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리쿠스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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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454년 동고트족의 왕으로 태어나, 488년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오도아케르를 제거하고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파 신자였으며, 말년에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누스 1세와 종교적 갈등을 겪었다. 테오도리쿠스는 로마 문화를 부흥시키고 건축 사업을 장려했으며, 라벤나를 수도로 삼아 통치했다. 그의 통치는 이탈리아를 평화롭게 했지만, 보에티우스와 교황 요한 1세의 죽음으로 종교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테오도리쿠스는 게르만 영웅 전설에서 '베른의 디트리히'로 묘사되기도 하며, 그의 영묘는 라벤나의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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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리쿠스 대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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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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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테오도리쿠스 |
고트어 | got |
중세 그리스어 | 그리스어: , 로마자 표기: |
라틴어 | 라틴어: |
통치 | |
동고트 왕 | 471년 – 526년 8월 30일 |
이전 통치자 | 테오데미르 |
후임 통치자 | 아탈라리쿠스 |
이탈리아 왕 | 493년 3월 15일 – 526년 8월 30일 |
이전 통치자 | 오도아케르 |
후임 통치자 | 아탈라리쿠스 |
서고트 왕 | 511년 – 526년 8월 30일 |
이전 통치자 | 게살레크 |
후임 통치자 | 아말라리크 |
개인 정보 | |
출생 | 454년 |
출생지 | 카르눈툼 근처 (오스트리아 니더외스터라이히주) |
사망 | 526년 8월 30일 |
사망지 | 라벤나, 동고트 왕국 |
아버지 | 테오데미르 |
어머니 | 에렐레우바 |
배우자 | 아우도플레다 |
자녀 | 아말라스윈타 테오데고타 오스트로고토 |
왕조 및 종교 | |
왕조 | 아말리 가문 |
종교 | 아리우스파 |
2. 생애
테오도리쿠스는 454년 동고트족의 왕 튜다미르(Thiudamir)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을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인질로 보내졌는데, 이는 튜다미르 왕과 동로마 제국 간의 협정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테오도리쿠스는 동로마 제국의 정치와 군사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우며 성장했다.[6] 레오 1세와 제논의 총애를 받아, 483년에는 마기스테르 밀리툼(군사 대장)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집정관의 지위에까지 올랐다.[17]
488년, 테오도리쿠스는 동고트족의 왕이 되었다. 당시 동고트족은 동로마 제국 내에서 포이데라티로서 거주하고 있었으나, 점차 통제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에 테오도리쿠스는 황제 제논과 협정을 맺고, 476년 로마를 점령한 오도아케르를 몰아내는 대가로 이탈리아를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테오도리쿠스는 488년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489년 이손조의 전투, 밀라노의 전투, 아다의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했다. 493년에는 라벤나를 함락시켰고, 오도아케르는 항복했으나 결국 테오도리쿠스에게 살해당했다.[31]
테오도리쿠스는 공식적으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황제의 총독이었지만, 실제로는 동등한 입장에서 황제와 교섭을 진행했고, 황제의 간섭은 거의 받지 않았다. 오도아케르와는 달리, 테오도리쿠스는 왕국 내의 로마 시민들을 로마 법에 따라 다스리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지켰다. 고트족은 그들만의 전통적인 법률과 관습에 따라 통치되었다.
테오도리쿠스는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 1세의 여동생 아우도플레다와 결혼하여 동맹을 강화했으며, 서고트족, 반달족, 부르군트족 등과도 혼인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클로비스 1세는 506년과 523년에 테오도리쿠스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테오도리쿠스는 아리우스파 신자였기 때문에, 재위 말년에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종교적인 문제로 마찰을 빚었다.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지만, 테오도리쿠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직접적인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라벤나에 묻혔으며, 그의 사후에는 딸 아말라순타가 어린 손자 아탈라릭을 대신하여 섭정을 맡았다.
2. 1. 초기 생애와 동로마 제국에서의 활동
테오도리쿠스는 454년 판노니아의 노이지들러 호 근처 카르눈툼에서 고트족 유력자 티우디미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고트족이 훈족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1년 후였다. 그의 고트어 이름은 '*Þiudareiks*'로 재구성되었으며, "백성의 왕" 또는 "백성의 통치자"로 번역된다.461년경부터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에 인질로 보내져 레오 1세 황제의 호의를 받으며, 동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알란족 장군 아스파르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동로마 제국에 억류된 동안 읽기, 쓰기, 산수를 배웠다.
469년 동고트족의 왕 발라미르가 사망하자, 레오 1세는 테오도리쿠스를 발라미르를 대신하여 슬라보니아의 수비대에 배속했다. 470년 테오도리쿠스는 바바이가 이끄는 사르마티아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휘하에서 싸운 6000명의 종사로부터 왕으로 추대되었다.
471년, 테오도리쿠스의 스승이었던 장군 아스파르가 레오 1세와 제논에 의해 살해되었다. 많은 고트족이 테오도리크 스트라보 밑으로 모여들었고, 테오도리크 스트라보는 473년에 "모든 고트족에 대한 왕"으로 추대되었다. 테오도리크 스트라보는 테오도리쿠스에게 자기 진영에 합류할 것을 요구했지만, 테오도리쿠스는 황제 측에 남았다.
474년경, 아버지 티우디미르가 사망했다. 티우디미르를 따르던 전사들 대부분은 테오도리쿠스의 종사단에 합류한 것으로 추정된다.
475년, 테오도리크 스트라보가 황제 제논에 대한 반란에 가담하여 마기스테르 밀리툼에서 해임되었고, 테오도리쿠스가 후임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임명되었다. 476년에는 파트리키 (귀족) 지위도 받았다. 그러나 테오도리쿠스는 테오도리크 스트라보 토벌에 나섰다가, 테오도리크 스트라보에게 설득당하여 그의 진영으로 투항했다.
47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곧 진압되었다. 제논은 테오도리크 스트라보도 반란에 가담한 것으로 의심하여 그를 마기스테르 밀리툼에서 해임했다. 481년, 테오도리크 스트라보가 사고로 사망했다. 테오도리쿠스는 483년에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복귀하고, 484년에는 동로마 제국의 최고 관직인 집정관 지위에도 올랐다. 제논은 485년에 테오도리쿠스를 양자로 맞이했다.
그러나 테오도리쿠스와 제논의 관계는 항상 원만하지 않았다. 486년에 테오도리쿠스는 트라키아를 약탈하고, 487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제논은 테오도리쿠스에게 화해를 제안하고 서로마 제국 통치를 위임하는 대신, 이탈리아 영주 오도아케르를 토벌할 것을 의뢰했다. 테오도리쿠스는 제논의 제안에 합의했지만, 고트족 다수가 테오도리쿠스와 헤어져 동로마 제국에 남았다. 488년, 테오도리쿠스는 이탈리아로 출발했다.
2. 2. 이탈리아 정복과 통치
테오도리쿠스는 488년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489년 이손조의 전투, 밀라노의 전투, 아다의 전투에서 승리했다.[31] 493년 테오도리쿠스는 라벤나를 점령했고, 오도아케르는 항복했지만 테오도리쿠스에게 살해당했다.오도아케르와 마찬가지로 테오도리쿠스는 공식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의 총독이었지만, 실제로는 동등한 관계에서 로마 황제와 교섭했고, 황제의 간섭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오도아케르와 달리 테오도리쿠스는 왕국 내 로마 시민들을 로마 법대로 다스린다는 약속을 지켰다. 고트족은 전통적인 법률과 관습으로 다스려졌다.
테오도리쿠스는 프랑크족 왕 클로비스 1세의 여동생 아우도플레다와 결혼하여 결혼 동맹을 맺었으며, 서고트족, 반달족, 부르군트족 왕들과도 동맹을 맺었다. 클로비스 1세는 506년과 523년 테오도리쿠스와 전쟁을 벌였다.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형식적으로 동고트족과 서고트족 모두의 왕이었으며, 505년경 어린 서고트족 왕의 섭정이 되었다. 테오도리쿠스는 507년 프랑크족에게 서고트 영토인 아퀴타니아를 빼앗겼으나, 그 외에는 대부분의 외침을 격퇴했고, 반달족 왕 트라사문트를 격퇴해 약탈을 막았다.
489년 이탈리아 침입 후, 테오도리쿠스는 여러 차례 오도아케르 군대에 승리했고, 490년 오도아케르를 라벤나로 몰아넣었다. 493년 테오도리쿠스는 협상을 통해 오도아케르를 항복시키고, 화해 연회 자리에서 오도아케르와 그 일족을 몰살했다.[31]
테오도리쿠스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로부터 부제 및 이탈리아 본토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31][32][33][34][35] 또한 테오도리쿠스는 승전으로 이탈리아 원정을 위해 조직된 새로운 종사단으로부터 왕으로 추대되었으며,[36][37] 497년 아나스타시우스 1세로부터 '영광스러운 왕(rex gloriosissmus)'으로 공인받았다.[37]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테오도리쿠스에게 제의와 제관을 수여하고,[37]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 대권을 부여했다.[31][38] 이로 인해 이탈리아에 이탈리아 왕과 동고트 왕국이 성립했다고 여겨진다. 다만 동고트 왕국의 성립은 이탈리아에 로마 제국과 다른 국가가 탄생했다는 의미는 아니다.[44] 동고트 왕국은 로마 제국의 군대 주둔법에 따라 이탈리아 본토에 배치된 서로마 제국의 수비대였으며, 그 영토와 주민은 여전히 서로마 제국의 것이었다. 고트족은 군관직만 맡을 수 있었고, 민정은 오도아케르 시대처럼 서로마 제국 정부가 계속 수행했다.[37][39][40] 테오도리쿠스의 발언은 로마 제국의 공식 포고였지만, 최종 국법 입법권은 동로마 제국 황제가 보유했다.[34][40] 테오도리쿠스는 500년 제국 수도 로마에서 재위 3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41][42] 이 기념식은 황제에게만 허용된 행위였으며, 테오도리쿠스가 서방 부제로서 권리를 행사한 것이지만, 이 기념식에서 축하받은 업적은 테오도리쿠스가 사르마티아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종사단으로부터 왕으로 추대된 470년의 사건이었다.[43] 테오도리쿠스는 자신의 왕권을 황제로부터 받거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닌, 승전으로 획득한 것으로 간주했다.[43]
이탈리아 본토 통치를 시작한 테오도리쿠스는 서로마 제국 각지 군벌과 혼인 관계를 맺어 평화를 유지하려 했다.[44] 테오도리쿠스는 프랑크족 왕 클로비스의 누이 아우도플레다와 결혼했고,[44] 헤룰리족 왕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44] 테오도리쿠스의 누이 Amalafrida|아말라프리다영어는 반달 왕국 왕 Thrasamund|트라사문드영어와 결혼했고,[44] 딸 Téodegonde Amalasunta|테오데곤데프랑스어는 서고트족 지도자 알라리크 2세의 아내가 되었으며, 조카 Amalaberga|아말라베르가영어는 Thuringii|튀링겐족영어 왕 Hermanafrid|헤르마나프리드영어의 아내가 되었다.[44] 알라리크 2세가 비에의 전투에서 전사한 507년 이후, 테오도리쿠스는 서고트 왕국 운영에 적극 간섭하여, 510년 서고트족 지도자를 가이세리크에서 테오데곤데의 어린 아들 아말라리크로 바꾸고, 자신이 섭정이 되어 서고트 왕국마저 직접 지배했다.[47] 이 시기 테오도리쿠스는 서로마 제국 여러 왕국의 맹주라 할 수 있었고,[47] 그 지배 영역은 이탈리아 본토, 히스파니아,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아프리카 속주, 시칠리아 속주, 라에티아, 노리쿰, 판노니아, 달마티아 속주로 광대했다.[31][48]
2. 3. 종교 정책과 말년
테오도리쿠스는 아리우스파 신자였으며, 이 점 때문에 재위 말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마찰이 생겼다. 양국의 관계는 나빠지기 시작했으나 테오도리쿠스가 살아있는 동안은 충돌이 없었다.[5]522년 철학자 보에티우스는 테오도리쿠스 대왕의 ''magister officiorum''(모든 정부 및 궁정 업무의 책임자)가 되었다. 보에티우스는 로마 귀족이자 기독교 인문주의자였으며, 철학자, 시인, 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번역가,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및 기타 그리스의 저명인사에 대한 주석가이기도 했다. 보에티우스의 처형은 아리우스파와 가톨릭교도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야만족 황제의 정당성에 대한 추가적인 의문만 제기했다.[8]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통치 초기에 보였던 종교적 관용을 보이는 아리우스파의 후원자가 아니었다. 비록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교회 권위와 황제 권위를 동일 인물에게 부여하는 ''황제교황주의''가 존재하여, 테오도리쿠스 대왕의 아리우스파 신념이 두 명의 황제 아래에서 용납되었지만, 동로마 제국 전역의 대부분의 성직자들에게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이단자였다.[10] 그의 통치 말년에 아리우스주의 문제로 로마 신민들과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누스 1세 황제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났다. 이러한 다툼은 결국 524년과 526년에 각각 보에티우스와 교황 요한 1세가 굶어 죽는 순교로 이어졌다. 두 왕국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지만, 테오도리쿠스 대왕의 군사적 능력은 비잔틴 제국이 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을 단념시켰다. 그의 죽음 이후, 그 망설임은 빠르게 사라졌다.[11]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라벤나에 매장되었으며, 사후 딸 아말라순타가 손자 아탈라릭을 대신해 섭정이 되었다.
3. 유산 및 평가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노력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탈리아는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그는 건축 활동을 장려하고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 트라야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 비견되기도 했다.[69] 고트족과 로마인 간의 우호적인 관계 또한 그의 왕국의 특징이었다.[70]
테오도리쿠스의 통치는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쳐 독일 전설 속 영웅 디트리히 폰 베른으로 묘사되기도 했다.[3] 역사학자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테오도리쿠스를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가장 뛰어난 게르만족 통치자 중 하나로 평가하며, 그의 정치력과 비전을 높이 평가했다.[45]
테오도리쿠스 대왕의 영묘는 현재 라벤나에 남아있으며, 1996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다.[71]
중세 독일 서사시 『힐데브란트의 노래』, 『니벨룽겐의 노래』 등에 등장하는 디트리히 폰 베른은 테오도리쿠스 대왕을 모델로 한 인물이다. 여기서 "베른(Bern)"은 이탈리아 도시 베로나를 가리킨다.[72]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 (1911년)에 따르면, 디트리히 전설은 테오도리쿠스의 생애와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디트리히 전설이 그와는 별개였음을 시사한다.[72] 예를 들어, 디트리히 전설에서는 에르마나리크 (376년 사망)나 아틸라 (453년 사망)가 테오도리쿠스 (526년 사망)와 동시대 인물로 묘사되는 등 시대 고증에 오류가 있다.[72]
『힐데브란트의 노래』에서 디트리히는 오도아케르를 피해 동방으로 향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후 전설에서는 오도아케르 대신 에르마나리크가 그 역할을 맡는다.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디트리히는 훈족 왕 에첼(아틸라)의 궁정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부르군트족과의 전쟁에서 활약한다.
스칸디나비아의 사가, 특히 13세기 노르웨이어로 편집된 『시즈레크의 사가』는 디트리히를 중세 독일 최고의 영웅왕으로 묘사하며, 기사왕 아서나 성왕 샤를마뉴와 함께 언젠가 다시 돌아올 왕으로 여긴다.
3. 1. 현대 역사학계의 논쟁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테오도리쿠스가 자신의 영토에서 행사한 권력의 성격에 대해 논쟁이 진행 중이다. 전통주의자들은 테오도리쿠스를 게르만족 왕으로 묘사하며, 고트 전쟁 당시 쓰여진 후기 비잔틴 자료를 근거로 그가 로마의 관습을 모방했다고 비난한다.그러나 조나단 J. 아놀드는 6세기 동안 테오도리쿠스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마그누스 펠릭스 엔노디우스의 ''티치넨시스 교회 주교 에피파니우스의 생애'', 카시오도루스의 ''바리에''와 ''찬가'', 익명의 발레시안의 ''후반부''와 같은 동시대 자료를 언급하며,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테오도리쿠스가 "적절한 로마 황제"로서 통치하기를 기다렸다고 주장한다. 아놀드에 따르면, 이러한 자료들은 테오도리쿠스가 이탈리아 귀족과 콘스탄티노플의 동방 궁정 모두에게 정당한 서로마 황제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아놀드는 테오도리쿠스가 스스로를 ''프린켑스(princeps)''라 칭하고, 자신의 영토를 ''공화국(Res Publica)''이라 칭한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러한 칭호는 전통적으로 황제와 제국을 위해 사용되었다. 또한 테오도리쿠스가 ''임페라토르(Imperator)'', ''임페리움(Imperium)'',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같은 칭호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동방 군주의 지위를 존중했지만, 이것이 서방에서의 왕위 계승 주장을 약화시키지는 않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한스-울리히 비머와 같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반박된다. 비머는 아놀드가 이탈리아 귀족 중 일부 이해 관계자들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주장한다. 그는 테오도리쿠스 측근의 자료를 사용하여 이탈리아 인구 전체나 콘스탄티노플 거주자들 사이에서 테오도리쿠스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을 추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테오도리쿠스의 지위에 대한 이러한 시각이 그의 통치의 이중성, 즉 로마인과 고트족 모두의 충성심을 유지해야 했던 점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비머는 "테오도리쿠스에 대한 '로마'식 해석은 최근 테오도리쿠스가 사실상 이탈리아의 서로마 황제였다는 이론으로 극단적으로 치우쳐졌다. 이 견해에 따르면 테오도리쿠스는 ''프린켑스 로마누스(princeps Romanus)''로 통치하면서 서로마 제국을 재건했다."라고 말한다.
비머는 테오도리쿠스의 통치 기간 동안 그가 이탈리아-로마인과 고트족이라는 두 민족 집단을 명확하게 분리해 두었던 방식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고트족만이 특정 군사 장비를 소지하거나 군사 계층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맡을 수 있었고, 고트족과 로마인의 머리 모양은 그들의 언어를 제외하고도 뚜렷하게 달랐다. 비머는 또한 동방 궁정이 테오도리쿠스를 서로마 황제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서로마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식이 필수적이었는데, 콘스탄티노플이 마지막으로 인정한 사람은 480년에 사망한 율리우스 네포스였다. 또한 비머는 정치적인 이유로 프랑크 왕국과 부르군디 왕국 왕들이 테오도리쿠스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각 왕국은 자체적으로 통치자로 설립되었으며, 동고트족 왕의 게르만족 친족으로서 외교 결혼을 통해 서로 묶여 있었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왕후 | 아우도프레다 | 프랑크의 군주 힐데리히 1세의 딸 |
장인 | 힐데리히 1세 | 프랑크의 군주 |
처남 | 클로비스 1세 | 프랑크의 군주 |
딸 | 아말라순타 | 519년 집정관 에우타릭과 결혼[58] |
외손 | 아탈라릭 | |
첩 | 이름 미상 | 모에시아에 거주 |
딸 | 오스트로고토 | 부르고뉴의 지기스문드 왕과 결혼 |
딸 | 테오데고타 | 알라릭 2세와 결혼 |
5. 건축 사업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이탈리아의 로마 도시 재건과 고대 기념물 보존을 장려했다.[71] 500년, 로마는 테오도리쿠스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는데, 그는 시간과 야만족에 의해 손상된 구조물을 복원하려 했다. 그는 로마의 위대한 건물들이 그 웅장함, 권력, 그리고 그에 대한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건축가들에게 "고대"의 모든 것을 복원하도록 지시했다. 그의 보존 노력은 미래 세대에게 경외심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고안되었다. 테오도리쿠스의 건축 사업 명성은 멀리 떨어진 시리아까지 이르렀다. 총괄적으로, 테오도리쿠스의 건축 프로그램은 호노리우스 (395–423) 이후 어떤 서로마 황제보다 더 광범위한 신축 및 복원을 보여주었다.
테오도리쿠스는 건축적인 관심의 대부분을 그의 수도인 라벤나에 쏟았다. 그는 수도교를 수리하여 라벤나의 물 공급을 복구했는데, 이 수도교는 원래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되었다. 카시오도로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테오도리쿠스의 건축 사업을 통해 여러 도시가 갱신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고대 불가사의를 능가하기까지 했다.
라벤나, 베로나, 파비아, 밀라노, 파르마, 코모, 아퀼레이아와 같은 북부 도시들은 새롭거나 개선된 성벽, 궁전, 수도교, 교회, 목욕탕, 그리고 다른 많은 인상적이고 영광스러운 건물들을 갖게 되었다.
그는 영웅 자신의 거대한 조각상 옆에 "헤라클레스 대성당"을 건설했다. 아리우스주의를 장려하기 위해 왕은 작은 아리우스주의 대성당인 '하기아 아나스타시스'를 위임했는데, 여기에는 아리우스 세례당이 있다. 테오도리쿠스가 라벤나와 그 교외에 건설한 세 개의 교회, S. 안드레아 데이 고티, S. 조르지오 및 S. 에우세비오는 13, 14, 15세기에 파괴되었다. 테오도리쿠스는 콘스탄티노플의 대궁전을 본떠서 라벤나에 자신을 위한 테오도리쿠스 궁전을 지었다. 그것은 이전 로마 구조의 확장이었다. 구세주의 궁정 교회는 오늘날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테오도리쿠스의 개인 예배 교회였으며 그의 취향에 따라 특별히 모델링되었다. 테오도리쿠스의 기마상은 궁전 앞 광장에 세워졌다.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라벤나에 매장되었지만, 그의 유해는 흩어졌고 그의 영묘는 벨리사리우스가 540년에 그 도시를 정복한 후 교회로 개조되었다. 그의 영묘는 라벤나에서 가장 훌륭한 기념물 중 하나이다. 벽돌로 만들어진 라벤나의 다른 모든 동시대 건물들과 달리, 테오도리쿠스 영묘는 고급 석재 전돌로 완전히 건설되었다.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도미티아누스 궁전은 특별 징수된 세금으로 재건되었고, 로마 시의 성벽이 재건되었으며, 로마 원로원은 테오도리쿠스의 금박 조각상으로 기념했다. 원로원의 쿠리아, 폼페이 극장, 도시의 수도교, 하수도 및 곡물 창고가 개조 및 수리되었고 플라비우스 원형 극장에 조각상이 세워졌다.
테오도리쿠스 대왕의 영묘는 현재도 라벤나에서 볼 수 있다. 영묘는 주변의 몇몇 초기 기독교 교회와 함께 1996년부터 "라벤나의 초기 기독교 건축물군"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 목록에 등록되어 있다.[71] 영묘는 테오도리쿠스 대왕 생전인 520년에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아마도 그의 사후에 완성되었다. 영묘의 지하 묘실은 홍수로 인해 오랫동안 매몰되어 있었으나, 1918년부터 1919년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금도금된 흉갑을 포함한 고대 벽화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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