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종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호종헌은 명나라 시대의 인물로, 왜구 토벌에 기여했으나 권력 남용으로 몰락한 인물이다. 그는 진사로 관직에 진출하여 여러 지역의 지현과 순안어사를 거치며 치적을 쌓았고, 특히 왜구 토벌에서 두각을 나타내 절강총독까지 올랐다. 서위의 계략을 활용하고 왕직을 포섭하려 했으나, 왕직의 사살로 왜구 제어에 실패하기도 했다. 이후 엄숭 일파로 몰려 탄핵당하고 투옥되어 자결했다. 사후 융경제와 만력제에 의해 복권되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권모술수와 사치품 뇌물, 균요법으로 백성을 괴롭혔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저서로는 『주해도편』이 있으며, 호금도가 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명나라의 총독 - 손광 (명나라)
손광은 명나라 만력제 치세에 활약한 문신이자 저술가로, 북방 방어에 힘썼으며 40여 종의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 쉬안청시 출신 - 매요신
매요신은 북송 시대의 시인으로, 평담한 시풍과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사회 비판적인 시를 썼으며 《완릉집》을 남기고 《신당서》 편찬과 《손자병법》 주석에 참여하는 등 학문적 업적도 남겼다. - 쉬안청시 출신 - 대혜종고
대혜종고는 남송 시대의 선승이자 임제종 양기파 승려로, 간화선 수행법을 주창하고 묵조선을 비판하며 중국, 한국, 일본 임제종 공안 수행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대혜어록』, 『정법안장』 등의 저서가 있다.
호종헌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호종헌(胡宗憲) |
자 | 여정(汝貞) |
호 | 매림(梅林) |
시호 | 양무(襄懋) (만력연간 추숭) |
생애 | |
출생일 | 정덕(正德) 7년 음력 9월 26일 (양력 1512년 11월 4일) |
출생지 | 남직례(南直隸) 휘주부(徽州府) 적계현(績溪縣) |
사망일 | 가정(嘉靖) 44년 음력 11월 초3일 (양력 1565년 11월 25일) |
사망지 | 북경(北京) |
묘소 | 알려진 정보 없음 |
가족 | |
배우자 | 알려진 정보 없음 |
친척 | 알려진 정보 없음 |
관력 | |
과거 | 가정17년무술과동진사출신(嘉靖十七年戊戌科同進士出身) |
주요 경력 | 산동익도현지현(山東益都縣知縣) 절강여요현지현(浙江餘姚縣知縣) 북직례순안어사(北直隸巡按御史) 호광순안어사(湖廣巡按御史) 절강순안어사(浙江巡按御史)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 병부상서도찰원우도어사(兵部尙書都察院右都御史) |
이두 현령 | 1540년 – 1542년 5월 |
위야오 현령 | 1547년 7월 – 1548년 |
절강 순무 | 1555년 7월 – 1556년 4월 |
남직례, 절강, 푸젠 총독 | 1556년 4월 – 1563년 |
절강 순무 | 1557년 2월 – 1563년 |
병부상서 | 1560년 6월 – 1563년 |
이두 현령 | 알려진 정보 없음 |
위야오 현령 | 알려진 정보 없음 |
절강 순무 | 이천충 |
남직례, 절강, 푸젠 총독 | 왕고 |
병부상서 | 알려진 정보 없음 |
이두 현령 | 알려진 정보 없음 |
위야오 현령 | 알려진 정보 없음 |
절강 순무 | 완어 |
남직례, 절강, 푸젠 총독 | 폐지 |
절강 순무 | 조병연 |
병부상서 | 알려진 정보 없음 |
저서 | |
주요 저서 | 『주해도편(籌海圖編)』(전13권) |
기타 정보 | |
관련 전투 | 가정 왜구 |
2. 생애
호종헌은 가정(嘉靖) 17년(1538)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가정 19년(1540) 산동 익도현(益都縣) 지현(知縣)이 되어 가뭄과 황충(蝗蟲)을 구제하고 도적을 평정하는 등 치적을 쌓았다. 가정 26년(1547)에는 절강(浙江) 여요현(餘姚縣) 지현으로 부임하여 "결기봉공, 지법정사(潔己奉公, 持法正事, 청렴 공정하고 법에 따라 일을 바로잡음)"라는 칭송을 받았다.
가정 28년(1549) 어사(御史)에 제수되어 선부(宣府)와 대동(大同)을 순시했으며, 북직례(北直隸) 순안어사(巡按御史)를 거쳐 가정 30년(1551) 호광(湖廣) 순안어사가 되어 묘족(苗族) 봉기를 평정하였다. 가정 33년(1554) 절강 순안어사(浙江巡按御史)가 되었고, 엄숭의 심복 조문화(趙文華)의 지시로 장경(張經)을 탄핵하여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로 승진했다.
가정 35년(1556) 절강총독(浙江總督)으로 승진하여 왜구 토벌을 본격적으로 지휘했다. 서위(徐渭)를 초빙하여 계략을 짜고, 서해(徐海), 진동(陳東), 마엽(麻葉) 등을 사살하거나 유인하여 처벌하였다. 왕직(汪直)을 초무(招撫)하려 했으나 조정의 반대로 실패하고 왕직은 처형되었다. 가정 39년(1560) 가정제는 왕직 체포 등의 공을 인정하여 호종헌을 태자태보(太子太保) 겸 도찰원좌도어사병부우시랑(都察院左都御史兼兵部右侍郞)에 임명하고 총독(總督)직을 유지하게 하였다. 3개월 후 병부상서겸도찰원우도어사(兵部尙書兼都察院右都御史)로 승진했고, 가정 40년(1561)에는 소보(少保) 관함이 더해지고 관할 지역이 강서(江西)까지 확대되었다.
가정 41년(1562) 엄숭 부자가 실각하면서 호종헌은 엄숭 일파로 몰려 탄핵받았으나, 가정제는 그를 옹호하며 풀어주었다. 가정 43년(1564) 사직하고 귀향했으나, 다음 해 가정 44년(1565) 엄세번(嚴世蕃)이 호종헌에게 보낸 친필 서신이 발견되면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호종헌은 「변무소(辯誣疏)」를 작성하여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옥중에서 '보검은 원통한 옥방에 묻히고, 충혼은 흰구름 속에 뒤얽혔다(寶劍埋寃獄, 忠魂繞白雲)'라는 시를 읊고 자결하였다.[6]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호종헌은 1512년 안후이성(安徽省) 휘주(徽州) 계현(績溪縣) 용천(龍川)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산동(山東) 청주(靑州) 복양(濮陽) 출신으로, 동진(東晋) 시기에 적계(績溪)로 이주하였다.[2] 23세에 성(省) 과거에 합격하여 거인(舉人)이 되었고, 가정(嘉靖) 17년(1538)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다.가정 19년(1540) 산동 익도현(益都縣) 지현(知縣)이 되어 가뭄과 황충(蝗蟲)을 구제하고 도적을 평정하여 치리(治理) 방면의 명성을 얻었다. 사람들은 그가 가뭄 때 비를 내리게 하고, 농작물을 파괴하는 메뚜기를 잡아먹도록 까치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자리를 잃은 광부들 중에서 천 명의 자원병을 모집하여 산둥의 순무 증선의 지휘하에 북방 국경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가정 26년(1547) 절강(浙江) 여요현(餘姚縣) 지현이 되어서는 "결기봉공, 지법정사(潔己奉公, 持法正事, 청렴 공정하고 법에 따라 일을 바로잡음)"라고 칭송받았다.[6] 그곳에서 자신의 봉급으로 산을 매입하여 도시 북쪽의 셩구이산(勝歸山)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불법 채석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그의 활기찬 통치는 백성들의 호응을 얻었고, 저장의 순무인 주완의 칭찬을 받은 몇 안 되는 지방 관리 중 한 명이 되었다. 1548년 그의 초상이 그의 명예를 기려 셩구이산의 절벽에 새겨지기도 했다.
1542년 5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복상(服喪)에 들어가 3년 동안의 유교 의례에 따른 상을 치렀다. 2년 후 그의 아버지도 돌아가시자 호종헌은 고향 마을에서 3년을 더 머물렀다.
2. 2. 왜구 토벌과 정치적 성장
1549년(가정 28년) 어사(御史)로 발탁되어 선부(宣府)와 대동(大同)을 순시하고, 북직례(北直隸) 순안어사(巡按御史)를 역임했다. 1551년(가정 30년) 호광(湖廣) 순안어사가 되어 묘족(苗族) 봉기를 평정하였다. 1554년(가정 33년) 절강순안어사(浙江巡按御史)가 되었고, 엄숭(嚴嵩)의 심복 조문화(趙文華)의 지시로 장경(張經)을 탄핵하고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로 승진했다.[6]1556년(가정 35년) 절강총독(浙江總督)으로 승진하여 본격적으로 왜구 토벌을 지휘했다. 서위(徐渭)를 초빙하여 계략을 짜고, 서해(徐海), 진동(陳東), 마엽(麻葉) 등을 사살하거나 유인하여 처벌했다. 특히 왕직(王直)을 초무(招撫)하려 했으나 조정의 반대로 실패하고, 왕직은 처형되었다.[6] 왕직은 조정에 항복 의사를 밝혔으나, 당시 조정은 강경 진압을 주장하여 왕직을 처형하였다.

2. 3. 권력 남용과 몰락
왕직 체포 등의 공으로 호종헌은 태자태보(太子太保) 겸 도찰원좌도어사병부우시랑(都察院左都御史兼兵部右侍郞)으로 승진했고, 총독(總督)직은 그대로 유지했다. 3개월 후에는 병부상서겸도찰원우도어사(兵部尙書兼都察院右都御史)로 승진했다.[6] 가정(嘉靖) 40년에는 소보(少保) 관함이 더해지고 강서(江西)까지 관할하게 되었다.[6]가정 41년, 엄숭 부자가 실각하면서 호종헌은 엄숭 일파라는 이유로 탄핵받았다. 그러나 가정제(嘉靖帝)는 '호종헌은 엄숭당이 아니다(宗憲非嵩黨)'라고 하며 호종헌을 풀어주었다.[6] 가정 43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6]
가정 44년, 엄세번이 호종헌에게 보낸 친필 서신이 조정에 발견되면서 호종헌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호종헌은 「변무소(辯誣疏)」를 작성하여 변무에 나섰지만 답변을 얻지 못했다.[6] 결국 옥중에서 '보검은 원통한 옥방에 묻히고, 충혼은 흰구름 속에 뒤얽혔다(寶劍埋寃獄, 忠魂繞白雲)'라는 시를 읊고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6]
3. 평가
『명사』 「호종헌전」은 호종헌이 권모술수에 능하고 공명(功名)을 좋아하여 조문화를 통해 엄숭 부자에게 뇌물을 바쳤다고 평가하였다. 호종헌은 아첨과 영합에 능하여 조문화에게는 잘 보이려 하고, 엄숭 부자에게는 아첨하였다. 명나라 관리들의 녹봉은 적었는데, 호종헌은 균요법(均徭法)을 시행하여 정해진 세금 외에 추가적인 세금을 거두어 백성들을 곤궁에 빠뜨렸으며, 관청 재산을 횡령하고 부유한 상인들의 재물을 빼앗기도 했다.[1]
3. 1. 긍정적 평가
호종헌은 엄숭의 몰락 이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충의는 여전히 민간에 전해졌다. 융경 6년(1572), 명목종 융경제는 호종헌의 복권을 추진했다.[1] 만력제는 호종헌의 항왜(抗倭)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관직을 완전히 복구하고, '양무(襄懋)'라는 시호를 내렸다.[1]3. 2. 부정적 평가
『명사』 「호종헌전」은 호종헌이 권모술수에 능하고 명예욕이 강했으며, 조문화를 통해 엄숭 부자와 결탁하여 매년 금, 은, 비단, 노비, 진귀한 물건 등 셀 수 없이 많은 뇌물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1] 호종헌은 조문화에게는 잘 보이려 애썼고, 엄숭 부자에게는 아첨하였다. 당시 명나라 관리들의 녹봉은 적었는데, 호종헌은 균요법(均徭法)을 시행하여 정해진 세금 외에 추가적인 세금을 거두어 백성들을 곤궁에 빠뜨렸다. 또한 관청의 재산을 횡령하고 부유한 상인들의 재물을 빼앗기도 했다.[1]3. 3. 재평가
융경제와 만력제는 호종헌의 왜구 토벌 공적을 인정하여 복권시키고, '양무(襄懋)'라는 시호를 내렸다.[1] 현대에는 호종헌의 왜구 토벌 공적을 중심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4. 저서
- 주해도편(전13권)
5. 가문
동진(東晋) 시기 적계(績溪)로 이주한 선조 호염(胡炎)의 34대손이다.[7]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 후진타오(胡錦濤)는 호종헌의 직계 후예이자 호염의 48대손이다.[8]
참조
[1]
뉴스
The Man In Jiang's Shadow
https://www.newsweek[...]
2002-05-05
[2]
웹사이트
Kengkou Village
http://www.china.org[...]
[3]
문서
[4]
서적
『명사(明史)』 권205「열전97」
[5]
서적
『명사(明史)』 권205「열전97」, "萬曆初,復官,謚襄懋."
[6]
문서
[7]
서적
文摘周刊:胡锦涛与安徽绩溪
http://ah.anhuinews.[...]
中安在线
2003-07-20
[8]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