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키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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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르 키농은 프랑스의 장대높이뛰기 선수로,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1983년 5.82m의 실외 세계 기록을 세웠으며, 1985년에는 개인 최고 기록인 5.90m를 기록했다. 1986년 부상 이후 기량이 하락하여 1988년 서울 올림픽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1993년 은퇴 후 회화 예술가로 활동하다가 2011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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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키농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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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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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피에르 장 기 키농 |
국적 | 프랑스 |
출생일 | 1962년 2월 20일 |
출생지 | 리옹, 프랑스 |
사망일 | 2011년 8월 17일 |
사망지 | 이에르, 프랑스 |
키 | 1.80m |
몸무게 | 74kg |
종목 | 장대높이뛰기 |
소속 클럽 | 라싱 클뤼브 드 프랑스 |
메달 기록 | |
남자 육상 | '' |
올림픽 | '' |
1984 로스앤젤레스 | 장대높이뛰기 |
유럽 실내 선수권 대회 | '' |
1984 예테보리 | 장대높이뛰기 |
유럽 주니어 선수권 대회 | '' |
1981 위트레흐트 | 장대높이뛰기 |
2. 선수 경력
프랑스를 대표하는 장대높이뛰기 선수였다. 그의 선수 경력 중 가장 중요한 성과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남자 장대높이뛰기 금메달을 획득한 것이다. 이는 프랑스 선수 최초의 올림픽 남자 장대높이뛰기 금메달이었다.
또한 1983년 8월 28일에는 5.82m를 넘으며 장대높이뛰기 세계 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나, 이 기록은 불과 4일 뒤 동료 선수인 티에리 비네롱에 의해 5.83m로 경신되었다. 이후 부상 등의 영향으로 선수 생활 후반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2. 1. 1984년 올림픽 이전
800m 달리기 선수였던 아버지를 둔 그는 살라즈쉬르산느에 위치한 Rhodia Club Omnisports의 육상 부서에서 장대높이뛰기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가 클럽에서 직접 코칭을 맡았다. 이후 리옹 출신의 코치 크리스티앙 부르기뇽의 지도 아래 리옹 교외인 생프리에스트에서 첫 장대높이뛰기 훈련을 시작했다. 1976년, 14세의 나이로 르페아주드루시용에서 열린 장대높이뛰기 대회에 데뷔했으며, 1979년에는 프랑스 청소년(18세 미만) 국가 챔피언이 되었다.1981년 실외 경기에서 5.5m를 넘으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같은 해 위트레흐트에서 열린 1981년 유럽 육상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는 5.3m를 넘어 은메달을 획득했다. 1981년, 키농은 파리의 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에 합류하여 장클로드 페랭 코치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파트리크 아바다, 장미셸 벨로, 그리고 당시 장대높이뛰기 세계 기록 보유자였던 티에리 비네론과 함께 훈련했다.
1983년 헬싱키에서 열린 제1회 1983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으나, 세 번의 시도에서 모두 실패하며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이는 그가 참가한 유일한 세계 선수권 대회(실외 또는 실내) 경험이었다.
1983년 8월 28일, 독일 쾰른에서 열린 육상 경기에서 키농은 5.82m를 넘으며 새로운 장대높이뛰기 세계 기록을 세웠다. 이는 블라디미르 폴랴코프가 26개월 동안 보유했던 기록을 1cm 경신한 것이었다. 이날 경기 우승 직후, 키농은 공식 대회에서 6m 높이에 도전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비록 시도는 큰 차이로 실패했지만, 코치 장클로드 페랭은 키농의 도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키농 자신은 나중에 "바 앞에서 혼자 있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른 경쟁자들과 싸우는 것을 선호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그의 세계 기록은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4일 뒤인 1983년 9월 1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동료 티에리 비네론이 5.83m를 넘으며 기록을 경신했다.
1984년 3월,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열린 1984년 유럽 실내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는 5.75m를 기록하며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 대회에서는 티에리 비네론이 금메달을 차지했다. 또한 키농은 프랑스 국가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1982년(5.55m), 1983년(5.65m), 1984년(5.7m)에 3년 연속으로 실외 장대높이뛰기 부문 우승을 차지했다.
2. 2.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1984년 하계 올림픽 육상 경기에서는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세르게이 부브카가 소련의 보이콧으로 인해 불참했다. 이로 인해 키농을 비롯하여 같은 프랑스 선수인 티에리 비네롱, 그리고 미국의 얼 벨과 마이크 털리가 남자 장대높이뛰기 종목의 유력한 우승 후보로 떠올랐다. 이 네 선수는 모두 올림픽 개막 이전에 5.8m 이상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결선 경기에서 벨과 비네롱은 5.7m 높이에서 세 번의 시도를 모두 실패하며 메달 경쟁에서 멀어졌다. 금메달을 향한 경쟁은 키농과 털리 두 선수로 압축되었다. 키농은 첫 번째 시도에서 5.7m를 성공하며 경기를 주도했고, 털리는 5.65m를 넘어 2위를 기록했다. 이후 바의 높이가 5.75m로 올라가자, 먼저 경기에 나선 키농은 첫 시도에서 이 높이를 넘는 데 성공했다. 털리가 이 높이를 넘으면 동률을 이룰 수 있었으나, 그는 도전을 포기했다. 두 선수 모두 5.8m 높이는 넘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키농은 5.75m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는 프랑스 선수 최초의 올림픽 남자 장대높이뛰기 금메달이었으며, 프랑스가 이 종목에서 획득한 첫 번째 메달이기도 했다. 또한 키농은 프랑스 최초로 남녀를 통틀어 도약 종목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가 되었다. (페르낭 콩데르가 1906년 중간 올림픽 장대높이뛰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바 있으나,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는 이 대회의 메달 기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올림픽은 키농이 출전한 유일한 올림픽 대회가 되었다. 털리는 5.65m로 은메달을 차지했고, 비네롱과 벨은 5.6m의 기록으로 공동 동메달을 수상했다.
올림픽 금메달 획득 직후, 키농은 프랑스의 스포츠 전문지 레키프와의 인터뷰를 통해 "과거 올림픽 무대에서 실패했던 다른 프랑스 선수들의 몫까지 성공하는 것을 나의 임무로 생각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또한 자신의 올림픽 우승이 "집단적인 노력의 결실"이며, "모리스 우비옹(1996년 하계 올림픽 장대높이뛰기 챔피언인 장 갈피옹의 코치)과 장-클로드 페랭이 시작하고 발전시켜 온 프랑스 장대높이뛰기 훈련 프로그램이 이뤄낸 성과"라고 평가했다.
2. 3. 1984년 올림픽 이후
1985년 7월 16일 프랑스 니스에서 열린 니카이아 드 니스(Meeting Nikaïa de Nice) 대회에서 키농은 5.9m의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는 3일 전 파리에서 세르게이 부브카가 세운 새로운 야외 세계 기록보다 10cm 낮은 기록이었다.[7]그러나 1986년에 입은 발목 부상과 이후 이어진 다른 부상들은 키농의 선수 경력 후반기 성적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그는 1980년대 전반기와 같은 수준의 경기력을 다시 보여주지 못했다.[1][2][8] 결국 1988년 서울 올림픽 장대높이뛰기 종목에는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다. 대신 필리프 콜레, 필리프 데앙코스, 티에리 비네론이 프랑스 대표로 선발되었다.[1][2][8]
1989년, 키농은 보르도에 정착하여 그곳의 스포츠 클럽 회원이 되었고, 조르주 마르탱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1993년 장대높이뛰기 선수 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보르도에서 활동했다.[9]
3. 은퇴 이후
은퇴 후 1993년부터 키농은 지중해 연안의 바르 데파르트망에 정착하여 르 라방두, 보르메-레-미모자 그리고 이에르 코뮌에서 거주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바르 데파르트망에서 살았다. 그는 사업을 시작하여 이에르에 기반을 둔 밴에서 운영하는 닭 로티세리 사업을 소유했다.[8][10]
1990년대 후반, 키농은 보르메-레-미모자 시의회와 협력하여 '스포츠 앙 루미에르'(Sports en Lumièrefra)를 창설했다. '스포츠 앙 루미에르'는 보르메-레-미모자에서 열리는 연례 스포츠 행사로,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이며 다양한 스포츠에 대한 무료 워크숍이 진행된다.[10]
키농은 2004년 프랑스 장대높이뛰기 선수 로메인 메스닐의 조언자 역할을 맡았는데, 그의 제자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장대높이뛰기 결선 진출에 실패했을 때, 키농은 이 경험을 "실패"로 여겼다.[2]
키농은 2006년부터 생애 마지막 5년간 추상 회화를 했다. 그는 같은 해 예술가 콜린 라퍼와의 만남 이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항상 그림에 관심이 있었으며, 니콜라 드 스탈과 잭슨 폴록이 그에게 영감을 준 롤 모델이라고 말했다. 그는 바르 데파르트망에서 그의 작품을 정기적으로 전시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2010년 2월에 열린 그의 첫 번째 작품 전시회는 성공적이었다.[1][2]
키농은 그의 고향인 리옹이 2015년 세계 마스터스 육상 선수권 대회를 유치하도록 지지하고 홍보했다. 그는 유치 준비에 참여했으며, 이 업무의 일환으로 프랑스 스포츠 고위 관계자들과 함께 미국을 방문했다. 2011년 7월 14일, 비드고슈츠, 리옹 및 퍼스의 세 유치 도시가 새크라멘토에서 열린 세계 마스터스 육상 총회에서 유치 발표를 했다. 유치 발표 중에 키농이 한 결론 연설은 유치 발표 직후 같은 날 열린 두 차례의 투표에서 리옹이 총회로부터 가장 많은 표를 얻는 데 주요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리옹은 2015년 세계 마스터스 육상 선수권 대회의 개최 도시로 선정되었다.[1][4][11][12]
4. 사망
2011년 8월 17일 수요일 오후 10시경, 키농은 프랑스 남부 이에르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창문에서 5m 높이 아래로 몸을 던져 자살했다.[22] 지역 일간지인 바르-마탱은 다음날 아침 그의 자살 소식을 보도했으며, 이는 이후 프랑스 육상 연맹에 의해 확인되었다.[13][1]
키농은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왔으며, 이를 치료하기 위해 약을 복용해 왔다. 그가 투신할 당시 그의 집에는 여성 친구가 함께 있었다. 유족으로는 어머니, 여동생 이사벨, 전 부인 캐롤라인 라르지, 그리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로빈과 장-밥티스트가 있다.[13][1]
키농의 전 코치였던 장-클로드 페랭은 프랑스 라디오 유럽 1과의 인터뷰에서 "저렇게 삶을 잃으면 타이틀과 기록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며 그의 죽음에 대해 "끔찍한 소식"이라며 "매우 비통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코치였던 5년 동안 키농의 삶을 가까이에서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고 덧붙였다.[13][1]
베르나르 암살렘 프랑스 육상 연맹 회장은 키농의 사망 소식에 "비통하다"고 말하며, "그는 훌륭한 챔피언이었다. 육상계에서 이례적인 인물이었지만 매우 호감을 주는 사람이었다"고 그를 추모했다.[13][1]
1996년 하계 올림픽 육상 남자 장대높이뛰기 금메달리스트인 장 갈피옹은 "피에르는 내가 존경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포스터는 내가 어렸을 때 침실에 가지고 있던 유일한 포스터였다"고 말하며 키농을 자신의 롤 모델이라고 밝혔다. 갈피옹은 자신이 장대높이뛰기를 시작할 무렵과 키농이 선수 생활 막바지에 함께 훈련하며 가까워졌다고 회상했다.[13][1]
론-알프 육상 연맹 회장 마르셀 페라리는 키농과 함께 2011년 7월 새크라멘토,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세계 마스터 육상 총회 프랑스 대표단의 일원이었으나, 리옹 카피탈과의 인터뷰에서 키농에게서 임박한 자살의 징후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13][1]
5. 유산
피에르 키농의 장례식은 2011년 8월 23일 오후, 바르 데파르트망의 보르메 레 미모자 코뮌에서 거행되었다. 장례식에는 그의 두 아들(로빈과 장-바티스트), 전 부인(캐롤라인 라르지), 여동생(이자벨), 어머니, 전 코치 장-클로드 페린, 그리고 스테판 디아강, 마리즈 에반제-에페, 티에리 비네론, 크리스티앙 플라지아, 윌리엄 모티와 같은 유명 은퇴 프랑스 운동선수들을 포함하여 200명 이상이 참석했다.[14]
장례식은 지방 정부 청사 앞에서 시작되었으며, 키농의 관 위에는 프랑스 국기가 덮여 있었다. 시청 발코니에는 그의 흑백 포스터 두 개가 걸렸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화환을 보내 애도를 표했다. 보르메 레 미모자 시장 알베르 바티네는 친구를 기리는 찬사를 가장 먼저 연설하며 "현재 당신은 별들과 함께 올림푸스 산 정상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스포츠부 장관 샹탈 주아노는 대표자를 통해 전달된 조의 메시지에서, 키농이 올림픽 챔피언이 된 1984년 8월 8일의 순간을 회상하며 다가오는 2011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는 모든 프랑스 선수들이 검은색 완장을 착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키농의 친구였던 스테판 디아강은 1996년 하계 올림픽 육상 남자 장대높이뛰기 금메달리스트 장 갈피온이 직접 쓴 편지를 읽었다. 당시 브레스트에서 요트 경기에 참가 중이던 갈피온은 편지에서 "피에르, 당신 덕분에 제가 처음으로 장대높이뛰기를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최고의 선수로 남을 것입니다."라고 쓰며 자신의 "영웅"인 키농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디아강은 또한 키농을 "아름다운 것들을 매우 즐겼던 삶의 미학가"라고 묘사했다.[14][15]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가 연주된 후, 장례 행렬은 보르메 레 미모자의 생 트로피메 로마 가톨릭 교회로 이동했고, 로페즈 신부가 종교 의식을 집전했다. 의식 중에는 키농의 가족이 선택한 로비 윌리엄스의 노래 천사들이 울려 퍼졌다. 키농의 장남 로빈은 아버지를 "인생의 영웅"이라고 불렀다. 키농은 그의 소원에 따라 보르메 레 미모자의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매장에는 가족들만 참석했다.[14][16]
그를 기리기 위해 여러 시설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2004년 4월 23일, 살레즈쉬르산의 콜레주 체육관은 "피에르 키농 체육관"으로 명명되었다.[17] 보르메레미모자의 체육관 역시 키농 사망 한 달이 채 안 된 2011년 9월 초에 "피에르 키농 체육관"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 체육관의 개관식은 키농의 50번째 생일이었던 2012년 2월 20일에 열렸으며, 그의 가족과 알베르 바티네 시장, 베르나르 암살렘 프랑스 육상 연맹 회장, 그리고 로랑스 빌리, 스테판 디아나, 장 갈피옹, 조셉 마흐무드, 윌리엄 모티 등 동료 선수들이 참석했다.[18] 또한, 낭트에 새로 건설된 실내 스포츠 경기장인 피에르-키농 메트로폴리탄 경기장은 2013년 9월에 개장했다.[19][20]
6. 수상
- 레지옹 도뇌르 기사 훈장[21]
7. 주요 기록
- 결승전에서의 순위와 높이만 표시되어 있습니다.*
연도 | 대회 | 개최지 | 순위 | 기록 |
---|---|---|---|---|
1981 | 유럽 주니어 선수권 대회 | 위트레흐트, 네덜란드 | 2위 | 5.3m |
1982 | 유럽 선수권 대회 | 아테네, 그리스 | 12위 | {{cvt |
1983 | 세계 선수권 대회 | 헬싱키, 핀란드 | 순위 없음 | NM |
1984 | 유럽 실내 선수권 대회 | 예테보리, 스웨덴 | 2위 | 5.75m |
1984 | 올림픽 | 로스앤젤레스, 미국 | 1위 | {{cvt |
1985 | 그랑프리 파이널 | 로마, 이탈리아 | 3위 | 5.7m |
- 장대높이뛰기 - 5.9m (1985년)
참조
[1]
웹사이트
Suicide de Pierre Quinon, champion olympique à la perche en 1984
http://www.lemonde.f[...]
Le Monde and AFP
2011-08-1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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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 tragique pour le champion Pierre Quinon
http://www.francesoi[...]
France-Soir
2011-08-18
[3]
웹사이트
Athlétisme - Disparition. Le perchiste Pierre Quinon s'est suicidé
http://www.leprogres[...]
Le Progrès
2011-08-18
[4]
웹사이트
La fin tragique de Pierre Qui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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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Progrès
2011-08-1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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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perchiste Pierre Quinon s'est suicid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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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ope1.fr
2011-08-18
[6]
서적
The Complete Book of the Summer Olympics 1996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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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웹사이트
Pierre Quinon, 1er champion olympique français en saut, s'est suicidé à 49 ans
http://www.purepeopl[...]
Pure People
2011-08-1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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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Quinon, la disparition tragique d'un grand champion
http://www.parismatc[...]
Paris Match
2011-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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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Quinon s'est donné la m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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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 Ou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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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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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tragique disparition de Pierre Qui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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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r-Matin
2011-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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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létisme : le perchiste Pierre Quinon s'est suicid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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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on Capit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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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utiful victory (Lyon 72 - Perth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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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World Masters Athletics Championships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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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mes : l'hommage du monde du sport à Pierre Qui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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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r-Ma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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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le aux obsèques de Pierre Qui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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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sport.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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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dernier hommage à Pierre Qui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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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Progrè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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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nier hommage à Pierre Qui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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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Dauphiné libéré
2011-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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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gymnase du collège prend le nom de Pierre Qui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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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rhodiaclu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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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gymnase Pierre-Quinon inauguré à Bor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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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r-Matin
2012-02-2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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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stade d'athlétisme s'appellera Pierre-Quinon - Nantes
http://www.ouest-fra[...]
Ouest-France
2013-06-2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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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issance du " Stadium métropolitain Pierre Quin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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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nantesmetropole.fr
201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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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dernier vertige de Pierre Qui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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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Point
2011-08-25
[22]
뉴스
五輪金のキノン氏が転落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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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ポーツナビ
2011-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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