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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대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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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탈대소동은 1870년 조슈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번의 재정 개혁으로 인해 해고된 구 번사들이 일으킨 무장 봉기이다. 1869년 판적봉환 이후 조슈번은 재정난을 겪었고, 대규모 군대 감축과 신분 및 직책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병력 선발이 이루어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구 번사들은 하마다 재판소를 습격하고 야마구치번 의사당을 포위하며 저항했다. 메이지 정부의 기도 다카요시가 진압을 지휘하여 탈대군은 패배했고, 관련자들은 처벌받았다. 이 사건은 메이지 유신 시대의 사회 변화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는 사례로, 신분제 철폐와 국민개병제 도입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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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대소동
개요
유형사건
시기메이지 시대
1873년
배경
원인정한론 대립
징병제 도입
지조 개정
사족 불만
주요 인물에토 신페이
고토 쇼지로
이타가키 다이스케
사이고 다카모리
경과
주요 사건메이지 6년 정변
사가의 난
신푸렌의 난
아키즈키의 난
하기의 난
서남전쟁
결과
영향자유 민권 운동의 발흥
입헌 정치 요구 증가
관련 정보
관련 사건이와쿠라 사절단
정한론
탈대소동 (脫隊騷動)
일본어だったいそうどう
로마자 표기Dattai Sōdō

2. 경과

1869년(메이지 2년) 조슈번판적봉환 이후 재정난을 겪게 되었고, 번지사 모리 모토노리는 대규모 군대 감축을 포함한 번정 개혁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기병대를 포함한 5,000여 명의 번병이 해고되었고, 새로운 어친병에는 신분과 직책을 기준으로 선발된 2,250명만이 채용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구 번사들, 특히 평민 출신 제대사(諸隊士)들이 1870년(메이지 3년) 1월 탈대소동을 일으켰다.

1869년 11월 25일 (양력 12월 27일), 모리 모토노리는 수입 감소에 따른 번정 개혁으로 조슈 제대 5,000여 명을 어친병 4대대 2,250명으로 재편성하고, 나머지 3,000여 명은 논공행상 없이 해고했다. 어친병 채용은 신분과 직책을 기준으로 선별되었고, 번 정규군인 구 간성대 대원이 재고용되는 한편, 평민 출신 제대사들은 실직했다.

이에 1870년 1월 1일 (음력 11월 30일), 요리구미 야마다 씨의 가신이었던 나가시마 요스케 등 구 기병대사 일부와 진무대의 후지야마 사쿠마 및 예무대의 토미나가 유리 등 구 제대사 1,200명이 탈대소동을 일으켰다.

2. 1. 탈대소동의 전개

1870년 1월 13일(양력 2월 13일) 탈대한 구 제대사들은 오모리현(현 시마네현 이와미 지방과 오키 제도)을 관할하는 하마다 재판소를 습격했다.[1] 1월 24일(양력 2월 24일)에는 야마구치번 의사당(현 야마구치현청)을 포위하여 교전한 구 간성대를 격파하고, 인근의 농민 반란 세력과 연합하여 1,800명 규모로 세력을 확장했다.[1]

2. 2. 기도 다카요시의 귀환과 진압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는 폐번치현 수행을 위해 사쓰마, 조슈, 도사 군을 메이지 정부의 어친병으로 미리 준비하고자 도쿄에서 귀번했다. 야마구치 번 내에서는 '''탈대 소동'''을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기에, 기도 다카요시가 모리 모토노리 지번사로부터 '''탈대 소동''' 진압 지휘를 의뢰받았다. 야마구치 번은 조슈 번 상비병 300명, 제4대대 250명, 오사카 병학료 80명, 가미노세키우베의 원군 100여 명으로 구성된 토벌군 800명을 편성하여 구 제대사들로 구성된 탈대군에 파견했다.[1]

2월 9일 (양력 3월 10일), 야마구치 번 정규군 토벌군은 스에토, 요로이가오카를 넘어 오고리의 야나이다 관문에서 탈대군과 교전했다. 한때 제압했지만 반격을 받아 미타지리(호후)로 철수했다. 2월 11일 (양력 3월 12일)에 다시 야나이다 관문의 탈대군을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오고리와 호후가 이 전투의 격전지[1]로 꼽히며, 그 중 하나인 호후의 쇼사카 포대[2][3]에 가까운 우다케산 산록의 텐토쿠지에서는 탈대군이 농성하여 사찰이 소실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3][4]

일련의 과정에 따른 인적 피해는 다음과 같았다.

구분전사부상
탈대군60명73명
토벌군20명64명



농상 출신자 1,300명은 귀향이 허가되었고, 공로자로 인정된 600명에게는 부지미 1인 반이 지급되었다. 3월 18일 (양력 4월 18일) 나가시마 요스케 등 25명을 시작으로, 5월 6일 (양력 6월 4일)까지 35명이 처형되었다.

한편, 기병대 창설자인 다카스기 신사쿠의 아버지 다카스기 고츄타는 야마구치 번 권대참사로서 구 기병대사를 진압하는 측에서 활약했다.

2. 3. 처벌과 오라쿠 겐타로의 도주

1871년 3월 5일, 오라쿠 겐타로는 탈대 소동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출두 명령을 받았다. 그는 포위나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오무라 마스지로 암살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여겨졌다. 오무라 마스지로문명개화, 국민개병, 부국강병 노선을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추진했는데, 오라쿠 겐타로의 문하생인 진다이 나오토, 단 신지로 등에게 암살당했다. 또한 오라쿠 겐타로의 많은 문하생들이 탈대 소동에 가담했기 때문에 주모자로 의심받았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오라쿠 겐타로는 규슈 분고국히메지마를 거쳐 가와카미 겐사이에게 의탁하여 쓰루사키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가와카미 겐사이에게 거병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나 오라쿠 겐타로는 배외주의적인 쇄국양이 사상가들을 모아 메이지 정부 타도를 계획했다.

1871년 3월, 히로사와 사네오미 암살 사건 수사 중 니쿄 사건이 밝혀졌다.[1] 오라쿠 겐타로는 존왕양이 사상의 영향력이 강한 구루메번의 응변대를 의지했지만, 구루메번으로 불똥이 튈 것을 우려한 응변대사에 의해 3월 16일 처형되었다(구루메번 난사건).[1]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가와카미 겐사이도 범인 은닉죄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

3. 사건의 여파와 역사적 의미

총재직 고문 키도 다카요시는 규율과 재정을 중시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나, 산기 마에바라 잇세이북월 전쟁에서 여러 부대와 함께 싸웠던 경험을 바탕으로 탈대자(脫隊者) 토벌에 반대하며 키도와 대립하였다.[1] 이로 인해 마에바라 잇세이는 병부 대보 요직을 사임하고 하야했다.[1] 그러나 마에바라 잇세이는 구(舊) 간성대와 사대대(四大隊) 대원을 이끌고 하기의 난을 일으켰지만, 곧바로 진압되어 참수되었다.[1]

탈대 소동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기존 질서에 익숙했던 이들의 저항을 보여준다. 이는 중앙집권화와 근대화 과정의 불가피한 갈등을 드러내는 동시에, 신분제 철폐와 국민개병제 도입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적 관점에서는, 이 사건이 비록 실패한 저항이었지만, 평등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진통으로 해석될 수 있다.

4. 더 보기

=== 관련 사건 ===

1869년 7월 25일(메이지 2년 6월 17일) 판적봉환 이후, 1871년까지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발생일사건 내용
1870년 1월 1일
(11월 30일)
요리구미 야마다 씨의 가신이었던 나가시마 요스케 등 구 기병대사의 일부와 진무대의 후지야마 사쿠마 및 예무대의 토미나가 유리 등 구 제대사 1,200명이 탈대소동을 일으켰다.
1870년 2월 13일
(1월 13일)
탈대한 구 제대사들이 오모리현(현 시마네현이와미 지방과 오키 제도)을 관할하는 하마다 재판소를 습격했다.
1870년 2월 24일
(1월 24일)
야마구치번 의사당(현 야마구치현청)을 포위하여 교전한 구 간성대를 격파했다. 인근의 농민 반란도 합류하여 야마구치번 의사당이 1,800명 규모로 포위되는 사태가 지속되었다.
1871년 3월히로사와 사네오미 암살 사건 수사 중 니쿄 사건이 드러났다. 오락 겐타로는 존양지사의 영향력이 강한 구루메번의 응변대를 의지했지만, 구루메번으로 불똥이 튈 것을 우려한 응변대사에 의해 3월 16일 처단되었다(구루메번 난사건).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가와카미 겐사이도 범인 은닉죄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876년 10월 24일마에바라 잇세이는 구(舊) 간성대와 사대대(四大隊)의 대원을 이끌고 하기의 난을 일으켰으나, 즉시 진압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 관련 인물 ===


  •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 도쿄에서 귀번하여 모리 모토노리 번지사로부터 탈대소동 진압 지휘를 의뢰받았다. 야마구치 번은 조슈 번 상비병 300명, 제4대대 250명, 오사카 병학료 80명, 가미노세키우베의 원군 100여 명으로 구성된 토벌군 800명을 파견했다.[1]
  • 다카스기 신사쿠의 아버지 다카스기 고츄타: 야마구치 번 권대참사로서 구 기병대사를 진압하는 측에서 활약했다.
  • 오무라 마스지로: 문명개화, 국민개병, 부국강병 노선을 기도 다카요시와 협력하여 강력하게 추진하였는데, 이는 탈대소동의 원인을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전년 9월에 오락 겐타로의 문하생인 진다이 나오토·단 신지로 등의 습격으로 암살되었다.
  • 오락 겐타로: 탈대 소동의 주모자로 여겨져 3월 5일에 출두 명령을 받았다. 그는 포위 활동이나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많은 문하생이 탈대 소동에 참가했기 때문에 주모자로 의심받았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오락은 규슈로 도주하여 가와카미 겐사이에게 의지했으나, 이후 구루메번 응변대사에 의해 처단되었다(구루메번 난사건).
  • 가와카미 겐사이: 오락 겐타로를 숨겨준 혐의(범인 은닉죄)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마에바라 잇세이: 여러 부대원들의 해고 및 탈대자(脫隊者)의 토벌에 맹렬히 반대하며 기도 다카요시와 대립했다. 그 결과 병부 대보의 요직을 사임하고 하야했다. 그러나 마에바라 잇세이 자신도 하기의 난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4. 1. 관련 인물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는 도쿄에서 귀번하여 모리 모토노리 번지사로부터 탈대소동 진압 지휘를 의뢰받았다. 야마구치 번은 조슈 번 상비병 300명, 제4대대 250명, 오사카 병학료 80명, 가미노세키우베의 원군 100여 명으로 구성된 토벌군 800명을 파견했다.[1]

다카스기 신사쿠의 아버지 다카스기 고츄타는 야마구치 번 권대참사로서 구 기병대사를 진압하는 측에서 활약했다.

오무라 마스지로문명개화, 국민개병, 부국강병 노선을 기도 다카요시와 협력하여 강력하게 추진하였는데, 이는 탈대소동의 원인을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전년 9월에 오락 겐타로의 문하생인 진다이 나오토·단 신지로 등의 습격으로 암살되었다.

오락 겐타로는 탈대 소동의 주모자로 여겨져 3월 5일에 출두 명령을 받았다. 그는 포위 활동이나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많은 문하생이 탈대 소동에 참가했기 때문에 주모자로 의심받았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오락은 규슈로 도주하여 가와카미 겐사이에게 의지했으나, 이후 구루메번 응변대사에 의해 처단되었다(구루메번 난사건).

가와카미 겐사이는 오락 겐타로를 숨겨준 혐의(범인 은닉죄)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마에바라 잇세이는 여러 부대원들의 해고 및 탈대자(脫隊者)의 토벌에 맹렬히 반대하며 기도 다카요시와 대립했다. 그 결과 병부 대보의 요직을 사임하고 하야했다. 그러나 마에바라 잇세이 자신도 하기의 난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4. 2. 관련 사건

1869년 7월 25일(메이지 2년 6월 17일) 판적봉환 이후, 1871년까지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발생일사건 내용
1870년 1월 1일
(11월 30일)
요리구미 야마다 씨의 가신이었던 나가시마 요스케 등 구 기병대사의 일부와 진무대의 후지야마 사쿠마 및 예무대의 토미나가 유리 등 구 제대사 1,200명이 탈대소동을 일으켰다.
1870년 2월 13일
(1월 13일)
탈대한 구 제대사들이 오모리현(현 시마네현이와미 지방과 오키 제도)을 관할하는 하마다 재판소를 습격했다.
1870년 2월 24일
(1월 24일)
야마구치번 의사당(현 야마구치현청)을 포위하여 교전한 구 간성대를 격파했다. 인근의 농민 반란도 합류하여 야마구치번 의사당이 1,800명 규모로 포위되는 사태가 지속되었다.
1871년 3월히로사와 사네오미 암살 사건 수사 중 니쿄 사건이 드러났다. 오락 겐타로는 존양지사의 영향력이 강한 구루메번의 응변대를 의지했지만, 구루메번으로 불똥이 튈 것을 우려한 응변대사에 의해 3월 16일 처단되었다(구루메번 난사건).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가와카미 겐사이도 범인 은닉죄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876년 10월 24일마에바라 잇세이는 구(舊) 간성대와 사대대(四大隊)의 대원을 이끌고 하기의 난을 일으켰으나, 즉시 진압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참조

[1] 백과전서 脱隊騒動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 기타 勝坂砲台跡 현지설명판
[3] 기타 脱退騒動 https://kotobank.jp/[...] 防府市歴史用語集(コトバンク)
[4] 기타 禅 曹洞宗 萬年山天徳寺 由緒 현지설명판
[5] 기타 勝坂砲台跡 현지설명판
[6] 기타 禅 曹洞宗 萬年山天徳寺 由緒 현지설명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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