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피리오 디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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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30년 멕시코 오아하카에서 태어난 군인, 정치인으로, 멕시코-미국 전쟁과 프랑스 개입기에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187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1884년부터 1911년까지 장기 집권하며 '포르피리아토' 시대를 열었다. 디아스는 권위주의적 통치와 외국 자본 유치를 통해 경제 발전을 이끌었지만, 빈부 격차 심화와 정치적 탄압으로 1910년 멕시코 혁명을 초래하여 망명했다. 그는 1915년 프랑스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멕시코 혁명 이후 부정적으로 평가받았으나, 근대화를 이룩한 공로로 최근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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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피리오 디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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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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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호세 데 라 크루스 포르피리오 디아스 모리 |
출생일 | 1830년 9월 15일 |
출생지 | 오아하카 시, 멕시코 |
사망일 | 1915년 7월 2일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
안장 장소 | 몽파르나스 묘지, 파리 |
정당 | 자유당 |
직업 | 군인, 정치인 |
배우자 | 델피나 오르테가 디아스 (1867년 결혼, 1880년 사망) 카르멘 로메로 루비오 (1881년 결혼) |
자녀 | 8명 |
부모 | 호세 파우스티노 디아스, 마리아 페트로나 모리 |
군 경력 | |
소속 | 멕시코군 |
복무 기간 | 1848년–1876년 |
계급 | 장군 |
참전 전투 | 미국-멕시코 전쟁 아유틀라 혁명 개혁 전쟁 칼풀랄판 전투 제2차 프랑스-멕시코 전쟁 라스 쿰브레스 전투 푸에블라 전투 제2차 푸에블라 전투 오아하카 공성전 산후안바우티스타 전투 미아우아틀란 전투 라 카르보네라 전투 제3차 푸에블라 전투 산 로렌소 언덕 전투 멕시코 시 포위전 노리아 계획 산 마테오 전투 툭스테펙 혁명 테코악 전투 |
정치 경력 | |
직위 1 | 멕시코 대통령 |
임기 시작 1 | 1884년 12월 1일 |
임기 종료 1 | 1911년 5월 25일 |
이전 대통령 1 | 마누엘 곤살레스 플로레스 |
다음 대통령 1 | 프란시스코 레온 데 라 바라 |
부통령 1 | 라몬 코랄 (1904–1911, 직위 재설정) |
직위 2 | 멕시코 대통령 |
임기 시작 2 | 1877년 2월 17일 |
임기 종료 2 | 1880년 12월 1일 |
이전 대통령 2 | 후안 N. 멘데스 |
다음 대통령 2 | 마누엘 곤살레스 플로레스 |
직위 3 | 멕시코 대통령 |
임기 시작 3 | 1876년 11월 28일 |
임기 종료 3 | 1876년 12월 6일 |
이전 대통령 3 | 호세 마리아 이글레시아스 |
다음 대통령 3 | 후안 N. 멘데스 |
직위 4 | 오아하카 주지사 |
임기 시작 4 | 1882년 12월 1일 |
임기 종료 4 | 1883년 1월 3일 |
이전 주지사 4 | 호세 마리아노 히메네스 |
다음 주지사 4 | 호세 마리아노 히메네스 |
직위 5 | 멕시코 개발, 식민지화 및 산업부 장관 |
대통령 5 | 마누엘 곤살레스 플로레스 |
이전 장관 5 | 비센테 리바 팔라시오 |
다음 장관 5 | 카를로스 파체코 비야로보스 |
임기 시작 5 | 1880년 12월 1일 |
임기 종료 5 | 1881년 6월 27일 |
직위 6 | 멕시코 연방구 주지사 |
이전 주지사 6 | 토마스 오호란 |
다음 주지사 6 | 후안 호세 바스 |
임기 시작 6 | 1867년 6월 15일 |
임기 종료 6 | 1867년 8월 14일 |
2. 젊은 시절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30년 9월 5일 오아하카주 오아하카에서 원주민 어머니와 크리오요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87] 아버지 호세 데 라 크루스는 여관주인이었으나, 디아스가 어렸을 때 사망했다.[87]
15세에 어머니 마리아 페트로나 모리 코르테스의 권유로 로마 가톨릭교회 세미나리오 콘실리아에 입학하여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1850년 베니토 후아레스에게 영감을 받아 과학 연구소 (Instituto de Ciencias)에 입학해 법을 공부했다.[87] 그러나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 발발로 군에 입대하면서 인생의 전환을 맞았다.[87] 이후 여러 직업을 거쳐 1855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에 맞서 싸우던 자유주의 게릴라 부대에 합류,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1. 출생과 가정 환경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30년 9월 15일 멕시코 오아하카주의 오아하카에서 원주민 어머니와 크리오요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87] 9월 15일은 미겔 이달고의 돌로레스의 함성 전야로, 멕시코 독립 전쟁을 촉발한 멕시코 역사에서 중요한 날짜이다.[13][14]
디아스의 아버지 호세 디아스는 크리오요(주로 스페인계 멕시코인)였다.[14][15] 어머니는 믹스텍 출신이었다. 호세 디아스는 용설란을 심고, 오아하카 시에 자신의 사업 생산품을 판매하는 길가 여관을 열었다. 호세 데 라 크루스는 디아스가 세 살 때인 1833년 콜레라로 사망했다.[14][15] 이후 어머니 파트로나 모리가 여러 자녀를 키우면서 여관을 운영했다.
디아스는 어머니에 의해 15세에 로마 가톨릭교회 신학교에 보내졌으나, 1846년 미국과의 멕시코-미국 전쟁 발발로 군에 입대하기로 결심하면서 그의 삶은 전환을 맞게 되었다.[87]
2. 2. 교육과 종교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30년 9월 5일 오아하카주 오아하카에서 원주민 어머니와 크리오요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87] 15세 때 어머니 마리아 페트로나 모리 코르테스의 권유로 로마 가톨릭 교회 세미나리오 콘실리아에 입학했다.
6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한때 목수 견습생으로 일하기도 했다.[16] 1845년, 15세에 대부이자 오악사카 대성당 참사회원이자 훗날 주교가 된 호세 아구스틴 도밍게스의 후원으로 오악사카 교구 신학교(Colegio Seminario Conciliar de Oaxaca)에 입학하여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1849년, 사제가 될 소명이 없다고 판단,[16]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률 공부로 전향했다.[15][17] 오악사카 예술 과학 연구소의 법학 교수이자 원주민 판사였던 돈 마르코스 페레스와 친구가 되었고, 그를 통해 당시 오악사카 주지사이자 훗날 멕시코 대통령이 되는 베니토 후아레스를 알게 되었다.[17] 1850년, 베니토 후아레스에게 영감을 받아 과학 연구소 (Instituto de Ciencias)에 입학해 법을 공부했다.[87] 1853년(23세)에 민법과 교회법 첫 시험에 합격했다.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자 오악사카 군대 대대에 합류했다. 오악사카 예술 과학 연구소에서 훈련을 받고 전술과 전략에 관한 강의를 들었지만, 1848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2. 3. 군 입대와 초기 경력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30년 9월 5일 오아하카주 오아하카에서 원주민 어머니와 크리오요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87] 그의 아버지는 여관주인이었으나 디아스가 유아였을 때 사망했다.[87]디아스는 15세에 어머니에 의해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가 되기 위해 세미나리오 콘실리아에 보내졌다. 그러나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기로 결심했다.[87] 1849년, 사제가 될 소명이 없다고 판단한 디아스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률 공부로 전향했다.[15][17]
1850년, 자유주의자 베니토 후아레스에게 영향을 받은 디아스는 과학 연구소 (Instituto de Ciencias)에 입학해 법을 공부했다.[87] 1853년에는 민법과 교회법 첫 시험에 합격했다.
1854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대통령에 대한 반란에 참여했고, 1855년 나야리트주 이스트란 시장에 취임했다. 이후 프랑스의 멕시코 원정에 맞서 육군 장교로서 여러 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1862년 푸에블라 전투에서는 기병대를 지휘하여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다.
3. 군사 경력과 정치 입문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62년 5월 푸에블라 전투에 참가한 뒤 5년 동안 프랑스와의 전투를 계속하였다. 막시밀리안이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으나, 프랑스의 패배와 함께 물러나고 1867년 공화파 정부가 다시 들어설 때까지 그는 유능한 군인이었다. 프랑스 군대와의 전쟁이 끝나자 베니토 후아레스는 경제∙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면서 군대를 축소시켰다. 9만 명의 군대는 한꺼번에 2만 명으로 감소되었다. 실업 군인들은 농촌이나 도시에서 무기를 소지한 채 많은 피해를 주었고, 이들은 국내 각지에서 갱이 되어 몸값을 요구하는 유괴나 폭행을 행하고 마을이나 농장을 약탈하였다.
이때 디아스는 1867년 호헌파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지만, 후아레스에게 패배했다. 1871년 6월 대선에 다시 출마했지만 역시 후아레스에게 패배했다. 1872년 7월 18일 후아레스가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최고 장관이었던 레르도가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을 계승하여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876년 레르도가 재선 의지를 밝히고 법원과 갈등을 빚는 틈을 타서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테코아쿠에서 레르도의 군대를 대파하고 11월 21일 레르도는 수도를 버리고 아카풀코로 달아났고, 같은 날 디아스는 수도에 개선하여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 1877년 4월 1일 의회는 포르피리오 디아스를 대통령으로 선언하였다.
3. 1. 멕시코-미국 전쟁과 자유주의 진영 합류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자 디아스는 오악사카 군대 대대에 합류했다. 그는 오악사카 예술 과학 연구소(Instituto de Artes y Ciencias, 현재 오악사카 베니토 후아레스 자치 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전술과 전략에 관한 강의를 들었지만, 1848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다.[16]1849년, 디아스는 사제가 될 소명이 없다고 결정하고,[16]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률 공부로 전향하기로 결정했다.[15][17] 그는 오악사카 예술 과학 연구소의 법학 교수이자 원주민 판사였던 돈 마르코스 페레스와 친구가 되었고, 그를 통해 당시 오악사카 주지사였던 훗날 멕시코의 대통령이 될 베니토 후아레스를 알게 되었다.[17] 디아스는 23세였던 1853년에 민법과 교회법 첫 시험에 합격했다.
같은 해에 보수당(Partido Conservador) 쿠데타가 마리아노 아리스타(Mariano Arista)의 자유당(Partido Liberal) 정부를 전복시키고 산타 안나(Santa Anna)를 마지막 독재자로 세웠다. 많은 저명한 자유당원들이 추방되었는데, 베니토 후아레스는 뉴올리언스로 피신했다. 마르코스 페레스는 체포되었지만, 디아스는 그의 형 펠릭스 디아스 모리(Félix Díaz Mori)의 도움으로 감옥에 있는 그와 소통할 수 있었다.
1854년 3월, 자유당 카우딜로(caudillo) 후안 알바레스(Juan Álvarez)가 이끄는 아유틀라 계획(Plan de Ayutla)이 산타 안나에 맞서 일어났다. 알바레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후, 디아스는 오악사카(Oaxaca)에서 도망쳐 자유당 당원 프란시스코 에레라(Francisco Herrera)와 합류했다. 당국은 에레라의 군대를 공격하고 해산시켰고, 디아스는 다시 도망쳐야 했지만, 아유틀라 운동은 점점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자유당이 오악사카 시를 점령하자 디아스는 이스틀란(Ixtlán)의 부현감(subprefect)이 되었다. 부현감으로서 디아스는 오악사카의 병영 반란을 진압하려는 실패한 시도를 도왔지만, 아유틀라 운동은 1855년 8월 산타 안나가 사임하고 망명하면서 결국 승리했다.
3. 2. 개혁 전쟁(1857-1860)과 프랑스 개입(1861-1867)


1857년 헌법 공포에 대한 보수당의 저항으로 디아스의 옛 스승인 베니토 후아레스가 대통령이 된 개혁 전쟁이 발발했다. 디아스는 이 전쟁에서 자유주의파 군인으로 참전하여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15]
1858년 1월, 보수파 장군 마르셀리노 코보스가 오악사카에서 자유주의군을 물리치기 전까지 이크틀란에서 지휘를 유지했다.[44] 이 전투에서 디아스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 4개월 동안 회복해야 했다.[45] 이후 테우안테펙 지역의 주지사이자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50명의 병력을 지휘하며 미국에서 수입된 자금과 무기를 모으는 임무를 맡았다.[46] 그는 후치탄 데 사라고사를 본부로 삼고 2년 동안 보수파에 대한 반복적인 승리를 거두며 중령으로 승진했다.[47]
1860년 8월, 디아스는 자유주의파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준 칼풀랄판 전투에 참여하여 전쟁을 종식시켰다.[50] 그는 대령으로 승진하여 국가 근위대에서 정규군으로 전속되었다.[50]
1861년, 승리한 후아레스 대통령이 수도에 재입성하자 디아스는 오코틀란 출신의 대의원으로 국회에 합류했다.[50] 같은 해 6월, 보수파 장군 레오나르도 마르케스가 수도를 급습하자, 디아스는 의회 의석을 떠나 도시 방어에 참여, 살라틀라코에서 마르케스의 군대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52]
프랑스의 멕시코 원정이 시작될 무렵, 디아스는 장군으로 승진하여 보병 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19] 1862년 5월, 푸에블라 전투에서 디아스는 푸에블라로 이어지는 도로 중 한 곳을 지키는 '오악사카 대대'를 지휘했다. 프랑스군 사령관 샤를 드 로랑세는 로레토와 과달루페 요새를 직접 공격하려 했으나, 멕시코 기병과 보병의 공격으로 격퇴되었다. 디아스는 산호세 렌테리아 농장으로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50]
프랑스군은 푸에블라에서의 패배를 보수당의 지원 부족으로 돌렸지만,[51] 보수당은 프랑스와 협력하여 권력을 되찾는 데 점점 더 마음을 돌렸다. 디아스는 개혁 전쟁에서 한때 맞섰던 레오나르도 마르케스와 전 보수당 대통령 미구엘 미라몬과 같은 많은 사람들과 다시 싸워야 했다. 결국 포르피리오 디아스 역시 프랑스에 합류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거절했다.
1863년, 프랑스군이 멕시코시티를 점령하고 임시 정부를 수립했지만, 디아스는 멕시코 남부에서 저항 운동을 계속했다. 1863년 10월, 디아스는 3,000명의 병력을 지휘하는 멕시코 군대 동부 사단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케레타로, 미초아칸, 멕시코주, 게레로 주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10월 29일에 풍부한 은광 도시인 탁스코를 점령했다. 이후 오악사카를 향해 남쪽으로 진군하면서 더 많은 병력을 모집하여 그의 병력은 8,000명으로 불어났다.
1864년, 디아스는 산후안바우티스타 전투(Battle of San Juan Bautista)에서 타바스코(Tabasco)의 수도를 탈환하고, 미나티틀란을 점령하는 등 프랑스군에 맞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864년 12월, 디아스의 군대는 아카풀코(Acapulco) 항구를 탈환했다.
1865년, 프랑스군은 오악사카 시에 있는 디아스의 작전 기지를 공격했으나,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놓인 디아스는 항복하고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그는 탈출에 성공하여 다시 멕시코군에 합류했다.
1863년 10월 15일, 베니토 후아레스는 그를 사단장으로 임명했고, 같은 달 28일에는 베라크루스, 푸에블라, 오아하카, 트라스칼라 4개 주의 군사 지휘권을 맡겼다. 디아스는 오아하카에서의 군사 작전을 강조하며 프랑스에 맞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했다. 1867년 4월 2일, 디아스는 푸에블라를 점령했고, 같은 해 6월 15일에는 공화당군을 위해 멕시코시티를 해방시켰다.
4. 정치 권력 장악 과정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62년 5월 푸에블라 전투에 참가한 뒤 5년 동안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활약하며 막시밀리언 황제가 물러나고 공화파 정부가 다시 들어선 1867년까지 유능한 군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프랑스 군과의 전쟁이 끝나자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은 군대를 9만 명에서 2만 명으로 축소했고, 이로 인해 실업 군인들이 갱단을 조직하여 사회 문제가 발생했다.[20]
이러한 상황에서 디아스는 1867년과 1871년 대선에 출마했으나 후아레스에게 패배했다. 1872년 후아레스가 사망하고 레르도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876년 레르도가 재선 의지를 밝히자 디아스는 반란을 일으켰다. 테코아쿠에서 레르도의 군대를 격파하고, 11월 21일 레르도가 수도를 버리고 아카풀코로 도망가자 디아스는 수도에 입성하여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 1877년 4월 1일 의회는 디아스를 대통령으로 선언하였다. 그는 "불쌍한 멕시코여! 신은 멀리 있는데 미국과는 너무 가깝도다!"(¡Pobre México! ¡Tan lejos de Dios y tan cerca de los Estados Unidos!es)라는 명언을 남겼다.
4. 1. 후아레스, 레르도와의 갈등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62년 5월 푸에블라에서 벌어진 프랑스와의 전투에 참가한 뒤 5년 동안 전투를 계속하였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던 막시밀리언이 프랑스의 패배와 함께 물러나고 공화파 정부가 다시 들어선 1867년까지 그는 유능한 군인이었다. 프랑스 군대와의 전쟁이 매듭지어지자 베니토 후아레스는 경제,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면서 군대를 축소시켰다. 9만의 군대는 한꺼번에 2만 명으로 감소되었다. 실업 군인들은 농촌이나 도시에서 무기를 소지한 채 많은 피해를 주고 있었다. 이들은 국내의 각지에서 갱이 되어 몸값을 요구하는 유괴나 폭행을 행하고 마을이나 농장을 약탈하였다.[20] 이때 디아스는 1867년 호헌파의 대통령 후보에 추대되었지만, 이 선거에서 후아레스에게 참패를 당했다.
1865년 말,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가 멕시코에서 군사적 수렁에 빠졌다는 결론을 내렸다.[21] 1866년 1월 프랑스 의회 개회식에서 그는 멕시코에서 프랑스군을 철수할 의도를 발표했다.[21] 프랑스는 막시밀리안 황제가 대중적 지지가 부족하여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퇴위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21] 프랑스 당국은 후아레스보다 프랑스의 이익에 더 잘 맞고 굴욕적이지 않은 대안적인 자유주의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고려했고,[21] 디아스가 그러한 정부를 이끌 후보로 제안되었지만, 후아레스에 대한 그의 충성심 때문에 거절되었다.[21] 대안 정부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고, 막시밀리안은 퇴위를 거부했으며, 프랑스는 그를 그의 운명에 맡겨 1867년 3월 마지막 프랑스군이 철수했다.
1867년 8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 디아스는 자신을 후보로 선언했다.[21] 한편, 후아레스 대통령은 헌법에 특정 개정안을 제안했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디아스의 선거 운동 주위에 결집하기 시작했다.[21] 후아레스는 그 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1871년 11월 30일에 끝날 예정인 새로운 임기를 시작했다.[21]
후아레스는 1871년 6월에도 대선에 나왔지만 역시 후아레스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후아레스는 1872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최고장관이었던 레르도가 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직을 계승하였으며, 곧 이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후아레스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방식으로 1871년 선거에 다시 한번 자신의 후보를 선언했고, 디아스를 상대로 다시 승리했다.[21] 디아스의 지지자들은 정부가 선거 부정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하며 후아레스를 합법적인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무기를 들고 일어설 준비를 했다.[21] 그 후의 반란은 1871년 11월 8일 혁명이 선포된 오악사카(Oaxaca)의 동명의 마을에서 발생한 노리아 계획(Plan de la Noria)으로 알려지게 되었다.[21] 전국적으로 지지하는 반란이 일어났지만, 후아레스는 1872년 7월 18일 사망할 때까지 이를 견뎌냈고, 대통령직은 법적 계승자인 레르도에게 넘어갔다.
레르도 대통령은 1872년 7월에 반군에게 사면을 제안했고, 많은 지휘관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디아스 자신은 이를 거부하고 8월 1일에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사면 조건을 수정하고 반란 지역이 완전히 참여할 수 있도록 10월에 있을 예정인 대통령 선거를 연장할 것을 촉구했다.[21] 대통령은 단호했지만 디아스 역시 마찬가지였고, 후속 서신에서 레르도에게 대통령 재선을 금지하는 헌법 개정을 시작할 것을 촉구했다.[21] 더 많은 반군 지휘관들이 항복하고 10월 선거에서 레르도가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하자, 디아스는 자신의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10월 말에 사면을 받기 전에 무조건 항복했다.[21]



1876년 레르도가 재선의 의지를 밝히고 법원과 갈등을 빚는 틈을 타서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테코아쿠에서 레르도의 군대를 대파하고 11월 21일 레르도는 수도를 버리고 아카풀코로 달아났고 이 날 디아스는 수도에 개선하여 그대로 임시 대통령이 되었으며, 1877년 4월 1일 의회는 포르피리오 디아스를 대통령으로 선언하였다. 그는 "불쌍한 멕시코여! 신은 멀리 있는데 미국과는 너무 가깝도다!"(¡Pobre México! ¡Tan lejos de Dios y tan cerca de los Estados Unidos!es)라는 명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디아스는 결국 1874년 공식 군 계급을 회복했지만 은퇴하여 사생활을 보냈고,[20] 이후 1875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마타모로스 맞은편 텍사스주 브라운스빌에 정착했다.[21] 1876년 초, 레르도 대통령은 그 해 6월 예정된 재선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미 인기가 없었던[21] 자신의 대통령직을 망쳐 놓았다. 1876년 1월 15일, 툭스테펙(Oaxaca)에서 툭스테펙 계획이 선포되었다.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혁명의 지도자직을 맡도록 초청받았다.[21]
툭스테펙 계획에 대한 지지가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자 디아스는 3월 22일 귀국했다. 그는 팔로 블랑코 마을에서 수정된 툭스테펙 계획을 발표했다.[21] 이 계획은 레르도 정부에 대한 여러 비판들을 담고 있었는데, 특히 대통령이 선거 과정을 지배하여 자유 선거가 무효화되었다는 주장에 초점을 맞추었다.[21] 디아스는 혁명의 군사 지도자로 선포되었고 레르도는 툭스테펙 계획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주지사들과 함께 축출되었다.[21] 임시 행정부는 먼저 대법원장이자 대통령의 법적 계승자인 호세 마리아 이글레시아스에게 제안되었지만, 그는 헌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계획에 어떤 역할도 거부했다.[21] 혁명가들은 이제 디아스를 대통령으로 인정했다.
마리아노 에스코베도휘하의 연방군이 디아스에게 접근하자 디아스는 도망쳐야 했고, 익숙한 기지인 오악사카에서 혁명에 다시 합류할 계획이었다. 그는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쿠바 의사로 변장하고 베라크루스 행 증기선에 탑승했다. 배가 베라크루스에 접근하자 선상의 군 장교들에게 발각되었다. 배가 해안에서 약 6.44km나 떨어져 있었지만, 디아스는 바다에 뛰어들어 해안으로 헤엄쳐 가려고 했지만, 장교들이 배를 보내 그를 잡아 배로 돌려보냈다.[21] 배의 재무관 알렉산더 코니는 디아스와 같은 프리메이슨이었고 디아스에게 동정적이어서 그가 다시 탈출하도록 도왔고, 디아스는 7월에 오악사카에 도착했다.[21]
11월 15일, 디아스가 오악사카에서 멕시코 시티로 접근하자 그의 군대는 테코악에서 연방군의 알라토레 장군과 충돌했다. 수 시간 동안의 전투 결과는 불확실했지만, 디아스는 증원군이 도착한 후 연방군을 격파했다.[21] 이제 멕시코 시티는 디아스의 군대에게 개방되었고, 레르도 데 테하다는 자신의 대의가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 군인과 민간인 지지자들과 함께 수도를 비우고 나라를 탈출하려 했다.[21]
7월 선거 후, 이글레시아스 휘하에서 살라망카 계획으로 알려진 반란이 발생하여 레르도의 선거가 부정이었고 합법적인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자신이 멕시코의 합법적인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21] 이글레시아스는 자신의 운동을 통합하기를 바라며 디아스와 서신을 교환하기 시작했지만, 레르도가 도망친 후에도 합의에 이를 수 없었다.[21]
디아스는 11월 29일 멕시코 시티에 입성하여 마침내 대통령직에 올랐다.[21] 그는 내각을 구성했지만 이제 이글레시아스의 운동을 분쇄하는 데 집중하고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후자의 근거지인 과나후아토로 향했다.[21]
이글레시아스는 정치적, 군사적 지지에서 대규모 이탈을 경험하기 시작했고, 12월 디아스와의 일련의 협상이 실패한 후, 포기를 결정하고 나라를 떠났다.[21] 승리한 디아스는 1877년 2월 12일 수도에 다시 입성했다.[21]
4. 2. 1876-1880년 집권 초기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76년 세바스티안 레르도 데 테하다 대통령이 재선 의지를 밝히자 반란을 일으켰다. 테코아쿠에서 레르도 군대를 격파하고, 11월 21일 레르도가 수도를 버리고 아카풀코로 도망가자 디아스는 수도에 개선하여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22] 1877년 4월 1일 의회는 디아스를 대통령으로 선언하였다.[22] 그는 "불쌍한 멕시코여! 신은 멀리 있는데 미국과는 너무 가깝도다!"(¡Pobre México! ¡Tan lejos de Dios y tan cerca de los Estados Unidos!es)라는 명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디아스는 1877년 초까지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을 맡지 않았고, 후안 N. 멘데스 장군을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한 후 1877년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통해 대통령직을 차지했다.[22] 역설적으로 그의 정부가 1857년 헌법에 처음으로 개정한 사항 중 하나는 재선을 금지하는 것이었다.[22]
새로운 선거가 디아스 정부의 정당성을 어느 정도 부여했지만, 미국은 이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축출된 레르도 대통령 지지자들이 봉기를 일으켜 디아스 정권에 계속 도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22] 미국이 디아스 정부를 인정하기 전에 멕시코는 미국에 대한 채무 지불과 국경을 넘나드는 아파치족의 습격 억제 등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했다.[23] 1868년에 미-멕시코 청구 위원회가 설립되었고,[23] 디아스는 300000USD를 지불함으로써 미국의 인정을 받았다.[24] 1878년 미국 정부는 디아스 정권을 인정했고, 전 미국 대통령이자 남북 전쟁 영웅인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멕시코를 방문했다.[25] ''참고: 1878년 레르디스타 봉기''
디아스는 그의 첫 번째 임기 동안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 실용적이고 개인적인 접근 방식을 개발했다. 오악사카에서 급진적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했던 정치적 자유주의자였지만, 그는 자유주의 이념가가 아니었고 정치 문제에 대한 실용적인 접근 방식을 선호했다.[26] 그는 정치적 동맹을 후원함으로써 통제력을 유지했다.[26] 그는 권위주의적인 통치자였지만, 선거 제도를 유지하여 자유 민주주의의 허울을 유지했다. 그의 행정부는 시민 사회와 공공 봉기의 억압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후임기의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는 "pan o palo"("빵 아니면 몽둥이")—즉, "관용 아니면 탄압"—의 선택이었다.[27] 디아스는 대통령으로서의 임무를 경제 발전이 가능하도록 내부 질서를 창출하는 것으로 보았다. 군사 영웅이자 기민한 정치가인 디아스는 결국 그 평화(''Paz Porfiriana'')를 성공적으로 확립했고, 이는 "디아스의 주요 업적 중 하나가 되었으며, 1884년 이후의 연이은 재선의 주요 정당성이 되었다."[28]
디아스와 그의 고문들의 미국에 대한 실용주의는 "방어적 근대화" 정책이 되었는데, 이는 북쪽 이웃에 대한 멕시코의 약한 입장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시도였다.[29] 디아스에게는 "신으로부터 너무 멀리, 미국으로부터 너무 가까이"라는 말이 있다고 전해진다.

디아스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그의 정치적 네트워크의 신뢰할 수 있는 구성원 중 한 명인 마누엘 곤살레스 장군이 헌법적인 방식으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5] "곤살레스 잠정 정부"로 불리는 이 4년간의 기간은 때때로 디아스가 대통령직에 꼭두각시를 세운 것으로 여겨지지만, 곤살레스는 스스로 통치했으며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오명 없이 합법적인 대통령으로 여겨졌다.

5. 포르피리아토(1884-1911): 장기 집권과 근대화
디아스는 1884년부터 1911년까지 멕시코를 통치하면서 장기간 집권과 근대화를 동시에 추진했다. 이 시기를 "포르피리아토"라고 부른다.
디아스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자신의 정치적 네트워크(카마리야)에서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인 마누엘 곤살레스 장군을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15] 곤살레스는 헌법적인 절차를 거쳐 대통령이 되었고, 4년간의 임기 동안(이 시기는 "곤살레스 잠정 정부"라고도 불린다[30]) 독자적으로 통치하며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는 오명을 벗었다. 이 기간 동안 디아스는 고향인 오악사카 주지사를 잠시 역임하고, 카르멘 로메로 루비오와 결혼하여 개인적인 삶에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미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나 세계 면화 박람회를 방문하고, 정치인 및 유력 사업가들과 관계를 맺었다. 특히, 마티아스 로메로를 통해 전 미국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를 만나는 등 미국과의 우호 증진과 투자 유치에 힘썼다.
곤살레스 대통령은 디아스 연합 출신이 아닌 인물들을 정부 요직에 앉혔는데, 이 중에는 1910년 디아스에게 도전하는 프란시스코 마데로의 할아버지인 에바리스토 마데로도 있었다. 곤살레스 정부는 토지 및 지하자원 권리에 대한 중요한 법률을 개정하고, 미국 국민의 이민과 식민지를 장려하는 법률을 통과시켰으며, 미국 투자자들에게 철도 특허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곤살레스 정부는 재정적, 정치적 어려움에 직면했고, 임기 후반에는 파산과 대중의 반대에 부딪혔다. 디아스는 "재선 없음"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1884년 선거에서 다시 출마했다.
이 시기 멕시코 지하 정치 신문들은 디아스의 슬로건이었던 "''Sufragio Efectivo, No Reelección''"(효과적인 선거, 재선 없음)을 "''Sufragio Efectivo No, Reelección''"(효과적인 선거 – 아님, 재선!)으로 바꾸어 풍자했다.[31] 디아스는 헌법을 개정하여 재임 기간을 두 번으로 늘리고, 이후에는 재선 제한을 완전히 없앴다. 이러한 변화로 디아스는 네 번 더 재선되었으며,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했다고 주장했다.[31]
이후 26년 동안 디아스는 강력한 군사적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통치를 확립했다.[15] 그의 첫 번째 목표는 멕시코 전역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독립 이후 65년간의 혁명과 무정부 상태로 인해 세계의 눈에 나라를 구원할 수 있을 만큼 규모와 확고함을 갖춘 좋은 강력한 ''Paz Porfiriana'' 즉, 포르피리오 평화를 세우려고 했다"[52]고 한다. 그의 두 번째 목표는 "정치는 조금, 행정은 많이"라는 모토[52]에서 드러나듯, 정치적 갈등을 줄이고 효율적인 정부 기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5. 1. 정치적 안정과 권위주의 통치
베니토 후아레스와 진보파에 의해 추방되었던 예수회를 다시 불러들이면서 디아스의 정치적 입지는 강화되었다. 망명갔던 가톨릭 교회 대주교는 디아스의 결혼식을 주례하기 위해 돌아왔고, 1891년 대주교가 사망하자 디아스는 장례식에 참석하였다.[88] 진보파들은 멕시코 새 헌법을 무시하는 그의 친가톨릭 정책에 항의했지만, 가톨릭과의 협력으로 디아스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국회 내 야당은 위협을 받거나 부정선거로 낙선하면서 점차 힘을 잃었고, 국회는 디아스 정부에 대한 충성파로만 채워졌다.[88] 대통령의 친척이나 부하들이 국회를 채웠고, 고향 동료들이 정부와 관청의 요직을 차지했다. 자유적 보수주의자와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등에 업은 디아스는 7번이나 재선에 성공하여 30년 동안 멕시코를 통치했다.[88]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디아스는 포섭과 강압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적절히 활용했다. 그는 서로 다른 이익집단의 욕망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 한 집단을 다른 집단에 대항하여 이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15] 곤잘레스 대통령 임기 이후, 디아스는 1876년 자신을 권좌에 올린 투스테펙 계획(Plan de Tuxtepec)의 지지 세력을 버리고, 후아레스(마티아스 로메로(Matías Romero))와 레르도(마누엘 로메로 루비오(Manuel Romero Rubio))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파벌 출신의 장관과 고위 관리들을 임명했다. 외국 투자를 통해 멕시코 국고가 풍족해지자, 디아스는 투스테펙의 충성파들을 매수할 수 있었다.

디아스 정권을 지지하는 중요한 세력은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외국 투자자들이었다. 디아스는 투자자들과 직접 만나 개인적인 유대감을 형성했으며, 이러한 외세와 디아스 정권의 긴밀한 협력은 멕시코 혁명에서 중요한 민족주의적 문제로 부각되었다.
국내의 경쟁 세력을 달래기 위해 디아스는 혼혈 인종과 원주민 지도자들에게 정치적 지위를 부여하거나 외국 이익을 위한 중개자로 만들었다. 농촌 엘리트 계층에게는 그들의 부와 아시엔다(hacienda)에 간섭하지 않는 방식으로 협력을 얻어냈다. 멕시코시티의 도시 중산층은 정부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국가 경제가 번영하고 정부가 확장되면서 연방 정부 고용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디아스는 친교회파와 반교회파 모두를 포용하며 멕시코 프리메이슨의 수장이자 가톨릭 주교들의 중요한 고문 역할을 수행했다.[32] 그는 교회를 공격하거나 보호하지 않는, 과거의 자유주의자들과는 다른 유형의 자유주의자였다.[33] 외국 투자와 투자자들의 유입과 함께, 특히 멕시코 북부에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도착했고, 이들은 멕시코 혁명 중 반대 세력이 되었다.[34]
디아스는 야당의 결성을 억압하고, 한때 존재했던 모든 지방 당국과 연방주의의 모든 측면을 해체했다. 대통령이 된 직후 멕시코의 모든 연방 주지사들은 그에게 직접 보고하게 되었다.[15] 입법부 의원과 같은 고위직은 대부분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충성스러운 인물들로 채워졌다. 의회는 그의 정책 계획에 대한 도장 역할을 했으며, 그의 재선과 대통령 임기 연장을 허용하기 위해 1857년 헌법을 개정하는 데 순응했다. 디아스는 정치적 통제를 위해 언론을 탄압하고 사법부를 통제했다.[15]
디아스는 정치적 안정을 위협하는 문제에 개입했다. 예를 들어, 코아우일라(Coahuila)주 북부 멕시코 주의 갈등에서 호세 마리아 가르사 갈란을 주지사로 임명하여 1910년 선거에서 디아스에게 도전할 프란시스코 I. 마데로(Francisco I. Madero)의 할아버지인 부유한 토지 소유주 에바리스토 마데로(Evaristo Madero)를 약화시켰다. 또한 디아스는 베르나르도 레이스(Bernardo Reyes) 장군을 누에보레온(Nuevo León) 주지사로 임명하여 기존 정치 엘리트를 대체했다.
디아스의 핵심 지지자는 레르디스타(Lerdista) 출신인 마누엘 로메로 루비오(Manuel Romero Rubio)였다. 역사가 프리드리히 카츠(Friedrich Katz)는 "로메로 루비오는 여러 면에서 포르피리오 정권의 건축가였다"라고 평가했다. 디아스가 로메로 루비오의 어린 딸 카르멘과 결혼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굳건해졌다. 로메로 루비오와 그의 지지자들은 디아스의 최초 재선과 그 이후의 무기한 재선을 허용하기 위한 헌법 개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로메로 루비오의 후원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인 호세 이브스 리만투르(José Yves Limantour)는 정권의 주요 재정 고문이 되어 국가 재정을 안정시켰다. 리만투르의 정치 네트워크는 통치에 대한 접근 방식 때문에 "과학자들(Científicos)"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부패 감소와 법률의 균일한 적용 증가와 같은 개혁을 추구했지만, 디아스는 어떤 중요한 개혁에도 반대했고 주지사와 입법자를 계속 임명하고 사법부를 통제했다.
디아스는 군사 훈련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미국 침략, 산타 안나(Antonio López de Santa Anna) 장군 시대, 개혁 전쟁, 제2차 프랑스 개입 등 격동의 시기에 군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의 대통령 내각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충분한 나이가 된 내각 구성원 중 83%가 이러한 갈등 중 하나 이상에 참여했다고 한다. 독립 이후 멕시코 군부가 개입하고 민간 정치인을 지배하는 전통은 디아스 치하에서도 이어졌다. 그러나 자세한 연구에 따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명한 군인들이 그의 정부에서 점점 더 작은 역할을 맡게 되었고, 그의 무장 동지가 아닌 그에게 충성하는 민간 정치인들이 내각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는 군사 독재가 아니라 강력한 민간 동맹을 가진 정권이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군사 고문을 민간인으로 대체한 것은 정치 무대에서 권력을 쥔 것이 민간인임을 시사한다.[35][36]
디아스는 15년에 걸쳐 지방 군벌들을 중앙 정부의 통제하에 두었다. 그는 전장에서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군인들에게 뇌물을 제공할 기회를 주었고, 풍족한 봉급은 다른 사람들의 충성심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위험한 군 지도자들은 유럽에서 군사 훈련과 비군사적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해외 파견을 갈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멕시코 밖에 머물게 할 수 있었다. 은퇴한 장교들은 최고 계급 봉급의 절반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주 경계와 인접하지 않은 군사 지역을 만들고 지휘관들을 정기적으로 순환시켜 어떤 한 지역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게 한 다음, 이 관행을 하급 장교들에게까지 확대했다. 이를 통해 디아스는 지방 군사주의를 파괴하고 그 대신 중앙 정부를 지탱하는 국가 군대를 발전시켰다.[37]
잠재적인 반대 세력은 멕시코 연방군이었다. 병사들은 강제로 군 복무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봉급도 적었다. 디아스는 군사 예산을 증액하고 유럽 군대를 모델로 기관을 현대화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1897년 육군과 해군 장교를 훈련시키기 위한 별도의 군사학교 설립도 포함되었다. 고위 장교들은 정부 공직에 임명되었다. 디아스는 대통령의 통제하에 있는 강력한 경찰력인 루랄레스(Rurales)를 확장했다. 디아스는 산적을 진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주로 주요 도시로 가는 수송로만 경비했지만 ''루랄레스''를 확장했다.[38] 이처럼 디아스는 군대와 경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33] 1910년 멕시코 혁명이 발발할 무렵, 연방군은 노령화된 지도부와 불만을 품은 병사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활동하는 혁명군을 통제할 수 없었다.[39]
5. 2. 경제 발전과 외국 자본 유치
디아스는 광산, 농업, 산업, 인프라 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려 했다. 정치적 안정과 식민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일부 법률을 개정하여 기업가들이 멕시코에 자본을 투자하는 데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법적 구조와 분위기를 조성했다. 외국 자본으로 조성된 철도는 시장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생산적인 지역으로 바꾸었다. 정부의 토지 측량 지시는 투자자들을 위한 안전한 토지 소유권을 확립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종종 소유권을 증명할 수 없거나 경작되지 않은 숲과 다른 지역의 전통적인 사용권이 소멸된 지역 사회의 주장을 무효화했다.[49] 커피, 고무, 헤네켄(밀을 묶는 데 사용되는 끈), 설탕, 밀, 채소 생산 등의 작물이 재배되었다. 방목에만 적합한 토지는 가시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전통적인 공동 목축이 사라졌고, 고급 소들이 수입되었다. 대토지 소유주(''아시엔다'')들도 종종 외국 투자자들에게 팔 기회를 얻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멕시코 전역의 광대한 토지가 개인이나 토지 회사 등 외국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미국과의 북쪽 국경을 따라서는 미국 투자자들이 두드러졌지만, 그들은 테우안테펙 지협과 멕시코 중부를 가로질러 양쪽 해안을 따라 토지를 소유했다.[50] 농촌 공동체와 소규모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농업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다른 일을 찾거나 이주해야 했다. 아시엔다의 상황은 종종 혹독했다.[51] 토지 소유권 상실은 농촌 불만을 야기했고, 멕시코 혁명에서 농민들이 토지 개혁을 통해 토지 소유권 집중을 역전시키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엘리트 계층에게는 "멕시코 경제의 황금기였고, 1페소에 3.2달러였다. 멕시코는 당시 프랑스, 영국, 독일과 같은 경제 강국과 비교되었다. 그러나 어떤 멕시코인들에게는 돈이 없었고, 문은 부유한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었다."[52] 경제 발전은 지역에 따라 크게 달랐다. 북부는 광산과 목축업으로, 중앙 계곡은 밀과 곡물을 위한 대규모 농장과 대규모 산업 중심지로 발전했다.[33]
경제 성장의 한 요소는 멕시코 광업 부문에 대한 외국 투자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세금 면제 및 기타 인센티브를 통해 투자와 성장을 효과적으로 실현했다. 외딴 남부 바하칼리포르니아 지역은 산타 로살리아 마을의 설립과 번영하는 엘 볼레오 구리 광산 개발로 경제 특구가 설립되면서 혜택을 보았다. 이는 디아스가 프랑스 광산 회사에 프로젝트에 대한 상당한 투자에 대한 대가로 70년간의 세금 면제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과나후아토는 지역 은광 사업에 상당한 외국 투자를 유치했다. 이 도시는 그 후 번영의 시기를 경험했고, 수많은 랜드마크 건물, 특히 웅장한 후아레스 극장의 건설로 상징된다. 1900년까지 중앙 고원의 공동 토지 90% 이상이 매각되거나 몰수되었고, 950만 명의 농민이 토지를 떠나 대지주를 섬기게 되었다.[53]
디아스는 효과적인 중앙 집권 정부를 수립했기 때문에 의사 결정을 집중하고 경제적 불안정을 통제할 수 있었다.[33] 이러한 불안정은 수십만 명의 농민이 토지를 빼앗긴 결과로 주로 발생했다. 공동체 토착민 토지는 사유화, 세분화되어 판매되었다. 따라서 디아스 시대는 급속한 경제 성장과 농촌 대중의 갑작스럽고 심각한 빈곤화라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고, 이는 1910년 멕시코 혁명으로 이어졌다.[54]
1883년에서 1894년 사이에 법률이 통과되어 점점 더 적은 사람들에게 많은 양의 토지를 제공했는데, 이는 지역 판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이를 공석 또는 무주지(''terrenos baldíos'')로 선언함으로써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것이었다. 디아스의 친구는 지역 판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바하칼리포르니아에서 1,200만 에이커의 토지를 얻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체포되어 농장으로 팔려갔다. 값싼 알코올 생산이 증가하면서 멕시코시티의 술집 수는 1864년 51개에서 1900년 1,400개로 증가했다. 이로 인해 알코올 중독 및 알코올 관련 사고로 인한 사망률이 세계 어느 곳보다 높은 수준으로 상승했다.[55]
5. 3.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
디아스는 가톨릭교회를 포함한 보수주의자들과 교회를 지지하는 사회 보수주의자들을 끌어들였다.[40] 그는 멕시코에서 종교 문제가 다시 정치적 불화를 야기한다는 것을 알고 정치적 실용주의자였다. 그가 레르도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디아스는 적어도 가톨릭교회의 암묵적인, 어쩌면 명시적인 지지를 받았다.[44]급진적 자유주의는 반교권주의적이었으며, 교회의 특권을 법 앞의 평등과 집단적 정체성이 아닌 개인적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다. 그들은 가톨릭교회의 경제적 힘이 근대화와 발전에 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후아레스 법은 성직자와 군인의 특권(Fueros)을 폐지했고, 레르도 법은 특히 교회와 원주민 공동체의 재산에 대한 상속권을 의무화했다. 1857년 자유주의 헌법은 가톨릭교회의 특권적 지위를 제거하고 종교적 표현을 언론의 자유로 간주하여 종교적 관용의 길을 열었다. 가톨릭 사제는 선거직에 출마할 수 없었지만 투표는 할 수 있었다.[41]
디아스는 1877년 집권했을 때, 반교권주의 법을 그대로 두었지만 더 이상 국가 정책으로 시행하지 않고, 개별 멕시코 주에 맡겼다. 이는 많은 지역에서 교회의 재등장으로 이어졌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덜 완전한 역할을 했다. 교회는 성직자 의복 착용 금지에 대한 개혁 금지를 무시했고, 야외 행렬과 미사가 열렸으며, 수도회가 존재했다.[45] 교회는 중개자를 통해 재산을 회복했고, 십일조도 다시 징수되었다.[45] 교회는 공교육에 투자하지 않은 디아스 정권의 공모로 교육에서의 역할을 되찾았다. 또한 자선 기관 운영에서도 그 역할을 되찾았다.[46] 포르피리오 시대 동안 가톨릭교회의 역할이 점점 더 눈에 띄었음에도 불구하고, 바티칸은 교황청과 멕시코 간의 공식적인 관계 재개에 성공하지 못했고, 제도로서의 교회의 헌법적 제한은 법으로 남아 있었다.[47]
디아스와 교회 사이의 이러한 ''사실상의 합의''는 실용적이고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디아스는 공개적으로 자유주의적 반교권주의를 포기하지 않았고, 1857년 헌법이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반교권주의 조치를 시행하지 않았다. 교회는 교육과 자선 기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했다. 19세기 후반 멕시코에서 종교 정상화의 다른 중요한 상징에는 예수회의 귀환, 과달루페의 성모를 "멕시코의 여왕"으로 봉헌, 멕시코 주교들의 디아스 평화 조정자로서의 업무 지원이 포함된다.[76] 1910년 멕시코 혁명이 발발했을 때, 가톨릭교회는 디아스 정권을 강력히 지지했다.[48]
6. 1910년 멕시코 혁명과 몰락
1910년은 멕시코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였다. 미겔 이달고 신부가 독립 전쟁을 시작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100주년 기념 공식 프로그램 표지에는 독립의 아버지 이달고, "법(Lex)"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베니토 후아레스, "평화(Pax)"라는 꼬리표가 붙은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등장했다. 또한 멕시코 문장과 자유의 모자도 그려져 있었다. 디아스는 9월 100주년 기념 행사 기간 동안 황금 천사가 있는 독립 기념비를 개관했다. 프랑스 개입 이후 디아스와 후아레스는 정치적 라이벌이었지만, 디아스는 사망한 라이벌의 유산을 홍보하기 위해 알라메다 공원에 후아레스 기념비를 건설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10년에 출판된 한 저서에는 9월 축제의 하루하루 일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67]
6. 1. 정치적 위기와 1910년 선거
디아스는 "공화주의적 군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그의 정권은 실용적인 식민 시대 부르봉 방식과 자유주의 공화주의 이상을 결합한 것이었다.[56] 디아스는 자신의 정권 이외의 다른 정권으로 이양하는 것을 잘 계획하지 않았다. 디아스가 나이가 들고 계속해서 재선되면서 대통령 계승 문제는 더욱 시급해졌다. 그의 정권 내의 정치적 열망자들은 대통령직을 계승할 것을 예상했고, 반대파들은 디아스의 퇴진을 예상하여 조직화하기 시작했다.1898년, 디아스 정권은 여러 중요한 문제에 직면했다. 오랜 세월 디아스의 정치 고문으로서 베니토 후아레스 정권 이후 멕시코와 미국의 관계 강화에 큰 노력을 기울였던 마티아스 로메로의 사망과, 스페인-미국 전쟁에서의 성공으로 제국주의를 향한 미국의 외교 정책의 주요 변화가 그것이다. 로메로의 죽음은 디아스가 의존하고 조종했던 세 개의 정치 집단 사이에 새로운 역학 관계를 만들어냈다. 로메로의 파벌은 멕시코 내 미국 투자를 강력하게 지지했고, 대체로 친미적이었지만, 로메로의 죽음으로 그 세력은 약해졌다. 다른 두 파벌은 호세 이브스 리만투르의 시엔티피코스와 베르나르도 레이스의 추종자들인 레이이스타스였다. 리만투르는 특히 윗먼 피어슨과 같은 영국의 금융계와 기업가들을 선호함으로써 미국의 영향력을 상쇄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멕시코에 대한 미국의 투자는 견고하게 유지되었고 심지어 증가했지만, 경제적 분위기는 그들의 이익에 더 적대적이었고, 그들의 정권에 대한 지지는 감소했다.[56]
미국은 서반구에서 탁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으며, 미국의 대통령 테오도어 루스벨트는 몬로 독트린을 루스벨트 수정안을 통해 수정하여, 미국이 다른 국가의 정치적 상황이 잘 운영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경우 미국의 정치에 개입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디아스는 이 정책에 반발하여 서반구의 안보는 모든 국가의 공동 사업이라고 말했다. 1901년 10월 22일부터 1902년 1월 31일까지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제2차 범미 회의에서 미주 국가들의 회의가 열렸고, 미국은 적어도 당분간 멕시코에 관한 개입주의의 강경 정책에서 물러섰다.[56]
국내 정치에서 베르나르도 레이스는 점점 더 강력해졌고, 디아스는 그를 전쟁 장관으로 임명했다. 멕시코 연방군은 점점 효과가 없어지고 있었다. 멕시코 북서부의 야키와 마야와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레이스는 군인 수를 늘리기 위해 증액된 자금을 요청하고 받았다.
괴짜 변호사 니콜라스 수니가 이 미란다가 디아스에 맞서 출마하면서 디아스 정권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도 있었다. 수니가는 모든 선거에서 패했지만 항상 부정선거를 주장했고 자신이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라고 생각했지만, 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은 하지 않았다.[56] 더 중요한 것은 1910년 선거가 다가오고 디아스가 재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함에 따라 리만투르와 레이스가 서로 호감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는 것이다.

1908년 2월 17일, 미국 언론인 제임스 크릴먼과의 인터뷰에서 디아스는 멕시코가 민주주의와 선거를 준비했고 자신은 은퇴하여 다른 후보들이 대통령직을 위해 경쟁하도록 할 것이라고 ''피어슨스 매거진''을 통해 말했다.[15] 주저 없이 여러 야당과 친정부 단체들이 결합하여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그들을 대표할 적절한 후보를 찾았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당시 누에보레온 주지사였던 베르나르도 레이스를 후보로 지지하는 클럽을 결성했다. 레이스가 공식적으로 출마를 선언한 적은 없었지만, 디아스는 그를 계속 위협으로 인식하고 그를 유럽으로 파견하여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1909년, 디아스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텍사스주 엘파소와 멕시코 치와와주 시우다드 후아레스에서 정상회담을 계획했는데, 이는 미국 대통령과 멕시코 대통령 간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자 미국 대통령이 멕시코 국경을 넘는 첫 번째 사건이었다.[57] 디아스는 7번째 대통령 선거 출마 계획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 회담을 요청했고, 태프트는 당시 멕시코에 투자된 수십억 달러의 미국 자본을 보호하는 데 동의했다.[58] 디아스가 집권한 거의 30년 동안 미국 기업들은 "멕시코 광물 자원의 거의 90%, 국영 철도, 석유 산업, 그리고 점점 더 많은 토지를 장악했다."[59] 양측은 엘파소와 시우다드 후아레스를 연결하는 논란이 되고 있는 차미잘 지대를 정상회담 기간 동안 깃발이 없는 중립 지역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했지만, 이 회의는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켰고 암살 위협과 기타 심각한 안보 문제를 야기했다.[60] 텍사스 레인저, 4,000명의 미국과 멕시코 군인, 미국 비밀경호국 요원, FBI 요원, 그리고 미국 연방 보안관들이 모두 경비를 위해 투입되었다.[61] 유명한 정찰대원인 프레드릭 러셀 번햄이 이끄는 250명의 추가 사설 경호대가 1908년 미국 부통령 후보였던 태프트의 예일대 동창이자 멕시코에서 상당한 광산 이익을 소유한 사업 파트너 번햄과 함께 존 헤이스 해먼드에 의해 고용되었다.[62][63][64] 10월 16일 정상회담 당일, 번햄과 텍사스 레인저인 C.R. 무어 사병은 행렬 경로를 따라 엘파소 상공회의소 건물에 숨겨진 팜 피스톨을 소지한 남자를 발견했다.[65] 번햄과 무어는 디아스와 태프트로부터 불과 몇 피트 떨어진 곳에서 암살자를 체포하고 무장 해제했다.[66]
여러 집단이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기 시작하자, 디아스는 은퇴하지 않고, 엘리트이지만 민주적인 성향의 개혁가인 프란시스코 이. 마데로가 자신과 경쟁하도록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토지 소유주였던 마데로는 이념적으로 디아스와 매우 유사했지만, 다른 멕시코 엘리트들이 대통령과 함께 통치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국 디아스는 마데로를 승인하지 않고, 1910년 선거 기간 동안 그를 투옥했다.
선거는 계속 진행되었다. 마데로는 많은 대중적 지지를 얻었지만, 정부가 공식 결과를 발표했을 때, 디아스가 거의 만장일치로 재선된 것으로 선포되었고, 마데로는 극소수의 표만 얻었다고 발표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선거 부정 사건은 멕시코 시민들 사이에 널리 퍼진 분노를 불러일으켰다.[15] 마데로는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에서 디아스에 대한 혁명을 촉구했고, 디아스를 축출하기 위한 폭력은 현재 멕시코 혁명의 첫 단계로 여겨지고 있다. 여러 곳에서 일어난 반란은 연방군과 농촌 경찰의 진압 능력을 시험했고, 정권의 약점을 드러냈다.[68] 디아스는 1911년 5월 25일 사임을 강요받았고, 6일 후인 1911년 5월 31일에 스페인으로 출국했다.[69]
6. 2. 멕시코 혁명 발발과 디아스의 망명
여러 집단이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기 시작하자, 디아스는 은퇴하지 않고 엘리트지만 민주적인 성향의 개혁가인 프란시스코 이. 마데로가 자신과 경쟁하도록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토지 소유주였던 마데로는 이념적으로 디아스와 매우 유사했지만, 다른 멕시코 엘리트들이 대통령과 함께 통치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국 디아스는 마데로를 승인하지 않고, 1910년 선거 기간 동안 그를 투옥했다.[15]선거는 계속 진행되었다. 마데로는 많은 대중적 지지를 얻었지만, 정부가 공식 결과를 발표했을 때, 디아스가 거의 만장일치로 재선된 것으로 선포되었고, 마데로는 극소수의 표만 얻었다고 발표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선거 부정 사건은 멕시코 시민들 사이에 널리 퍼진 분노를 불러일으켰다.[15] 마데로는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에서 디아스에 대한 혁명을 촉구했고, 디아스를 축출하기 위한 폭력은 현재 멕시코 혁명의 첫 단계로 여겨지고 있다. 여러 곳에서 일어난 반란은 연방군과 농촌 경찰의 진압 능력을 시험했고, 정권의 약점을 드러냈다.[68] 디아스는 1911년 5월 25일 사임을 강요받았고, 6일 후인 1911년 5월 31일에 스페인으로 출국했다.[69]
7. 망명 생활과 죽음
디아스는 1915년 7월 2일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 생활 중 사망했다. 그는 몽파르나스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의 다른 자녀들은 유아기 또는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그의 미망인 카르멘과 그의 아들은 멕시코로 돌아갈 수 있었다.[71]
디아스의 장기 독재는 1917년 멕시코 헌법 제83조에 대통령 재선 금지 조항이 만들어지는 교훈을 남겼다.
8. 유산과 평가
디아스의 유산은 1990년대 이후 재평가를 거쳐왔다. 디아스가 축출되기 전 그의 생전에는 그를 찬양하는 문헌들이 있었는데, 이는 "포르피리스모"로 불린다. 그는 멕시코에 마침내 안정을 가져온 정치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유지했다.[78][79][80]
그를 폭군이자 독재자로 묘사하는 방대한 문헌들은 디아스 통치 후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디아스의 역사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계속 기여해 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특히 텔레비전 진행자이자 역사가인 엔리케 크라우세에 의해 디아스의 이미지를 재평가하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이는 "신 포르피리스모"로 불린다.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 하에서 멕시코가 신자유주의적 길을 추구함에 따라, 외국인 투자를 개방한 디아스의 정책은 제도혁명당의 국영 기업 민영화 및 시장 지향적 개혁으로의 전환과 일치했다. 이러한 수정주의자들에게 디아스는 훨씬 온화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디아스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Pobre 멕시코! ¡Tan lejos de Dios y tan cerca de los Estados Unidos!" (''가난한 멕시코여! 신으로부터는 너무 멀리, 미국으로부터는 너무 가까이!'').[81][82]
부분적으로 디아스의 장기 집권 때문에, 현행 멕시코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단일 6년으로 제한하고, 비연속적인 경우에도 재선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심지어 임시직으로라도 대통령직을 수행한 사람은 다시 출마하거나 재직할 수 없다. 이 조항은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입법자들이 연속해서 두 번째 임기에 출마할 수 있게 된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1920년대 이후로 디아스의 유해를 멕시코로 반환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다. 가장 최근의 움직임은 2014년 오악사카에서 프란시스코 히메네스가 이끄는 ''Comisión Especial de los Festejos del Centenario Luctuoso de Porfirio Díaz Mori''에 의해 시작되었다. 어떤 사람들에 따르면, 디아스의 유해가 멕시코로 반환되지 않은 것은 "혁명 이후 국가가 디아스 정권의 유산과 타협하지 못한 것을 상징한다"[71][83]는 것이다.
생전에는 유럽과 미국 사회에서 높이 평가되었고, 망명 후에도 그 평가는 변하지 않았다. 멕시코에서는 혁명 이후 부정적으로 평가되었으나, 근대화를 이룩한 공로로 현재는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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