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슈트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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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1864년 뮌헨에서 태어난 독일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1880년대 후반부터 교향시와 오페라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교향시 《돈 후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오페라 《살로메》, 《엘렉트라》, 《장미의 기사》 등이 있다. 그는 나치 정권 하에서 제국음악원 총재를 역임하며 논란을 빚기도 했지만, 20세기 초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음악은 영화 음악에도 활용되었다. 만년에는 가곡과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지휘자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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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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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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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리하르트 게오르크 슈트라우스 |
출생 | 1864년 6월 11일 |
출생지 | 뮌헨, 바이에른 왕국, 독일 연방 |
사망 | 1949년 9월 8일 |
사망지 |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바이에른 주, 서독 |
직업 | 작곡가, 지휘자 |
배우자 | 파울리네 데 아나 (1894년 결혼) |
작품 목록 | 작품 목록 |
음악 스타일 | |
장르 | 교향시 오페라 |
활동 시기 | 후기 낭만주의 ~ 20세기 초반 |
영향 | 신낭만주의 |
관련 인물 | |
관련 인물 | 프란츠 샬크 |
2. 생애
1864년 바이에른 왕국 뮌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뮌헨 궁정 오페라의 수석 호른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뮌헨 양조업자의 딸이었다.[2]
4세에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 공부를 시작했고, 6세에 첫 작곡을 했다.[2] 11세부터는 베노 발터에게 바이올린을,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이어에게 작곡을 배웠다.[2] 초기에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로베르트 슈만, 펠릭스 멘델스존 스타일의 곡을 썼으며, 호른 협주곡 1번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2]
1874년 처음으로 바그너의 오페라를 접했으나, 보수적인 아버지의 반대로 바그너 음악 공부는 금지당했다.[3] 1882년 루드비히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뮌헨 대학교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공부했다.[2] 같은 해 바이올린 협주곡 라단조를 초연했다.
1885년 알렉산더 리터를 만나면서 프란츠 리스트와 바그너의 "미래의 음악"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는 교향시 돈 후안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2] 1894년에는 소프라노 가수 Pauline Strauss-de Ahna|파울리네 데 아나de와 결혼했다.
1933년 요제프 괴벨스에 의해 제국음악원 총재로 임명되었으나,[11] 유대인 대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름을 삭제하는 것을 거부하여 1935년 해임되었다.[12]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에서는 올림픽 개막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12]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나치 협력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48년 마지막 작품인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작곡했다. 1949년 9월 8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1864년 6월 11일 바이에른 왕국 뮌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뮌헨 궁정 오페라의 수석 호른 연주자이자 쾨니히리히 무지크슐레 교수였다.[2][1] 어머니는 뮌헨 양조업자 게오르크 프쇼르의 딸로, 집안이 재정적으로 부유했다.[2]
슈트라우스는 4세에 뮌헨 궁정 오케스트라 하피스트 아우구스트 톰보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2] 곧 오케스트라 리허설에 참석했고, 앙상블 부지휘자로부터 음악 이론과 관현악 편성에 대한 레슨을 받았다. 6세에 첫 작곡을 했고, 이후 거의 평생 동안 꾸준히 작곡했다. 1872년에는 아버지의 사촌이자 뮌헨 궁정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베노 발터로부터 바이올린 지도를 받기 시작했고, 11세부터 5년 동안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이어에게 작곡을 배웠다.[2]
슈트라우스는 아버지의 영향도 깊이 받았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베토벤,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음악을 가르쳤으며,[2] 1875년부터 1896년까지 지휘했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빌데 궁글'에서 아들의 작품을 연주하며 지원했다.[2] 슈트라우스의 초기 교향곡 작품들은 이 앙상블을 위해 작곡되었다.[2] 이 시기 작품들은 아버지 가르침에 따라 로베르트 슈만, 펠릭스 멘델스존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다. 호른 협주곡 1번은 이 시대를 대표하며 현대 호른 레퍼토리의 주요 작품이다.[2]
1874년, 슈트라우스는 처음으로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과 ''탄호이저''를 들었다.[3] 1878년 뮌헨에서 ''발퀴레''와 ''지크프리트'' 공연을 관람했고, 1879년 ''니벨룽의 반지'' 전곡,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을 관람했다.[2] 그러나 음악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아버지는 슈트라우스에게 바그너 음악 공부를 금지했다. 슈트라우스 가문에서는 바그너 음악을 깊이 의심했고, 슈트라우스는 16세가 되어서야 ''트리스탄과 이졸데'' 악보를 구할 수 있었다.[3] 훗날 슈트라우스는 바그너 작품에 대한 보수적 적대감에 대해 깊이 후회한다고 말했다.[3]
1882년 루드비히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뮌헨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 미술사를 공부했다.[2] 같은 해 빈에서 바이올린 협주곡 라단조를 초연했으며, 오케스트라 파트를 직접 피아노로 편곡하여 연주하고, 스승 베노 발터가 독주를 맡았다. 1년 후 베를린으로 가서 잠시 공부한 후 마이닝겐 궁정 오케스트라에서 한스 폰 뷜로의 부지휘자로 자리를 얻었다. 뷜로는 16세 때 작곡한 젊은 작곡가의 관악기를 위한 ''세레나데 (작품 7)''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슈트라우스는 리허설에서 뷜로를 관찰하면서 지휘 기술을 배웠다. 뷜로는 그를 매우 좋아했고, 슈트라우스는 그를 가장 위대한 지휘 멘토로 여겼으며, "해석의 기술"을 배웠다고 자주 말했다.[2] 뷜로 지휘 아래 피아노 협주곡 24번을 연주하며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처음 주요 데뷔를 했고, 자신만의 카덴차를 작곡했다.[2]
1885년 12월, 뷜로는 예상치 못하게 사임했고, 슈트라우스는 1886년 4월까지 시즌 나머지 기간 동안 마이닝겐 궁정 오케스트라 임시 수석 지휘자로 남게 되었다.[2]
2. 2. 음악적 발전과 변화
1885년 슈트라우스는 마이닝겐 관현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리하르트 바그너의 조카 중 한 명과 결혼한 작곡가 알렉산더 리터를 만났다.[2] 리터는 프란츠 리스트와 바그너의 이상을 열렬히 옹호했으며, 1885년부터 슈트라우스의 작곡가로서의 작품 궤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2] 리터는 슈트라우스에게 보수적인 작곡 스타일을 버리고 바그너와 리스트를 모델로 삼아 "미래의 음악"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2] 또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바그너, 프리드리히 폰 하우제거의 저작에 대한 연구와 대화를 통해 슈트라우스에게 영향을 주었다.[2] 이 모든 것이 슈트라우스에게 새로운 미학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이는 그가 교향시 장르를 받아들이면서 처음으로 드러났다.[2]슈트라우스가 새로운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바그너의 조카 중 한 명과 결혼한 알렉산더 리터와 만나면서부터이다. 리터의 영향으로 슈트라우스는 혁신적인 음악에 진지하게 접근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슈트라우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 1889년 초연된 그의 출세작이자 첫 성공작인 교향시 돈 후안이 탄생했다. 이 작품에 대해 청중의 반은 갈채를 보냈고, 나머지 반은 야유를 퍼부었다. 슈트라우스는 자신의 내면의 음악적 소리를 들었다고 인식하며 "수많은 동료로부터 미치광이 취급을 받지 않는 예술가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면, 나는 이제 내가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만족한다"라며 교향시 작곡을 계속했다. 대표적인 교향시로는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1895년),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사용되어 유명해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96년) 등이 있다.
1894년, 슈트라우스는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 탄호이저를 지휘했다. 이때 엘리자베트를 노래한 소프라노 가수 Pauline Strauss-de Ahna|파울리네 데 아나de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파울리네는 격렬한 성격으로 인해, 공처가였던 슈트라우스의 아내로서 여러 일화를 남겼다.
2. 3. 나치와의 관계
요제프 괴벨스와 나치의 권력 장악 이후, 독일에서 나치 정권 하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정치와의 관계를 둘러싸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의가 있다. 제국음악원 총재로 임명되었지만, 비정치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유대인 며느리와 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치와 협력하기도 했다.1933년 11월, 요제프 괴벨스는 슈트라우스와 상의 없이 그를 '제국음악원(Reichsmusikkammer)'의 장으로 임명했다.[11] 슈트라우스는 공직을 유지하면서도 비정치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했으나, 유대인 며느리와 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치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맺기도 했다.[2]
1935년, 오페라 《말없는 여인》의 포스터에서 유대인 대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름을 삭제하는 것을 거부하여 제국음악원 총재직에서 해임되었다.[12]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에서는 올림픽 개막음악을 작곡하기도 하였다.[12]
슈트라우스는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드러냈다.
> 나는 내가 '독일인'이라는 생각에 의해 내 행동의 어느 부분에서라도 인도된다고 믿는가? 모차르트가 작곡할 때 의식적으로 '아리아인'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단지 두 종류의 사람, 즉 재능이 있는 사람과 재능이 없는 사람만을 인식한다.[12]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슈트라우스는 나치 협력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전후 대한민국에서는 '일본 황기 2600년에 바치는 축전곡'이 전체주의를 합리화한다는 이유로 연주 금지되기도 했다.
2. 4. 만년과 죽음
1948년, 슈트라우스는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그의 마지막 작품인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작곡했다. 그는 평생 동안 많은 가곡을 썼지만, 이 곡들은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곡일 것이다. 당시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과 비교했을 때, 슈트라우스의 화성적, 선율적 언어는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곡은 항상 청중과 연주자에게 인기가 있었다.
슈트라우스는 1949년 9월 8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장례식에서는 '장미의 기사' 제3막의 삼중창이 연주되었다.
슈트라우스의 유해는 화장되어 가르미슈 묘지에 안치되었다. 이 묘에는 그의 아내 파울리네, 아들 프란츠(1898년~1980년)와 며느리 앨리스(1904년~1991년), 손자 리하르트(1927년~2007년)와 그의 아내 가브리엘, 손자 크리스찬과 그의 아내 브리깃테가 함께 묻혀 있다.[2]
3. 지휘자로서의 슈트라우스
슈트라우스는 작곡가로서 뿐만 아니라 지휘자로서도 명성을 얻었으며, 생전에는 자신의 작품을 포함하여 수많은 오페라와 콘서트를 연주했다. 뮌헨, 베를린, 빈 등 주요 가극장에서 요직을 맡았다. 다만, 나중에는 자신의 작품 초연도 다른 지휘자에게 위임하게 되었다.[2]
한스 폰 뷜로에게서 지휘를 배웠다.[2]
젊은 시절의 슈트라우스는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에게 "미치광이다!"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격렬한 몸짓을 중시하는 다이내믹한 지휘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후년에는 간결하고 과장이 적은 억제된 스타일로 변했다. 제자인 카를 뵘이나 조지 셀에게서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2]
뵘의 증언에 따르면, 그림자 없는 여인을 지휘했을 때, 지휘 모습을 촬영하던 카메라맨이 "왼손을 내밀어, 서서 지휘해 주시겠습니까?"라고 간청하자, "나는 이전부터 지휘할 때는 항상 이렇게 하기로 정해져 있다. 앞으로도 쭉, 왼손을 내밀지 않고 앉아서 지휘를 할 것이다!"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클라이맥스에서 그만 열이 받아서 무심코 왼손을 내밀고 일어서서 지휘를 했다. 공연 종료 후, 뵘은 "선생님은, 평소에 자신의 지휘법에 대해 '이것은 절대로 지켜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선생님 스스로 그 계율을 깨고 말았네요?"라고 놀리자, 슈트라우스는 뚱한 채로 도망치듯이 돌아갔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에서는 "개런티를 두 배로 해준다면 양손으로 지휘해도 좋아"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지휘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뵘에게 "오른손으로 박자를 잡는 것은 외적인 것으로, 악원들이 자신의 위치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외는 모두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온다. 지휘자의 표정은 곡의 서정적인 부분이나 극적인 부분에서 변화해야 하며, 작품에 나타나는 사랑과 증오를 함께 체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지 셀의 증언에 따르면 슈트라우스는 연주보다 트럼프 게임인 '스커트'를 더 좋아했던 것 같으며, 어느 날 오페라 피델리오를 지휘하는 중에 회중시계를 본 결과, 이대로는 트럼프 시간에 늦을 것을 깨닫고 갑자기 맹렬한 속도로 지휘를 했다고 한다.
슈트라우스의 연주는 자신의 작품을 포함하여 수많은 녹음이 남아 있으며, 그 모습은 사진뿐만 아니라 몇몇 필름으로도 엿볼 수 있다.
4. 작품 세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20세기 초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벨러 버르토크는 1902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듣고 "새로운 삶의 씨앗을 담고 있었다"고 평했다. 카롤 시마노프스키 역시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받아 ''서주 협주곡'', 두 번째 교향곡, ''하기트'' 등을 작곡했다. 에드워드 엘가, 벤자민 브리튼 등 영국의 작곡가들과 존 애덤스, 존 코릴리아노 등 현대 작곡가들도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받았다.
슈트라우스의 음악 스타일은 20세기 중반 영화 음악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음악적 묘사와 감정 표현 스타일은 영화 음악 어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맥스 슈타이너,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뉴먼 등은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받아 영화 음악을 작곡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오프닝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사용되어 유명해졌으며, 존 윌리엄스는 ''슈퍼맨'', ''스타워즈'' 등의 영화 음악에서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이어갔다.
슈트라우스는 콘서트홀 청중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으며, 2002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과 캐나다 교향악단에서 가장 많이 연주된 작곡가 상위 10위 안에 꾸준히 들었다.[32] 그는 또한 20세기 작곡가 중 작품 녹음 수 상위 5위 안에 들었다.[33]
알렉산더 리터의 영향으로 교향시 장르를 개척한 슈트라우스는 《돈 후안》, 《맥베스》, 《죽음과 변용》,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돈 키호테》, 《영웅의 생애》 등 다수의 교향시를 작곡했다.[18]
슈트라우스는 《헌정》, 《만령절》, 《세레나데》, 《세실리아》, 《내일!》, 《자장가》, 《네 개의 마지막 노래》 등 수많은 가곡을 작곡했다.[2]
호른 협주곡 두 곡, 바이올린 협주곡, 오보에 협주곡, 바순과 클라리넷을 위한 이중 협주곡 등 여러 독주 악기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했다.
교향곡 1번(1880)과 교향곡 2번(1884) 외에도 가정 교향곡(1903)과 알프스 교향곡(1915)을 작곡했다. 교향적 환상곡 《이탈리아에서》(1886)는 이탈리아 여행 중의 인상을 바탕으로 작곡되었다.[2]
첼로 소나타 바장조(1883년), 바이올린 소나타 내림마장조(1886년) 등 실내악곡도 작곡했다.
4. 1. 오페라
19세기 말부터 슈트라우스는 오페라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장르에서 그의 초기 시도였던 《군트람》(1894)과 《사라진 불》(1901)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군트람》은 슈트라우스의 경력에서 처음으로 상당한 비평적 실패를 겪었고, 《사라진 불》은 일부 비평가들에게 외설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9]1905년, 슈트라우스는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불협화음적인 모더니즘 오페라 《살로메》를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출연진은 38번 이상의 커튼콜을 받았다.[20] 모리스 라벨은 《살로메》를 "엄청난" 작품이라고 평가했으며, 구스타프 말러는 "살아있는 화산, 지하의 불"이라고 묘사했다. 슈트라우스는 이 오페라로 얻은 수입으로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 있는 자신의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21]
이후 슈트라우스는 《엘렉트라》(1909)에서 엘렉트라 코드를 통해 불협화음의 사용을 더욱 발전시켰다. 《엘렉트라》는 슈트라우스가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과 대본 작가로서 협력한 첫 번째 오페라였다. 두 사람은 이후 여러 차례 함께 작업했다. 호프만스탈과의 후기 작품에서 슈트라우스는 자신의 화성 언어를 완화시켰다. 그는 바그너적인 반음계적 화성을 기반으로 한 더 풍부하고 멜로디컬한 후기 낭만주의 양식을 사용했으며, 불협화음은 훨씬 줄어들고, 관현악 작곡과 음색에서 뛰어난 기교를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장미의 기사》(1911)와 같은 오페라는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슈트라우스는 1942년까지 정기적으로 오페라를 제작했다. 호프만스탈과 함께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1912), 《그림자 없는 여인》(1919), 《이집트의 헬레나》(1928), 《아라벨라》(1933)를 창작했다. 《간주곡》(1924)의 경우 슈트라우스가 직접 대본을 제공했다. 《말 없는 여인》(1935)은 슈테판 츠바이크와 함께 대본을 썼고, 《평화의 날》(1935–36)과 《다프네》(1937)는 모두 요제프 게고르와 슈테판 츠바이크가 대본을 썼으며, 《다나에의 사랑》(1940)은 요제프 게고르와 함께 작업했다.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오페라 《카프리치오》(1942)는 클레멘스 크라우스가 대본을 썼지만, 그 기원은 슈테판 츠바이크와 요제프 게고르에게서 비롯되었다.
4. 2. 교향시
알렉산더 리터의 영향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교향시라는 장르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는 《돈 후안》, 《맥베스》, 《죽음과 변용》,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돈 키호테》, 《영웅의 생애》 등 다수의 교향시를 작곡했다.[18]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제목 | 작곡 연도 |
---|---|
돈 후안 | 1888년 |
맥베스 | 1890년 |
죽음과 변용 | 1889년 |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 1894년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896년 |
돈 키호테 | 1897년 |
영웅의 생애 | 1898년 |
4. 3. 가곡
슈트라우스는 생애 동안 수많은 가곡을 작곡했다. 특히 《헌정》, 《만령절》, 《세레나데》, 《세실리아》, 《내일!》, 《자장가》, 《네 개의 마지막 노래》 등이 유명하다.[2] 그는 종종 아내의 목소리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으며, 그의 가곡은 성악과 피아노를 위해 작곡되었고, 사후에 몇 곡이 관현악으로 편곡되었다. 그의 가곡들은 항상 청중과 연주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음악학자들은 그의 다른 많은 작품들과 함께 걸작으로 간주한다.1894~1895년, 30세 무렵에 그는 "루에, 마이네 제엘레!", "체칠리에", "모르겐!", "하임리히에 아우프포더룽", "트라움 도르히 디 뎀머룽" 등 몇몇 유명한 곡들을 발표했다. 1918년, 오페라에 전념하느라 오랜 공백기를 가진 후, 그는 ''여섯 개의 가곡'', 작품번호 68을 작곡했는데, 이는 ''브렌타노 가곡''이라고도 불린다.
1948년 5월부터 9월까지, 그의 죽음 직전에, 슈트라우스는 죽음을 주제로 하는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작곡했다. 마지막 곡인 "Im Abendrot"(황혼에)는 "이것이 아마 죽음일까요?"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질문은 말로 답해지지 않지만, 대신 슈트라우스는 그의 이전 교향시 ''죽음과 변용''에서 "변용 주제"를 인용하는데, 이는 죽음 이후 영혼의 변용과 성취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2] 그는 이 곡들을 키르스텐 플라그스타트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고 전해지며, 그녀가 초연했고, 녹음되었다.
제목 | 작곡 연도 | 비고 |
---|---|---|
《자장가》 | 1878년 | |
《헌정》 Op.10-1 | 1882년-1883년 | |
《만령절》 Op.10-8 | 1883년 | |
《세레나데 》 Op.17-2 | ||
《세실리아》 Op.27-2 | 1894년 | |
《은밀한 권유》 Op.27-3 | 1894년 | |
《내일!》 Op.27-4 | 1894년 | |
《자장가》 Op.41-1 | 1899년 | |
《네 개의 마지막 노래》 AV.150 | 1948년 | |
《접시꽃》 AV.304 (유작) | 1948년 | |
헤르만 길름의 시집 마지막 장에 의한 8개의 가곡 Op.10 | 1885 | |
5개의 중성(中聲)용 가곡 Op.15 | 1886 | |
아돌프 프리드리히 폰 샤크 백작의 시에 의한 6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Op.17 | 1886-87 | |
아돌프 프리드리히 폰 샤크 백작의 시집 연잎에 의한 6개의 가곡 Op.19 | 1888 | |
펠릭스 단의 시집 소녀의 꽃에 의한 4개의 가곡 Op.22 | 1888 | |
펠릭스 단의 시집 소박한 노래에 의한 5개의 가곡 Op.21 | 1889-90 | |
니콜라우스 폰 레나우의 시에 의한 2개의 가곡 Op.26 | 1891 | |
4개의 가곡 Op.27 | 1894 | |
오토 율리우스 비어바움의 시에 의한 3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Op.29 | 1895 | |
칼 부세와 리하르트 데멜의 시에 의한 4개의 가곡 Op.31 | 1895-96 | |
5개의 가곡 Op.32 | 1896 | |
관현악 반주에 의한 4개의 가곡 Op.33 | 1896-97 | |
4개의 가곡 Op.36 | 1897-98 | |
6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Op.37 | 1896-98 | |
5개의 가곡 Op.39 | 1898 | |
5개의 가곡 Op.41 | 1899 | |
옛 독일 시인들의 시에 의한 3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Op.43 | 1899 | |
관현악 반주에 의한 2개의 저성(低聲)용 가곡 Op.44 | 1899 | |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에 의한 5개의 가곡Op.46 | 1899-1900 | |
루트비히 울란트의 시에 의한 5개의 가곡 Op.47 | 1900 | |
오토 율리우스 비어바움과 칼 헹켈의 시에 의한 5개의 가곡 Op.48 | 1900 | |
8개의 가곡 Op.49 | 1901 | |
관현악 반주에 의한 2개의 저음 베이스용 가곡 Op.51 | 1902/06 | |
6개의 가곡 Op.56 | 1903/05-06 | |
알프레트 케어의 시에 의한 12개의 가곡 상인의 거울 Op.66 | 1918 |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 과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서동시집에 의한 6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Op.67 | 1918 | |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시에 의한 6개의 가곡 Op.68 | 1918 | |
아힘 폰 아르님과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에 의한 5개의 작은 가곡 Op.69 | 1918 | |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시에 의한 3개의 고성(高聲)용 찬가 Op.71 | 1921 | |
한스 베트게의 페르시아와 중국 번역시집 동양의 노래에 의한 5개의 가곡 Op.77 | 1928 | |
4개의 고음 베이스용 가곡 Op.87 | 1922/29/35 | |
3개의 가곡 Op.88 | 1933/42 (마지막 출판 작품) |
4. 4. 협주곡
슈트라우스는 여러 독주 악기를 위한 협주곡을 많이 작곡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호른 협주곡 두 곡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호른 연주자들이 즐겨 연주하는 곡이다. 바이올린 협주곡, 오보에 협주곡, 바순과 클라리넷을 위한 이중 협주곡도 유명하다. 특히 바순과 클라리넷을 위한 이중 협주곡은 클라리넷이 공주를, 바순이 곰을 상징하며, 결국 곰이 왕자로 변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제목 | 악기 | 작곡 연도 |
---|---|---|
바이올린 협주곡 라단조 Op.8 | 바이올린 | 1882년 |
부를레스케 라단조 AV.85 | 피아노 | 1885년 |
가정교향곡 부록 Op.73 | 왼손 피아노 | |
판아테네의 대제 Op.74 | 왼손 피아노 | |
클라리넷과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내림마장조 AV.61 | 클라리넷 | |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바장조 AV.75 | 첼로 | |
호른 협주곡 1번 내림마장조 Op.11 | 호른 | 1883년 |
호른 협주곡 2번 내림마장조 AV.132 | 호른 | 1943년 11월 28일 |
오보에 협주곡 라장조 AV.144 | 오보에 | 1945년 10월 25일 |
이중협주곡 바장조 AV.147 | 클라리넷, 바순 | 1947년 12월 16일 |
4. 5. 기타 관현악곡
슈트라우스는 교향곡 1번(1880)과 교향곡 2번(1884) 외에도 가정 교향곡(1903)과 알프스 교향곡(1915)을 작곡했다. 교향적 환상곡 《이탈리아에서》(1886)는 그가 이탈리아 여행 중 여러 장소에 대한 묘사와 그에 따른 음조적 인상을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작곡되었다.[2]그 외의 관현악곡으로는 다음이 있다.
- 모음곡 《우스운 시민》 작품 60 (1917, 극음악에서 발췌)
- 축전 전주곡 작품 61 (1913)
- 일본 황기 2600년에 부치는 축전곡 작품 84 (1940)
- 《변용》(Metamorphosen) (1945, 현악 합주)
4. 6. 실내악곡
슈트라우스는 첼로 소나타 바장조(1883년), 바이올린 소나타 내림마장조(1886년), 현악4중주 가장조(1880년), 피아노 사중주 다단조(1885년) 등 실내악곡도 작곡했다.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에 의한 멜로드라마 에녹 아든(낭독자와 피아노를 위한)도 있다.1890년 이후 슈트라우스는 대규모 관현악 작품과 오페라에 집중하면서 실내악곡 작곡은 매우 드물어졌다. 그의 실내악 작품 중 4개는 실제로 그의 오페라의 일부를 편곡한 것이다.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다프네 에튀드''와 그의 마지막 오페라 ''카프리치오''의 서곡인 현악 육중주가 포함된다. 그의 마지막 독립적인 실내악 작품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E장조의 알레그레토는 1948년에 작곡되었다.
그는 또한 이 기간 동안 관악 앙상블을 위해 두 개의 대규모 작품을 작곡했다. 소나티나 1번 "병자의 작업실에서"(1943년)와 소나티나 2번 "행복한 작업실"(1946년)이다. 두 작품 모두 이중 목관 오중주와 두 대의 호른, C조 클라리넷, 바셋 호른, 베이스 클라리넷, 콘트라베이스를 위해 작곡되었다.
4. 7. 저서
- 《사색과 기억》(김윤미 역, 포노, 2022). ISBN 979-11-89716-26-4
- 헬타 브라우코프 편, 츠카코시 사토시 역, 《말러와 슈트라우스 - 어떤 세기말의 대화 왕복 서한집 1888~1911》 (음악의 벗사, 1982년)
- 오노 마코토 감수, 호리우치 미에 역, 《오페라 "장미의 기사" 탄생의 비밀 - R. 슈트라우스/호프만슈탈 왕복 서한집》 (가와이데 서방 신사, 1999년)
- 빌리 슈 편, 나카지마 유지 역,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호프만슈탈 왕복 서한 전집》 (음악의 벗사, 2001년)
- 에르토르 베를리오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고카지 쿠니타카 감수, 히로세 다이스케 역, 《관현악법》 (음악의 벗사, 2006년)
5. 영향과 유산
1980년대까지 슈트라우스는 일부 포스트모던 음악학자들에게 보수적인 작곡가로 여겨졌지만, 그의 작곡에 대한 재검토와 새로운 연구는 그를 현대주의자로 재평가했다.[23] 그는 여전히 음조와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을 활용하고 존경했지만, 진보된 화성 스타일과 결합된 오케스트레이션의 선구적인 미묘함으로 유명하다. 지휘자 마크 엘더는 대학 프로덕션에서 처음으로 슈트라우스를 연주했을 때 "깜짝 놀랐다. 나는 음악이 화성과 멜로디를 가지고 그가 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라고 회상했다.[24]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20세기 초 작곡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벨러 버르토크는 1902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듣고, 나중에 그 작품이 "새로운 삶의 씨앗을 담고 있었다"고 말했다. 슈트라우스의 영향은 현악 사중주 1번, ''코슈트'' 및 ''푸른 수염의 성''을 포함한 그의 작품에 분명히 나타난다.[25] 카롤 시마노프스키 역시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의 ''서주 협주곡''과 그의 첫 번째 및 두 번째 교향곡,[26] 그리고 ''하기트''와 같은 작품에 반영되었으며, 이는 ''살로메''를 모델로 했다. 에드워드 엘가는 그의 연주 서곡 ''남쪽에서 (알라시오)''와 다른 작품에서,[27] 벤자민 브리튼은 그의 오페라 작법에서 영향을 받는등 영국의 작곡가들 또한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받았다. 존 애덤스와 존 코릴리아노를 포함한 많은 현대 작곡가들이 슈트라우스에게 빚을 졌다고 인정한다.[28]
슈트라우스의 음악 스타일은 20세기 중반 영화 음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음악적 묘사(돈 후안, 틸 오일렌슈피겔, 영웅)와 감정의 스타일은 영화 음악 어휘로 들어갔다. 영화 음악 역사가 티모시 슈어러는 "점수 매기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포스트(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요소는 풍부한 사운드, 확장된 화성 언어, 반음계, 프로그램 음악의 사용, 그리고 라이트모티프의 사용이다. 할리우드 작곡가들은 포스트 낭만주의적 관용구를 영화 점수 매기기 노력과 호환된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설명했다.[29] 맥스 슈타이너와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는 슈트라우스와 같은 음악적 세계에서 왔으며 자연스럽게 그의 스타일로 글을 쓰도록 이끌렸다. 영화 역사가 로이 프렌더가스트는 "그들에게 제시된 영화의 종류와 같은 극적인 문제에 직면했을 때, 슈타이너, 코른골트, 뉴먼은 극적인 영화 점수 매기기의 해답을 바그너, 푸치니, 베르디, 그리고 슈트라우스에게서 찾았다."라고 썼다.[30] 나중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오프닝은 스탠리 큐브릭이 1968년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사용했을 때 가장 잘 알려진 영화 음악 중 하나가 되었다. 존 윌리엄스의 영화 음악은 ''슈퍼맨''과 ''스타워즈''와 같은 주류 히트작의 스코어에서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이어갔다.[31]
슈트라우스는 콘서트홀 청중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2002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과 캐나다의 교향악단에서 가장 많이 연주된 작곡가 상위 10위 안에 꾸준히 들었다.[32] 그는 또한 현재 그의 작품 녹음 수 측면에서 20세기 작곡가(1860년 이후 출생) 상위 5위 안에 들어 있다.[33]
그의 명예는 다음과 같다:[36]
연도 | 훈장 및 명예 |
---|---|
1903년 |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명예 박사 |
1907년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프랑스 파리 |
1914년 6월 14일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오피시에 |
1910년 | 바이에른 막시밀리안 과학 예술 훈장 |
1914년 | 옥스퍼드 대학교 명예 박사 |
뮌헨 명예 시민 | |
1924년 | 독일 과학 예술 훈장 |
빈 국립 음악 예술 대학교 명예 박사, 빈과 잘츠부르크 명예 시민 | |
1932년 | 뉴욕 음악 대학 메달 |
1936년 | 로열 필하모닉 협회 금메달 |
1939년 | 벨기에 왕관 훈장 코망되르, 벨기에의 레오폴 3세가 수여 |
1949년 | 뮌헨 대학교 명예 박사[37] |
제임스 블리시의 SF 소설 "예술 작품"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본질과 인격이 다른 사람에게 이식되는 개념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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