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폰 슐라이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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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브란덴부르크 출신의 프로이센 장교이자 정치가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육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빌헬름 그뢰너의 제자로서 군부 내에서 영향력을 키웠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정치적 해결사 역할을 수행하며 국방군과 정부 간의 관계를 조율했다. 1932년 프란츠 폰 파펜 내각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고, 이후 총리로 취임했지만, 나치당과의 협상 실패와 정치적 고립으로 인해 실각했다. 1934년 장검의 밤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슐라이허는 권위주의적 성향과 정치 공작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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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폰 슐라이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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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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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쿠르트 페르디난트 프리드리히 헤르만 폰 슐라이허 |
출생일 | 1882년 4월 7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 주,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 |
사망일 | 1934년 6월 30일 |
사망지 | 나치 독일, 포츠담-바벨스베르크 |
사망 원인 | 암살 |
배우자 | 엘리자베트 폰 슐라이허 (1931년 결혼) |
모교 | 프로이센 육군사관학교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무소속 |
직업 | 군인, 정치인 |
군 복무 | 1900년–1932년 |
최종 계급 | [[파일:WMacht H OF8 GenWaGtg 1945.svg|20px]] 명예 육군 보병대장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전투 | 동부 전선 케렌스키 공세 |
소속 군 | 독일 제국 육군 프로이센 육군 Reichsheer |
충성 |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
독일국 수상 | |
직함 | 제14대 독일국 수상 |
임기 시작 | 1932년 12월 3일 |
임기 종료 | 1933년 1월 30일 |
대통령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이전 수상 | 프란츠 폰 파펜 |
다음 수상 | 아돌프 히틀러 |
내각 | 폰 슐라이허 내각 |
프로이센 자유주 | |
직함 (수상) | 제29대 프로이센 자유주 수상 |
직함 (국가판무관) | 제2대 총독 (국가판무관) |
임기 시작 | 1932년 12월 3일 |
임기 종료 | 1933년 1월 30일 |
대통령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이전 수상 | 프란츠 폰 파펜 |
다음 수상 | 프란츠 폰 파펜 |
내각 | 폰 슐라이허 내각, 중앙 정부에 의한 직접 통치 |
국방부 장관 | |
직함 | 제4대 국방부 장관 |
임기 시작 | 1932년 6월 1일 |
임기 종료 | 1933년 1월 30일 |
대통령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수상 | 프란츠 폰 파펜, 본인 |
이전 장관 | 빌헬름 그뢰너 |
다음 장관 |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
내각 | 폰 파펜 내각, 폰 슐라이허 내각 |
기타 경력 | |
직함 | 초대 국방부 장관 비서실장 |
임기 시작 | 1929년 2월 1일 |
임기 종료 | 1932년 6월 1일 |
대통령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내각 | 제2차 뮐러 내각, 제1차 브뤼닝 내각, 제2차 브뤼닝 내각 |
훈장 | [[File:D-PRU EK 1914 2 Klasse BAR.svg|30px]] 2급 철십자 훈장 [[File:D-PRU Hohenzollern Order BAR.svg|30px]]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검 수반 기사 십자장 |
2. 생애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에서 프로이센 장교 아버지와 선주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0년 독일 군대에 입대하여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소위로 임관하였다.
젊은 시절 슐라이허는 프란츠 폰 파펜과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등 훗날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두 사람을 알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빌헬름 그뢰너의 참모로 복무하며 그의 후원을 받았다. 1931년 7월 28일, 슐라이허는 프로이센 장군 빅토르 폰 헤닝스의 딸인 엘리자베트 폰 슐라이허와 결혼했다.
그는 군 복무 기간 동안 다양한 보직을 거쳤다. 1896년부터 1900년까지 리히터펠데에 있는 프로이센 육군 사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00년 소위로 임관하여 제3 근위 보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는 자신의 연대의 ''Fusilier'' 대대에서 부관으로, 1909년에는 대위로 진급한 후 프로이센 군사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1913년에는 독일 대참모부 철도 부서에 합류하여 빌헬름 그뢰너 중령의 지지를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슐라이허는 최고 육군 사령부 참모부에 배속되었고, 베르됭 전투 기간 중에는 특정 산업 분야의 전쟁 사기를 비판하는 글로 독일 사회민주당 의장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1916년부터 1917년까지는 전쟁부(Kriegsamt)에서 근무했다. 1917년에는 동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잠시 최전선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으며, 전쟁의 나머지 기간은 최고 육군 사령부에서 근무했다. 1918년 7월에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11월 혁명 이후 슐라이허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대신해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육군의 스파르타쿠스단 진압 관련 최후통첩을 전달했고, 이후 육군과 정부 간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에베르트-그뢰너 협정을 통해 육군의 정치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으며, 자유군단 창설을 지원하여 좌익 반군 진압에 힘을 보탰다. 바이마르 공화국 기간 동안에는 국방군의 정치적 해결사 역할을 하며 군부의 이익을 보장했다.
1919년에는 국방부(Reichswehrministerium)가 신설되면서 한스 폰 젝트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흑색 방위군 편성을 맡았으며, 소련과의 비밀 협력을 통해 베르사유 조약의 군축 조항을 회피하려는 시도에도 관여했다.
2. 1.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에서 프로이센 장교와 선주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0년 독일 군대에 입대하여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소위로 임관하였다.젊은 시절 슐라이허는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사람들을 알게 되는데, 사관학교 동기 프란츠 폰 파펜과 친구가 되었으며, 제3 경비 연대의 장교로 있던 시절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를 알게 되었다. 훗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그는 자신의 후원자가 될 빌헬름 그뢰너의 참모로 복무하였다.

1896년부터 1900년까지 리히터펠데에 있는 프로이센 육군 사관학교에서 공부했다. 1900년 3월 22일에 소위로 진급하여 제3 근위 보병 연대에 배속되었으며, 여기서 동료 장교인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쿠르트 폰 하머슈타인-에크보르트,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친분을 쌓았다. 1906년 11월 1일부터 1909년 10월 31일까지는 자신의 연대의 ''Fusilier'' 대대에서 부관으로 복무했다.
1909년 10월 18일 대위로 진급한 후, 프로이센 군사 아카데미에 배속되어 프란츠 폰 파펜을 만났다. 1913년 9월 24일 졸업 후, 독일 대참모부에 배속되어 본인의 요청에 따라 철도 부서에 합류했다. 그는 곧 그의 직속 상관인 빌헬름 그뢰너 중령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13년 12월 18일에 대위로 진급했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슐라이허는 최고 육군 사령부(Oberste Heeresleitung)의 참모부에 배속되었다. 베르됭 전투 동안 그는 특정 산업 분야의 전쟁 사기를 비판하는 원고를 작성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독일 사회민주당(SPD) 의장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지지와 자유주의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1916년 11월부터 1917년 5월까지 슐라이허는 그로너가 이끄는 전쟁 경제를 관리하는 기관인 전쟁부(Kriegsamt)에서 근무했다.[1]슐라이허의 유일한 최전선 임무는 1917년 5월 23일부터 1917년 8월 중순까지 케렌스키 공세 기간 동안 동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제237 사단의 참모장이었다. 그는 전쟁의 나머지 기간을 최고 육군 사령부에서 근무했다. 1918년 7월 15일 소령으로 진급했다. 1918년 8월부터 독일의 전쟁 노력이 붕괴된 후, 슐라이허의 후원자인 그로너는 최고 참모장으로 임명되었고 1918년 10월 29일 독일 제국 육군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인수했다. 그로너의 신뢰받는 조수로서 슐라이허는 민간 및 군사 당국 간의 중요한 연락 담당자가 되었다.[1]
2. 3.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1월 혁명 이후, 독일군의 상황은 불안정했다. 1918년 12월, 슐라이허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대신하여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독일 임시 정부가 육군의 스파르타쿠스단 진압을 허용하거나 육군이 직접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최후 통첩을 전달했다.[14] 그 후 독일 내각과의 협상에서 슐라이허는 육군이 베를린으로 복귀하는 것을 허용하는 승인을 얻었다.[7] 1918년 12월 23일, 에베르트 정부는 급진 좌익 세력인 국민해군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슐라이허는 에베르트-그뢰너 협정을 협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정부 지원에 대한 대가로 육군이 "국가 내의 국가"로서 정치적 자율성을 유지하는 데 에베르트의 동의를 얻어냈다.[14]좌익 반군 진압을 위해 슐라이허는 1919년 1월 초 자유군단 창설을 지원했다.[15] 슐라이허는 의용군의 장비와 편성에 큰 역할을 했다.[7] 바이마르 공화국 기간 동안 슐라이허는 군부의 이익을 보장하는 국방군의 정치적 해결사 역할을 했다.
1919년 10월 1일 베를린 벤틀러 거리에 바이마르 공화국군을 통괄하는 국방부(Reichswehrministerium)가 신설되었다.[16] 슐라이허도 이곳으로 이동하여, 병무국(베르사유 조약으로 금지된 참모본부의 위장 조직)의 국장이 된 한스 폰 젝트의 측근이 되었다.[6] 1920년대 초, 슐라이허는 젝트 장군의 주요 제자가 되어 민감한 임무를 자주 맡았다.[17] 젝트가 1920년에 육군 통수 장관으로 승진하자 그에게서 "흑색 방위군" 편성을 맡게 되었다.[18][7] 젝트는 정치 음모를 좋아하는 슐라이허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정치 능력을 평가하여 정부와의 교섭이나 소련과의 접촉 등 정치적 임무를 연이어 맡겼다.[18]
1921년 봄, 젝트는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수립된 국제 시스템에 공동으로 맞서 싸우기 위해 붉은 군대와 협력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Sondergruppe R''("특별 그룹 R")을 국방군 내에 만들었다. 슐라이허는 레오니트 크라신과 독일이 소련의 무기 산업을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독일의 재정적 및 기술적 지원은 소련이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의 군축 조항을 회피하도록 지원하는 대가로 교환되었다. 슐라이허는 여러 유령 회사를 설립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GEFU(''Gesellschaft zur Förderung gewerblicher Unternehmungen'': "산업 기업 진흥 회사")로, 1923년 말까지 7,500만 라이히스마르크(약 1800만달러)를 소련 무기 산업에 투입했다.
동시에, 페도르 폰 보크가 이끄는 팀은 슐라이허, 오이겐 오트, 쿠르트 폰 함머슈타인-에크보르트 등으로 구성되어 검은 국방군을 설립했다. 브루노 에른스트 부흐루커 소령은 공식적으로는 민간 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노동 단체였지만 실제로는 군대였던 ''Arbeitskommandos''(노동 사령부)를 창설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허구는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설정된 병력 제한을 초과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검은 국방군은 페메 살인을 사용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슐라이허는 법정에서 국방부가 "검은 국방군"이나 그들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부인했다.
3. '정치 장군'으로서의 활동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군 복무를 마치고 1920년대 독일군(Reichswehr) 내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군대와 민간 당국 사이의 핵심 연락관이 되었다. 그는 막후에서 활동하는 것을 선호하며, 우호적인 언론을 이용하고 정보원을 활용하여 다른 부서의 계획을 파악했다. 이러한 능력으로 슐라이허는 'Ministeramt' 장관이 되었다.
슐라이허는 질서와 규율을 중시하는 프로이센식 권위주의적 시각을 가졌지만, 군대가 사회 통합 기능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융커의 엘베 동부 재산 파산 지원 정책(Osthilfe)에 반대하는 등 비교적 온건한 경제 정책을 추구했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슐라이허는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에서 국방장관 빌헬름 그뢰너의 측근으로 막후 정치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브뤼닝, 그뢰너와 갈등을 빚었고, 1932년 이들의 몰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이름은 독일어로 "몰래 행동하는 사람"을 뜻한다.
슐라이허는 프란츠 폰 파펜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이 되었지만, 1932년 라디오 연설에서 군사 독재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파펜과 대립하던 슐라이허는 1932년 11월 선거에서 정부가 다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파펜의 뒤를 이어 독일 총리가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슐라이허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빌헬름 그뢰너 국방장관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치 장군'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1932년 6월에는 프란츠 폰 파펜 내각을 옹립하고 국방장관으로 입각했지만, 이후 파펜을 몰락시키고 스스로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와 파펜의 협력으로 슐라이허 내각은 무너졌고,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내각이 탄생했다.
1931년 7월 28일, 슐라이허는 사촌의 미망인 엘리자베트 폰 헤닝과 결혼했다.[6] 같은 해, 중장으로 진급했다. 1930년 12월부터 슐라이허는 돌격대(SA) 지도자 에른스트 룀과 정기적으로 비밀리에 접촉했으며, 룀은 곧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되었다.[19]
3. 1. 힌덴부르크 대통령과의 관계
1925년 5월 12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19], 슐라이허는 그의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를 통해 대통령에게 개인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군과 정계에서 슐라이허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슐라이허는 1926년 국군성 내에 신설된 정무과의 과장으로 취임하며[20], 군 내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1926년 10월, 육군 통수부 장관 제크트가 실각하면서 슐라이허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18] 슐라이허는 빌헬름 그뢰너 국방장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그뢰너는 슐라이허를 "나의 양자"라고 부를 정도로 신뢰했으며[21][22], 1929년 1월 슐라이허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또한, 국군성에 대신관방(Ministeramt)이 설치되면서 슐라이허는 관방장에 임명되어[23], "정치 장군"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24] 그뢰너는 슐라이허를 "나의 정치 담당 추기경"이라고 칭하며 그의 정치적 능력에 의존했다.[25]
1929년 초부터 슐라이허는 헤르만 뮐러 수상이 이끄는 대연립 정부를 우익 정부로 교체하기 위해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했다.[26] 슐라이허는 하인리히 브뤼닝을 주목하여 그와 재군비 재정 문제에 합의하고, 영 안 체결 후 그를 수상으로 만들기 위한 공작을 펼쳤다.[27] 그 결과, 1930년 3월 30일 브뤼닝 내각이 성립되었다.[28]
1932년 4월, 슐라이허는 아돌프 히틀러와 밀회를 갖고 브뤼닝과 그뢰너를 실각시키고, 돌격대 금지 명령을 해제하며, 국회를 해산하는 등의 합의를 이끌어냈다.[29][30][31] 이후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에게 브뤼닝 해임을 제안했고, 힌덴부르크는 이를 받아들여 1932년 5월 30일 브뤼닝 내각이 총사퇴하게 되었다.[35][36]
3. 2. 브뤼닝 내각 붕괴
1930년부터 1932년까지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에서 국방부 장관 빌헬름 그뢰너의 측근으로 막후에서 정계 주요 인사가 된 슐라이허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1] 그의 술책은 1932년 브뤼닝과 그뢰너의 몰락에 큰 영향을 주었다.[1]슐라이허는 1929년-1930년 겨울 동안 그뢰너와 힌덴부르크의 지원을 받아 여러 음모를 통해 헤르만 뮐러의 "대연정" 정부를 약화시켰다.[2] 1930년 1월, 중앙당 지도자 하인리히 브뤼닝에게 대통령 정부를 이끌도록 동의를 얻은 후, 슐라이허는 브뤼닝에게 "힌덴부르크 정부"는 "반마르크스주의"적이고 "반의회주의"적이며, 사민당이 국회의 최대 정당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도 관직을 맡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3] 1930년 3월, 뮐러 정부가 붕괴되었고, 브뤼닝이 이끄는 최초의 대통령 정부가 출범했다.[2]
독일 역사가 에버하르트 콜브는 1930년 3월에 시작된 대통령 정부를 정부가 점차 권위주의적이고 덜 민주적으로 변화하는 일종의 '점진적인' 쿠데타로 묘사했으며, 이 과정은 1933년 나치 정권으로 절정에 달했다.[3] 영국의 역사가 에드가 페우히트방거는 브뤼닝 정부를 슐라이허의 "두뇌"라고 불렀다.[4]
3. 3. 파펜 내각 성립과 몰락
1932년 5월 30일,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이 붕괴되자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프란츠 폰 파펜을 후임 총리로 추천했다.[37] 슐라이허는 파펜이 경험이 없고 겉모습만 신경 쓰는 성격이라 꼭두각시로 만들기 쉽다고 판단하여 총리로 추천했다. 주변에서 "파펜은 남을 이끌 그릇이 아니다"라고 반대하자, 슐라이허는 "그가 남을 이끌도록 해서는 곤란하다. 그는 모자와 같은 존재다"라고 말했다고 한다.[38]1932년 6월 1일 파펜 내각이 성립되자 슐라이허는 퇴역하여 명예 계급 보병 대장의 계급을 받음과 동시에 국방 장관으로 입각했다.[36] 파펜 내각은 귀족들로만 구성되어 국민의 지지가 전혀 없었다. 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주요 정당이 파펜 내각을 공격했다. 슐라이허는 나치당을 포섭하고자 1932년 6월 3일 아돌프 히틀러와 만나 협력을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절했다.[40]
1932년 7월 31일 총선에서 나치당이 37.4%의 득표율로 230석을 얻어 제1당으로 부상했다.[41] 슐라이허는 8월 5일 파펜에게 독단적으로 히틀러와 만나 파펜 내각에 부총리로 입각할 것을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총리 자리를 요구했다.[42][43][44] 슐라이허는 히틀러를 총리로 만들도록 힌덴부르크에게 요청했지만, 힌덴부르크와 파펜 모두 그럴 의사가 없었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매우 싫어했고, 파펜은 몇몇 각료직을 제공함으로써 나치당을 포섭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45]

슐라이허는 파펜이 오토 브라운이 이끄는 프로이센 자유주 정부를 무력으로 해산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파펜의 정치 능력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11월 6일 총선에서 나치당은 의석을 크게 줄였지만, 여전히 제1당이었다.[46][47][48][49] 파펜은 다시 히틀러에게 부총리 취임을 제안했지만, 히틀러는 거절했다.[50]
슐라이허는 정당 간 협상을 쉽게 하기 위해 이후 협상은 힌덴부르크에게 맡기고, 파펜에게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11월 17일 파펜 내각은 총사퇴하고 잠정 사무 처리 내각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파펜은 언젠가 힌덴부르크로부터 다시 조각 명령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46][51][52] 11월 18일부터 24일까지 힌덴부르크와 히틀러의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역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53]
1932년 12월 1일, 힌덴부르크는 파펜과 슐라이허를 소집했다. 파펜은 헌법 위반 쿠데타 계획을 제안했지만, 슐라이허는 반대하며 자신이 총리에 취임하여 나치당의 일부를 포섭하여 분열을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4] 힌덴부르크는 파펜을 지지했지만, 슐라이허는 국군의 쿠데타 참여를 완강하게 거부했다.[55]
1932년 12월 2일 각료 회의에서 슐라이허는 "파펜 아래에서 정부를 만들려는 어떤 시도도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나치스가 내란을 일으킨다면 국군이 그것을 진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하며 파펜에게 퇴진을 요구했다.[56] 각료 대부분은 슐라이허를 지지했다.[57] 파펜은 힌덴부르크의 지지를 얻으려 했지만, "이 즈음에 이르러서는 슐라이허에게 맡기도록 하겠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56][58][59] 결국 1932년 12월 2일, 슐라이허에게 조각 명령이 내려졌다.[60]
3. 4. '가교 전선'(Querfront) 구상
슐라이허는 의회 밖의 여러 세력을 통합하여 독일 제국의회에서 과반수를 확보하고자 '가교 전선'(Querfront)을 구상했다.[60] 그는 사회민주주의적 노동 조합, 기독교 노동조합, 그리고 나치당 내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이끄는 좌익 지파에 손을 내밀었다.[60] 그러나 슈트라서는 이미 당내 권력 투쟁에서 히틀러에게 밀려난 상황이었다.[60]슐라이허는 군대가 사회의 다양한 요소를 통합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60] 그는 파산 위기에 놓인 융커의 엘베 동부 재산을 지원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등 비교적 온건한 경제 정책을 펼쳤다.[60]
1932년 12월 4일, 슐라이허는 슈트라서에게 프로이센 정부를 "제국"의 통제에서 복원하고 슈트라서를 프로이센의 새 장관-대통령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다.[62] 슐라이허는 슈트라서 파벌의 이탈을 통해 나치당 분열을 유도하여 히틀러가 새 정부를 지지하도록 압박하려 했다.[62] 그러나 히틀러가 슈트라서를 당내에서 고립시키면서 슐라이허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64]
슐라이허의 '가교 전선' 구상은 나치당의 분열을 유도하고, 다양한 사회 세력을 통합하여 안정적인 의회 기반을 마련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나치당 내부 권력 투쟁과 정치적 상황 변화로 인해 실패하고, 결국 히틀러의 집권으로 이어졌다.
3. 5. 나치당과의 관계
1930년 12월부터 슐라이허는 돌격대(SA) 지도자 에른스트 룀과 정기적으로 비밀리에 접촉했으며, 룀은 곧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되었다.[19] 1931년 1월 2일, 슐라이허는 국방부 규칙을 변경하여 나치당원들이 장교, 전투 부대 또는 해군으로 복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군사 기지와 무기고에서 복무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19] 1931년 3월, 슐라이허와 룀은 폴란드와의 전쟁이나 공산주의 쿠데타가 발생할 경우, SA가 동원되어 국가 비상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국방군' 장교의 지휘를 받기로 하는 비밀 협약을 맺었다.[19] 슐라이허와 룀의 긴밀한 우정은 나중에 1934년 히틀러가 슐라이허와 룀이 자신을 전복하려 했다는 주장에 대한 사실적인 근거를 제공하여 두 사람 모두 암살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19]슐라이허는 나치를 "본질적으로 건강한 ''민족 공동체''의 반응"으로 보았으며, "급진 좌파로부터 유권자를 끌어올 수 있고 이미 그렇게 한 유일한 정당"으로 칭찬했다.[19] 그는 자신의 새 우익 대통령 정부에 대한 나치의 지지를 확보하여 독일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했다. 슐라이허는 이후 다양한 나치 지도자들 간의 불화를 이용하여 SA를 국방군에 통합함으로써 나치를 제압하려 했다.[19]
1932년 4월 13일 브뤼닝 총리와 그뢰너 국방장관 겸 내무장관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나치당의 돌격대와 친위대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효과는 미미했고, 4월 23일 각 주에서 치러진 지방 선거에서 나치당은 바이에른주를 제외하고 모든 주 의회에서 제1당으로 약진했다.[29] 슐라이허는 브뤼닝 내각을 외면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한 우익 대연립 정권을 획책하여 나치당과 접촉, 4월 28일과 5월 8일 나치당 당수 아돌프 히틀러와 밀회를 가졌다. 양측은 브뤼닝과 그뢰너를 실각시키고, 돌격대 금지 명령을 해제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국회 선거까지 신 내각에 관용을 베푸는 것 등으로 합의했다.[29][30][31]
슐라이허는 자신의 정부에 대한 나치의 지지를 얻어 국회에서 과반수를 확보하고자 했다.[19] 1932년 12월 중순, 슐라이허는 고위 군 지도자 회의에서 나치 운동의 붕괴가 독일 국가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19] 1932년 말까지, 나치당(NSDAP)은 자금이 고갈되고, 내부 갈등에 더 취약해졌으며, 1932년 11월의 국회 선거에서 당이 득표를 잃으면서 기가 꺾였다. 슐라이허는 나치당이 조만간 자신의 정부를 지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그만이 나치에게 권력을 제공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나치당이 계속 붕괴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19]
나치의 지지를 얻으면서도 총리직을 유지하기 위해 슐라이허는 소위 ''Querfront''("교차 전선")의 형성을 이야기했는데, 이를 통해 그는 나치가 자신의 정부를 지지하도록 강요하는 방법으로 독일의 분열된 특별 이익을 비의회적이고 권위주의적이지만 참여적인 정권으로 통일하려 했다.[19] 히틀러가 자신의 정부를 지지하도록 압박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슐라이허는 사회민주당 노동조합, 기독교 노동조합, 그리고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이끄는 나치당의 경제적으로 좌익적인 분파에 접근하여 ''Querfront''를 설립하려는 시늉을 했다.[19]
1932년 12월 4일, 슐라이허는 슈트라서를 만나 프로이센 정부를 "제국"의 통제에서 복원하고 슈트라서를 프로이센의 새로운 장관-대통령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다.[19] 슐라이허는 슈트라서가 이끄는 자신의 파벌이 당에서 이탈하여 나치당 내 분열의 위협을 가하면 히틀러가 새 정부를 지지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슐라이허의 정책은 실패했는데, 히틀러가 당 내에서 슈트라서를 고립시켰기 때문이다.[19]
수상에 취임한 바로 그날인 12월 3일, 슐라이허는 나치당 조직 전국 지도자 그레고어 슈트라서에게 접근하여 그에게 부수상과 프로이센 주 수상 자리에 취임해 줄 것을 요청했다.[60][62] 당시 나치당의 선거 자금은 고갈되어 제대로 된 선거 운동을 거의 하지 못했고, 12월 4일 튀링겐 주 주 의회 선거에서는 지난 선거에 비해 40%나 득표를 잃는 참패를 겪었다.[62] 조직 전국 지도자 슈트라서에게는 탈당 신고서가 잇따라 도착했다.[63] 이러한 상황에 초조해진 슈트라서는, 12월 5일과 12월 7일 베를린의 호텔 카이저호프에서 열린 나치당 지도자 회의에서 당이 와해될 것이라며 즉시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타협적인 히틀러는 슈트라서를 철저하게 비난하고 매도했다. 결국 슈트라서는 당의 직위를 사임하게 되었고, 슐라이허의 나치당 분열 전략은 실패했다.[64]
3. 6. 슐라이허 내각 붕괴

슐라이허는 의회 바깥의 권위주의적이지만 정권에 참여하는 독일의 여러 세력들을 통합하여 Querfront(교차 전선)를 조직, 의회에서 과반수를 얻고자 하였다.[60] 그는 사회민주주의적 노동 조합, 기독교 노동조합, 그리고 나치에서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이끄는 좌익 지파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슈트라서는 당내 권력 투쟁에서 이미 히틀러에게 실권을 내 준 상황이었다.[62]
슐라이허는 처음에 일부 성과를 얻었으나, 결국 양측에서 외면받았다. 그러는 사이 가톨릭 중앙당 대표를 지낸 프란츠 폰 파펜 전 수상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지지를 얻게 되었는데, 대통령은 슐라이허가 힌덴부르크가 싫어하던 독일 사회민주당과 공조하려 했으며 "비밀 의회 정치"의 태도를 보인 데 우려하고 있었다.
1932년 12월 3일 수상에 취임한 슐라이허는[60] 나치당 조직 전국 지도자 그레고어 슈트라서에게 접근하여 그에게 부수상과 프로이센 주 수상 자리에 취임해 줄 것을 요청했다.[60][62] 나치당의 선거 자금은 고갈되어 제대로 된 선거 운동을 거의 하지 못했고, 12월 4일 튀링겐 주 주 의회 선거에서는 지난 선거에 비해 40%나 득표를 잃는 참패를 겪었다.[62] 조직 전국 지도자 슈트라서에게는 탈당 신고서가 잇따라 도착했다.[63] 이러한 상황에 초조해진 슈트라서는, 12월 5일과 12월 7일 베를린의 호텔 카이저호프에서 열린 나치당 지도자 회의에서 당이 와해될 것이라며 즉시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타협적인 히틀러는 슈트라서를 철저하게 비난하고 매도했다. 결국 슈트라서는 당의 직위를 사임하게 되었고, 슐라이허의 나치당 분열 전략은 실패했다.[64]
파펜은 슐라이허 몰래 히틀러, 힌덴부르크와 비밀 회합을 가졌으며, 힌덴부르크는 비상시 권력을 부여하고 제국 의회를 다시 해산하자는 슐라이허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1933년 1월 23일,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나치당 분열 전략이 실패했음을 알리고,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하여 나치당과 공산당을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힌덴부르크는 이를 거부했다.[69]
결국 1933년 1월 28일,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회견한 슐라이허는 사임을 신청하고, 히틀러를 후임 수상으로 임명하도록 힌덴부르크에게 권했다. 1월 30일 대통령은 슐라이허를 해임하고 히틀러를 새 총리로 앉혔다.
4. 암살
1934년 6월 30일 장검의 밤 사건 당시, 슐라이허는 주요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전부터 슐라이허가 호엔촐레른 왕가의 귀환을 협상하려 시도하는 것을 우려하여 그를 암살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74]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슐라이허는 직업 군인이면서도 "정치 장군"으로서 큰 정치적 권력을 휘둘렀다. 1932년 프란츠 폰 파펜 내각을 옹립하고 자신도 국방장관으로 입각했으나, 이후 파펜을 몰아내고 스스로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나치당 당수 아돌프 히틀러와 파펜의 협력으로 슐라이허 내각은 무너졌고,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내각이 탄생했다.
수상 퇴임 후, 슐라이허는 나치에 가까운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신임 국방장관의 제안으로 국방성 내 거처를 포기해야 했다. 은퇴 후 한때 상관이었던 빌헬름 그뢰너 전 국방장관과 화해하고 국내 여행을 떠났으나, 공공연하게 히틀러 정권을 비판하여 친구들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오트 소장은 위험을 감지하고 일본 체류를 권유했지만, 슐라이허는 "프로이센의 장군은 조국에서 도망치지 않는다"라며 거절했다.
4. 1. 장검의 밤 사건
1934년 6월 30일 장검의 밤 사건 당시,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주요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오랫동안 슐라이허를 암살 대상으로 여겼다.[74]1934년 6월 30일 오전 10시 30분경, 슐라이허의 자택에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슐라이허는 전화 통화를 하던 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Jawohl, ich bin General von Schleicher''"("예, 저는 폰 슐라이허 장군입니다")였으며, 이 말 뒤에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74] 총성을 들은 슐라이허의 아내 엘리자베트 폰 슐라이허도 현관으로 달려갔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슐라이허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그의 아내는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74] 슐라이허 암살을 실행한 인물로는 요하네스 슈미트가 지목되고 있다.

히틀러는 7월 13일 제국 의회 연설에서 슐라이허가 에른스트 룀과 함께 음모를 꾸며 정부를 전복하려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나치 당 기관지 "푀르키셔 베오바흐터"는 2년 후 "1933년 1월 29일의 슐라이허에 의한 쿠데타 계획"이라는 기사를 게재하여 슐라이허 숙청을 정당화했다. 다만, 국방군은 슐라이허의 명예 회복을 도모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
4. 2. 암살 이후

슐라이허의 후임 국방부 장관은 그의 숙적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였다. 블롬베르크는 국방부 장관이 되자마자 슐라이허와 관련된 장교들을 숙청했다.[5] 페르디난트 폰 브레도우를 해임하고 발터 폰 라이헤나우 장군으로 교체했으며, 오이겐 오트는 국방군 수장 직에서 해임되어 일본 주재 무관으로 망명했으며, 빌헬름 아담 장군은 군대청(위장된 참모본부)의 수장 직에서 해임되고 루드비히 베크로 교체되었다.[5] 육군 총사령관이자 슐라이허의 측근이었던 쿠르트 폰 함머슈타인-에퀴르트 장군은 1934년 2월, 그의 권한이 실질적이기보다 형식적으로 변하자 절망하여 사임했다.[5] 함머슈타인의 사임으로 1926년부터 육군을 지배해 온 슐라이허 파벌 전체가 고위 지휘부에서 해임되었고, 이로써 슐라이허에게 남은 모든 권력의 원천이 파괴되었다.[5]
1934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장검의 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슐라이허는 주요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1934년 6월 30일 오전 10시 30분경, 슐라이허는 자택에서 지인과 통화 중에 정체불명의 방문을 받고, 응대하던 중 총격을 받았다. 달려온 부인 엘리자베트 폰 슐라이허도 총격을 받아 함께 사망했다. 슐라이허의 마지막 말은 "''Jawohl, ich bin General von Schleicher''" ("예, 저는 폰 슐라이허 장군입니다")였으며, 이 말 뒤에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5] 습격한 것은 친위대의 요하네스 슈미트 등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현역 육군 장성이었고, 게다가 부인까지 휘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국방군은 나치에 대해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다. 수사는 포츠담 시 경찰청장 볼프-하인리히 폰 헬도르프의 지시에 의해 중단되었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던 가정부 마리아 귄터는 다음 해 의문의 익사를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발표되었다.
슐라이허의 장례식에서 슐라이허의 친구 쿠르트 폰 함머슈타인-에퀴르트는 친위대가 장례식 참석을 거부하고 조문객들이 가져온 화환을 압수하자 불쾌감을 느꼈다. 함머슈타인과 원수 아우구스트 폰 막켄젠은 슐라이허의 명예 회복을 시도하기 시작했다.[5] 육군은 어떻게든 친위대에서 슐라이허의 파일을 입수했다. 막켄젠은 슐라이허에게 건배하는 400명의 장교 회의를 주재했고, 슐라이허와 브레도우의 이름을 연대 명예 롤에 올렸다.[5]
7월 13일 국회 연설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슐라이허가 룀과 공모하여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고 비난했다. 히틀러는 슐라이허와 룀이 모두 프랑스의 사주를 받은 반역자라고 주장했다. 슐라이허는 앙드레 프랑수아-퐁세의 절친이었고, 음모에 대한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슐라이허가 프랑스를 위해 일했다는 주장은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표면적으로 타당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5]
슐라이허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육군의 지원은 효과가 있었다.[5] 1935년 1월 3일 베를린 국립 오페라에서 열린 연설에서 히틀러는 슐라이허가 "실수로" 총에 맞아 사망했고, 그의 살인은 허위 정보에 근거하여 명령되었으며, 슐라이허의 이름은 그의 연대 명예 롤에 복원될 것이라고 밝혔다.[5]

슐라이허의 명예를 회복하는 발언은 독일 언론에 게재되지 않았지만, 원수 폰 막켄젠은 1935년 2월 28일 참모 장교들의 공개 모임에서 슐라이허의 명예 회복을 발표했다. 육군으로서는 슐라이허의 살인 사건이 해결된 것으로 간주되었다.[5] 나치는 개인적으로 슐라이허를 계속 대역죄로 비난했다. 헤르만 괴링은 1935년 1월 바르샤바 방문 중 얀 셈베크에게 슐라이허가 1933년 1월 히틀러에게 프랑스와 소련과 관계를 맺고 후자와 폴란드를 분할할 것을 촉구했으며, 이것이 히틀러가 슐라이허를 암살한 이유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1935년 5월 22일 폴란드 대사 요제프 립스키에게 슐라이허는 "그가 라팔로 조약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정당하게 살해되었다"고 말했다.[5]
5. 유산과 평가
(원문 소스 부족으로 이전 답변과 동일합니다.)
슐라이허에 대한 내용은 현재 참조할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슐라이허의 유산과 평가에 대한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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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Kurt von Schleicher 1882–1934
https://www.dhm.de/l[...]
2017-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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ベネット、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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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次大戦中における自由労働組合の超経営的参加政策(ドイツ・一九一四-一九一八)(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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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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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阿部、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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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阿部、p.41-42
[13]
문서
阿部、p.43
[14]
문서
ゲルリッツ(文庫版)、下巻p.15
[15]
문서
ゲルリッツ(文庫版)、下巻p.18
[16]
문서
ゲルリッツ(文庫版)、下巻p.32
[17]
문서
ヴィストリヒ、p.121
[18]
문서
ベネット、p.171
[19]
문서
阿部、p.127
[20]
문서
ゲルリッツ(文庫版)、下巻p.68
[21]
문서
アイク、3巻p.124
[22]
문서
ベネット、p.183
[23]
문서
ベネット、p.183
[24]
문서
ゲルリッツ(文庫版)、下巻p.81
[25]
문서
ベネット、p.184
[26]
문서
モムゼン、p.260
[27]
문서
モムゼン、p.260-261
[28]
문서
阿部、p.165
[29]
문서
阿部、p.195
[30]
문서
トーランド、上巻p.302
[31]
문서
モムゼン、p.389
[32]
문서
アイク、第4巻p.147
[33]
문서
フェスト、上巻p.432-433
[34]
문서
アイク、第4巻p.148-150
[35]
문서
林、p.179
[36]
참조
阿部、p.196
[37]
참조
モムゼン、p.392
[38]
참조
フェスト、上巻p.434
[39]
참조
モムゼン、p.396
[40]
참조
阿部、p.197
[41]
참조
阿部、p.200
[42]
참조
フェスト、上巻p.438
[43]
참조
モムゼン、p.416
[44]
참조
阿部、p.201
[45]
참조
モムゼン、p.417-418
[46]
참조
阿部、p.205
[47]
참조
トーランド、上巻p.313
[48]
참조
フェスト、上巻p.447
[49]
참조
モムゼン、p.436-437
[50]
참조
阿部、p.205
[51]
참조
モムゼン、p.438-439
[52]
참조
フェスト、上巻p.448
[53]
참조
阿部、p.205-206
[54]
참조
トーランド、上巻p.317
[55]
참조
フェスト、上巻p.440-441
[56]
참조
トーランド、上巻p.318
[57]
참조
モムゼン、p.440-441
[58]
참조
フェスト、上巻p.451
[59]
참조
モムゼン、p.441
[60]
참조
阿部、p.206
[61]
참조
アイク、第4巻p.279
[62]
참조
モムゼン、p.456
[63]
참조
フェスト、上巻p.452
[64]
참조
フェスト、上巻p.454
[65]
참조
トーランド、上巻p.324
[66]
참조
トーランド、上巻p.325-328
[67]
참조
アイク、第4巻p.324
[68]
참조
阿部、p.212
[69]
참조
フェスト、上巻p.462
[70]
참조
モムゼン、p.471
[71]
문서
阿部、p.213
[72]
문서
モムゼン、p.476
[73]
서적
Fritz Günther von Tschirschky: Erinnerungen eines Hochverräters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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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ans-Otto Meissner, Junge Jahre im Reichspräsidentenpala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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