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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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테네는 그리스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로, 아티키 분지에 위치해 있으며, 기원전 3000년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해 온 유서 깊은 도시이다. 아테나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서구 문명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민주주의, 철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현재 아테네는 그리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며,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등 수많은 유적과 박물관을 보유한 주요 관광 도시이기도 하다. 아테네는 아테네 국제공항과 피레우스 항구를 통해 국제적인 교통의 요지이며, 아테네 지하철, 트램, 버스 등 다양한 대중교통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아테네는 여러 도시와 자매 결연을 맺고 있으며, 그중에는 서울, 로스앤젤레스, 베이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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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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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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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Αθήνα |
로마자 표기 | Athína |
별칭 | το κλεινόν άστυ (tò kleinòn ásty, "영광스러운 도시") το ιοστεφὲς ἄστυ (tò iostephès ásty, "제비꽃 왕관을 쓴 도시") 지혜의 도시 이성의 도시 |
지리 | |
국가 | 그리스 |
지리적 지역 | 중앙 그리스 |
행정 지역 | 아티카 |
지역 단위 | 중앙 아테네 |
면적 | 38.964 km² |
도시 지역 면적 | 412 km² |
수도권 면적 | 2,928.717 km² |
고도 | 70.1m (최저) - 338m (최고) |
인구 | |
전체 인구 (2021년) | 643,452명 |
도시 인구 | 3,059,764명 |
수도권 인구 | 3,638,281명 |
정치 | |
정치 체제 | 시장-의회 정부 |
시장 | 하리스 두카스 |
시장 소속 정당 | PASOK |
명명 유래 | 아테나 |
경제 | |
수도권 GDP (2022년) | 970억 유로 |
1인당 GDP | 25,800 유로 |
시간대 | |
시간대 | EET |
협정 세계시 (UTC) | +2 |
서머타임 | EEST |
서머타임 협정 세계시 (UTC) | +3 |
교통 | |
주요 공항 | 아테네 국제공항 |
기타 정보 | |
우편 번호 | 10x xx, 11x xx, 120 xx |
지역 번호 | 21 |
차량 등록 번호 | Yxx, Zxx, Ixx |
수호성인 |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스 (10월 3일) |
공식 웹사이트 | cityofathens.gr |
2. 지명의 어원
아테네는 적어도 3,000년 이상 사람들이 계속 거주해 온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1000년경 고대 그리스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이후 약 500여 년간 아테네 고유의 문화 유적을 바탕으로 서양 문명의 기틀을 마련한다. 중세 시대에는 쇠락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부흥으로 다시 영화를 누렸으며, 십자군 전쟁 당시 이탈리아와의 교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서는 오랜 침체를 겪었다.
고대 그리스어로 도시명 아테네는 '''아테나이'''(Ἀθῆναιgrc)로 아테나 여신과 관련되어 있다. 이 도시의 명칭은 테바이, 뮈케나이, 델포이처럼 문법상 복수형으로 되어있다. 아테나이는 아테나(Ἀθῆναgrc)의 복수형이다.
19세기에 '''아테나이'''(Ἀθῆναιel) 표기가 아테네 시의 공식 명칭으로 다시 정해졌다. 그리스 정부가 1970년대 카타레부사 그리스어의 사용을 포기하면서 Ἀθήναel(아티나)가 아테네의 공식 명칭이 된다.
신화에 따르면, 아테네의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을 무렵 아테나 여신과 그녀의 삼촌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이 도시의 수호신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두 신은 누가 더 이로운 선물을 주는지에 따라 승패를 결정하기로 하고 당시 그 지역 왕인 케크롭스 1세에게 판단을 부탁했다. 비블리오테케에 따르면 포세이돈은 트리아이나를 땅에 꽂아 염수가 솟는 우물을 만들었고, 베르길리우스의 농경시에서는 말을 선물하였다고 한다.[279][280] 아테나는 올리브나무를 선사하고 그 나무를 기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27][26] 이 경쟁에서 케크롭스 1세는 아테나 여신의 편을 들어주었고, 그래서 아테나의 이름에서 유래한 아테네가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통념과 달리, 현 학계에서는 여신으로부터 도시의 이름이 제정된 것이 아니라, 도시의 이름으로부터 여신의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281][25]
고대 그리스어로 이 도시의 이름은 Ἀθῆναιgrc (''Athênai'', 고전 아테네어)였는데, 이는 복수형 단어이다. 호메로스 시대 그리스어와 같은 초기 그리스어에서는 Ἀθήνηgrc (''Athḗnē'')와 같이 단수형으로 사용되었다.[23] Θῆβαιgrc (''Thêbai'')나 Μυκῆναιgrc (''Μukênai'')처럼 나중에 복수형으로 바뀐 것으로 추측된다. 이 단어의 어근은 그리스어나 인도유럽어족 기원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며,[24] 아티카의 그리스 이전 토착어의 잔재일 가능성이 있다.[24]
중세 시대에는 이 도시의 이름이 다시 단수형인 Ἀθήναel로 표기되었다. 알폰소 10세는 '죽음/무지가 없는 곳'이라는 가짜 어원을 제시했다. 오스만 튀르키예어에서는 ''Ātīnā''라고 불렸고,[32] 현대 튀르키예어에서는 ''Atina''라고 부른다.
고전 문학에서는 이 도시를 보라빛 관의 도시 또는 τὸ κλεινὸν ἄστυgrc (''tò kleinòn ásty'', "영광스러운 도시")라고 부르기도 했다.
3. 역사
아테네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은 쉬스트 동굴(Cave of Schist)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11세기에서 7세기 사이로 거슬러 올라간다.[33] 아테네는 최소 5,000년(기원전 3000년) 동안 계속해서 사람이 살았다.[34][50] 기원전 1400년경에는 미케네 문명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고, 아크로폴리스는 중요한 미케네 요새의 자리였으며, 그 흔적은 특징적인 사이클롭스 벽의 일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35]
케라메이코스[37] 등지의 철기 시대 매장 유적은 종종 풍부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기원전 900년 이후 아테네가 이 지역에서 무역과 번영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38]
기원전 6세기에는 광범위한 사회적 불안으로 솔론의 개혁이 이루어졌고, 이는 기원전 508년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한 민주주의 도입으로 이어졌다. 아테네는 이때 대규모 함대를 가진 중요한 해상 강국이 되어, 페르시아 지배에 대한 이오니아 도시들의 반란을 도왔다. 이후 벌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을 이끌고 페르시아를 물리쳤으며,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와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보이오티아와 아티카가 페르시아에 함락된 후, 아테네는 1년 안에 두 번이나 점령 및 약탈당했다.[39]
이후 수십 년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황금기로 알려져 있으며, 이 시기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주요 도시가 되었고, 그 문화적 업적은 서구 문명의 기초를 마련했다.[14] 아이슈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희곡 작가들과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등 역사가, 의사 히포크라테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이 시기에 아테네에서 활동했다. 델로스 동맹은 원래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연합이었으나, 곧 아테네의 제국적 야망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그 결과 발생한 긴장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으로 이어졌고, 아테네는 라이벌 스파르타에게 패배했다.[40]
기원전 4세기 중반,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아테네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기원전 338년 필리포스 2세의 군대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와 테베를 포함한 일부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을 격파했다. 이후 로마 통치하에 아테네는 널리 존경받는 학교들 덕분에 자유 도시 지위를 부여받았다. 2세기에는 아테네 시민이었던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41]가 도서관, 체육관, 현재까지 사용되는 수로, 여러 사원과 신전, 다리 건설을 명하고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완공에 자금을 지원했다.
4세기 초, 동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에서 통치를 시작했고, 제국의 도시 건설과 확장으로 아테네의 많은 예술품이 황제들에 의해 옮겨져 장식되었다. 제국은 기독교화되었고, 라틴어 사용은 그리스어로 대체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두 언어가 모두 사용되었다. 후기 로마 시대에 아테네는 13세기까지 황제들에 의해 통치되었고, 시민들은 자신을 로마 제국의 시민("''로마이오이''")으로 여겼다. 제국의 기독교화는 아테네에 큰 영향을 미쳐 도시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들었다.[50] 파르테논 신전, 에렉테이온, 헤파이스테이온(테세이온) 등 고대 유적은 교회로 개조되었다.
아테네는 신플라톤주의 학습 중심지로 남아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카이사레아의 바실, 황제 율리아누스 등 주목할 만한 제자들을 배출하며 이교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독교 유물은 5세기 초까지 고고학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42] 267년 헤룰리족과 396년 알라리크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의 약탈은 도시 구조와 운명에 큰 타격을 입혔고, 아테네는 이후 고대 도시의 일부만을 포함하는 작은 요새 지역으로 제한되었다.[42]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529년에 이교도의 철학 강의를 금지했는데,[43] 이는 일반적으로 아테네 고대 역사의 끝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아테네는 사라센의 습격을 받았다. 896년에는 아테네가 습격을 받고 짧은 기간 동안 점령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일부 고고학적 유적과 당시 건물에 아랍식 장식 요소를 남겼다.[44] 비잔티움 제국의 성상 파괴 논쟁에서 아테네는 787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테네의 이레네 황후의 역할 때문에 성상 숭배파 입장을 지지한 것으로 여겨진다.[42]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터키의 제국 침략과 내전은 이 지역을 크게 벗어났고, 아테네는 피해 없이 지방 도시로서 존재를 유지했다. 알렉시오스, 요한, 마누엘 등 콤네누스 황제들의 지도력으로 비잔티움 제국이 회복되면서 아티카와 그리스의 다른 지역은 번영을 누렸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중세 도시는 11세기부터 12세기 말까지 지속적이고 빠른 성장기를 경험했다.
고대부터 사용되지 않던 아테네 아고라(시장)는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곧 비누와 염료 생산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도시의 성장은 베네치아와 에게 해 항구를 자주 드나들던 상인들을 아테네로 끌어들였다.
11세기와 12세기는 아테네의 비잔티움 미술 황금기였다. 아테네와 그 주변의 가장 중요한 중세 비잔티움 교회의 대부분이 이 시기 동안 건설되었으며, 이는 도시 전반의 성장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1204년 4차 십자군이 아테네를 정복했고, 도시는 라틴인에게서 탈환되지 못하고 오스만 투르크에게 함락되었다. 아테네는 19세기까지 그리스의 통치를 받지 못했다.
1204년부터 1458년까지 아테네는 십자군 전쟁 이후 세 차례에 걸쳐 라틴인에 의해 지배되었다. "라틴인" 또는 "프랑크족"은 십자군 전쟁 동안 동지중해로 온 서유럽인이자 라틴 교회 신자들이었다. 비잔티움 그리스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아테네는 일련의 봉토의 일부였으며, 제1차 십자군 이후 시리아와 키프로스에 세워진 십자군 국가와 유사했다. 이 시기는 ''프랑코크라티아''로 알려져 있다.
1397년 야쿠브 파샤와 티무르타시라는 오스만 장군들에 의해 아테네에 대한 최초의 오스만 제국 공격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아테네를 단기간 점령하는 것으로 이어졌다.[44] 1458년, 메흐메드 2세 술탄의 지휘 아래 아테네는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었다.[44] 오스만 술탄은 고대 유적의 아름다움에 크게 감명받아 약탈이나 파괴를 금지하는 페르만(firman)(황제의 칙령)을 사형이라는 형벌과 함께 발표했다. 파르테논 신전은 도시의 주요 모스크인 파르테논 모스크로 개조되었다.[50]
오스만 지배하에 아테네는 중요성을 상실했고 인구는 급감하여 프란츠 바빙거의 말대로 "작은 시골 마을"이 되었다.[44]
터키인들은 파르테논 신전과 프로필라에(Propylaea)(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화약과 폭발물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1640년, 번개가 프로필라에를 강타하여 파괴되었다.[46] 1687년 모레아 전쟁 중 프란체스코 모로시니 장군 지휘하의 베네치아군이 아크로폴리스를 포위 공격했고(아크로폴리스 포위 공격 (1687)), 파르테논 신전을 강화하기 위해 오스만인들이 아테네 니케 신전을 해체했다. 포격 중 발사된 포탄이 파르테논 신전에 있던 화약고를 폭발시켰고(9월 26일), 건물은 심각한 피해를 입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822년, 그리스 반란군이 아테네를 점령했지만, 1826년 오스만 제국에 다시 함락되었다(아크로폴리스는 1827년 6월까지 유지됨). 고대 유적들은 다시 한번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오스만 군대는 1833년 3월 철수할 때까지 이곳을 점령했다.
그리스 독립 전쟁 이후 그리스 왕국이 건립되자, 아테네는 역사적, 감상적 이유로 1834년 새로운 독립 그리스 국가의 두 번째 수도로 나프플리오를 대체하여 선택되었다.[47] 당시 아테네는 아크로폴리스 기슭을 따라 흩어진 집들로 이루어진 약 4,000명(이전 인구의 절반 미만)의 작은 도시였다. 그리스 국왕 오토 1세는 건축가 스타마티오스 클레안티스와 에두아르트 샤우베르트에게 국가 수도에 걸맞는 현대적인 도시 계획을 설계하도록 의뢰했다.
최초의 현대 도시 계획은 아크로폴리스, 고대 케라메이코스 묘지, 그리고 바이에른 국왕의 새로운 궁전(현재 그리스 의회가 위치)으로 정의되는 삼각형으로 구성되어 현대 아테네와 고대 아테네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신고전주의는 이 시대의 국제적인 건축 양식으로, 한센, 클렌체, 불랑제, 카프탄조글루 등 바이에른, 프랑스, 그리스 건축가들이 새로운 수도의 주요 공공 건물들을 설계하는 데 사용되었다. 1896년 아테네는 최초의 현대 올림픽 경기를 개최했다. 1920년대에는 그리스-터키 전쟁 (1919년-1922년)과 그리스와 터키 간 인구 교환 이후 소아시아에서 추방된 많은 그리스 난민들이 아테네 인구를 증가시켰다. 도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아테네의 가장 큰 확장은 주로 제2차 세계 대전과 그리스 내전이 끝난 1950년대와 1960년대 이후에 일어났다.
1980년대에는 공장과 자동차 증가로 인한 스모그와 혼잡, 자유 공간 부족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나타났다. 1990년대에 도시 당국이 취한 대기 오염 방지 조치와 아티키 오도스 고속도로, 아테네 지하철 확장, 아테네 국제공항 등 도시 기반 시설의 개선으로 오염이 감소하고 아테네는 훨씬 더 기능적인 도시로 변모했다. 2004년 아테네는 2004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다.
4. 지리
아테네는 아티키 중앙 평야에 걸쳐 펼쳐져 있으며, 이 평야는 '''아테네 분지''' 또는 '''아티카 분지'''(Λεκανοπέδιο Αθηνών/Αττικής|레카노페디오 아티논/아티키스el)라고 불린다. 이 분지는 네 개의 큰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서쪽에는 아이갈레오 산, 북쪽에는 파르니타 산, 북동쪽에는 펜텔리쿠스 산, 동쪽에는 히메투스 산이 있다.[283] 이 중 파르니타 산이 가장 높으며(1413m),[49]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리카베투스 산은 아테네 시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 중 하나이며, 아티카 분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아테네는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 때문에 기온 역전 현상이 발생하여 도시의 대기 오염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50]
케피소스 강, 일리소스 강, 에리다노스 강은 아테네의 역사적인 강들이다.
4. 1. 기후
아테네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10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비가 많이 내린다. 여름에는 거의 비가 오지 않고 가끔 폭풍우나 소나기가 내리는 정도이다. 파르니타산맥의 영향으로 강한 비그늘이 형성되기도 하지만, 아테네는 다른 지중해 지역에 비해 매우 건조하다. 북부 교외 지역은 산의 영향으로 겨울에 눈이 더 많이 내리고 기온이 낮아지는 다른 기후 형태를 보인다. 도심에는 안개가 드물지만, 이메토스 산 동쪽 지역에는 안개가 자주 발생한다.[56]
눈은 드물지만, 1987년 3월, 1992년 2월, 2002년 1월 4~6일, 2004년 2월 12~13일, 2008년 2월 16~18일에 폭설이 내려 도시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2021년 2월 16일[59]과 2022년 1월 24일[60]에도 폭설이 내려 도시 전체가 눈으로 뒤덮였다.
봄과 가을은 야외 활동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여름은 특히 무덥고 때로는 스모그와 공해가 발생할 수 있지만, 예전보다는 많이 개선되었다. 7월 낮 평균 기온은 33.5°C까지 올라가며, 남쪽이나 남서쪽에서 그리스 전역으로 열풍이 부는 7, 8월에는 혹서가 잦다. 이런 날에는 기온이 40°C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아테네는 도시 열섬 현상 때문에 여름에 특히 더 더워질 수 있다.[61] 유럽 본토에서 가장 더운 도시 중 하나로,[62] 폭염에 대처하기 위해 유럽 최초로 폭염 담당관을 임명하기도 했다.[63] 아테네 광역시는 2021년까지 세계기상기구 기록에서 유럽 최고 기온인 48°C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1977년 7월 10일 엘레프시나와 타토이 궁전 지역에서 기록되었다.[64][65]
아테네는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고온 스텝 기후(BSh)에 해당한다. 1981년-2010년 평년값에서는 스텝 기후로 바뀌었지만,[166] 온대와 건조대의 경계선상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414.1mm이며, 대부분 10월부터 4월 사이에 내린다.[167]
다음은 아테네의 기후 정보를 정리한 표이다.
월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연간 |
---|---|---|---|---|---|---|---|---|---|---|---|---|---|
평균 최고 기온 (°C) | 13.3 | 14.2 | 17.0 | 21.1 | 26.5 | 31.6 | 34.3 | 34.3 | 29.6 | 24.4 | 18.9 | 14.4 | 23.3 |
평균 기온 (°C) | 10.2 | 10.8 | 13.1 | 16.7 | 21.8 | 26.6 | 29.3 | 29.4 | 25.0 | 20.3 | 15.6 | 11.6 | 19.2 |
평균 최저 기온 (°C) | 7.1 | 7.3 | 9.2 | 12.3 | 17.0 | 21.6 | 24.2 | 24.4 | 20.4 | 16.2 | 12.2 | 8.7 | 15.0 |
강수량 (mm) | 55.6 | 44.4 | 45.6 | 27.6 | 20.7 | 11.6 | 10.7 | 5.4 | 25.8 | 38.6 | 70.8 | 76.3 | 433.1 |
출처: 아테네 국립천문대 (평년값: 1991년~2020년, 극값: 1890년~현재)[284], Meteoclub[285][286]
4. 2. 환경 문제
아테네는 산악 지형으로 인해 기온 역전 현상이 발생하여 도시의 오염 문제가 심각했다. 1970년대에는 공해가 극심하여 그리스 문화부는 "에렉테이온의 여상주(女像柱)가 심하게 훼손되고, 파르테논 신전 서쪽 면에 있는 기병의 얼굴도 지워졌다"고 보고했다.[51] 1970년대 후반까지 아테네의 대기오염은 매우 심각해서, 당시 그리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콘스탄티노스 트리파니스(Constantine Trypanis)는 "...에렉테이온(Erechtheum)의 카리아티드 5개의 조각 세부 사항이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파르테논 신전 서쪽의 기수 얼굴은 거의 지워졌다."고 언급했다.[221]
1990년대 그리스 당국은 아티키 분지의 대기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광범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공해는 여전히 아테네의 문제로 남아 있으며, 특히 여름철 더운 날에는 더욱 심각하다. 2007년 6월 말, 아티키 지역에 큰 산불이 발생하여 파르니타산맥 국립공원의 숲 상당 면적이 불탔으며, 이는 아테네의 연중 대기 상태 유지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져 도시 대기 상태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52] 2007년 6월 하순,[222] 아티카 지역에서는 여러 건의 산불[222]이 발생했는데, 그중에는 파르니타 산(Mount Parnitha)[223]의 광대한 삼림 국립공원의 상당 부분을 태운 화재도 포함되어 있다.[223] 파르니타 산은 연중 아테네의 대기 질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222]
지난 10여 년간 폐기물 처리 노력(특히 프시탈리아 섬의 시설) 덕분에 사로니코스 만의 수질이 개선되었으며, 아테네 해안의 수질은 이제 수영할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다.
2007년 1월, 아테네는 교외 아노 리오시아 인근 쓰레기 매립장이 가득 차서 일시적으로 쓰레기 처리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224] 이 문제는 1월 중순 당국이 임시 매립장으로 해결했다.[224]
5. 행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