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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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감리교신학대학교는 1887년 배재학당에서 시작된 신학 교육을 기원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신학대학교이다. 1907년 감리교 협성 신학교로 설립되어 남녀 신학 교육을 실시했으며, 1925년 감리교 신학교로 통합, 1959년 감리교신학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93년 현재의 교명으로 변경되었으며, 신학과, 기독교교육학과, 종교철학과 등의 학과와 대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학교는 탁사 기념관, 역사 박물관, 웨슬리 채플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총학생회, 동아리, 합창단, 학보사 등 학생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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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 - [대학]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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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감리교신학대학교 |
영문 이름 |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
표어 | 경건·학문·실천 |
설립 | 1887년 |
종류 | 사립 신학대학 |
총장 | 유경동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독립문로 56 |
종교 | 기독교대한감리회 |
웹사이트 | 감신대 홈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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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887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배재학당에서 신학 교육을 시작했다. 1888년 영아소동으로 중단되었다가 1893년 재개, 1899년 '신학회'로 개칭되었다.
1905년 남북 감리교 연합 신학교 논의가 시작, 1907년 6월 감리교 협성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10년 4월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현 감리교신학대학교 위치)로 이전했다. 비슷한 시기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도 설립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 재학생 7명이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했다.
1925년 4월 '감리교 신학교'로 통합, 1931년 12월 14일 4년제 남녀공학 실시, 1935년 4월 5일 5년제로 개편되었다. 1920년대 후반~30년대 전반 ‘아빙돈 성경 주석'을 번역했다. 1940년 5월 삐라 사건으로 폐교되었다.
1945년 광복 후 재건, 1946년 3월 재개교했다. 1950년 한국 전쟁으로 부산 피난, 1954년 4월 서울로 복귀했다.
1959년 4월 1일 감리교신학대학으로 승격, 홍현설 초대 학장 취임. 1959년 10월 31일 웰치 채플 건립. 1960년 2월 21일 화재 후, 10월 31일 새 본관(현 대학원 건물, 청암기념관) 준공. 1971년 대학원과 신학대학원 정규 인가. 1981년 7월 15일 김용옥 학장 기념 도서관 개관. 1980년대 변선환 교수 이단 시비 사건 발생.
1993년 3월 1일 감리교신학대학교로 교명 변경, 학장은 총장으로 변경. 1999년 백주년 기념관 완공, 2003년 웨슬리 채플 건립. 2004년 학부제 실시, 장천생활관(새 기숙사) 완공. 2017년 10월 10일 김진두 목사 제 14대 총장 선출, 2020년 2월 1일 이후정 교수 제 15대 총장 선출.
2. 1. 신학회 시대 (1887년~1907년)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서 최초로 신학 교육이 이루어졌다. 1887년 9월부터 배재학당 내 한국 학생들에게 신학 교육을 실시했다는 기록이 1888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미 감리회에 보낸 선교 보고서에 나타나 있어, 1887년을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설립연도로 본다.1888년 영아소동으로 배재학당 내 신학 교육은 상당 기간 중단되었다. 이는 수구세력들이 서양인들이 아이들의 눈과 간을 빼내 사진기 렌즈와 약으로 쓴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려 발생한 사건이었다. 고종은 서양인들의 활동을 잠시 중단시켰고, 종교 집회 및 선교사들의 지방 여행도 금지했다.
1893년 신학 교육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신학 교육이 아니라 초기 신학교로서 목회자 육성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1893년 미 감리회 해외 선교회 연례보고서에는 한국 선교 통계에 "신학교 1, 교사 2명, 학생 12명"이라고 보고되었다. 1893년 8월, 미 감리회 한국 선교회 19차 연회에서 아펜젤러를 '배재대학 학장 겸 신학부 부장'으로 임명하여 '본처 전도사 과정'으로 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1893년 겨울 시작된 '신학반'은 1899년 2월 '신학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전까지 영어로 "Theological Department"(신학부), "Theological school"(신학교), "Theological class"(신학반) 등으로 불리며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았던 신학 교육 모임의 명칭이 한국인의 투표로 '신학회'로 결정되었다. 이 모임은 서울 외 다른 지방으로 확산되었고, 한국인 전도인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도록 확대되었다. 신학 교육 장소와 대상이 확대되면서 지원자들이 급속히 늘어 교수진과 교재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교수진 부족 문제는 지방마다 선교를 관장하는 선교사들과 이웃 지방에서 지원받은 선교사들로 해결했고, 교재 부족 문제는 1900년 12월부터 <신학월보>로 해결하였다.
2. 1. 1. 배재학당에서의 신학 교육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배재학당이 설립되었다. 배재학당 설립 당시 고종 황제는 마태 복음서 20장 26-28절을 인용,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欲爲大者當爲人役]."는 당훈을 지어주었다. 이 배재학당에서 최초의 신학 교육이 이루어졌다. 1888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미 감리회에 보낸 선교 보고서에 1887년 9월부터 배재학당 내 한국 학생들에게 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1887년을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설립연도로 본다.2. 1. 2. 영아소동과 그 이후의 신학 교육 (신학반, 신학회)
1888년에 일어난 '영아소동'으로 배재학당 내 신학 교육이 상당 기간 중단되었다. 이는 수구세력들이 서양인들이 아이들의 눈과 간을 빼내 사진기 렌즈와 약으로 쓴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려 발생한 사건이었다. 고종은 서양인들의 활동을 잠시 중단시켰고, 종교집회 및 선교사들의 지방 여행도 금지되었다.1893년에 이르러 신학교육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신학교육이 아니라 초기 신학교로서 목회자를 육성하는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1893년 미 감리회 해외 선교회 연례보고서에는 한국 선교 통계에 "신학교 1, 교사 2명, 학생 12명"이라고 보고되었다. 스크랜턴은 1893년 5월 6일자 편지에서 1888년에 중단되었던 신학 교육이 1893년에야 비로소 규칙적으로 실시되었다고 하였다. 아펜젤러가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후, 1893년 8월에 열린 미 감리회 한국 선교회 19차 연회에서는 아펜젤러를 '배재대학 학장 겸 신학부 부장'으로 임명하여 '본처 전도사 과정'으로 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1893년 겨울에 시작된 '신학반'은 1899년 2월 '신학회'로 개칭되었다. 이때까지 영어로 "Theological Department"(신학부), "Theological school"(신학교), "Theological class"(신학반) 등으로 불리며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던 신학 교육 모임의 명칭이 '신학회'로 한국인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 모임은 서울 외 다른 지방으로 확산되었고, 한국인 전도인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도록 확대되었다. 신학교육의 장소와 대상이 확대되자 지원자들이 급속히 늘어났고 교수진과 교재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교수진 부족 문제는 지방마다 선교를 관장하는 선교사들과 이웃 지방에서 지원 받은 선교사들로 해결했고, 교재 부족 문제는 1900년 12월부터 <신학월보>로 해결하였다.
2. 2. 감리교 협성 신학교 시대 (1907년~1923년)
1905년부터 남북 감리교 연합 신학교 설립 논의가 두 감리교회 안에서 제기되었고, 1907년 6월 연합으로 신학교를 설립하여 그 이름을 감리교 협성 신학교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남북 연합 신학 운동이 실시되었고, 그 결실은 1930년 '기독교 조선 감리회' 결성으로 나타났다.1907년 개교한 감리교 협성 신학교는 남성 교육 기관이었다. 여성에 대한 신학교육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미 감리회의 선교사 스크랜턴 대부인의 보고에 의하면 여성의 신학교육은 1890년 무렵부터 개인 교습 형태로 진행되었다. 한국인 전도 부인들을 모아 성서와 기도법 등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1900년에는 정식 <여자 성경 학원>으로, 다시 1911년 <부인 성경 학원>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서 전도부인이란 남녀가 구분되었던 한국의 당시 상황 속에서 여성 전도에 어려움을 겪던 남성 선교사들을 대신하여 기초적인 신학교육을 받고 전도하던 부인들을 일컫는다.
남 감리회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여자 성서 학교를 운영하였다. 1921년에 이르러서는 북감리교회와 남감리회의 성서학원이 통합됨으로써 한국 최초의 여자 신학교인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2. 2. 1. 감리교 협성 신학교 (남성 신학 교육)
1905년부터 남북 감리교 연합 신학교 설립 논의가 두 감리교회 안에서 제기되었고, 마침내 1907년 6월 연합으로 신학교를 설립하여 그 이름을 감리교 협성 신학교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남북 연합 신학 운동이 실시되었고, 그 결실은 1930년 '기독교 조선 감리회' 결성으로 나타났다.1910년 4월, 미국 남북 감리교회 한국 선교부는 현 감리교신학대학교가 위치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에 부지를 구입하고 건물을 지어 1907년 설립된 감리교 협성 신학교를 이전시켰다.
2. 2. 2.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 (여성 교육)
1907년 개교한 감리교 협성 신학교는 남성 교육 기관이었다. 여성에 대한 신학교육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미 감리회의 선교사 스크랜턴 대부인의 보고에 의하면 여성의 신학교육은 1890년 무렵부터 개인 교습 형태로 진행되었다. 한국인 전도 부인들을 모아 성서와 기도법 등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1900년에는 정식 <여자 성경 학원>으로, 다시 1911년 <부인 성경 학원>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서 전도부인이란 남녀가 구분되었던 한국의 당시 상황 속에서 여성 전도에 어려움을 겪던 남성 선교사들을 대신하여 기초적인 신학교육을 받고 전도하던 부인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대우가 좋지 못했지만, 사회에 진출한 여성이라는 긍정적인 정체성 때문에 열심히 전도하여 감리교회를 양적으로 발전시켰다.남 감리회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여자 성서 학교를 운영하였다. 1921년에 이르러서는 북감리교회와 남감리회의 성서학원이 통합됨으로써 한국 최초의 여자 신학교인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 부지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3가 8번지에 마련하였다.
2. 2. 3. 3.1 운동과 감리교신학교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 때 감리교신학교 재학생 중 7명이 "민족 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박희도,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신석구, 신홍식, 정춘수이다.2. 3. 감리교 신학교 시대 (1931년~1945년)
1920년대부터 남북 감리교는 협동으로 운영하는 남녀 신학교를 하나로 통합하자는 논의를 시작했다. 2년간의 실험 교육을 거쳐, 1925년 4월 두 학교는 '감리교 신학교'로 통합되었다. 이는 한국 최초의 남녀 통합 고등 교육 기관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여성에 대한 불평등 구조가 만연했던 시대에 여성과 남성이 함께 복음을 배우는 신학 교육의 장이 열린 것이다. 1931년 12월 14일부터는 전문학교령에 따라 4년제 남녀공학을 실시하였다. 교장은 빌링스(B. W. Billings)가, 부교장은 구 협성여자 신학교 교장이었던 체틴(A. B. Chattin)이 맡았다. 1935년 4월 5일에는 대학령에 따라 5년제(예과 2년, 본과 3년)로 학제가 개편되었다.2. 3. 1. 아빙돈 주석 번역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전반 한국 기독교에 신학적인 갈등이 찾아왔는데, 이는 감리교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아빙돈 성경 주석' 때문이었다. ‘아빙돈 주석’은 미국과 유럽의 유수한 성서 신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것으로, 당시 세계적으로 통용되었던 성서비평학을 통해 성서를 주석하였다. 아빙돈 주석서는 성서비평학을 활용하여 일반 독자들에게 성서 주석의 현대성을 밝혀주어 미국 기독교계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감리교회가 주축이 되어 ‘아빙돈 주석서’를 번역했다는 것은 당시 감리교회가 진보적인 신학 노선을 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빙돈 성경 주석’은 감리교의 류형기가 번역과 편집 책임을 맡고 출판했으며, 번역에는 감리교의 양주삼, 정경옥, 김창준, 전영택, 변홍규, 장로교의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 김관식, 김재준, 조회령, 윤인구 등 53명이 참여했다.2. 3. 2. 삐라 사건과 폐교
1940년 5월 어느 날 감리교 신학교 교정에 “일본인 학교에 조선 사람 보내지 말라.”, “일본인 상품을 보이콧하라.”, “창씨개명하지 말라.”,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 등의 내용이 적힌 삐라가 발견되었다. 이는 일제가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해 꾸민 자작극이었다. 그로 인해 몇몇 학생들이 조사를 받고 변홍규 교장과 정일형 교수가 구속되었다. 결국 그 해 10월 당시 감독이었던 친일파 정춘수가 무기한 휴교(사실상 폐교령)를 선언하여 학교가 폐교되었다.2. 4. 광복 후 감리교 신학교 시대 (1945년~1959년)
1945년 광복 이후, 감리교회는 재건 과정을 겪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통합되었던 기독교 교단 문제는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남북 대회"에서 논의되었으나, 감리교 교역자들은 조선교단의 불법성을 주장하며 퇴장했다. 이들은 재건위원회를 조직하고, 1945년 12월 17일 조선 감리회 유지 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국적인 연락망을 구축했다. 1946년 1월 14일 동대문 교회에서 연합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중도파와 선교사들의 중립적인 자세로 인해 연기되어 4월 6일에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감리교 신학교 재건이 결의되었고, 변홍규 목사가 교장으로 추대되었다. 1946년 3월, 감리교 신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다. 4월 5일에는 감리교 신학교 강당에서 기독교 조선 감리회 중부 및 동부 연회가 연합으로 개최되어 1939년 감리교회의 정통성을 잇고 있음을 선언하였다.어렵게 재개교한 감리교 신학교는 1948년 45명, 1949년 40명, 1950년 38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으로 피난해야 했다. 1951년 민가를 구입하고 판잣집을 지어 임시 교사로 사용했다. 부산 피난 시절에는 1951년 43명, 1952년 6명, 1953년 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데 그쳤다. 1954년 3월 13일 부산에서 마지막 졸업식을 갖고, 4월에 서울로 복귀했다. 환도 이후에는 매년 30~5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정상화되었다.
학교 재건 후 변홍규 박사가 다시 교장에 취임했다. 그는 미국 드류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33년부터 감신 교수로 재직했으며, 1939년 빌링스에 이어 감신의 6대 교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1941년 김인영 목사가 잠시 교장을 맡았다가, 해방 후 다시 변홍규 목사가 교장직을 수행했다. 1948년부터 1951년까지는 유형기 목사가, 1952년부터 25년간은 홍현설 목사가 교장직을 맡았다.
2. 5. 감리교신학대학 시대 (1959년~1993년)
1959년 감리교신학교는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교장이었던 홍현설은 같은 해 3월 18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3부 연합 연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제일 먼저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고 싶은 기쁜 소식은 과거 수십 년 간 우리의 숙제였던 대학 승격 문제가 드디어 해결되어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금년 4월 1일부터 정규 대학의 인가를 받아 학생을 모집할 것입니다."
1959년 4월 1일 이후 학교의 공식적인 명칭은 감리교신학대학이 되고 홍현설 교장이 제 1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59년 10월 31일에는 미국 웰치 감독의 헌금으로, 웰치 감독의 이름을 딴 웰치 채플이 건립되었다.
4.19 혁명이 있기 두 달 전인 1960년 2월 21일 뜻하지 않은 화재로 도서 및 학적부가 거의 전소되었다. 같은 해 5월 10일 새 본관 공사에 착수하였고, 10월 31일 새 본관(현 대학원 건물로 쓰이는 청암기념관)이 3층 규모로 준공되었다. 1969년 선교 대학원이 교단의 위촉으로 개설되었고, 1971년 봄에는 대학원과 신학대학원이 문교부로부터 정규 대학원의 인가를 얻어 개원하였다. 이어 부설 연구소를 두었는데, 기독교 교육연구소(소장: 은준관 교수)와 한국교회 선교 문제 연구소(소장: 홍현설 교수) 등이 있었다.
1977년 홍현설 학장이 정년 은퇴하고, 1977년 6월 윤성범 교수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윤성범 교수부터 학장을 4년 임기제로 하였다.
1980년 2월 11일 윤성범 학장에 이어 김용옥 교수가 제 3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김용옥 학장은 재임 기간인 1980년 3월 15일 교육부로부터 공동 박사 과정 설립 인가를 받았고, 9월 30일에는 1981학년도 입학정원 증원 및 기독교교육과 설치인가를 받았다. 11월 24일에는 신학대학원(Th. M. 과정, M.Div. 과정) 설립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새로 도서관을 신축할 것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으나, 이듬해 김용옥 학장은 도서관 완공을 보지 못하고 간염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1981년 2월 14일 박봉배 박사가 제 4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81년 7월 15일 도서관이 준공, 개관되었는데, 도서관 건립을 추진하다가 병사한 김용옥 학장의 이름을 따 "김용옥 학장 기념관"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1982년 6월 29일에는 종합관이 준공되었고, 충정로 3가 구 협성여자신학교에서 종합관 지하로 기숙사를 옮겼다. 10월 5일에는 종교철학과 설치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리한 종합대학화 계획과 학장 종신제 추진 등의 이유로 1982년, 1985년 두 번의 학내 사태가 일어났다. 두 번에 걸친 사태 후 박봉배 학장이 학장직을 사임하고 퇴진하였으며, 1987년에는 이사회가 퇴진하기에 이른다. 1985년 박봉배 학장이 사임한 후 송길섭 박사가 제 5대 학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0월 30일에 기독교교육과를 기독교교육학과로 개편하였다.
감리교 신학의 토착화 전통은 변선환 교수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이러한 학문적 전통에 대한 교단의 일부 세력이 반발하고 나섬으로써 교단과 학교 간에 학문적인 갈등이 야기되었다.
1982년 6월 26일 현대사회연구소가 주최한 불교와 기독교와의 대화 모임에서 변선환 교수가 주제 강연을 했는데, 이 강연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이단 시비가 일어났다. 문제가 된 강연 내용은 "무신론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것이었는데, 이 말의 본래 의도는 "우리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배타적 입장을 떠나 무신론자까지도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연 내용이 신문에 발표되자 감리교 부흥단은 변선환 교수가 사도신경과 감리회 교리적 선언을 부인했다는 일종의 규탄 성명서를 발표하고 변선환 교수의 감리교 정회원 자격 정지를 요구하였다. 결국 오경린 감독회장이 변선환 교수로 하여금 해명서와 자신의 신앙 고백서를 발표하도록 하여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이는 진보적 신학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반발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2. 6. 감리교신학대학교 시대 (1993년~현재)
1993년 3월 1일 감리교신학대학교로 교명이 바뀌면서, 학장은 총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구덕관 총장은 취임사(1992년 9월 10일자 학보)에서 학교 발전에 대한 계획을 밝혔으나, 학생들의 큰 불만을 샀다. 변선환 학장 시절인 1990년 3월 12일 이사회에서 충북 음성군 감곡면 원당리에 제2캠퍼스를 개발하기로 한 계획이 알려지면서 학생들의 분노를 샀고, 결국 구덕관 총장 퇴진 운동으로 이어져 1994년 10월 퇴진하였다.구덕관 총장이 퇴진한 후, 이종수 감독이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997년과 1998년 전국대학종합평가와 건물 확보를 위해 백주년 기념관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 각종 집회와 학생들의 담소 공간이었던 아레오바고를 헐고 지상 7층, 지하 3층 규모로 1999년 완공하였다. 완공 이후 교수 연구실과 김용옥 학장 기념관에 있던 도서관 등이 백주년 기념관으로 이동하였다.
이종수 감독은 약 2년의 짧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으며, 1997년 염필형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2000년에는 김득중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2003년 웰치 채플을 헐고 웨슬리 채플을 지었다. 웨슬리 채플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1,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와 현대적인 모습으로 지어졌다. 웰치 채플 건립 시, 웰치 채플의 역사성과 예술적 가치를 들어 학생회와 학교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 학생회는 웰치 채플을 보존하고 운동장 자리에 지을 것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웨슬리 채플이 완공된 후 같은 해부터 장천 김선도 감독의 헌금으로 새 기숙사 건축을 시작하였다. 2004년 학과제를 폐지하고 학부제를 실시하였다. 신입생은 신학부로 편성되어 2학년 때부터 신학, 기독교교육학, 종교철학 세 전공으로 나뉘는 체제로 2004학번부터 적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 수렴 없는 학교 측의 일방적인 실시로 학생회와 학교가 큰 갈등을 빚었다. 학부제 실시로 인해 선후배 간의 친목 도모가 어려워지고 학우들 간 개인주의가 심화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4년 김외식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비아돌로로사가 건립되고, 2005년 주차장이 완공되었다. 새 기숙사가 완공되어 '장천생활관'이라 이름 붙여졌다. 김외식 총장은 감신의 국제화를 내세워 여러 외국 학교들과 자매 결연을 맺고 외국 학생들의 교육 프로그램(International Church Leader Program, 약칭 I.C.L.P. 후에 International Graduate School of Theology, 약칭 I.G.S.T.로 개칭)을 신설하였다.
2008년에는 김홍기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김홍기 총장은 취임사에서 300억을 모금하여 감신의 발전을 도모하겠다고 밝혔다.
2012년에는 박종천 교수(조직신학)가 감신대 13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2016년 13대 총장이었던 박종천 교수의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이사회의 거듭된 파행으로 후임 총장이 선출되지 못하였다. 총장이 선출되지 못하자 교무처장인 이환진 교수가 총장 직무대행을 맡게 되었다.
2017년 10월 10일 개최된 2017년 제 10차 이사회에서 영등포중앙교회 김진두 목사가 제 14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2020년 2월 1일 15대 총장으로 이후정 교수가 선출되었다.
3. 학교 시설
감리교신학대학교에는 다음과 같은 시설들이 있다.
- 탁사 기념관: 1910년에 지어진, 현재 감신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3층 건물로, 본래 기숙사였으나 현재는 교수 연구실로 쓰인다. 2008년 최병헌 목사를 기념하여 명칭이 바뀌었다.
- 역사 박물관: 1910년 당시 선교사 주택으로 지어진 붉은 벽돌 2층 건물이다. 학보사와 방송국 건물로 사용되다가 2007년 리모델링 후 현재 역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청암 기념관 (대학원): 초대 학장 홍현설 목사의 호를 따서 지어졌다. 1959년 화재로 소실된 캠블 기념관 자리에 1960년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본관으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대학원 수업만 진행된다.
- 김용옥 학장 기념관 (학생회관): 1980년 김용옥 학장의 감신 발전 계획에 따라 지어졌다. 건립 과정 중 사망한 김용옥 학장을 기리기 위해 이름이 붙여졌다. 1999년 백주년 기념관 건립 이후 학생회실, 카페, 동아리실 등이 들어섰다.
- 신석구기념관 (구 종합관): 1982년 건립되었다. 충정로에 있던 기숙사 및 대지를 매매하여 지어졌다. 당시 학장 박봉배의 감신 자립 의지가 반영되었다. 학부와 평생교육원 강의가 주로 이루어진다.
- 백주년 기념관: 1999년 감리교 교단의 지원금으로 완공되었다. 대학 본부, 도서관, 교수 연구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 웨슬리 채플: 2003년 웰치 채플을 헐고 새로 지은 채플이다. 1,5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현대식 시설과 6억원 상당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다.
- 장천생활관 (기숙사): 2005년 완공된 기숙사 건물이다.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의 헌금으로 건립되었으며, 30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 외에도 웰치 채플, 동아리실 건물, 아레오바고, 대학 본부, 대학원 기숙사 등은 현재 사라진 시설이다.
3. 1. 탁사 기념관
1910년 당시 기숙사로 지어진, 현재 감신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붉은 벽돌의 3층 건물로, 현재 교수들 중 절반 가량이 연구실로 사용하고 있다. 본래 명칭은 "교수회관"이었으나 2008년 본교 졸업생이자 한국 최초의 신학자인 탁사 최병헌 목사를 기념하는 뜻에서 "탁사 기념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탁사 기념관으로 명칭이 바뀌기 전까지는 관회수교로도 불렸는데, 이는 교수회관의 현판이 한글 우횡서로 쓰여 있던 데서 비롯된 별칭이었다.3. 2. 역사 박물관
이 건물은 탁사 기념관과 더불어 감신에서 오래된 건물로 손꼽힌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로, 1910년 당시에는 선교사의 주택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상당 기간 동안 학보사와 방송국 건물로 사용되었다. 2007년 내부 리모델링을 거쳐 감신대 역사 박물관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3. 3. 청암 기념관 (대학원)
청암 기념관은 초대 학장인 홍현설 목사의 호를 따 지어진 건물이다. 이 자리에는 본래 1910년 당시 캠블 부인의 지원으로 지어진 캠블 기념관이 있었다. 1959년 화재로 캠블 기념관이 전소되자, 1960년 청암 기념관을 지었다. 처음 건립될 당시 본관으로서 학부 및 대학원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종합관이 지어진 후로는 대학원 수업만 이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미적으로 아름다워 학교 홍보 사진에 많이 활용되는 건물이기도 하다.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락에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루어진 기도실이 있다.3. 4. 김용옥 학장 기념관 (학생회관)
이 건물은 청암 기념관 옆에 있다. 1980년 학장으로 취임한 김용옥 학장에 의해 수립된 감신 발전 계획에 따라 지어졌다. 이 건물 건립 과정에서 갑자기 병사한 김용옥 학장의 이름을 따 이름이 지어졌다. 본래 도서관 및 교수 연구실 등으로 활용되었으나 1999년 백주년 기념관의 건립으로 현재 학생회실과 카페, 동아리실이 있다.3. 5. 신석구기념관 (구 종합관)
1982년 건립되었다. 충정로에 있던 기숙사(구 감리교협성여자신학교 건물) 및 대지를 매매하여 지었다. 당시 학장 박봉배의 의지에 따라 감신 자립을 위해 지어졌다. 지상 3층, 지하 2층으로 구성되어 3층은 강의실과 열람실이 밀집해 있고, 지하 2층은 기숙사가 위치해 있었다. 장천생활관 건립 후에는 기숙사 대신 교수 연구실, 동아리방, 기관실 등이 위치해 있다. 2008년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으며, 옥상에 정원이 조성되었다. 종합관에서는 주로 학부와 평생교육원 강의가 이루어진다.3. 6. 백주년 기념관
1999년 감리교 교단의 지원금을 받아 완공되었다. 지하 3층, 지상 7층 건물로, 1997년 대학 종합 평가에 대비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지하 1~3층은 강의실 및 부속 시설, 지상 1, 2층은 대학 본부, 지상 3~5층은 도서관, 지상 6~7층은 교수 연구실로 사용되고 있다.3. 7. 웨슬리 채플
2003년 웰치 채플을 헐고 새로 건립한 채플이다. 1,500명 가량을 수용할 수 있으며, 현대식 시설과 6억원 가량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다. 감리교 산하 신학교 중 제일 규모가 큰 채플로 손꼽힌다. 건립 과정 중 웰치 채플의 역사성과 미적 가치 등으로 인해 학교 측과 학생 측 간의 갈등이 있었다. 지상 1, 2층, 지층으로 구성되어, 1, 2층은 채플로, 지층은 강의실 및 세미나실로 활용되고 있다. 채플실은 휴일에 한해 예식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3. 8. 장천생활관 (기숙사)
2005년 완공된 기숙사 건물이다. 광림교회 장천 김선도 목사의 헌금으로 건립되었으며, 김선도 목사의 호를 따 이름을 장천생활관이라 하였다. 300명의 학생을 수용하고 있으며, 식당, 체육 시설, 기도실 등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다. 현재 감신대 건물 중에서 가장 최신식 건물이다.3. 9. 사라진 시설
사라진 시설로는 웰치 채플, 동아리실 건물, 아레오바고, 대학 본부, 대학원 기숙사 등이 있다.4. 학생 활동
감리교신학대학교는 학부에 총학생회, 총여학생회, 신학과 학생회, 기독교교육학과 학생회, 종교철학과 학생회, 동아리 연합회가 활동하고 있다. 기독교교육학과가 설치되기 이전까지 신학과 학생회가 곧 총학생회와 다름 없었으며, 1980년 기독교교육학과 설치 이후 총학생회가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과거 학생회는 4.19 혁명과 유신, 제5공화국 시절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학내 사태와 교단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최근에는 이러한 활동은 뜸해지고, 교내 행사 중심으로 학생회가 활동하고 있다. 총학생회는 4월의 해오름제와 10월 대동제를 주관한다. 각 학과 학생회는 각자의 고유 행사를 가지고 활동한다. 5월에는 동아리 연합회 주관으로 누리제가 열리고 있다.
동아리는 공식적으로 학교에 등록된 수가 20여 개이다. 사회, 선교, 문화 세 분과로 나뉘어 있으며, 신학교의 특성에 따른 동아리들이 대부분이다. 이외에도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는 동아리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동아리는 아니지만 학교에 소속된 기관으로 합창단, 학보사, 방송국이 있다. 합창단은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역사와 궤를 거의 같이 할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가졌으며, 매년 가을에 정기연주회를 열고, 방학 때는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한다. 학보사는 매 학기 수차례 학보를 간행하고 있다. 방송국은 학기 중 정기 방송을 진행하며 매년 방송제를 개최한다.
5. 개설 학과
감리교신학대학교에는 학부 과정과 대학원 과정이 있다.
5. 1. 대학
4개의 학과가 있다.5. 2. 대학원
3개의 대학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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