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성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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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탕성즈는 중화민국 군인으로, 신해혁명, 북벌 등 건국 초기의 주요 전쟁에 참여했다. 북양군벌 시대에는 후난 군벌에 속해 후난성 주석을 역임했으며, 국민혁명군에 합류하여 군사적 요직을 두루 거쳤다. 중일전쟁 당시 난징 수비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난징 방어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비판받았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후난성 정부에서 활동하며,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등에서 직무를 수행하다가 1970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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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성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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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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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탕성즈 |
로마자 표기 | Tang Shengzhi |
출생 | 1889년 10월 12일 |
출생지 | 청나라 후난성 융저우부 둥안현 |
사망 | 1970년 4월 6일 |
사망지 | 중화인민공화국 후난성 창사시 |
경력 | |
소속 | 중화민국 (1912-1949) |
복무 기간 | 1914년–1949년 |
최종 계급 | 대장 |
지휘 | 난징 수비 사령관 |
부대 | 제4사단 |
참전 | 신해혁명 북벌 중원 대전 제2차 중일 전쟁 국공 내전 |
훈장 | 청천백일훈장 |
이후 활동 | 정치인 |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탕성즈는 바오딩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신해혁명, 호국전쟁, 호법운동 등 중화민국 초기의 주요 전쟁에 참여했다. 북양군벌 시대에는 후난 군벌 소속으로 후난성 제4사단장을 역임했다. 자오헝티와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여 후난 성장 자리에 올랐으나, 우페이푸의 지원을 받은 반대 세력에 밀려 국민혁명군에 합류했다. 국민혁명군 제8군 군장, 후난성 주석, 우한 국민정부 요직 등을 거치며 북벌에 참여했다.
북벌 성공 후에는 장제스에 반대하는 군사 세력의 주축이 되었으나, 닝한전쟁에서 패배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장제스에게 투항하여 군사 요직을 맡았으나, 다시 반장(反蔣) 세력에 가담했다가 패배하고 정계에서 물러났다. 1931년 광저우 국민정부에서 활동하다 만주 사변 이후 난징 정부로 복귀, 1935년에는 상장 지위를 받았다.[4]
2. 1. 바오딩 육군사관학교 졸업 및 초기 군 경력
탕성즈는 1914년 바오딩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신해혁명, 호국전쟁, 호법운동, 북벌전쟁 등 중화민국 건국 초기의 중요한 전쟁에 참여했다.[4]북양군벌 시대에 탕성즈는 후난 군벌에 속해 있었고, 북양군벌이 후난에서 철수한 후에는 후난성 제4사단장이 되었다. 당시 후난성 성장 자오헝티와 대립하여 쿠데타로 자오헝티를 창사에서 몰아낸 후, 스스로 성장의 자리에 올랐다. 탕성즈는 반대 세력을 몰아내려 했으나, 그의 적은 우한에서 반격 준비를 하고 있던 우페이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탕성즈는 패전하여 창사에서 물러나 북벌군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1926년 6월 2일, 탕성즈는 정식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국민혁명군에 참여하여 국민혁명군 제8군의 군장을 임명받았고, 6월에 다시 창사를 점령한 후 후난성의 주석이 되었다.[4] 1927년에는 우한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위원, 군사위원회 7인 주석단 멤버, 우한 국민정부 위원, 제4집단군 총사령관 등의 직을 겸임했다.[4]
2. 2. 후난 군벌 시대
탕성즈는 북양군벌 시대에 후난 군벌에 속했다. 북양군벌이 후난에서 철수한 후, 탕성즈는 후난성 제4사단장이 되었다. 당시 후난성 성장 자오헝티와 대립하여 쿠데타로 자오헝티를 창사에서 몰아낸 후, 스스로 성장의 자리에 올랐다. 탕성즈의 적은 우한에서 반격 준비를 하고 있던 우페이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탕성즈는 패전하여 창사에서 물러나 북벌군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4] 1926년 6월 2일, 탕성즈는 정식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국민혁명군에 참여하여 국민혁명군 제8군의 군장을 임명받았고, 같은 해 6월에 다시 창사를 점령한 후 후난성의 주석이 되었다. 1927년에는 우한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위원, 군사위원회 7인 주석단 멤버, 우한 국민정부 위원, 제4집단군 총사령관 등의 직을 겸임했다.[4]2. 3. 국민혁명군 합류
탕성즈는 1926년 6월 2일 정식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국민혁명군에 참여하여 국민혁명군 제8군 군장에 임명되었고, 6월에 다시 창사를 점령한 후 후난성 주석이 되었다.[4] 1927년에는 우한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위원, 군사위원회 7인 주석단 멤버, 우한 국민정부 위원, 제4집단군 총사령관 등의 직을 겸임했다.[4]북벌전쟁에서 승리한 후, 탕성즈는 장제스와 신광시파에 의한 우한 정부에 대한 반대 세력의 군사적 주력이 되었다.[4] 1927년 11월 12일 닝한전쟁에서 리쭝런에게 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4] 1929년 4월에 탕성즈는 장제스에게 투항하여 국민정부 군사참의원 원장, 제5로군 총지휘관으로서 장제스와 계열 군벌과의 전쟁에 참여했다.[4] 10월에 장펑전쟁에 참여했지만, 12월에 다시 깃발을 바꿔 반장(反蔣)의 스여우산과 연합하여 호당구국군 제4로 총지휘관을 맡았다가 패전 후, 1930년에 다시 하야했다.[4]
3. 중일전쟁과 난징 방어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난징으로 접근해오자, 장제스는 탕성즈에게 난징 방어를 맡겼다. 탕성즈는 이 임무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난징 방어전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수도와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결의를 밝히며, 도시를 빠져나가는 주요 경로를 차단하고 시민들의 탈출을 막는 강경책을 펼쳤다.[4]
12월 초, 일본군이 난징 외곽에 도착하면서, 장제스와 탕성즈가 계획했던 방어전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방어 계획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는데, 이는 난징 주변 전투에서 패퇴한 중국군 병사들이 방어 병력에 합류하면서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안전한 곳으로 후퇴하기를 원했고, 공황 상태에 빠진 병사들은 명령에 불복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심지어 도망치는 부대가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도 방어 부대의 연대장을 사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2]
우한으로 피신한 장제스는 탕성즈에게 명령 불복종 병사를 즉결 처형할 권한을 부여했지만, 이미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탕성즈는 도시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제스와 그의 참모들 역시 이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수도를 아무런 저항 없이 포기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었다. 장제스는 탕성즈에게 어느 정도 명분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저항을 한 후, 철수할 것을 지시했다. 탕성즈는 사실상 무의미한 방어전을 수행해야 하는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
일본군이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을 살포하는 와중에도, 탕성즈는 공개적으로는 결사항전의 의지를 표명했지만, 내부적으로는 휴전을 위한 협상을 모색했다. 그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겠다는 자신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수도와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전투를 피하고자 했다.
결국 압도적인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중국군은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고, 탕성즈는 1937년 12월 12일 저녁, 공식적인 항복 절차 없이 도시를 탈출했다.[2] 조직적인 철수를 계획했으나, 현실은 혼란과 공포 속에서 무질서한 도주로 이어졌다. 많은 지휘관들은 명령도 없이 부대를 버리고 도망쳤으며, 원래 계획대로 퇴각에 성공한 부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2]
난징 함락 이후, 탕성즈의 행동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철저 항전을 외쳤지만, 결국 무책임하게 도망쳤다는 비판을 받았다.[7] 정식 항복 절차를 밟지 않아 정전 협상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는 난징 대학살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지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기도 한다.[7]
3. 1. 난징 수비 사령관 임명
1937년 11월, 일본군이 난징으로 진격해 오자, 탕성즈는 난징 방어전의 최고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수도와 함께 존망을 같이 할 것을 공언하고, 난징에서 창장 이북으로 통하는 도로를 봉쇄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배를 파괴하여 시민들이 피난하지 못하도록 했다.[4]탕성즈는 외국 기자들에게 배포한 보도 자료에서 도시를 항복시키지 않고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주로 훈련받지 않은 병사 10만 명을 모았는데, 여기에는 상하이 전선에서 패배한 일부 병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또한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이 난징에서 도망가는 것을 막았다. 방어군은 도로를 봉쇄하고, 배를 파괴하고, 인근 마을을 불태우면서 많은 시민들이 대피하는 것을 막았다.[4]
그러나 수도 방어전은 처음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혼란 속에서 조직적인 퇴각이 이루어져야 했지만 무질서한 도주가 되어 버렸다. 많은 지휘관들은 아무런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고 단순히 그들의 군대를 포기하고 제멋대로 도망쳐 버렸다. 10만 명의 수도 방어대와 수천 명 이상의 중국인 부대는 전선에서 도망쳐 시내로 돌아왔다.
가사하라 도쿠시에 따르면, "탕성즈 사령관은 장제스의 철수 명령을 받아 최고 막료·지휘관 회의에서 사수를 단념하고, 12월 12일 오후 5시 반경까지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패전의 혼란 속에서 이 퇴각 명령은 말단까지 전달되지 않아, 자리를 굳게 지키라는 전 명령을 믿은 부대와 퇴각을 하려는 부대 사이에 일부 상호 교전하는 듯한 혼란이 발생하거나, 독자적인 행동을 취한 부대도 있었다"고 한다.[4] 한편, 탕성즈는 12월 12일 20시에 부하들을 버리고 난징에서 도망쳤다는 견해도 있다.[5]
3. 2. 난징 방어 계획
장제스의 우한 지휘 본부 지시에 따라, 탕성즈는 35사단과 72사단을 항구에 배치하여 사람들이 난징에서 도망가는 것을 막았다.[4] 방어군은 도로를 봉쇄하고, 배를 파괴하고, 인근 마을을 불태우면서 많은 시민들의 대피를 막았다.[4] 그는 수도와 함께 존망을 같이 할 것을 공언하고, 난징에서 창장 이북으로 통하는 도로를 봉쇄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배를 파괴하여 시민들이 피난하지 못하도록 했다.[4]3. 3. 방어 실패와 철수
12월 초, 일본군이 난징 외곽에 도착하면서, 장제스(蒋介石)와 탕성즈(唐生智)가 계획했던 난징 방어전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난징 주변 지역 전투에서 도망쳐 온 중국군 병사들이 방어군을 압도하면서 방어 계획은 처음부터 붕괴되었다. 이들은 더 안전한 곳으로 후퇴하길 원했고, 공황 상태에 빠져 규율이 무너져 부대가 명령을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2] 어떤 경우에는, 수도를 방어하는 부대의 연대 지휘관들이 도망치는 부대가 더 직접적인 탈출 경로를 가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주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도망치는 부대의 대대 지휘관들에게 사살당하기도 했다.우한으로 떠난 장제스는 탕성즈에게 즉시 명령을 어기는 자를 사살할 권한을 부여했지만, 탕성즈는 수십만 명의 군대가 공개적으로 도주하는 상황이라 명령을 실행할 수 없었다. 탕성즈가 장제스의 지시를 수행하려면 일본군의 도시 공격 전에 도주하는 국민당 군대와 난징 수비대가 전투를 벌여야 했다.
도주하는 군인들 사이에서 규율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계획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탕성즈는 도시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암울한 상황을 고려하여, 장제스의 참모들과 심지어 장제스 자신도 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장제스는 싸움 없이 수도를 포기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다른 누구도 그런 결정을 감히 내리고 분노한 중국 대중을 마주할 수 없었다.
동시에, 장제스는 탕성즈가 난징 수비대 사령관을 맡아 장제스가 이 상황이 제기하는 딜레마를 피할 수 있도록 해준 것에 대해 매우 고마워했다. 그는 탕성즈에게 체면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절망적인 싸움을 계속하도록 명령했고, 그러면 철수할 권한을 갖게 될 것이다. 탕성즈는 이제 자신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방어를 수행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었다.
일본군이 도시에 항복하라는 전단을 뿌리는 동안, 탕성즈는 공개적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나 사적으로는 휴전을 위해 협상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겠다는 원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도와 그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도시에서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그는 중국 정부가 중국 대중을 마주할 수 있도록 절망적인 상징적인 싸움을 벌여 수도를 방어해야 했다.
수많은 부대가 명령을 어기고 진지를 포기하고 도주했다는 소식이 탕의 사령부에 전해지자, 전면적인 철수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문제는 철수 명령을 내린 사람이 수도를 잃은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매우 분노한 중국 대중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탕은 혼자 그 책임을 지고 비난을 받는 것을 매우 꺼려하여, 모든 사단 지휘관과 그 이상의 계급을 포함하는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장제스가 필요할 경우 철수할 수 있도록 허가한 것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탕의 사령부가 결정해야 할 사항이었다. 탕이 모든 사람의 의견을 묻고, 만장일치로 철수에 동의하는 답변을 얻자, 그는 전면 철수 명령을 내리기 전에 모든 사람에게 장제스의 명령에 서명하게 했다.
12월 12일,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가진 적의 맹렬한 포격과 공습에 이틀 동안 방어전을 펼친 후, 많은 병사들이 도주하는 상황에서, 탕은 전면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날 저녁, 그는 당시 유일하게 탈출 경로로 이용 가능했던, 도시 성벽 북쪽에 위치한 이장문을 통해 공식적으로 일본 군사 당국에 도시를 항복할 의사가 없음을 알리지 않고 도시에서 탈출했다.[2]
그러나 방어전과 전면적인 퇴각 모두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뒤이어 벌어진 상황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고, 조직적인 퇴각으로 계획되었던 것은 곧 혼란스럽고 공포에 질린 도주로 변질되었다. 저녁 늦게가 되자, 조직적이지 못한 퇴각은 완전히 궤멸로 이어졌다. 많은 지휘관들이 부대를 버리고 퇴각 명령도 내리지 않은 채 스스로 도망쳤다. 수도 방어 병력 10만 명과 난징 주변 전투에서 수도로 도주한 수천 명의 중국군 병력 중, 원래 계획대로 성공적으로 퇴각한 부대는 단 두 개 연대에 불과했으며, 두 연대 모두 온전하게 생존했다. 원래 계획대로 퇴각하지 못한 다른 부대들은 공격해 오는 일본군에게 희생되었다.
프랭크 틸먼 더딘(Frank Tillman Durdin)과 아치볼드 스틸(Archibald Steele)은 중국군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상점을 약탈하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기 위해 군복을 벗는 모습을 보며 "거리는 총, 수류탄, 칼, 배낭, 코트, 신발, 헬멧으로 뒤덮였다"고 기록했다.[2][3]
가사하라 도쿠시의 "난징 방어전과 중국군"에 따르면, "탕성즈 사령관은, 장제스의 철수 명령을 받아, 최고 막료·지휘관 회의에서, 사수를 단념하고, 12월 12일 오후 5시 반경까지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패전의 혼란 속에서, 이 퇴각 명령은 말단까지 전달되지 않아, 자리를 굳게 지키라는 전 명령을 믿은 부대와 퇴각을 하려는 부대 사이에 일부 상호 교전하는 듯한 혼란이 발생하거나, 독자적인 행동을 취한 부대도 있었다".[4] 한편, 탕은 12월 12일 20시에 부하들을 버리고 난징에서 도망쳤다는 견해도 있다.[5]
3. 4. 난징 함락과 책임 논란
장제스와 탕성즈가 수립한 난징 방어 계획은 처음부터 붕괴되었다. 난징 주변 지역 전투에서 도망쳐 온 중국군 병사들이 방어군을 압도했고, 공황 상태에서 규율이 무너져 부대가 명령을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4] 심지어 수도를 방어하는 부대의 연대 지휘관들이 도망치는 부대의 대대 지휘관들에게 사살당하기도 했다.우한으로 떠난 장제스는 탕성즈에게 명령을 어기는 자를 즉시 사살할 권한을 부여했지만, 탕성즈는 수십만 명의 군대가 공개적으로 도주하는 상황이라 명령을 실행할 수 없었다.
탕성즈는 도시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장제스는 싸움 없이 수도를 포기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탕성즈는 절망적인 싸움을 계속하여 체면을 유지한 후 철수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일본군이 항복을 요구하는 전단을 뿌리는 동안, 탕성즈는 공개적으로 분노를 표출했지만, 사적으로는 휴전을 위해 협상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도와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도시에서의 대결을 피하려 했다.
1937년 11월 일본군이 난징을 공격했을 때, 탕성즈는 사수를 주장하며 수도 경비 사령관이 되어 난징 방어전의 최고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수도와 함께 존망을 같이 할 것을 공언하고, 난징에서 창장 이북으로 통하는 도로를 봉쇄하고 뱃길을 파괴하여 시민들의 피난을 막았다.[4]
그러나 수도 방어전은 혼란 속에서 무질서한 도주로 이어졌다. 많은 지휘관들은 명령 없이 군대를 포기하고 도망쳤다. 10만 명의 수도 방어대와 수천 명의 중국군 부대는 전선에서 도망쳐 시내로 돌아왔다.[4]
가사하라 주쿠지에 따르면, 탕성즈는 장제스의 철수 명령을 받고 12월 12일 오후 5시 반경까지 퇴각 명령을 내렸지만, 이 명령은 말단까지 전달되지 않아 혼란이 발생했다. 일부 부대는 서로 교전하기도 했다.[4] 탕성즈는 12월 12일 20시에 부하들을 버리고 난징에서 도망쳤다는 견해도 있다.[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탕성즈의 행적은 불분명했다. 바이충시가 그를 추궁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937년 난징 사건 당시 난징성 사령관이었던 탕성즈는 철저 항전을 외쳤지만 도망쳤다. 이는 무책임한 행위이며, 정전 마무리를 짓지 못해 피해 확산의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7] 탕성즈가 항복 문서에 조인했다면, 중국군은 포로로 보호받고 '난징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난징 사건 긍정론자 측에서도 탕성즈의 책임을 지적한다.[8] 요시다 유타카는 탕성즈가 민간인을 끌어들인 책임과 직무를 포기한 책임을 비판했다. 후지와라 아키라는 탕성즈의 지휘 포기를 무책임하다고 말했다.
기타무라 미노루는 난징 사건 관련 문서를 조사한 결과, 당시 공식 기록인 『난징 안전지대의 기록』에 기재된 사건 외에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군 병사의 소행은 적으며, 난징에서 발생한 희생자의 책임은 탕성즈에게 있다고 말했다.[9]
4. 중일전쟁 이후의 삶
탕성즈는 중일전쟁 시기 난징 대학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은퇴와 비슷한 생활을 하며 불교 연구에 몰두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탕성즈는 국민당이 몰락할 때까지 은둔 생활을 이어갔다. 바이충시가 그에게 국민당 군대와 함께 남쪽으로 철수할 것을 제안했지만, 탕성즈는 이를 거절하고 중국에 남았다. 그는 국민당에 체포되지 않기 위해 변장하고 숨어 다녔으며, 이 과정에서 다리를 다치기도 했다.
4. 1. 국민당 정권과의 관계
장제스의 지원과 보호에도 불구하고, 탕성즈는 결과적으로 발생한 난징 대학살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그는 은퇴에 가까운 삶을 살았으며 시간을 할애하여 불교를 연구했다.[4]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는 국민당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주목받지 못했다. 이때 바이충시는 탕성즈에게 국민당 군대가 더 남쪽으로 철수할 때 함께 가자고 요청했다. 탕성즈는 중국을 떠나기를 거부하고, 국민당 군대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 변장하고 여러 곳에 숨어 다니다가 그 과정에서 다리 하나를 다쳤다. 1949년 이후 그는 후난성의 사령관이자 지사가 되었다.
북벌전쟁에서 승리한 후, 탕성즈는 장제스와 신광시파에 의한 우한 정부에 대한 반대 세력의 군사적 주력이 되었다. 1927년 11월 12일 닝한전쟁에서 그는 리쭝런에게 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1929년 4월에 탕성즈는 장제스에게 투항하여 국민정부 군사참의원 원장, 제5로선군 총지휘관으로서 장제스와 계열 군벌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10월에 장펑전쟁에 참여했지만, 12월에 다시 깃발을 바꿔 반장(反蔣)의 스여우산과 연합하여 호당구국군 제4로 총지휘관을 맡았다. 패전한 후, 1930년에 다시 하야했다.
1931년, 광저우 국민정부와 군사위원회의 상무위원이 되었다. 만주 사변 이후, 다시 난징 정부로 돌아와 난징 국민정부 군사참의원 원장에 복임했다. 1935년 4월에 상장의 지위를 받았다. 1937년 11월에 일본군이 난징을 진공했을 때, 그는 사수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스스로 수도 경비 사령관의 장관이 되어, 중국 측의 난징 방어전의 최고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수도와 함께 존망을 같이 할 것을 공언하고, 난징에서 창장 이북으로 통하는 도로를 봉쇄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뱃길을 파괴하여 시민들의 많은 수가 피난하지 못하도록 했다.
탕 사령관에 의한 수도 방어전은 처음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혼란 속에서 조직적인 퇴각이 이루어져야 했지만 무질서한 도주가 되어 버렸다. 많은 지휘관들은 아무런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고 단순히 그들의 군대를 포기하고 제멋대로 도망쳐 버렸다. 10만 명의 수도 방어대와 수천 이상의 중국인 부대는 전선에서 도망쳐 시내로 돌아왔다. 두 개의 연대만이 처음 계획에 따라 어떻게든 잘 퇴각할 수 있었다.
함락 당시의 난징 방어군 사령부의 상황에 대해서는 가사하라 주쿠지의 "난징 방어전과 중국군"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에 따르면, "탕성즈 사령관은 장제스의 철수 명령을 받아 최고 막료·지휘관 회의에서 사수를 단념하고 12월 12일 오후 5시 반경까지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패전의 혼란 속에서 이 퇴각 명령은 말단까지 전달되지 않아 자리를 굳게 지키라는 전 명령을 믿은 부대와 퇴각을 하려는 부대 사이에 일부 상호 교전하는 듯한 혼란이 발생하거나, 독자적인 행동을 취한 부대도 있었다"[4]。한편, 탕성즈는 12월 12일 20시에 부하들을 버리고 난징에서 도망쳤다는 견해도 있다[5]。다음 날 난징은 함락되었고, 이듬해 1월에는 난징 자치위원회가 발족했다.
4. 2.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1948년 11월, 탕성즈는 난징과 상하이로 가서 장제스에게 중국 공산당과의 정전 협상을 제안했다. 1949년에는 후난에서 "평화 자구" 운동을 조직하고, "후난 인민 자구 위원회"의 주임 위원으로서 후난의 평화적 해방을 지지했다.[4]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탕성즈는 후난성 인민정부 부주석, 부성장, 중난 군정위원회 위원, 국방위원회 위원 등 후난성과 중난 군구의 요직을 맡았다. 또한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중앙 상무 위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회 위원 등을 겸임했다.
1961년 11월, 탕성즈는 직장암으로 입원했다. 12월에 문병 온 천이는 "맹소 선생, 당신은 친구로서 과분한 사람입니다. 국민당의 일급 상장 중에서 당신만이 우리 홍군, 해방군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칭찬했다.[5] 1968년 문화 대혁명 당시, 린뱌오와 장칭은 탕성즈에게 허룽을 "인민의 적"이라고 비난하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탕성즈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는 권총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나는 각지를 전전하며 총알 세례를 받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한 적은 없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1970년 4월 6일, 탕성즈는 지병으로 창사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 3. 문화대혁명 시기의 시련
장제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탕성즈는 난징 대학살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그는 은퇴와 비슷한 삶을 살며 불교를 연구했다.[4]1961년 직장암으로 입원했다. 1968년 문화 대혁명 당시, 린뱌오와 장칭의 반혁명 집단은 허룽을 "인민의 적"으로 매도하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했지만, 탕성즈는 완강히 저항했다. 반혁명 집단은 탕성즈에게 압력을 가하며 협박했지만, 탕성즈는 이에 굴하지 않고 격노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이러한 압박은 탕성즈의 심신을 쇠약하게 만들었다.[5]
4. 4. 사망
장제스의 지원과 보호에도 불구하고, 탕성즈는 난징 대학살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그는 은퇴와 비슷한 삶을 살았으며 불교를 연구했다.[4]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탕성즈는 국민당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주목받지 못했다. 바이충시는 탕성즈에게 국민당 군대가 남쪽으로 철수할 때 함께 가자고 요청했지만, 탕성즈는 중국을 떠나기를 거부했다. 그는 국민당 군대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 변장하고 여러 곳에 숨어 다니다가 그 과정에서 다리 하나를 다쳤다. 1949년 이후 그는 후난성의 사령관이자 지사가 되었다.
1948년 11월, 탕성즈는 난징·상하이로 가서 장제스에게 중국 공산당과 정전하는 화의를 제안했다. 1949년에는 후난에서 "평화 자구" 운동을 조직하여, "후난 인민 자구 위원회"의 주임 위원으로서 후난의 평화 해방 지지를 호소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탕성즈는 후난성 인민정부 부주석, 부성장, 중난 군정위원회 위원, 국방위원회 위원 등 후난성과 중난 군구에서 여러 직무를 담당했다. 또한,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중앙 상무 위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회 위원 등의 직무를 겸임했다.
1961년 11월, 탕성즈는 직장암으로 입원했다. 12월에 문병 온 천이는 "맹소 선생, 당신은 친구로서 과분한 사람입니다. 국민당의 일급 상장 중에서 당신만이 우리 홍군, 해방군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칭찬했다. 1968년 린뱌오, 장칭의 반혁명 집단은 여러 차례 후난에 사람을 보내 탕성즈에게 허룽이 "인민의 적"이라고 성명하도록 강요했지만, 탕성즈는 완강히 저항했다. 그들은 탕성즈가 말을 듣지 않자 화가 나서 권총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지며 "말할 건가, 안 할 건가! 안 하면 너를 쏴 죽이겠다!"라고 외쳤지만, 탕성즈는 격노하여 옷을 젖히고 가슴을 치며 "이 녀석! 이리 와! 나는 각지를 전전하며 총알 세례를 걸어왔는데, 죽음을 두려워한 적은 없다!"라고 말했다. 탕성즈의 기백 앞에 그들은 머리를 숙이고 황급히 퇴각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심적 고통 때문에 탕성즈의 심신은 쇠약해져 갔다.
1970년 4월 6일, 탕성즈는 지병의 발작으로 창사에서 병사했다. 향년 82세였다.
5. 평가 및 논란
탕성즈는 난징 방어전에서 보여준 무책임한 행동과 지휘 능력 부족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6] 1937년 난징 사건 당시 난징성 사령관이었던 그는 "내 혈육으로 난징성과 생사를 함께 한다"고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 항전을 외치며 도망쳤다.[7] 이는 항복이라는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은 무책임한 행동으로, 정전 협상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피해를 확산시킨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7]
난징 사건 긍정론자들조차 탕성즈가 난징에서 절대 사수 방침을 고집하여 민간인을 끌어들인 점과, 전투 도중 도망쳐 사령관으로서의 직무를 포기한 점을 비판한다.[8] 요시다 유타카는 이로 인해 혼란이 더욱 커졌다고 지적했고, 후지와라 아키라는 탕성즈의 행동을 "매우 무책임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기타무라 미노루는 2007년 강연에서 난징에서 발생한 희생의 책임은 난징을 전장으로 만들고 도망친 탕성즈에게 있다고 주장했다.[9]
아사히 신문은 1937년 12월 20일, 탕성즈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총살형에 처해졌다고 보도했으나, 이는 오보였다.
5. 1. 난징 방어전 책임론
12월 초, 일본군이 난징 외곽에 도착했을 때, 난징 방어전은 장제스와 탕성즈가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방어 계획은 난징 주변 지역 전투에서 도망쳐 온 중국군 병사들이 방어군을 압도하면서 무너졌다. 이들은 더 안전한 곳으로 후퇴하길 원했고, 공황 상태에서 규율이 무너져 부대가 명령을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6] 어떤 경우에는 도망치는 부대의 대대 지휘관들이 수도를 방어하는 부대의 연대 지휘관들을 사살하기도 했다.장제스는 우한으로 떠난 후 탕성즈에게 명령을 어기는 자를 즉시 사살할 권한을 부여했지만, 탕성즈는 수십만 명의 군대가 도주하는 상황에서 명령을 실행할 수 없었다. 탕성즈는 도시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장제스의 참모들과 장제스 자신도 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장제스는 싸움 없이 수도를 포기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탕성즈에게 체면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절망적인 싸움을 계속하도록 명령했다.
탕성즈는 철저 항전을 외쳤지만, 정연한 철수 작전을 지도하지 않고 패잔병을 성내에 남겨둔 채 12월 12일 저녁 "각 부대는 각자 포위를 돌파하여 목적지에 집결하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양쯔강 북안으로 도주했다. 이러한 무책임함과 열악한 통제 능력은 비판을 받았다.[6] 1937년 난징 사건 당시 난징성 사령관이었던 탕성즈는 "내 혈육으로 난징성과 생사를 함께 한다"고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 항전을 외치며 도망쳤다. 이 때문에 항복이라는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도망친 것은 무책임의 극치이며, 이로 인해 정전의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이 피해 확산의 원인 중 하나라고 여겨진다.[7]
난징 사건 긍정론자 측에서도 탕성즈가 다수의 난민을 안고 있는 난징시에서 절대 사수 방침을 채택하여 민간인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한 책임, 도중에 도망쳐 사령관으로서의 직무를 포기한 책임을 비판한다.[8] 요시다 유타카는 이로 인해 혼란이 배가되었다고 말했다. 후지와라 아키라는 "탕이 지휘관으로서 도중에 지휘를 포기하고 도망친 것은 매우 무책임한 행위다"라고 말했다.
기타무라 미노루는 2007년 강연에서 난징에서 50명 정도의 희생자가 발생한 책임은 난징을 전장으로 만들어 놓고 자신은 도망친 사령관 탕성즈에게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말했다. 당시 난징은 국제법상 무차별 폭격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이를 회피하고 일반 시민의 피해자를 최소한으로 줄였기 때문에 일본군 측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9]
5. 2. 아사히 신문의 오보 사건
탕성즈는 철저 항전을 외치면서도 정연한 철수 작전을 지도하지 않고 패잔병을 성내에 남겨둔 채 12일 저녁 "각 부대는 각자 포위를 돌파하여 목적지에 집결하라"고 명령하고 자신 혼자 몰래 양쯔강 북안으로 도주했다. 그 무책임함과 열악한 통제 능력이 규탄받아[6], 12월 18일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9일 총살형에 처해졌다고 전해졌으나(「아사히 신문」 12월 20일 보도), 이는 오보였다.참조
[1]
서적
Memoirs of Li Zongren
[2]
웹사이트
Five Western Journalists in the Doomed City
http://www.geocities[...]
2006-04-19
[3]
논문
All Captives Slain
[4]
서적
南京攻防戦と中国軍
晩聲社
[5]
서적
"ザ・レイプ・オブ・南京"の研究
詳伝社
[6]
문서
挹江門における事件
[7]
블로그
小林よしのり「戦争論」批判4 - ブログ
http://blog.livedoor[...]
[8]
간행물
まぼろし派・中間派・大虐殺派 三派合同大アンケートより
2001-02
[9]
뉴스
一般市民を対象とした虐殺はなかったとの結論に達する
週刊新潮
2007-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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