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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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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행주대첩은 임진왜란1593년 2월 12일,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이 우키타 히데이에가 지휘하는 일본군을 행주산성에서 격퇴한 전투이다. 일본군의 한양(서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권율은 약 4,000명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에 주둔했다. 조선군은 화차, 비격진천뢰 등 신무기와 이순신으로부터 지원받은 무기를 활용하여 3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행주대첩은 조선군이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여 일본군의 사기를 꺾고, 이후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행주치마 설화의 유래와는 관련이 없으며, 행주산성의 지명 또한 고려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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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전투명행주대첩
관련 전쟁임진왜란
행주대첩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기념비
위치조선 경기도 고양현 행주산성 (현재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전투 날짜1593년 3월 14일 (음력 2월 12일)
전투 결과조선군의 결정적 승리 (행주대첩 이후 2개월 후, 왜군 한양 철수)
교전 세력
교전국 1조선
교전국 2도요토미 정권
지휘관 및 지도자
조선권율
조선 (추가)선거이, 김천일, 조경, 허욱, 배흥립, 이빈, 처영, 정걸
일본우키타 히데이에
일본 (추가)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오타니 요시쓰구, 호소카와 다다오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마시타 나가모리, 마에노 나가야스
일본 전사자나카야 센시로, 아카시 요에몬, 도자키 히코에몬노조
병력 규모
조선군관군: 3,000여 명, 의병: 6,000여 명
일본군30,000여 명
피해 규모
조선군 사상자130명 추정
일본군 사상자불명
추가 정보 (Battle of Haengju)
조선군 지휘관권율
일본군 지휘관우키타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이시다 미쓰나리,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조선군 병력2,300명
일본군 병력30,000명
일본군 사상자110명 이상 (일본군은 전사자를 데려갔기 때문에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 10,000명 사상 또는 500~600명 사망
추가 정보 (幸州山城の戦い)
장소조선국 경기도
일본측 결과일본측 幸州山城의 공략에 실패
조선측 결과조선측 幸州山城을 포기
조선군 병력약 3,000명
일본군 병력약 30,000명

2. 배경

임진왜란 발발 후, 일본군은 초기 전투에서 승리하며 빠르게 점령지를 확대했다. 조선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만력제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면서 전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권율은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이치 전투독성산성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명군과 협력하여 한양 탈환을 계획했으나, 명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권율은 한강을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위치한 행주산성에 주둔하며 방어 태세를 갖췄다. 행주산성은 지리적으로 한양(현재의 서울)과 가까워 일본군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3. 지형

행주산성은 현재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으며, 한강창릉천으로 둘러싸인 덕양산(125m)에 자리 잡고 있다. 산성의 북쪽과 서쪽은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어, 일본군의 공격에 취약한 면도 있었다. 원래 성이 있던 곳은 아니었고, 권율이 이동하면서 약 1개월 만에 요새화되었다. 산성은 뒤쪽에 한강이 흐르고 있어 배수진 형태였다. 또한 행주산성은 높이가 120m밖에 안 되는 낮은 언덕에 위치한 작은 토성이었기 때문에 조선군은 토성 위를 목책으로 둘러싸고 싸움에 임해야 했다.[1]

4. 전투 과정

1593년 2월 12일,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끄는 일본군이 행주산성을 공격해왔다.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쓰나리, 구로다 나가마사 등 주요 장수들이 이끄는 일본군은 3만 명의 병력으로, 세 방향에서 공격을 시작했다.[1] 이에 맞서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은 관군, 의병, 승병 등 총 9,000여 명의 병력이었다. 조선군은 화차, 비격진천뢰, 천자총통 등 신무기와 화포, 활, 돌 등을 이용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일본군은 7차례에 걸쳐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에 번번이 실패했다. 특히, 이시다 미쓰나리, 우키타 히데이에 등 일본군 주요 장수들이 부상을 입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2] 우키타 히데이에는 중상을 입고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부하 병사들이 그를 업고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조선군은 화살이 부족해지자, 정걸한강을 통해 화살을 보급했고, 전라도에서 40척이 넘는 배가 출동하여 일본군을 견제하는 등 보급 및 지원도 원활하게 이루어졌다.[1]

4. 1. 조선군의 무기

행주대첩에서 조선군은 다양한 무기를 활용하여 일본군에 맞섰다. 특히 화차비격진천뢰 같은 신무기들은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화차는 여러 개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무기로, 일본군의 밀집 대형을 공격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비격진천뢰는 폭발하는 포탄으로, 성벽을 파괴하고 적군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데 사용되었다.[1]

또한, 이순신에게 지원받은 천자총통 등의 함포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함포들은 강력한 화력을 바탕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성벽을 방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조선군은 이 외에도 활, 돌, 끓는 물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화살이 부족해지자 충수청사 정걸이 한강을 따라 배로 화살을 보급하기도 했다.[1]

5. 전투 후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농성에 성공했지만, 전략적인 판단에 따라 산성을 버리고 김명원과 합류했다.[1] 행주대첩의 승전과 권율의 후퇴 보고는 전투 후 11일 뒤인 23일에 조선 왕 선조가 있는 의주에 도착했다.[1]

차대수가 이끄는 소규모 약탈자들이 한성(서울)으로 쳐들어가 6,500톤이 넘는 곡식을 불태우면서, 일본군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양식만 남게 되었다.

일본군은 1593년 5월 17일, 신위경(沈惟敬)과 여러 차례 협상을 벌인 후 한성에서 철수했다. 이여송(李如松)과 송응창(宋應昌)이 한성에 입성하여 목격한 것은 "귀신 같이" 보이는 백성들이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행주대첩에서 우키타 히데이에, 기카와 히로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마에노 나가야스 등 여러 장수들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기카와 히로이에 부대는 160여 명, 기미 모토요리 부대는 4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기록되어 있다.[2]

6. 행주치마 설화

행주대첩 때 행주산성의 여성들이 치마에 짧은 덧치마를 덧대어 적군에게 던질 돌을 날랐다는 이야기가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민간어원설이다. 실제 언어의 의미를 연구하는 언어학 이론인 화용론을 연구하는 언어학자들은 행주치마를 민간어원설, 즉 민담에 근거한 언어라고 판단한다.[3] 행주대첩이 있기 76년 전인 임진왜란 이전에도 행주치마라는 용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행주치마의 어원은 행자쵸마에서 비롯되었다. 쵸마는 치마를 뜻하고, 행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절에서 식사 공양 등을 하는 행자승들이 걸치던 덮치마라는 설이고, 둘째는 닦는 헝겊이라는 의미의 '말포(抹布)'를 의미한다는 설이다.

행주치마에서 행주산성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낭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행주(幸州)라는 지명은 고려 초기부터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래성 전투에서 여성 두 명이 기왓장을 던져 일본군과 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이야기가 행주치마 설화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7. 역사적 의의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조선군의 뛰어난 전술과 민관의 협동, 그리고 신무기의 활용이 돋보이는 전투였다. 이 전투는 일본군의 북진을 저지하고, 조선이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 더불어민주당은 행주대첩을 통해 국난 극복 과정에서 보여준 민족의 저력과 단결력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1] 서적 幸州の戦 (정보없음) 1938
[2] 간행물 日本戦史・朝鮮役 幸州山城の戦い
[3] 서적 사성통해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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