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올라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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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올라는 이탈리아 코센차현에 위치한 도시로, 북쪽은 Fuscaldo, 남쪽은 San Lucido, 내륙으로는 Montalto Uffugo와 San Fili와 접한다. 코센차에서 35km, 라메지아 테르메 국제공항에서 50km 거리에 있으며, 중요한 기차역이 있다. 지진 등급은 구역 2(중간-높음 지진 활동)이다. 파올라의 역사는 11세기 말에 처음 언급되었으며, 로마 시대의 빌라 유적과 비잔틴, 노르만, 슈바벤, 앙주, 아라곤, 프랑스 등의 지배를 거쳤다. 주요 명소로는 성 프란치스코 성소, 로마 유적, 파올라 성, 일곱 개의 수로 분수 등이 있으며, 성 프란치스코의 탄생과 죽음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린다. 교통은 철도, 국도, 시내 버스 등을 통해 이루어지며, 아시시, 프레쥐 등 여러 도시와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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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올라 (이탈리아) | |
|---|---|
| 기본 정보 | |
![]() | |
| 공식 명칭 | Città di Paola (이탈리아어) |
| 현지 명칭 | Pàula (나폴리어) |
| 지리 좌표 | 북위 39° 22′ 동경 16° 02′ |
| 행정 | |
| 국가 | 이탈리아 |
| 지역 | 칼라브리아주 |
| 광역 자치체 | 코센차도 (CS) |
| 시장 | 조반니 폴리타노 |
| 프라치오니 | 해당사항 없음 |
| 면적 | |
| 총 면적 | 42.88 km² |
| 인구 | |
| (2017년 12월 31일) | 15,716명 |
| 인구 밀도 | 370명/km² |
| 주민 | Paolani (파올라니) |
| 지리 | |
| 해발 고도 | 94 m |
| 기타 정보 | |
| 성인 | 성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
| 축일 | 4월 2일, 5월 4일 |
| 우편 번호 | 87027 |
| 지역 번호 | 0982 |
| ISTAT 코드 | 078091 |
| 지진 구역 | 2 |
| 추가 정보 | |
| 인접 코무네 | 인접 코무네 참조 |
| 홈페이지 | 파올라 시 공식 웹사이트 |
2. 지리
파올라는 북쪽 해안을 따라 후스칼도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산 루치도와 접하며, 내륙으로는 몬탈토 우푸고와 산 필리와 접한다. 도청 소재지에서 35km, 라메치아 테르메 국제공항에서 50km 떨어져 있다. 이 도시는 중요한 기차역을 가지고 있다.
지진 등급: 구역 2 (중간-높음 지진 활동)[1]
코센차현 남서부에 위치한다.
인접 코무네는 다음과 같다.
- 후스칼도
- 몬탈토 우푸고
- 산 필리
- 산 루치도
3. 역사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 비잔틴 지배, 노르만 지배, 슈바벤- 앙주 지배, 아라곤과 프랑스 지배, 두 시칠리아 왕국과 이탈리아 왕국 시대를 거치면서 파올라는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경험했다.
슈바벤의 프리드리히 2세 치세에 칼라브리아는 번영을 누렸고, 파올라도 이 시기에 혜택을 받았다. 칼라브리아가 슈바벤에서 앙주 통치로 넘어가면서 파올라는 봉토가 되었고, 루포 가문에 위탁되었다. 1418년 폴리세나 루포는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결혼하여 파올라 지역을 지참금으로 가져왔으나, 1420년 독살로 사망하여 파올라는 다시 루포 가문으로 돌아갔다. 이후 폴리세나의 여동생 코벨라와 조반니 안토니오 마르자노의 결합으로 태어난 마리노 마르자노가 봉토를 상속받았지만, 반역 혐의로 빼앗겼다.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는 아라곤의 도착과 함께 파올라를 도시 지위로 선포했다. 1283년 상륙 기간 동안, 포세 지역 주민들은 파올라 성 주변으로 피신하여 고대 수도원의 균형을 깨뜨렸고, 수도원은 쇠퇴하게 되었다. 1555년 드라구트 라이스가 이끄는 투르크족은 파올라를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성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미니모 수도사의 수도원을 공격했다. 1806년 프랑스군이 파올라를 점령하여 성 프란치스코 성지를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1809년 요아킴 뮈라의 법률에 따라 종교 단체들이 억압되고 수도원은 다른 용도로 전환되었다.
빈 회의 (1815년) 이후 페르디난도 4세가 나폴리 왕위에 복위되고, 나폴리와 시칠리아가 통합되어 두 시칠리아 왕국이 형성되었다. 1844년과 1852년 페르디난도 2세 국왕과 왕세자 프란체스코가 파올라를 방문했다. 리소르지멘토 동안 파올라는 가리발디 운동에 참여했으며, 니노 빅시오와 자코모 메디치가 지휘하는 군대에 도움을 제공했다. 1910년 파올라-코센차 철도 건설 이전까지 파올라 항구는 나폴리와 메시나를 잇는 무역항으로 번성했다.
3. 1. 지명의 유래
현재 파올라 마을의 지명 유래에 대한 기록은 11세기 말에 비교적 드물게 나타나는데, 노르만 귀족 로베르토 보온 오브 푸스칼도의 소유였던 때 ''tenimentum Paulae''가 언급된다.[1]16세기 중반부터 많은 학자들이 마을 이름의 유래를 추적하려 했다.[1]
그 중 첫 번째는 사제 가브리엘 바리오였는데, 그는 역사가 스테파누스 비잔티누스의 저작(그는 다시 밀레투스의 헤카타이우스를 참고했다)을 바탕으로 고대 오이노트리아 정착지 파티코스를 현대 지명과의 유사성을 통해 파올라와 동일시했다.[1]
- 칼라브리아가 로마에 정복된 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라는 로마 집정관이 칼라브리아 도시에 거주지를 정했다. 따라서 파올라라는 이름은 그에게서 유래되었을 것이다.[1]
- 라틴어로 '''Pabula'''는 목초지를 의미한다. 몇몇 중요한 문서에 따르면 파올라는 푸스칼도의 부락이었으며, 푸스칼도의 마르키스 스피넬리가 관리했다. 초목이 풍부한 이 지역은 주로 가축 방목에 사용되었다.[1]
이러한 가설 중에서 역사학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것은 세 번째 가설인데, 다른 두 가설과는 달리 역사적 증거로 뒷받침된다.[1]
3. 2.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
기원전 4세기와 3세기 사이에 파올라 지역은 브루티족의 옵피둠 클람페티아의 시골 지역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곳은 현재 산 루치도 시의 역사적 중심지로 확인되었다. 1980년대 말 성 요한 세례자에게 헌정된 교회의 포장도로를 재건하는 동안, 헬레니즘 시대의 정착지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여러 개의 생활 공간과 생산 시설이 포함되어 있었고, 수많은 베틀 추와 같은 동일 시대에 제작된 도자기 유물 생산을 위한 가마 유적도 발견되었다.[1] 산 루치도 지역에서 수행된 연구를 바탕으로 파올라 지역 역시 올리브와 포도 재배와 관련된 소규모 생산 농장이 점재했을 것이고, 이는 지형학적 조건에 의해 유리했을 것으로 보인다.[1] 1990년대 후반 복원 작업을 하는 동안 바디아 루타 수도원 단지 안뜰에서 발굴된 뼈와 도자기 조각에서 이러한 흔적이 발견되었다.[1]이후 클람페티아는 이 지역의 다른 브레튼 중심지와 함께 두 번째 로마-카르타고 전쟁에 참여했고, 전쟁의 마지막 해에 마침내 정복되었다.[1] 로마의 카르타고에 대한 승리는 칼라브리아 원주민의 정치적 독립의 종말과 농장의 소멸을 의미했다.[1]
로마의 영향으로 칼라브리아 시골의 농업 재구성이 촉발되었고, 새로 정복된 영토를 통제하기 위해 새로운 콜로니아(식민지)가 건설되었다.[1] 이 지역 전역의 비옥한 해안 테라스에 수많은 빌라가 건설되었으며, 영주와 그의 가족을 위한 욕실 또는 온천(pars urbana), 직원과 노예를 위한 숙소(pars rustica 및 ergastula), 가공 공장, 농산물 저장용 대형 창고(pars fructuaria 및 horrea)가 갖춰진 호화로운 저택이 건설되었다.[1]
1980년대 초 파올라 북쪽 교외의 콘트라다 쿠투라에서 이러한 대규모 빌라 중 하나가 발견되었다.[1] 건물은 부분적으로 보존되어 있고 거의 탐사되지 않았으며, 해수면에서 수십 미터 위에 있는 해안 테라스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1] 빌라의 구조는 동일한 테라스의 자연 경사를 정돈하기 위해 건설된 석조 하부 구조(''basis villae'') 위에 있으며, pars urbana는 바다를 향하고, 그 바깥쪽 면은 일련의 틈새로 번갈아 가며 배치되어 동상 조각품을 보관하여 단지를 더욱 웅장하게 만들었다.[1] pars urbana에는 또한 여러 개의 ''suspensurae''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욕실(balneum) 또는 개인 스파가 포함되어 있었다.[1]
해안 테라스 안쪽, 주변 언덕 방향에는 빌라의 ''pars fructuaria''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화산석 맷돌 조각과 으깨는 데 사용된 석재 프레스 조각, 현장에서 생산되어 2002년 칼라브리아 고고학 감독국에서 수행한 소규모 발굴 테스트에서 발견된 수많은 운송용 암포라(항아리)에서 알 수 있듯이 올리브와 포도를 가공하는 시설이 있었다.[1]
3. 3. 비잔틴 지배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하면서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테오도시우스의 막내 아들 호노리우스는 서로마 제국을, 장남 아르카디우스는 동로마 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파올라 지역은 중부 이탈리아, 남부 이탈리아 및 소아시아 일부를 포함하는 비잔틴 제국의 소유가 되었다.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제국은 동고트족, 롬바르드족과 이탈리아 영토 지배권을 두고 끊임없이 투쟁했다. 536년까지 비잔틴 제국의 영토는 이탈리아 총독령, 베네치아 공화국, 나폴리 공국, 사르데냐 및 코르시카, 시칠리아 및 칼라브리아 공국으로 축소되었다. 이후 수 세기 동안 비잔틴은 아랍 및 사라센의 침략을 받았고, 그 결과 시칠리아는 아랍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칼라브리아 공국은 이슬람교도들에게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했다. 이 시기에 칼라브리아는 바실리안 수도주의가 성장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시칠리아가 아랍에게 정복당한 후, 수도사들은 위험을 피해 시칠리아를 떠나 칼라브리아, 특히 티레니아 해안을 따라 정착했다.
파올라 지역의 성 바실 수도사, 특히 성 요사팟의 바실리안 수도회는 ''바디아'' 지역에 '''성 요사팟 계곡과 포세의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수도원과 영토 북쪽에 '''대천사 미카엘'''에게 봉헌된 수도원 두 곳을 세웠다. 이들은 ''로라''라고 불리는 유형의 수도원으로, 지역 영주, 종교 권력 등과 협력하여 시민들에게 사회 발전을 위한 존경과 헌신을 얻어 인구를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1110년, 푸스칼도의 영주 로베르토 데 부붐의 아내는 산타 마리아 델레 포세 수도원 수도사들에게 서면 기증을 했다. 이를 통해 수도사들은 수도원 건설에 필요한 재산, 물레방아, 가축, 농부 등을 받았고, 시민들에 대한 노력을 장려하며 복종을 얻으려 했다.[1]
3. 4. 노르만 지배
1000년경 노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전사들이 강력한 드라카르를 타고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오트빌 가문의 윌리엄과 그의 형제 드로고가 이들을 이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지도자들은 시칠리아를 시작으로 비잔틴의 남부 이탈리아 지배권을 빼앗았다. 1050년 로베르토가 칼라브리아에 도착했고, 1057년 그의 형제 로저가 합류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교황청의 반대에 직면하면서 칼라브리아의 주요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치비타테 전투에서 레오 9세가 이끄는 자원군 군대는 전멸했고 교황 자신도 노르만족에게 사로잡혔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도착하면서 모든 정교회 교구가 가톨릭 교구로 전환되었고, 니콜라오 2세는 남부의 새로운 지배자들과 동맹을 맺기로 결정하고 1059년 멜피에서 로베르토 기스카르에게 ''풀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공작''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수여했다. 파올라시는 1110년경 노르만족에게 ''파올라 성'' 건설을 빚지고 있다. 이 요새는 모르타르와 사암을 사용하여 도시를 내려다보는 전략적 위치에 건설되었으며, 파올라 지역을 통과하는 군인들로부터 수도사와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1]
3. 5. 슈바벤-앙주 지배
슈바벤의 프리드리히 2세 치세 동안 칼라브리아는 가장 번영했던 시기 중 하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바실리카타의 멜피에 거주지를 두었고, 코센차 대성당과 성을 건설했으며, 이오니아 해에 로카 임페리알레 요새를 건설했다. 칼라브리아인들은 슈바벤에 충성을 유지했으며, 슈바벤의 콘라딘이 나폴리의 권력을 잡은 앙주의 샤를 1세의 명령으로 살해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파올라도 이 번영의 시기에 혜택을 받았다. 칼라브리아가 슈바벤에서 앙주 통치로 넘어가면서 마을은 점차 성장하여 봉토가 되었고, 루포 가문에 위탁되었다. 1418년 폴리세나 루포는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결혼하여 파올라 지역을 지참금으로 가져왔다. 폴리세나는 1420년 삼촌 중 한 명에게 독살당했고, 밀라노 공작에게 상속자를 남기지 않아 파올라와 그녀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다른 마을은 그녀의 가족에게 돌아갔다. 파올라의 봉토는 폴리세나의 여동생인 코벨라가 조반니 안토니오 마르자노와 결혼할 때 다시 지참금으로 가져왔다. 그들의 결합에서 마리노 마르자노가 태어났고, 그는 나폴리의 아라곤 왕 아라곤의 페란테에게 반역한 혐의로 봉토를 빼앗겼다.3. 6. 아라곤과 프랑스 지배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가 아라곤의 도착과 함께 파올라를 도시 지위로 선포했다. 1283년 상륙 기간 동안, 포세 지역 주민들은 충돌을 피하고자 파올라 성 주변 지역에 참호전을 벌여, 고대 수도원 주변의 균형을 깨뜨렸다. 이로 인해 수도원은 마지막 주민과 수도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쇠퇴했다.1555년 7월 2일, 드라구트 라이스가 이끄는 투르크족이 마을을 포위,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성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미니모 수도사의 수도원을 공격하여 약탈했다. 회복 후, 마을은 칼라브리아의 다른 마을들처럼 계속 존속했지만, 점차 성장하며 중요해졌다.
1806년 10월 18일, 프랑스군이 파올라를 점령했다. 그들은 성 프란치스코 성지를 불태우고 약탈했으며, 성지는 버려진 상태로 남았다. 나폴레옹의 나폴리 왕국에서 1809년 요아킴 뮈라가 발표한 법률에 따라 파올라의 미니모 수도원 프로토-수도원을 포함한 모든 종교 단체가 억압되었다.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은 군사적 용도 등으로 전환되었고, 교회는 교구 사제에게 넘겨졌으며, 모든 성직자 재산이 몰수되었다.
3. 7. 두 시칠리아 왕국과 이탈리아 왕국
빈 회의(1815년) 이후 페르디난도 4세가 나폴리 왕위에 복위되었다. 다음 해에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두 왕국이 통합되어 새로운 두 시칠리아 왕국이 형성되었다. 1844년 페르디난도 2세 국왕과 그의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가 맹세로 파올라를 방문했다. 국왕은 1852년 10월 29일 왕세자 프란체스코와 함께 다시 돌아왔다.리소르지멘토 동안 파올라는 가리발디의 운동에 참여했다. '두 세계의 영웅'은 마을을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부하들인 '가리발디니'는 지나갔다. 니노 빅시오와 자코모 메디치가 지휘하는 군대가 가리발디와 합류하기 위해 나폴리로 향할 때 시에서 도움을 받았다. 1910년 파올라-코센차 철도가 건설되기 전, 파올라 항구는 매우 붐볐고, 나폴리와 메시나에서 온 증기선이 상품과 여행객으로 가득 찼으며 무역이 번성했다. 파시스트 당의 마지막 서기인 카를로 스코르자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4. 주요 명소
파올라는 칼라브리아의 종교 관광 명소 중 하나로, 성 프란치스코의 성소를 비롯하여 바디아, 소테라 교회, 로마 유적, 스코르자 궁전, 파올라 성 등 다양한 명소가 있다. 특히 성 프란치스코의 탄생(3월 27일)과 죽음(4월 2일)을 기념하는 축제가 5월 1일부터 4일까지 열리며, 성인의 '흉상'과 '망토' 행진이 육지와 바다에서 진행된다. 16세기에는 성 프란치스코와 관련된 신자들의 방문으로 도시가 크게 성장하며 건축 및 예술 활동이 활발했다.
성 프란치스코 성소 외에도 파올라에는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명소들이 있다.
- '''요새:''' 노르만-아라곤 성, 블로우 타워, 바디아 타워
- '''고고학 유적지:''' C. 다 쿠투라, 비아 S. 아가타
- '''기타:''' 전몰자 기념비, 성 프란치스코 아치(시 입구), '피시아리디'(피아자 델 포폴로의 기념비적 분수), 시계탑, 수호 성인의 출생지, 계단, 폰타나 델레 세테 칸넬레(일곱 개의 수로 분수), 로체타, 피아자 델 포폴로

4. 1. 성 프란치스코 성소

성 프란치스코의 성소는 도시 윗부분, 이스카 개울에 접해 있고 식물이 풍부한 계곡에 있다. 남부 이탈리아 전역, 특히 성 프란치스코가 수호성인인 칼라브리아에서 순례자들이 찾아온다. 성인의 유해 일부가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나머지는 프랑스 투르에 있음).
성소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고, 가장자리에 성당의 주요 정면이 있다. 주 입구 오른쪽에는 성소 옆으로 이어지는 아치길이 있는데, 이곳에는 2000년에 개장한 대형 현대식 바실리카와 순례자들이 물을 마시는 쿠키아렐라 분수가 있다. 그 옆에는 1943년 8월 영국-미국 폭격 중 성소 옆 개울에 떨어진 불발탄이 있지만 성소에는 피해를 주지 않았다. 계속 가면 악마의 다리와 성인이 젊은 시절 피난처였던 곳이 있는 길이 나온다.
주 입구를 통해 성소에 들어가면 두 개의 초기 반 개방형 방이 나온다. 첫 번째 방에는 16세기와 20세기의 여러 기념일과 성소에서의 사건을 기념하는 여러 개의 명판이 있고, 두 번째 방은 옛 바실리카의 전실이다. 오른쪽에는 바실리카로 가는 문이 있고, 왼쪽에는 개울과 인접한 수도원의 전망이 있으며, 앞으로는 성인의 회랑과 은둔처, 그리고 '복자 니콜라스'의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16세기에 지어진 고대 로마네스크 양식의 바실리카는 크고 다소 휑한 주 홀과 오른쪽의 단일 측면 통로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길을 따라 4개의 작은 예배당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곳에는 파올라에 남아 있는 성 프란치스코의 유물 몇 점, 그의 옷과 뼈 조각이 보관되어 있는 호화로운 바로크 양식의 예배당이 있다.
성소의 회랑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는 성인의 장미 정원이 있는데, 현재는 큰 정원이며 내부 벽을 따라 성인의 삶의 주요 에피소드를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많은 부분이 전설과 관련이 있다. 그 옆에는 성 프란치스코의 은둔처가 있는데, 좁은 지하 공간으로 성인과 그의 형제들을 위한 첫 번째 공동체의 핵을 구성했다. 사원의 종탑은 회랑과 고대 바실리카 사이에 솟아 있다.
4. 2. 기타 명소
성 프란치스코의 성소는 도시 윗부분, 이스카 개울가에 있으며 식물이 울창한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남부 이탈리아 전역, 특히 성 프란치스코가 수호성인인 칼라브리아에서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곳으로, 성인의 유해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 성소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으며, 그 가장자리에 사원의 정면이 있다. 주 입구 오른쪽에는 성소 옆으로 이어지는 아치길이 있는데, 이곳에는 대형 현대식 바실리카(2000년에 개장)와 순례자들이 물을 마시는 쿠키아렐라 분수가 있다. 그 옆에는 1943년 8월 영국-미국 폭격 중 성소 옆 개울에 떨어진 불발탄이 있지만, 성소에는 피해를 주지 않았다. 계속 나아가면 악마의 다리와 성인이 젊은 시절 피난처였던 곳이 있는 길이 나온다.성소 주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두 개의 초기 반 개방형 방이 나온다. 첫 번째 방에는 16세기와 20세기의 여러 기념일과 성소에서의 사건을 기념하는 여러 개의 명판이 있으며, 두 번째 방은 옛 바실리카의 진정한 전실이다. 오른쪽에는 바실리카로 가는 문이 있고, 왼쪽에는 개울과 인접한 수도원의 전망이 있으며, 앞으로는 성인의 회랑과 은둔처, 그리고 '복자 니콜라스'의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16세기에 지어진 고대 로마네스크 양식의 바실리카는 크고 다소 휑한 주 홀과 오른쪽의 단일 측면 통로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길을 따라 4개의 작은 예배당이 있고, 그중 최고점에는 파올라에 남아 있는 성 프란치스코의 유물 몇 점, 그의 옷과 뼈 조각이 보관되어 있는 호화로운 바로크 양식의 예배당이 있다.
성소의 회랑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는 성인의 장미 정원이 있는데, 현재는 큰 정원이며 내부 벽을 따라 성인의 삶의 주요 에피소드를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있으며, 그중 많은 부분이 전설과 관련이 있다. 그 옆에는 성 프란치스코의 은둔처가 있는데, 좁은 지하 공간으로 성인과 그의 형제들을 위한 첫 번째 공동체의 핵을 구성했다. 사원의 종탑은 회랑과 고대 바실리카 사이에 솟아 있다.
기념비적인 분수인 '''일곱 개의 수로 분수'''는 긴 계단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지역 장인의 작품이다. 1636년에 제작되었으며, 공작새의 꼬리를 연상시키는 큰 부채꼴 모양이다. 원래는 12개의 구멍이 있었지만, 현재는 두 개의 팔로 구성되어 있다. 벽에는 일곱 개의 석판이 있고, 그중 일곱 개의 돌 프로토메에서 물이 흘러나와 반원형 분지에 모인다. 돌 방패는 시간이 지나 닳았지만 여전히 온전하며, 공작새의 상징과 16세기 초 파올라를 사들여 약 3세기 동안 통치했던 스피넬리 가문의 문장이 묘사되어 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명소가 있다.
- 소테라 교회
- 카르미네 성모 교회
- 산 미켈레 교회
- 바디아 수도원
- 대성당
- 산탄고스티노 수도원
- 산 자코모 마조레 교회
- 카푸친 수도원
- 산 레오나르도 교회
- 무염시태 교회
- 예수회 수도원
- 로사리오 교회
- 산 프란치스키엘로 교회
- 몬테베르지네 교회
- 은총의 성모 교회
- 아돌로라타 교회
- 산타 마르게리타 교회
- 산 조셉 교회
- 산타 마리아 디 포르토 살보 교회
- 천사의 성모 교회
- 산타 아나 교회
'''요새:'''
'''고고학 유적지:'''
'''기타:'''
- '피시아리디'(피아자 델 포폴로의 기념비적 분수)
- 시계탑
- 수호 성인의 출생지
- 계단
- 폰타나 델레 세테 칸넬레(일곱 개의 수로 분수)
- 로체타(골목, 개구부, 로지아, 아치, 부벽 및 돌 포털을 포함한 모든 특징적인 건축물이 있는 지구)
- 피아자 델 포폴로

4. 3. 요새
파올라의 요새는 다음과 같다.- 노르만-아라곤 성
- 블로우 타워
- 바디아 타워
4. 4. 고고학 유적지
4. 5. 기타
파올라는 칼라브리아의 종교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주요 명소로는 성 프란치스코의 성소, 바디아, 소테라 교회, 로마 유적, 스코르자 궁전, 파올라 성 등이 있다.성 프란치스코의 탄생은 3월 27일에, 그의 죽음은 4월 2일에 기념된다. 성 프란치스코를 기리는 장엄한 축제는 5월 1일부터 4일까지 열리며, 성인의 '흉상'과 '망토'를 육지와 바다에서 여러 차례 행진한다. 2008년 5월 4일, 성 프란치스코의 서거 5주년 기념 행사가 종료되었다.
산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성소 외에도 파올라에는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있다.
- 소테라 교회
- 카르미네 성모 교회
- 산 미켈레 교회
- 바디아 수도원
- 대성당
- 산탄고스티노 수도원
- 산 자코모 마조레 교회
- 카푸친 수도원
- 산 레오나르도 교회
- 무염시태 교회
- 예수회 수도원
- 로사리오 교회
- 산 프란치스키엘로 교회
- 몬테베르지네 교회
- 은총의 성모 교회
- 아돌로라타 교회
- 산타 마르게리타 교회
- 산 조셉 교회
- 산타 마리아 디 포르토 살보 교회
- 천사의 성모 교회
- 산타 아나 교회
요새로는 노르만-아라곤 성, 블로우 타워, 바디아 타워가 있다.
고고학 유적지로는 C. 다 쿠투라, 비아 S. 아가타가 있다.
다음도 언급할 가치가 있다.
- 전몰자 기념비
- 성 프란치스코 아치(시 입구)
- '피시아리디'(피아자 델 포폴로의 기념비적 분수)
- 시계탑
- 수호 성인의 출생지
- 계단
- 폰타나 델레 세테 칸넬레(일곱 개의 수로 분수)
- 로체타
- 피아자 델 포폴로
'''일곱 개의 수로 분수'''
기념비적인 분수인 일곱 개의 수로 분수는 긴 계단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지역 장인의 작품이다. 1636년에 제작되었다. 분수는 공작새의 꼬리를 연상시키며, 파올라의 상징인 큰 부채꼴 모양으로 열린다. 원래는 12개의 구멍이 있었지만, 현재는 두 개의 팔로 구성되어 있으며, 벽에는 일곱 개의 석판이 있고, 그중 일곱 개의 돌 프로토메가 있어 물이 흘러나와 반원형 분지에 모인다.
'''성 프란치스코 성소'''
성 프란치스코의 성소는 도시 윗부분의 계곡에 위치해 있다. 남부 이탈리아 전역, 특히 칼라브리아에서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성인의 유해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
성소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으며, 주 입구 오른쪽에는 성소 옆으로 이어지는 아치길이 있는데, 이곳에는 대형 현대식 바실리카와 순례자들이 물을 마시는 쿠키아렐라 분수가 있다. 그 옆에는 1943년 8월 영국-미국 폭격 중 성소 옆 개울에 떨어진 불발탄이 있다.
16세기에 지어진 고대 로마네스크 바실리카는 크고 다소 휑한 주 홀과 오른쪽의 단일 측면 통로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길을 따라 4개의 작은 예배당이 있고, 그중 최고점에는 파올라에 남아 있는 성 프란치스코의 유물 몇 점이 보관되어 있는 호화로운 바로크 예배당이 있다.
성소의 회랑에는 성인의 장미 정원이 있는데, 내부 벽을 따라 성인의 삶의 주요 에피소드를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그 옆에는 성 프란치스코의 은둔처가 있다.
5. 교통
파올라에는 여러 기반 시설과 연결 노선이 있다. 철도역은 남 티레니아 철도를 따라 있으며, 파올라-코센차 철도와의 환승 지점이다. 파올라는 남북 축을 따라 18번 국도가 통과하며, 여기서 107번 국도가 분기된다. 시내에는 택시, 버스, 시내 서비스와 같은 다양한 교통 수단이 있으며, 요청 시 운행하는 미니버스 서비스도 있다.
6. 자매 도시
참조
[1]
웹사이트
Tavola: Popolazione residente - Cosenza (dettaglio loc. abitate) - Censimento 2001.
http://dawinci.istat[...]
2015-07-31
[2]
웹사이트
Tavola: Superficie territoriale (Kmq) - Cosenza (dettaglio comunale) - Censimento 2001.
http://dawinci.istat[...]
2015-07-31
[3]
웹사이트
Total Resident Population on 1st January 2018 by sex and marital status
http://demo.istat.it[...]
2019-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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