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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브르트코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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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브르트코 1세는 보스니아의 중세 통치자로, 블라디슬라프 코트로마니치와 옐레나 슈비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1353년 삼촌 스테판 2세가 사망하며 보스니아 반이 되었고, 1377년에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세르비아 제국 붕괴 이후 영토를 확장하여 달마티아를 정복하고, 경제적 번영을 이끌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맞서 코소보 전투에 참전했다. 트브르트코 1세는 보스니아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1391년 사망할 때까지 보스니아를 강성하게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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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브르트코 1세
기본 정보
이름스테판 트브르트코
다른 이름스체판/스테판 트브르트코
로마자 표기Stjepan/Stefan Tvrtko
풀네임스체판 트브르트코 1세 코트로마니치
국왕
통치 기간1377년 10월 ~ 1391년 3월 10일
대관식1377년 (10월 26일?)
계승자다비샤
보스니아 반
통치 기간1353년 9월 ~ 1377년 10월 (1366년 ~ 1367년 부크의 통치로 중단)
선임자스테판 2세
개인 정보
배우자도로테아 오브 불가리아
자녀트브르트코 2세
가문코트로마니치 가문
아버지블라디슬라프 오브 보스니아
어머니옐레나 오브 브리비르
출생1338년경
출생지스레브레니크
사망일1391년 3월 10일
사망지보보바츠
매장지밀레, 비소코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이미지
투즐라에 있는 트브르트코 1세의 동상

2. 초기 생애와 통치

트브르트코 1세는 블라디슬라프 코트로마니치와 옐레나 슈비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스니아 반 스테판 2세의 형제였고, 어머니는 조지 2세의 딸이었다. 삼촌 스테판 2세가 1353년에 사망하면서, 트브르트코는 보스니아의 반이 되었다. 당시 약 15세였던 트브르트코를 대신하여 아버지 블라디슬라브가 섭정으로 통치했다. 즉위 직후, 트브르트코는 아버지와 함께 영토를 순회하며 봉신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1354년, 아버지 블라디슬라브가 사망하면서 어머니 옐레나가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곧바로 헝가리로 가서, 자신의 주군인 루이 1세에게 트브르트코의 즉위에 대한 동의를 받았다. 귀국 후 옐레나는 밀레에서 의회(''스타나크'')를 열어 "모든 보스니아, 도니 크라이, 자고리에, 그리고 훔 랜드"의 귀족들의 소유와 특권을 확인했다.

트브르트코와 그의 어머니, 형제, 사촌 엘리자베스가 삼촌 스테판의 임종을 지키는 모습. 이는 1380년 제작된 성 시므온의 함에 묘사되어 있다.


1355년 5월, 옐레나와 트브르트코는 군대를 이끌고 두브노로 진군하여 오빠의 상속분을 요구했다. 달마티아 부반과의 협정을 통해 트브르트코는 외할아버지가 소유한 모든 도시와 고모 카타리나의 도시를 상속받기로 했으나, 실제로 점유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국왕 트브르트코 1세의 인장


트브르트코의 즉위와 함께 삼촌 스테판이 건설한 국가는 붕괴되기 시작했고, 헝가리 왕 루이 1세는 자신의 왕실 영지를 확장하고자 그의 봉신들이 트브르트코로부터 독립하도록 장려했다. 1357년, 루이 1세는 트브르트코를 헝가리로 불러들여 네레트바 강까지, 그리고 번영하는 세관 도시인 드리예바를 포함, 도니 크라이와 서부 훔의 대부분을 1353년부터 루이와 결혼한 스테판의 딸 엘리자베스의 지참금으로 넘겨주도록 강요하고, 트브르트코와 그의 동생 부크를 보스니아와 우소라의 통치자로 확인했다. 또한, 보스니아인들에게 보스니아 교회를 진압해야 한다는 조건을 강요했다.

2. 1. 가계와 출신

트브르트코 1세는 보스니아 반 블라디슬라브 코트로마니치와 옐레나 슈비치의 장남으로, 1337년경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스니아 반 스테판 2세의 형제였으며, 어머니는 크로아티아의 영주 조지 2세의 딸이었다. 트브르트코의 가문인 코트로마니치 가문은 보스니아의 유력 가문이었고, 외가인 슈비치 가문은 크로아티아의 유력 가문이었다.

블라디슬라프가 살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테판 2세의 칭호는 트브르트코에게 직접 넘어갔는데, 그 이유는 불분명하다. 1354년 아버지 블라디슬라프가 사망한 후에는 어머니 옐레나가 섭정으로 통치했다. 옐레나는 헝가리로 가서 루이 1세에게 트브르트코의 즉위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 귀국 후 옐레나는 밀레에서 의회(''스타나크'')를 열어 귀족들의 소유와 특권을 확인했다. 1355년에는 군대를 이끌고 두브노로 진군하여 오빠의 상속분을 요구하기도 했다.

2. 2. 섭정과 초기 통치

트브르트코 1세는 블라디슬라프 코트로마니치와 옐레나 슈비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스니아 반(ban) 스테판 2세의 형제였고, 어머니는 조지 2세의 딸이었다. 삼촌 스테판 2세가 1353년에 사망하면서, 트브르트코는 보스니아의 반이 되었다. 당시 약 15세였던 트브르트코를 대신하여 아버지 블라디슬라브가 섭정으로 통치했다. 즉위 직후, 트브르트코는 아버지와 함께 영토를 순회하며 봉신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1354년, 아버지 블라디슬라브가 사망하면서 어머니 옐레나가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곧바로 헝가리로 가서, 자신의 주군인 루이 1세에게 트브르트코의 즉위에 대한 동의를 받았다. 귀국 후 옐레나는 밀레에서 의회를 열어 귀족들의 소유와 특권을 확인했다.

1355년, 옐레나와 트브르트코는 군대를 이끌고 두브노로 진군하여 오빠의 상속분을 요구했다. 달마티아 부반과의 협정을 통해 트브르트코는 외할아버지가 소유한 모든 도시와 고모 카타리나의 도시를 상속받기로 했으나, 실제로 점유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트브르트코의 즉위와 함께 삼촌 스테판이 건설한 국가는 붕괴되기 시작했고, 헝가리 왕 루이 1세는 봉신들이 트브르트코로부터 독립하도록 장려했다. 1357년, 루이 1세는 트브르트코를 헝가리로 불러들여 영토를 넘겨주도록 강요하고, 트브르트코와 그의 동생 부크를 보스니아와 우소라의 통치자로 확인했다. 또한, 보스니아인들에게 보스니아 교회를 진압해야 한다는 조건을 강요했다. 트브르트코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지만, 보스니아 교회 문제로 인해 루이 1세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헝가리 국왕 루이 1세의 첫 번째 인장, 보스니아에 대한 원정 중에 불명예스럽게 분실(공식적으로 "도난")됨


1363년, 트브르트코와 루이 1세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헝가리 군대가 보스니아를 공격했으나, 소코 그라드 요새 방어에 성공하는 등 트브르트코는 헝가리에 맞서 승리했다. 스레브레니크 요새 방어전에서는 왕의 인장을 잃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성 시메온의 흉상에 있는 트브르트코와 그의 형제 부크(스테판 2세의 죽음을 묘사한 장면의 세부 묘사)


1364년, 트브르트코와 그의 가족은 베네치아 공화국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1366년, 귀족들의 반란으로 트브르트코는 폐위되고 동생 부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트브르트코는 헝가리 왕실 궁정에 피난했다가 루이 1세의 도움으로 복위했다. 1374년, 트브르트코는 부크와 화해했다.

3. 헝가리와의 관계와 권력 투쟁

3. 1. 헝가리의 간섭과 영토 상실

1357년 트브르트코 1세가 단독 통치를 시작한 이후 1363년까지 보스니아의 내정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 시기 아비뇽 교황청이 보스니아 교회를 억압하려 하자 트브르트코의 종교 정책이 주목받았다. 트브르트코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왕 루이는 보스니아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보스니아 침공의 종교적 구실을 갖게 되었다. 트브르트코는 훔의 동방 정교회를 포함한 모든 지역 신앙에 관용을 보였다.

트브르트코는 국왕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강조했지만, 루이에 대한 돈지 크라이(Donji Kraji) 귀족들의 충성을 자신에 대한 배신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1363년,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루이는 보스니아 이단자들을 근절한다는 의도를 밝혔다. 4월까지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고, 5월에는 라구사 공화국 관리들이 상인들에게 보스니아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루이가 이끄는 군대가 돈지 크라이를 공격했고, 헝가리 부총독 니콜라스 콘트와 에스테르곰 대주교 니콜라스 아파티가 이끄는 군대가 우소라를 공격했다. 브라트코 부코슬라비치는 루이에게 투항하여 클류치 요새를 넘겨주었지만, 부카크 흐르바티니치는 소코 그라드 요새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우소라에서는 스레브레니크 요새가 왕실 군대의 공격에 맞서 버텼고, 왕의 인장을 잃는 굴욕을 겪었다.

헝가리인들이 패배하자 보스니아 마그나테들의 단결이 약해졌다. 1364년, 트브르트코와 그의 어머니, 형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1365년 말, 베네치아 공화국과 라구사 공화국은 트브르트코에게 그의 봉신들이 상인들을 대우하는 방식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트브르트코는 봉신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1366년 2월, 마그나테들은 반란을 일으켜 트브르트코를 폐위시켰다. 트브르트코는 그의 남동생 부크로 교체되었다.

트브르트코는 헝가리 왕실 궁정에 피난했고, 루이 국왕은 보스니아를 되찾기 위해 트브르트코에게 군사적 원조를 제공했다. 트브르트코는 3월에 보스니아로 돌아와 돈지 크라이, 라마, 훔, 우소라 지역을 포함한 나라의 일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재확립했다. 상코 밀테노비치는 1366년 말에 부크에게 투항했다. 이듬해, 트브르트코는 부크를 남쪽으로 몰아세웠고, 결국 그를 라구사로 도망치게 했다. 상코는 늦여름에 트브르트코에게 복종했다. 1374년까지 트브르트코는 부크와 화해했다.

3. 2. 반란과 복위

1363년, 트브르트코 1세헝가리의 루이 1세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헝가리 군대는 보스니아를 침공했지만, 스레브레니크 요새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헝가리 왕은 왕의 인장을 잃는 굴욕을 겪었다.

1366년 2월, 보스니아 귀족들은 트브르트코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켜 그를 폐위시키고 동생 부크를 옹립했다. 트브르트코 1세는 어머니와 함께 헝가리로 망명하여 루이 1세의 지원을 받았다. 3월에 보스니아로 돌아온 트브르트코 1세는 돈지 크라이, 라마, 훔, 우소라 지역을 포함한 나라의 일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재확립했다.

이후 트브르트코 1세는 귀족들의 충성을 확보하고 부크 지지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다. 1367년, 부크는 라구사로 망명했고, 트브르트코 1세는 보스니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했다. 1374년, 트브르트코 1세는 부크와 화해했다.

4. 세르비아 정복과 왕위 계승

두샨 4세의 죽음과 1355년 12월 그의 아들 우로시 5세의 즉위는 곧 강력하고 위협적이었던 세르비아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제국은 스스로 보스니아에 저항할 수 없었던 자치 영주령들로 분열되었다. 이는 트브르트코가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길을 열었지만, 내부 문제로 인해 그는 즉시 이 기회를 잡지 못했다. 보스니아 동쪽 국경의 영주령은 보이슬라브 보이노비치의 것이었다. 보이슬라브가 1361년 라구사를 공격했을 때, 공화국은 트브르트코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보이슬라브의 미망인 고이슬라바는 어린 아들들을 대신하여 통치하면서 트브르트코가 부크와의 갈등 동안 가족의 영지를 통과하도록 허락했고, 트브르트코는 이 가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는 조카 니콜라 알토마노비치로부터 그녀를 보호할 수 없었는데, 니콜라 알토마노비치는 1368년 11월까지 그녀의 아들들의 영지를 점령했다. 트브르트코가 할 수 있는 일은 몰수당한 미망인이 안전하게 그녀의 고향 알바니아로 갈 수 있도록 돕는 것뿐이었다.

1374년 이후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지역 영주들 간의 세르비아 제국 분할


야심 찬 니콜라는 곧 트브르트코에 대항하여 반란을 선동하기 시작했고, 산코 밀테노비치는 다시 그의 영주에 대항하여 일어났다가 1369년에 다시 패배하고 사면되었다. 트브르트코와 니콜라는 1370년 8월 평화를 맺었지만, 후자의 호전성은 곧 그에게 모든 이웃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베네치아와 제타 영주 주라지 1세 발시치와 연합하여 니콜라는 라구사와 코토르를 공격할 의도였다. 트브르트코와 모라비아 세르비아의 영주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헝가리루이의 지원을 받아 도시들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했다. 라자르 역시 루이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그 후 그와 트브르트코는 니콜라에 대항하기 위해 1,000명의 기병을 받았으며, 그는 1373년 가을에 완전히 패배했으며, 그의 영토는 승리한 동맹국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트브르트코는 상부 포드리니예, 가츠코, 그리고 폴림례의 일부를 미레셰바 수도원과 함께 차지했다. 이것은 트브르트코 통치 기간 동안 보스니아의 첫 번째 중요한 확장이었으며 그에게 세르비아 문제에 대한 상당한 영향력을 부여했다.

1374년, 트브르트코는 불가리아 차르 이반 스트라치미르의 딸 불가리아의 도로테아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이반 스트라치미르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도로테아와 그녀의 자매를 그의 궁정에서 명예로운 인질로 유지했던 루이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신부는 정교회 신자였지만, 이 결혼은 트브르트코의 오랜 적이었던 보스니아 주교 페테르에 의해 가톨릭 의식으로 거행되었으며, 트브르트코는 그에게 광대한 토지를 수여했다. 트브르트코는 이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교황 그레고리 11세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니콜라 알토마노비치의 영토 분할은 트브르트코와 주라지 1세 발시치 사이에 마찰을 일으켰는데, 후자가 트브르트코가 합병할 것으로 예상했던 해안 ''주파스''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1377년 초, 트브르트코는 트레비녜, 코나블리, 드라체비차를 점령하기 위해 트라부니아인들과 성공적으로 공모하여, 세르비아 영토에 대한 최종 정복을 이루었다. 그 당시, 세르비아는 독립 영주령들의 헝겊 조각으로 축소되었다.

4. 1. 세르비아 제국의 붕괴와 기회

두샨 4세가 1355년 12월 사망하고 그의 아들 우로시 5세가 즉위하면서 강력했던 세르비아 제국은 붕괴되었다. 제국은 자치 영주령들로 분열되었고, 이는 트브르트코가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할 기회를 제공했다. 보스니아 동쪽 국경의 영주령은 보이슬라브 보이노비치의 것이었다. 보이슬라브가 1361년 라구사를 공격했을 때, 공화국은 트브르트코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보이슬라브의 미망인 고이슬라바는 트브르트코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녀는 조카 니콜라 알토마노비치로부터 보호받지 못했고, 니콜라는 1368년 11월까지 그녀 아들들의 영지를 점령했다. 트브르트코는 고이슬라바가 알바니아로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도왔다.

야심 찬 니콜라는 트브르트코에 대항하여 반란을 선동했고, 산코 밀테노비치는 다시 영주에 대항했다가 패배하고 사면되었다. 트브르트코와 니콜라는 1370년 8월 평화를 맺었지만, 니콜라는 베네치아와 제타 영주 주라지 1세 발시치와 연합하여 라구사와 코토르를 공격하려 했다. 트브르트코와 모라비아 세르비아의 영주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헝가리의 루이 1세의 지원을 받아 도시들을 보호했다. 라자르는 루이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트브르트코와 함께 니콜라에 대항하기 위해 1,000명의 기병을 지원받아 1373년 가을 니콜라를 완전히 패배시켰다.

트브르트코는 상부 포드리니예, 가츠코, 폴림례의 일부를 밀레셰바 수도원과 함께 차지했다. 이것은 보스니아의 첫 번째 중요한 확장이었고 세르비아 문제에 대한 상당한 영향력을 부여했다. 1374년, 트브르트코는 불가리아 차르 이반 스라치미르의 딸 불가리아의 도로테아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루이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니콜라 알토마노비치의 영토 분할은 트브르트코와 주라지 1세 발시치 사이에 마찰을 일으켰다. 1377년 초, 트브르트코는 트레비네, 코나블레, 드라체비차를 점령하여 세르비아 영토에 대한 최종 정복을 이루었다.

4. 2. 세르비아 영토 정복

두샨 4세의 죽음과 우로시 5세의 즉위는 세르비아 제국의 붕괴를 야기했다. 제국은 자치 영주령들로 분열되었고, 이는 트브르트코가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보이슬라브 보이노비치 사후, 그의 미망인 고이슬라바는 트브르트코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니콜라 알토마노비치에게 영지를 빼앗겼다.

니콜라는 트브르트코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1370년 8월 평화를 맺었다. 그러나 니콜라는 베네치아, 주라지 1세 발시치와 연합하여 라구사와 코토르를 공격하려 했다. 트브르트코와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헝가리의 루이 1세의 지원을 받아 니콜라를 1373년 가을에 격파하고 그의 영토를 분할했다. 트브르트코는 상부 포드리니예, 가츠코, 폴림례 일부를 차지하여 보스니아를 크게 확장하고 세르비아 문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1374년, 트브르트코는 불가리아의 도로테아와 결혼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교황 그레고리 11세의 인정을 받았다. 니콜라 알토마노비치의 영토 분할은 트브르트코와 주라지 1세 발시치 사이에 마찰을 일으켰다. 1377년, 트브르트코는 트레비녜, 코나블리, 드라체비차를 정복하여 세르비아 영토에 대한 최종 정복을 완료했다.

4. 3.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왕 즉위

1371년 12월, 네마니치 왕조의 마지막 왕인 우로스 약세가 사망하면서 세르비아 왕위는 공석이 되었다.[2] 세르비아는 여러 영주들로 분할되었고,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인 마르코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트브르트코는 자신의 네마니치 왕조 혈통을 근거로 세르비아 왕위를 주장했다. 그의 할머니 엘리자베스는 드라구틴 왕의 딸이었다. 트브르트코는 "이중 왕관"을 주장하며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왕으로 즉위할 권리를 내세웠다.

트브르트코 1세의 서명, 그를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및 프리모리예의 왕"으로 식별한다.


트브르트코는 1377년 가을, 아마도 성 데메트리우스의 축일인 10월 26일에 보스니아 대관식을 거행하여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왕이 되었다. 대관식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다. 마브로 오르비니는 1601년에 대관식이 밀레셰바 수도원에서 대주교에 의해 거행되었다고 기록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을 근거로 대관식이 정교회 밀레셰바 수도원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반면,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역사학자들은 최근의 고고학 및 역사적 연구를 바탕으로 대관식이 밀레의 성 니콜라스 프란체스코 교회에서 열렸다고 주장한다. 밀레는 트브르트코 1세의 후계자들의 대관식이 열린 곳이자 그의 전임자들의 매장지였다.

트브르트코는 왕위에 오른 후, 신의 은총으로 세르비아, 보스니아, 포모르예 및 서부 지역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또한 네마니치 왕조와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스테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트브르트코의 왕위는 헝가리 왕 루이와 그의 후계자 메리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러나 트브르트코는 세르비아 지역 영주들에 대한 권위를 완전히 확립하지는 못했고, 정교회의 지지를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5. 경제 발전과 해상 진출

트브르트코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보스니아는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금속 광석과 금속 가공품(주로 , 구리, )의 수출은 보스니아 경제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러한 상품들은 디나르 알프스 산맥을 넘어 해안으로 운송되었고, 주로 라구사 공화국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구매되었다.

트브르트코의 동전, 백합 문양과 그의 문장


라구사코토르의 해상 도시들은 보스니아 왕국에 식량을 의존했는데, 트브르트코 1세는 이 의존도를 이용하여 처음에는 낮았던, 보스니아에게 불리한 가격을 인상했다. 그러나 보스니아는 아드리아 해에서 네레트바 강부터 코토르 만에 이르는 자국 영토를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없었는데, 이 지역에는 주요 정착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1378년 키오자 전쟁이 발발하자 트브르트코는 베네치아 편에 서서 참전하려 했으나, 라구사코토르를 견제하기 위해 이를 반대했다. 트브르트코는 라구사에 코토르 방어를 위한 지원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코토르는 베네치아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트브르트코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1379년 다시 헝가리에 복종하면서 트브르트코에게 실망을 안겼다.

코토르 점령 실패와 라구사의 금수 조치, 해상 무역 접근성 개선의 필요성으로 인해 트브르트코는 1382년 초 코토르 만에 노비라는 새로운 요새 도시를 건설하고 소금 무역 중심지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라구사는 소금 무역 독점권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노비의 상업을 방해했고, 결국 트브르트코는 1382년 11월에 노비에서의 소금 판매를 중단해야 했다.

1382년 트브르트코 1세가 건설한 노비 요새

5. 1. 경제 성장

트브르트코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보스니아는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금속 광석과 금속 가공품(주로 , 구리, )의 수출은 보스니아 경제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러한 상품들은 디나르 알프스 산맥을 넘어 해안으로 운송되었고, 주로 라구사 공화국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구매되었다.

라구사코토르의 해상 도시들은 보스니아 왕국에 식량을 의존했는데, 트브르트코 1세는 이 의존도를 이용하여 처음에는 낮았던, 보스니아에게 불리한 가격을 인상했다. 그러나 보스니아는 아드리아 해에서 네레트바 강부터 코토르 만에 이르는 자국 영토를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없었는데, 이 지역에는 주요 정착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1378년 키오자 전쟁이 발발하자 트브르트코는 베네치아 편에 서서 참전하려 했으나, 라구사코토르를 견제하기 위해 이를 반대했다. 트브르트코는 라구사에 코토르 방어를 위한 지원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코토르는 베네치아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트브르트코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1379년 다시 헝가리에 복종하면서 트브르트코에게 실망을 안겼다.

코토르 점령 실패와 라구사의 금수 조치, 해상 무역 접근성 개선의 필요성으로 인해 트브르트코는 1382년 초 코토르 만에 노비라는 새로운 요새 도시를 건설하고 소금 무역 중심지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라구사는 소금 무역 독점권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노비의 상업을 방해했고, 결국 트브르트코는 1382년 11월에 노비에서의 소금 판매를 중단해야 했다.

5. 2. 해상 진출 시도

트브르트코 1세는 세르비아 영토를 최대한 확보한 후 해안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보스니아는 디나르 알프스 산맥을 넘어 해안으로 금속 가공품을 운송하여 주로 라구사 공화국베네치아 공화국에 판매하여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라구사와 코토르는 트브르트코 왕국에 식량을 의존했는데, 트브르트코는 이를 이용하여 보스니아에 유리한 가격을 설정했다.

1378년 베네치아 공화국제노바 공화국 사이에 키오자 전쟁이 발발하자, 헝가리 왕국루이 1세는 제노바 편을 들었고, 헝가리에 종속된 라구사 역시 제노바를 지지했다. 베네치아는 코토르를 점령한 후 트브르트코에게 참전을 설득하려 했으나, 트브르트코는 라구사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코토르를 자신의 네마니치 선조들의 유산이라 주장하며 점령하려 했다.

코토르 점령 실패와 라구사의 금수 조치로 보스니아 경제가 피해를 입자, 트브르트코는 해상 무역 접근성을 개선하고자 했다. 1382년 트브르트코 1세는 코토르 만에 노비라는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고 소금 무역 중심지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라구사는 소금 무역 독점권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노비의 상업을 방해했고, 결국 트브르트코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6. 헝가리 왕위 계승 위기와 달마티아 정복

1382년 9월 11일 헝가리 왕 루이 1세가 사망하고 그의 딸 마리아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헝가리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여왕들의 인기는 낮았고, 이는 트브르트코에게 1357년에 루이에게 빼앗겼던 드리예바와 기타 영토를 되찾고 코토르를 점령할 기회를 제공했다. 1385년, 트브르트코는 헝가리의 최고 지배권을 형식적으로 인정했지만, 실질적인 의미는 없었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자매"인 여왕들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며 그들에 대한 충성 서약을 인용했지만, 마리와 엘리자베스는 그에게 종주권을 강요할 힘이 없었다.

루이의 영토(빨간색)와 트브르트코의 보스니아(분홍색)를 포함한 종속 및 주장 영토


1385년 봄, 트브르트코는 코토르를 소유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드리예바와 코토르의 무역 중심지 합병은 보스니아 경제와 국왕의 재정에 매우 중요했다. 코토르 점령은 트브르트코에게 제타의 발샤 2세의 적대감을 샀다.

엘리자베스와 마리에 대한 반란은 1385년 말 마리가 친척인 나폴리의 카를 3세를 지지하여 폐위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엘리자베스는 다음 해 2월 카를을 암살했고, 마리는 왕좌로 복귀했다. 7월 25일, 두 여성 모두 나폴리의 라디슬라오의 지지자들에게 갇히게 되었다. 내전이 마리의 영토를 휩쓸었고, 그녀의 약혼자 지기스문트는 그녀를 해방시키기 위해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트브르트코는 라디슬라오의 헝가리 왕위 주장을 지지하기로 선택했다. 엘리자베스는 감옥에서 교살되었고, 1387년 3월 지기스문트가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하고 마리를 해방시키면서 트브르트코는 더욱 단호하게 행동하게 되었다. 그는 달마티아를 공격할 자유를 얻었다.

트브르트코 1세의 문장


달마티아 도시는 베네치아와의 동맹 덕분에 마리와 지기스문트에게 충성심을 유지했다. 트브르트코는 1387년 7월 클리스 요새를 장악하여 스플리트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보스니아 군대가 스플리트와 자다르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도시들은 항복을 거부했다. 오스트로비차 요새는 11월에 트브르트코에게 항복했고, 그 뒤를 트로기르가 따랐다.

1388년까지 보스니아 군대의 달마티아 황폐화는 너무 심각해져서 도시 당국은 지기스문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스플리트, 자다르, 시베니크는 모든 희망을 잃고 트브르트코는 1389년 3월에 항복 협상을 할 것을 요청했다. 트브르트코는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1389년 6월 15일까지 스플리트가 마지막으로 항복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6. 1. 헝가리 왕위 계승 분쟁

1382년 9월 11일 헝가리 왕 루이 1세가 사망하고 그의 딸 마리아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헝가리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여왕들의 인기는 낮았고, 이는 트브르트코에게 1357년에 루이에게 빼앗겼던 드리예바와 기타 영토를 되찾고 코토르를 점령할 기회를 제공했다. 1385년, 트브르트코는 헝가리의 최고 지배권을 형식적으로 인정했지만, 실질적인 의미는 없었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자매"인 여왕들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며 그들에 대한 충성 서약을 인용했지만, 마리와 엘리자베스는 그에게 종주권을 강요할 힘이 없었다.

1385년 봄, 트브르트코는 코토르를 소유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드리예바와 코토르의 무역 중심지 합병은 보스니아 경제와 국왕의 재정에 매우 중요했다. 코토르 점령은 트브르트코에게 제타의 발샤 2세의 적대감을 샀다.

엘리자베스와 마리에 대한 반란은 1385년 말 마리가 친척인 나폴리의 카를 3세를 지지하여 폐위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엘리자베스는 다음 해 2월 카를을 암살했고, 마리는 왕좌로 복귀했다. 7월 25일, 두 여성 모두 나폴리의 라디슬라오의 지지자들에게 갇히게 되었다. 내전이 마리의 영토를 휩쓸었고, 그녀의 약혼자 지기스문트는 그녀를 해방시키기 위해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트브르트코는 라디슬라오의 헝가리 왕위 주장을 지지하기로 선택했다. 엘리자베스는 감옥에서 교살되었고, 1387년 3월 지기스문트가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하고 마리를 해방시키면서 트브르트코는 더욱 단호하게 행동하게 되었다. 그는 달마티아를 공격할 자유를 얻었다.

달마티아 도시는 베네치아와의 동맹 덕분에 마리와 지기스문트에게 충성심을 유지했다. 트브르트코는 1387년 7월 클리스 요새를 장악하여 스플리트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보스니아 군대가 스플리트와 자다르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도시들은 항복을 거부했다. 오스트로비차 요새는 11월에 트브르트코에게 항복했고, 그 뒤를 트로기르가 따랐다.

1388년까지 보스니아 군대의 달마티아 황폐화는 너무 심각해져서 도시 당국은 지기스문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스플리트, 자다르, 시베니크는 모든 희망을 잃고 트브르트코는 1389년 3월에 항복 협상을 할 것을 요청했다. 트브르트코는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1389년 6월 15일까지 스플리트가 마지막으로 항복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6. 2. 달마티아 정복



트브르트코가 동쪽에서 교전하는 동안 지기스문드의 군대는 달마티아에서 트브르트코의 영토 확장을 되돌리려 했다. 클리스가 잠시 상실되었고, 달마티아 도시들은 다시 항복을 거부하여 트브르트코는 다시 공격을 시작해야 했다. 1390년 5월, 달마티아 제도와 도시들은 마침내 트브르트코에게 항복했다. 그는 이후 스스로를 "신의 은총으로 라시아, 보스니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포모르제의 왕"이라고 칭했다. 트브르트코는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의 왕으로서 그의 지지자 요한 팔리나와 요한 호르바트를 그의 반으로 임명했으며, 스플리트 대주교 안드레아 괄도를 수트예스카에서 맞이했다.

통치 마지막 몇 달 동안 트브르트코는 달마티아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그의 통치를 피한 유일한 달마티아 도시인 자다르를 점령하기 위한 계획에 전념했다. 그는 베네치아에 광범위한 동맹을 제안했지만, 이는 베네치아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다. 한편, 트브르트코는 오스트리아 공작 알베르트 3세와 관계를 발전시켰다. 1390년 늦여름, 트브르트코와 합스부르크 왕가 일원 간의 결혼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헝가리는 트브르트코의 외교 정책의 초점이었다. 서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트브르트코와 지기스문드는 9월에 평화를 협상하기 시작했다.

7. 오스만 제국의 침입과 코소보 전투

1386년, 오스만 제국보스니아 왕국을 처음 침공했으나, 이 침공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388년, 랄라 샤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과 제타 침략군이 빌레차까지 진입했다. 1388년 8월 말에 벌어진 빌레차 전투는 블라트코 부코비치 공작이 이끄는 보스니아 군대의 승리로 끝났다.

1389년 6월 15일, 오스만 군대는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 국가 연합군과 만났다. 트브르트코 1세는 세르비아의 왕으로서 자신의 의무라고 느껴, 군대에 달마티아를 떠나 라자르 흐레블랴노비치와 부크 브란코비치를 도우라고 명령했다. 그는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에 무기를 판매한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밀라노 통치자를 원망했다. 무라드 1세와 라자르를 포함하여 보스니아 귀족들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전투의 결과는 확정하기 어려웠지만, 전장에서 온 Vlatko의 편지는 트브르트코에게 기독교 연합이 승리했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트브르트코 1세는 여러 기독교 국가들에게 승리를 알렸고, 피렌체 공화국은 보스니아 왕국과 그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칭찬하며 응답했다. 그러나 라자르의 후계자들이 오스만 종주권을 받아들이고, 부크 브란코비치가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에게 돌아서면서, 트브르트코 1세의 세르비아 칭호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잃었다. 코소보 전투 이후, 세르비아 왕위에 대한 보스니아의 주장은 명목상에 불과했다.

7. 1. 오스만 제국의 위협

1386년, 오스만 제국보스니아 왕국을 처음 침공했으나, 이 침공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388년, 랄라 샤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과 제타 침략군이 빌레차까지 진입했다. 1388년 8월 말에 벌어진 빌레차 전투는 블라트코 부코비치 공작이 이끄는 보스니아 군대의 승리로 끝났다.

1389년 6월 15일, 오스만 군대는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 국가 연합군과 만났다. 트브르트코 1세는 세르비아의 왕으로서 자신의 의무라고 느껴, 군대에 달마티아를 떠나 라자르 흐레블랴노비치와 부크 브란코비치를 도우라고 명령했다. 그는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에 무기를 판매한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밀라노 통치자를 원망했다. 무라드 1세와 라자르를 포함하여 보스니아 귀족들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전투의 결과는 확정하기 어려웠지만, 전장에서 온 Vlatko의 편지는 트브르트코에게 기독교 연합이 승리했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트브르트코 1세는 여러 기독교 국가들에게 승리를 알렸고, 피렌체 공화국은 보스니아 왕국과 그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칭찬하며 응답했다. 그러나 라자르의 후계자들이 오스만 종주권을 받아들이고, 부크 브란코비치가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에게 돌아서면서, 트브르트코 1세의 세르비아 칭호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잃었다. 코소보 전투 이후, 세르비아 왕위에 대한 보스니아의 주장은 명목상에 불과했다.

7. 2. 코소보 전투 참전

트브르트코 1세는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에서의 군사 활동 중에도 동쪽 영토에서 소규모 전투를 치러야 했다. 보스니아 왕국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지만, 제타의 조지 2세는 의도적으로 투르크족을 보스니아로 끌어들였다. 1386년과 1388년에 오스만 제국의 침공이 있었고, 특히 1388년 8월 말 빌레차 전투에서 블라트코 부코비치가 이끄는 보스니아 군대가 승리했다.

1389년 6월 15일,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와 세르비아 연합군이 맞붙었다. 트브르트코 1세는 세르비아의 왕으로서 의무감을 느껴 군대에 달마티아를 떠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와 부크 브란코비치를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에 무기를 판매한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밀라노 통치자를 원망했다. 전투 결과는 확정하기 어려웠지만, 블라트코의 편지는 트브르트코 1세에게 기독교 연합군의 승리를 확신시켰다. 트브르트코 1세는 여러 기독교 국가에 승리를 알렸고, 피렌체 공화국은 그를 칭찬했다. 그러나 라자르의 후계자들이 오스만 종주권을 인정하고 부크 브란코비치가 트브르트코 1세의 적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에게 돌아서면서, 그의 세르비아 왕위 주장은 명목상에 불과하게 되었다.

8. 말년과 유산



트브르트코가 동쪽에서 교전하는 동안 지기스문드의 군대는 그의 달마티아에서의 영토 확장을 되돌릴 수 있었다. 클리스는 7월에 잠시 상실되었고, 달마티아 도시들은 다시 항복을 거부했으며, 트브르트코는 다시 공격을 시작해야 했다. 11월부터 12월까지 일련의 전투와 소규모 교전의 결과, 보스니아의 결정적인 승리로 이어졌고 헝가리군은 후퇴했다. 1390년 5월, 도시들과 달마티아 제도는 마침내 트브르트코에게 항복했다. 그는 이후 스스로를 "신의 은총으로 라시아, 보스니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포모르제의 왕"이라고 칭했다. 트브르트코는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의 왕으로서 그의 지지자 요한 팔리나와 요한 호르바트를 그의 반으로 임명했으며, 스플리트 대주교 안드레아 괄도를 수트예스카에서 맞이했다.

통치 마지막 몇 달 동안 트브르트코는 달마티아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그의 통치를 피한 유일한 달마티아 도시인 자다르를 점령하기 위한 계획에 전념했다. 그는 베네치아에 광범위한 동맹을 제안했지만, 그것은 공화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다. 한편, 트브르트코는 또한 오스트리아 공작 알베르트 3세와 관계를 육성했다. 1390년 늦여름, 최근 과부가 된 트브르트코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 간의 결혼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헝가리는 트브르트코의 외교 정책의 초점이었다. 서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트브르트코와 지기스문드는 9월에 평화를 협상하기 시작했다. 지기스문드는 약세였고, 1391년 1월 그의 사절들이 트브르트코의 궁정에 도착했을 때 트브르트코에게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협상은 트브르트코가 3월 10일에 사망했기 때문에 아마도 결론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의 삼촌 스테판 2세와 함께 밀레에 묻혔다.

트브르트코 1세는 최소한 한 명의 아들 트브르트코 2세를 남겼는데, 그의 정통성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미성년자였고 그의 아버지를 계승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 1366년 반란에 가담하여 트브르트코 1세에 의해 추방되었고 1390년에 그와 화해한 친척(아마도 사생아 이복형제) 다비샤가 대신 왕으로 선출되었다. 다음 왕인 오스토야는 트브르트코 1세의 사생아(또는 아마도 다른 사생아 이복형제)였을 가능성이 있다.

8. 1. 외교적 노력과 사망

1390년 트브르트코 1세 치하 보스니아는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3][4] 트브르트코가 동쪽에서 교전하는 동안 지기스문드의 군대는 달마티아에서의 영토 확장을 되돌리려 했으나, 11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보스니아가 승리하고 헝가리군은 후퇴했다. 1390년 5월, 달마티아 제도와 도시들은 트브르트코에게 항복했고, 그는 스스로를 "신의 은총으로 라시아, 보스니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포모르제의 왕"이라 칭했다. 트브르트코는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의 왕으로서 요한 팔리나와 요한 호르바트를 반으로 임명하고, 스플리트 대주교 안드레아 괄도를 수트예스카에서 맞이했다.

통치 마지막 몇 달 동안 트브르트코는 달마티아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유일하게 그의 통치를 피한 자다르를 점령하려 했다. 그는 베네치아에 동맹을 제안했지만, 베네치아는 이익에 부합하지 않아 거절했다. 한편, 트브르트코는 오스트리아 공작 알베르트 3세와 관계를 발전시켜, 1390년 늦여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혼담이 오갔다. 헝가리는 트브르트코 외교 정책의 초점이었고, 서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9월에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지기스문드는 약세였기에 트브르트코에게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협상은 1391년 3월 10일 트브르트코가 사망하며 결론을 맺지 못했다. 그는 밀레에 묻혔다.

8. 2. 평가

트브르트코 1세는 보스니아의 가장 위대한 중세 통치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그가 물려받은 나라보다 더 크고, 강하며, 정치적으로 더 영향력 있고, 군사적으로 더 강력한 나라를 남겼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보스니아 경제는 번성했고, 새로운 정착지와 무역 중심지가 나타났으며, 신민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

블라디미르 쵸로비치는 트브르트코 1세를 두샨과 비교하며, 트브르트코가 지나치게 야심 찬 정복자가 아니라 유능한 정치가였다고 평가했다. 쵸로비치는 트브르트코가 필요할 때 힘을 사용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외국의 정복자가 아닌 합법적인 상속자로, 크로아티아인들에게는 더 나은 통치자로 보이도록 주의를 기울였다고 기록했다. 또한 쵸로비치는 트브르트코의 인내심과 외교술을 강조하며, 그를 기회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칭했다.

참조

[1] 웹사이트 srebrenik-rodni-grad-prvog-bosanskog-kralja https://poslovnenovi[...]
[2] 서적 The Double Wreath, A Contribution to the History of Kingship in Bosnia http://www.doiserbia[...]
[3] 웹사이트 Historijska karta Srednjevjekovovne Bosanske Države https://kolekcije.nu[...] 2021-04-10
[4] 웹사이트 Historijska karta srednjevjekovne bosanske države / sastavio Marko Vego; izrada i reprodukcija Geokarta. https://digitalna.ns[...] Digitalne zbirke Nacionalne i sveučilišne knjižnice u Zagrebu 2021-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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