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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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피아니스트로,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른팔을 잃은 후 왼손만을 위한 피아노 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벤저민 브리튼, 모리스 라벨 등 당대 유명 작곡가들에게 왼손만을 위한 곡을 위촉하여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척했으며,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그의 대표적인 위촉 작품으로 꼽힌다.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시민권을 얻었으며, 1961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그가 위촉한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피아노 레퍼토리로 연주되고 있으며, 음악적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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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비트겐슈타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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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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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파울 비트겐슈타인 (Paul Wittgenstein) |
출생 | 1887년 11월 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 |
사망 | 1961년 3월 3일, 미국 뉴욕 |
직업 | 음악가 |
악기 | 피아노 |
2. 초기 생애 및 교육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의 사업가 카를 비트겐슈타인과 레오폴디네 마리아 요제파 칼무스의 넷째 아들로 빈에서 태어났다.[1][2] 그는 가톨릭 신자로 자랐으며, 그의 조부모 중 세 명은 성인이 되어 유대교에서 개종했다. 그의 아버지 쪽 할머니만이 유대계 혈통이 없었다.[1][2] 그의 동생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2년 후에 태어났다.
이 집에는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 구스타프 말러, 요제프 라보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저명한 문화계 인사들이 자주 방문했으며, 어린 파울은 그들과 듀엣을 연주했다. 그의 할머니 파니 비트겐슈타인은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의 사촌이었으며, 그녀는 그를 입양하여 펠릭스 멘델스존에게 배우도록 라이프치히로 데려갔다.
그는 말빈 브레(러시아어판)에게, 나중에 폴란드의 거장 테오도르 레셰티츠키에게 사사했다. 1913년에 데뷔하여, 그 연주 평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파울은 소집되었다. 그는 폴란드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러시아 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이 부상으로 인해, 오른팔은 절단해야만 했다.
2. 1. 가족 배경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의 사업가 카를 비트겐슈타인과 레오폴디네 마리아 요제파 칼무스의 넷째 아들로 빈에서 태어났다.[1][2] 그는 가톨릭 신자로 자랐으며, 그의 조부모 중 세 명은 성인이 되어 유대교에서 개종했다. 그의 아버지 쪽 할머니만이 유대계 혈통이 없었다.[1][2] 그의 동생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2년 후에 태어났다.이 집에는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 구스타프 말러, 요제프 라보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저명한 문화계 인사들이 자주 방문했으며, 어린 파울은 그들과 듀엣을 연주했다. 그의 할머니 파니 비트겐슈타인은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의 사촌이었으며, 그녀는 그를 입양하여 펠릭스 멘델스존에게 배우도록 라이프치히로 데려갔다.
2. 2. 음악 교육
3. 제1차 세계 대전과 오른팔 절단
1913년에 데뷔하여 연주 평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에 징집되었다. 동부 전선 폴란드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부상으로 인해 오른팔을 절단해야 했다. 상처가 회복되면서, 그는 왼팔만으로 연주 활동을 계속할 결심을 굳혔다.
3. 1. 전투 중 부상
3. 2. 포로 생활과 결심
4. 왼손 피아니스트로서의 경력
그는 시베리아 옴스크의 포로 수용소에서 회복하는 동안 왼손만 사용하여 경력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덴마크 대사를 통해 그는 눈이 먼 그의 옛 스승 요제프 라보르에게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써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라보르는 이미 작품을 시작했다고 말하며 즉시 응답했다. 전쟁이 끝난 후 비트겐슈타인은 강도 높게 공부하며 왼손을 위한 곡들을 편곡하고 라보르가 그를 위해 쓴 새로운 곡을 배웠다. 그는 다시 콘서트를 시작했다. 많은 리뷰는 그가 팔 하나를 가진 사람이 연주하기에는 매우 훌륭하다는 내용으로 언급되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더 유명한 작곡가들에게 접근하여 그를 위해 연주할 곡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벤저민 브리튼, 파울 힌데미트, 알렉상드르 탕스만,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카를 바이글, 프란츠 슈미트, 세르게이 보르트키에비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모두 그를 위해 곡을 만들었다. 모리스 라벨은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썼고, 이 곡은 비트겐슈타인이 영감을 준 다른 어떤 곡보다 더 유명해졌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초연을 위해 악보를 변경하자 라벨은 격분했고 두 사람은 화해하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의뢰한 모든 곡을 연주하지는 않았다. 그는 프로코피예프에게 그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연주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프로코피예프가 나를 위해 쓴 협주곡조차도 아직 연주하지 못했는데, 작품의 내적 논리가 내게 명확하지 않고, 물론 그것이 명확해질 때까지 연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힌데미트의 ''오케스트라가 있는 피아노 음악'' 작품 29번을 완전히 거부했다. 그는 그 악보를 서재에 숨겨두었고, 2002년 미망인이 사망한 후에야 발견되었다(그때는 힌데미트 본인이 사망한 지 39년이 지난 후였다). 그는 작곡가와의 계약에 자신이 생존하는 동안 해당 작품에 대한 독점적인 공연권을 갖는다는 조항을 삽입했기 때문에 이러한 접근 방식을 취할 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이 의뢰한 많은 곡들은 오늘날 양손 피아니스트들에 의해 여전히 자주 연주된다. 특히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 프리드리히 뷔러는 작곡가의 승인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의 반대에 부딪혀 프란츠 슈미트의 비트겐슈타인이 영감을 준 왼손 작품을 양손으로 편곡했다. 레온 플라이셔 (결국 오른손의 능력을 회복했지만)와 주앙 카를루스 마르틴스와 같이 비트겐슈타인 이후에 태어나 어떤 이유로든 오른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된 피아니스트들도 그를 위해 작곡된 작품을 연주했다.
연주자로서 비트겐슈타인의 사후 평가는 엇갈린다. 알렉산더 보그는 1928년과 1934년 사이에 비트겐슈타인이 "뛰어난 기술과 섬세함을 가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였지만 그의 연주는 점점 더 "가혹하고 서투르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그를 한 번 초대한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들은 그를 다시 초청하는 것을 거의 꺼렸다. 그가 권한 없이 자신이 의뢰한 작품을 변경하고 다시 쓰는 경향 또한 그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음악적 지위에 기여했다.
4. 1. 새로운 레퍼토리 개발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시베리아 옴스크의 포로 수용소에서 회복하는 동안 왼손만으로 연주 경력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레퍼토리 개발에 힘썼다. 그는 눈이 먼 옛 스승 요제프 라보르에게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써달라고 요청했고, 라보르는 이미 작품을 시작했다는 답신을 보냈다. 전쟁 후, 비트겐슈타인은 왼손을 위한 곡들을 편곡하고 라보르가 작곡한 새로운 곡을 배우며 다시 콘서트를 시작했다.비트겐슈타인은 더 유명한 작곡가들에게도 왼손 연주곡을 의뢰했다. 벤저민 브리튼, 파울 힌데미트, 알렉상드르 탕스만,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카를 바이글, 프란츠 슈미트, 세르게이 보르트키에비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이 그를 위해 곡을 작곡했다. 특히 모리스 라벨은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이 곡은 비트겐슈타인이 영감을 준 다른 어떤 곡보다 유명해졌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초연을 위해 악보를 변경하자 라벨은 격분했고, 둘은 화해하지 못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의뢰한 모든 곡을 연주하지는 않았다.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이해하지 못해 연주하지 않았고, 힌데미트의 ''오케스트라가 있는 피아노 음악'' 작품 29번은 완전히 거부하여 미망인이 사망한 2002년이 되어서야 발견되었다. 그는 작곡가와의 계약을 통해 자신이 생존하는 동안 해당 작품에 대한 독점적인 공연권을 갖도록 했다.
비트겐슈타인이 의뢰한 많은 곡들은 오늘날 양손 피아니스트들에 의해 여전히 자주 연주된다. 프리드리히 뷔러는 프란츠 슈미트의 왼손 작품을 양손으로 편곡하기도 했고, 레온 플라이셔와 주앙 카를루스 마르틴스와 같이 오른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된 피아니스트들도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작곡된 작품을 연주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후 평가는 엇갈린다. 뛰어난 기술과 섬세함을 가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였지만, 그의 연주가 점점 가혹하고 서투르게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자신이 의뢰한 작품을 권한 없이 변경하고 다시 쓰는 경향도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4. 2. 주요 위촉 작품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른팔을 잃은 후, 왼손만으로 연주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많은 작곡가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그는 덴마크 대사를 통해 그의 스승이었던 요제프 라보르에게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써달라고 요청했고, 라보르는 이미 작품을 시작했다는 답신을 보냈다.전쟁이 끝난 후, 비트겐슈타인은 왼손 연주 기법을 연마하고 라보르의 곡을 연습하며 콘서트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벤저민 브리튼, 파울 힌데미트, 알렉상드르 탕스만,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카를 바이글, 프란츠 슈미트, 세르게이 보르트키에비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유명 작곡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모리스 라벨은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의뢰한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곡이 되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초연을 위해 악보를 변경하자 라벨은 격분했고, 둘의 관계는 틀어졌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의뢰한 모든 곡을 연주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이해하지 못해 연주하지 않았고, 파울 힌데미트의 ''관현악을 동반한 피아노 음악''은 아예 거부하고 악보를 숨기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이 의뢰한 작품에 대해 생존 시 독점적인 공연권을 가지는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죽거나 더 이상 연주하지 않을 때까지는 의뢰한 작품들이 자신에게 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이 의뢰한 작품 중 많은 곡은 오늘날 양손 피아니스트들에 의해 연주된다. 프리드리히 뷔러는 프란츠 슈미트의 왼손 작품을 양손으로 편곡하여 연주하기도 했다.
다음은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의뢰한 주요 작품 목록이다.
- 모리스 라벨: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피아노 협주곡 (왼손을 위한) Op.17
- 프란츠 슈미트: (왼손을 위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베토벤 주제에 의한 협주적 변주곡 (1923년), (왼손을 위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내림 마장조 (1934년)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가정 교향곡 여록, 판 아테나 신의 대축제 Op.74 (왼손 피아노와 관현악)
- 파울 힌데미트: 관현악을 동반한 피아노 음악 (왼손을 위한) Op.29 (1923년) (비트겐슈타인은 연주하지 않음)
- 벤자민 브리튼: 주제와 변주 (디버전스) Op.21 (왼손 피아노와 관현악) (비트겐슈타인이 가장 높이 평가한 작품)
-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4번 (비트겐슈타인은 연주하지 않음)
5. 나치 박해와 망명
비트겐슈타인 가문은 아버지 쪽으로는 3대, 어머니 쪽으로는 2대 전에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주로 유대인 혈통이었고, 뉘른베르크법에 따라 유대인으로 분류되었다.[3] 나치당의 집권과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파울은 누나 헤르미네와 헬레네(당시 69세와 64세)에게 빈을 떠나라고 설득했지만, 그들은 그곳의 집에 애착을 갖고 있었고, 그들처럼 저명한 가문이 정말 위험에 처해 있다고 믿을 수 없었다. 루드비히는 이미 몇 년 동안 영국에서 살고 있었고, 마가렛(그레틀)은 미국인과 결혼한 상태였다. 파울 자신은 나치 정권 하에서 더 이상 공개 콘서트를 할 수 없게 되자 1938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그레틀과 함께, 루드비히(1939년에 영국 국적을 취득)의 도움을 받아 가족 재산(대부분 해외에 보관)과 법적 연줄을 이용하여 누이들의 비유대인 지위를 얻는 데 성공했다.
가문의 재정 포트폴리오는 독일과 점령지에 있는 재산 및 기타 자산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가치는 약 60억 달러였으며, 이는 유럽에서 가장 큰 개인 재산이었을 것이다. 사실상 모든 가족 자산은 나치에게 넘겨졌고, 그 대가로 두 누이는 인종법에 대한 예외적인 해석에 따라 보호받아 빈의 가족 궁전에서 계속 살 수 있었다.
5. 1. 나치의 위협
비트겐슈타인 가문은 아버지 쪽으로는 3대, 어머니 쪽으로는 2대 전에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뉘른베르크법에 따라 유대인으로 분류되었다.[3] 나치당의 집권과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파울은 누나 헤르미네와 헬레네에게 빈을 떠나라고 설득했지만, 그들은 그곳 집에 애착을 갖고 있었고, 저명한 가문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거절했다. 루드비히는 이미 영국에서 살고 있었고, 마가렛(그레틀)은 미국인과 결혼한 상태였다. 파울 자신은 나치 정권 하에서 더 이상 공개 콘서트를 할 수 없게 되자 1938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그레틀과 함께, 루드비히(1939년에 영국 국적을 취득)의 도움을 받아 가족 재산(대부분 해외에 보관)과 법적 연줄을 이용하여 누이들의 비유대인 지위를 얻는 데 성공했다.가문의 재정 포트폴리오는 독일과 점령지에 있는 재산 및 기타 자산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가치는 약 60억 달러였으며, 이는 유럽에서 가장 큰 개인 재산이었을 것이다. 사실상 모든 가족 자산은 나치에게 넘겨졌고, 그 대가로 두 누이는 인종법에 대한 예외적인 해석에 따라 보호받아 빈의 가족 궁전에서 계속 살 수 있었다.
5. 2. 미국 망명과 가족 보호
비트겐슈타인 가문은 아버지 쪽으로는 3대, 어머니 쪽으로는 2대 전에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주로 유대인 혈통이었고, 뉘른베르크법에 따라 유대인으로 분류되었다.[3] 나치당의 집권과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파울은 누나 헤르미네와 헬레네에게 빈을 떠나라고 설득했지만, 그들은 그곳의 집에 애착을 갖고 있었고, 저명한 가문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믿을 수 없었기에 거절했다. 마가렛(그레틀)은 미국인과 결혼한 상태였고, 파울 자신은 나치 정권 하에서 더 이상 공개 콘서트를 할 수 없게 되자 1938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그레틀과 함께, 루드비히(1939년에 영국 국적을 취득)의 도움을 받아 가족 재산(대부분 해외에 보관)과 법적 연줄을 이용하여 누이들의 비유대인 지위를 얻는 데 성공했다.[3]가문의 재정 포트폴리오는 독일과 점령지에 있는 재산 및 기타 자산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가치는 약 60억 달러였으며, 이는 유럽에서 가장 큰 개인 재산이었을 것이다. 사실상 모든 가족 자산은 나치에게 넘겨졌고, 그 대가로 두 누이는 인종법에 대한 예외적인 해석에 따라 보호받아 빈의 가족 궁전에서 계속 살 수 있었다.[3]
6. 미국에서의 삶과 죽음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1938년 미국으로 이주하여,[1] 1946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4] 그는 제자였던 힐데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는데, 힐데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파울은 "인종 모독" 혐의를 받을 수 있었다.[4] 1940년에는 쿠바에서 7개월을 보내며 힐데와의 영주권을 얻으려 노력했고, 같은 해 8월 20일 하바나에서 가톨릭식 결혼식을 올렸다.[4] 1941년 미국에 도착한 아내와 자녀들을 롱아일랜드의 집에 정착시키고, 자신은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의 아파트에서 주말마다 그들을 방문했다.[1] 그는 뉴욕을 중심으로 교육 활동과 연주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으며,[1] 1961년 뉴욕시에서 생을 마감했다.[4]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롱아일랜드에 묻혔지만, 나중에 펜실베이니아주 파이크 카운티의 파인그로브 묘지로 이장되었다.[1]
6. 1. 교육 활동
6. 2. 개인적인 삶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제자였던 힐데와 결혼했다.[4] 이들은 결혼 전 두 자녀를 두었는데, 힐데가 18세, 파울이 47세였을 때 첫 피아노 레슨 후 첫 아이를 임신했다. 힐데가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파울은 "인종 모독" 혐의를 받을 수 있었고, 1938년에 뉴욕으로 피신했다. 1940년에는 7개월 동안 쿠바에서 힐데와 자신의 영주권을 얻으려 노력했고, 1940년 8월 20일 하바나에서 가톨릭식 결혼식을 올렸다.[4] 1941년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미국에 도착하자, 롱아일랜드의 한 집에 정착시켰고, 자신은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 있는 아파트에서 주말마다 가족을 방문했다.[1] 1946년 미국 시민이 되었고, 이후 가르치는 일과 연주를 하며 미국에서 여생을 보냈다. 1961년 뉴욕시에서 사망하여 처음에는 롱아일랜드에 묻혔지만, 이후 펜실베이니아주 파이크 카운티 사우스 스털링의 파인그로브 묘지로 이장되었는데, 이곳은 그의 미망인이 이사한 곳이다.7. 유산과 평가
7. 1. 음악적 유산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위촉한 왼손을 위한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피아노 레퍼토리로 연주되고 있다. 특히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20세기 피아노 음악의 걸작으로 꼽힌다.비트겐슈타인이 의뢰한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모리스 라벨: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피아노 협주곡 (왼손을 위한) Op.17, 두 대의 바이올린, 첼로와 왼손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Op.23
- 프란츠 슈미트: 두 개의 피아노 5중주 (1932년, 1938년) (왼손 피아노, 클라리넷, 현악 3중주), 토카타 (피아노 독주곡), (왼손을 위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베토벤 주제에 의한 협주적 변주곡 (1923년), (왼손을 위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내림 마장조 (1934년)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가정 교향곡 여록 (왼손 피아노와 관현악), 판 아테나 신의 대축제 Op.74 (왼손 피아노와 관현악)
- 파울 힌데미트: 관현악을 동반한 피아노 음악 (왼손을 위한) Op.29 (1923년) (비트겐슈타인은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고, 유족들도 봉인했었지만, 2003년에 자필 악보가 매각되면서 2004년에 레온 플라이셔에 의해 초연되었다.)
- 벤자민 브리튼: 주제와 변주 (디버전스) Op.21 (왼손 피아노와 관현악) (비트겐슈타인은 의뢰한 작품 중에서 이 곡을 최고로 평가했다.)
-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4번 (비트겐슈타인은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고, 작곡가의 사후인 1956년에 지크프리트 랩이 초연했다.)
그 외 작품과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편곡한 작품에 대해서는 :en:Works associated with Paul Wittgenstein을 참조.
7. 2. 사후 평가
참조
[1]
간행물
A Nervous Splendor
https://www.newyorke[...]
2018-07-06
[2]
서적
Ludwig Wittgenstein: The Duty of Genius
The Free Press
[3]
웹사이트
Lost Art Internet Database - Jüdische Sammler und Kunsthändler (Opfer nationalsozialistischer Verfolgung und Enteignung) - Wittgenstein, Paul
https://www.lostart.[...]
2021-11-09
[4]
서적
The House of Wittgenstein: A Family at War
[5]
웹사이트
Austrian Marshall Plan Foundation Report, 2014 The Vienna Archives: Musical Expropriations During the Nazi Era and 21st Century Ramifications
https://www.lootedar[...]
[6]
웹사이트
Brian Evenson Soundtracks Last Days
https://www.villagev[...]
2009-04-03
[7]
서적
비트겐슈타인 가문
필로소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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