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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스토아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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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을 물리친 파우사니아스 장군의 아들로, 스파르타의 아기아스 왕가 출신이다. 그는 사촌 플레이스타르쿠스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했으며, 미성년자였기에 삼촌 니코메데스가 섭정 역할을 했다. 그는 아테네와의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평화를 추구했으며, 기원전 446년 아티카 침공 후 철수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다. 이후 델포이 신탁의 조언에 따라 기원전 428년 왕위에 복귀하여 니키아스 화약 체결에 기여했으며, 기원전 40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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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스토아낙스
기본 정보
사망409 BC
사망 장소스파르타
통치 시작458 BC
통치 종료409 BC
이전 통치자플레이스타르코스
다음 통치자파우사니아스
왕조아기아데

2. 가계 배경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스파르타의 두 왕가 중 하나인 아기아드 왕가 출신이다.[1] 그의 아버지는 파우사니아스로,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하여 그리스를 구한 영웅적인 장군이었다.[55][1] 그러나 파우사니아스는 이후 메디즘(페르시아 내통) 혐의를 받아 기원전 467년 또는 466년에 에포르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1]

플레이스토아낙스는 기원전 470년대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그에게는 클레오메네스와 아리스토클레스라는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1] 그는 자녀 없이 사망한 사촌 플레이스타르쿠스(재위: 기원전 480–459)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1][2][55] 당시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그의 삼촌이자 아버지 파우사니아스의 동생인 니코메데스가 섭정을 맡아 그를 돌보며 국정을 운영했다.[60][2][3][55]

3. 생애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스파르타의 아기아스 왕조 출신 왕이다. 그는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영웅인 파우사니아스 장군의 아들로,[1] 기원전 470년대 후반에 태어났다.[1] 기원전 459년, 자녀 없이 사망한 사촌 플레이스타르쿠스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1][2] 즉위 초기에는 왕족이자 삼촌인 니코메데스가 섭정을 맡아 후견했다.[60][2][3]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아테네와의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통치했지만, 평화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였다. 기원전 446년, 그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군대를 이끌고 아티카를 침공했으나,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와 협상 후 철수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그는 고문이었던 클레안드리데스와 함께 뇌물 수수 혐의로 기소되었다.[61][62] 클레안드리데스는 사형 선고를 피해 도망쳤고, 플레이스토아낙스는 막대한 벌금을 부과받았으나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기원전 445년 추방당했다.[61][62]

기원전 427년, 19년간의 망명 생활 끝에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스파르타로 소환되었다. 이는 델포이 신탁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으나, 무녀를 매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63][36] 복귀 후 그는 다시 왕위에 올라 19년간 통치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진행 중이던 시기, 그는 평화 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화약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63] 정적들은 과거 아티카 침공 실패를 들어 그를 비난했지만, 그는 니키아스 화약의 성과를 내세워 이에 맞섰다.

같은 해인 기원전 421년,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아르카디아의 파르하시아 지역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파르하시아의 종주국이었던 만티네이아를 물리치고 파르하시아를 독립시켰다.[64]

플레이스토아낙스는 기원전 409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파우사니아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54]

3. 1. 첫 번째 통치 (기원전 459년 ~ 기원전 445년)

기원전 459년, 스파르타의 왕 플레이스타르쿠스가 자식 없이 사망하자 그의 사촌인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왕위를 계승했다.[1]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을 격파한 명장 파우사니아스의 아들이다.[1]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삼촌이자 파우사니아스의 동생인 니코메데스가 섭정을 맡아 그를 후견했다.[2][3][55]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스파르타의 두 왕가 중 하나인 아기아스 왕가에 속했다.[1]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즉위할 무렵, 그리스 세계는 스파르타아테네를 중심으로 각자의 동맹 세력을 규합하여 대립하는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60년 ~ 기원전 445년)이 한창이었다.[3] 기원전 457년, 섭정 니코메데스는 도리스를 지원하고 포키스의 침공을 격퇴한다는 명분으로 1,500명의 스파르타 병사와 10,000명의 동맹군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다.[4] 그러나 이 군대의 실제 목적은 포키스 격퇴보다는 서쪽에서 아티카를 직접 침공하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있다.[5] 니코메데스는 보이오티아의 타나그라까지 진군하여 아테네 군과 교전했다.[8] 이 타나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는 승리했지만 상당한 손실을 입었고, 결국 메가라를 거쳐 코린토스 지협을 통해 펠로폰네소스로 철수해야 했다.[9]

기원전 446년, 아테네와의 5년 평화 조약이 만료되자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첫 원정에 나섰다. 당시 20대였던 젊은 왕을 보좌하기 위해 클레안드리데스(아마도 그 해의 에포르였을 것으로 추정됨)를 포함한 고문단이 동행했다.[10][11] 스파르타는 메가라와 에우보이아 섬에서 일어난 반(反)아테네 봉기를 이용해 아테네를 압박하려 했다.[12] 플레이스토아낙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을 이끌고 아티카를 침공하여 아테네 근교의 엘레우시스 지역까지 진군하며 약탈했다.[13]

당시 에우보이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섬에 가 있던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 군의 침공 소식을 듣고 급히 본토로 돌아왔다. 양측의 군대가 대치하며 전투가 임박한 상황이었으나,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도 평화를 원했던 인물로,[56] 페리클레스와 협상을 벌였다. 아테네가 그리스 본토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메가라, 트로이젠, 아카이아 등에서 주둔군을 철수하는 조건으로 군대를 물렸다.[13][14]

그러나 스파르타로 귀환한 플레이스토아낙스와 클레안드리데스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유리한 상황에서 아테네를 공격하지 않고 철수한 것에 대해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된 것이다.[61][62]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가 자신의 재임 기간 회계 장부에 '필요 경비' 명목으로 10 탈렌트(약 260kg의 은에 해당)를 지출했다고 기록했는데, 이것이 스파르타 측을 매수하는 데 사용된 자금일 수 있다고 시사했다.[15][16]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실제로 뇌물을 받았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17][18] 그것이 철수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을 수 있다. 그는 페리클레스가 제시한 조건이 전투 없이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13][19] 원정 중이던 기원전 446년 9월 2일에 발생한 일식을 전쟁 지속에 대한 불길한 징조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20] (실제로 그의 할아버지인 섭정 클레옴브로투스는 기원전 480년에 일식을 이유로 원정을 중단한 전례가 있다.[21]) 또는 아테네가 지나치게 약화될 경우, 페르시아의 잠재적 위협에 그리스 전체가 취약해질 것을 우려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20]

결국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다수의 에포르와 공동 왕이었던 아르키다무스 2세가 그에게 불리한 입장을 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3] 그는 15 탈렌트라는 막대한 벌금을 부과받았으나, 이를 지불하지 못하거나 거부하고 결국 스파르타를 떠나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25][26][61][62] 함께 기소된 클레안드리데스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처형 전에 탈출하여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 도시인 투리오이로 망명했다.[27][28]

아이러니하게도, 플레이스토아낙스의 추방을 야기했던 페리클레스와의 평화 협상 조건은 이후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에 체결된 30년 평화 조약의 토대가 되었다.[29]

3. 2. 망명 (기원전 445년 ~ 기원전 427년)

기원전 446년, 플레이스토아낙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군을 이끌고 아티카를 침공했으나, 아테네페리클레스에게 매수된 고문 클레안드리데스의 영향으로 철수했다.[61][62] 이 일로 클레안드리데스는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도주했고, 플레이스토아낙스는 막대한 벌금을 부과받았다. 벌금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기원전 445년 스파르타에서 추방되었다.[61][62]

제우스 신전을 내려다보는 리카이온 산의 모습.


처벌을 피하고자 플레이스토아낙스는 라코니아를 떠나 아르카디아의 리카이온 산으로 피신했다. 그는 그곳 제우스 리카이오스의 신성한 땅 안에 집을 짓고 살면서 신의 보호를 받고자 했다.[30][31] 이 신성한 장소는 스파르타 당국의 처벌이나 암살 위협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는 피난처 역할을 했다.[33] 그는 기원전 446년에 있었던 일식을 신의 계시로 해석하며 자신의 망명 생활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32]

망명 기간 동안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아들 파우사니아스를 낳았다.[34] 아들의 이름을 반역죄로 처형당한 자신의 아버지(섭정 파우사니아스)와 같게 지은 것은, 스파르타 당국에 대한 그의 반항심을 보여주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34]

플레이스토아낙스가 망명해 있는 동안, 스파르타의 다른 왕인 아르키다무스 2세가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아르키다무스는 플레이스토아낙스의 주요 정적이었으며, 플레이스토아낙스의 아들 파우사니아스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권력을 거의 독점할 수 있었다.[35] 이러한 이유로 아르키다무스는 델포이 신탁이 여러 차례 플레이스토아낙스의 복귀를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반대했다.[35] 플레이스토아낙스의 망명은 기원전 427년까지 19년간 계속되었다.

3. 3. 두 번째 통치 (기원전 427년 ~ 기원전 409년)

기원전 427년, 플레이스토아낙스는 19년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스파르타로 돌아와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의 복귀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델포이 신탁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으나[63][58], 투키디데스는 그의 동생 아리스토클레스가 델포이의 무녀인 피티아에게 뇌물을 주어 복귀를 종용했다는 기록을 남겼다.[36] 하지만 같은 해 그의 오랜 정적이었던 아르키다무스 2세가 사망한 것이[37] 복귀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순례자와 기부금이 줄어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델포이 신전 측에서도 아테네와의 평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플레이스토아낙스의 복귀를 원했을 수 있다.[38]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로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스파르타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뇌물 수수 의혹은 그의 통치 기간 내내 따라다녔다.[35] 스파르타에서는 그의 복귀를 기념하고 왕으로서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고대 건국 신화와 관련된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40]

플레이스토아낙스가 복귀했을 당시,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 발발)으로 아테네와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평화를 주장했던 플레이스토아낙스는[61] 복귀 후 스파르타 내 평화파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의 복귀 이후 스파르타의 대 아테네 정책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기원전 426년 아기스 2세가 이끈 아티카 침공이 지진이라는 불길한 징조를 이유로 갑작스럽게 중단된 사건은[43][44] 플레이스토아낙스의 영향력이 작용한 결과라는 해석도 있다.[45] 또한 기원전 425년 스팍테리아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패배한 후 아테네에 평화를 제안한 것 역시 그의 의중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46]

플레이스토아낙스의 평화 노력은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평화 조약 체결로 결실을 맺었다.[63][58] 그는 이 조약 체결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투키디데스는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전쟁 중 발생한 스파르타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비난을 면하기 위해 평화를 추진했다고 다소 비판적으로 서술했지만[47][48][49], 실제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평화가 스파르타의 국익에 더 부합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50] 이 조약은 아테네 측 협상 대표였던 니키아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지만, 플레이스토아낙스의 주도적인 역할을 고려할 때 '플레이스토아낙스의 평화'라고 불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23]

같은 해, 플레이스토아낙스는 니키아스 평화 조약에 불만을 품고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탈퇴한 만티네이아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아르카디아의 파르하시아 지역으로 원정을 떠났다.[51][52] 그는 만티네이아 군대를 격파하고 파르하시아를 만티네이아의 지배에서 해방시켰다.[64][59] 이 지역은 그가 망명 생활을 했던 리카이온 산과 가까운 곳으로, 플레이스토아낙스는 과거 망명 시절 맺었던 인연을 활용하여 파르하시아를 지원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53]

플레이스토아낙스는 기원전 409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인 파우사니아스가 왕위를 계승했다.[54]

4. 평가 및 논란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스파르타 내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온건파와 전쟁을 주장하는 강경파 사이에서 갈등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정책은 당시 스파르타 사회, 특히 강경파의 시각과는 다른 노선을 걸었기에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기원전 446년, 플레이스토아낙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군대를 이끌고 아티카를 침공했으나 엘레우시스 근방까지 진격한 후 아테네와 협상을 벌여 군대를 철수시켰다.[13][14] 이 결정은 스파르타 내부에서 큰 반발을 샀다. 플레이스토아낙스와 그의 고문이었던 클레안드리다스는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에게 뇌물을 받고 철수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15][16]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가 자신의 재임 기간 회계 장부에 기록한 10 탈렌트의 불분명한 지출이 바로 이 뇌물이었을 것이라고 시사했다.[15][16]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실제로 뇌물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지만,[17][18] 단순히 페리클레스가 제시한 조건(아테네의 그리스 본토 영유권 포기 및 일부 주둔군 철수)이 전투 없이 원정을 마무리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13][19] 또한, 기원전 446년 9월 2일 발생한 일식을 전쟁 지속에 대한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였거나,[20] 아테네의 과도한 약화가 페르시아의 재침공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를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20]

결국 플레이스토아낙스는 유죄 판결을 받고 거액의 벌금형(15 탈렌트)을 선고받았으나, 이를 납부하지 못하고 아르카디아의 리카이온 산으로 망명했다.[25][26] 그는 제우스 리카이오스의 신성한 구역 안에 거처를 마련했는데, 이는 자신을 기소한 스파르타 세력으로부터 신변을 보호하고, 일식과 관련된 제우스 신의 가호를 통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30][31][32][33] 클레안드리다스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투리오이로 도주했다.[27][28] 아이러니하게도 플레이스토아낙스와 페리클레스가 합의한 내용은 이후 체결된 30년 평화 조약의 기초가 되었다.[29]

플레이스토아낙스는 망명 중에도 스파르타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 했으며, 특히 공동 왕이었던 아르키다무스 2세는 그의 복귀를 강력히 반대했다.[35] 기원전 427년(또는 428년), 플레이스토아낙스는 망명 19년 만에 스파르타로 돌아왔다. 투키디데스는 그의 동생 아리스토클레스가 델포이의 피티아(무녀)에게 뇌물을 주어 신탁을 조작했고, 이 신탁을 통해 스파르타인들이 플레이스토아낙스를 복귀시키도록 유도했다고 기록했다.[36] 그러나 그의 귀환은 아르키다무스 2세의 사망과[37] 델포이 신전 자체의 이해관계(전쟁으로 인한 순례자 및 기부 감소를 막기 위해 평화를 원함)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38] 그럼에도 불구하고 델포이 신탁 조작 의혹은 계속 따라다녔고, 기원전 421년에도 그는 여전히 피티아 매수 혐의로 비난받았다.[35] 투키디데스가 플레이스토아낙스에게 비판적인 기록을 남긴 것은, 그의 정보 출처가 아르키다무스 2세의 아들이자 플레이스토아낙스의 정적이었던 아기스 2세였기 때문일 수 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39]

복귀 후 플레이스토아낙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종식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기원전 425년 스팍테리아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패배한 이후 평화 협상을 주도했다.[46] 투키디데스는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전쟁 중 스파르타가 겪는 어려움이 과거 자신의 신성 모독적인 행위(피티아 매수 의혹) 때문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평화를 원했다고 개인적인 동기를 강조했지만,[47][48][49] 실제로는 평화가 스파르타의 국익에 더 부합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50]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평화 조약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조약은 아테네의 협상 대표 니키아스의 이름을 땄지만, 플레이스토아낙스의 기여도를 고려할 때 '플레이스토아낙스의 평화'라고 불릴 수도 있다.[23]

정적들은 그의 과거 행적(기원전 446년 철수, 뇌물 수수 및 신탁 조작 의혹)을 계속 문제 삼으며 비난했지만, 플레이스토아낙스는 니키아스 평화 조약 체결이라는 업적을 내세워 이에 맞섰다. 현대에 와서는 그의 외교 노선이 당시 스파르타의 강경 일변도 정책 속에서 실리를 추구한 선택이었다는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다.

참조

[1] 논문 Some Agiad Dates
[2] 논문 Some Agiad Dates
[3] 서적 Historical Commentary
[4] 서적 Sparta's First Attic War
[5] 서적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6] 서적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7] 서적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8] 서적 Sparta's First Attic War
[9] 서적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10] 서적 Prosopographie
[11] 서적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12] 논문 King Pleistoanax
[13] 서적 Sparta and Lakonia
[14] 서적 Sparta's First Attic War
[15] 서적 Pericles
[16] 서적 Sparta's First Attic War
[17] 서적 Outbreak of the Peloponnesian War
[18] 서적 Sparta's First Attic War
[19] 서적 Companion to Sparta
[20] 서적 Sparta's First Attic War
[21] 논문 King Pleistoanax
[22] 논문 The Deposing of Spartan Kings
[23] 서적 Agesilaos
[24] 논문 King Pleistoanax
[25] 서적 Agesilaos
[26] 서적 Exile, Ostracism, and Democracy
[27] 서적 Peace of Nicias
[28] 논문 Cleandridas le Spartiate
[29] 논문 King Pleistoanax
[30] 서적 Commentary on Thucydides
[31] 논문 King Pleistoanax
[32] 논문 King Pleistoanax
[33] 서적 Commentary on Thucydides
[34] 논문 Some Agiad Dates
[35] 논문 What Did the Athenians Demand
[36] 논문 Some Agiad Dates
[37] 서적 Delphic Oracle
[38] 서적 Delphic Oracle
[39] 논문 What Did the Athenians Demand
[40] 서적 La religion des Spartiates
[41] 서적 Archidamian War
[42] 논문 Some Agiad Dates
[43] 서적 Archidamian War
[44] 서적 Commentary on Thucydides
[45] 서적 Archidamian War
[46] 서적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47] other Thucydides, v. 16 § 1
[48] 서적 Archidamian War
[49] 서적 Commentary on Thucydides
[50] 서적 Origins of the Peloponnesian War
[51] 서적 Sparta and Lakonia
[52] 서적 Commentary on Thucydides
[53] 논문 King Pleistoanax
[54] 간행물 The Deposing of Spartan Kings 1945-07-01
[55] other ディオドロス, XI. 79
[56] other トゥキュディデス, II. 21
[57] other プルタルコス, 「ペリクレス伝」, 22
[58] other トゥキュディデス, V. 16-19
[59] other ibid, V. 33
[60] other 디오도로스, XI. 79
[61] other 투키디데스, II 21
[62] other 플루타르코스 〈페리클레스 전〉 22
[63] other 투키디데스, V. 16 - 19
[64] other ibid, V.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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