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나그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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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나그라 전투는 기원전 457년, 포키스가 도리스를 침공하자 스파르타가 도리스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 군대와 아테네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스파르타는 포키스를 굴복시킨 후 귀국길에 아테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로 진군했고, 아테네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아르고스 등 동맹군을 이끌고 출격했다. 전투는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스파르타는 승리를 주장하며 메가라를 거쳐 귀환했다. 이후 아테네는 보이오티아를 침공하여 승리하고 세력을 확장했으며, 타나그라 전투 후 키몬의 노력으로 스파르타와 5년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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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그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
날짜 | 기원전 457년 |
장소 | 보이오티아 타나그라 |
결과 | 스파르타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아테네 |
교전국 1 동맹 | 아르고스 및 기타 동맹국 |
교전국 2 | 스파르타 및 기타 동맹국 |
지휘관 | |
아테네 지휘관 | 미론ides |
스파르타 지휘관 | 니코메데스 |
병력 규모 | |
아테네 병력 | 14,000명 |
스파르타 병력 | 11,500명 |
사상자 규모 | |
아테네 사상자 | 불명 |
스파르타 사상자 | 불명 |
관련 전투 |
2. 배경
포키스가 도리스의 보이오스, 키티니온, 에소네온 등의 도시를 침공하자, 스파르타는 동맹국이자 자신들 도리아 인의 고향인 도리스를 돕기 위해 파병을 결정했다. 어린 플레이스토아낙스 왕 대신 니코메데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중장보병 1,500명과 펠로폰네소스 동맹군 10,000명으로 구성된 군대가 파견되었다. 그들은 포키스를 성공적으로 굴복시키고 정복지에서 조약을 맺게 했다.[26][27]
하지만 귀국길은 순탄치 않았다. 해로를 이용하면 크리사 만에서 아테네 함대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고, 육로를 통과하려면 게라네이아 고개를 아테네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파르타 군은 보이오티아에 머물며 돌파 방도를 모색했고, 타나그라로 진로를 택했다. 이에 맞서 아테네는 아르고스 군 1,000명을 포함한 14,000명의 동맹군을 출격시켰다.[28][29]
2. 1.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후의 세력 구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패권을 차지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아테네 제국의 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외교적 모욕과 요구가 잇따르면서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6]기원전 478년,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향후 침략에 대비하여 아테네를 비롯한 다른 그리스 도시들에게 성벽 재건을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계략을 의심하고 이미 건설 작업을 시작한 아테네는 성벽 완공을 위해 외교적 절차를 지연시키기 위해 술책을 사용했다. 아테네는 아테네 정치인 테미스토클레스를 라케다이몬으로 보내 아테네가 성벽 건설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고, 그 결과 테미스토클레스가 스파르타에게 긴 성벽 재건 계획이 있다고 말했을 때 긴 성벽은 거의 완공되었다.[7]
기원전 458년, 아테네는 도시와 피레우스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방어 구조물인 긴 성벽 건설을 시작했다.[3] 다른 성벽들과 마찬가지로, 긴 성벽 덕분에 아테네인들은 전투를 거부하고 바다에서 오는 보급품으로부터 단절될 염려 없이 후퇴할 수 있었다.[4]
2. 2. 아테네의 성장과 스파르타의 견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패권을 차지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아테네 제국의 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외교적 모욕과 요구가 잇따르면서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6]기원전 478년,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향후 침략에 대비하여 아테네를 비롯한 다른 그리스 도시들에게 성벽 재건을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계략을 의심하고 이미 건설 작업을 시작한 아테네는 성벽 완공을 위해 외교적 절차를 지연시키는 술책을 사용했다. 아테네는 아테네 정치인 테미스토클레스를 라케다이몬으로 보냈고, 테미스토클레스가 스파르타에게 긴 성벽 재건 계획이 있다고 말했을 때는 긴 성벽이 거의 완공된 상태였다.[7] 기원전 464년, 헬롯 반란과 요새 이토메 포위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던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비롯한 동맹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8] 사령관 키몬의 주장에 따라 "상당한 병력"이 스파르타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9] 그러나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반란을 일으킨 이토메의 헬롯을 도울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하여 아테네 군대를 돌려보냈다. 이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켰고, 모욕감과 굴욕감을 느낀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동맹을 파기했다.[10]
기원전 458년, 아테네는 도시와 피레우스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방어 구조물인 긴 성벽 건설을 시작했다.[3] 다른 성벽들과 마찬가지로, 긴 성벽 덕분에 아테네인들은 전투를 거부하고 바다에서 오는 보급품으로부터 단절될 염려 없이 후퇴할 수 있었다.[4]
2. 3. 포키스의 도리스 침공과 스파르타의 개입
포키스가 도리스의 보이오스, 키티니온, 네소네온 등의 도시를 침공하자, 도리아인의 고향이자 동맹국인 도리스를 돕기 위해 스파르타는 파병을 결정했다. 어린 플레이스토아낙스 왕 대신 니코메데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중장보병 1,500명과 펠로폰네소스 동맹군 10,000명으로 구성된 군대가 파견되었다. 이들은 포키스를 성공적으로 굴복시키고 정복지에서 조약을 맺게 했다.[26][27]하지만 귀국길은 순탄치 않았다. 해로를 이용하면 크리사 만에서 아테네 함대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고, 육로를 통과하려면 게라네이아 고개를 아테네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파르타 군은 보이오티아에 머물며 돌파 방도를 모색했고, 타나그라로 진로를 택했다. 이에 맞서 아테네는 아르고스 군 1,000명을 포함한 14,000명의 동맹군을 출격시켰다.[28][29]
3. 전투 과정
기원전 457년 양군은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에서 격돌했다. 첫날은 테살리아 기병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아르고스 군은 전선을 유지하며 싸웠고, 양측 모두 수많은 전사자를 냈다. 그날 밤, 테살리아 군의 배신을 모르는 아테네의 보급 부대가 테살리아 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후 원병으로 온 스파르타 군과 아테네 군 사이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져 양측 모두 많은 전사자를 기록했다.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양측이 전투의 승리를 주장했지만, 투키디데스는 스파르타 측의 승리라고 언급했다.[11] 이후 스파르타와 그 동맹군은 메가라와 게라네이아 고개를 통과하여 무사히 귀국했다.[11]
3. 1. 스파르타 군의 고립과 아테네의 대응
포키스인들이 도리스의 도시들과 전쟁을 벌이자, 도리아인 출신 스파르타는 미성년 조카이자 왕인 플레이스토아낙스를 대신하여 섭정으로 있던 니코메데스의 지휘 아래 구원군을 보냈다.[11] 스파르타 호플리테스 1,500명과 동맹군 10,000명으로 구성된 군대가 보이오티아로 진입하여 포키스를 복종시켰다.[15]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처사에 경멸감을 느끼고, 아테네가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장벽 건설을 막기 위해 도시 내부의 파벌과 협상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보이오티아에 고립된 스파르타 군대를 차단하려 했다.[12]
추방된 아테네 정치인이자 장군인 키몬은 오이네이스 부족으로 알려진 자신의 병력과 함께 아테네를 지원하기 위해 아테네인들을 만났으나, 500인 평의회가 아테네 병력에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고 우려하여 거부당했다.[13]
스파르타는 아테네 해군이 통제하는 코린트 만을 통한 수송이나, 메가라에서 지원받는 아테네 군인이 점령한 게라네이아 산길을 통과하는 어려운 행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래서 안전한 귀환 경로가 열리거나 아테네의 전면 공격을 기다리기로 결정했다.[14]

하지만 귀국길에 해로를 이용하려 하자 크리사 만에서 아테네 함대의 방해를 받을 위험이 있었고, 육로를 이용하려 해도 게라네이아 고개가 아테네에 의해 장악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보이오티아에 머물면서 돌파 방법을 모색한 후, 타나그라로 진군했다. 이에 대해 아테네는 아르고스 군 1,000명과 기타 동맹군을 포함 총 14,000명으로 출격했다.[21][23]
3. 2. 타나그라 전투
기원전 457년 양군은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에서 격돌했다. 첫날은 테살리아 기병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아르고스 군은 전선을 유지하며 싸웠고, 양측 모두 수많은 전사자를 냈다. 그날 밤, 테살리아 군의 배신을 모르는 아테네의 보급 부대가 테살리아 군의 공격을 받았지만, 아테네 군에 이어 스파르타 군이 구원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양측에서 다수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양측이 전투의 승리를 주장했지만, 투키디데스는 스파르타 측의 승리라고 언급했다.[11] 이후 스파르타와 그 동맹군은 메가라와 게라네이아 고개를 통과하여 무사히 귀국했다.[11]1,500명의 스파르타인과 동맹 호플리테스 10,000명으로 구성된 11,500명의 스파르타 군과 아르고스 출신의 동맹군 1,000명을 포함한 14,000명의 아테네 군이 타나그라에서 맞붙었다. 전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15]
전투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없었지만, 스파르타와 아테네 군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스파르타는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했으며, 코린토스 지협의 산길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귀향길에 메가리드에 진입한 후 과일 나무를 베어냈다.[16]
3. 3. 키몬의 참전 시도와 좌절
아테네에서 추방된 정치인이자 장군이었던 키몬은 오이네이스 부족으로 알려진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아테네를 지원하기 위해 아테네인들과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500인 평의회는 키몬이 아테네 병력에 혼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그의 지원을 거부했다.[13]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타나그라 전투 62일 후, 아테네는 뮈로니데스의 지휘 아래 보이오티아를 침공해 오이노피타 전투에서 보이오티아 군을 물리치고 포키스와 오푼티안 로크리스를 점령했다.[17][18][19] 수년 후, 키몬은 스파르타와의 관계로 인해 추방에서 소환되어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 5년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20]
4. 1. 스파르타의 귀환과 아테네의 반격
타나그라 전투 62일 후, 아테네는 미로니데스의 지휘 아래 보이오티아를 침공했다. 아테네군은 오이노피타 전투에서 보이오티아군을 격파하고 보이오티아를 세력 하에 두었으며,[25] 스파르타가 건설한 벽을 무너뜨리고 오푼티안 로크리스의 부유한 주민 100명을 인질로 잡았다.[17] 이 승리로 아테네는 분쟁의 근원지였던 포키스와 오푼티안 로크리스도 점령했다.[18][19] 타나그라 전투 후 수년이 지나, 키몬은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특별한 관계로 인해 추방에서 소환되었다. 키몬은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5년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데 기여했다.[20]4. 2. 아테네의 세력 확장과 5년 평화 조약
타나그라 전투 62일 후, 아테네는 미로니데스의 지휘 아래 보이오티아를 침공했다. 그들은 오이노피타 전투에서 보이오티아군을 격파하고 보이오티아를 세력 하에 두었다.[25] 오이노피타 전투에서 테베를 격파한 아테네군은 보이오티아를 장악했으며, 스파르타가 건설한 벽을 무너뜨리고 오푼티안 로크리스의 부유한 시민 100명을 인질로 잡았다.[17] 이 승리로 아테네는 분쟁의 근원지였던 포키스와 오푼티안 로크리스도 점령했다.[18][19] 타나그라 전투 후 수년이 지나, 키몬은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특별한 관계로 인해 추방에서 소환되었다. 키몬은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5년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데 기여했다.[20]4. 3.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의 전개
이 전투 62일 후, 아테네는 미로니데스의 지휘 아래 보이오티아를 침공해 오이노피타 전투에서 보이오티아 군을 물리치고 보이오티아를 세력 하에 두었다. 아테네군은 오이노피타 전투에서 테베를 격파하고 보이오티아를 장악했으며, 스파르타가 건설한 벽을 무너뜨리고 오푼티안 로크리스의 부유한 시민 100명을 인질로 잡았다.[17] 이 승리로 아테네는 분쟁의 근원지였던 포키스와 오푼티안 로크리스도 점령했다.[18][19] 타나그라 전투 후 수년이 지나, 키몬은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특별한 관계로 인해 추방에서 소환되었다. 키몬은 이러한 특별한 관계를 바탕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5년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데 기여했다.[20]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2]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3]
서적
The Greek World 479-323 BC
Routledge
2011-03-17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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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http://dx.doi.org/10[...]
Oxford University Press
2021-11-28
[6]
서적
The landmark Thucydides : a comprehensive guide to the Peloponnesian War
Free Press
[7]
서적
The landmark Thucydides : a comprehensive guide to the Peloponnesian War
Free Press
[8]
서적
The Oxford Companion to Classical Civiliz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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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Old Oligarch': The Constitution of the Athenians Attributed to Xenophon
Oxford University Press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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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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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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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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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ディオドロ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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ディオドロ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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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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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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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디오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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