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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리케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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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리케르트는 1863년 현재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태어난 독일의 철학자이다. 그는 신칸트주의의 바덴 학파를 이끌었으며, 가치 철학을 전개하여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의 방법론적 차이를 강조했다. 리케르트는 인식의 대상을 초월적 가치인 당위로 보고, 문화과학은 가치 관계적이며 개별화의 방법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그의 철학은 막스 베버의 사회학 연구에 영향을 미쳤으며,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의 조교로 학문적 경력을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인식의 대상』, 『자연과학 개념 형성의 한계』, 『문화과학과 자연과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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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리케르트
기본 정보
하인리히 리케르트
본명하인리히 요한 리케르트
출생일1863년 5월 25일
출생지프로이센 왕국, 단치히 (현재 폴란드, 그단스크)
사망일1936년 7월 25일
사망지나치 독일, 하이델베르크
국적독일
학문 분야
시대19세기 철학
지역서양 철학
학파신칸트주의 (바덴 학파)
주요 관심사인식론
교육베를린 대학교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박사, 1888년)
소속 기관프라이부르크 대학교 (1894–1915)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1915–1932)
주요 사상역사적 사실과 과학적 사실 사이의 질적 구별
앎 (kennen)과 인식 (erkennen)의 구별
박사 지도 교수빌헬름 빈델반트
박사 학위 제자브루노 바우흐
마르틴 하이데거
주요 제자루돌프 카르나프
학위 논문 제목정의론 (Zur Lehre von der Definition)
학위 논문 링크Zur Lehre von der Definition (On the Theory of Definition)
학위 논문 년도1888년

2. 생애

1863년 프로이센 단치히(현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아버지 하인리히 에드윈 리케르트(Heinrich Edwin Rickert)와 어머니 아네테 스토다트(Annette née Stoddart)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자이자 후에 국민자유당 소속 정치인이었다.

단치히와 베를린에서 수학한 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입학하여 미술사학자 헤르만 그림(Hermann Grimm)과 철학자 프리드리히 파울젠(Friedrich Paulsen)의 강의를 들었다. 특히 파울젠의 강의는 리케르트가 철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1885년 슈트라스부르크 대학교로 옮겨 빌헬름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 등의 강의를 들었으며, 취리히에서는 리하르트 아베나리우스(Richard Avenarius)를 알게 되었다. 1888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빈델반트의 지도 아래 논문 Zur Lehre von der Definitionde(정의론)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889년 건강상의 이유로 프라이부르크로 이주했으며, 1891년 《Der Gegenstand der Erkenntnisde》(인식의 대상)을 집필하여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교수 자격을 얻었다. 이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사강사(Privatdozent)와 준교수를 거쳐, 1894년 조교수, 1896년에는 알로이스 릴(Alois Riehl)의 후임으로 정교수가 되었다. 프라이부르크 시절 그의 강의에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출석하기도 했다.

1916년에는 빈델반트의 후임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었다. 리케르트가 떠난 프라이부르크 교수직은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이 맡았다. 하이델베르크에서는 1921년부터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와 동료로 지냈으며, 그 외에도 한스 드리슈(Hans Driesch), 하인리히 마이어(Heinrich Maier), 막스 베버(Max Weber) 등과 교류했다.

1932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퇴직했으며, 그의 후임은 야스퍼스가 되었다. 1936년 나치 독일 치하의 하이델베르크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사상

리케르트의 사상은 가치 철학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이는 그의 인식론과 문화과학 방법론의 토대를 이룬다. 그는 초기 저작 《인식의 대상》(1892)에서 인식하는 주관을 판단하는 주관으로, 인식되는 대상은 초월적인 가치인 당위(當爲)로 규정했다.

이후 《문화과학과 자연과학》(1899) 등의 저작을 통해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의 방법론적 차이를 명확히 했다. 자연과학이 가치를 떠나 일반화의 방법을 통해 자연 현상을 기술하는 몰가치적(沒價値的) 학문이라면, 문화과학은 개별적이고 가치와 관련된 문화 현상을 개별화의 방법을 통해 탐구하는 가치관계적(價値關係的)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스승 빌헬름 빈델반트의 견해를 발전시킨 것으로, 서남독일 학파(바덴 학파)의 핵심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리케르트의 이러한 방법론은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연구, 특히 이상형 개념 정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주저 《철학의 체계》(제1부, 1921)는 문화가치의 체계를 다루며, 여기서 그는 객관계(客關界), 가치계(價値界), 의미실현(意味實現)의 세 세계를 설정했다. 특히 세 번째 세계인 의미실현의 세계는 실재와 가치가 결합된 삶의 세계이며,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형이상학의 대상이 아닌 형이전학(形而前學)의 대상이라고 보았다. 리케르트에게 철학이란 이러한 세계 전체를 학문적으로 추구하는 활동이었다.

리케르트는 인식이란 무한한 현실 속에서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여 파악하는 가치판단의 과정이라고 보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가치철학(Wertphilosophie|베르트필로조피de)을 체계화했다.

한편, 그는 당시 유행하던 생의 철학에 대해서는 반성을 결여했다는 이유로 《생의 철학》(1920)에서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니체나 베르그송, 딜타이, 지멜 등이 주장한 소위 "생명적 가치"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며,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타당한 진정한 가치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딜타이가 과학과 역사(자연과 정신)의 구분을 해석학을 통해 접근하려 한 반면, 리케르트는 칸트의 선험적 방법을 적용하여 이를 극복하고 통합적인 지식 이론을 구축하고자 했다.[3] 그의 제자 중에는 훗날 저명한 철학자가 된 마르틴 하이데거가 있다.[2]

3. 1. 가치 철학

리케르트의 철학은 가치 철학이다. 그는 초기 저작 《인식의 대상》(1892)에서 인식하는 주관을 판단하는 인식론적 주관으로 보았고, 인식되는 대상은 초월적인 가치인 당위(當爲)라고 주장했다.

리케르트는 스승 빌헬름 빈델반트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켜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을 구분하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자연과학적인 개념 구성의 한계》(1896-1902)와 《문화과학과 자연과학》(1899)에서 그는 자연과학이 가치를 배제하고 일반화의 방법을 통해 자연을 기술하는 반면, 문화과학은 개성적이고 가치와 관련된 문화재를 개별화의 방법을 통해 탐구한다고 설명했다. 즉, 자연과학은 몰가치적(沒價値的) 태도를 취하지만, 문화과학은 가치관계적(價値關係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과학 방법론은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연구, 특히 이상형 개념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주저 《철학의 체계》(제1부, 1921)는 문화가치의 체계를 다룬다. 리케르트는 가치를 다른 것들과 구별하며 세 개의 세계, 즉 객관계(客關界), 가치계(價値界), 의미실현(意味實現)의 세계를 설정했다. 이 중 세 번째 세계인 의미실현의 세계는 실재적인 것과 타당한 것이 결합된 세계로, 이론적·예술적·도덕적·종교적인 삶의 세계이며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는 이를 형이상학의 대상이 아닌 형이전학(形而前學)의 대상이라 보았다. 리케르트에게 철학이란 형이전학적 세계, 감성적 세계, 가치의 예지적 세계로 구성된 전체 세계를 학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었다.

리케르트는 형이전학의 대상으로서 가치를 품고 있는 삶 자체는 인정했지만, 당시 유행하던 생의 철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는 《생의 철학》(1920)에서 생의 철학이 반성을 결여했다고 지적하며 거부했다. 또한, 니체나 베르그송과 같은 철학자들과 달리, 가치는 삶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요구하며, 딜타이지멜 등이 말한 "생명적 가치"는 진정한 의미의 가치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리케르트의 철학은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연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베버는 그의 방법론, 특히 이상형이라는 개념을 리케르트의 연구에서 많이 차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마르틴 하이데거는 리케르트의 조교로 학문적 경력을 시작하여 그 밑에서 졸업하고 리케르트의 지도하에 교수 자격 논문을 작성했다.[2]

찰스 R. 밤바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 리케르트는 그의 연구에서 딜타이처럼 과학과 역사 또는 자연과 정신 사이의 구분을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철학적 방법으로 이러한 구분을 극복하는 통합적인 지식 이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딜타이에게 그 방법은 해석학과 결합되었지만, 리케르트에게는 칸트의 선험적 방법이었다.[3]

리케르트는 빌헬름 빈델반트와 함께 소위 바덴 학파의 신칸트주의자들을 이끌었다.

리케르트에게 있어 대상의 인식이란, 어떤 주어(비합리적 내용)와 술어(합리적 형식)를 결합하는 것이며, 그 판단에는 가치가 작용하게 된다. 즉, 인식이란 다양한 현실 중에서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만을 선택하여 파악하는 것이다. 리케르트는 이것을 가치판단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가치철학(Wertphilosophie|베르트필로조피de)을 전개했다.

또한, 이 가치철학의 관점에서 리케르트는, 자연과학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반적 법칙만을 파악하려 하는 것에 대해, 역사과학은 정치·경제·예술 등의 문화적 가치에서 보아 중요한 개성적 특징만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후자에 "문화과학"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스승 빌헬름 빈델반트의 사상을 발전시킨 이 "가치관계적"인 문화철학의 입장에서 리케르트는 인식론을 검토하여, 그 후의 독일 역사학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3. 2. 문화과학과 자연과학

리케르트는 그의 저서 《자연과학적인 개념 구성의 한계》(1896-1902)와 특히 《문화과학과 자연과학》(1899)을 통해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의 근본적인 차이를 명확히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자연과학은 가치를 배제하고 반복적인 자연 현상을 일반화의 방법으로 설명하는 몰가치적(沒價値的) 학문이다. 자연과학은 개별적인 사건이나 현상보다는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하는 데 중점을 둔다.

반면, 문화과학은 역사, 예술, 사회 등 인간의 가치가 담긴 개별적이고 특수한 문화 현상(문화재)을 개별화의 방법으로 탐구하는 가치관계적(價値關係的) 학문이다. 문화과학은 연구 대상을 선택하는 단계에서부터 어떤 것이 역사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가치 판단이 개입된다고 보았다. 즉, 문화과학은 연구자의 가치관과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구분은 스승 빈델반트의 아이디어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서남독일 학파 (바덴 학파)의 핵심적인 사상이 되었다. 이들은 문화와 가치의 문제를 철학의 중심 과제로 삼았다.

리케르트의 이러한 방법론적 구분, 특히 가치 관련성과 개별화 개념은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베버의 이상형 개념 정립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2] 베버는 사회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객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연구 대상의 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리케르트의 영향이 반영된 것이다.

리케르트는 인식 자체가 가치판단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가치철학(Wertphilosophie)을 펼쳤다. 그는 무한하고 다양한 현실 속에서 인간이 모든 것을 인식할 수는 없으며, '알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여 파악하는 과정이 바로 인식이라고 설명했다.

이 가치철학적 관점에서 그는 자연과학이 보편 법칙을 추구하는 반면, 역사과학(문화과학)은 정치, 경제, 예술 등 문화적 가치에 비추어 중요한 개별적 사건이나 인물의 특징을 파악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했다.

딜타이 역시 과학과 역사(자연과 정신)의 구분을 인정했지만, 딜타이가 해석학을 통해 이를 이해하려 한 것과 달리, 리케르트는 칸트의 선험적 방법을 적용하여 통합적인 지식 이론을 구축하고자 했다. 찰스 R. 밤바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 "리케르트는 그의 연구에서 딜타이처럼 과학과 역사 또는 자연과 정신 사이의 구분을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철학적 방법으로 이러한 구분을 극복하는 통합적인 지식 이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딜타이에게 그 방법은 해석학과 결합되었지만, 리케르트에게는 칸트의 선험적 방법이었다."[3]

리케르트의 '가치관계적' 문화과학 개념은 이후 독일 역사학 연구에 중요한 철학적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역사 서술이 단순히 과거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관에 따라 의미 있는 사건들을 선택하고 해석하는 과정임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니체나 베르그송과 같은 생의 철학자들과 달리, 진정한 가치는 삶과 일정한 거리를 둘 때 객관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딜타이지멜 등이 언급한 소위 "생명적 가치"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며, 시공을 초월하여 보편타당한 의미를 지니는 진정한 가치는 아니라고 비판했다. 이는 그의 철학이 당시 유행하던 생의 철학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지점이다.

3. 3. 역사학 방법론

리케르트는 초기 저서 《인식의 대상》(1892)에서 인식하는 주관은 판단하는 주관으로서 인식론적인 주관이며, 인식되는 대상은 초월적인 가치인 당위(當爲)라고 보았다. 이후 《자연과학적인 개념 구성의 한계》(1896-1902)와 《문화과학과 자연과학》(1899)에서 그는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의 방법론적 차이를 명확히 했다. 자연과학은 가치를 떠난 자연 현상을 일반화의 방법으로 기술하는 반면, 문화과학은 개성적이고 가치와 관련된 문화재를 개별화의 방법으로 다룬다고 주장했다. 즉, 자연과학은 몰가치적(沒價値的) 태도를 취하지만, 문화과학은 가치관계적(價値關係的)이라는 것이다. 이는 스승인 빌헬름 빈델반트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서남독일 학파가 문화가치의 철학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문화과학 방법론은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리케르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가치의 철학이며, 그의 주저 《철학의 체계》(제1부, 1921) 역시 문화가치의 체계를 다룬다. 그는 가치를 다른 것들과 구별하며, 객관계(客關界), 가치계(價値界), 의미실현(意味實現)의 세 세계를 설정했다. 특히 세 번째 세계는 실재적인 것과 타당한 것이 결합된 세계로, 이론적·예술적·도덕적·종교적인 삶의 세계이며 직접 체험 가능한 형이전학(形而前學)의 대상이라고 보았다. 그는 철학이란 형이전학적 세계, 감성적 세계, 가치의 예지적 세계로 구성된 전체 세계를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비록 형이전학의 대상으로서 가치를 품는 삶을 인정했지만, 당시 유행하던 생의 철학에 대해서는 반성을 결여했다는 이유로 《생의 철학》(1920)에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역사적 사실과 과학적 사실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니체나 베르그송과 같은 철학자들과 달리, 리케르트는 가치가 삶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베르그송, 빌헬름 딜타이, 게오르크 지멜 등이 말한 소위 "생명적 가치"는 진정한 의미의 가치가 아니라고 보았다.

리케르트의 철학은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연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베버는 자신의 방법론, 예를 들어 이상형이라는 개념을 리케르트의 연구에서 상당 부분 차용했다. 또한, 마르틴 하이데거는 리케르트 밑에서 조교로 학문 경력을 시작했으며, 그의 지도 아래 졸업하고 후기 학위 논문을 완성했다.[2]

찰스 R. 밤바흐는 리케르트의 작업에 대해 "리케르트는 그의 연구에서 딜타이처럼 과학과 역사 또는 자연과 정신 사이의 구분을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철학적 방법으로 이러한 구분을 극복하는 통합적인 지식 이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딜타이에게 그 방법은 해석학과 결합되었지만, 리케르트에게는 칸트의 선험적 방법이었다."라고 기술한다.[3]

리케르트는 빌헬름 빈델반트와 함께 바덴 학파라 불리는 신칸트주의 그룹을 이끌었다. 그에게 대상의 인식이란, 어떤 주어(비합리적 내용)와 술어(합리적 형식)를 결합하는 행위이며, 이 판단 과정에는 가치가 개입된다. 즉, 인식은 다양한 현실 속에서 알 가치가 있는 것만을 선택하여 파악하는 과정이다. 리케르트는 이를 가치판단이라고 명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가치철학(Wertphilosophie)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가치철학적 관점에서 그는 자연과학이 반복되는 일반 법칙을 파악하려는 것과 달리, 역사과학(그가 문화과학이라 명명한)은 정치, 경제, 예술 등 문화적 가치에 비추어 중요한 개성적 특징을 파악하는 학문이라고 주장하며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4. 주요 저서

하인리히 리케르트의 주요 저작들은 그의 가치 철학과 문화과학 방법론을 잘 보여준다. 초기 저작인 《인식의 대상》(1892)에서는 인식하는 주관을 판단하는 주관으로, 인식되는 대상을 초월적인 가치인 당위(當爲)로 보았다. 이후 《자연과학적인 개념 구성의 한계》(1896-1902)와 《문화과학과 자연과학》(1899)에서는 자연과학이 일반화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문화과학은 개별적이고 가치와 관련된 문화재를 개별화의 방법으로 다룬다고 주장했다. 이는 빌헬름 빈델반트의 견해를 발전시킨 것으로, 서남독일 학파의 특징인 문화가치 철학을 명확히 보여주며 막스 베버의 사회과학 방법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리케르트의 철학은 가치 철학에 기반하며, 그의 주저 《철학의 체계》(제1부, 1921)는 문화가치의 체계를 다룬다. 그는 객관 세계, 가치 세계, 의미 실현의 세계라는 세 가지 세계를 구분했으며, 특히 세 번째 세계는 실제와 가치가 결합된 체험 가능한 세계로 보았다. 그는 이를 형이상학이 아닌 형이전학(形而前學)의 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당시 유행하던 생의 철학에 대해서는 《생의 철학》(1920)에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아래는 리케르트의 주요 저서 목록이다.

연도원제 (독일어)한국어 번역 제목비고
1888Zur Lehre von der Definitionde정의 이론에 관하여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892Der Gegenstand der Erkenntnis: Ein Beitrag zum Problem der philosophischen Transcendenzde인식의 대상: 철학적 초월 문제에 대한 기여프라이부르크 대학교 교수 자격 논문
1896-1902Die Grenzen der naturwissenschaftlichen Begriffsbildung: Eine logische Einleitung in die historischen Wissenschaftende자연과학 개념 형성의 한계: 역사 과학에 대한 논리적 서론
1899Kulturwissenschaft und Naturwissenschaft: Ein Vortragde문화과학과 자연과학: 강연
1899Fichtes Atheismusstreit und die Kantische Philosophie: eine Säkularbetrachtungde피히테의 무신론 논쟁과 칸트 철학: 세속적 관찰
1905Geschichtsphilosophiede역사철학1924년 《Die Probleme der Geschichtsphilosophie: Eine Einführung》(역사철학의 문제들: 서론)으로 별도 출판
1909Zwei Wege der Erkenntnistheorie: Transscendentalpsychologie und Transscendentallogikde인식론의 두 가지 길: 초월심리학과 초월논리학
1910Vom Begriff der Philosophiede철학의 개념에 관하여
1912Das Eine, die Einheit und die Eins: Bemerkungen zur Logik des Zahlbegriffsde하나, 통일성 그리고 일자(一者): 수 개념의 논리에 대한 소견
1915Wilhelm Windelbandde빌헬름 빈델반트빌헬름 빈델반트에 대한 연구
1920Die Philosophie des Lebens: Darstellung und Kritik der philosophischen Modeströmungen unserer Zeitde삶의 철학: 우리 시대 철학적 유행 경향의 서술과 비판생의 철학 비판
1921System der Philosophie, Erster Teil: Allgemeine Grundlegung der Philosophiede철학 체계, 제1부: 철학의 일반적 기초
1924Kant als Philosoph der modernen Kultur: Ein geschichtsphilosophischer Versuchde현대 문화의 철학자로서의 칸트: 역사철학적 시도
1927Über die Welt der Erfahrungde경험의 세계에 관하여
1930Die Logik des Prädikats und das Problem der Ontologiede술어의 논리와 존재론의 문제
1931Die Heidelberger Tradition in der Deutschen Philosophiede독일 철학의 하이델베르크 전통
1932Goethes Faustde괴테의 파우스트
1934Grundprobleme der Philosophie: Methodologie, Ontologie, Anthropologiede철학의 기본 문제: 방법론, 존재론, 인류학
1939Unmittelbarkeit und Sinndeutungde직접성과 의미 해석


5. 영향

리케르트는 《자연과학적인 개념 구성의 한계》(1896-1902), 《문화과학(文化科學)과 자연과학》(1899) 등의 저서를 통해 자연과학과 문화과학의 방법론적 차이를 명확히 했다. 그는 자연과학이 가치를 배제하고 일반화의 방법을 사용하는 반면, 문화과학은 개별적이고 가치와 관련된 문화 현상을 개별화의 방법으로 다룬다고 주장했다. 자연과학은 가치 중립적(몰가치적) 태도를 취하지만, 문화과학은 가치 관련적(가치관계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빈델반트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서남독일 학파(바덴 학파)가 문화 가치의 철학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이다.

리케르트의 문화과학 방법론은 특히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베버는 자신의 방법론, 특히 이상형(Ideal type)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데 리케르트의 연구를 상당 부분 참고했다.

또한, 20세기 철학의 주요 인물인 마르틴 하이데거는 리케르트 밑에서 조교로 학문 경력을 시작했으며, 리케르트의 지도 아래 졸업하고 후기 학위 논문을 완성했다.[2]

리케르트는 역사적 사실과 과학적 사실 사이의 질적 차이에 대한 논의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니체나 베르그송과 같은 철학자들과 달리, 가치는 삶과 일정한 거리를 필요로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베르그송, 딜타이, 지멜 등이 주장한 소위 "생명적 가치"는 진정한 의미의 가치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그는 《생의 철학》(1920)에서 당시 유행하던 생의 철학이 철학적 반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거부하는 입장을 취했다.

찰스 R. 밤바흐는 리케르트가 딜타이처럼 과학과 역사(또는 자연과 정신)의 구분을 인정하면서도, 칸트의 선험적 방법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통합적인 지식 이론을 구축하고자 했다고 평가한다.[3]

리케르트는 빌헬름 빈델반트와 함께 소위 바덴 학파의 신칸트주의자들을 이끌었다.

참조

[1] 서적 Knowing and Cognizing: Critical Remarks on Theoretical Intuitionism Routledge
[2] 서적 The Neo-Kantian Reader Routledge
[3] 서적 Heidegger, Dilthey and the Crisis of Historicism https://books.google[...] Cornell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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