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테런스 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테렌스 영은 1915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영국의 영화 감독이자 각본가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각본가로 영화계에 입문하여 브라이언 데스몬드 허스트, 데이비드 맥도널드 등 여러 감독의 작품에 참여했다. 1948년 감독으로 데뷔하여 전쟁 영화, 스파이 영화, 007 시리즈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제작했다. 특히, 007 시리즈의 초기 작품인 《007 노 박사》(1962), 《007 러브 이즈 뭔들》(1963), 《007 썬더볼 작전》(1965)을 연출하여 숀 코네리를 제임스 본드 역으로 캐스팅하는 등 시리즈의 성공에 기여했다. 1981년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인천》을 연출했으나, 1983년 최악의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8년 마지막 영화를 연출하고 199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캐서린스 칼리지 동문 - 툰쿠 압둘 라만
    툰쿠 압둘 라만은 말레이시아의 초대 총리로서 독립을 선포하고 연방을 수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UMNO 의장으로서 연합당을 결성하여 총선에서 승리, 아세안 창설을 주도하는 등 외교적으로도 활약했지만 싱가포르 분리와 5·13 사건을 겪은 후 총리직에서 물러나 말레이시아 스포츠 발전에도 기여한 인물이다.
  •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캐서린스 칼리지 동문 - 윌리엄 스트롱
    윌리엄 스트롱은 17세기 영국의 목사이자 작가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의회 앞에서 설교하고 웨스트민스터 총회 등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사망 후 유해가 버려졌다.
  • 영국의 영화 각본가 - 피터 모건
    피터 모건은 런던 출신의 영국 극작가이자 각본가로, 영화 《더 퀸》, 《프로스트/닉슨》 등의 각본을 썼으며,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의 제작, 작가, 총괄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에미상을 수상하고 대영 제국 훈장을 받았다.
  • 영국의 영화 각본가 - 라이어널 위그럼
    라이어널 위그럼은 워너 브라더스 부사장으로서 《해리 포터》 영화 시리즈 제작을 총괄하고, 독립 프로듀서로 전향하여 《셜록 홈즈》 시리즈 제작 및 각본 참여, 가이 리치와 함께 Ritchie/Wigram Productions 설립 후 《맨 프롬 U.N.C.L.E.》 등의 영화를 제작한 영국의 영화 프로듀서이자 각본가이다.
  • 영국의 영화 감독 - 조지 해리슨
    영국의 록 음악가이자 비틀즈의 리드 기타리스트였던 조지 해리슨은 "조용한 비틀"로 불리며 "Something"과 같은 곡들을 작곡했고, 인도 악기 도입, 솔로 활동, 방글라데시 난민 구호 콘서트 개최, 영화 제작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 영국의 영화 감독 - 개러스 에드워즈
    개러스 에드워즈는 영국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국의 영화 감독이자 각본가, 시각 효과 전문가로, 저예산 SF 영화 《몬스터즈》를 통해 주목받기 시작하여 《고질라》,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등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감독했다.
테런스 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테런스 영
로마자 표기Terence Young
본명숀 테런스 영
다른 이름Shaun Terence Young
출생일1915년 6월 20일
출생지상하이 국제 공동 조계, 중국
국적영국
사망일1994년 9월 7일
사망지, 프랑스
학력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캐서린 칼리지
배우자도로시아 베넷 (1942년 6월 결혼)
자녀3명
직업영화 감독, 영화 각본가
주요 작품
주요 작품007 시리즈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
수상
골든 라즈베리상최악의 감독상
1982년 인천!
일본어 표기
이름テレンス・ヤング
로마자 표기Terence Young
한국어 표기
이름테런스 영
로마자 표기Terence Young

2. 초기 생애와 교육

영은 1915년 중화민국 상하이 국제조계에서 영국인 부모에게 태어났다.[3][46] 그의 호적등본에는 이름이 '''스튜어트 테렌스 허버트 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1] '''션 테렌스 영'''이라는 이름도 사용했으며,[4] 영국영화협회(BFI)의 스크린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도 후자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는 상하이 시 경찰의 부국장이었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간 영은 런던의 해로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케임브리지대학교 세인트 캐서린스 칼리지에 진학하여 역사를 전공했다. 대학 시절에는 테니스, 럭비, 크리켓을 즐겼으며 대학 신문에 비평을 기고하기도 했다. 여름 방학에는 브리티시 인터내셔널 픽처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화계와 처음 인연을 맺었고, 졸업 후 각본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41년에는 멜로드라마 영화 ''덴저 인 문라이트''(Dangerous Moonlighteng)의 각본을 맡아 주목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은 영국 육군에 입대하여 대위 계급까지 올랐다. 근위 기갑사단의 정보 장교로서 네덜란드 아른험에서 벌어진 마켓 가든 작전에 참전했으며,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1] 그는 당시 포격 지휘 경험과 관련하여, 훗날 "조금만 더 왼쪽을 노렸더라면 (당시 그곳에 살고 있던 오드리 헵번)을 쏘았을 테니 지금쯤 이 일을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농담을 종종 했다고 전해진다.[47][48]

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테런스 영은 제2차 세계 대전 후기에 영국군 전차 부대장으로 참전했다. 그는 마켓 가든 작전 당시 격전지였던 아른험에서 포격을 지휘했다. 훗날 영은 당시 아른험에 살고 있던 오드리 헵번을 언급하며 "조금만 더 왼쪽을 노렸더라면 (오드리 헵번을 쏘았을 테니) 지금쯤 이 일을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종종 농담했다고 전해진다.[47][48]

4. 영화 경력

영국 경찰서장의 아들로 1915년 상하이 조계에서 태어났다.[46] 영국에서 교육을 받고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각본가로 활동했으며, 1941년 멜로드라마 ''위험한 달빛''(Dangerous Moonlight)의 각본으로 주목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후반기 마켓 가든 작전 당시 영국군 전차 부대장으로 참전하여 아른험에서 포격을 지휘했다. 그는 훗날 당시 그곳에 살고 있던 오드리 헵번을 언급하며 "조금만 더 왼쪽을 노렸더라면 (헵번을 쏘았을 테니) 지금쯤 이 일을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47][48]

전후 런던에서 조감독을 거쳐 영화 감독이 되었고,[49] 1953년 영화 붉은 베레모(''The Red Beret'')로 할리우드에 데뷔했다. 1962년 007 살인번호를 시작으로 007 위기일발, 007 썬더볼 작전 등 총 3편의 007 시리즈 영화를 감독했다. 이 과정에서 무명이었던 숀 코네리를 초대 제임스 본드로 발탁하고, 자신의 단골 재단사를 통해 그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50]

1994년 프랑스 의 병원에서[46] 심부전으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6]

주요 감독 작품은 다음과 같다.

주요 감독 작품
연도제목
1962007 살인번호
1963007 위기일발
1965007 썬더볼 작전
1967어두워질 때까지
1968비우
1970배신자
1971레드 선
1972살인 영장
1979혈선
1981오! 인천
1983두 얼굴의 스파이
1988비극의 마라톤


4. 1. 각본가 시절

영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재학 시절 대학 신문 ''그란타''에 영화 평론을 기고했고, 여름 방학에는 엘스트리 스튜디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화계와 인연을 맺었다. 졸업 후 각본가로 업계에 진출하여 브라이언 데스몬드 허스트 감독의 영화 ''밤의 불길 속에서''(On the Night of the Fire, 1939)의 각본 작업에 참여하며 이름을 올렸다. 이 작품은 칸 영화제에 영국 대표작으로 출품되기도 했다.[5]

이후에도 허스트 감독과 협력하여 ''무기의 요청''(A Call for Arms, 1940, 단편), ''위험한 달빛''(Dangerous Moonlight, 1941), ''울스터의 편지''(A Letter from Ulster, 1942, 단편) 등의 각본을 썼다.[5] 특히 1941년 멜로드라마 ''위험한 달빛''의 각본으로 주목받았다. 다른 감독들을 위해서는 젊은 제임스 메이슨이 출연한 ''비밀 임무''(Secret Mission, 1942)와 ''승낙''(On Approval, 1944) 등의 각본을 썼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인 1946년, 영은 다시 허스트 감독을 도와 마켓 가든 작전 중 아른험 전투를 그린 영화 ''그들의 영광은''(Theirs Is the Glory)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5]

이후 투 시티즈 필름(Two Cities Films) 소속으로 허스트 감독의 ''허기진 언덕''(Hungry Hill, 1947)과 데이비드 맥도널드(David McDonald) 감독의 ''악당 바이런 경''(The Bad Lord Byron, 1949)의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으나, 이 두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며 큰 손실을 기록했다.[6]

영은 런던에서 각본가와 조감독을 거쳐 영화 감독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49]

주요 각본 참여 작품
연도제목감독비고
1939밤의 불길 속에서 (On the Night of the Fire)브라이언 데스몬드 허스트칸 영화제 영국 대표 출품작[5]
1940무기의 요청 (A Call for Arms)브라이언 데스몬드 허스트단편 영화[5]
1941위험한 달빛 (Dangerous Moonlight)브라이언 데스몬드 허스트멜로드라마[5]
1942울스터의 편지 (A Letter from Ulster)브라이언 데스몬드 허스트단편 영화[5]
1942비밀 임무 (Secret Mission)(감독 정보 없음)제임스 메이슨 출연
1944승낙 (On Approval)(감독 정보 없음)
1946그들의 영광은 (Theirs Is the Glory)브라이언 데스몬드 허스트아른험 전투 배경[5]
1947허기진 언덕 (Hungry Hill)브라이언 데스몬드 허스트투 시티즈 필름 제작[6]
1949악당 바이런 경 (The Bad Lord Byron)데이비드 맥도널드투 시티즈 필름 제작, 흥행 실패[6]


4. 2. 감독 데뷔와 초기 작품

영의 감독으로서 첫 단독 작품은 프랑스에서 제작되어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영화 거울의 복도(1948)였다. 이 영화는 에릭 포트먼이 주연을 맡았으며, 크리스토퍼 리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하다.

그 다음 작품은 이탈리아에서 촬영된 뮤지컬 영화 당신과 함께 한 밤(1948)이었지만, 흥행에는 크게 실패했다.[6] 영국으로 돌아온 영은 원래 스튜어트 그랜저와 함께 ''소중한 저주''(Precious Baneeng)를 감독할 예정이었으나 제작이 취소되었다. 대신 배우 스튜어트 그랜저가 출연하는 코미디 영화 여자 혐오자(1948)를 제작했다.

영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자신이 영국 육군 전차 부대장으로 참전했던 마켓 가든 작전 중 아른험 전투를 배경으로 한 전쟁 영화 그들은 나뉘어지지 않았다(1950)의 각본을 쓰고 직접 감독을 맡았다. 이 영화는 영의 감독으로서 첫 번째 성공작이 되었다.[7]

이후 스웨덴에서 일부 촬영된 스파이 영화 독수리의 계곡(1951)을 감독했으며, 이 영화의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어서 높은 헤드라인(1952)을 제작했다. 1953년에는 붉은 베레모(''The Red Beret'')를 통해 할리우드에 데뷔했다.

4. 3. 워릭 필름과의 협력

영은 어빙 앨런과 알버트 R. 브로콜리의 워릭 필름사를 위해 첫 영화로 앨런 래드가 주연한 《레드 베레》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영국 박스오피스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 본드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작가 리처드 마이봄, 촬영 감독 테드 무어, 스턴트맨 밥 시몬스 등 많은 제작진이 참여했다.[8]

이후 영은 스페인에서 올리비아 드 핫빌랜드와 함께 《그 여인》(1955)을 제작했지만, 이 영화는 폴 스코필드의 데뷔작이었음에도 흥행에는 실패했다.[22] 알렉스 코르다와 함께 1939년 영화 《네 개의 깃털》을 거의 그대로 재구성한 《나일강의 폭풍》(1955)을 공동 제작했으며, 이 영화는 영국 박스오피스에서 인기를 끌었다.[9]

워릭 필름과는 마우마우 반란을 다룬 영화 《사파리》(1956)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케냐에서 일부 촬영되었으며 빅터 매튜어와 재닛 리가 출연했다. 같은 제작사를 위해 빅터 매튜어와 아니타 에크버그가 출연한 《자락》(1957)을 감독했는데,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10]

MGM의 의뢰로 밴 존슨이 출연하는 《호랑이의 행동》(1957)을 제작했으며, 이 영화에는 젊은 시절의 숀 코네리가 조연으로 출연했다.[11] 북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전쟁 영화 《다이할 시간 없음》(1958)은 워릭 필름과 함께한 영의 네 번째 영화이자 매튜어와 함께한 세 번째 영화였다. 영은 이 영화의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다.[11] 그는 또한 제임스 해들리 체이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플레이하우스 90》의 에피소드 "어둠처럼 깊은 밤"을 런던에서 촬영하며 감독했다.

영은 클리프 리처드의 영화 데뷔작인 《중대한 고발》(1959)을 제작했고,[12] 이후 제인 맨스필드가 출연하는 《감당하기 힘든 것》(1960)을 만들었다.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에서는 모리스 슈발리에와 함께 발레 영화 《검은 스타킹》(1961)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앨런 래드와 함께 페플럼 영화 《챔피언의 결투》(1961)를 제작했다.[13]

4. 4. 007 시리즈

앨버트 R. 브로콜리가 어빙 앨런과 결별한 후, 해리 살츠먼과 손잡고 이언 플레밍제임스 본드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시리즈 제작에 나섰다. 브로콜리는 이전에 함께 일했던 스태프들을 대거 기용했으며, 테런스 영도 그중 한 명으로 시리즈 첫 작품인 007 살인번호(1962)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본드 연구가 스티브 제이 루빈에 따르면, 영은 키가 크고 옷을 잘 입는 등 세련된 인물로, 이언 플레밍이 묘사한 제임스 본드의 모습을 닮았다고 평가받았다. 또한 그는 원작 소설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며, 영화에서도 원작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14]

영은 007 시리즈에 몇 가지 중요한 기여를 했는데, 특히 초대 제임스 본드 역으로 숀 코네리를 발탁한 것이 대표적이다. 미스 머니페니 역을 연기한 배우 로이스 맥스웰은 훗날 "테런스는 숀을 각별히 챙겼다. 저녁 식사에 데려가고, 자신의 단골 재단사에게 소개해 옷을 맞춰주었으며, 걷는 법, 말하는 법, 심지어 식사 예절까지 가르쳤다"고 회상했다.[15] 영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영화 속 제임스 본드의 세련된 패션에는 그의 취향이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고 평가받는다.[50]

007 살인번호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바로 제작된 후속작 007 위기일발(1963)은 더욱 큰 흥행을 기록했다. 그러나 007 위기일발 촬영 도중, 영과 촬영 감독은 중요한 장면을 찍기 위해 탑승했던 헬리콥터가 바다에 추락하는 사고를 겪었다. 두 사람은 물에 빠져 거의 익사할 뻔했으나 동료 스태프들에게 구조되었고, 영은 구조된 지 불과 30분 만에 다시 메가폰을 잡고 촬영을 재개하는 투혼을 보였다.[16]

연이은 성공으로 영에게는 많은 연출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세 번째 007 영화인 007 골드핑거의 사전 제작에도 참여했으나, 제작자들에게 영화 수익의 일정 비율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감독직에서 하차했다. 그의 빈자리는 가이 해밀턴이 메웠다.[17] 영은 대신 킴 노백 주연의 영화 몰 플랜더스의 연애 모험(1965)을 연출했다.[17] 이 영화는 영의 제작사 윈체스터 프로덕션과의 공동 제작이었으며, 한때 숀 코네리의 당시 아내였던 다이앤 실렌토가 주연으로 고려되기도 했다.[18][19]

이후 영은 네 번째 007 영화인 007 썬더볼 작전(1965)의 감독으로 복귀했다. 이 작품은 그가 감독한 마지막 007 영화가 되었다. 영은 007 썬더볼 작전을 마친 후 "마지막 작품을 찍을 때는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겼지만[50], 이후 007 유어 아이스 온리007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의 감독 제안을 받았음에도 모두 거절하며 007 시리즈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감독한 007 시리즈 영화는 다음과 같다.


4. 5. 007 시리즈 이후

007 썬더볼 작전》(1965) 이후 영의 작품 대부분은 유럽 대륙, 주로 이탈리아프랑스에서 제작되었다.

1965년에는 부르빌과 헨리 폰다가 주연한 옴니버스 영화 《더티 게임》(The Dirty Game)의 일부를 감독했다. 1966년에는 프레드릭 스태퍼드 주연의 스파이 영화 《도쿄를 위한 에이스 오브 하트 OSS 117》(Atout cœur à Tokyo pour OSS 117)의 스토리를 제공했고, 이언 플레밍의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올스타 캐스팅의 《양귀비도 꽃이다》(The Poppy Is Also a Flower)를 감독했다.[20] 같은 해 크리스토퍼 플러머율 브리너가 주연한 전쟁 스파이물 《트리플 크로스》(Triple Cross)를 제작했다.

1967년에는 앤서니 퀸과 함께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방랑자》(The Rover, 원제 L'Avventuriero)를 제작했으나,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21] 그러나 같은 해 오드리 헵번 주연의 스릴러 영화 《어두워질 때까지》(Wait Until Dark)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23] 1967년 인터뷰에서 영은 자신의 최고 작품으로 《검은 스타킹》(Black Tights), 《007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 《그들은 나뉘지 않았다》(They Were Not Divided)를 꼽기도 했다.[22]

이후 오마 샤리프 주연의 시대극 《마이어링》(Mayerling, 1968)을 감독하고 공동 집필했으며, 윌리엄 홀든과 함께 《크리스마스 트리》(The Christmas Tree, 1969)를 제작했다.[24] 또한 이 시기에는 《비우》(1968)와 《배신자》(1970)를 감독했다.

1970년대에는 찰스 브론슨 주연의 영화 세 편을 연달아 제작했다. 첫 작품은 스릴러 《콜드 스웨트》(Cold Sweat, 1970)였다. 다음으로는 《007 살인번호》의 우르술라 안드레스, 알랭 들롱, 三船敏郎|미후네 도시로일본어가 공동 주연한 독특한 서부극 《레드 선》(Red Sun, 1971)이었는데, 이 영화는 국제적으로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25] 마지막 협업은 마피아 전기 드라마 《발라치 페이퍼》(The Valachi Papers, 1972)였으며, 이 작품 역시 흥행에 성공했다.[26] 이 시기에는 이 외에도 《살인 영장》(1972), 《아마조네스》(1973), 리처드 버턴리 마빈 주연의 《클랜스맨》(The Klansman, 1974) 등을 감독했다.

1979년에는 오드리 헵번과 다시 작업한 스릴러 《화려한 상속인》(Bloodline)을 감독했다. 1981년에는 로런스 올리비에, 재클린 비셋, 벤 가자라, 三船敏郎|미후네 도시로일본어 등 호화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통일교의 자금 지원과 역사 왜곡 논란으로 비판받은 전쟁 영화 《오! 인천》(Inchon!)을 감독했다. 이후 《두 얼굴의 스파이》(The Jigsaw Man, 1983), 《비극의 마라톤》(Run for Your Life, 원제 Marathon Run, 1988) 등을 연출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4. 6. 《오! 인천》과 말년

영은 1973년 영화 《전쟁의 여신 (War Goddess)》을 제작한 후, 리처드 버튼과 리 마빈이 출연하는 《클랜스맨 (The Klansman)》(1974)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이 영화는 원래 새뮤얼 풀러가 감독과 각본을 맡을 예정이었으나, 유럽 투자자들의 요청으로 영이 감독으로 교체되었고 각본도 수정되었다. 영은 자신이 감독했던 《007 썬더볼 작전》에 출연했던 루치아나 팔루치를 이 영화에 캐스팅했다.[27] 새뮤얼 풀러는 나중에 영을 만난 경험을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테렌스는 내가 영화에서 밀려났다는 것을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고 맹세했소. 그는 내 원본 각본을 읽어본 적도 없었고, 미국의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소. 그의 매니저가 급여 때문에 그 일을 받아들이도록 밀어붙였소. 테렌스는 코트다쥐르에 있는 그의 저택과 비싼 프랑스 여자 친구를 위해 많은 돈을 써야 했소. 그는 형편없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탐욕을 솔직하게 인정한 그런 정직한 사람을 내가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소.[28]


이후 영은 《클랜스맨》에 참여했던 배우, 제작자, 작가와 함께 《잭팟》이라는 영화 작업을 했으나, 재정 문제로 완성되지 못했다.[29]

1979년에는 시드니 셸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블러드라인》(1979)의 감독을 맡아 오드리 헵번과 다시 작업했다. 이 영화는 원래 존 프랑켄하이머가 감독할 예정이었다.[30]

영은 인천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대작 영화 《인천》(1981)을 감독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이 영화에는 로렌스 올리비에가 출연했는데, 영과 올리비에는 오랜 친구 사이였다. 올리비에는 1943년 자신의 감독 데뷔작인 《헨리 5세》(1944)의 감독직을 영에게 제안했지만 당시 영은 거절한 바 있다.[31] 그러나 영화 《인천》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큰 실패를 겪었고, 영은 1983년 제3회 골든 라즈베리상 시상식에서 최악의 감독상을 수상하는 불명예를 안았다.[32]

이후 영은 마이클 케인과 올리비에가 출연하는 《지그소 맨》(1983)을 감독했으나, 제작비 부족으로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영이 마지막으로 감독한 영화는 데이비드 캐러딘 주연의 《목숨을 걸고 도망쳐》(1988)이다.[33] 이 외에도 영은 홍콩 영화 《폭스배트》(1977)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공동 감독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다. 또한 사담 후세인의 삶을 다룬 6시간 분량의 이라크 텔레노벨라 《긴 날들 (The Long Days)》(1980)의 편집을 담당했고, 이 작품 역시 일부 지역에서는 공동 감독으로 크레딧되었다.[34]

5. 사생활

영은 1942년 소설가 도로테아 "도시아" 베넷과 결혼했다. 베넷은 이전에 니센이라는 노르웨이 남성과 결혼하여 딸을 두었으나, 1942년 6월 런던의 노르웨이 망명 정부로부터 이혼 판결을 받고 5일 뒤 영과 결혼했다. 이후 베넷의 전 남편 니센은 이 이혼 판결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영을 상대로 베넷과의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1955년 3월 1심에서는 니센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으나, 같은 해 항소심에서 기각되어 원래의 이혼 판결이 유효한 것으로 확정되었다.[35][36][37][38]

영은 베넷과의 사이에서 아들 한 명과 딸 두 명을 두었다. 아들은 1943년 3월에 태어났으며, 베넷이 전 남편 니센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줄리엣 니센은 영의 의붓딸로 함께 지냈다.[39] 베넷과 영의 막내딸은 1966년에 입양한 아이로, 당시 세 살이었으며 이미 두 자녀는 성인이었다.[40][38][41]

5. 1. 성추문 의혹

2022년, 배우 마가릿 르워스는 1962년 테런스 영 감독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42] 르워스에 따르면, 사건은 영화 ''007 살인번호''의 종영 파티로 가는 리무진 안에서 발생했다. 영은 르워스에게 반복적으로 추근거렸으며, 그녀가 거부 의사를 밝히자 신체를 더듬었다. 르워스가 계속해서 그의 접근을 거부하자, 영은 영화에서 그녀의 출연 장면을 삭제하겠다고 협박했다. 두 달 뒤, 영은 자메이카 킹스턴에 있는 르워스의 집으로 전화해 다시 추근대며 런던으로 와서 더빙 작업을 할 것을 요구했다. 르워스가 이를 거절하자 영은 또다시 영화에서 그녀의 장면을 삭제하겠다고 협박했다. 르워스는 이 사건 때문에 결국 다른 배우가 자신의 목소리를 더빙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42]

6. 사망

1994년 프랑스 의 한 병원에서 심장 질환(출처에 따라 심장마비[43] 또는 심부전[46])으로 사망했다. 향년 79세였다.[43][46]

7. 작품 목록


  • 1948: ''거울의 복도'' (''Corridor of Mirrors'')
  • 1948: ''당신과의 밤'' (''One Night with You'')
  • 1948: ''여자 혐오자'' (''Woman Hater'')
  • 1950: ''그들은 분열되지 않았다'' (''They Were Not Divided'')
  • 1951: ''독수리의 계곡'' (''Valley of Eagles'')
  • 1952: ''높은 헤드라인'' (''The Tall Headlines'')
  • 1953: ''붉은 베레모'' (''The Red Beret'')
  • 1955: ''그 여인'' (''That Lady'')
  • 1955: ''나일강의 폭풍'' (''Storm Over the Nile'')
  • 1956: ''사파리'' (''Safari'')
  • 1956: ''자락'' (''Zarak'')
  • 1957: ''호랑이의 행동'' (''Action of the Tiger'')
  • 1958: ''죽을 시간 없어'' (''No Time to Die'') - 007 노 타임 투 다이(''No Time To Die'', 2021)와 제목은 같지만 다른 작품이다. 다만, 앨버트 브로콜리와 루치아나 팔루치 등 007 관계자들이 다수 참여했다.
  • 1959: ''중대한 고발'' (''Serious Charge'')
  • 1960: ''감당하기에 너무 뜨거워'' (''Too Hot to Handle'')
  • 1961: ''검은 스타킹'' (''Black Tights'')
  • 1961: ''챔피언의 결투'' (''Duel of Champions'')
  • 1962: ''007 살인번호'' (''Dr. No'')
  • 1963: ''007 위기일발'' (''From Russia with Love'')
  • 1965: ''몰 플랜더스의 연애 모험'' (''The Amorous Adventures of Moll Flanders'')
  • 1965: ''더티 게임'' (''The Dirty Game'')
  • 1965: ''007 썬더볼 작전'' (''Thunderball'')
  • 1966: ''양귀비 또한 꽃이다'' (''The Poppy Is Also a Flower'')
  • 1966: ''트리플 크로스'' (''Triple Cross'')
  • 1967: ''잔혹의 규칙'' (''L'Avventuriero'')
  • 1967: ''방랑자'' (''The Rover'')
  • 1967: ''어두워질 때까지'' (''Wait Until Dark'')
  • 1968: ''비우'' (''Mayerling'')
  • 1969: ''크리스마스 트리'' (''The Christmas Tree'')
  • 1970: ''밤의 방문객'' (''Cold Sweat'')
  • 1971: ''레드 선'' (''Red Sun'')
  • 1972: ''발라치 서류'' (''The Valachi Papers'')
  • 1973: ''전쟁의 여신'' (''War Goddess'')
  • 1974: ''쿠 클럭스 클랜'' (''The Klansman'')
  • 1977: ''폭스배트'' (''Foxbat'')
  • 1979: ''혈선'' (''Bloodline'')
  • 1981: ''오! 인천'' (''Inchon'')
  • 1983: ''두 얼굴의 스파이'' (''The Jigsaw Man'')
  • 1988: ''비극의 마라톤'' (''Run for Your Life'')

참조

[1] 논문 Young, (Stewart) Terence Herbert https://www.oxforddn[...] 2023-09-10
[2] 서적 Brewer's Cinema https://archive.org/[...] Cassell 2023-09-07
[3] 뉴스 Terence Young https://archive.org/[...] 2023-09-11
[4] 웹사이트 Young, Terence (1915–1994) http://www.screenonl[...] 2012-10-18
[5] 뉴스 LONDON FILM MEN DEFY AIR RAIDS: MAKE PICTURE TO TIME http://nla.gov.au/nl[...] 2024-11-25
[6] 서적 The Money Behind the Screen: A History of British Film Finance, 1945-1985 Edinburgh University Press
[7] 뉴스 Six British films get top box-office rating http://nla.gov.au/nl[...] 2020-04-09
[8] 뉴스 Hollywood cheer: Eric Johnston predicts good year for industry; Producer's point of view. 1954-01-10
[9] 간행물 The Emasculation of Anthony Steel: A Cold Streak Saga https://www.filmink.[...] 2020-09-23
[10] 뉴스 Top Grosses of 1957 1958-01-08
[11] 간행물 Others in the Money 1958-12-18
[12] 간행물 Other better-than-average offerings 1959-12-17
[13] 뉴스 More TV Notables Grabbed for Films: Ladd Among Us for 'Tiger'; Should Nation Honor Artists? 1961-03-31
[14] 서적
[15] 서적 For Your Eyes Only : Ian Fleming and James Bond Bloomsbury 2009
[16] 서적
[17] 서적
[18] 간행물 Rank 'Moll Flanders' in Wake of 'Tom Jones' https://archive.org/[...] 1964-02-05
[19] 뉴스 Breaking Away From His Bondage to Bond: Breaks With Bond 1966-01-16
[20] 간행물 The Euan Lloyd Interview
[21] 간행물 ABC's 5 Years of Film Production Profits & Losses 1973-05-31
[22] 뉴스 Terence Young's Post-Bond Views 1967-02-21
[23] 서적 Coming Back to a Theater Near You: A History of Hollywood Reissues, 1914–2014 McFarland & Company
[24] 뉴스 Mayerling again this summer? 1968-03-11
[25] 서적 Charles Bronson: the 95 films and the 156 television appearances https://books.google[...] McFarland & Co 2020-06-26
[26] 간행물 All-time Film Rental Champs 1976-01-07
[27] 뉴스 Forget the Credit; They'll Take Cash 1974-12-09
[28] 서적 A third face : my tale of writing, fighting, and filmmaking Knopf
[29] 뉴스 World of Stars: Young Connoisseur of Rough Years https://news.google.[...] 1975-07-05
[30] 웹사이트 Sidney Sheldon's Bloodline – History http://catalog.afi.c[...] 2019-05-16
[31] 서적 Laurence Olivier HarperCollins 1992
[32] 서적 The Official Razzie Movie Guide Warner Books
[33] 서적 Il cinema di Terence Young Il foglio
[34] 간행물 Tales of the Tyrant https://www.theatlan[...] 2002-05
[35] 뉴스 SCREEN: 'JIGSAW MAN,' BRITISH SPY THRILLER https://www.nytimes.[...] 2023-09-11
[36] 뉴스 At Last She Knows Who Her Husband Is https://www.britishn[...] 1955-11-05
[37] 뉴스 Decree Judgement Reserved https://www.britishn[...] 1955-03-24
[38] 뉴스 Court Holds Woman's Second Marriage Lawful https://www.britishn[...] 1955-11-05
[39] 뉴스 Hanging the Stars https://www.britishn[...] 1954-05-21
[40] 웹사이트 Obituary: Terence Young https://www.independ[...] 1994-09-15
[41] 뉴스 Her Kisses Reserved https://archive.org/[...] 1966-10-29
[42] 뉴스 James Bond actor breaks 60-year silence to claim Dr No director sexually assaulted her https://www.itv.com/[...] 2022-07-13
[43] 뉴스 Terence Young; British Director Made 3 Early James Bond Films https://www.latimes.[...] 1994-09-09
[44] 웹사이트 Young, Terence (1915-1994) http://www.screenonl[...]
[45] 서적 The American Cinema
[46] 뉴스 Terence Young, 79; In 1960's, Directed 3 James Bond Films https://www.nytimes.[...] 뉴욕 타임즈 1994-09-09
[47] 서적 『母、オードリーのこと』 竹書房 2004-05-18
[48] 서적 『audrey hepburn treasures』 講談社 2006-09-25
[49] 웹사이트 Young, Terence (1915-1994) http://www.screenonl[...] screenonline
[50] 웹사이트 「男が憧れる」007 歴代ボンド、一流の装いの秘密 https://style.nikkei[...] 2020-06-0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