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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취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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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취훈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사회사업가로,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소 후에는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에 힘썼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중화민국에 전달하는 활동을 했다. 광복 후에는 친일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독립운동 이력이 밝혀져 석방되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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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취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호취훈
원어 이름胡就勳
접미어목사
제목 모양목사
출생일1894년 5월 29일
타계일1947년 2월 27일 (사망 당시 52세)
출생지조선 평안도 용강군 귀석면 석찬리 449번지
타계 장소소련 군정 북조선 평안남도 용강군 귀석면 석찬리 본가 사저에서 병사
거주지조선 평안도 진남포
조선 평안남도 진남포
조선 평안남도 대동
대한제국 평안남도 대동
대한제국 함경남도 원산
대한제국 한성부
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양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용강
배우자오용준(吳龍俊, 본관은 해주.)
부모아버지 호태합(胡泰合), 어머니 덕수 이씨 부인(德水 李氏 夫人)
학력협성신학교 중퇴
종교개신교(감리회)
자녀슬하 7남 1녀
경력
전직한국독립당 당무위원, 학림학교 설립자
재직온정리교회 설립자, 감리교회 목사
훈장
훈장2009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2. 생애

1919년 3월 6일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온정리(平安南道 龍岡郡 海雲面 溫井里) 장터에서 전개된 대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였다.[1][2]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을 때 이에 앞서 2월 27일 평안남도 진남포 신흥리(平安南道 鎭南浦 新興里) 교회에서의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모임에 참가하였다가(당시: 평안남도 용강군 감리교 청년회장) 3월 1일 하오 2시 홍기황 君이 독립선언서를 읽은 것을 듣고 대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 후, 향리로 돌아와 온정리 장날에 만세 운동을 주도 하였으며, 3월초 시작된 독립운동은 4월 중순까지 진행되다 4월말 일본군의 검거 선풍으로 인하여 지하 운동으로 바뀌었음. 3월 독립 운동때 온정리에 진압 차 출동한 헌병이 100명이고 맞아 죽은 헌병도 2명이었다. 이 사건으로 검거되었으며, 대정 8년 5월 10일 진남포 지청 및 평양 복심 법원이 언도한 판결에 대하여 상고 경성고등법원에서 재판시 검사가 무식함으로 가여이 여기며 ‘잘못했다’고 말하라는 사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잘못이 없다. 우리나라 대한(大韓)이 독립하였다는데 내 어찌 만세를 부르지 않겠는가..."라고 진술하여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 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당시 관련 재판의 기록이 아직도 대한민국 행정자치부 예하 국가기록원에 남아 전하고 있으며(대정 8년(1920년) 형상 제158호 판결서) 1920년 5월, 만기 출감후 깨달음이 있어 짚풀 새끼와 초신을 팔아 온천교회(평안남도 용강군 귀성면 장찬리)를 설립하고, 과수원을 경영해서는 학림학교를 설립하여 후학 양성을 도모하고 민족 정신 및 근대 계몽 정신을 고취하는데 주력하고 본인의 사업 관련 기반을 근거로써 주변의 어려운 가정을 지원하는 사업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후일 1940년 축산 양계(畜産 養鷄) 업종에 눈 떠 닭 5,000수를 키워 일본군 제103전투비행장 건설 시에는 일본군에게 계란을 공급하였는데 일군 병사가 닭을 잡아가자 "일본이 망했다."고 외쳤다는 것이다. 일헌(日憲)이 이를 수상히 여겨 반문한즉 "달걀을 낳는 닭을 먹으니 차라리 망하지 않겠는가"고 답변하였다는 일화가 남아 있으며. 민족대표 33인의 한명인 신석구(申錫九) 목사와 같이 독립 운동 관련 자금을 모집하여 해마다 1회씩 중화민국 국민정부 대륙 본토로 조달하는 작전 사업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선 광복 후 소련 공산당 지배하에 있었던 관계로 일본군에게 군납을 하였다는 이유와 교회 및 학교가 비행장의 군보급창으로 증발 사용되었다는 것과 당시 과수원을(평남 용강 석찬리 449번지) 기점으로 사방 30리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호족 계급)였던 관계로 투옥되었다가 악질 지주가 아닌 사회사업가로서 독립운동의 이력이 밝혀지고 교회 및 학교가 연합군의 폭격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이유로 일본이 강제 증발한 것이 증명되어 석방되었지만 투옥시 심한 고문과 정신적 충격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1947년 2월 27일 사망(병사)하였다.[1][2]

2. 1. 초기 생애와 독립운동 (1894년 ~ 1919년)

호취훈은 1919년 3월 6일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온정리 장터에서 전개된 대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였다.[1][2]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을 때, 이에 앞서 2월 27일 평안남도 진남포 신흥리 교회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 모임에 참가하였다.(당시 평안남도 용강군 감리교 청년회장이었음) 3월 1일 오후 2시 홍기황이 독립선언서를 읽은 것을 듣고 대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 후, 고향으로 돌아와 온정리 장날에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1][2] 3월 초 시작된 독립운동은 4월 중순까지 진행되다 4월 말 일본군의 검거로 인해 지하 운동으로 바뀌었다. 3월 독립 운동 당시 온정리에 진압 차 출동한 헌병은 100명이고, 맞아 죽은 헌병도 2명이었다.[1]

이 사건으로 검거되었으며, 1919년 5월 10일 진남포 지청 및 평양 복심 법원이 언도한 판결에 대하여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하여 재판을 받았다. 검사가 무식함으로 가여이 여기며 ‘잘못했다’고 말하라는 사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잘못이 없다. 우리나라 대한(大韓)이 독립하였다는데 내 어찌 만세를 부르지 않겠는가..."라고 진술하여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1][2] 당시 관련 재판 기록은 대한민국 행정자치부 예하 국가기록원에 남아 전하고 있다.(대정 8년(1920년) 형상 제158호 판결서)[1]

2. 2. 민족 교육 및 계몽 운동 (1920년 ~ 1945년)

호취훈은 1919년 3월 6일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온정리 장터에서 전개된 대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였다.[1][2] 3.1 운동 직전 평안남도 진남포 신흥리 교회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 모임에 참석했다가, 3월 1일 홍기황이 독립선언서를 읽는 것을 듣고 대한 독립 만세 운동에 동참하였다.[1]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온정리 장날에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1][2]

3월 초부터 4월 중순까지 독립운동이 이어졌으나, 4월 말 일본군의 검거로 지하 운동으로 전환되었다.[1] 당시 온정리에 헌병 100명이 진압을 위해 출동했고, 헌병 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 이 사건으로 체포된 호취훈은 재판 과정에서 검사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대한이 독립하였다는데 내 어찌 만세를 부르지 않겠는가..."라고 진술하여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1]

1920년 5월 출감 후, 호취훈은 온천교회(평안남도 용강군 귀성면 장찬리)를 설립하고, 학림학교를 세워 후학 양성과 민족 정신 및 근대 계몽 정신 고취에 힘썼다.[1][2] 과수원 경영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주변의 어려운 가정을 돕는 사업도 전개하였다.[1]

1940년에는 축산 양계 업종에 종사하며 닭 5,000수를 키워 일본군 제103전투비행장 건설 시 일본군에게 계란을 공급하기도 했다. 이때 일본군 병사가 닭을 잡아가자 "일본이 망했다."고 외쳤는데, "달걀을 낳는 닭을 먹으니 차라리 망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 신석구 목사와 함께 독립 운동 자금을 모아 매년 1회씩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전달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1]

1945년 광복 이후, 일본군 군납 이력과 교회 및 학교가 비행장 군보급창으로 사용된 점, 대지주였다는 점 때문에 투옥되었으나, 사회사업가로서의 독립운동 이력이 밝혀지고, 교회 및 학교가 일본에 의해 강제 징발된 것이 증명되어 석방되었다.[1][2] 그러나 투옥 당시 겪은 심한 고문과 정신적 충격의 후유증으로 1947년 2월 27일 사망하였다.[1][2]

2. 3. 해방 이후와 죽음 (1945년 ~ 1947년)

호취훈은 1945년 8.15 광복 이후 소련군정 치하에서 일본군에게 군납을 하였다는 이유와 교회 및 학교가 비행장의 군보급창으로 사용되었다는 점, 그리고 넓은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1][2] 그러나 악질 지주가 아닌 사회사업가로서 독립운동 이력이 밝혀지고, 교회 및 학교가 연합군의 폭격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이유로 일본이 강제 징발한 것이 증명되어 석방되었다.[1][2] 하지만 투옥 당시 겪은 심한 고문과 정신적 충격의 후유증으로 1947년 2월 27일 사망하였다.[1][2]

3. 경력

4. 학력

평안남도 평양 종로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1907년) 평안남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1913년) 경성 연희전문학교 문과 1년 중퇴(1913년), 평안남도 평양신학교 1년 중퇴(1914년), 함경남도 원산 협성신학교 1년 중퇴(1915년) 하였다.

5. 기독교 관련 시설

호취훈은 1909년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당찬리에 감리교회 부설 교육기관인 학림학교를 설립하였다.[3] 학림학교는 6년제였으며, 1935년 당시 교장 김태훈과 교사 3명이 봉직하였고 학생수는 162명이었다.[3] 학림학교는 용강군 내에서 역사가 깊고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성이 높은 사립학교였다.[3]

또한 호취훈은 1933년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온정리에 온정리교회(감리교회)를 설립하고 담임목사를 맡았다.[4] 온정리교회 교인수는 200명이였다.[4]

6. 사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2009년 3월 1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7. 가족 관계

슬하 7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호인수, 차남은 호인순, 3남은 호인평, 4남은 호인영, 5남은 호인구, 6남은 호인백, 7남은 호인만이며, 막내딸은 호인명이다. 형제로는 형 호도훈과 남동생 호모훈이 있다. 친조부는 호경우이다.

참조

[1] 문서 1945년 8월 15일, 평안남도 룡강군 용강에서 광복절 조선 광복 목도 시절에도 그는 이미 와병 5년차(1940년 2월 29일 이후 와병)로 인하여 거동이 편치는 않았던 시절이었다
[2] 서적 용강군지 1988-10-15
[3] 서적 감리교요람
[4] 간행물 용강군지 조선중앙일보 1988-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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