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콘라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콘라딘은 1254년 아버지 콘라트 4세의 사망으로 시칠리아와 예루살렘의 왕으로 인정받았으나, 로마 왕으로는 선출되지 못했다. 그는 삼촌 루이 2세의 후견을 받으며 성장했고, 1262년 슈바벤 공국을 차지했다. 1266년 삼촌 만프레디가 패배하자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했으나, 1268년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패배하고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의 죽음으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단절되었으며, 그의 유산은 상속 분쟁으로 이어졌다. 콘라딘은 19세기와 20세기 초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252년 출생 - 이혼 (고려)
    이혼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과거 급제 후 충렬왕과 충선왕 대에 여러 요직을 거쳐 도첨의정승까지 올랐으며 충선왕의 신임을 받아 관제 개정에 참여했고 사후 문장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신성 로마 제국 사람 -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는 1483년 독일에서 태어난 신학자이자 종교 개혁가로, '오직 믿음으로' 칭의 교리를 확립하고 95개 논제를 발표하여 종교 개혁을 촉발했으며, 독일어 성경 번역과 성직자 결혼 허용에 기여했으나 후기에는 반유대주의적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 신성 로마 제국 사람 - 만프레디
    만프레디는 프리드리히 2세의 사생아로 타란토 공으로 임명되었으며,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하여 교황권에 대항하다가 앙주의 샤를 1세에게 패배하여 사망했고,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며 만프레도니아를 건설했다.
  • 1268년 사망 - 김준 (고려 후기)
    김준은 최충헌 가노의 아들로 최씨 정권 붕괴 후 권력을 잡았으나 몽골과의 전쟁 지속을 주장하며 부패를 초래했고, 임연에게 살해당하면서 무신정권 붕괴를 가져왔다.
  • 1268년 사망 - 교황 클레멘스 4세
    클레멘스 4세는 프랑스 출신 법률가로 교황(재위: 1265년 ~ 1268년)이 되었으며, 시칠리아 왕국 분쟁 개입, 토마스 아퀴나스 후원, 로저 베이컨에게 《대저작》 집필 지시 등 학문 장려에 힘썼다.
콘라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콘라딘 왕
"마네세 필사본의 삽화, 콘라딘 왕"
독일어Konradin
이탈리아어Corradino
왕위
예루살렘 왕1254년 5월 21일 – 1268년 10월 29일
전임자콘라트 2세
후임자위그 1세
시칠리아 왕1254년 5월 21일 – 1268년 10월 29일
전임자콘라트 1세
후임자카를로 1세
슈바벤 공작1254년 5월 21일 – 1268년 10월 29일
전임자콘라트 3세
후임자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2세 (명목상)
개인 정보
출생일1252년 3월 25일
출생지신성 로마 제국, 바이에른, 란츠후트 인근 볼프슈타인 성
사망일1268년 10월 29일 (향년 16세)
사망지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메르카토 광장
매장지나폴리,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교회
가문
왕가호엔슈타우펜 가문
아버지콘라트 4세
어머니엘리자베트 폰 바이에른

2. 초기 생애

콘라딘은 볼프슈타인 바이에른에서 콘라트 4세와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태어났다.[1] 1254년 호엔슈타우펜 지지자들에 의해 시칠리아와 예루살렘의 왕으로 인정받았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마-게르만 왕이 되지는 못했다.

1254년 아버지를 잃은 그는 삼촌이자 후견인인 바이에른 공작 루이 2세의 궁정에서 성장했다.[1] 예루살렘키프로스 왕가의 친척이 섭정으로 지배했다.

"압살롬처럼 아름다웠고, 훌륭한 라틴어를 구사했다"는 기록 외에 그의 외모와 성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1] 아버지가 그를 교회의 후견에 맡겼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콘라딘의 로마-게르만 왕 선출을 금지하고, 독일의 호엔슈타우펜 영지를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에게 제안했다.[1][2][3]

2. 1. 출생과 가족 배경

콘라딘은 볼프슈타인 바이에른에서 콘라트 4세와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태어났다.[1] 1254년 아버지를 잃은 그는 삼촌이자 후견인인 바이에른 공작 루이 2세의 궁정에서 성장했다.[1] 그의 후견인들은 그를 위해 슈바벤을 지킬 수 있었다. 시칠리아에서는 아버지의 이복 형제인 만프레디가 계속 섭정을 맡았지만, 왕위를 찬탈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의 외모와 성격에 대해서는 "압살롬처럼 아름다웠고, 훌륭한 라틴어를 구사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1]

2. 2. 유년기와 섭정

콘라딘은 볼프슈타인 바이에른에서 콘라트 4세와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태어났다.[1] 1254년 아버지를 잃은 그는 삼촌이자 후견인인 바이에른 공작 루이 2세의 궁정에서 성장했다.[1] 그의 후견인들은 그를 위해 슈바벤을 지킬 수 있었다. 예루살렘키프로스 왕가의 친척이 섭정으로 지배했다. 시칠리아에서는 아버지의 이복 형제인 만프레디가 계속 섭정을 맡았지만, 왕위를 찬탈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1]

그의 외모와 성격에 대해서는 "압살롬처럼 아름다웠고, 훌륭한 라틴어를 구사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1] 아버지가 그를 교회의 후견에 맡겼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콘라딘의 로마-게르만 왕 선출을 금지하고, 독일의 호엔슈타우펜 영지를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에게 제안했다.[1][2][3]

3. 정치 및 군사 경력

콘라딘은 아버지 콘라트 4세가 죽자 시칠리아 왕위를 계승했지만, 로마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했고, 신성 로마 제국대공위 시대를 맞이했다.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외삼촌인 바이에른 공작 겸 라인 궁정 백작 루트비히 2세의 보호를 받았다.

1266년, 아버지 쪽 삼촌 만프레디가 베네벤토 전투에서 패사하자, 콘라딘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샤를 1세와 싸웠지만, 1268년 8월 23일 탈리아코초 전투( Battaglia di Tagliacozzoit)에서 패배했다. 한때 황제파가 많았던 피사로 도망치려 했지만, 아스투라에서 체포되어 유폐되었다. 그 후 나폴리로 이송되어 10월 29일, 바덴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 등 7명과 함께 사형 집행인도메니코 푼초의 손에 의해 메르카토 광장에서 참수되었으며, 그의 죽음으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4][2][3]

3. 1. 슈바벤 공작 즉위와 이탈리아 원정

예루살렘 왕과 시칠리아 왕 칭호를 얻은 콘라딘은 1262년 슈바벤 공국을 차지했고 한동안 공국에 머물렀다.[1] 1266년, 교황 클레멘스 4세의 부름을 받은 앙주의 샤를 1세가 베네벤토 전투에서 만프레디를 격파하고 살해하여 이탈리아 남부를 차지하자, 기벨린 도시들의 사절단은 바이에른으로 가서 콘라딘에게 이탈리아를 구원하러 올 것을 촉구했다.[1] 로마의 상원 의원 카스티야의 헨리 백작이 그에게 영원한 도시의 지원을 제안했고, 콘라딘은 자신의 영지를 담보로 알프스 산맥을 건너 베로나에서 시칠리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담은 선언문을 발표했다.[1]

삼촌인 루이와 독일로 돌아간 다른 동료들의 이탈, 클레멘스 4세의 위협, 자금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의는 번창하는 듯했다.[1] 그는 시칠리아 왕을 선포했고, 카스티야의 헨리 공자를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은 이탈리아 북부와 남부에서 무기를 들었다. 로마는 그의 사절을 열정적으로 맞이했고, 젊은 왕은 파비아, 피사, 시에나에서 환영을 받았다. 1267년 9월, 카스티야의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스페인 함대와 피사 출신의 기사단, 튀니스에서 온 스페인 기사들이 시칠리아 도시 샤카에 상륙했고, 섬의 대부분이 앙주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팔레르모메시나만이 샤를에게 충성했다. 반란은 칼라브리아와 풀리아로 번졌다. 같은 해 11월, 교황은 그를 파문했다. 그의 함대는 앙주의 샤를 1세의 함대에 승리했고, 1268년 7월, 콘라딘은 대중의 환영을 받으며 로마에 입성했다.[1]

조반니 빌라니의 "누오바 크로니카"에 묘사된 14세기 콘라딘 처형


그는 병력을 강화한 후, 할아버지 시대부터 그곳에 정착한 사라센[1] 군대를 합류하기 위해 루체라로 진군했다. 1268년 8월 23일, 이탈리아, 스페인, 로마, 아랍, 독일 군인들로 구성된 그의 다국적 군대는 이탈리아 중부의 언덕 지역인 탈리아코초에서 샤를의 군대와 맞붙었다. 콘라딘 군대의 열정, 특히 앙주의 깃발을 탈환하며 승리의 돌격을 감행한 카스티야의 헨리 왕자가 이끄는 스페인 기사단의 열정은 처음에는 승리를 확정하는 듯했다. 그러나 샤를의 전술을 간파하지 못한 그들은 샤를의 군대 정예 부대인 언덕 뒤에 숨겨둔 베테랑 프랑스 기사단이 적의 기습으로 전투에 참여하면서 결국 패배했다. 전투에서 탈출한 콘라딘은 로마에 도착했지만, 도시를 떠나라는 조언에 따라 시칠리아로 항해하기 위해 아스투라로 향했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는 체포되어 나폴리의 오보 성에 갇혔고, 떼려야 뗄 수 없는 바덴의 프리드리히와 함께 갇혔다. 1268년 10월 29일 콘라딘과 프리드리히는 참수되었다.[4][2][3]

3. 2. 로마 입성과 교황의 파문

1266년, 교황 클레멘스 4세의 부름을 받은 앙주의 샤를 1세가 베네벤토 전투에서 만프레디를 격파하고 살해하여 이탈리아 남부를 차지하자, 기벨린 도시들의 사절단은 바이에른으로 가서 콘라딘에게 이탈리아를 구원하러 올 것을 촉구했다. 로마의 상원 의원 카스티야의 헨리 백작이 그에게 영원한 도시의 지원을 제안했다. 콘라딘은 자신의 영지를 담보로 알프스 산맥을 건너 베로나에서 시칠리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담은 선언문을 발표했다.[1]

삼촌인 루이와 독일로 돌아간 다른 동료들의 이탈, 클레멘스 4세의 위협, 자금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의는 번창하는 듯했다.[1] 그는 시칠리아 왕을 선포했고, 카스티야의 헨리 공자를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은 이탈리아 북부와 남부에서 무기를 들었다. 로마는 그의 사절을 열정적으로 맞이했고, 젊은 왕은 파비아, 피사, 시에나에서 환영을 받았다. 1267년 9월, 카스티야의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스페인 함대와 피사 출신의 기사단, 튀니스에서 온 스페인 기사들이 시칠리아 도시 샤카에 상륙했고, 섬의 대부분이 앙주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팔레르모메시나만이 샤를에게 충성했다. 반란은 칼라브리아와 풀리아로 번졌다. 같은 해 11월, 교황은 그를 파문했다.[1] 그의 함대는 앙주의 샤를 1세의 함대에 승리했고, 1268년 7월, 콘라딘은 대중의 환영을 받으며 로마에 입성했다.

3. 3. 탈리아코초 전투와 패배

1266년, 만프레디가 베네벤토 전투에서 패사하자 이탈리아에 침공하여, 샤를 1세와 싸웠지만, 1268년 8월 23일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패배했다.[1] 한때 황제파가 많았던 피사로 도망치려 했지만, 토레 아스투라에서 체포되어 유폐되었다.[1]

그 후 나폴리로 이송되어 10월 29일, 바덴 변경백프리드리히 1세 등 7명과 함께 사형 집행인도메니코 푼초의 손에 의해 메르카토 광장에서 참수되었으며, 그의 죽음으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4][2][3]

1351년, 참수형이 집행된 장소에 산타 크로체 알 메르카토 교회가 세워졌다.

3. 4. 체포와 처형

콘라딘은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한때 황제파가 많았던 피사로 도망치려 했지만, 토레 아스투라에서 체포되어 유폐되었다.[1] 그 후 나폴리로 이송되어 오보 성에 갇혔고, 바덴의 프리드리히와 함께 갇혔다. 1268년 10월 29일, 바덴 변경백프리드리히 1세 등 7명과 함께 사형 집행인도메니코 푼초의 손에 의해 메르카토 광장에서 참수되었으며, 그의 죽음으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4][2][3]

1351년, 참수형이 집행된 장소에 가 세워졌다.

조반니 빌라니의 "누오바 크로니카"에는 14세기 콘라딘 처형에 대한 내용이 묘사되어있다.

템플릿을 제거하였다.

4. 유산 및 평가

콘라딘의 죽음으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직계 남성 혈통은 단절되었다.[5] 그의 유해는 바덴의 프리드리히와 함께 나폴리의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수도원 교회에 안치되었으며, 1847년 바이에른의 황태자 막시밀리안은 베르텔 토르발센이 조각한 대리석 조각상을 세웠다. 하이델베르크에 보존된 중세 독일 가사 모음집인 14세기 ''마네세 코덱스''에는 콘라딘이 쓴 두 곡의 노래가 실려 있으며, 그의 운명은 여러 드라마의 주제가 되었다.[1]

콘라딘 사후, 그의 상속 영지였던 예루살렘 왕국은 증조모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1세의 상속인들 사이에서 계승 분쟁이 일어났다. 브리엔의 휴가 장자 상속권을 주장했지만, 키프로스의 휴 3세가 이미 섭정을 맡아 예루살렘 왕국을 유지했다.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도 혈연을 근거로 권리를 주장했고, 이는 후에 콘라딘을 처형한 앙주의 샤를에게 넘어갔다.

시칠리아 왕국슈바벤 공국의 상속권은 고모 마르가레트와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에게 있었으나, 실제 권력은 앙주의 샤를에게 있었다. 슈바벤은 콘라딘이 마지막 원정 전에 저당잡혀 영토 단위로 붕괴되었고, 시칠리아 만종 이후 시칠리아 섬은 만프레드의 아라곤 상속인이, 이탈리아 남부는 앙주 측이 차지하며 분열되었다.[2][3]

콘라딘은 19세기와 20세기 초 예술 작품의 소재로 자주 등장했다. 펠리시아 헤먼스는 1824년에 "콘라딘의 죽음"을, 찰스 스웨인은 1832년에 "콘라딘"을 썼다. C. R. 애쉬비는 1908년에 ''콘라딘: 철학적 발라드''를 출판했다. 칼 리스티키비의 소설 ''Põlev lipp'' (''불타는 깃발'') (1961)는 콘라딘의 이탈리아 원정을 묘사한다.

4. 1.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몰락

베르텔 토르발센의 기념상


16세의 콘라딘이 죽으면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직계(남성)는 단절되었다.[5] 그의 유해는 바덴의 프리드리히와 함께 그의 어머니가 그의 영혼을 위해 세운 나폴리의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수도원 교회에 안치되어 있다. 1847년에는 바이에른의 황태자 막시밀리안이 그의 기념비를 위해 베르텔 토르발센이 조각한 대리석 조각상을 세웠다. 하이델베르크에 보존되어 있는 중세 독일 가사의 모음집인 14세기 ''마네세 코덱스''에는 콘라딘이 쓴 두 곡의 노래가 실려 있으며, 그의 운명은 여러 드라마의 주제가 되었다.[1]

그의 상속 영지인 예루살렘 왕국은 그의 증조모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1세의 상속인에게 넘어갔으며, 그들 사이에서 계승 분쟁이 일어났다. 장자 상속에서 선임 상속인은 콘라딘의 아버지의 사촌인 브리엔의 휴였지만, 또 다른 사촌 키프로스의 휴 3세는 이미 섭정직을 맡고 있었고 예루살렘의 휴 1세로서 왕국을 유지했다. 콘라딘의 할머니의 사촌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는 또한 혈연의 근친성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고, 나중에 콘라딘을 처형한 앙주의 샤를에게 팔았다.

1266년, 부친 쪽 삼촌 만프레디가 패사하자 이탈리아에 침공하여, 샤를 1세와 싸웠지만, 1268년 8월 23일에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패배했다. 한때 황제파가 많은 피사로 도망치려 했지만, 토레 아스투라에서 체포되어 유폐되었다.

그 후 나폴리로 이송되어 10월 29일, 바덴 변경백프리드리히 1세 등 7명과 함께 사형 집행인도메니코 푼초의 손에 의해 메르카토 광장에서 참수되었으며, 그의 죽음으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1351년, 참수형이 집행된 장소에 산타 크로체 알 메르카토 교회가 세워졌다.

4. 2. 문화적 영향



16세의 콘라딘이 죽으면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직계(남성)는 단절되었다.[5] 그의 유해는 바덴의 프리드리히와 함께 그의 어머니가 그의 영혼을 위해 세운 나폴리의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수도원 교회에 안치되어 있다. 1847년에는 바이에른의 황태자 막시밀리안이 그의 기념비를 위해 베르텔 토르발센이 조각한 대리석 조각상을 세웠다. 하이델베르크에 보존되어 있는 중세 독일 가사의 모음집인 14세기 ''마네세 코덱스''에는 콘라딘이 쓴 두 곡의 노래가 실려 있으며, 그의 운명은 여러 드라마의 주제가 되었다.[1]

그의 상속 영지인 예루살렘 왕국은 그의 증조모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1세의 상속인에게 넘어갔으며, 그들 사이에서 계승 분쟁이 일어났다. 장자 상속에서 선임 상속인은 콘라딘의 아버지의 사촌인 브리엔의 휴였지만, 또 다른 사촌 키프로스의 휴 3세는 이미 섭정직을 맡고 있었고 예루살렘의 휴 1세로서 왕국을 유지했다. 콘라딘의 할머니의 사촌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는 또한 혈연의 근친성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고, 나중에 콘라딘을 처형한 앙주의 샤를에게 팔았다.

엄격한 정통성을 기준으로 볼 때 그의 시칠리아 왕국슈바벤 공국의 일반적인 상속인은 그의 고모 마르가레트였으며, 그의 아버지 콘라트 4세의 이복 여동생(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세 번째 부인 이사벨라 잉글랜드 사이의 막내이자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녀)이었으며, 1255년부터 튀링겐의 영지백 알베르트와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 프리드리히는 그녀의 권리에 따라 시칠리아와 슈바벤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거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콘라딘이 마지막 원정 전에 저당 잡았던 슈바벤은 영토 단위로 붕괴되고 있었다. 그는 아우트르메르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앙주의 샤를은 남부 이탈리아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변경백 프리드리히는 1269년 이탈리아 침공을 제안했고, 롬바르디아 기벨린 세력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지지를 얻었지만, 그의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이탈리아 문제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시칠리아는 앙주의 샤를에게 넘어갔지만, 1282년 시칠리아 만종으로 인해 왕국에 대한 이중적인 주장이 발생했다. 만프레드의 아라곤 상속인은 시칠리아 섬을 유지했고, 앙주 측은 이탈리아 남부를 유지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나폴리 왕국이라고 불렸다.[2][3]

콘라딘은 19세기와 20세기 초 예술적 해석의 대상이었다. 여러 그림과 문학 작품, 특히 시에서 그의 군사 작전과 처형을 묘사했다. "불타는 갑판 위에 서 있던 소년"으로 가장 잘 알려진 펠리시아 헤먼스는 1824년에 "콘라딘의 죽음"을 썼다. 찰스 스웨인은 1832년에 "콘라딘"을 썼는데, 이 시는 저스틴 헨리 루빈의 "독주 피아노를 위한 3개의 음색시"의 첫 번째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6] ''콘라딘: 철학적 발라드''는 C. R. 애쉬비가 그의 후원자이자 친구인 콜로넬 쇼 헬리어에게 헌정하여 1908년 "미술 공예 운동" 기간 동안 활동한 "가장 중요한 개인 인쇄소 중 하나"인 에섹스 하우스 프레스에서 출판되었다.[7]

칼 리스티키비의 소설 ''Põlev lipp'' (''불타는 깃발'') (1961; 에스토니아어로)는 콘라딘의 이탈리아 원정을 묘사한다. 장 파스칼 올리브리의 프랑스어 번역은 ''L'étendard en flammes''라는 제목으로 2005년 파리에서 출판되었다.[8]

5. 시칠리아 및 예루살렘 왕위 계승



16세의 콘라딘이 죽으면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직계(남성)는 단절되었다.[5] 그의 유해는 바덴의 프리드리히와 함께 그의 어머니가 그의 영혼을 위해 세운 나폴리의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수도원 교회에 안치되어 있다. 1847년에는 바이에른의 황태자 막시밀리안이 그의 기념비를 위해 베르텔 토르발센이 조각한 대리석 조각상을 세웠다.[1]

그의 상속 영지인 예루살렘 왕국은 그의 증조모 예루살렘의 이사벨라 1세의 상속인에게 넘어갔으며, 그들 사이에서 계승 분쟁이 일어났다. 장자 상속에서 선임 상속인은 콘라딘의 아버지의 사촌인 브리엔의 휴였지만, 또 다른 사촌 키프로스의 휴 3세는 이미 섭정직을 맡고 있었고 예루살렘의 휴 1세로서 왕국을 유지했다. 콘라딘의 할머니의 사촌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는 또한 혈연의 근친성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고, 나중에 콘라딘을 처형한 앙주의 샤를에게 팔았다.

엄격한 정통성을 기준으로 볼 때,[5] 그의 시칠리아 왕국슈바벤 공국의 일반적인 상속인은 그의 고모 마르가레트였으며, 그의 아버지 콘라트 4세의 이복 여동생(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세 번째 부인 이사벨라 잉글랜드 사이의 막내이자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녀)이었으며, 1255년부터 튀링겐의 영지백 알베르트와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 프리드리히는 그녀의 권리에 따라 시칠리아와 슈바벤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거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콘라딘이 마지막 원정 전에 저당 잡았던 슈바벤은 영토 단위로 붕괴되고 있었다. 그는 아우트르메르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앙주의 샤를은 남부 이탈리아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변경백 프리드리히는 1269년 이탈리아 침공을 제안했고, 롬바르디아 기벨린 세력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지지를 얻었지만, 그의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이탈리아 문제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시칠리아는 앙주의 샤를에게 넘어갔지만, 1282년 시칠리아 만종으로 인해 왕국에 대한 이중적인 주장이 발생했다. 만프레드의 아라곤 상속인은 시칠리아 섬을 유지했고, 앙주 측은 이탈리아 남부를 유지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나폴리 왕국이라고 불렸다.[2][3]

참조

[1] EB1911
[2] 서적 Sicily: Three Thousand Years of Human History - 7 - Hohenstaufens https://books.google[...] Steerforth Press 2010-04-20
[3] 서적 Medieval Italy: 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4-08-02
[4] 서적 Die Hinrichtung Konradins von Hohenstaufen – Reaktionen der Zeitgenossen und Rezeption der Nachwelt https://www.grin.com[...] Grin 2011-10-19
[5] 서적 History of the City of Rome in the Middle Ag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6] 웹사이트 https://www.d.umn.ed[...]
[7] 웹사이트 Assessment of The Essex House Press collection, Court Barn Museum https://www.conserva[...] 2023-11-17
[8] Webarchive L'étendard en flammes http://www.passiondu[...] Alvik 2016-06-0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