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야누스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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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라야누스 다리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전쟁을 위해 건설한 다뉴브강을 횡단하는 다리이다. 현재 루마니아의 드로베타-터르누 세베린과 세르비아의 클라도보 인근에 위치했으며, 103년부터 105년 사이에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의 설계로 건설되었다. 20개의 석조 교각 위에 목재 아치를 얹은 구조로, 다키아 전쟁 준비에 기여했다. 다리의 목재 상부 구조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파괴되었으며, 현재는 교각의 일부 잔해만 남아 있다. 다리 건설을 기념하는 타불라 트라이아나는 세르비아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1979년 '예외적으로 중요한 문화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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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브 다리는 1954년 소련 엔지니어들이 설계하여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연결하는 총 길이 2,223.52m의 도로-철도 병용 2층 구조 다리이며, 선박 통행을 위한 개폐 구간을 갖춘 양국 간 국경 통과 지점이다.
트라야누스 다리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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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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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Pons Traiani (라틴어) |
다른 이름 | Podul lui Traian (루마니아어) Трајанов мост / Trajanov most (세르비아어) |
횡단 대상 | 다뉴브강 |
위치 |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 (루마니아), 클라도보 (세르비아) |
설계자 |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 |
재료 | 나무, 돌 |
길이 | 1135m |
폭 | 15m |
높이 | 19m |
경간 | 20개의 석조 기둥 |
건설 시작 | 103년 |
완공 | 105년 |
파괴 |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시대인 서기 270년경 상부 구조 파괴 |
문화유산 지정 |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 문화 기념물 (세르비아)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 고고학 유적지 (세르비아) |
좌표 | 22.66705 |
기타 정보 | |
문화재 지정 정보 (세르비아) | 명칭: Pontes with Trajan's Bridge 지정 유형: 고고학 유적지 지정일: 1981년 3월 28일 지정 번호: AN 44 |
2. 역사적 배경
트라야누스 다리는 로마 제국이 다키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건축물이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는 로마 군단에 보급품을 원활하게 전달하기 위해 철문 동쪽에 이 다리의 건설을 명령했다. 다리는 오늘날 루마니아의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과 세르비아의 클라도보 인근에 위치했다.
다리 건설은 단순히 다리 하나를 건설하는 것을 넘어, 다뉴브강의 급류를 피해 안정적인 항해를 가능하게 하고, 강력한 함대와 방어 시설, 국경 첩보 시설을 구축하는 등 더 큰 계획의 일환이었다. 특히 철문의 거대한 폭포는 수위가 낮을 때 배의 통행을 방해하는 큰 문제였다. 당시에는 강바닥의 큰 바위를 제거할 중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로마 공학자들은 서쪽 강기슭의 돌비탈을 뚫어 운하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대규모 토목 공사는 로마의 다키아 침공을 위한 준비 작업의 일환이었으며, 결국 다키아 정복과 금광 확보라는 큰 성과로 이어졌다.
2. 1. 다키아 전쟁과 다리의 필요성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는 로마 군단에 보급품을 원활하게 전달하기 위해 철문 동쪽에 다리 건설을 명령했다. 이 다리는 오늘날 루마니아의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과 세르비아의 클라도보 인근에 위치했다.다리 건설은 다뉴브강의 급류를 피해 안정적인 항해를 가능하게 하고, 강력한 함대와 방어 시설, 국경 첩보 시설을 구축하는 등 더 큰 계획의 일환이었다. 특히 철문의 거대한 폭포는 수위가 낮을 때 배의 통행을 방해하는 큰 문제였다. 당시에는 강바닥의 큰 바위를 제거할 중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로마 공학자들은 서쪽 강기슭의 돌비탈을 뚫어 운하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 운하는 철문에서 시작하여 급류가 시작되는 지점(오늘날 노비 시프 마을 하류)까지 이어졌다.
운하 건설 과정에서 공사 지역을 보호했던 제방의 흔적은 3.2km 길이의 운하가 다뉴브강의 문제 지역을 우회하여 지나갔음을 보여준다. 이 운하는 모래로 채워졌으며, 주변에서 빈 조개 껍데기가 발견되기도 한다.
이러한 토목 공사, 특히 트라야누스 다리 건설은 로마의 다키아 침공(106년)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다키아 정복 후 로마는 123일 동안 기념 경기를 열었는데, 이 기간 동안 10,000명의 검투사와 11,000마리의 야생동물이 동원되었다.
다리의 길이는 1135m (현재 다뉴브강 폭 800m), 너비는 15m, 높이는 19m였다. 다리 양 끝에는 카스트룸이 설치되어 다리를 건너려면 반드시 주둔지를 통과해야 했다. 남쪽(세르비아 코스톨)에는 폰테스 요새가, 북쪽(루마니아 드로베타)에는 드로베타 요새가 건설되었다. 폰테스에서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청동 두상이 발견되어 현재 베오그라드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 2. 건설 과정
트라야누스 다리는 루마니아의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과 세르비아의 클라도보 인근 철문 동쪽에 위치했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다키아에서 싸우는 로마 군단의 보급로를 위해 건설을 명령했다.다리의 길이는 1135m(현재 다뉴브강의 폭은 800m)이고, 너비는 15m, 강 표면에서 높이는 19m였다. 다리 양쪽 끝에는 카스트룸이 있어, 다리를 건너려면 주둔지를 통과해야 했다.

각 카스트룸은 폰테스(Pontes)와 드로베타(Drobeta, 드로베티스)라고 불렸다. 클라도보 인근 코스톨 마을에는 폰테스 카스트룸이 103년에 다리와 함께 건설되었으며, 민간 취락도 있었다. 수 헥타르 규모의 두꺼운 성벽을 가진 40m 길이 카스트룸 잔해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도자기 파편, 로마 시대 글씨가 새겨진 벽돌, 주화 등이 발견되었다. 폰테스에서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청동 두상이 발견되었는데, 다리 입구에 있던 조각상의 일부로 현재 베오그라드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강 왼쪽에는 드로베타 카스트룸이 있었고, 거기서도 다리 끝에 있던 트라야누스 청동상이 발견되었다.[15]
트라야누스 다리 건설은 다뉴브강의 안정적인 항해를 위해 급류를 피하는 운하를 파고, 강력한 함대와 방어 시설, 국경 지대 첩보 시설을 설치하는 거대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철문의 거대한 폭포는 큰 문제였다. 바위투성이의 강바닥 때문에 수위가 낮을 때는 다뉴브강 전체 폭에서 배가 다닐 수 없었다. 당시에는 강바닥의 큰 바위를 들어내 강기슭으로 옮길 중장비가 없었기에, 로마 공학자들은 서쪽 강기슭의 돌비탈을 뚫어 운하를 만들기로 했다. 이 운하는 철문에서 시작하여 급류가 시작되는 노비 시프 마을 하류까지 이어졌다.
운하 건설 중 공사 지역을 보호했던 제방 흔적은 공사 규모를 보여준다. 3.2km 길이의 운하가 다뉴브강의 문제 지역을 아치형으로 우회했다.[19] 운하는 모래로 채워졌고, 빈 조개 껍데기가 근방에서 꾸준히 발견된다.[15]
이 모든 토목 작업, 특히 트라야누스 다리는 106년 로마의 승리로 끝난 로마의 다키아 침입 준비를 위한 것이었다. 다키아인을 제압하고 금광을 장악한 효과는 엄청나서, 다키아 정복 기념 로마 경기가 123일간 계속되었고, 10,000명의 검투사와 11,000마리의 야생동물이 희생되었다.[19]
2. 2. 1. 기술적 특징
트라야누스 다리는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가 설계하였으며, 벽돌, 모르타르, 포촐라나 시멘트로 만든 20개의 석조 교각 위에 각 38m마다 걸쳐 있는 목제 아치를 사용했다.[16][17] 각 교각마다 목제 케이슨을 만들어 사용했고, 103년과 105년 사이에 건설되어 매우 빠르게 지어졌다.[18]
아폴로도로스는 탈레스가 고안한 원리를 이용하여 강의 흐름을 재조정하는 기술을 접목시켰다. 공학자들은 오늘날 클라도보의 시내 서쪽에 있는 물길을 파기 위하여 수위가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강물은 건설 현장에서 클류치의 저지대를 거쳐 오늘날의 말라 브르비차라는 마을의 지점으로 흐르도록 2km 재조정되었다. 목제 케이슨이 직사각형 배열로 강바닥에 설치되어, 점토로 뒤덮인 교각을 지지하는 기초 역할을 하였다. 속이 빈 교각에는 모르타르가 들어간 돌들로 채워졌고, 겉에는 로마 벽돌로 둘러쌌다. 이 벽돌들은 코스톨이라는 마을 주변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으며, 2천 년 전에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물리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교각의 높이는 44.46m, 폭은 17.78m, 간격은 50.38m였다.[19] 다리 구조물은 땅에서 조립되어 교각에 설치되었다고 오늘날 여겨진다. 운하를 파낸 해가 매우 건조하고 수면이 아주 낮았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상황이었다. 강바닥은 교각의 기초가 시작됐을 때는 거의 완전히 드러났다. 50m 간격으로 모두 20개의 교각들이 있었으며 오크나무가 사용되었고 다리는 다뉴브강 위로 배 수송이 가능할 만큼 충분했다.[15]

다리 건설에 참여한 로마 군단 및 코호르테스의 인원들이 벽돌에 자신들의 부대 명칭들을 새겼기에 벽돌 역시도 역사적 가치가 있다. 따라서 플라비아 펠릭스 제5군단, 클라우디아 제7군단, 마케도니카 제5군단, 게미나 제13군단 등과 크레툼 제1 코호르테스, 히스파노룸 제2 코호르테스, 브리토눔 제3 코호르테스, 안티오켄시움 제1 코호르테스 등이 건설 작업을 했다는 것이 알려졌다.[19]
2. 3. 다리의 파괴
트라야누스 다리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명으로 다키아 정복 전쟁에 참여하는 로마 군단의 보급로를 위해 건설되었다. 이 다리는 오늘날 루마니아의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과 세르비아의 클라도보 인근 철문 동쪽에 위치했다.다리의 설계자인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는 벽돌, 모르타르, 포촐라나 시멘트로 만든 20개의 석조 교각 위에 목재 아치를 설치했다.[16][17] 탈레스가 고안한 원리를 이용하여 강의 흐름을 조정하는 기술을 적용, 오늘날 클라도보 서쪽에 물길을 파 수위를 낮추고, 강물을 클류치 저지대를 거쳐 말라 브르비차 방향으로 2km 우회시켰다. 목제 케이슨을 강바닥에 설치, 점토로 덮은 교각을 지지하는 기초로 사용했다. 속 빈 교각은 모르타르가 들어간 돌로 채우고 겉은 로마 벽돌로 둘러쌌다.[19] 다리 구조물은 땅에서 조립되어 교각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설 당시 매우 건조한 날씨와 낮은 수면 덕에 강바닥이 거의 드러난 상태에서 기초 작업이 가능했다. 50m 간격으로 설치된 20개의 오크나무 교각은 다뉴브강 위로 배 수송이 가능할 만큼 높았다.[15]
플라비아 펠릭스 제5군단, 클라우디아 제7군단, 마케도니카 제5군단, 게미나 제13군단 등과 여러 코호르테스들이 다리 건설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벽돌에 새겨진 부대 명칭을 통해 확인되었다.[19]
트라야누스 다리 건설은 다뉴브강의 급류를 피해 안정적인 항해를 가능하게 하고, 강력한 함대와 방어 시설, 첩보 시설을 구축하는 대규모 계획의 일환이었다. 특히 철문의 거대한 폭포는 수위가 낮을 때 항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큰 문제였기에, 로마 공학자들은 서쪽 강기슭의 돌비탈을 뚫어 운하를 건설했다. 3.2km 길이의 운하는 다뉴브강의 문제 지역을 우회했다.[19]
이러한 토목 공사는 서기 106년 로마의 승리로 끝난 로마의 다키아 침입을 위한 준비였다. 다키아 정복을 기념하는 로마의 경기는 123일간 계속되었고, 10,000명의 검투사와 11,000 마리의 야생동물이 동원되었다.[19]
트라야누스 다리의 목조 상부구조는 후임 황제 하드리아누스 때 북쪽의 야만족 침입을 막기 위해 해체되었고, 불에 타 파괴되었다.[21][15]
1858년 다뉴브강 수위가 낮아지면서 다리 잔해가 다시 드러났고, 20개의 교각이 확인되었다.[15] 1906년 다뉴브강 위원회는 항해 방해를 이유로 교각 두 개를 제거했다. 1932년에는 16개, 1982년에는 12개의 교각이 확인되었으며, 나머지는 물에 휩쓸려 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루마니아와 세르비아의 다뉴브강 기슭에서 출입구 쪽 교각 하나씩을 볼 수 있다.[15][22]
1979년 트라야누스 다리는 '예외적으로 중요한 문화 기념물'로, 1983년에는 '예외적으로 중요한 유적지'로 지정되어 세르비아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3. 구조 및 설계
트라야누스 다리는 루마니아의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과 세르비아의 클라도보 사이, 철문 동쪽에 위치했다. 다키아에서 전투 중인 로마 군단에 보급품을 지원하기 위해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명령으로 건설되었다.
전체 길이는 1,135m (현재 다뉴브강 폭은 800m), 너비는 15m, 강 표면으로부터 높이는 19m였다. 다리 양쪽 끝에는 카스트룸이 설치되어 통행을 통제했는데, 이 카스트룸들은 각각 폰테스와 드로베타(드로베티스)라 불렸다.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가 설계를 맡아 벽돌, 모르타르, 포촐라나 시멘트로 만든 20개의 석조 교각 위에 목재 아치를 올리는 방식을 사용했다. 다리 건설은 다뉴브강의 급류를 피해 안전한 항해를 돕기 위한 운하 건설, 강력한 함대 및 방어 시설 구축, 국경 지역 첩보 시설 설치 등 대규모 계획의 일환이었다. 철문의 거대한 폭포는 항해에 큰 장애물이었는데, 특히 수위가 낮을 때는 바위와 강바닥의 문제로 통행이 불가능했다. 로마 공학자들은 서쪽 강기슭에 운하를 파는 방식을 택했다. 이 운하는 철문에서 시작하여 급류가 시작되는 지점(오늘날 노비 시프 마을 하류)까지 이어졌다.
3.2km 길이의 운하는 다뉴브강의 문제 지역을 우회했다.[19] 운하는 모래로 채워졌으며, 빈 조개 껍데기가 주변에서 발견된다.[15] 이러한 토목 공사는 서기 106년 로마의 승리로 끝난 로마의 다키아 침공 준비 과정이었다. 다키아 정복을 기념하는 로마의 경기는 123일간 계속되었으며, 10,000명의 검투사와 11,000마리의 야생동물이 동원되었다.[19]
3. 1. 교각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는 벽돌, 모르타르, 포촐라나 시멘트로 만든 20개의 석조 교각 위에 각 38m마다 걸쳐 있는 목제 아치를 사용했다.[16][17] 각 교각마다 목제 케이슨을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다리는 흔치 않게 빠르게 103년과 105년 사이에 지어졌다.[18]
아폴로도로스는 그보다 6세기 먼저 태어난 탈레스가 고안한 원리를 이용하여 강물 흐름을 재조정하는 기술을 접목시켰다. 공학자들은 오늘날 클라도보의 시내 서쪽에 있는 물길을 파기 위하여 수위가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강물은 건설 현장에서 2km 하류, 클류치의 저지대를 거쳐 오늘날의 말라 브르비차라는 마을의 지점으로 흐르도록 재조정되었다. 목제 케이슨이 직사각형 배열로 강바닥에 설치되어, 점토로 뒤덮인 교각을 지지하는 기초 역할을 하였다. 속이 빈 교각에는 모르타르가 들어간 돌들로 채워졌고, 겉에는 로마 벽돌로 둘러쌌다. 이 벽돌들은 코스톨이라는 마을 주변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으며, 2천 년 전과 같은 물리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교각의 높이는 44.46m, 폭은 17.78m, 간격은 50.38m였다.[19] 다리 구조물은 땅에서 조립되어 교각에 설치되었다고 오늘날 여겨진다. 운하를 개설한 해가 매우 건조하고 수위가 매우 낮았다는 점은 다리 건설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기둥 기초 공사가 시작될 때 강바닥은 거의 완전히 배수되었다. 오크나무가 사용된 20개의 교각들은 50m 간격으로 배치되었으며, 다리는 다뉴브강 위로 배 수송이 가능할 만큼 충분히 높았다.[15]
다리 건설에 참여한 로마 군단 및 코호르테스의 인원들이 벽돌에 자신들의 부대 명칭을 새겼기 때문에, 벽돌 역시도 역사적 가치가 있다. 따라서 플라비아 펠릭스 제5군단, 클라우디아 제7군단, 마케도니카 제5군단, 게미나 제13군단 등과 크레툼 제1 코호르테스, 히스파노룸 제2 코호르테스, 브리토눔 제3 코호르테스, 안티오켄시움 제1 코호르테스 등이 건설 작업을 했다는 것이 알려졌다.[19]
3. 2. 상부 구조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가 설계한 트라야누스 다리는 벽돌, 모르타르, 포촐라나 시멘트로 만든 20개의 석조 교각 위에 각 38m마다 걸쳐 있는 목제 아치를 사용했다.[16][17] 각 교각마다 목제 케이슨을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다리는 이례적으로 빠르게 103년과 105년 사이에 지어졌다.[18]아폴로도로스는 탈레스가 6세기 전에 고안한 원리를 이용하여 강물 흐름을 재조정하는 기술을 접목시켰다. 공학자들은 오늘날 클라도보 시내 서쪽에 있는 물길을 파기 위해 수위가 내려가기를 기다렸다. 강물은 건설 현장에서 클류치 저지대를 거쳐 오늘날 말라 브르비차 마을 지점까지 2km 가량 재조정되었다. 목제 케이슨은 직사각형 배열로 강바닥에 설치되어 점토로 덮인 교각을 지지하는 기초 역할을 했다. 속이 빈 교각은 모르타르가 들어간 돌로 채워졌고, 겉은 로마 벽돌로 둘러쌌다. 이 벽돌들은 코스톨 마을 주변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으며, 2천 년 전과 같은 물리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교각의 높이는 44.46m, 폭은 17.78m, 간격은 50.38m였다.[19] 다리 구조물은 땅에서 조립되어 교각에 설치되었다고 오늘날 여겨진다. 운하를 팠던 해는 매우 건조하고 수면이 아주 낮았다는 점이 공사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강바닥은 교각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거의 완전히 드러났다. 오크나무로 만들어진 20개의 교각들은 50m 간격으로 배치되었고, 다리는 다뉴브강 위로 배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높았다.[15]
다리 건설에 참여한 로마 군단 및 코호르테스 인원들이 벽돌에 자신들의 부대 명칭을 새겼기 때문에, 벽돌 역시도 역사적 가치가 있다. 플라비아 펠릭스 제5군단, 클라우디아 제7군단, 마케도니카 제5군단, 게미나 제13군단 등과 크레툼 제1 코호르테스, 히스파노룸 제2 코호르테스, 브리토눔 제3 코호르테스, 안티오켄시움 제1 코호르테스 등이 건설 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19]
3. 3. 기타 시설
트라야누스 다리는 오늘날 루마니아의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과 세르비아의 클라도보 인근, 철문 동쪽에 위치했다. 다리 건설은 다키아에서 전투를 벌이는 로마 군단에 보급품을 지원하기 위해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명령으로 시작되었다.다리의 각 끝에는 카스트룸이 설치되어 출입구를 통제했다. 이 카스트룸들은 각각 폰테스와 드로베타(드로베티스)라고 불렸다.
- 폰테스 카스트룸: 오른쪽 강기슭, 클라도보 인근 코스톨 마을에 위치했다. 103년에 건설되었으며, 민간인 거주지도 함께 있었다. 수 헥타르 규모로, 두꺼운 성벽을 가진 40m 길이의 카스트룸 잔해가 남아있다. 도자기 파편, 로마 시대 글자가 새겨진 벽돌, 주화 등이 발견되었으며, 트라야누스 황제의 청동 두상도 발견되어 베오그라드 국립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 드로베타 카스트룸: 왼쪽 강기슭에 위치했으며, 이곳에서도 트라야누스 청동상이 발견되었다.[15]
트라야누스 다리 건설은 다뉴브강의 급류를 피해 안전한 항해를 돕기 위한 운하 건설, 강력한 함대 및 방어 시설 구축, 국경 지역 첩보 시설 설치 등 대규모 계획의 일환이었다. 철문의 거대한 폭포는 항해에 큰 장애물이었는데, 특히 수위가 낮을 때는 바위와 강바닥의 문제로 통행이 불가능했다. 로마 공학자들은 서쪽 강기슭에 운하를 파는 방식을 택했다. 이 운하는 철문에서 시작하여 급류가 시작되는 지점까지 이어졌으며, 오늘날 노비 시프 마을 하류이다.
3.2km 길이의 운하는 다뉴브강의 문제 지역을 우회했다.[19] 운하는 모래로 채워졌으며, 빈 조개 껍데기가 주변에서 발견된다.[15]
이러한 토목 공사는 서기 106년 로마의 승리로 끝난 로마의 다키아 침공 준비의 일환이었다. 다키아 정복을 기념하는 로마의 경기는 123일간 계속되었으며, 10,000명의 검투사와 11,000마리의 야생동물이 동원되었다.[19]
4. 타불라 트라이아나
타불라 트라이아나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군사 도로를 완공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명판이다. 세르비아 오그라디나 인근에 있으며, 1979년 '예외적으로 중요한 문화 기념물'로 지정되어 세르비아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1972년 철문 제1 수력 발전소 건설로 인해 원래 위치에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4. 1. 명판의 내용
4m 너비와 1.75m 높이에, 트라야누스의 군사 도로 완공을 기념하는 로마의 기념 명판 ("''Tabula Traiana''")이 오그라디나 인근 루마니아 쪽을 바라보는 세르비아 쪽에 위치해 있다.[1] 1972년에, 철문 제1 수력 발전소가 지어졌을 때 (대략 35m 만큼 수위 상승) 명판은 원래 있던 장소에서 현재 장소로 옮겨졌다.[1] 명판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1]
:IMP. CAESAR. DIVI. NERVAE. F
NERVA TRAIANVS. AVG. GERM
PONTIF MAXIMUS TRIB POT IIII
PATER PATRIAE COS III
MONTIBVS EXCISI(s) ANCO(ni)BVS
SVBLAT(i)S VIA(m) F(ecit)
오토 벤도르프는 위 명각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1]
:거룩한 네르바 카이사르의 아들이시며,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폰티펙스 막시무스이시자, 네 차례의 트리부누스, 세 차례의 집정관, 국가의 아버지를 맡으신 네르바 트라야누스께서 산의 바위를 파내시고 목제 들보를 사용하셔 이 도로를 지으셨다.
타불라 트라이아나는 1979년에 '예외적으로 중요한 문화 기념물'[정식 명칭: 예외적으로 중요한, 이동 불가능한 문화 유산물(Непокретна културна добра од изузетног значаја)]로 지정되었고, 세르비아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4. 2. 명판의 이전
트라야누스의 군사 도로 완공을 기념하는 로마 기념 명판("''Tabula Traiana''")은 너비 4m, 높이 1.75m로, 오그라디나 인근 루마니아 쪽을 바라보는 세르비아 쪽에 있다. 1972년 철문 제1 수력 발전소 건설로 수위가 약 35m 상승하면서, 명판은 원래 위치에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명판에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IMP. CAESAR. DIVI. NERVAE. F
NERVA TRAIANVS. AVG. GERM
PONTIF MAXIMUS TRIB POT IIII
PATER PATRIAE COS III
MONTIBVS EXCISI(s) ANCO(ni)BVS
SVBLAT(i)S VIA(m) F(ecit)
오토 벤도르프는 이 명각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거룩한 네르바 카이사르의 아들이시며,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폰티펙스 막시무스이시자, 네 차례의 트리부누스, 세 차례의 집정관, 국가의 아버지를 맡으신 네르바 트라야누스께서 산의 바위를 파내시고 목제 들보를 사용하셔 이 도로를 지으셨다.
타불라 트라이아나는 1979년에 '예외적으로 중요한 문화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세르비아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1965년 수력 발전소와 급수장 계획 확정 당시,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의 다뉴브 강변을 따라 있는 여러 취락들이 물에 잠기고, 타불라 트라이아나를 포함한 유적지들도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해졌다. 세르비아 문화 과학 학사원은 명판 보존을 촉구했고, 세르비아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전 작업은 이집트 아부 심벨 신전 이전 작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Venčac'라는 채광 업체에 맡겨졌다.[20]
처음에는 명판 위치에 케이슨을 설치하려 했으나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졌다. 명판을 조각내어 옮기는 방안은 암석 특성 때문에, 부유물(Floating Elevator) "Veli Jože"로 들어 올리는 방안은 사실성 상실 우려 때문에 각각 폐기되었다.[20]
결국 명각 원위치 22m 위에 새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바위를 파내기로 결정되었다. 명판은 주변 바위, 도로 부분과 함께 한 조각으로 잘려, 와이어 소를 이용해 350톤 무게의 덩어리를 새 공간으로 옮겼다. 작업은 1967년 9월에 시작되어 1969년에 완료되었다.[20]
5. 잔해와 유적
트라야누스 다리는 오늘날 루마니아의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과 세르비아의 클라도보 인근, 철문 동쪽에 위치했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다키아에서 싸우는 로마 군단에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해 건설을 명했다.
다리의 길이는 1135m(현재 다뉴브강의 폭은 800m)이고, 너비는 15m, 강 표면에서 높이는 19m였다. 다리 양쪽 끝에는 카스트룸이 설치되어 있어, 다리를 건너려면 반드시 주둔지를 통과해야 했다.
이 카스트룸들은 각각 폰테스와 드로베타로 불렸다. 클라도보 인근 코스톨 마을(다뉴브강 오른쪽)에는 폰테스 카스트룸이 103년에 다리와 함께 건설되었고, 나중에 민간인 정착지가 생겨났다. 수 헥타르 규모에 두꺼운 성벽을 갖춘 40m 길이의 카스트룸 잔해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폰테스에서는 도자기 파편, 로마 시대 글자가 새겨진 벽돌, 주화, 트라야누스 황제 청동 두상 등이 발견되었다. 청동 두상은 다리 입구에 있던 조각상의 일부로, 현재 베오그라드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다뉴브강 왼쪽에는 드로베타 카스트룸이 있었고, 이곳에서도 트라야누스 청동상이 발견되었다.[15]
다리 설계자인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는 벽돌, 모르타르, 포촐라나 시멘트로 만든 20개의 석조 교각 위에 38m 간격으로 목제 아치를 설치했다.[16][17] 각 교각마다 목제 케이슨을 설치하여 103년에서 105년 사이에 빠르게 건설되었다.[18]
아폴로도로스는 탈레스의 원리를 이용하여 강물 흐름을 조정했다. 공학자들은 클라도보 서쪽에 물길을 파기 위해 수위가 낮아지기를 기다렸고, 강물은 클류치 저지대를 거쳐 말라 브르비차까지 2km 조정되었다. 목제 케이슨은 직사각형으로 강바닥에 설치되어 점토로 덮인 교각 기초 역할을 했다. 속 빈 교각은 모르타르와 돌로 채워졌고, 겉은 로마 벽돌로 둘러싸였다. 코스톨 주변에서 발견되는 벽돌은 2천 년 전과 같은 물리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교각 높이는 44.46m, 폭은 17.78m, 간격은 50.38m였다.[19] 다리 구조물은 땅에서 조립되어 교각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행히 운하를 파는 동안 매우 건조하고 수면이 낮아 강바닥이 거의 드러났다. 50m 간격으로 20개의 오크나무 교각이 설치되었고, 다리는 다뉴브강 위로 배가 다닐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높았다.[15]
다리 건설에 참여한 로마 군단과 코호르테스 인원들이 벽돌에 부대 명칭을 새겼다. 플라비아 펠릭스 제5군단, 클라우디아 제7군단, 마케도니카 제5군단, 게미나 제13군단 등과 크레툼 제1 코호르테스, 히스파노룸 제2 코호르테스, 브리토눔 제3 코호르테스, 안티오켄시움 제1 코호르테스 등이 건설에 참여했다.[19]
철문의 거대한 폭포는 배 운항에 큰 문제였다. 특히 수위가 낮을 때는 바위투성이 강바닥 때문에 다뉴브강 전체 폭에서 항해가 불가능했다. 당시에는 강바닥의 큰 바위를 들어내 강기슭으로 옮길 중장비가 없었기에, 로마 공학자들은 서쪽 강기슭 돌비탈을 뚫어 운하를 건설하기로 했다. 운하는 철문에서 시작하여 급류가 시작되는 노비 시프 하류까지 이어졌다.
운하 건설 중 공사 지역을 보호했던 제방 흔적은 공사 규모를 보여준다. 3.2km 길이의 운하가 아치형으로 다뉴브강의 문제 지역을 우회했다.[19] 운하는 모래로 채워졌고, 빈 조개 껍데기가 근방에서 꾸준히 발견된다.[15]
이러한 토목 공사, 특히 트라야누스 다리 건설은 106년 로마의 다키아 침입을 위한 준비였다. 다키아를 제압하고 금광을 장악한 효과는 엄청나서, 다키아 정복 기념 로마 경기가 123일간 계속되었고, 10,000명의 검투사와 11,000마리의 야생동물이 희생되었다.[19]
5. 1. 세르비아 측 잔해

트라야누스 다리의 목조 상부구조는 트라야누스의 후임자인 하드리아누스 때 아마도 북쪽의 야만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해체되었다.[21] 상부구조는 불을 붙여 파괴되었다.[15]
1858년에 다뉴브강의 수위가 엄청난 가뭄으로 기록적으로 낮았을 때 다리의 잔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15] 이때 20개의 교각들을 여전히 볼 수 있었다.
1906년에 다뉴브강 위원회는 항해를 방해했던 교각 두 개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1932년에는 16개의 교각들이 수면 아래에 있었고, 1982년에는 그 중 12개만이 고고학자들에게 지도로 표시되었으며, 나머지 네 개는 물에 휩쓸려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출입구 쪽의 교각들만이 루마니아와 세르비아에 하나씩,[15] 다뉴브강 기슭에서 볼 수 있다.[22]
1979년에 트라야누스 다리는 '예외적으로 중요한 문화 기념물'에, 1983년에는 '예외적으로 중요한 유적지' 목록에 등재되어 세르비아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5. 2. 루마니아 측 잔해
트라야누스 다리의 건설은 다뉴브강의 급류를 피해 안정적인 항해를 가능하게 하고, 강력한 함대와 방어 시설 및 국경 첩보 시설을 구축하는 거대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1906년 다뉴브강 위원회는 항해에 방해가 되었던 교각 두 개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1932년에는 16개의 교각이 수면 아래에 남아 있었고, 1982년에 고고학자들이 그중 12개를 지도로 표시했으며, 나머지 4개는 물에 휩쓸려 간 것으로 추정된다. 다리의 잔해는 다뉴브강의 수위가 기록적으로 낮았던 1858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으며,[15] 이때 20개의 교각들을 여전히 볼 수 있었다.

현재는 루마니아 쪽 다뉴브강 기슭에서 입구 쪽 교각 하나만 볼 수 있다.[22]
6. 현대의 관점과 의의
트라야누스 다리는 로마 제국이 다키아 지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3년부터 105년까지 2년 만에 완공된 이 다리는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가 설계하였으며, 당시 기술력으로는 놀라운 속도였다.[18] 다리 건설에는 탈레스가 고안한 강의 흐름을 조정하는 기술이 사용되었고, 공학자들은 클라도보 서쪽에 물길을 파 강물을 말라 브르비차 마을까지 2km 우회시켰다.[15]
다리는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과 클라도보 인근 철문 동쪽에 위치했으며, 길이는 1,135m(현재 강폭 800m), 너비 15m, 높이 19m였다. 다리 양 끝에는 카스트룸이 설치되어 통행을 통제했다.[15] 코스톨 마을 근처의 폰테스 카스트룸에서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청동상 머리가 발견되어 베오그라드 국립박물관에 전시 중이다.[15]
아폴로도로스는 벽돌, 모르타르, 포촐라나 시멘트로 20개의 석조 교각을 만들고 그 위에 목재 아치를 올렸다.[16][17] 목제 케이슨을 기초로 사용하고, 속이 빈 교각은 모르타르와 돌로 채우고 겉은 로마 벽돌로 마감했다.[19] 교각의 높이는 44.46m, 폭은 17.78m, 간격은 50.38m였다.[19] 오크나무로 만든 다리는 배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높았다.[15]
플라비아 펠릭스 제5군단, 클라우디아 제7군단, 마케도니카 제5군단, 게미나 제13군단 등 여러 로마 군단과 코호르테스가 건설에 참여했으며, 벽돌에 새겨진 부대 명칭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19]
트라야누스 다리 건설은 다뉴브강 항해를 위한 운하 건설, 함대 및 방어 시설 구축 등 대규모 계획의 일환이었다. 철문의 급류는 항해에 큰 문제였으나, 로마 공학자들은 서쪽 강기슭에 3.2km 길이의 운하를 파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19]
이러한 토목 공사는 로마의 다키아 침입 준비 과정이었으며, 106년 로마의 승리로 이어졌다. 다키아 정복을 기념하는 경기는 123일간 계속되었고, 10,000명의 검투사와 11,000마리의 야생동물이 동원되었다.[19]
참조
[1]
웹사이트
Информациони систем непокретних културних добара
https://nasledje.gov[...]
[2]
문서
The bridge seems to have been surpassed in length by another Roman bridge across the Danube, [[Constantine's Bridge (Danube)|Constantine's Bridge]], a little-known structure whose length is given at 2,437 m ({{harvnb|Tudor|1974b|p=139}}; {{harvnb|Galliazzo|1994|p=319}}). In China, the 6th century single-span [[Anji Bridge]] had a comparable span of {{convert|123|feet|m|disp=or}}.
[3]
논문
Trajan's Bridge: The World's First Long-Span Wooden Bridge
https://www.bscesjou[...]
[4]
간행물
Trajan’s Canal at the Iron Gate
1973
[5]
웹사이트
Roman canal
https://vici.org/vic[...]
[6]
뉴스
Стубови Трајановог моста
2018-03-18
[7]
문서
The earliest identified Roman caisson construction was at Cosa, a small Roman colony north of Rome, where similar caissons formed a breakwater as early as the 2nd century BC: International Handbook of Underwater Archaeology, 2002.
[8]
서적
Bridge Engineering - A Global Perspective
Thomas Telford Publishing
2003
[9]
문서
In the first century BC, Roman engineers had employed wooden caissons in constructing the [[Herod the Great|Herodian]] harbour at Caesarea Maritima: Carol V. Ruppe, Jane F. Barstad, eds. International Handbook of Underwater Archaeology, 2002, "Caesarea" pp505f.
[10]
간행물
Srećniji od Avgusta, bolji of Trajana
2017-09-09
[11]
뉴스
Спасавање Трајанове табле
2019-05-26
[12]
서적
Hadrian: Empire and Conflict
https://archive.org/[...]
Harvard University Press
[13]
웹사이트
Romans Rise from the Waters
http://ipsnews.net/i[...]
2006-12-05
[14]
문서
트라야누스 다리는 길이 면에선 다뉴브강을 건너는 또다른 다리인 길이 2,437 m의 덜 알려진 건축물 콘스탄티누스 다리에 경신당한 것으로 보인다({{harvnb|Tudor|1974b|p=139}}; {{harvnb|Galliazzo|1994|p=319}}). 중국에선, 6세기의 단동 형태 다리인 [[안제교]]는 37미터에 이르는 상당한 경간을 갖추고 있다.
[15]
뉴스
Стубови Трајановог моста
2018-03-18
[16]
문서
확인된 가장 초기의 로마의 케이슨은 로마시의 북쪽에 있는 작은 로마 식민지 코사(Cosa)에 있으며, 그곳에는 트라야누스 다리의 것과 유사한 케이슨이 기원전 2세기에 방파제를 형성했다. International Handbook of Underwater Archaeology, 2002.
[17]
서적
Bridge Engineering - A Global Perspective
Thomas Telford Publishing
2003
[18]
문서
기원전 1세기에, 로마 공학자들은 카이사리아 마리티마에 있는 [[헤로데 1세]]의 항구를 건설할 때 목제 케이슨을 적용했다: Carol V. Ruppe, Jane F. Barstad, eds. International Handbook of Underwater Archaeology, 2002, "Caesarea" pp505f.
[19]
간행물
Srećniji od Avgusta, bolji of Trajana
2017-09-09
[20]
뉴스
Спасавање Трајанове табле
2019-05-26
[21]
서적
Hadrian: Empire and Conflict
https://archive.org/[...]
Harvard University Press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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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psnews.net/i[...]
200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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