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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다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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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다하투스는 534년 동고트 왕국의 왕이 되었으나, 무능한 통치로 인해 536년 암살당했다. 그는 테오도리쿠스 대왕의 조카였으며, 아말라순타의 아들 아탈라릭이 죽은 후 공동 통치자가 되었지만, 아말라순타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침공에 맞서 싸웠으나 실패하고, 비티기스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펠릭스 단의 소설 《로마를 위한 투쟁》과 L. 스프라그 드 캠프의 소설 《어둠이 드리우기 전에》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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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다하투스
기본 정보
Coin reading in Latin,
라틴어로 "D[OMINUS] N[OSTER] THEODAHATUS REX / VICTORIA PRINCIPUM" ('우리의 주님 테오다하트 왕' / '왕자들의 승리')라고 적힌 동전
이름테오다하트
로마자 표기Teodahadeu
칭호동고트 왕
이탈리아 왕
재위 기간534년 – 536년 12월 경
이전아탈라리크
이후비티게스
섭정아말라스운타 (535년까지)
섭정 유형공동 군주
출생480년 경
출생지타우레시움, 동로마 제국
사망536년 12월 (56세)
배우자구델리바
자녀테우디기셀
테오데난타
가문아말 가문
어머니아말라프리다

2. 초기 생애

테오다하드는 480년경 현재 북마케도니아에 있는 타우레시움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 아마라프리다를 통해 테오도리쿠스 대왕의 조카가 되었다.[5] 아마라프리다의 두 번째 결혼이 500년경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테오다하드는 첫 번째 남편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누이는 아말라베르가였으며, 아버지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테오다하드는 테오도리쿠스와 함께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수 있으며, 즉위 당시 나이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테오다하드"는 '사람'과 '갈등'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플라톤과 다른 그리스 철학자들을 공부했고,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재산을 취득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했으며, 때로는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6] 그는 후에 아들 대신 통치하던 여왕 아말라순타가 보낸 비잔틴 사절이 로마와 라벤나에 도착한 후, 압류한 토지에 대해 시민들에게 보상해야 했다.[7] 프로코피우스의 《연대기》는 아말라순타가 비잔틴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8] 자신의 통치를 지지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으며, 테오다하드가 획득한 토지를 비잔틴 귀족과 유스티니아누스 자신에게까지 팔려고 시도한 것에 대해 언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테오다하드는 아내와 테우디기젤을 포함한 두 아들과 테오데난테라는 딸을 두었다.[9]

테오다하투스는 아말 가문의 혈통으로, 아마라프리다가 반달 왕국으로 시집가기 전에,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토스카나 지방을 영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투시아 공으로 불렸지만, 후에 동고트 왕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토스카나의 영지를 동로마 제국으로 이양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안락한 생활을 보내려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위기에 직면해서도 우유부단하게 도망을 시도하는 등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테오도리크에게 매우 미움을 받아, 아말 가문의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고발당해 두 번이나 법정에 서기도 했다.

테오도리크 사후, 테오다하투스는 반 아마라스운타파의 수장이 되어 장군 투린과 큐프리아누스 등과 함께 532년부터 533년에 걸쳐 아마라스운타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아마라스운타는 프랑크 왕국아를 침공 시 반대파 장군을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2. 1. 가계와 출신

테오다하드는 테오도리쿠스 대왕의 조카이며, 어머니는 아마라프리다이다.[5] 그의 누이는 아말라베르가이다. 테오다하드는 테우디기젤을 포함한 두 아들과 딸 테오데난테를 두었다.[9]

2. 1. 1. 가족 관계

테오다하드는 테오도리쿠스 대왕의 조카이며, 어머니는 아마라프리다이다.[5] 그의 누이는 아말라베르가이다. 테오다하드는 테우디기젤을 포함한 두 아들과 딸 테오데난테를 두었다.[9]

3. 동고트 왕 즉위

테오다하드는 아말라순타의 아들 아탈라릭이 죽은 후, 534년에 공동 통치자로 지명되었지만, 실권은 아말라순타에게 있었다. 테오다하드는 이 때문에 그해 말 반란을 일으켜 아마라순타를 추방하고 동고트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아마라순타는 볼세나 호에 유폐되었고,[11] 그녀에게 원한을 가진 인물에게 암살되었다. 이 조치는 이탈리아 반도의 탈환을 꾀하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좋은 구실을 제공하게 된다.

동로마 제국은 아마라스운타 암살의 보복으로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함대를 시칠리아 섬에 파견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게다가 달마티아로부터 장군 문도(Mundo)가 이끄는 육전 부대가 이탈리아를 향했다. 테오다하투스는 황제 사절 페트루스에게 협상을 벌여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카르타고의 반란으로 벨리사리우스가 북이탈리아로 향하고 문도가 이끄는 육상 부대가 고트군에 의해 전멸되자, 돌연 페트루스를 투옥하고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곧 달마티아를 탈환했다. 카르타고를 제압한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이탈리아 반도를 목표로 하여 거의 저항 없이 북상, 3주간의 포위 끝에 536년에 나폴리를 정복했다. 궁지에 몰린 테오다하투스는 고트군이 집결하는 로마로 향했지만, 미적지근한 태도에 분노한 고트족들은 536년 11월 테오다하투스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이에 당황한 테오다하투스는 라벤나로 도망쳤지만, 그 도중인 12월 초순, 고트군 총사령관이자 후계자로 임명된 장군 비티기스의 명을 받은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3. 1. 아말라순타와의 공동 통치

테오다하드는 동고트 왕국의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테오도리크는 그를 왕위 계승자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테오다하드가 전장에서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견해가 역사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알려진다. 초기에 프로코피우스는 이를 중상모략이라고 일축했지만, 이후 학계의 지지를 얻었다.[10]

테오다하드의 사촌인 아말라순타는 아들 아탈라릭을 대신하여 10년 동안 섭정으로 통치했으며, 아들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통치했다. 그녀의 친(親) 비잔틴적인 입장과 여성이라는 점은 많은 동고트 귀족들의 반대에 직면하게 했으며, 일부는 그녀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아마라순다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테오다하드를 공동 군주로 임명했다. 이 임명 전에 테오다하드는 아마라순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관계를 맺기 위해 왕위 계승 가문과 결혼해야 했다.

아마라순다는 토스카나에서 테오다하드가 논란이 많은 토지를 매입한 후 그의 평판을 회복시키고자 로마 원로원에 그를 왕국의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유능한 토지 소유주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은 엇갈린 결과를 낳았다. 아마라순다는 그녀의 성별과 콘스탄티노플과의 연계로 인해 지지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은 반면, 테오다하드는 귀족들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가 없었다.[10]

아마라순다는 또한 전임자인 테오도리크에 의해 왕위를 물려받도록 훈련받지 못한 테오다하드를 왕으로서의 책임에 대비시켜야 했다. 테오다하드는 통치에 대해 배우는 데 관심이 없었으며, 통치를 꺼렸음을 시사했다. 그의 초기 생애는 토지 획득과 판매에 집중되었으며, 이는 동방에서 은퇴하기 위한 준비였을 가능성이 있다.[5]

테오다하드는 토스카나에서의 아마라순다의 행동에 분개하여 결국 그녀를 볼세나 호수 근처 오르비에토의 섬으로 유배시켰으며, 그곳에서 그녀는 암살당했다.[11] 그녀의 죽음에 대한 대응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시칠리아에서 군사 행동을 시작하여 고트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3. 2. 아말라순타 유폐와 암살

테오다하드는 동고트 왕국의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테오도리크는 그를 왕위 계승자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테오다하드가 전장에서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에서도 입증된다.[10]

테오다하드의 사촌인 아말라순타는 아들 아탈라릭을 대신하여 10년 동안 섭정으로 통치했으며, 아들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통치했다. 그녀의 친 비잔틴적인 입장과 여성이라는 점은 많은 동고트 귀족들의 반대에 직면하게 했으며, 일부는 그녀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아마라순다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테오다하드를 공동 군주로 임명했다. 이 임명 전에 테오다하드는 아마라순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관계를 맺기 위해 왕위 계승 가문과 결혼해야 했다.

아마라순다는 토스카나에서 테오다하드가 논란이 많은 토지를 매입한 후 그의 평판을 회복시키고자 로마 원로원에 그를 왕국의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유능한 토지 소유주로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은 엇갈린 결과를 낳았다. 아마라순다는 그녀의 성별과 콘스탄티노플과의 연계로 인해 지지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은 반면, 테오다하드는 귀족들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가 없었다. 아마라순다는 또한 테오다하드를 왕으로서의 책임에 대비시켜야 했지만, 테오다하드는 통치에 대해 배우는 데 관심이 없었으며, 통치를 꺼렸다.[5] 그의 초기 생애는 토지 획득과 판매에 집중되었으며, 이는 동방에서 은퇴하기 위한 준비였을 가능성이 있다.

테오다하드는 토스카나에서의 아마라순다의 행동에 분개하여 결국 그녀를 볼세나 호수[11] 근처 오르비에토의 섬으로 유배시켰으며, 그곳에서 그녀는 암살당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대응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시칠리아에서 군사 행동을 시작하여 고트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4.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 (고트 전쟁)

유스티니아누스 1세아말라순타가 사망하자 동로마 제국서로마 제국을 재통합할 목적으로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빠르게 정복했다. 테오다하드는 침공 전에 유스티니아누스가 보낸 사절과 평화 협상을 시도하여 왕국을 매각하고 자신의 자유를 확보하려 했다.[9]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하여 테오다하드와 동고트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정복하게 했다. 테오다하드는 경험과 지식 부족으로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여 효과적인 방어를 펼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9]

테오다하드의 사위 에브레무드는 벨리사리우스와 맞서 싸우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그를 만나자 고트족 군대를 버리고 도망쳤다. 플라톤을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테오다하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협상을 시작한 후 군대를 강화하지 못했고, 라벤나로마로 피신했다. 전쟁에 대한 부적절한 준비와 포위된 나폴리를 돕지 않은 것으로 인해 고트족 사이에서 불만이 커졌고, 테오도리크 대왕의 전직 장군이었던 비티게스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아마라스운타 암살의 보복으로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함대를 시칠리아 섬에 파견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게다가 달마티아로부터 장군 문도(Mundo)가 이끄는 육전 부대가 이탈리아를 향했다. 테오다하투스는 황제 사절 페트루스에게 협상을 벌여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카르타고의 반란으로 벨리사리우스가 북이탈리아로 향하고 문도가 이끄는 육상 부대가 고트군에 의해 전멸되자, 돌연 페트루스를 투옥하고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곧 달마티아를 탈환했다. 카르타고를 제압한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이탈리아 반도를 목표로 하여 거의 저항 없이 북상, 3주간의 포위 끝에 536년에 나폴리를 정복했다.

궁지에 몰린 테오다하투스는 고트군이 집결하는 로마로 향했지만, 미적지근한 태도에 분노한 고트족들은 536년 11월 테오다하투스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이에 당황한 테오다하투스는 라벤나로 도망쳤지만, 그 도중인 12월 초순, 고트군 총사령관이자 후계자로 임명된 장군 비티기스의 명을 받은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비티게스 선출 소식을 들은 테오다하드는 라벤나로 돌아가 통제권을 되찾고 진격하는 비잔틴 군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이 퇴각 중에 비티게스는 옵타리스라는 고트족을 보내 테오다하드를 생포하거나 살해하도록 했다. 옵타리스는 테오다하드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테오다하드가 사망한 후, 비티게스는 동고트족의 왕으로 선포되었다.[6]

4. 1. 벨리사리우스의 침공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동로마 제국서로마 제국을 재통합할 목적으로 아말라순타가 사망하자,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신속하게 정복했다.[9] 테오다하드는 침공 전에 유스티니아누스가 보낸 사절과 평화 협상을 시도하여 왕국을 매각하여 자신의 자유를 확보하려 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자신의 가장 유능한 지휘관 중 한 명인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하여 테오다하드와 동고트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정복하게 했다.[9] 테오다하드는 경험과 지식 부족으로 전쟁의 요구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여 효과적인 방어를 펼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9]

테오다하드의 사위 에브레무드는 벨리사리우스와 맞서 싸우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그를 만나자 고트족 군대를 버리고 도망쳤다. 플라톤을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테오다하드는 콘스탄티노플과 협상을 시작한 후 군대를 강화하지 못했다. 라벤나로마로 피신하면서, 전쟁에 대한 부적절한 준비와 포위된 나폴리를 돕지 않은 것으로 인해 고트족 사이에서 불만이 커졌다. 이러한 불만은 테오도리크 대왕의 전직 장군이었던 비티게스의 새로운 왕 선출로 이어졌다.[9]

비티게스 선출 소식을 들은 테오다하드는 라벤나로 돌아가 통제권을 되찾고 진격하는 비잔틴 군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이 퇴각 중에 비티게스는 옵타리스라는 고트족을 보내 테오다하드를 생포하거나 살해하도록 했다. 옵타리스는 옵타리스가 구애했던 여성에 대한 테오다하드의 행동 때문에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테오다하드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9]

테오다하드가 사망한 후, 비티게스는 동고트족의 왕으로 선포되었다.[6]

4. 2. 테오다하드의 무능과 패배

유스티니아누스 1세아말라순타가 사망하자 동로마 제국서로마 제국을 재통합할 목적으로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빠르게 정복했다. 테오다하드는 침공 전에 유스티니아누스가 보낸 사절과 평화 협상을 시도하여 왕국을 매각하고 자신의 자유를 확보하려 했다.[9]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하여 테오다하드와 동고트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정복하게 했다. 테오다하드는 경험과 지식 부족으로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여 효과적인 방어를 펼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9]

테오다하드의 사위 에브레무드는 벨리사리우스와 맞서 싸우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그를 만나자 고트족 군대를 버리고 도망쳤다. 테오다하드는 콘스탄티노플과 협상을 시작한 후 군대를 강화하지 못했고, 라벤나로마로 피신했다. 전쟁에 대한 부적절한 준비와 포위된 나폴리를 돕지 않은 것으로 인해 고트족 사이에서 불만이 커졌고, 테오도리크 대왕의 전직 장군이었던 비티게스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되었다.

비티게스 선출 소식을 들은 테오다하드는 라벤나로 돌아가 통제권을 되찾고 진격하는 비잔틴 군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이 퇴각 중에 비티게스는 옵타리스라는 고트족을 보내 테오다하드를 생포하거나 살해하도록 했다. 옵타리스는 테오다하드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테오다하드가 사망한 후, 비티게스는 동고트족의 왕으로 선포되었다.[6]

5. 죽음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아말라순타가 사망하자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을 재통합할 기회로 삼아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빠르게 정복했다.[9] 테오다하드는 침공 전에 유스티니아누스가 보낸 사절과 평화 협상을 시도하여 왕국을 매각하고 자신의 자유를 확보하려 했다.[9]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하여 테오다하드와 동고트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정복하게 했다.[9] 테오다하드는 경험과 지식 부족으로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해 효과적인 방어를 펼치지 못했다.[9] 테오다하드의 사위 에브레무드는 벨리사리우스와 맞서 싸우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그를 만나자 고트족 군대를 버리고 도망쳤다. 테오다하드는 플라톤을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과 협상을 시작한 후 군대를 강화하지 못했다. 라벤나로마로 피신하면서, 전쟁에 대한 부적절한 준비와 포위된 나폴리를 돕지 않은 것으로 인해 고트족 사이에서 불만이 커졌다.

이러한 불만은 테오도리크 대왕의 전직 장군이었던 비티게스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536년 11월, 고트족들은 테오다하투스에게 퇴위를 요구했고, 당황한 테오다하투스는 라벤나로 도망쳤다. 비티게스 선출 소식을 들은 테오다하드는 라벤나로 돌아가 통제권을 되찾고 진격하는 비잔틴 군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이 퇴각 중에 비티게스는 옵타리스라는 고트족을 보내 테오다하드를 생포하거나 살해하도록 했다. 옵타리스는 옵타리스가 구애했던 여성에 대한 테오다하드의 행동 때문에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12월 초순, 테오다하드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6] 테오다하드가 사망한 후, 비티게스는 동고트족의 왕으로 선포되었다.[6]

5. 1. 비티게스의 왕위 계승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아말라순타가 사망하자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을 재통합할 기회로 삼아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빠르게 정복했다.[9] 테오다하드는 침공 전에 유스티니아누스가 보낸 사절과 평화 협상을 시도하여 왕국을 매각하고 자신의 자유를 확보하려 했다.[9]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하여 테오다하드와 동고트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정복하게 했다.[9] 테오다하드는 경험과 지식 부족으로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해 효과적인 방어를 펼치지 못했다.[9] 테오다하드의 사위 에브레무드는 벨리사리우스와 맞서 싸우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그를 만나자 고트족 군대를 버리고 도망쳤다. 테오다하드는 플라톤을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과 협상을 시작한 후 군대를 강화하지 못했다. 라벤나로마로 피신하면서, 전쟁에 대한 부적절한 준비와 포위된 나폴리를 돕지 않은 것으로 인해 고트족 사이에서 불만이 커졌다.

이러한 불만은 테오도리크 대왕의 전직 장군이었던 비티게스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비티게스 선출 소식을 들은 테오다하드는 라벤나로 돌아가 통제권을 되찾고 진격하는 비잔틴 군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이 퇴각 중에 비티게스는 옵타리스라는 고트족을 보내 테오다하드를 생포하거나 살해하도록 했다. 옵타리스는 테오다하드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6] 테오다하드가 사망한 후, 비티게스는 동고트족의 왕으로 선포되었다.[6]

6. 평가

테오다하투스는 아말 가문의 혈통이었지만, 토스카나 지방을 동로마 제국에 넘기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편안한 생활을 추구하려 했으며, 위기 상황에서도 우유부단하게 도망치려 하는 등 부적절한 대처를 보였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테오도리크에게 미움을 받아 법정에 서기도 했다.

테오도리크 사후, 반(反) 아마라스운타 파의 수장이 되어 532년부터 533년까지 아말라순타에게 압력을 가했지만, 프랑크 왕국아를 침공 시 반대파 장군 암살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었다. 534년 공동 통치자로 지명되었으나 실권은 없었고, 결국 반란을 일으켜 아마라스운타를 유폐하고 살해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이탈리아 반도 침공의 구실을 제공했다.

동로마 제국의 침공에 맞서 협상을 시도했으나, 카르타고 반란 진압과 고트족의 패배 이후 강경 자세로 돌변했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동로마 군에게 나폴리를 빼앗기는 등 궁지에 몰렸고, 결국 536년 11월 고트족에게 퇴위를 요구받고 라벤나로 도망치던 중 비티기스의 명령을 받은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테오다하드는 펠릭스 단의 1876년 역사 소설 《로마를 위한 투쟁(Ein Kampf um Rom)》에 등장하며, 이 소설에서 그는 약하고 아내 고텔린다에게 복종하는 인물로 묘사되며, 고텔린다는 아말라순타 살해의 진정한 배후로 묘사된다.

테오다하드는 또한 L. 스프라그 드 캠프의 1939년 대체 역사 소설 《어둠이 드리우기 전에(Lest Darkness Fall)》에서 "티우다하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6. 1. 현대 소설에서의 묘사

테오다하드는 펠릭스 단의 1876년 역사 소설 《로마를 위한 투쟁(Ein Kampf um Rom)》에 등장하며, 이 소설은 1878년에 영어로 번역되었다. 이 소설에서 그는 약하고 아내 고텔린다에게 복종하는 인물로 묘사되며, 고텔린다는 아말라순타 살해의 진정한 배후로 묘사된다.

테오다하드는 또한 L. 스프라그 드 캠프의 1939년 대체 역사 소설 《어둠이 드리우기 전에(Lest Darkness Fall)》에서 "티우다하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Italy and Her Invaders https://archive.org/[...] Clarendon Press 1896
[2] 논문 a review of Theodahad: A Platonic King at the Collapse of Ostrogothic Italy https://dx.doi.org/1[...] 2016
[3] 서적 The Prosopography of the Later Roman Empire: Volume 2, AD 395-527 University of Cambridge Press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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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문서 西ゴート王[[テウディギセル]]と同一人物であるという説が唱えられているが、仮説に過ぎない。テオダハド暗殺後に投獄されたことが記録に残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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