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로치청절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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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로치청절도사는 당나라 때 요동 지역 방어를 위해 설치된 평로군에서 시작하여, 안사의 난 이후 산둥 지역을 장악하며 세력을 확장한 번진이다. 719년 평로군사에서 평로군 절도사로 승격되었으며, 안록산의 난을 거치며 치청(淄靑)이라는 명칭이 추가되어 평로치청절도사로 불리게 되었다. 이정기 집권 시기에는 발해, 신라와의 중계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키웠다. 당나라 조정과 대립하며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다가 이사도의 난을 거치며 쇠퇴하였고, 오대십국 시대를 거쳐 송나라 때 명예직으로 전환되면서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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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는 당나라 후기 평로치청 번진의 절도사로, 이정기의 손자이자 이납의 아들이며 형 이사고의 뒤를 이었으나 당 헌종의 승인을 받지 못해 반란을 일으키고 당나라의 토벌 작전으로 몰락했다. - 평로군 절도사 (당) - 안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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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로치청절도사 | |
|---|---|
| 평로치청절도사 | |
| 정보 | |
| 존속 기간 | 756년 ~ 905년 |
| 국가 | 당나라 |
| 별칭 | 치청 (淄青) 평로 (平盧) |
| 위치 | |
| 수도 | 익도 (益都, 현재의 산둥 성칭저우) |
| 관할 구역 | 산둥 성 중부 및 동부 랴오닝 성 서부 허베이 성 북동부 |
2. 역사
719년 요동반도 영주(지금의 랴오닝성 차오양시)에 실위와 말갈 세력에 대한 방어를 목적으로 평로군(平盧軍)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평로군사(平盧軍使)였다가 평로군 절도사(平盧軍節度使)·경략하북탁지사(經略河北度支使)로 승격되었다. 740년경 당나라 조정은 당시 평로군 절도사에게 칙령을 내려 발해와 흑수(黑水)에 대한 절도(節度)를 위임했다.
742년 당현종은 안록산을 평로절도사 겸 영주도독으로 임명하여 방위 책임을 맡겼다. 755년 안록산이 양귀비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평로군은 그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그러나 평로진 내부에서는 왕현지, 후희일, 이정기 등을 중심으로 안록산에 반대하는 세력이 나타나 그가 임명한 평로절도사 서귀도를 살해하고 당나라 조정 편에 섰다.
안사의 난 기간 중 평로군은 산둥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761년 청주를 함락하는 등 반란군으로부터 산둥 일대의 여러 고을을 빼앗았다. 762년 안사의 난이 마무리되자 평로군은 반란 진압에 참여한 공으로 치주, 청주, 기주, 밀주, 제주, 해주 등 6개 주를 관할하게 되었으며, 절도사 관직명에 치주와 청주의 앞글자를 따서 '치청(淄靑)'이 추가되었다. 이때부터 평로군은 산둥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화하였다.
765년 이회옥(뒷날 이정기로 개명)이 절도사 후희일을 쫓아내고 스스로 절도사에 올랐다. 이후 이정기, 이납, 이사고, 이사도 4대에 걸쳐 사실상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며 할거하였다. 781년 이정기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이납은 조정의 승인 없이 병사를 일으켜 스스로 유후(留後)를 자칭하며 절도사 지위를 승계하려 하였다. 당덕종은 이납의 절도사 계승을 거절하였고, 이납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783년에는 당나라 덕종이 봉천으로 피신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784년, 당나라는 번진의 반란을 불문에 부치고 그들의 독립성을 인정하였다.
당나라 헌종 즉위 후 번진 억압 정책으로 번진과 당나라 조정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815년, 이사도는 조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819년, 당나라 군대가 운성을 함락시키고 이사도를 처형하면서 이씨(李氏) 일가의 할거는 종식되었다.
황소의 난 시기에는 왕경무·왕사범 부자가 평로군 절도사직을 세습하며 잠시 반독립 세력을 형성하기도 하였으나, 905년 주전충에게 토벌되어 항복하면서 평로군은 주전충의 지배하에 편입되었다.
후량 시기 절도사 역임자는 다음과 같다.
915년 이후 924년까지는 후임자가 불명이다.
후당 시기 절도사 역임자는 다음과 같다.
후진 말기, 940년부터 944년까지 평로군 절도사였던 양광원은 요나라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수정에 의해 진압되었다.
2. 1. 초기 평로군: 요동 방어
719년, 요동반도 영주(營州, 지금의 랴오닝성 차오양시)에 실위와 말갈 세력에 대한 방어를 목적으로 평로군(平盧軍)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평로군사(平盧軍使)였다가 평로군 절도사(平盧軍節度使)·경략하북탁지사(經略河北度支使)로 승격되었다. 740년경 당나라 조정은 당시 평로군 절도사에게 칙령을 내려 발해와 흑수(黑水)에 대한 절도(節度)를 위임했다. 742년 당현종은 안록산을 평로절도사 겸 영주도독으로 임명하여 방위 책임을 맡겼다. 755년 안록산이 양귀비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평로군은 그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그러나 평로진 내부에서는 왕현지, 후희일, 이정기 등을 중심으로 안록산에 반대하는 세력이 나타나 그가 임명한 평로절도사 서귀도를 살해하고 당나라 조정 편에 섰다.2. 1. 1. 평로군의 설치와 역할
719년, 요동반도 영주(營州, 지금의 랴오닝성 차오양시)에 실위와 말갈 세력에 대한 방어를 목적으로 평로군(平盧軍)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평로군사(平盧軍使)였다가 평로군 절도사(平盧軍節度使)·경략하북탁지사(經略河北度支使)로 승격되었다. 740년경에는 당나라 조정이 당시 평로군 절도사에게 칙령을 내려 발해와 흑수(黑水)에 대한 절도(節度)를 위임하기도 했다.2. 1. 2. 안록산의 발흥과 평로군
742년 당현종은 안록산을 평로절도사 겸 영주도독으로 임명하여 방위 책임을 맡겼다. 755년 안록산은 양귀비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평로군은 안록산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평로진 내부에서는 왕현지, 후희일, 이정기 등을 중심으로 안록산에 반대하는 세력이 나타나, 안록산이 임명한 평로절도사 서귀도를 살해하고 당나라 조정에 가담했다.2. 2. 치청평로군: 산둥으로의 이동
719년, 평로군사(平盧軍使)를 평로군 절도사(平盧軍節度使)·경략하북탁지사(經略河北度支使)로 승격시키고 영주(營州, 지금의 랴오닝성 차오양시)에 본부를 둔 것이 이 번진의 시작이었다. 740년을 전후하여 당나라 조정은 당시의 평로군 절도사 오지의(烏知義)에게 칙령을 내려 "발해와 흑수(黑水)는 최근 국가로 복귀하였으니, 역시 경에게 절도(節度)를 위임한다."라고 하였다.당현종 말엽인 742년 안록산이 평로절도사 겸 영주도독으로 임명되었다. 755년 안녹산이 양귀비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평로진 내부에서 반대 세력이 나타나 치청평로군의 중추 세력을 이루었다. 왕현지와 안녹산의 부장 후희일, 이회옥(뒷날 이정기로 개명) 등은 안녹산이 임명한 평로절도사 서귀도를 죽이고 당나라 조정 편에 섰다. 758년 조정은 왕현지를 평로절도사로 임명했으나, 이듬해 병사하자 이회옥이 왕현지의 아들을 살해하고 후희일을 추대하여 그 자리를 계승하게 하였다.
2. 2. 1. 안사의 난과 산둥 진출
안사의 난 기간 중 평로군은 산둥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761년, 청주를 함락하는 등 반란군으로부터 산둥 일대의 여러 고을을 빼앗았다. 762년 안사의 난이 마무리되자 평로군은 반란 진압에 참여한 공으로 치주, 청주, 기주, 밀주, 제주, 해주 등 6개 주를 관할하게 되었으며, 절도사 관직명에 치주와 청주의 앞글자를 따서 '치청(淄靑)'이 추가되었다. 이때부터 평로군은 산둥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화하였다.2. 2. 2. 이정기의 집권과 번진 강화
765년 이회옥(뒷날 이정기로 개명)이 절도사 후희일을 쫓아내고 스스로 절도사에 올랐다. 당 대종은 쫓겨난 후희일을 후대하는 한편, 이회옥에게 정기라는 이름을 내리고 후임 절도사로 임명하면서 발해와 신라와의 외교 교섭을 관장하는 발해신라양번사 직위를 추가로 내렸다. 이후 평로군은 발해/신라와 주변 번진과의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세력을 확장하였다.이정기는 775년 당 대종의 명에 따라 반란을 일으킨 위박절도사 전승사를 토벌하고 위박 번진의 영지인 덕주를 장악하는 등 산동 지역의 10개 주에 걸쳐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776년 변송에서 이영요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토벌하면서 서주, 조주, 복주 등 5개 주를 더 장악하여 15개 주에 이르는 큰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778년 치소(治所)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겼으며, 조정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주변 번진과 교류하면서 세력을 유지하였다.
2. 3. 조정과의 대립과 이씨 할거
742년 안록산이 평로절도사 겸 영주도독으로 임명되어 방위 책임을 맡았다. 755년 안록산은 양귀비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평로진은 그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이때 평로진 내부에서 왕현지, 후희일, 이회옥(훗날 이정기로 개명) 등을 중심으로 안록산이 임명한 평로절도사 서귀도를 제거하고 당나라 조정에 가담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758년, 조정은 왕현지를 평로절도사로 임명했으나 이듬해 병사하자, 이회옥이 왕현지의 아들을 살해하고 후희일을 추대하여 그 자리를 계승하게 하였다.안사의 난 동안 평로군은 산둥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안록산의 부장이었으나 당나라에 귀순한 평로절도사 후희일은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의 위협을 받자 761년 청주를 함락하는 등 산둥 일대의 여러 고을을 빼앗았다. 762년 안사의 난이 마무리되자 평로군은 반란 진압에 참여한 공으로 치주, 청주, 기주, 밀주, 제주, 해주 등 6개 주를 관할하게 되었으며, 평로절도사 직위에 치주와 청주 2주의 이름을 따서 치청(淄靑)이 추가되었다. 이때부터 평로군은 산둥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화하였다.
이후 평로군은 이정기, 이납, 이사고, 이사도 4대에 걸쳐 사실상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며 할거하였다.
2. 3. 1. 이유악의 난과 평로군의 동조
765년부터 819년까지 평로치청 절도사(평로치청 번진)의 4대 절도사를 역임한 이정기 - 이납 - 이사고 - 이사도 4부자는 사실상 당나라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누렸다. 781년 이정기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이납은 조정의 승인 없이 병사를 일으켜 스스로 유후(留後)를 자칭하며 절도사 지위를 승계하려 하였다. 당덕종은 이납의 절도사 계승을 거절하였고, 이납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납의 반란에는 성덕군 절도사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 또한 동조하였다.2. 3. 2. 이납의 반란과 당의 양보
李惟岳|이유악중국어이 죽은 뒤, 782년에 왕무준, 주도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납은 제왕(齊王)을 칭했다. 783년에는 당나라 덕종이 봉천으로 피신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784년, 당나라는 번진의 반란을 불문에 부치고 그들의 독립성을 인정하였다. 이납은 농서군왕으로 책봉되었다.2. 3. 3. 이사도의 난과 평로군 소멸
당나라 헌종 즉위 후 번진 억압 정책으로 번진과 당나라 조정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815년, 이사도는 조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819년, 당나라 군대가 운성을 함락시키고 이사도를 처형하면서 이씨(李氏) 일가의 할거는 종식되었다.2. 4. 이씨 할거 이후
안사의 난 당시 평로군은 산동 방면으로 남하하여, 761년 청주를 함락하는 등 반란군으로부터 산동 일대의 여러 고을을 빼앗았다. 762년 안사의 난이 진압된 후 평로군은 반란 진압에 참여한 공으로 치주, 청주, 기주, 밀주, 제주, 해주 등 6개 주를 관할하게 되었고, 절도사는 평로절도사 직위에 더해 치주와 청주 2주의 이름을 따서 치청(淄靑)이 추가되었다. 이때부터 평로군은 산동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화하였다.2. 4. 1. 평로군의 쇠퇴
882년 황소의 난 말기까지 명목상 존속하였다. 평로군은 천평군, 연해절도사(태녕군) 등으로 영지가 분할되었다. 치청절도사 관할은 치주, 청주, 제주, 등주, 내주 5개 주로 축소되었다.2. 4. 2. 왕경무, 왕사범 부자의 할거
882년 황소의 난 말기부터 약 20년간, 왕경무·왕사범 부자가 절도사 자리를 계승하며 일시적으로 반독립 세력으로 할거하였다. 905년 주전충에게 토벌되어 왕사범이 항복하였고, 이후 평로군은 주전충의 지배하에 편입되었다.2. 5. 오대십국 시대와 평로군 소멸
안사의 난 이후, 평로군은 산둥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761년 당나라에 귀순한 평로절도사 후희일은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의 위협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여 청주를 함락하는 등 산둥 일대의 여러 고을을 빼앗았다. 762년 안사의 난이 마무리되자 평로군은 반란 진압에 참여한 공으로 치주, 청주, 기주, 밀주, 제주, 해주 등 6개 주를 관할하게 되었으며, 절도사 명칭은 기존 평로절도사에 치주와 청주를 의미하는 '치청(淄靑)'이 추가된 치청평로절도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평로군은 산둥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화하였다.황소의 난 시기에는 왕경무·왕사범 부자가 평로군 절도사직을 세습하며 잠시 반독립 세력을 형성하기도 하였으나, 905년 주전충에게 토벌되어 항복하면서 평로군은 주전충의 지배하에 편입되었다.
2. 5. 1. 후량, 후당 시기의 평로군
882년부터 약 20년 간, 왕경무·왕사범 부자가 절도사 자리를 계승하며 일시적으로 반독립 세력으로 할거하기도 하였다. 905년에 왕사범은 주전충에게 토벌되어 항복하였으며, 이후 평로군은 주전충의 지배하에 편입되었다.후량 시기 절도사 역임자는 다음과 같다.
915년 이후 924년까지는 후임자가 불명이다.
후당 시기 절도사 역임자는 다음과 같다.
이 시기 평로군은 청주(靑州), 치주(淄州), 등주(登州), 내주(萊州) 4개 주를 관할하였다.
2. 5. 2. 후진 시기 양광원의 반란
후진 말기, 940년부터 944년까지 평로군 절도사였던 양광원은 요나라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수정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로 인해 944년 말부터 946년 말까지 평로군은 청주방어사(靑州防禦使)로 격하되었다.2. 5. 3. 송나라 시기 평로군 소멸
당나라 현종 시기인 719년, 평로군사(平盧軍使)를 평로군 절도사(平盧軍節度使)·경략하북탁지사(經略河北度支使)로 승격시키고 랴오닝성 영주에 본부를 둔 것이 평로군의 시작이었다. 740년경 당나라 조정은 평로군 절도사 오지의(烏知義)에게 "발해와 흑수(黑水)는 최근 국가로 복귀하였으니, 역시 경에게 절도(節度)를 위임한다"는 칙령을 내렸다.742년 안록산이 평로절도사 겸 영주도독으로 임명되었다. 755년 안록산은 양귀비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평로군은 안록산의 근거지 중 하나가 되었다. 이때 평로군 내부에서 왕현지, 후희일, 이회옥(이정기로 개명) 등이 반란에 반대하여 당나라 조정 편에 섰다. 758년 왕현지가 평로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다음 해 병사하였고, 이회옥이 왕현지의 아들을 살해하고 후희일을 추대하였다.
안사의 난 동안 평로군은 산둥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761년 당나라에 귀순한 평로절도사 후희일은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의 위협을 피해 청주를 함락하는 등 산둥 일대를 장악했다. 762년 안사의 난이 끝나자 평로군은 치주, 청주, 기주, 밀주, 제주, 해주 등 6개 주를 관할하며 치청(淄靑)이 추가된 치청평로군(淄靑平盧軍)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평로군은 산둥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바뀌었다.
황소의 난 말기인 882년부터 약 20년간 왕경무·왕사범 부자가 절도사직을 세습하며 반독립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 905년 왕사범은 주전충에게 토벌되어 항복하였고, 평로군은 주전충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3. 역대 절도사
平盧淄靑節度使|평로치청절도사중국어의 역대 절도사는 다음과 같다.
| 시기 | 이름 | 재위 기간 |
|---|---|---|
| 당나라 시기 | ||
| 이씨 할거 이전 | 왕현지 | 758년 ~ 759년 |
| 후희일 | 759년 ~ 765년 | |
| 李正己|이정기중국어 | 765년 ~ 781년 | |
| 이씨 할거 시대 | 이납 | 781년 ~ 793년 |
| 이사고 | 793년 ~ 807년 | |
| 이사도 | 807년 ~ 819년 | |
| 이씨 할거 이후 | 왕경무 | 882년 ~ ? |
| 왕사범 | ? ~ 905년 | |
| 한건 | 906년 ~ 910년 | |
| 오대십국 시대 | ||
| 후량 | 하덕륜 | 910년 ~ 913년 |
| 장만진 | 913년 ~ 914년 | |
| 원상선 | 914년 | |
| 하덕륜 (재임) | 914년 ~ 915년 | |
| 불명 | 915년 ~ 924년 | |
| 후당 | 부습 | 924년 ~ 926년 |
| 곽언위 | 926년 ~ 928년 | |
| 왕건립 | 928년 ~ 930년 | |
| 왕안구 | 930년 ~ 932년 | |
| 방지온 | 932년 ~ 936년 | |
| 후진 | 왕건립 (재임) | 936년 ~ 940년 |
| 양광원 | 940년 ~ 944년 | |
| 양승신 | 947년 | |
| 후한 | 유수 | 947년 ~ 950년 |
| 후주 | 부언경 | 950년 ~ 952년 |
| 왕준 | 953년 | |
| 상사 | 953년 ~ 954년 | |
| 이홍의 | 954년 ~ 958년 | |
| 안심기 | 958년 ~ 959년 | |
※944년 말부터 946년 말까지는 양광원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청주방어사(靑州防禦使)로 격하되었다.
※양승신은 요나라에서 임명되었다.
4. 관할 지역
요동반도의 영주(營州, 지금의 랴오닝성 차오양시) 일대가 평로군의 원래 관할 구역이었다. 평로군은 실위와 말갈 세력에 대한 방비를 목적으로 한 번진이었다. 719년 평로군사(平盧軍使)가 평로군 절도사(平盧軍節度使)·경략하북탁지사(經略河北度支使)로 승격되면서 영주에 본부를 둔 것이 이 번진의 시작이었다. 740년을 전후하여 당나라 조정은 당시의 평로군 절도사 오지의(烏知義)에게 칙령을 내려 "발해와 흑수(黑水)는 최근 국가로 복귀하였으니, 역시 경에게 절도(節度)를 위임한다."라고 하였다.
755년 안록산이 양귀비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평로진 내부에서 반대 세력이 나타났다. 이들은 치청평로군의 중추 세력을 이루었다. 요동도호 왕현지와 안녹산의 부장 후희일, 이회옥(뒷날 이정기로 개명) 등을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은 안녹산이 임명한 평로절도사 서귀도를 모살하고 당나라 조정의 편을 들었다. 조정은 758년 왕현지를 평로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안사의 난 기간동안 평로군은 산동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761년에는 청주를 함락하는 등 반란군으로부터 산동 일대의 여러 고을을 빼앗았다. 762년에 안사의 난이 마무리되자 평로군은 반란 진압에 참여한 공으로 치주, 청주, 기주, 밀주, 제주, 해주 등 6개 주를 관할하게 되었으며, 그 절도사는 평로절도사 직위에 더해 관하 치주와 청주 2주의 이름을 따서 직위에 치청(淄靑)이 추가로 관직명에 붙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평로군은 산동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화하였다.
765년 이회옥이 절도사 후희일을 쫓아내고 스스로 절도사에 올랐다. 이후 평로군은 발해/신라와 주변 번진과의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정기는 775년에 위박 번진의 영지인 덕주를 장악하고, 776년에는 서주, 조주, 복주 등 5개 주를 더 장악하여 15개 주에 이르는 큰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778년에 번진의 치소(治所)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겼다.
882년부터 약 20년 간, 왕경무·왕사범 부자가 절도사 자리를 계승하며 일시적으로 반독립 세력으로 할거하기도 하였다. 905년에 왕사범은 주전충에게 토벌되어 항복하였으며, 이후 평로군은 주전충의 지배하에 편입되었다.
5. 평로군과 신라의 관계
이정기 시기, 평로군은 발해와 신라 사이의 중계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었다. 819년, 신라 헌덕왕은 당나라의 요청으로 김웅원 장군을 파병하여 이사도의 난을 진압하는 것을 지원했다.
6. 평로군 출신 인물
- 성예
- 유심
- 하로기
- 한희재
- 두정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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