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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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밴 존슨은 1916년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에서 태어난 배우이다. 1930년대부터 연기를 시작하여 브로드웨이와 영화를 오가며 활동했다. MGM과 계약을 맺고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으며, 특히 1943년 영화 《조라는 이름의 사나이》로 스타덤에 올랐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자동차 사고로 징집 면제된 후, 전쟁 드라마와 뮤지컬에서 '미국 소년' 이미지를 구축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1954년 MGM과의 계약 종료 후 프리랜서 배우로 활동하며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으며, 1960년대 이후에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연극 무대에서도 활동했다. 1992년 배우 생활에서 은퇴한 후, 2008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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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 존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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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찰스 밴 델 존슨 |
| 출생일 | 1916년 8월 25일 |
| 출생지 |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 |
| 사망일 | 2008년 12월 12일 |
| 사망지 | 미국 뉴욕주 록랜드군 나이액 |
| 국적 | 미국 |
| 직업 | 배우, 가수, 무용가 |
| 활동 기간 | 1935년–1992년 |
| 개인사 | |
| 배우자 | 이브 린 애벗 윈 (1947년–1968년, 이혼) |
| 자녀 | 1명 |
| 친척 | 트레이시 키넌 윈 (의붓아들) |
| 기타 정보 | |
| 별칭 | 디너 극장의 왕 목소리 없는 시나트라 |
2. 초기 생애
1916년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에서 태어났다.[4] 그의 아버지 찰스 E. 존슨은 스웨덴 출신 이민자로 어린 시절 미국으로 건너와[31] 배관공을 거쳐 부동산 업자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 로레타는 펜실베이니아 더치(게르만계독일계 미국인)였다. 존슨이 3살 때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으로 집을 나갔고,[32] 남겨진 아버지와 외아들의 관계는 냉담하여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5]
존슨은 고등학교 재학 중 뉴포트의 사교 클럽에서 공연했고, 1935년 졸업 후 뉴욕으로 이주하여 연기 경력을 시작했다.[4] 조지 애보트 연출의 ''너무 많은 소녀들''과 ''팔 조이'' 등에 출연하며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했다.[7]
3. 경력
워너 브라더스와의 짧은 계약 후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GM)와 계약을 맺었다.[9] 1942년 닥터 키다레(Dr. Kildare) 시리즈의 ''길레스피 박사의 새로운 조수(Dr. Gillespie's New Assistant)''에서 닥터 랜달 아담스 역을 맡아 이름을 알렸다.
1943년 영화 ''A Guy Named Joe'' 촬영 중 자동차 사고로 이마에 금속판을 넣고 얼굴에 흉터가 생겼지만, 스펜서 트레이시의 도움으로 영화를 마칠 수 있었다.[12] 이 영화의 성공으로 존슨은 스타덤에 올랐고, 제2차 세계 대전 징집에서 면제되어 배우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4]
MGM은 존슨을 '미국 소년' 이미지로 만들었고, 그는 전쟁 드라마와 뮤지컬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다. 준 앨리슨과 함께 출연한 뮤지컬 ''두 소녀와 선원''(1944)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연도 순위 지역 1945 2위 미국 1946 3위 미국 1950 18위 미국 1951 24위 미국
전후에도 MGM에서 활동하며 에스터 윌리엄스와 《이지 투 웨드》(1946), 주디 갈랜드와 《굿 올 썸머타임》(1949) 등에 출연했다. 벌지 전투를 다룬 《배틀그라운드》(1949)에도 출연했다.
콜럼비아 픽처스의 《케인호의 반란》(1954)에서 스티븐 메리크 역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는 흉터가 캐릭터의 진정성을 높여준다고 믿어 분장 시 흉터를 가리지 않았다.[15] 《브리가둔》(1954) 출연 후, 《내가 마지막으로 파리를 보았을 때》(1954)를 끝으로 MGM과의 계약을 마쳤다.
1954년 MGM 계약 종료 후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1957년 뮤지컬 《하멜린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주인공 역을 맡아 노래와 춤 실력을 선보였다.[17] 1961년에는 런던에서 ''더 뮤직 맨''에 출연하여 호평을 받았다.[17]
1970년대 이후 서머 스톡과 디너 시어터에서 활동했고, 1985년 뮤지컬 ''라 카그 오 폴''로 브로드웨이 극장에 복귀했다.
3. 1. 브로드웨이 시절
존슨은 고등학교 재학 중 뉴포트의 사교 클럽에서 공연했다. 1935년 졸업 후 뉴욕으로 이주하여 오프 브로드웨이 쇼 '앙트레 누'에 참여했다.[4]
존슨은 대역 무용수로 극단에서 뉴잉글랜드 투어를 했지만, 그의 연기 경력은 브로드웨이 쇼 ''1936년의 새로운 얼굴들(New Faces of 1936)''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다시 코러스로 돌아와 뉴욕시 인근의 여름 리조트에서 일했다.[6] 1939년, 연출가이자 극작가인 조지 애보트는 그를 로저스 앤 하트의 ''너무 많은 소녀들''에서 대학생 역할과 세 명의 남성 주연 모두의 대역으로 캐스팅했다. 그는 루실 볼과 데시 아르나즈가 공동 출연한 ''너무 많은 소녀들''의 영화 각색에서 크레딧에 오르지 않은 역할을 맡았고, 이후 애보트는 그를 코러스 보이로 고용하고, 진 켈리의 대역으로 ''팔 조이''에 출연시켰다.[7]
3. 2. MGM과의 계약
워너 브라더스와의 짧은 계약이 끝난 후, 밴 존슨은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GM)와 계약을 맺었다. MGM은 그에게 연기, 화술, 발음 수업을 제공했다.[9] 그는 영화 ''어딘가에 당신을 찾으리라(Somewhere I'll Find You)''(1942)에서 군인 역으로 크레딧에 오르지 못하는 단역으로 출연했다. 이후, 영화 ''해들리 부인과의 전쟁(The War Against Mrs. Hadley)''(1942)에서 작은 배역으로 주목받았고, 이는 MGM이 그를 장기 시리즈인 닥터 키다레(Dr. Kildare)에 캐스팅하도록 이끌었다. 루 에이어스(Lew Ayres)가 닥터 키다레 역을, 라이오넬 배리모어(Lionel Barrymore)가 닥터 길레스피 역을 맡았던 이 시리즈는, 에이어스의 양심적 병역 거부로 인해 경력에 타격을 입으면서 닥터 길레스피가 새로운 의사들을 지도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존슨은 ''길레스피 박사의 새로운 조수(Dr. Gillespie's New Assistant)''(1942)에서 닥터 랜달 아담스 역을 연기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3. 3. 스타덤
존슨의 큰 성공은 스펜서 트레이시와 아이린 던이 주연한 영화 ''A Guy Named Joe''(1943)에서였다. 그는 이 영화에서 죽은 조종사를 수호천사로 삼는 젊은 조종사 역을 맡았다. 1943년 영화 제작 중에 존슨은 심각한 자동차 사고를 당해 이마에 금속판을 넣고 얼굴에 여러 개의 흉터가 생겼는데, 성형 수술로 완전히 교정하거나 가릴 수 없었다.[12] 존슨은 또한 뇌 수술을 받았다. 그는 배우 활동으로 복귀하기 전에 키넌 윈의 집에서 회복했다.[11] 그는 나머지 배우 경력 동안 흉터를 가리기 위해 두꺼운 화장을 했다. MGM은 그를 ''A Guy Named Joe''에서 교체하려 했지만, 트레이시는 그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끝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주장했다.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어 100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고, 존슨을 스타로 만들었다.[12]
자동차 사고로 인한 존슨의 부상은 그를 제2차 세계 대전 징집에서 면제시켰다. 다른 많은 배우들이 군 복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고는 존슨의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4] 그는 나중에 "우리 다섯 명이 있었어요. 지미 크레이그, 밥 영, 바비 워커, 피터 로포드, 그리고 저였죠. 모두 항상 같은 배역을 위해 오디션을 봤어요."라고 말했다. 존슨은 매우 바빴고, 종종 군인 역할을 연기했다. 그는 이 시기에 대해 농담조로 "목요일 아침에 준 앨리슨과 함께 영화를 마치고, 목요일 오후에 에스터 윌리엄스와 함께 새로운 영화를 시작했던 기억이 나요. 제가 어느 군대에 있었는지 몰랐어요!"라고 말했다.[13]
MGM은 전쟁 드라마와 뮤지컬에서 존슨의 이미지를 전형적인 '미국 소년'으로 만들었다. 그가 주연을 맡은 첫 번째 "A"급 영화는 뮤지컬 ''두 소녀와 선원''(1944)이었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는 준 앨리슨과 함께 한 그의 첫 번째 영화였다. 그는 ''도버의 하얀 절벽''(1944)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고, 그 후 ''3인의 백의의 사나이''(1944)에서 닥터 아담스 역을 다시 연기했다.
영화 흥행업자들은 수년간 존슨을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배우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 연도 | 순위 | 지역 |
|---|---|---|
| 1945 | 2위 | 미국 |
| 1946 | 3위 | 미국 |
| 1950 | 18위 | 미국 |
| 1951 | 24위 | 미국 |
3. 4. 전후 경력


전쟁 이후에도 존슨은 MGM에서 계속 활동하며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했다. 라나 터너, 월터 피전, 진저 로저스와 함께 《주말의 연정》(1945)에서 주연을 맡았는데, 이 작품은 《그랜드 호텔》의 뮤지컬 리메이크였다.[3] 1945년, 그는 빙 크로스비와 함께 박스 오피스 스타 1위에 올랐다.
에스터 윌리엄스와 《이지 투 웨드》(1946)에서 다시 만났는데, 이 작품은 《소송 부인》의 뮤지컬 리메이크였다.[14] 스펜서 트레이시와 캐서린 헵번이 출연한 《국가의 활력》(1948)에서는 조연으로 출연했고, 전쟁 드라마 《커맨드 디시전》(1948)에서는 클라크 게이블과 피전을 지원했다.
20세기 폭스사는 존슨을 빌려 코미디 영화 《어머니는 신입생》(1948)에서 로레타 영과 함께 출연시켰다. MGM으로 돌아온 그는 필름 느와르 영화 《범죄 현장》(1949)에서 역할을 맡았다. 1949년, 그는 주디 갈랜드와 함께 《굿 올 썸머타임》에 출연했는데, 이 영화는 갈랜드와 존슨의 어린 딸로 출연한 라이자 미넬리의 첫 영화 출연작이기도 했다. 다음 작품은 MGM의 새로운 스튜디오 책임자 도어 샤리가 제작한 벌지 전투에 관한 영화 《배틀그라운드》(1949)였다.
존슨은 코미디 영화 《빅 행오버》(1950)에 출연했고, 그 후 《아이다호의 공작부인》(1951)에서 윌리엄스와 다시 만났다. 그는 로맨틱 코미디 《마이크라는 세 남자》(1951)에 출연했다. 그는 샤리가 제작한 영화 《고 포 브로크!》(1951)에서 유럽에서 유명한 442연대 전투단의 일본계 미국인 부대를 이끄는 장교 역할을 맡았다. 그는 《그것은 큰 나라》(1951)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고, 《너무 어려서 키스할 수 없어》(1951)에서 준 앨리슨과 다시 만났다. MGM은 그를 콜럼비아 픽처스에 빌려 《케인호의 반란》(1954)에서 스티븐 메리크 역을 맡게 했다. 그는 메리크 분장을 할 때 얼굴의 흉터를 가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흉터가 캐릭터의 진정성을 높여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허먼 워크는 소설에서 메리크를 "못생겼지만 불쾌하지 않은 특징"을 가진 인물로 묘사한다. 수년 후 한 평론가는 "험프리 보가트와 호세 페러는 이 해상 법정 드라마에서 모든 장면을 휩쓸었지만, 고통스럽게 갈등하는, 그다지 똑똑하지 않은 스티브 메리크 중위 역을 맡은 존슨의 캐릭터가 영화 전체를 묶어준다"라고 언급했다. 잡지 《타임》은 존슨이 "할리우드가 일반적으로 허용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배우였다"라고 평했다.[15]
존슨은 다음으로 진 켈리와 함께 《브리가둔》(1954)에서 냉소적인 두 번째 주연을 맡았다.[4] 그는 MGM에서의 마지막 영화인 《내가 마지막으로 파리를 보았을 때》(1954)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는 콜럼비아 픽처스와 연간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5년 계약을 맺었다.[16]
3. 5. 프리랜서 시절
1954년 MGM과의 계약이 끝난 후, 밴 존슨은 프리랜서 배우로서 여러 영화사와 작업했다. 1955년에는 컬럼비아에서 제작한 《애정의 종말》에 출연했고, 1956년에는 폭스에서 제작한 《병 속의 바닥》에 출연했다. 같은 해, 그는 《레인 속의 기적》에서 제인 와이먼과 함께 전쟁을 준비하는 젊은 군인 역할을 맡아 호평을 받았으며, 《베이커 가 23번지》에서는 런던에 거주하는 시각 장애인 극작가를 연기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17]1957년에는 NBC 추수감사절 특집 프로그램으로 방영된 뮤지컬 《하멜린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주인공 피리 부는 사나이 역을 맡았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를 에드바르 그리그의 음악으로 각색한 이 작품에서 클로드 레인스와 함께 출연하여 노래와 춤 실력을 선보였다.[17] 이 프로그램은 큰 성공을 거두어 음반으로도 제작되었고, 1958년에 다시 방송되었다.[18]
1959년, 밴 존슨은 텔레비전 시리즈 《언터처블》의 엘리엇 네스 역을 거절했고, 이 역할은 로버트 스택에게 돌아갔다.[20]
3. 6. 영국 활동 및 후기 경력
1961년, 존슨은 해롤드 필딩이 런던 아델피 극장에서 제작한 ''더 뮤직 맨''에 출연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갔다. 이 쇼는 1년 가까이 성공적으로 공연되었으며, 존슨은 어려운 주연 역할인 해롤드 힐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17]1968년에는 루실 볼과 헨리 폰다가 함께 출연한 MGM 영화 ''너의 것, 나의 것, 우리의 것''에 출연했다.
존슨은 1966년 TV 시리즈 ''배트맨''의 두 에피소드(39, 40화)에서 "음유시인"으로 출연했다. 1970년대에는 ''여기에 루시가 있다'', ''퀸시 M.E.'', ''맥밀란과 아내'', ''러브, 아메리칸 스타일'' 등에 출연했다. 1976년 미니시리즈 ''부유한 남자, 가난한 남자''에서 주연을 맡아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1980년대에는 앤젤라 랜즈베리의 ''명탐정 씬디''에 준 앨리슨과 함께 출연했다. 1982년 2월 27일에는 ''러브 보트''의 특별 2부작 에피소드 "The Musical: My Ex-Mom; The Show Must Go On; The Pest, Parts 1 and 2"에 출연하여 앤 밀러, 에델 머먼, 델라 리스, 캐롤 채닝, 캡 캘러웨이와 함께 공연했다.
1970년대, 두 번의 암 투병을 거친 후, 존슨은 서머 스톡과 디너 시어터에서 두 번째 경력을 시작했다. 1985년, ''팔 조이'' 이후 처음으로 브로드웨이 극장으로 돌아와 뮤지컬 ''라 카그 오 폴''의 주연을 맡았다. 같은 해 그는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 조연을 맡았다. 75세가 된 그는 ''쇼 보트''에서 앤디 선장으로 순회 공연을 했다. 그의 마지막 영화 출연은 ''쓰리 데이즈 투 킬'' (1992년)이었다. 2003년에는 A. R. 거니의 ''러브 레터스''를 뉴욕주 웨슬리 힐스의 한 극장에서 베치 팔머와 함께 세 번 공연했다.[21]
4. 사생활
1947년 1월 25일, 배우 키넌 윈과 이혼한 다음 날, 전직 무대 배우 이브 애보트(1914–2004)와 결혼했다.[22] 1948년에 딸 스카일러가 태어났다. 이 결혼으로 존슨은 의붓아들인 에드먼드 키넌(네드)과 각본가 트레이시 키넌 윈을 얻었다. 90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이브가 발표한 성명에서, 그녀는 MGM이 존슨의 동성애 혐의를 덮기 위해 그녀와 결혼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빅 스타'가 결혼하여 그의 성적 취향에 대한 소문을 잠재울 필요가 있었고, 불행하게도 제가 '그것'이었습니다. 그가 결혼할 유일한 여성이었습니다."[22] 키넌 윈의 아버지 에드 윈은 복잡한 그들의 관계에 대해 "나는 그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요. 이비는 키넌을 사랑했고, 키넌은 이비를 사랑했고, 밴은 이비를 사랑했고, 이비는 밴을 사랑했고, 밴은 키넌을 사랑했고, 키넌은 밴을 사랑했어요."라고 말했다.[22]
존슨의 전기 작가 로널드 L. 데이비스는 존슨이 동성애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영화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썼지만, 존슨이 영화를 만들던 시대에는 신문 칼럼니스트나 영화 잡지 작가들이 이를 보도하거나 암시하지 않았다.[23] 스튜디오 임원 루이스 B. 메이어는 존슨과 동성애자로 의심되는 그의 배우 친구들에 대한 잠재적인 스캔들을 진압하기 위해 강력한 노력을 기울였다.[23]
존슨과 이브 애보트의 결혼은 메이어가 사망한 지 4년 만에 끝났다. 존슨의 아들 네드 윈은 존슨이 런던 웨스트엔드 극장에서 ''더 뮤직 맨''의 해롤드 힐 교수 역으로 공연하면서 프로덕션의 남성 댄서와 불륜을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존슨이 그녀를 "남자 소년, 정말로. 그는 리드 보이 댄서예요."[22] 때문에 떠났다고 주장했다. 1961년에 부부는 헤어졌고 1968년에 이혼이 확정되었다.[24][25]
이브는 그의 "쾌활한 밴" 스크린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힘든 어린 시절 때문에 우울하고 변덕스러웠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그가 불쾌함을 거의 참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침실로 들어가 스스로를 고립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와 어려운 관계를 가졌고, 사망 당시 딸과도 소원한 관계였다.[3]
1963년 왼쪽 대퇴부의 피부암 수술을 받은 후, 두 번째 수술에서 림프절을 제거하고 암을 극복했다.
5. 사망
존슨은 1990년대 초 배우 생활에서 은퇴하여 맨해튼 이스트 사이드의 이스트 54번가 405번지에 있는 펜트하우스에서 살았다. 그는 뉴욕주 나이액에 있는 요양 시설인 태판 지 매너로 이사했다. 2008년 12월 12일, 92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화장되었다.[26]
6. 출연 작품
원제
The Human Comedy
Madame Curie
Two Girls and a Sailor
The White Cliffs of Dover
3 Men in White
Thirty Seconds Over Tokyo
No Leave, No Love
The Bride Goes Wild
State of the Union
Command Decision
Mother Is a Freshman
In the Good Old Summertime
Battleground
Go for Broke!
Easy to Love
Siege at Red River
Men of the Fighting Lady
The Caine Mutiny
Brigadoon
The Last Time I Saw Paris
The End of the Affair
The Bottom of the Bottle
Miracle in the Rain
23 Paces to Baker Street
Action of the Tiger
The Last Blitzkri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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