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아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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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시밀리아노 1세는 1832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1867년 멕시코에서 처형된 인물이다.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군으로 복무하며 해군 사령관까지 올랐고, 롬바르디아-베네토 총독을 지냈다. 이후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으나, 자유주의자 베니토 후아레스의 저항에 직면했다. 미국 남북전쟁 종전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은 후아레스에게 패배하여 체포되었고, 1867년 케레타로에서 처형당했다. 그의 죽음은 프랑스 제2제정의 붕괴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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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아노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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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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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페르난도 막시밀리아노 호세 마리아 |
다른 이름 | |
출생 | 1832년 7월 6일 |
출생지 | 오스트리아 제국 빈 쇤브룬 궁전 |
사망 | 1867년 6월 19일 |
사망지 | 멕시코 케레타로 세로 데 라스 캄파나스 |
매장일 | 1868년 1월 18일 |
매장지 | 오스트리아 빈 임페리얼 크립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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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작위 | 멕시코 황제 |
재위 | 1864년 4월 10일 – 1867년 6월 19일 |
즉위 | 1864년 4월 10일 |
선임자 | 군주제 수립 (베니토 후아레스, 공화국 대통령) |
후임자 | 군주제 폐지 (베니토 후아레스, 공화국 대통령) |
섭정 | 호세 마리아 라쿤사 테오도시오 라레스 산티아고 비다우리 |
가족 | |
배우자 | 샤를로트 (1857년 7월 27일 결혼) |
아버지 |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카를 |
어머니 | 바이에른 공주 조피 |
종교 | |
종교 | 가톨릭교 |
기타 | |
왕가 |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 |
로마자 표기 | Ferdinand Maximilian Josef Maria von Habsburg-Lothringen |
언어 | |
기타 작위 | 오스트리아 대공, 롬바르도-베네토 부왕 |
2. 생애
오스트리아 제국의 합스부르크-로렌 가문 출신으로, 1832년 7월 6일 빈의 쇤브룬 궁전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이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과학, 특히 식물학에 관심이 많았으나,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에 입대하여 복무하며 해군 현대화에 기여했고, 1854년에는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857년 벨기에의 샤를로트 공주와 결혼하였고, 같은 해 롬바르디아-베네토 왕국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이탈리아 지역에서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 시도는 오스트리아 제국 중앙 정부의 보수적인 입장과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거센 흐름 속에서 난관에 부딪혔고, 결국 1859년 총독직에서 해임되었다.
2. 1. 초기 생애
1832년 7월 6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에 있는 쇤브룬 궁전에서 태어났다.[8][9][10] 다음 날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요제프 마리아''(Ferdinand Maximilian Josef Maria)로 세례를 받았다. 첫 번째 이름은 그의 대부이자 아버지의 삼촌인 후일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를 기리고, 두 번째 이름은 외할아버지인 바이에른의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를 기린 것이다.아버지는 프란츠 카를 대공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2세(후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차남이었다. 따라서 막시밀리안은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일원이었다. 어머니는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의 소피 공주였다. 지적이고 야심차며 강한 의지를 가진 소피는 남편 프란츠 카를 대공과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역사가 리처드 오코너(Richard O'Conner)는 프란츠 카를을 "삶의 주된 관심사가 그레이비 소스를 듬뿍 뿌린 만두를 먹는 것인, 상냥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 생활은 결실을 맺어, 네 번의 유산 끝에 막시밀리안을 포함한 네 명의 아들이 성인이 되었다. 궁정에서는 막시밀리안이 어머니 소피와 나폴레옹 2세 사이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이러한 불륜 관계나 출생 가능성은 근거가 희박하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통에 따라, 막시밀리안은 여섯 살까지 '아야(aja)'라 불린 여성 가정교사 루이제 폰 슈툼페더(Louise von Sturmfeder) 남작 부인의 보살핌을 받았다. 이후 교육은 가정교사에게 맡겨졌다. 하루 대부분을 공부에 보냈으며, 주당 수업 시간은 일곱 살 때 32시간에서 열일곱 살 때 55시간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학습 분야는 역사, 지리, 법학, 기술부터 언어, 군사 연구, 펜싱, 외교까지 다양했다. 모국어인 독일어 외에도 헝가리어, 슬라브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구사했다.
어린 시절부터 막시밀리안은 모든 면에서 형 프란츠 요제프를 능가하고 자신이 더 나은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오스트리아 궁정의 엄격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고난 개방성을 유지했다. 쾌활하고 카리스마가 넘쳐 주변 사람들을 쉽게 매료시켰지만, 무절제한 면도 있었다. 그는 선생님들을 조롱하고 종종 장난의 주동자였는데, 심지어 숙부인 페르디난트 1세 황제까지 장난의 대상이 되었다. 형을 능가하려는 노력과 매력적인 성격은 과묵하고 내성적인 프란츠 요제프와의 사이에 균열을 만들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 시절의 긴밀했던 관계는 거의 사라졌다.
1848년 1848년 혁명이 유럽 전역을 휩쓸자, 페르디난트 1세 황제는 막시밀리안의 형 프란츠 요제프에게 제위를 넘기고 퇴위했다. 막시밀리안은 새로 즉위한 형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함께 제국 전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1849년 오스트리아에서 혁명이 진압되면서 수많은 반란군이 처형되고 수천 명이 투옥되었다. 막시밀리안은 이러한 조치를 무의미한 잔혹 행위로 여기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훗날 "우리는 우리 시대를 계몽의 시대라고 부르지만, 유럽에는 미래에 사람들이 법 위에 군림하는 정부의 독단적인 통치와는 다른 것을 원했다는 죄밖에 없는 사람들을 복수심으로 사형을 선고한 재판소의 불의에 대해 공포와 놀라움으로 돌아볼 도시들이 있다"고 말했다.
빈의 궁정 무도회에서 막시밀리안은 젊은 몰다비아 귀족 여성 빅토리아 케슈코(Viktoria Keșco, 1835~1856)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이 동방 정교회 신자였고 왕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혼은 불가능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다른 귀족과 강제로 결혼시켰다.[8][9][10]

1856년 5월,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막시밀리안에게 파리에서 빈으로 돌아오면서 브뤼셀에 들러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1세를 방문하라고 지시했다. 1856년 5월 30일, 막시밀리안은 벨기에에 도착하여 레오폴드 1세의 차남인 필리프 왕자의 영접을 받았다. 그는 벨기에 왕자들과 함께 투르네, 코르트레이크, 브뤼헤, 겐트, 안트베르펜, 샤를루아 등을 방문했다. 브뤼셀에서 그는 레오폴드 1세의 외동딸인 벨기에의 샤를로트를 만났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레오폴드 1세는 이를 알고 막시밀리안에게 청혼을 권유했다. 신생 국가였던 벨기에에게 강대국 오스트리아와의 연결은 유리한 기회였다. 이전 연애에 실패했던 막시밀리안에게도 유럽 군주의 딸과의 결혼은 적절해 보였다. 그는 청혼했고 벨기에 궁정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벨기에의 라켄 궁전과 빈 황궁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작센의 게오르크 왕자는 이전에 샤를로트에게 거절당한 경험 때문에 레오폴드 1세에게 막시밀리안의 "계산적인 성격"을 경고하기도 했다. 반면, 샤를로트의 사촌이자 미래의 레오폴드 2세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막스는 기지, 지식, 재능, 친절함으로 가득 찬 청년"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약혼은 1856년 12월 23일에 공식화되었고, 1857년 7월 27일 브뤼셀 왕궁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결혼식에는 샤를로트의 사촌인 알버트 공 등 유럽의 주요 왕족들이 참석했으며, 이는 벨기에 왕조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은 다시 한번 강력한 합스부르크 가문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막시밀리안과 샤를로트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멕시코 황제 부부 시절인 1865년 9월, 그들은 제1 멕시코 제국 황제였던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손자인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 이 그린과 그의 사촌 살바도르 데 이투르비데 이 마르산을 입양했다. 아구스틴의 어머니인 미국 출신의 알리시아 이투르비데(Alice Green)는 처음에는 동의했으나 곧 마음을 바꿔 입양 철회를 요청했지만, 아이 없이 멕시코에서 추방되었다.[15] 아구스틴과 살바도르는 1865년 9월 16일 황실 칙령으로 이투르비데 공(Prince de Iturbide) 칭호와 전하(Highness) 경칭을 받았으며, 황족 다음의 서열을 인정받았다.[16] 1866년 10월, 제국이 위태로워지자 막시밀리안은 알리시아에게 아들 아구스틴을 돌려주겠다고 편지했다.[17]
일부 전기 작가는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에서 정부를 두었다고 주장하며,[18] 역사가 엔리케 크라우제는 그가 브라질 체류 중 매독에 감염되어 불임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19] 다른 전기 작가는 막시밀리안이 쿠에르나바카의 저택(코르테스 궁전, 쿠에르나바카)에 비밀 통로를 두고 여성들을 만났으며, 쿠에르나바카의 멕시코 여성인 콘셉시온 세다노 이 레기사노(Concepción Sedano y Leguizano)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두었다고 주장한다. 이 아들은 막시밀리안의 처형 직후 사망한 어머니 대신, 멕시코 망명자의 자금 지원으로 파리에서 교육받았다고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그는 스페인에 살다가 독일 정보부에 징집되었고, 프랑스에 의해 반역죄로 체포되어 1917년 총살형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 전기 작가에 따르면, 그의 처형 당시 낭독된 혐의는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의 아들 세다노"로 시작되었다고 한다.[20]
막시밀리안과 카를로타에게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직계 후손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카를 폰 합스부르크를 비롯한 방계 후손들이 존재한다.[21]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일부 구성원들은 여전히 멕시코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중 멕시코에서 태어난 카를로스 펠리페 데 합스부르고는 그의 가족 역사, 막시밀리안과 카를로타, 그리고 제2 멕시코 제국에 관한 많은 인터뷰, 회의 및 발표를 한 학자이다.[22][23][24]
2. 2. 오스트리아 해군 복무

통치자가 될 운명이 아니었던 막시밀리안은 예술과 과학, 특히 식물학에 관심이 많았으나 군에 입대하여 소규모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그는 해군 경력에 열정을 보였고,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의 직접적인 관계 덕분에 이전까지 소홀히 여겨졌던 해군에 자원을 투입할 수 있었다.[11]
18세에 중위가 되었고, 1850년 10월에는 해군 중위 계급으로 코르벳 불카누스호에 승선하여 그리스를 통과하는 짧은 순항을 했다. 1851년 초, SMS ''노바라''호에 승선하여 더 먼 항해를 떠났는데, 그는 이를 매우 즐거워하며 일기에 "나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꿈 중 하나, 바다를 통한 항해를 이룰 것이다. 나는 나를 위한 매우 감동적인 순간에 나의 사랑하는 오스트리아 고국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떠난다."라고 적었다.

이 항해 중 리스본에서 브라질의 전 황제 페드루 1세의 딸인 공주 마리아 아멜리아 드 브라간사를 만났다. 아름답고, 경건하며, 영리하고 세련된 교육을 받은 그녀와 막시밀리안은 사랑에 빠져 1852년에 약혼했다. 그러나 1852년 2월 마리아 아멜리아는 홍역에 걸렸고, 건강이 악화되어 결핵에 걸렸다. 의사의 권유로 마데이라에서 요양했으나, 1853년 2월 4일 사망하여 막시밀리안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시기 그는 이탈리아, 스페인, 마데이라, 탕헤르, 알제리, 베이루트,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지를 여행했다. 1854년 스페인 방문 시에는 그라나다의 왕립 예배당에 있는 그의 조상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무덤을 방문했다.[12] 이후 브라질 제국도 방문했으며, 1859년 장인 벨기에의 레오폴드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의 첫 번째 후손"으로 칭하며 신대륙 탐험의 중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13]
막시밀리안은 선원들을 지휘하는 법을 배우고 항해의 기술적 측면에 대한 탄탄한 교육을 받았다. 1854년 9월 10일, 22세의 나이로 오스트리아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준장 및 소장 계급을 받았다. 이전의 프리드리히 대공(1821년–1847년)처럼 그는 전함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그의 지원 덕분에 해군은 황실의 지원과 공적 관심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해군력을 중시하지 않았던 오스트리아에게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사령관으로서 막시밀리안은 해군 현대화를 위한 여러 개혁을 실행했다. 그는 트리에스테와 폴라(현재의 푸라)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고, 나중에 제독 빌헬름 폰 테게토프가 승리를 거둘 전투 함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선원들의 훈련, 항해 경험, 사기 진작보다는 조선(배 건조)에 막대한 자금을 돌린 것에 대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14] 그는 또한 대규모 과학 탐험(1857~1859)을 기획했고, 프리깃함 SMS ''Novara''는 오스트리아에서 처음으로 세계 일주 항해를 한 전함이 되었다.
1855년 말, 악천후 속에서 트리에스테 만에 그의 배를 피신시킨 경험에 감명을 받아 그곳에 거주지를 짓기로 결심했고, 실제로 1856년 3월 트리에스테 시 근처에 나중에 미라마레 성으로 불리게 될 건물의 건설을 시작하면서 그 목표를 달성했다.
1856년 3월 크림 전쟁이 끝나 유럽에 평화 시대가 도래하자 막시밀리안은 파리로 여행하여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와 그의 아내인 황후 외제니를 만났다. 그는 그곳에서 나중에 막시밀리안의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멕시코 보수파를 만났다. 대공은 나폴레옹 3세에 대해 그의 일기에서 "황제는 그의 유명한 삼촌의 천재성이 부족하지만, 프랑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웅대한 인물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이 세기 위에 우뚝 서 있으며 분명히 자신의 흔적을 남길 것이다."라고 썼다.
2. 3.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총독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은 당시 유행하던 진보 사상, 특히 자유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그의 자유주의적 견해는 1857년 2월 28일, 형인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그를 제국의 이탈리아어 사용 지역인 롬바르디아-베네토 왕국의 총독으로 임명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는 고령의 요제프 라데츠키 원수의 통치에 대한 이탈리아 주민들의 불만이 커지는 상황에서, 젊고 진보적인 성향의 황제 친동생을 임명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충성심을 회복하려는 의도도 있었다.[25]
총독으로 임명된 후, 막시밀리안은 1857년 7월 27일 브뤼셀에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1세와 왕비 루이즈-마리 도를레앙의 딸인 샤를로트 공주와 결혼했다. 샤를로트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 공 부부의 사촌이기도 했다. 막시밀리안과 샤를로트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1857년 9월 6일, 막시밀리안과 샤를로트 부부는 롬바르디아-베네토의 수도인 밀라노에 도착하여 밀라노 왕궁에 거처를 정했으며, 때때로 몬차 왕궁에도 머물렀다. 총독으로서 막시밀리안은 측근과 하인들로 구성된 인상적인 궁정을 갖추고 마치 군주처럼 생활했다. 그는 총독 재임 기간에도 트리에스테 근교에 미라마르 성 건설을 계속했으며, 이는 3년 후에 완공되었다. 성 건설 비용에는 샤를로트의 지참금도 일부 사용되었다.
막시밀리안은 총독으로서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세금 제도를 개정하여 세금 부담을 공정하게 분배하려 했고, 의료 지구 설립, 베네치아 운하 준설, 쿠오모 항구 확장,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늪지 배수, 비료 보급 및 프리울리 평야 관개 사업 등을 시행했다. 또한 밀라노에서는 대로 건설을 추진하고 밀라노 두오모 광장을 넓혔으며, 라 스칼라와 마리노 궁전 사이에 새로운 스칼라 광장을 조성했다. 암브로지아나 도서관 복원 사업도 진행했다. 그의 행정 능력은 1859년 영국 외무장관이 "롬바르디아-베네토 지방의 행정은 대공 막시밀리안이 큰 재능과 자유롭고 관대한 정신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또한 막시밀리안은 제국 해군 발전에 힘썼으며, 오스트리아 제국의 첫 세계 일주 탐험이 된 '노바라' 호의 탐험(1857-1859)을 조직했다. 이 과학 탐험에는 빈의 여러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부인 샤를로트 역시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자선 단체를 방문하거나 학교를 세우고, 롬바르디아 전통 의상을 입는 등 현지 주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1858년 부활절에는 부부가 함께 의례복을 입고 베네치아 대운하를 따라 행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인들 사이에서 반(反)오스트리아 감정은 계속 확산되었다.
막시밀리안의 총독 재임 기간은 1859년까지 약 2년으로 짧았다. 그의 자유주의적 개혁 시도는 보수적인 오스트리아 군부의 반대에 부딪혔고, 총독임에도 불구하고 주둔군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이 없었다. 1858년 4월, 그는 빈으로 가서 형인 황제에게 군사 및 행정적 권한을 통합하고 양보 정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로 인해 피에몬테와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그의 역할은 경찰 책임자 수준으로 제한되었다.
1859년 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월에는 안전 문제로 샤를로트가 미라마르로 돌아가야 했고, 2월에는 오스트리아 군대가 밀라노와 베네치아에서 상류층 인사들을 포함한 다수를 체포하여 만토바 등지의 감옥으로 이송하는 등 강경 진압에 나섰다. 브레시아는 민병대에 점령되었고, 피아첸차와 포 강 유역에는 군대가 주둔했다. 막시밀리안은 페렌츠 규라이 장군의 강경책을 완화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3월에는 밀라노 경찰과 베로나 시민 간의 충돌이 발생했고, 파비아는 사실상 군사 점령 상태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상황은 군대의 개입 없이는 질서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로 위험해졌다.[26]
결국 막시밀리안의 회유 노력과 개혁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어떠한 양보도 하려 하지 않았고, 동생의 정책이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고 관대하다고 여겼다. 1859년 4월 10일,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막시밀리안을 총독직에서 해임했다. 그의 해임 직후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지역 대부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막시밀리안의 해임 소식에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지도자였던 카부르 백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롬바르디아에서 우리의 최악의 적…은 대공 막시밀리안이었습니다. 젊고, 활동적이며, 진취적인 그는 밀라노 사람들을 설득하는 어려운 과업에 온전히 헌신했고, 거의 승리 직전이었습니다. 롬바르디아 지방은 그 어느 때보다 번영하고 잘 관리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비엔나의 선정적인 정부가 개입하여, 평소처럼 실수를 저지르고, 오만한 행동을 하고, 오스트리아에게는 치명적이지만 피에몬테에게는 가장 유리한 일을 했습니다…롬바르디아는 이제 우리 손에 들어올 것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오스트리아의 실책을 환영하는 반응이었다.
해임 후 막시밀리안은 트리에스테로 돌아가 은둔 생활을 하며 미라마르 성 건설에 집중했다.
3. 멕시코 제국 황제
1863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제2멕시코 제국을 세우고 막시밀리아노에게 황제 자리를 제안했다. 이는 19세기 중반 멕시코의 혁명과 내전으로 인한 혼란, 그리고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의 외채 상환 중지 선언을 빌미로 프랑스가 군사적으로 개입한 결과였다.[139] 프랑스는 처음에는 스페인, 영국과 함께 멕시코를 압박했으나, 두 나라는 곧 철수했고 나폴레옹 3세는 아메리카 대륙에 카톨릭 제국을 세우려는 야심으로 단독 개입을 강행했다.
막시밀리아노는 1864년 6월 10일, 샤를로트 황후와 함께 멕시코에 도착하여 오스트리아 제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하지만 당시 멕시코에는 이미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이 이끄는 합법적인 정부가 존재했기에, 멕시코는 황제와 대통령이 공존하는 기형적인 상황에 놓였다.
막시밀리아노 황제는 인디언 농민 보호를 내세우며 온정적인 통치를 시도했고, 베니토 후아레스의 일부 개혁 조치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그를 지지했던 대토지 소유자들과 가톨릭 세력의 반발을 샀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처음부터 불안정했다. 국고는 바닥난 상태였고, 베니토 후아레스가 이끄는 공화파 군대는 게릴라전을 벌이며 저항을 계속했다.
결정적으로 1865년 미국 남북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먼로주의를 내세워 프랑스에 철수를 요구하고 후아레스 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137] 샤를로트 황후가 유럽으로 건너가 지원을 호소했지만 나폴레옹 3세와 교황 비오 9세에게 거절당했다. 국제적 압박과 내부 저항이 거세지자 프랑스군은 1866년 멕시코에서 철수했다.
홀로 남겨진 막시밀리아노는 퇴위를 거부하고 저항했으나, 결국 1867년 5월 15일 케레타로에서 후아레스 군에게 항복했다. 빅토르 위고, 주세페 가리발디 등 유럽의 많은 명사들과 군주들이 그의 구명을 요청했지만,[140] 후아레스 대통령은 외세 간섭을 단호히 배격하고 멕시코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사형을 결정했다. 막시밀리아노는 케레타로 교외 언덕에서 부하 장군인 미겔 미라몬과 토마스 메히아 카마초와 함께 총살당했다. 미겔 미라몬은 반 후아레스파의 대통령 후보였으며, 토마스 메히아 카마초는 멕시코 원주민 출신이었다.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는 이 사건을 소재로 '막시밀리아노 황제의 처형'이라는 그림을 그려, 막시밀리아노를 사지로 몰아넣고 외면한 나폴레옹 3세와 프랑스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림에서 사형 집행 군인은 프랑스군과 비슷한 제복을 입고 있으며, 뒤에서 총알을 장전하는 군인은 나폴레옹 3세의 얼굴로 묘사되었다.
3. 1. 즉위 배경
멕시코는 19세기 중반 혁명(1854~55)과 내전(1858~61)을 겪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집권한 자유당의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은 1861년 외채 상환 중지를 선언했다. 이에 프랑스, 스페인, 영국은 공동으로 1861년 겨울 베라크루스항을 봉쇄하고 멕시코 정부에 채무 이행을 압박했다.[139] 스페인과 영국은 멕시코와 합의 후 이듬해 철수했지만, 아메리카 대륙에 카톨릭 제국을 세우려는 야심을 가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단독으로 군사 개입을 강행했다. 프랑스군은 내륙으로 진군하여 멕시코시티를 점령하고 제2멕시코 제국을 수립했다.1821년 독립 이후 멕시코는 자유당과 보수당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보수당 내에는 군주제를 지지하는 세력이 존재했다. 비록 초대 황제 아구스틴 1세가 퇴위 후 망명 약속을 어기고 귀국했다가 처형당하며 군주제가 실패로 끝났음에도, 보수파는 여전히 군주제를 대안으로 여겼다. 1840년 정치가 호세 마리아 구티에레스 데 에스트라다는 공화정이 실패했으므로 유럽 왕족을 초청해 군주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마리아노 파레데스 대통령 시기와 산타 안나의 마지막 집권기에 잠시 주목받았으나, 1857년 헌법 제정으로 자유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는 듯 보였다. 이 헌법은 보수파의 기반인 가톨릭교회와 군대의 권한을 제한했다. 이에 반발한 보수파는 헌법 무효를 선언하고 개혁 전쟁(1858~1861)을 일으켰으나 결국 패배했다. 전쟁에서 패한 보수파는 외국의 지원을 받아 군주제를 실현하려 했다.
멕시코 외교관 호세 이달고는 산타 안나 정부 시절부터 유럽 왕실과 접촉하며 군주제 수립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산타 안나 실각 후에도 그는 독자적으로 활동했는데, 어린 시절 친구이자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인 외제니 드 몽티조 황후를 통해 프랑스 황제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멕시코 군주제 지지자들은 유력한 황제 후보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대공을 주목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과거 뉴 스페인 총독령을 오랫동안 통치했기에 정통성 면에서 유리했고, 막시밀리안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총독 시절 행정 능력을 인정받은 바 있었다. 또한 형인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건재하여 그가 유럽에서 군주가 될 가능성은 낮았다.[28] 1859년, 멕시코 귀족인 호세 파블로 마르티네스 델 리오 등이 막시밀리안에게 처음으로 황제직을 제안했지만[27] 그는 거절했다. 이후에도 멕시코 왕당파는 여러 차례 그를 설득했고, 호세 마리아 구티에레스 데 에스트라다가 다시 한번 막시밀리안에게 황제직 수락을 요청했다.[29]
1861년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정부는 서반구 문제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고 몬로 독트린을 내세우기 어려웠다. 이는 유럽 열강, 특히 프랑스가 멕시코에 개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 1861년 7월, 후아레스 대통령의 외채 상환 중단 선언은 나폴레옹 3세에게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나폴레옹 3세는 미국 확장을 견제할 프랑스 위성국을 멕시코에 세우고자 했고, 멕시코에 채권을 가지고 있던 영국과 스페인의 지지를 얻어 채무 재협상을 명분으로 군사 원정을 준비했다. 이는 1861년 10월 31일 런던 조약으로 공식화되었다.[30]
1861년 10월 초, 막시밀리안은 구티에레스 데 에스트라다에게 두 가지 조건 하에 황제직을 수락하겠다고 답했다. 첫째는 멕시코 국민 스스로가 그를 원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프랑스와 영국의 지원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31]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레흐베르크 백작을 보내 프랑스의 군사 개입과 국민투표 지지 약속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동생에게 설명하게 했다.[32]

프랑스가 후아레스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영국과 스페인은 공동 개입에서 이탈했다. 프랑스는 1862년 4월 단독으로 군사 작전을 개시했고, 개혁 전쟁에서 패배했던 보수파 장군들이 프랑스군에 합류했다.[33] 샤를 드 로랑세가 이끄는 프랑스 원정군은 푸에블라 전투(1862년 5월 5일, 신코 데 마요)에서 패배했지만, 나폴레옹 3세는 약 38,900명의 증원군을 엘리 프레데릭 포레 장군 지휘 하에 파견했다. 프랑스군은 1년 만인 1863년 푸에블라를 점령하고, 같은 해 6월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함락했다. 프랑스는 점령지에 괴뢰 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포레 장군은 35명의 멕시코인으로 구성된 '상급위원회'(Junta Superior)를 임명했고, 이 위원회는 3명의 행정부 위원을 선출했다. 이 삼두정치는 다시 215명의 멕시코인을 선출하여 '명망가 회의'(Assembly of Notables)를 구성했다.[34]
명망가 회의는 1863년 7월 소집되어 막시밀리아노를 멕시코 황제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공식 대표단이 유럽으로 파견되어 10월에 막시밀리안을 만났다. 그는 국민투표를 통해 멕시코 국민의 지지를 확인해야만 황제직을 수락하겠다는 조건을 다시 내걸었다.[35] 1864년 2월까지 프랑스군은 멕시코 인구 대부분이 거주하는 지역을 장악했고, 이 지역에서 실시된 국민투표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지만, 막시밀리안은 멕시코인 대다수가 자신을 지지한다는 결과를 받아들였다.[36]
멕시코 황제 자리는 막시밀리안에게 큰 대가를 요구했다. 그는 나폴레옹 3세의 군사적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고, 형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그에게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권과 대공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프란츠 요제프는 동생의 결정을 만류하기도 했으나[123], 막시밀리안의 의지는 확고했다. 1864년 4월 9일, 막시밀리안은 마지못해 '가족 협약'(Family Pact)에 서명하여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권을 포기했다.[37] 그는 1864년 4월 10일 트리에스테의 미라마르 성에서 공식적으로 멕시코 황제직을 수락했다. 그의 아내 샤를로트는 카를로타 황후가 되었다.
막시밀리안은 1864년 6월 10일 멕시코에 도착하여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당시 멕시코에는 이미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이 이끄는 합법적인 공화국 정부가 존재했기 때문에, 멕시코는 황제와 대통령이 동시에 존재하는 기형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3. 2. 멕시코 통치

1864년 4월, 오스트리아 해군 소장직을 사임한 막시밀리아노는 트리에스테에서 SMS ''노바라''호를 타고 멕시코로 향했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군함의 호위를 받으며 출발한 그는 교황 비오 9세의 축복을 받았고,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할 때는 빅토리아 여왕의 명령으로 영국 주둔군이 예포를 쏘기도 했다.[38][39][124] 그러나 그의 앞날에 대한 불안한 시선도 존재했다. 멕시코에서 복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프랑스 대령 프랑수아 클로드 뒤 바라일은 막시밀리아노가 탄 배를 보며 그의 도전을 무모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40][41]
1864년 5월 29일, 막시밀리아노와 카를로타 황후는 베라크루스에 도착했다.[42] 당시 황열병이 유행하여 시민들의 환영은 냉담했지만,[43] 수도 멕시코시티에서는 불꽃놀이와 개선문으로 성대하게 환영받았다.[44] 황제 부부는 멕시코시티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렸으나,[45][46][47] 정세 불안으로 인해 정식 대관식은 끝내 거행되지 못했다. 막시밀리아노는 멕시코 보수파, 귀족, 성직자, 일부 원주민 및 유럽 군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처음부터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이 이끄는 자유주의 세력은 그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프랑스 원정군(막시밀리아노의 멕시코 제국군 포함)과 공화파 간의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48]

황제 부부는 멕시코 국립궁전에 잠시 머물다가 멕시코시티 외곽 언덕 위의 차풀테펙 성을 공식 거처로 삼았다. 이곳은 과거 아즈텍 황제와 스페인 총독들의 휴양지였다. 막시밀리아노는 차풀테펙에서 도심까지 이어지는 넓은 길을 건설하도록 명령했는데, 처음에는 '황후의 길'(Paseo de la Emperatriz)이라 불렸으나 오늘날 멕시코시티의 중심가인 파세오 데 라 레포르마가 되었다.[49] 그는 또한 쿠에르나바카에 하르딘 보르다라는 별장을 마련했다.
막시밀리아노는 자신을 지지한 보수파들의 기대와 달리, 1857년 멕시코 헌법에 담긴 자유주의 개혁 일부를 지지하는 온건한 노선을 걸었다. 그는 인디언 농민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가부장적인 온정주의로 통치하려 했고, 토지 개혁, 종교의 자유 등 후아레스 정부의 혁신적 개혁 일부를 지지하여 대토지 소유자들의 불만을 샀다. 또한 강제노역제도 폐지를 추진하고, 후아레스가 몰수한 교회 영지의 반환을 거부하여 가톨릭 성직자들과 대립했다. 1864년 12월, 교황 특사 피에르 프란체스코 메글리아는 자유주의 법률 폐지, 교회 재산 반환, 가톨릭 유일 종교 복원 등을 요구했으나 막시밀리아노는 이를 거부하고 예배의 자유를 선포하며 개혁을 유지했다.[54] 이러한 정책은 그의 자유주의적 성향을 보여주었지만, 제국의 핵심 지지 기반인 보수파와 교회의 지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기 위해 1864년 여름 정치 사면을 선포했고, 일부 온건 자유주의자들이 제국에 합류했다.[51] 그러나 멕시코의 정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후아레스에게 사면과 총리직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하는 등[52]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 후아레스는 북부로 피신했음에도 멕시코의 합법적 수장 지위를 유지하며 미국의 인정을 받았고,[53] 이는 막시밀리아노 정권의 정통성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막시밀리아노는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법 앞의 평등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노동자, 특히 원주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률을 제정하려 했다. 노동 시간 제한, 아동 노동 금지, 10MXN 이상 농민 부채 탕감, 체벌 금지, 부채로 인한 인신매매 금지 등의 조치를 내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진했다.[58] 법률은 스페인어와 함께 원주민 중 가장 많은 화자를 가진 나우아틀로도 발표되었고, 원주민 학자 파우스티노 갈리시아를 정부 고문 및 빈민 보호 평의회 의장으로 임명했다.[62][63] 또한 산림 관리, 철도, 도로, 운하, 우편, 전신, 광업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을 제정하고,[56][57] 독일 김나지움을 모델로 한 무료 학교 시스템과 과학·문학 아카데미 설립을 계획했다.[60][61] 미국 남부 연합 출신자들과 유럽, 아시아 등지의 이민을 장려하기 위해 뉴 버지니아 식민지, 카를로타 식민지 등을 건설하기도 했다.[64][65] 그러나 국고가 바닥나 일상적인 비용을 개인 재산으로 충당해야 했으며,[56] 제정된 많은 법률은 실제로 시행되지 못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개혁이 유럽의 여론을 의식한 보여주기식 정책이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66][68]

황제 부부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멕시코 제1제국 황제 아구스틴 1세의 손자인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 이 그린과 살바도르 데 이투르비데 이 마르산을 양자로 삼아 왕자 지위를 부여하고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왕족 혈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황위 계승 의사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125] 막시밀리아노는 소박한 옷을 선호하고 멕시코 전통 의상을 즐겨 입었으며, 시골에서 승마, 산책, 수영 등을 즐겼다.[71][72] 일요일에는 차풀테펙 성에서 원주민을 포함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접견했고,[73] 상류층을 위한 무도회도 열었다.[74] 그는 쿠에르나바카 별장에서 콘셉시온 세다노라는 여인을 정부로 두기도 했다.[18] 1864년과 1865년에는 황제와 황후가 각각 전국 순방에 나서 민심을 살피기도 했다.[69][70]
그러나 막시밀리아노의 통치는 점차 위기로 치달았다. 멕시코 전역을 장악하지 못한 채 후아레스 군의 게릴라 저항은 계속되었다. 1865년 미국 남북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먼로주의를 내세워 나폴레옹 3세에게 프랑스군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고 후아레스에게 무기를 지원하기 시작했다.[137] 다급해진 카를로타 황후는 유럽으로 건너가 나폴레옹 3세와 교황 비오 9세에게 지원을 호소했지만 거절당했고, 이 과정에서 심각한 정신 붕괴를 겪어 다시는 멕시코로 돌아오지 못했다.[128] 여기에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의 압박까지 더해지자, 나폴레옹 3세는 결국 1866년 멕시코에서 프랑스군을 철수시켰다. 미국의 지원으로 힘을 얻은 후아레스 군대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고, 막시밀리아노는 점차 고립되었다. 그가 내린 후아레스 지지자 사살 명령은 공화파의 보복을 불러와 제국의 지지 기반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의 후아레스 지원 강화와 프랑스군 철수로 인해 많은 지지자들이 막시밀리아노를 떠나기 시작했다.[126]
3. 3. 제국의 몰락과 최후


1865년 4월 미국 남북 전쟁이 끝나면서 미국의 외교 정책에도 변화가 생겼다. 미국 정부는 몬로주의를 내세웠지만 프랑스와 직접적인 분쟁은 피하려 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을 지지했으며, 멕시코 제2제국을 인정하지 않고 막시밀리아노 1세의 서신도 무시했다.[75] 12월에는 후아레스 정부에 3000만달러 규모의 민간 차관이 승인되었고, 미국인 자원봉사자들이 멕시코 공화파 군대에 합류했다.[76] 브라운스빌 근처에서 비공식적인 미국의 급습이 이루어졌고, 후아레스의 미국 대사 마티아스 로메로는 율리시스 S. 그랜트나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이 공화파를 돕기 위해 멕시코에 개입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77] 미국의 잠재적인 침공 가능성은 막시밀리아노 1세의 지지자들마저 동요하게 만들었다.[78] 미국은 직접적인 군사 개입은 삼갔지만, 프랑스가 멕시코에서 철수하도록 지속적인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79]
한편, 프랑스군이 멕시코 북부의 공화파 거점에 집중하면서 남부에서는 공화파 게릴라 활동이 급증했다. 프랑스군이 주요 도시를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게릴라들은 시골 지역에서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증가하는 폭력에 대처하기 위해, 그리고 후아레스가 멕시코를 떠났다고 잘못 판단한 막시밀리아노 1세는 1865년 10월, 게릴라를 돕거나 참여한 자를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처형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이는 1862년 후아레스의 유사한 조치[80]에 대응하는 성격이었으나, '흑색 법령'이라는 악명을 얻으며 널리 비난받았고 제국의 인기를 더욱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81] 이 법령으로 인해 1만 1천 명이 넘는 후아레스 지지자들이 처형된 것으로 추산된다.[82][83]
1866년 1월, 나폴레옹 3세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고 막대한 비용 부담을 느꼈기 때문에, 프랑스 입법 의회에 멕시코에서 프랑스군을 철수할 의향을 밝혔다. 막시밀리아노 1세의 추가 지원 요청이나 철수 연기 요청은 거절되었다. 황후 카를로타는 제국을 구하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가 지원을 호소했지만 실패했다. 임무 실패 후 카를로타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고, 1927년 사망할 때까지 벨기에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84]
유럽의 지원이 끊기고 프랑스군마저 철수하게 되면서 막시밀리아노 1세의 입지는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1866년 10월, 그는 내각을 오리사바로 옮겼고 퇴위를 고려하기도 했다. 11월 25일 장관 회의에서 퇴위 안건이 논의되었으나, 장관들의 만류로 수도로 돌아왔다.[85] 그는 국민에게 호소하여 국민의회를 열어 정부 형태를 결정하려 했으나,[86] 프랑스 침략자의 꼭두각시로 여겨진 그에게 후아레스는 어떠한 타협도 할 의사가 없었다.
국민의회 계획이 실패하자 막시밀리아노 1세는 군사적 저항을 선택했다. 1867년 2월,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그는 약 1만 명의 멕시코 제국군과 함께 케레타로로 후퇴했다. 공화파 장군 마리아노 에스코베도와 라몬 코로나는 4만 명의 병력으로 케레타로를 포위했지만, 제국군은 수 주간 버텼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5월 11일, 막시밀리아노 1세는 적진을 돌파하여 해안으로 탈출하려 했다. 이 계획은 미겔 로페스 대령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로페스는 공화파 장군 에스코베도와 협력하여 성문을 열어주었으며, 막시밀리아노 1세가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87]
1867년 5월 15일 케레타로는 함락되었고, 다음 날 아침 막시밀리아노 1세는 펠릭스 살름-살름이 이끄는 충성스러운 기병 여단의 구출 시도가 실패한 후 포로가 되었다. 그는 미겔 미라몬과 토마스 메히아 카마초 장군과 함께 체포되었다.[88] 미겔 미라몬은 반 후아레스파의 대통령 후보였으나 낙선한 인물이었고, 토마스 메히아 카마초는 멕시코 원주민 출신이었다.
막시밀리아노 1세의 재판은 6월 13일 케레타로의 이투르비데 극장에서 열렸다. 그는 멕시코 정부 전복 음모와 흑색 법령 실행 혐의로 기소되었다. 보수파 정치가 라파엘 마르티네스 데 라 토레를 포함한 변호인단은 제국의 정통성과 막시밀리아노의 통치를 변호하려 했으나,[89] 법원은 단 하루 만에 유죄 판결과 함께 사형을 선고했다.[90]
유럽의 여러 군주들, 빅토르 위고, 주세페 가리발디와 같은 저명인사들,[91] 심지어 막시밀리아노 1세의 친형인 프란츠 요제프 1세까지 베니토 후아레스에게 전보와 편지를 보내 막시밀리아노의 구명을 요청했다.[140][91] 후아레스는 개인적으로 막시밀리아노를 존중했지만,[92][131] 멕시코가 더 이상 외세의 간섭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막시밀리아노에 맞서 싸우다 희생된 수많은 멕시코인들을 고려하여 사형 집행을 결정했다.[93]
펠릭스 살름-살름과 그의 아내 아그네스 살름-살름은 간수들에게 뇌물을 주어 막시밀리아노의 탈출을 계획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아노는 미라몬과 메히아 장군 없이는 떠나지 않겠다고 했으며, 변장을 위해 수염을 깎는 것은 황제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거부했다.
1867년 6월 19일 오전 6시 40분, 막시밀리아노는 미라몬, 메히아 장군과 함께 캄파나스 언덕에서 공화파 총살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는 스페인어로만 말했고, 처형 집행인들에게 금화를 나누어 주며 자신의 머리는 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132]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모두를 용서하고, 모두가 나를 용서해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흘리려는 피가 나의 새로운 조국에서 경험했던 유혈 사태를 끝내게 하기를 바랍니다. 멕시코 만세! 멕시코의 독립 만세!"[133][134] 미라몬과 메히아 장군은 "황제 만세!"를 외치며 최후를 맞이했다. 막시밀리아노의 처형 소식은 그의 형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아우스글라이히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성립을 축하하는 부다페스트 행사 중에 전달되었다.[135]
처형 후 막시밀리아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멕시코에 안치되었다가, 6개월 후 오스트리아 해군 제독 빌헬름 폰 테게트호프가 이끄는 SMS 노바라(SMS ''Novara'') 함선에 의해 오스트리아로 송환되었다. 그의 시신 사진이 촬영되기도 했다.[94] 트리에스테를 거쳐 빈으로 옮겨진 시신은 1868년 1월 18일 황실 납골당에 안장되었다.[95] 처형 장소인 캄파나스 언덕에는 막시밀리아노 황제 기념 예배당이 세워졌다.[96]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는 막시밀리아노 1세의 처형 소식을 듣고 프랑스 정부, 특히 나폴레옹 3세의 무책임한 태도를 비판하기 위해 '막시밀리아노 황제의 처형'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 사형 집행 군인들은 프랑스군과 유사한 제복을 입고 있으며, 맨 뒤에서 총알을 장전하는 군인은 나폴레옹 3세의 얼굴로 묘사되었다.
4. 유산 및 평가
막시밀리아노 1세는 순진한 성격의 군주가 외세의 농간에 휘말렸을 때 어떤 비극을 맞이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프랑스 제2제정의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꼭두각시 군주가 필요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아노를 멕시코 황제 자리에 앉혔다. 이는 이미 베니토 후아레스가 이끄는 공화국 정부가 존재하는 멕시코의 상황을 무시한 처사였으며, 결과적으로 멕시코는 황제와 대통령이 동시에 존재하는 기형적인 정치 체제를 갖게 되었다. 당연히 후아레스 대통령은 이러한 상황에 강하게 반발했고, 막시밀리아노 1세는 결국 후아레스 군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아노를 외면한 채 멕시코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고, 고립된 막시밀리아노 1세는 후아레스 군대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막시밀리아노는 나폴레옹 3세가 자신을 왜 이미 대통령이 있는 멕시코의 황제로 추대했는지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순진하게 그를 믿었던 대가를 치른 셈이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은 공화주의 성향의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연작 주제가 되었다. 특히 세 번째 버전에서는 처형을 집행하는 멕시코 군인들이 프랑스 군복과 유사한 복장을 하고 있으며, 사형 선고의 마지막 일격(coup de grâce)을 가하려는 인물이 나폴레옹 3세와 흡사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나폴레옹 3세의 책임론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으로, 이 그림은 파리에서 전시가 금지되었다.[97] 막시밀리아노의 처형 직후, 그의 죽음을 기리는 사진이나 처형 당시 입었던 총탄 자국이 선명한 셔츠 사진 등이 담긴 방문증(carte-de-visite) 카드가 유통되기도 했다.[98]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는 그의 피아노곡집 ''순례의 해''에 막시밀리아노를 추모하는 장송 행진곡("Marche funèbre, en mémoire de Maximilian I, empereur de Mexique")을 포함시켰다.[99]
빈에서는 빈 황궁 보물실, 헤어레스게쉬히트리셰스 박물관, 황실 가구 컬렉션 등 여러 박물관에서 멕시코 제2제국과 관련된 막시밀리아노의 유품 및 기념품을 전시하고 있다.[100] 빈 13구 쇤브룬궁 공원 입구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으며, 바트이슐에는 1868년에 세워진 막시밀리안 분수가 있다.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의 베네치아 광장에도 그의 동상이 있으며, 1876년 풀라에 세워졌던 로스트라타 기둥은 현재 베네치아의 비엔날레 정원에 옮겨져 있다.
막시밀리아노는 다양한 연극,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묘사되었다.
- 연극: 프란츠 베르펠의 희곡 ''후아레스와 막시밀리안'' (1924년 베를린 초연)
- 영화: ''후아레스와 막시밀리안'' (1934년 멕시코 영화, 엔리케 에레라 분), ''후아레스'' (1939년 미국 영화, 브라이언 어언 분), ''미치광이 황후'' (1939년 미국 영화, 콘래드 네이글 분), ''베라 크루즈'' (1954년 미국 영화, 조지 매크레디 분)
- 텔레비전: 멕시코 텔레노벨라 ''엘 부엘로 델 아길라'' (마리오 이반 마르티네스 분), 넷플릭스 드라마 ''황후'' (2022년 독일 드라마, 요하네스 누스바움 분, 부정적으로 묘사됨)
문학 작품 속에서는 해리 터틀도브의 1997년 대체 역사 소설 ''얼마나 적은 자들이 남아 있을까''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미국 남북 전쟁에서 아메리카 연합국이 승리한 세계를 배경으로 1881년까지 막시밀리아노가 황제로 군림하며 재정난 타개를 위해 소노라와 치와와주를 남부 연합에 300만달러에 매각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한편, 막시밀리아노가 실제로는 처형되지 않았고, 후아레스와의 비밀 협정을 통해 1936년까지 엘살바도르에서 '후스토 아르마스(Justo Armas)'라는 이름으로 망명 생활을 했다는 음모론도 독일어권에서 제기되기도 한다.[101][102][103]


1867년 막시밀리아노 1세가 공화국 군대에 의해 처형되면서 멕시코에서 군주제를 재건하려던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아구스틴 1세에 이어 멕시코 역사상 두 번째로 처형된 황제가 되었으며, 이 사건 이후 멕시코 보수파 내에서도 군주제 복원은 더 이상 주요 목표가 되지 못했다.
막시밀리아노는 스스로를 멕시코의 자유주의 사상에 동조하는 인물로 여겼지만,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의 통치는 나폴레옹 3세의 군사력과 유럽 자본의 이해관계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지속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초기에는 멕시코 보수주의자들이 그를 지지했으나, 막시밀리아노가 가톨릭교회의 특권을 폐지하는 자유주의 개혁 법안들을 거부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지지하면서 보수파의 지지를 상실했다. 멕시코 역사가 에리카 파니는 막시밀리아노가 교회 재산 국유화, 교회와 군대의 특권 폐지, 철도 건설 등 주요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베니토 후아레스, 세바스티안 레르도 데 테하다, 포르피리오 디아스와 같은 멕시코 자유주의자들의 계보에 속한다고 평가하기도 한다.[104] 멕시코 보수주의는 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했지만, 막시밀리아노의 죽음과 함께 멕시코 군주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세기 후반부터 역사학계에서는 막시밀리아노와 제2 멕시코 제국을 단순히 비난하기보다는 그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연구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105]
1971년 한 전기 작가는 막시밀리아노와 그의 아내 카를로타를 "비극적인 인물"로 묘사하며, 이 시대를 "그랜드 오페라"에 비유했다. 그는 이 시대의 인물들이 위대하기보다는 "자세를 취하는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보이며, 이 사건 전체가 "19세기 멜로드라마"의 관점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는 진짜였으며", 막시밀리아노와 카를로타, 그리고 그들의 신세계 모험으로 인해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비극은 "쇠퇴와 망상으로 가득 찬 시대의 산물"이라고 분석했다.[106]
일부 역사가들은 막시밀리아노의 자유주의적 개혁 시도, 멕시코 국민을 돕고자 했던 진심, 자신을 따르던 이들을 버리지 않은 의리, 그리고 케레타로 포위전에서의 개인적인 용기를 높이 평가한다. 반면, 다른 연구자들은 그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근시안적이었으며, 제국의 붕괴가 임박한 상황에서도 공화주의 세력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불필요한 저항을 지속했다고 비판한다.
막시밀리아노 통치가 남긴 예상치 못한 유산 중 하나는 음악 분야에 있다. 그가 멕시코로 데려온 중앙 유럽의 군악대와 민속 음악가들은 그의 사후 멕시코 북부와 미국 남서부 지역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폴카나 왈츠 같은 유럽 음악을 아코디언과 같은 악기로 계속 연주하면서 현지의 스페인 및 원주민 음악과 융합시켰다. 이는 멕시코와 멕시코계 미국인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친 노르테뇨와 테하노 음악 같은 새로운 음악 장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107][108]
멕시코 내에는 막시밀리아노를 기리는 공식적인 동상이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싸웠던 자유주의 진영의 장군 출신 대통령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 시기에 그의 처형 장소인 케레타로의 세로 데 라스 캄파나스 언덕에 막시밀리아노 황제 기념 예배당이 세워졌다. 2006년에 설립된 극우 성향의 멕시코 민족전선과 같이 제2 멕시코 제국을 옹호하는 일부 반공화주의, 반자유주의 단체들은 매년 케레타로에 모여 막시밀리아노와 그의 추종자들의 죽음을 순교로 기념하는 행사를 열기도 한다.[109] 빈의 황실 납골당에 있는 막시밀리아노의 석관 앞에는 멕시코 국기와 국가 상징물이 놓여 있으며, 멕시코 역사에서 그의 위치는 그를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한 시대적 배경과 함께 학자들에 의해 재평가되고 있다.
처형 후 방부 처리된 막시밀리아노의 시신은 오스트리아 해군 제독 빌헬름 폰 테게토프가 지휘하는 군함 노바라(Novara)호에 실려 오스트리아로 송환되었다. 트리에스테를 거쳐 빈으로 옮겨진 시신은 1868년 1월 18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묘인 카푸치너납골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형인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동생의 비극적인 죽음을 매우 슬퍼했으며, 아내 샤를로트는 남편의 죽음 이후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사망할 때까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이 사건은 나폴레옹 3세의 정치적 실책으로 평가받으며 프랑스 국민의 신뢰를 잃게 만들었고, 결국 제2제정 붕괴의 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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