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네이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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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로네이아 전투는 기원전 447년에 벌어진 고대 그리스의 전투이다. 아테네가 보이오티아를 장악하려 했으나, 보이오티아의 저항으로 인해 아테네는 패배했다. 이 전투는 델로스 동맹의 세력 약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펠로폰네소스 동맹과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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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네이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 명칭 | 코로네이아 전투 |
일부 |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
시기 | 기원전 447년 |
장소 | 코로네이아 |
결과 | 보이오티아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보이오티아 도시 국가 |
교전국 2 | 델로스 동맹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스파르톤 |
지휘관 2 | 톨미데스 |
병력 규모 | |
병력 1 | 불명 |
병력 2 | 호플리테스 1,000명, 기타? |
사상자 규모 | |
사상자 1 | 불명 |
사상자 2 | 불명 |
2. 배경
기원전 457년 아테네는 오이노피타 전투에서 보이오티아 군을 격파하고 테바이를 제외한 보이오티아 전역을 점령했다. 이는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주도하며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2. 1. 보이오티아의 저항
기원전 448년 제2차 신성 전쟁 이후, 망명했던 보이오티아인들이 오르코메노스와 카이로네이아 등 보이오티아의 여러 지역을 아테네로부터 되찾기 시작했다.[6] 이들은 아테네의 지배에 저항하며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3. 코로네이아 전투 (기원전 447년)
기원전 457년 오이노피타 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는 테바이를 제외한 보이오티아 전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기원전 448년 제2차 신성 전쟁 이후, 망명한 보이오티아인들이 오루코메노스와 카이로네이아 등 보이오티아의 여러 지역을 아테네로부터 되찾기 시작했다. 이에 아테네는 톨미데스 휘하의 중장보병 1,000명과 동맹군을 보내 카이로네이아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팔아 수비대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들은 코로네이아로 진격하던 중, 스파르톤이 이끄는 보이오티아, 로크리스, 에우보이아 연합군의 습격을 받아 패배했고, 톨미데스는 전사했다.[6]
3. 1. 전투의 결과
아테네는 포로 반환을 조건으로 보이오티아에서 철수해야 했고, 보이오티아는 독립을 회복했다.[6] 이 패배로 에우보이아와 메가라 등 아테네에 대항하는 동맹국들의 반란이 잇따랐다. 아테네는 이러한 반란에 대처하는 동시에,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의 전투도 치러야 했다. 결국 기원전 446년 또는 445년에 아테네는 스파르타 및 그 동맹국들과 30년 평화 조약을 맺고 일시적으로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4. 전투 이후의 정세
코로네이아 전투 패배로 아테네는 보이오티아 지배권을 상실했다.[6] 이로 인해 아테네의 세력이 약화되었고, 델로스 동맹에 균열이 생겼다.
4. 1. 펠로폰네소스 동맹과의 관계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패배한 후, 에우보이아와 메가라 등 아테네에 대항한 동맹국들의 반란이 잇따랐다. 아테네는 이러한 반란에 대처하고, 이에 편승한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의 전투를 치러야 했다.[6] 결국, 기원전 446년 또는 445년에 아테네는 스파르타 및 그 동맹국들과 삼십년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일단 평화를 추구했다.5. 역사적 의의
코로네이아 전투는 아테네의 팽창 정책에 제동을 걸고, 델로스 동맹의 약화를 초래한 중요한 사건이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아테네는 보이오티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고, 에우보이아와 메가라 등 동맹국들의 반란에 직면했다.[6] 이는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동맹과의 전쟁을 치르고, 결국 기원전 445년에 삼십년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조
[1]
문서
ディオドロス, XII, 6
[2]
문서
パウサニアス, I, 27, 5
[3]
문서
プルタルコス, 「ペリクレス」, 18
[4]
문서
プルタルコス, 「アゲシラオス」, 19
[5]
문서
トゥキュディデス, I, 113
[6]
문서
디오도로스, XII,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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