맹 해군에 합류하기를 거부했다. 레오티키데스가 지휘하는 해군은 델로스에서, 페르시아 함대의 잔존 세력은 사모스에서 숨어 다녔으며, 양측 모두 전투를 원치 않았다.[25] 마르도니우스는 테살리아에 머물렀고, 동맹군은 펠로폰네소스 밖으로 군대를 파견하는 것을 거부했다.[21]
마르도니우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1세를 통해 아테네와 함대를 설득하려 했고, 평화, 자치, 영토 확장을 제안했다.[25]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 사절단도 그 제안을 듣도록 했고, 거부했다. 이 거부에 따라 페르시아인들은 다시 남쪽으로 진격했다. 아테네는 다시 대피했고 페르시아인들에게 넘겨졌다. 마르도니우스는 살라미스에 있는 아테네 난민들에게 평화 제안을 반복했다. 아테네는 메가라 및 플라타이아이와 함께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고, 그렇지 않으면 페르시아 조건에 동의하겠다고 위협했다.[26] 히아킨토스 축제를 기념하고 있던 스파르타인들은 테게아의 킬레오스가 아테네인들이 항복할 경우의 위험을 지적할 때까지 결정을 늦추었다.[27] 아테네 사절이 다음날 스파르타인들에게 최후 통첩을 전달했을 때, 그들은 이미 부대가 '가는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스파르타 군대는 페르시아군을 만나기 위해 진격하고 있었다.[28] 스파르타와 아테네 군대를 포함한 그리스 도시 국가 동맹은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을 향해 북쪽으로 진격했고, 두 군대는 결국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서로 마주하게 되었다.[29]
한편, 크산티푸스 휘하의 아테네 해군은 델로스 인근에서 동맹 함대에 합류했다. 그들은 사모스에서 온 사절단에 접근하여 이오니아 도시들이 동맹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와 성공적으로 교전할 경우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제안했다.[30] 또한 페르시아 함대의 사기와 감소된 항해 능력을 지적했다.[1] 레오티키데스는 이를 시도하기로 결정하고 사모스로 항해했다.[31]
3. 전투의 전개
델로스 섬을 찾은 레오티키다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해군은 사모스 섬에서 온 사절로부터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 의사를 전달받았다. 스파르타와 아테네 수군은 사모스 섬에 상륙했지만, 페르시아군은 해전을 피하고 크세르크세스 1세의 명령에 따라 이오니아를 방어하던 미칼레 주둔군에 합류했다.
그리스군은 미칼레에 상륙하여 전투 준비를 하던 페르시아군과 대치했다. 이때 레오티키다스는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그리스군이 승리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군의 사기를 높였다. (플라타이아 전투는 실제로 그리스의 승리로 끝났다.) 페르시아군은 반란을 경계하여 사모스인의 무장을 해제하고, 이오니아인들을 미칼레 산 꼭대기로 보내 본진에서 멀리했다.
아테네군, 코린트군, 시키온군, 트로이젠군은 해안 평지를 따라 페르시아 본진으로 진격했고, 스파르타군은 구릉을 우회하여 접근했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스파르타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테네군과 동맹군은 스파르타군보다 먼저 승리하기 위해 분투하여 방벽을 돌파하고 페르시아군이 아닌 이방인 부대를 패주시켰다. 페르시아군으로 구성된 육군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스파르타군과 사모스군이 참전하면서 섬멸되었다. 패주한 페르시아군은 이오니아 경비 부대에 의존했지만, 그들은 페르시아군을 그리스군 진영으로 유도하고 자신들도 그리스 측에 가담하여 페르시아군을 공격했다.[32][33][34][35][37][38][39][36][59][60][61][45][74][75][76][77][79][80]
3. 1. 그리스군의 진군과 페르시아군의 대응
델로스 섬을 찾은 레오티키다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해군에게 사모스 섬에서 사절이 와서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 의도를 전했다. 이 소식을 듣고 스파르타와 아테네 수군은 사모스 섬에 상륙했지만, 페르시아 측은 해전을 경계하여 사모스 섬 방어를 포기하고 크세르크세스 1세의 명에 따라 이오니아를 방어하고 있던 미칼레의 주둔군에게 합류했다.페르시아군은 연합 함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모스 섬에서 이오니아 본토 방향으로 출항했다.[32]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는 그들이 해상 전투에서 연합군을 이길 수 없다고 의회에서 결정했기 때문이다.[32] 페르시아군은 페니키아 선박을 돌려보냈고, 그 후 미칼레 산 근처 해안으로 항해했다.[32] 크세르크세스는 이오니아를 지키기 위해 티그라네스 휘하의 군대를 그곳에 남겨두었다.[32] 페르시아군은 배를 해변에 정박시키고, 주변에 울타리를 세우고, 임시 요새를 지킬 준비를 했다.[33]
사모스 섬에서 페르시아 함대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 연합군은 혼란에 빠졌다. 결국 연합군은 본토로 항해하기로 결정하고 해상 전투를 위해 준비했다.[34] 그러나 연합군이 미칼레에 접근했을 때, 페르시아군은 그들과 교전하려 하지 않고, 자신들의 진지를 지켰다. 이에 레오튀키데스는 진지에 최대한 가까이 항해하여 전령에게 이오니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게 했다.
헤로도토스는 이 메시지의 목적이 두 가지였다고 제안한다. 첫째, 페르시아인들이 모르게 이오니아인들이 연합군을 위해 싸우도록 (또는 적어도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며, 둘째, 이 메시지가 페르시아인들에게 알려지면 페르시아인들이 이오니아인들을 불신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호소에 이어, 연합군도 배를 해변에 정박시키고 진지를 공격할 준비를 시작했다.[35] 페르시아군은 사모스 섬 분견대가 연합군을 지원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그들의 갑옷을 빼앗았다.[35] 게다가 페르시아군은 밀레투스인들을 미칼레를 넘어가는 고개를 지키게 했는데, 밀레투스인들이 배반할 수도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35]
3. 2. 레오티키데스의 계략
헤로도토스는 레오튀키데스가 전령을 통해 이오니아인들에게 전한 메시지가 두 가지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첫째, 페르시아인들 몰래 이오니아인들이 연합군을 위해 싸우거나, 적어도 페르시아군에 맞서 싸우지 않도록 격려하는 것이었다. 둘째, 이 메시지가 페르시아인들에게 알려져 그들이 이오니아인들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헤로도토스는 연합군이 페르시아 진지에 접근했을 때,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했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기록한다.[37] 디오도로스 역시 레오튀키데스가 전투 시작 전에 연합군에게 플라타이아이에서의 승리를 알렸다고 주장한다.[38] 이 소식으로 사기가 높아진 연합군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나섰다.[37] 플라타이아이 전투와 미칼레 전투가 같은 날에 일어났다는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학설이 제시되었다. 그린은 플라타이아이 전투 승리 후, 연합군 지휘관 파우사니아스가 크세르크세스 1세가 아시아와의 통신에 사용했던 페르시아 봉화 시스템을 장악하여 플라타이아이의 소식을 연합 함대에 보냈다고 제안한다.[39] 이는 승전 소문과 거의 동시에 공격이 이루어진 것을 설명할 수 있지만,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36]
3. 3. 전투 과정
레오튀키데스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은 사모스 섬에 접근하는 페르시아 군을 감지하고, 사모스에서 이오니아 본토로 이동하여 전투를 준비했다.[74]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군이 이오니아로 후퇴한 것은 그리스 해군에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74] 페르시아 군은 페니키아인 부대를 해산시키고, 미칼레 산 기슭의 얕은 여울로 이동하여 크세르크세스 1세가 남겨둔 잔존 부대와 합류했다.[74] 미칼레에 집결한 페르시아 군은 배를 해변으로 끌어올리고, 요새와 방어벽을 구축하여 임시 항구를 만들고 방어 준비를 했다.[75]그리스 군은 페르시아 군을 추격했지만, 페르시아 군이 이오니아 본토로 도주했기 때문에 추격을 일시 중단했다. 이후 그리스 군은 다시 해군 부대를 편성하여 이오니아로 건너가기로 결정했다.[76] 그리스 연합군은 해군을 이끌고 이오니아로 진격했지만, 페르시아 군은 미칼레에 구축한 요새와 야영지에 틀어박혀 공격하지 않았다. 이에 레오튀키데스는 야영지에 접근하여 이오니아 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
''"이오니아인 여러분, 우리 말을 들으시오. ... 각자는 자신의 자유를 기억하고, 다음으로 전투 구호 ''헤베'':를 외치시오. 그리고 이 말을 듣는 자는 듣지 못한 자에게 전하시오."''[74]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 호소는 이오니아인들에게 그리스 군과 함께 싸우거나, 최소한 페르시아 군에 협력하지 않도록 하는 목적과 페르시아 군에게 이오니아 인에 대한 불신을 심어 내부 붕괴를 유도하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74]
이후 그리스 연합군은 미칼레 해변에 상륙하여 페르시아 군 야영지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77] 페르시아 군은 사모스 섬 증원 부대가 그리스 편을 들 것이라고 의심하여 그들의 무장을 해제했다.[74] 또한 밀레토스인 부대도 의심하여 미칼레에서 떨어진 곳에 배치하고 가도변에 진을 치게 했다.[74] 페르시아 군은 내부 불안 요소를 제거하고 야영지를 나와 그리스 연합군과 전투에 임했다.[74]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군 본영으로 진군할 때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그리스 군이 페르시아 육군을 격파했다는 소문이 퍼졌다.[79] 디오도로스는 레오튀키데스가 전투 전에 플라타이아에서의 승전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80] 이 소식으로 그리스 군의 사기는 높아졌다.[74]
그리스 연합군은 두 부대로 나뉘었다. 아테네, 코린토스, 시키온, 트로이젠 병력이 우익에, 스파르타 병력과 기타 병력이 좌익에 배치되었다.[59] 우익은 평지를 가로질러 페르시아 진영으로 곧장 진격했고, 좌익은 험한 지형을 통해 페르시아 군을 측면 공격하려 했다.[59] 우익이 페르시아 군과 전투를 시작했을 때 좌익은 아직 접근 중이었다.[59] 헤로도토스는 아테네 군과 그와 함께한 병력들이 스파르타 군보다 먼저 승리하기 위해 더욱 열정적으로 공격했다고 전한다.[59]
페르시아 군은 잠시 동안 자리를 지켰지만, 결국 무너져 울타리로 도망쳤다.[59] 우익 병사들은 그들을 따라 진영으로 들어갔고, 많은 페르시아 군은 진영에서 도망쳤다. 페르시아 출신 병사들을 제외하고, 그들은 뭉쳐 진영에 들어온 연합군 병사들과 싸웠다.[59] 마침내 좌익이 도착하여 진영을 측면에서 공격하고 남은 페르시아 군 후방을 공격하여 궤멸을 완료했다.[36][60]
전투 결과를 지켜보던 무장 해제된 사모스 인들은 연합군 편에 합류했다.[60] 이것은 다른 이오니아 병력들이 페르시아 군을 공격하도록 영감을 주었다.[60] 미칼레 길목을 지키던 밀레투스 인들도 페르시아 군을 공격했다. 처음에는 도망치는 페르시아 군 병력을 잘못 인도하여 연합군 병력에게 돌아가게 했고, 전투 결과가 확실해지자 도망치는 페르시아 군을 죽이기 시작했다.[61]
헤로도토스는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다고 말한다.[60] 특히 시키온 인들은 장군 페릴라우스를 잃는 등 피해가 컸다.[60] 페르시아 측에서는 제독 마르돈테스와 장군 티그라네스가 사망했지만, 아르타인테스는 탈출했다.[60] 디오도로스는 4만 명의 페르시아 군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하며, 생존자들이 사르디스로 갔다고 언급한다.[45]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플라타이아 전투와 같은 날 벌어진 미칼레 전투의 승리로 그리스 본토와 이오니아에서 페르시아의 영향력은 사라졌다. 이후 이오니아는 재건되어 다시 그리스 세계에 통합되었다.[63]
그리스군은 카리아, 헬레스폰토스(현재의 다르다넬스 해협), 키프로스까지 진출했지만,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페르시아 군은 트라키아의 프리기아에 머물렀다.[63] 미칼레 전투 승리 이후, 연합 함대는 헬레스폰트로 가서 부교를 파괴하려 했지만 이미 철거된 후였다.[65] 펠로폰네소스인들은 귀향했지만, 아테네인들은 여전히 페르시아가 점령하고 있던 케르소네소스를 공격하기 위해 남았다.[65] 이 지역의 페르시아인들과 그 동맹국들은 세스토스로 향했고, 아테네인들은 그곳을 포위했다. 오랜 포위 공격 끝에 세스토스는 아테네에 함락되었고, 이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새로운 국면, 즉 그리스의 반격을 알렸다.[66]
플라타이아이와 미칼레에서 거둔 승리로 그리스에 대한 페르시아의 2차 침공은 끝났다. 이후 30년 동안, 그리스인들은, 주로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을 통해, 페르시아인들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에게해 섬 및 이오니아에서 몰아냈다.[66] 마침내 기원전 449년 칼리아스 평화를 통해 페르시아와의 평화가 찾아오면서 반세기 동안의 전쟁이 막을 내렸다.[66]
4. 1. 그리스의 승리와 페르시아의 패배
플라타이아 전투와 같은 날, 그리스 본토의 페르시아 세력이 제거되면서, 이오니아에서 페르시아의 영향력은 사라졌다. 전투 후, 이오니아는 본격적으로 재건되었고, 다시 그리스 세계에 통합되었다.[63]그리스군은 카리아, 헬레스폰토스(현재의 다르다넬스 해협), 키프로스까지 침공했지만, 전쟁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페르시아 군은 트라키아의 프리기아에 틀어박혔다.
스파르타인들이 도착했을 때, 페르시아 진영은 약탈당했고 해변에 정박해 있던 그들의 배는 파괴되었다.[63] 사모스로 돌아온 그들은 다음 행보에 대해 논의했다. 레오튀키데스는 이오니아 그리스 도시들을 철수시키고 그 주민들을 그리스 본토로 데려오는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페르시아의 추가 공격으로부터 이오니아를 방어하기가 어려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산티포스는 이오니아 도시들이 원래 그리스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은 나중에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아테네인들과 델로스 동맹에 합류했다.
플라타이아이와 미칼레에서 거둔 쌍둥이 승리로 그리스에 대한 페르시아의 2차 침공은 끝났다. 더욱이, 미래의 침공 위협은 줄어들었다. 그리스인들은 크세르크세스가 다시 시도할까 봐 여전히 걱정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스를 정복하려는 페르시아의 욕망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64]
미칼레에서의 승리 이후, 연합 함대는 헬레스폰트로 항해하여 부교를 파괴하려 했지만, 이미 파괴된 것을 발견했다.[65] 펠로폰네소스인들은 고향으로 항해했지만, 아테네인들은 여전히 페르시아가 점령하고 있던 케르소네소스를 공격하기 위해 남았다.[65] 이 지역의 페르시아인들과 그 동맹국들은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인 세스토스로 향했고, 아테네인들은 그곳에서 그들을 포위했다. 오랜 포위 공격 끝에 세스토스는 아테네인들에게 함락되었고, 이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새로운 국면, 즉 그리스의 반격의 시작을 알렸다.[66] 헤로도토스는 세스토스 포위 이후 자신의 ''역사''를 마쳤다. 그 후 30년 동안, 그리스인들은, 주로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을 통해, 페르시아인들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에게해 섬 및 이오니아에서 몰아냈다(또는 몰아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66] 페르시아와의 평화는 마침내 기원전 449년에 칼리아스 평화로 도래하여 반세기의 전쟁을 종식시켰다.[66]
4. 2. 이오니아의 해방과 델로스 동맹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그리스 본토의 페르시아 세력이 제거되면서, 이오니아에서 페르시아의 영향력은 사라졌다. 전투 후, 이오니아는 본격적으로 재건되었고, 다시 그리스 세계에 통합되었다.[63]그리스인은 카리아, 헬레스폰토스(현재의 다르다넬스 해협), 키프로스까지 침공했지만, 전쟁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페르시아 군은 트라키아의 프리기아에 머물렀다.
스파르타인들이 도착했을 때, 페르시아 진영은 약탈당했고 해변에 정박해 있던 그들의 배는 파괴되었다.[63] 사모스로 돌아온 그들은 다음 행보에 대해 논의했다. 레오튀키데스는 이오니아 그리스 도시들을 철수시키고 그 주민들을 그리스 본토로 데려오는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페르시아의 추가 공격으로부터 이오니아를 방어하기가 어려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산티포스는 이오니아 도시들이 원래 그리스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은 나중에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아테네인들과 델로스 동맹에 합류했다.
플라타이아이와 미칼레 전투에서 거둔 승리로 그리스에 대한 페르시아의 2차 침공은 끝났다. 더욱이, 미래의 침공 위협은 줄어들었다. 그리스인들은 크세르크세스가 다시 침공을 시도할까 봐 여전히 걱정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스를 정복하려는 페르시아의 욕망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64]
미칼레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연합 함대는 헬레스폰트로 항해하여 부교를 파괴하려 했지만, 이미 파괴된 것을 발견했다.[65] 펠로폰네소스인들은 고향으로 항해했지만, 아테네인들은 여전히 페르시아가 점령하고 있던 케르소네소스를 공격하기 위해 남았다.[65] 이 지역의 페르시아인들과 그 동맹국들은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인 세스토스로 향했고, 아테네인들은 그곳에서 그들을 포위했다. 오랜 포위 공격 끝에 세스토스는 아테네인들에게 함락되었고, 이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새로운 국면, 즉 그리스의 반격의 시작을 알렸다.[66] 헤로도토스는 세스토스 포위 이후 자신의 ''역사''를 마쳤다. 그 후 30년 동안, 그리스인들은, 주로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을 통해, 페르시아인들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에게해 섬 및 이오니아에서 몰아냈다(또는 몰아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66] 페르시아와의 평화는 마침내 기원전 449년에 칼리아스 평화로 도래하여 반세기의 전쟁을 종식시켰다.[66]
4. 3. 전쟁의 장기화와 종결
플라타이아이 전투와 같은 날 벌어진 미칼레 전투의 승리로 그리스 본토와 이오니아에서 페르시아의 영향력은 사라졌다. 이후 이오니아는 재건되어 다시 그리스 세계에 통합되었다.[63]그리스군은 카리아, 헬레스폰토스(현재의 다르다넬스 해협), 키프로스까지 진출했지만,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페르시아 군은 트라키아의 프리기아에 머물렀다.[63] 미칼레에서의 승리 이후, 연합 함대는 헬레스폰트로 가서 부교를 파괴하려 했지만 이미 철거된 후였다.[65] 펠로폰네소스인들은 귀향했지만, 아테네인들은 여전히 페르시아가 점령하고 있던 케르소네소스를 공격하기 위해 남았다.[65] 이 지역의 페르시아인들과 그 동맹국들은 세스토스로 향했고, 아테네인들은 그곳을 포위했다. 오랜 포위 공격 끝에 세스토스는 아테네에 함락되었고, 이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새로운 국면, 즉 그리스의 반격을 알렸다.[66]
플라타이아이와 미칼레에서 거둔 승리로 그리스에 대한 페르시아의 2차 침공은 끝났다. 이후 30년 동안, 그리스인들은, 주로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을 통해, 페르시아인들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에게 해 섬 및 이오니아에서 몰아냈다.[66] 마침내 기원전 449년 칼리아스 평화를 통해 페르시아와의 평화가 찾아오면서 반세기 동안의 전쟁이 막을 내렸다.[66]
5. 역사적 의의
미칼레 전투와 플라타이아이 전투는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페르시아의 2차 침공을 결정적으로 종식시키고,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균형을 그리스 쪽으로 기울게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66] 살라미스 해전은 그리스를 당장의 정복 위협에서 구원했지만, 실질적으로 그 위협을 종식시킨 것은 미칼레 전투와 플라타이아이 전투였다.[66] 그러나 이 두 전투는 테르모필레, 살라미스, 마라톤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이러한 차이는 전투가 벌어진 상황 때문으로 보인다. 테르모필레 전투는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한 그리스 군의 영웅적인 항전으로,[67]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은 불리한 상황과 절박한 전략적 상황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유명하다. 반면, 플라타이아 전투와 미칼레 전투는 그리스가 비교적 유리한 상황에서,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덜 극적으로 보였을 수 있다.[66][68]
군사적으로 미칼레 전투와 플라타이아이 전투(둘 다 육상에서 벌어짐)의 주된 교훈은 마라톤 전투에서 처음 증명된 바와 같이, 호플리테 (그리스 중장보병)가 페르시아의 경무장 보병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재확인한 것이다.[69]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후 페르시아 제국은 이 교훈을 받아들여 그리스 용병을 모집하고 의존하기 시작했다.[70] 같은 날 벌어진 플라타이아이 전투로 그리스 본토의 페르시아 세력은 완전히 제거되었고, 미칼레 전투로 이오니아에서 페르시아의 영향력도 사라졌다. 전투 후 이오니아는 재건되어 다시 그리스 세계에 편입되었다.
그리스군은 카리아, 헬레스폰토스(현재의 다르다넬스 해협), 키프로스까지 진격했지만, 전쟁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페르시아군은 트라키아에서 프리기아까지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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