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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인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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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시아인의 편지》는 1721년 출판된 몽테스키외의 서간체 소설로, 페르시아인 우즈베크와 리카가 프랑스를 여행하며 쓴 편지들을 엮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 사회, 정치, 종교, 사회 풍속 등을 페르시아인의 시각으로 비판적으로 묘사하며, 비교 종교, 망명, 이성, 계몽주의 등의 주제를 다룬다. 《페르시아인의 편지》는 서간체 소설의 형식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많은 모방작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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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인의 편지
기본 정보
1754년 판의 책 표지
원제Lettres persanes
저자샤를 드 몽테스키외
국가프랑스
언어프랑스어
장르서간체 소설
출판1721년

2. 작품 개요

『페르시아인의 편지』는 150통의 편지로 구성된 소설로, 1721년 5월 "쾰른: 피에르 마르토"라는 표제로 처음 출판되었다. 이 출판사는 암스테르담의 출판업자 자크 데스보르드가 위장한 회사였으며, 당시 그의 사업은 미망인 수잔 드 코가 운영하고 있었다. 이 초판은 'A판'으로 불리며, 1998년부터 옥스퍼드와 리옹/파리에서 출판되기 시작한 몽테스키외 전집(2004)의 최신 비평판에 사용되었다.

같은 해 후반에 같은 출판사에서 발행된 두 번째 판(B)은 세 통의 새로운 편지를 추가하고 원래 편지 13통을 삭제했다. 1758년 몽테스키외의 아들이 준비한 사후 판에는 8통의 새로운 편지가 추가되어 총 161통이 되었으며, 작가가 쓴 "''페르시아인의 편지''에 대한 몇 가지 성찰"이라는 짧은 글도 포함되었다. 2004년 ''전집'' 제1권은 원래 판본의 텍스트로 돌아갔지만 추가된 편지는 "보충"으로 표시되었다. 이 문서의 편지 참조는 이 판본을 기준으로 하며, 괄호 안에는 1758년의 번호 체계를 따른다.

2. 1. 서간체 형식

몽테스키외는 "Quelques remarques sur les ''Lettres persanes'' (1757)"에서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소설이라고 처음 언급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예상치 못하게 ... 일종의 소설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큰 호응을 얻었다. 시작과 전개, 결말을 볼 수 있으며,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라고 썼다. 처음에는 독자들과 작가에게 이 책은 소설, 더 나아가 서간체 소설로 여겨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서간체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721년에 출판된 "편지" 모음집은 논쟁적이고 정치적인 정기 간행물을 연상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페르시아인의 편지''는 보이에 다르장의 ''Lettres juives''(1738)와 ''Lettres chinoises''(1739) 등 수많은 모방작을 낳으며, 1721년과 1754년 사이에 "서간체 소설"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몽테스키외는 ''Mes Pensées''에서 "나의 ''페르시아인의 편지''는 사람들에게 서한 소설을 쓰는 법을 가르쳤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서간체 구조는 상당히 유연하여 총 19명의 발신인과 최소 22명의 수신인이 등장한다. 우스베크와 리카가 가장 많은 편지를 썼다. 편지들은 모두 음력 달력에 따라 날짜가 기록되었으며, 로버트 섀클턴이 밝힌 바와 같이 이슬람식 이름을 대입하여 서양 달력과 일치시킬 수 있다.

3. 주요 내용

우즈베크는 서양의 남녀 간 자유로운 관계를 높이 평가하지만, 하렘의 주인으로서 어느 정도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아내들은 나른하고 버려진 연인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으며, 그는 제한적인 소통과 진정한 자아를 드러내지 못하는 주인 또는 연인의 역할에 머무른다. 우즈베크의 언어는 아내들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제약되어 있다. 게다가 그는 처음부터 페르시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내들의 태도에 이미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1] 하렘은 그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는 긴장의 덩어리였으며, 그는 환관들뿐만 아니라 아내들도 신뢰하지 않았다.[1]

3. 1. 플롯 요약

1711년, 우즈베크는 어린 친구 리카와 함께 이스파한에 있는 자신의 하렘을 떠나 프랑스로 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는 다섯 명의 아내(자시, 제피스, 파트메, 젤리스, 록산)를 흑인 환관들에게 맡기고 떠나는데, 그 중 한 명이 수장이자 첫 번째 환관이다. 여행 중, 그리고 파리에서의 오랜 체류 기간(1712–1720) 동안, 그들은 친구들과 물라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서양, 특히 프랑스 사회의 여러 측면, 특히 프랑스 정치와 예절에 대해 언급하며, 존 로의 시스템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포함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렘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1717년(편지 139 [147])부터 그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된다. 우즈베크는 수석 환관에게 단속을 명령하지만, 그의 메시지는 제때 도착하지 못하고, 내부 반란은 그의 아내들의 죽음을 초래하며, 특히 그가 가장 아끼던 록산의 복수적인 자살과 대부분의 환관들의 죽음으로 이어진다.[1]

3. 2. 연대기

기간내용편지 번호
1711년 3월 19일 ~ 1712년 5월 4일 (약 14개월)이스파한에서 프랑스까지의 여정1–21 (1–23)
1712년 5월 ~ 1715년 9월 (총 3년)루이 14세 시대의 파리22–89 (24–92)
1715년 9월 ~ 1720년 11월 (5년)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의 섭정 시대90–137 (93–143), [보충 편지 8 (145)]
1717년 ~ 1720년 (약 3년)이스파한 후궁의 붕괴138–150 (146–161)


3. 3. 결말

Roxane프랑스어의 마지막 편지(1720년 5월 8일)보다 늦게 작성된 로(Law)의 "체계"에 대한 역사를 담고 있는 134–137(140–145)번 서한을 우즈베크는 이미 받았음에 틀림없다. 서신 전달에 통상 5개월이 걸리므로, 그는 1720년 10월과 11월에 자신의 가장 최근 서한(보충 서한 8과 138 [145와 146]번 서한)을 썼다. 따라서 그가 실제로 페르시아로 돌아갔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1]

마지막 서한들(139–150 [147–161])은 서한의 날짜 순서에 따라 3년 이상의 갑작스러운 아날레프시스를 보여준다. 69(71)번 서한에서 139(147)번 서한까지, 즉 연대순으로 1714년부터 1720년까지, 우즈베크의 서한 중 하렘과 관련된 내용은 단 한 통도 없다. 94번 서한에서 143번 서한까지(사후 출판본의 보충 서한 97번에서 보충 서한 8 [145]번까지) 하렘은 어떤 모습으로도 언급되지 않는다.[1] 126번부터 137번 서한(132번부터 148번 서한)은 리카의 것이며, 이를 면밀히 살펴보면 우즈베크가 약 15개월(1719년 8월 4일부터 1720년 10월 22일까지) 동안 침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즈베크는 그동안 서한을 받았지만, 1758년에 보충 서한 9–11(157, 158, 160)이 추가된 후 마지막 시리즈가 더 발전될 때까지 독자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우즈베크는 1714년 10월에 "하렘이 혼란에 빠졌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63 [65]번 서한), 반란의 기세가 고조되자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서한 전달의 지연과 일부 서한의 손실로 인해 상황은 회복 불가능하게 되었다.[1]

실의에 빠진 우즈베크는 페르시아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받아들인 듯하며, 희망은 거의 없다. 1719년 10월 4일 그는 "나는 내 머리를 적들에게 넘겨줄 것이다"(147 [155])라고 한탄한다.[1]

4. 분석 및 비평

라 브뤼예르, 파스칼 등의 고전적 전통에 따른 풍자와 함께, 섭정 시대의 "정신"이 주로 칭송받았던 초기와 달리, 1950년대 이후 ''페르시아인의 편지''는 텍스트와 새로운 연구를 바탕으로 작품의 통일성과 후궁의 역할, 종교와 정치 등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과 비평이 이루어지고 있다.[1]

오랜 기간 표준 판본이었던 폴 베르니에의 주석본과 로버트 섀클턴의 무슬림 연대기 연구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로제 메르시에, 로제 로페르, 폴린 크라 등은 작품의 통일성과 후궁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후 서간체 형식, 후궁의 구조, 우스베크의 모순 등에 대한 연구가 이어졌다.[1]

최근에는 종교와 정치에 대한 분석이 주를 이루며, 후궁의 역할은 여성, 환관, 동서양 문화 대조와 함께 부각되고 있다.[1]

4. 1. 사회 비평

페르시아인들은 프랑스 사회의 정치, 종교,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우스벡과 리카는 서신을 통해 당시 프랑스 사회의 현실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특히, 트롤로다이트에 관한 우화(서한 11-14), 인구 통계학에 관한 분석(서한 109-118), 생 빅토르 도서관 방문기(서한 128-132) 등은 권력, 기후의 영향, 식민지화 비판과 같은 주제를 다루며, 이후 법의 정신에서 더 발전된 형태로 나타날 내용들을 예고한다.[1]

4. 1. 1. 사회 풍속

파리에서 페르시아인들은 스스로를 표현하고 정부 기관에서 살롱 풍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이끌어낸다. 우스벡은 질문을 많이 하는 반면, 리카는 프랑스 생활에 더 매력을 느낀다. 두 사람 모두 몽테스키외의 풍자적 어조를 유지한다.[1]

리카는 어느 날 15분 만에 세 가지 도덕적 질문, 네 가지 역사적 문제, 다섯 가지 물리학적 요점을 결정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그날의 소식에 대해서도 결정했다. 리카는 그에게 페르시아에 대해 말했지만, 그는 타베르니에와 샤르댕의 권위를 바탕으로 리카를 반박했다.[1]

이 이야기는 앵발리드가 막 완공되고 카페와 극장이 번성하는 파리에서 일어났다. 의회의 기능, 재판소, 카푸친, 예수회 등의 종교 단체, 튈르리, 팔레 루아얄 등의 공공 장소, 맹인들을 위한 퀸즈뱅트(300명) 병원, 앵발리드 등의 국가 재단이 관찰된다. 두 페르시아인의 존재는 판화 덕분에 대중적인 현상이 된다.[1]

토론이 벌어지는 카페는 이미 극장과 오페라처럼 공공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아직도 자비로 현자의 돌을 찾는 사람들이 있고, 소식통과 정기간행물은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파리 대학교, 아카데미, 과학, 불 ''Unigenitus'' 등 모든 것이 독자의 눈앞에 나타난다.[1]

우스벡은 종교적 비교에 괴로워한다. 그는 무슬림이 되는 것을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고, 기독교의 몇 가지 측면(삼위일체, 성찬례)에 대해 궁금해하면서, 왜 일부 음식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는지 묻는다. 그는 또한 사회적 유용성에 관해 두 종교, 심지어 모든 종교를 동화한다.[1]

5. 주제

이 작품은 비교 종교, 망명, 인본주의(휴머니즘), 국가 정체성 및 민족주의, 인종, 이성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5. 1. 비교 종교

비교종교학은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비교하고, 종교적 관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본주의이성은 종교적 믿음과 관계없이 인간의 가치와 이성을 중시하는 사상으로, 종교 간의 이해와 화합을 돕는 역할을 한다.

5. 2. 망명과 정체성

망명은 국가 정체성과 개인 정체성의 문제를 야기한다. 페르시아인의 편지에서 우즈베크와 리카의 망명 생활은 이러한 문제를 잘 보여준다. 이들은 비교 종교, 인본주의, 이성 등의 가치를 통해 정체성 혼란을 극복하려 한다. 하지만 국가 정체성과 민족주의는 여전히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인종 문제 또한 이들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5. 3. 이성과 계몽주의

6. 영향

몽테스키외는 1757년에 쓴 "Quelques remarques sur les ''Lettres persanes''"에서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소설이라고 처음 언급했다. 이 책은 처음에는 소설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간체 소설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1721년 당시에는 논쟁적이고 정치적인 정기 간행물을 연상시켰을 가능성이 높았다. 마담 뒤누아예의 ''Lettres historiques et galantes''(1707–1717)는 두 여성의 서신 형태로 루이 14세 통치 말기와 레장스의 시작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페르시아인의 편지''는 이미 어느 정도 확립된 형식의 유행을 확인하는데 기여했으며, 보이에 다르장의 ''Lettres juives''(1738)와 ''Lettres chinoises''(1739) 등 수많은 모방작을 낳았다. 몽테스키외는 ''Mes Pensées''에서 "나의 ''페르시아인의 편지''는 사람들에게 서한 소설을 쓰는 법을 가르쳤다"라고 언급했다.

6. 1. 문학적 영향

몽테스키외는 "Quelques remarques sur les ''Lettres persanes'' (1757)"에서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소설이라고 처음 언급했다. 이 글은 "예상치 못하게 '페르시아인의 편지'에서 일종의 소설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큰 호응을 얻었다. 시작과 전개, 결말을 볼 수 있으며,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로 시작한다. 처음 독자들과 작가에게 이 책은 소설, 더 나아가 당시에는 어떤 의미에서도 확립된 장르가 아니었던 "서간체 소설"로 여겨지지 않았다. (현재는 종종 그렇게 분류된다).

1721년에 "편지" 모음집은 ''Lettres historiques'' (1692–1728)나 예수회의 유명한 Lettres édifiantes et curieuses|프랑스어 (1703–1776)와 같이 기본적으로 논쟁적이고 정치적인 정기 간행물을 연상시켰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마담 뒤누아예의 ''Lettres historiques et galantes'' (1707–1717)는 두 여성의 서신 형태로 루이 14세 통치의 말기와 레장스의 시작을 연대기로 제공했다.

''페르시아인의 편지''는 이미 어느 정도 확립된 형식의 유행을 확인하는 데 기여했다. 이 작품은 보이에 다르장의 ''Lettres juives'' (1738)와 ''Lettres chinoises'' (1739), 풀랭 드 생푸아의 ''Lettres d’une Turque à Paris, écrites à sa sœur'' (1730) (''페르시아인의 편지''와 함께 여러 번 출판됨), 프랑수아즈 드 그라피니의 ''Lettres d’une Péruvienne'' (1747), 리처드슨의 서한 소설 등 수많은 모방작들을 낳았다.

이러한 작품들은 1721년과 1754년 사이에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서간체 소설"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몽테스키외는 ''Mes Pensées''에 "나의 ''페르시아인의 편지''는 사람들에게 서한 소설을 쓰는 법을 가르쳤다"(1621번)라고 언급했다.

참조

[1] 서적 Lettres persanes https://gallica.bnf.[...] P. Brunel 2016-06-13
[2] 서적 Lettres persanes http://gallica.bnf.f[...] P. Brunel 2020-01-03
[3] 문서 電子書籍も同時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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