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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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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원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송시열과 권상하의 제자이다. 그는 강문 8학사로 명성을 얻었으며, 인물성동이 논쟁에서 이간의 인물동성론을 비판하고 '성 삼층설'을 주장하며 호론을 이끌었다. 숙종 때 관직에 진출했으나 경종 때 사직하고, 영조 때 경연관으로 소론을 비판하다 삭직되기도 했다. 이후 학문에 전념하며 《남당집》, 《주서동이고》 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순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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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진
기본 정보
한원진 초상
한원진 초상
한글한원진
한자韓元震
로마자 표기Han Wonjin
일본어 읽기かんげんしん

2. 생애

한원진은 서인 노론의 거두 송시열과 송준길의 제자인 권상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권상하 문하에서 강문 8학사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다.

숙종 43년(1717년) 학행으로 천거받아 관직에 진출했으나, 1721년 (경종 1년) 신축환국으로 노론이 실각하면서 사직했다. 영조 1년(1725년) 경연관으로 복직했으나 소론 배척론을 펴다가 탕평책에 어긋난다며 삭직되었고, 1741년 (영조 17년) 복직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이간의 인물동성론에 반대하며 인(人)·물(物)의 성이 같지 않다고 주장하여 인물성동이 논변을 낳았고, 주희의 이기심성 정설을 수정해 본연의 성을 이분하는 "성 삼층설"을 주장했다.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고수하며 호론의 영수로 활동했다.

천문, 지리, 병학, 산수에도 통달했다.

저서로는 《남당집》, 〈퇴계집차의〉, 〈장자변해〉, 〈양명집변〉, 〈선학통변〉, 〈근사록주설〉 등이 있으며, 1741년 (영조 17년) 송시열이 착수한 《주서동이고》를 완성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문순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조선 서인 노론의 거두 송시열과 송준길의 수제자인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권상하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아 강학한다는 소식을 듣고, 1702년에 그의 문하생이 되어 이간 등과 함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강문팔현)로 선발되었다. 강문 8학사 중 한사람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조 초기의 영의정 한상경의 후손이다.

2. 2. 학문적 성장

일찍이 서인 노론의 거두인 송시열과 송준길의 수제자인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02년 권상하송시열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강학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권상하의 문인 중에서도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보여, 그의 제자 8명을 뜻하는 강문 8학사(강문팔현)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이간 등과 함께 강문팔학사로 손꼽히며 학문적 명성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2. 3. 관직 진출과 좌절

1717년(숙종 43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장릉 참봉에 제수되며 관직에 진출하였다. 1721년(경종 1년) 익위사 부솔에 제수되었으나, 신축환국으로 노론이 실각하면서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2. 4. 탕평책 비판과 복직

1725년 (영조 1년) 경연관으로 제수되며 복직하였으나, 영조노론소론을 함께 등용하는 탕평책에 반대하며 소론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로 인해 탕평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삭직되었다. 1741년 (영조 17년)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2. 5.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

숙종 43년(1717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관직에 나아갔으나, 경종 1년(1721년)에 노론이 실각하면서 사직하였다. 영조 1년(1725년)에 경연관(經筵官)으로 임명되어 진강(進講)하였으나, 소론 배척론을 펴다가 탕평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삭직되었다. 영조 17년(1741년)에 복직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천문(天文)·지리(地理)·병학(兵學)·산수(算數)에도 통달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남당집(南塘集)》, 〈퇴계집차의(退溪集箚疑)〉, 〈장자변해(莊子辨解)〉, 〈양명집변(陽明集辨)〉, 〈선학통변(禪學通辨)〉, 〈근사록주설(近思錄註說)〉 등이 있다. 특히 영조 17년(1741년)에 저술한 《주서동이고(朱書同異考)》는 송시열이 착수한 것을 50년 만에 완성한 거작이었다.

2. 6. 사망과 추증

1751년 (영조 27년) 사망하였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사상과 논쟁

한원진은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수학하였다. 권상하의 문인 중에서도 이름이 높아 그의 8명의 수제자를 뜻하는 강문 8학사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날렸다.

3. 1. 인물성 논쟁과 호락논쟁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수학하였다. 권상하의 문인 중에서도 이름이 높아 그의 8명의 수제자를 뜻하는 강문 8학사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날렸다. 같은 문하의 이간과 인물성 편재 문제를 논하며, 이간의 인물 동성론을 비판하고, 사람(人)과 사물(物)의 성(性)에는 편전(偏全)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며, 주희의 이기심성 정설에 수정을 가해 본연의 성을 이분하는 "성 삼층설"을 주장했다. 이러한 한원진의 주장은 인물성동이 논쟁, 이른바 호락논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원진은 충청도 지역에 기반을 둔 호론(湖論)의 영수로 활동하며,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옹호하고 낙론(洛論)에 대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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