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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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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이광수는 한국 근대 소설의 선구자로, 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세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으며, 일본 유학 후 오산학교 교사, 교장을 거쳐 작가로 활동했다. 3·1 운동 당시 2·8 독립선언의 기초에 참여하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으나, 귀국 후 친일 행위로 비판받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고,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1950년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민족 계몽과 근대화에 기여했으나, 친일 행적으로 인해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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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광수
이광수
한국어 이름이광수
한자 표기李光洙
로마자 표기I Gwangsu
다른 이름이보경, 춘원
출생일1892년 2월 1일
출생지조선 평안도 정주군
사망일1950년 10월 25일
사망지북한 자강도 만포
직업작가
언어한국어, 일본어
모교와세다 대학
자녀5명
한국어 이름 정보
한글이광수
한자李光洙
로마자 표기I Gwangsu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I Kwangsu
아명 (한글)이보경
아명 (한자)李寶鏡
아명 로마자 표기I Bogyeong
아명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I Pokyŏng
호 (한글)춘원
호 (한자)春園
호 로마자 표기Chunwon
호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Ch'unwŏn
학자 정보
이광수
출생일1892년 3월 5일
출생지평안북도 정주군
사망일1950년 10월 25일
사망지북한
다른 이름이춘원
주요 관심 분야조선문학, 동양철학
모교메이지가쿠인 보통학부 졸업, 와세다 대학 중퇴
한국 인물 정보
이름 (로마자 표기)Lee Kwang-su
한글 이름이광수
한자 이름李光洙
히라가나り こうしゅ
가타카나イ・グァンス
기타 정보
전주 이씨 인구2,609,890명
작가 정보
이광수
이광수
출생일1892년 3월 4일
출생지조선 평안도 정주군 갈산면 신리 940번지 익성동
사망일1950년 10월 25일
사망지북한 자강도 강계군 만포면 고개동
직업언론인, 작가, 소설가, 시인, 번역가, 문필가
필명춘원생, 경서학인, Y생, 장백, 장백산인
보경
춘원, 장백산인, 고주
장르소설, 시문학, 수필, 희곡
종교천도교
활동 기간1914년 ~ 1950년
배우자허영숙(재혼), 백혜순(이혼)
자녀3남 2녀 (장남 리진근, 차남 리봉근, 삼남 리영근, 장녀 리정란, 차녀 리정화)
형제리애경(여동생), 리애란(여동생)
친척리건규(조부), 허명재(처질녀), 백두진(처질서)

2. 생애

1892년 3월 4일[2]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으나,[3] 1902년 부모가 콜레라로 사망하여 고아가 되었다.[3] 동학의 도움으로 교육받을 기회를 얻었고,[3] 1905년 일진회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 메이지가쿠인 등에서 수학했다.[3]

1910년 귀국하여 오산학교 교사 및 교장으로 재직했고,[3] 1915년 다시 일본으로 가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했다.[3] 1917년 매일신보에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로 평가받는 《무정》을 연재하며 문단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7] 1919년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서 기초에 참여한 뒤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기관지 《독립신문》 편집장으로 활동했다.[3][10]

1921년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활동하며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는 등 계몽주의민족주의 노선을 걸었으나,[10] 점차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 친일 노선으로 전향했다.[10] 창씨개명(향산광랑, 香山光郎)을 하고 조선문인협회 회장을 맡는 등[6] 일제 말기 황국신민화 정책과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10]

1930년대의 이광수


광복 후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병보석 후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10]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7월 12일 납북되어, 그해 10월 25일 만포에서 결핵 악화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6][10] 2009년 대한민국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했다.[10]

연도주요 활동
1892년평안북도 정주 출생.
1902년부모 사망, 고아가 됨.
1905년일본 유학 시작.
1910년메이지가쿠인 졸업, 오산학교 교사 부임. 첫 결혼.
1915년와세다 대학 입학.
1917년무정》 연재 시작.
1919년2·8 독립선언서 기초, 상하이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1921년귀국, 허영숙과 재혼.
1922년「민족개조론」 발표.
1923년동아일보 입사.
1933년조선일보 부사장 역임.
1937년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 이후 친일 전향.
1940년향산광랑으로 창씨개명, 조선예술상 수상.
1949년반민족행위처벌법 위반 혐의로 수감 (병보석 후 불기소).
1950년한국 전쟁 중 납북, 10월 25일 사망 추정.
2009년친일반민족행위자 지정.


2. 1. 출생과 가계

이광수는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신리 940번지 익성동에서 태어났다.[3] 아버지는 전주 이씨 안원대군의 후손인 이종원(李鍾元)이었고, 어머니는 충주 김씨(忠州金氏)였다. 4남 2녀 중 넷째 아들이었으나, 위로 형 세 명이 모두 요절하여 사실상 외아들로 자랐다. 아버지 이종원은 당시 42세였고, 두 번 사별한 뒤 재혼한 상태였으며, 어머니 충주 김씨는 그의 세 번째 부인이었다.

그의 가계는 조선 태조의 고조부인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 진(珍)의 22대손이다. 안원대군은 조선 건국 후에 추증된 이름이다. 그의 직계 조상 중 21대조 사마 시(施), 20대조 희무(希武), 19대조 춘흥(春興) 등은 1872년(고종 9년)에야 왕족의 예우로 으로 추증된 인물들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평범하게 살았고, 6대조부터는 아들이 하나뿐인 독자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이건규(建圭)는 증조부의 학행과 효행 덕분에 음서통덕랑 벼슬을 받았으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시와 글씨, 술을 즐기다가 기생을 첩으로 들여 주막을 차렸다. 아버지 이종원은 초시에는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에 계속 낙방하며 술로 세월을 보냈다.

어릴 적 이름은 보경(寶鏡)이었다. 아버지가 그가 태어나기 전 꿈에서 늙은 승려거울을 주고 가는 것을 보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아호는 춘원(春園)이며, 그 외에 고주(孤舟), 외배, 올보리라는 별호도 사용했다.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워 이광수가 어릴 때 정주군 내에서만 아홉 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위로 형 셋이 일찍 죽었고, 이광수 역시 어릴 때 심한 기침과 발작을 앓아 일찍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다행히 고비를 넘겼다. 5, 6세까지도 잔병치레가 잦아 부모의 간호가 필요했고 의원이 자주 드나들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5세에 한글천자문을 깨쳤고, 8세에는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16]사략》, 《대학》, 《중용》, 《맹자》, 《고문진보》 등을 읽고 한시와 부(賦)를 지었으며,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신동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5세 때는 외할머니에게 《덜걱전》, 《소대성전》, 《장풍운전》 같은 고전 소설을 읽어줄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좋은 학교에 갈 형편은 되지 못했다. 어머니가 뽕나무 잎을 훔쳐 누에를 키웠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집안은 가난했다.[17] 말수가 적고 병약했던 그는 주로 혼자 생각하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같은 마을 출신의 시인 백석(본명 백기행)과 근처 곽산 출신의 김소월 등이 그의 몇 안 되는 친구였다.

19세 무렵의 이광수


열 살 무렵에는 담배 장사를 하기도 했으며, 평생 고아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18] 또한 어머니가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이라는 점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11세가 되던 해인 1902년 8월, 부모님이 전염병콜레라로 모두 사망하면서 고아가 되었다.[3] 이후 그의 성장 과정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누이동생 둘과 함께 외가와 재당숙 할아버지 집을 오가며 자랐다. 그에게는 이복형제들도 있었으나 부모 사후 연락이 끊겼고, 친 여동생 애경은 만주로 시집가 살다가 1936년 사망했으며, 다른 여동생 애란은 민며느리로 들어갔다가 결혼 이듬해 사망했다. 태조 이성계의 방계 후손이었지만 왕족으로서의 자각이나 혜택은 없었고, 오히려 성리학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고아가 된 후 재종조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집을 나와 경성부 근처에서 육체노동과 상점 점원 등으로 일하며 떠돌았다. 어려서 얻은 폐렴결핵은 치료 시기를 놓쳐 평생 그를 괴롭혔다. 가난과 주변의 멸시, 무심한 어른들의 막말과 욕설은 어린 그에게 깊은 상처와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힘든 시기를 보내던 중, 우연히 만난 어느 천도교인의 도움과 위로에 깊이 감명받아 천도교 입교를 결심하게 된다.

1903년 천도교에 입교한 그는 박찬명 대령의 집에 머물면서 도쿄한성부에서 오는 문서를 베껴 쓰고 배포하는 일을 했다.[16] 재능을 인정받아 천도교의 서기 일을 맡기도 했다.[19] 이 무렵 경성부에서 열린 이승훈, 안창호, 유길준의 강연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그들의 연설과 어록을 구해 읽으며 자신의 사표로 삼았다.

1904년 일본 관헌의 천도교 탄압을 피해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인천)를 거쳐 상경했다. 1905년에는 천도교와 관련된 일진회(一進會)의 지원을 받아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3] 타이세이 중학교(大城中學)에 입학했으나 학비 마련이 어려워 그해 11월 중퇴하고 귀국했다. 경성부에서 상점 점원 등으로 일하며 학비를 모은 뒤, 1906년 2월 다시 일본으로 가 3월에 복학했다.[3] 1907년에는 메이지가쿠인(明治学院)으로 학교를 옮겼다.[3]

2. 2. 청소년기

그에게는 여러 이복형제가 있었고, 친형 세 명은 요절했으며 여동생 두 명(애경, 애란)이 있었다. 부모 사후 이복형제들과는 연락이 끊겼고, 여동생 애경은 만주로 가 살다 1936년 사망했으며, 애란은 민며느리로 들어갔다가 결혼 이듬해 사망했다.

5세에 천자문을 깨우치고 소학, 명심보감까지 읽었으며, 외할머니에게 《덜걱전》, 《소대성전》, 《장풍운전》 같은 고전 소설을 읽어줄 정도로 명석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8세경 동네 글방에서 《사략》, 《대학》, 《중용》, 《맹자》, 《고문진보》 등을 배우며 한시와 부(賦)를 지었다.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신동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집안은 매우 가난하여 어머니가 뽕나무 잎을 훔쳐 누에를 키웠다는 이야기도 있다.[17] 가난한 환경과 더불어 말수가 적고 병약했던 그는 주로 혼자 사색하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같은 마을 출신의 시인 백석 (본명 백기행)이나 근처 곽산면 출신 김소월 등이 그의 몇 안 되는 친구였다.

열 살에 담배 장사를 시작했으며, 평생 고아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한다.[18] 또한 어머니가 삼취부인이라는 점 때문에 주변의 무시와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가세가 기울어 담배 장사를 하던 중, 11세 되던 해인 1902년 8월, 부모가 전염병 콜레라로 모두 사망하면서 고아가 되었다.[3] 이후 그의 성장 과정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누이동생 둘과 함께 외가와 재당숙 할아버지 집을 오가며 자랐다. 그의 집안은 태조 이성계의 방계 후손이었지만, 스스로 왕족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고 직계 후손이 아니라 예우도 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성리학에 대해 비판적인 의식을 갖게 되었다.

고아가 된 후 재종조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동생들을 두고 집을 나와 경성부 근처에서 육체노동과 상점 점원 등으로 일했다. 어려서 앓은 폐렴과 결핵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 평생 병약하게 지냈다. 가난의 설움을 깊이 느꼈고, 어린 고아에 대한 주변의 멸시와 무시, 어른들의 막말과 욕설은 그에게 깊은 상처와 좌절을 안겨주었다. 힘든 시기를 보내던 중, 그를 딱하게 여긴 어느 천도교인의 위로와 호의에 깊이 감명받아 천도교 입교를 결심하게 된다.

1903년 천도교에 입교한 이광수는 박찬명 대령의 집에 기숙하며 도쿄한성부에서 오는 문서를 베껴 쓰고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16][3] 재능을 인정받아 천도교의 서기 일도 보게 되었다.[19] 이 무렵 경성부에서 열린 이승훈, 안창호, 유길준의 강연을 듣고 크게 감화되어 그들의 연설과 어록을 구해 읽으며 탐독했고, 훗날 이들을 자신의 사표이자 민족의 사표로 꼽기도 했다.

1904년 일본 관헌이 천도교(동학)을 탄압하자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인천)를 거쳐 상경했다. 1905년 천도교와 관련된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3] 바로 타이세이 중학교(大城中學)에 입학하였으나 학비 조달이 어려워 이해 11월에 중퇴하고 귀국하였다.[3] 몸이 병약하여 고된 일을 하기 힘들었던 그는 경성부의 상점 점원 등으로 일하면서 학비를 모았다. 1906년 2월 학비를 장만한 뒤 다시 일본으로 가 그해 3월 타이세이 중학교에 복학하였다.

김성수와 송진우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에 있는 개신교 목사의 집에서 하숙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일본인 목사가 매일 새벽과 저녁에 '하나님, 대일본제국을 위해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과 정의, 도덕의 존재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또한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제국주의 현실 앞에서 정의란 존재하는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었고,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1906년 3월 타이세이 중학교(大成)에 복학하여 유학 생활을 하였고, 홍명희·최남선 등을 만나 사귀었다.[16] 같은 해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메이지 학원 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했다.[3] 이때 일본에서 만난 홍명희와 친하게 지내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톨스토이를 소개받았다고 한다.[20] 이어 일본 유학 중 프리드리히 니체무신론과 불가지론, 에른스트 헤켈의 적자생존론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 등을 접하고 두루 섭렵하였다.

1907년 메이지 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3] 이때 미국에서 귀국하던 안창호도쿄에 들러 행한 애국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받고 독립, 계몽 운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였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복음주의 신학을 고집하여 세운 메이지 학원의 분위기에 처음에는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으나, 적응해감에 따라 청교도 생활을 흠모하게 되고 서양선교사들의 성서공부 시간에 익힌 기독교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기도 하였다. 1907년 12월 황성신문에 정육론 (情育論)을 발표하였고, 1908년에는 국내에 최남선이 설립한 신문관(新文館)에 참여하여 작품과 시집을 발표하였으며, 그해 해리엇 비처 스토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번역한 《검둥의 설움》을 신문관을 통해 간행하였다.

소년지 제1호 (1907년)


또한 홍명희, 문일평, 안재홍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1908년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1908년 11월 1일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 소설, 문학론, 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소년지와 소년회는 1911년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될 때까지 그는 유학생활 틈틈이 작품과 논설을 발표하곤 했다. 1909년에는 '방랑'이라는 소설을 썼다. 1909년 11월 7일에는 소설 〈노예 (奴隷)〉를 발표하였다.

일본 유학 중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존경했다. 후쿠자와는 일찍이 김옥균박영효와 같은 우리나라 개화파의 스승이었고, 이광수는 “하늘이 일본을 축복하셔서 이러한 위인을 내려셨다”고 부러워했다.[21] 이광수는 후쿠자와를 가리켜 "하늘이 일본을 축복해 내린 위인"이라며 스스로 ‘한국의 후쿠자와’를 꿈꿨다.[22] 의병장 신돌석이 조선인의 밀고로 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민중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탐욕을 부린 것이라 판단, 교육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된다.

2. 3. 일본 유학 시절

1905년 8월, 일진회의 지원을 받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3] 그는 가난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10살 때 콜레라로 부모를 잃고 동학 지도자 박찬명(朴贊明)에게 의탁하여 교육받을 기회를 얻었다.[3] 김성수와 송진우의 주선으로 도쿄의 한 개신교 목사 집에서 하숙하게 되었다. 이광수는 이때 일본인 목사가 매일 '하나님, 대일본 제국을 위해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정의, 도덕의 존재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게 되었다고 한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제국주의 현실을 하나님이 외면하는 듯한 모습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후 기독교를 믿지 않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1906년 3월 타이세이 중학교(大成中学校)에 입학했으나,[3] 같은 해 학비 문제로 잠시 귀국해야 했다.[3] 1907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메이지 학원(明治学院) 중학부 3학년으로 편입했다.[3] 이 시기 홍명희, 최남선, 문일평 등과 교류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16] 특히 홍명희와 가깝게 지내며 그로부터 톨스토이를 소개받는 등 영향을 받았다.[20] 유학 중 프리드리히 니체무신론과 불가지론, 에른스트 헤켈의 적자생존론, 찰스 다윈의 진화론 등 다양한 서구 사상을 접하고 탐독했다.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하던 안창호도쿄에서 한 애국 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받아 독립운동과 계몽 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했다. 처음에는 복음주의 신학을 강조하는 메이지 학원의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으나, 점차 적응하면서 청교도적 생활을 흠모하고 기독교적 생활을 실천하기로 마음먹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앞서 언급된 종교적 회의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1907년 12월 황성신문에 '정육론(情育論)'을 발표하며 논객으로서의 활동도 시작했다.

1908년에는 국내 최남선이 설립한 신문관(新文館)에 참여하여 작품과 시집을 발표했으며,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한국어로 번역한 『검둥의 설움』을 신문관을 통해 간행하였다. 또한 홍명희, 문일평, 안재홍 등과 함께 1908년 재일본 조선인 유학생 모임인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11월 1일부터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며 시, 소설, 문학론, 논설 등을 활발히 발표했다. 소년회는 1911년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될 때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나혜석. 이광수와 교제했던 인물 중 한 명이다.


1909년에는 소설 '방랑'과 11월 7일 소설 〈노예(奴隷)〉를 발표했다. 같은 해 말, 메이지 학원 재학 중에 일본어로 쓴 단편 소설 愛か?|아이카?일본어를 학교 학보인 『시로가네 가쿠호』(白金學報)에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3] 이 작품은 한국 초기 퀴어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도 언급된다. 11월 18일에는 일본어 소설 '사랑인가'를, 11월 24일에는 소설 '호(虎)'를 발표했다. 그의 일본어 시 '사랑의 노래'가 일본 잡지 '부의 일본'에 게재되면서 유학생들 사이에서 문명(文名)을 얻었다. 이 시기 알렉산드르 푸시킨, 막심 고리키, 레프 톨스토이 등 러시아 작가와 시마자키 도시손, 도쿠토미 겐지로, 기노시타 나오에, 나쓰메 소세키 등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특히 톨스토이의 영향은 깊어 "조선의 톨스토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일본 유학 중 이광수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깊이 존경하여 "하늘이 일본을 축복하셔서 이러한 위인을 내려셨다"고 표현하며 스스로 ‘한국의 후쿠자와’가 되기를 꿈꿨다.[21][22] 이는 당시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준 후쿠자와의 사상이 이광수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한편, 의병장 신돌석이 조선인의 밀고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민중의 무지를 개탄하며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기도 했다.

1910년 3월 23일부터 24일까지 이보경(李寶境) 또는 고주(孤舟)라는 필명으로 여행기 '여행의 잡감(旅行의 雜感)'을 발표하였다.[23] 이 글에서 일본과 조선의 현실을 비교하며 조선 소년들에게 "일어나라, 우리 소년 제군!"이라고 각성을 촉구했다.[23] 이 여행기는 1910년 4월 1일 도쿄에서 발간된 유학생 모임 신한소년회의 회람지 '신한자유종' 3호에 실렸다.[23] 같은 해 '나(余)의 자각한 인생'을 발표하여 국가와 개인의 운명을 동일시하며 여러 사상적 편력 끝에 애국주의에 도달했음을 밝혔다.[24] 또한 《소년》에 신체시 '우리 영웅'을, 《대한흥학보》 제11호에 평론 '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했다.

1910년 3월, 메이지 학원 5학년을 졸업한 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다.[16]

2. 4. 교육·문학·언론 활동

1909년 메이지 학원 재학 중 일본어 단편 소설 〈사랑인가〉를 학교 학보 《시로가네 가쿠호》에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3] 같은 해 11월에는 〈호 虎〉를 발표했고, 12월에는 〈정육론 情育論〉을 써서 한국의 《황성신문》에 발표했다. 그의 일본어 시 '사랑의 노래'가 일본 잡지에 실리면서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졌다. 이 시기 그는 톨스토이 등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으며, 이는 그의 문학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0년 3월, 메이지 학원 5학년 졸업 직후 할아버지의 위독 소식에 귀국했다.[16] 귀국길 경부선 열차 안에서 쓴 여행기 '여행의 잡감'(旅行의 雜感)을 이보경(李寶境) 또는 고주(孤舟)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는데,[23] 이 글에서 그는 일본과 비교하며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일어나라, 우리 소년 제군!"이라며 청년들의 분발을 촉구했다.[23] 같은 해 《소년》지에 신체시 〈우리 영웅〉을, 《대한흥학보》 제11호에 평론 〈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나(余)의 자각한 인생'이라는 글에서는 여러 사상을 거쳐 최종적으로 애국주의에 도달했음을 고백했다.[24]

1910년 3월, 일본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남강 이승훈의 권유로 평안북도 정주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했다.[16] 이곳에서 훗날 시인이 되는 김소월 등을 가르쳤으며, 유영모, 조만식 등과 함께 교편을 잡았다. 그는 오산학교의 교가를 직접 작사하기도 했다.[25]

오산학교 교가 (일부)
네 손이 솔갑고 힘도 크구나
불길도 만지고 돌도 주물러
새로운 누리를 짓고 말련다
네가 참 다섯메의 아이로구나.[25]



교사 활동 중 순 한글체 단편소설 〈무정〉을 《대한흥학보》에 발표했는데, 이 작품이 큰 호응을 얻으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특히 그가 내세운 자유 연애 사상은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았으나, 보수적인 유림층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26] 같은 해 박은식, 주시경, 안창호 등이 참여한 계몽단체 광문회에도 회원으로 활동했다.[27]

1910년 7월, 중매로 백혜순과 결혼했으나 애정 없는 결혼 생활에 실망하며 자유 연애와 함께 이혼의 자유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혼이 개인의 행복 추구를 위한 선택이며, 무의미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강연과 칼럼을 통해 역설했다. 한일 합방 직후 망명길에 오른 신채호가 정주에 들렀을 때 만나기도 했다.[28] 합방에 좌절하여 교사직을 그만두려 했으나, 인재 양성이 중요하다는 이승훈의 만류로 학교에 남았다.

오산학교의 설립자이자 교장 이승훈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이승훈이 구속되자 학감(교감)이 되어 임시 교장 로버트 목사와 함께 학교 운영의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불탄 교사를 재건하는 데 힘썼다. 최남선이 주관하던 잡지 《소년》에 단편을 발표하며 문필 활동을 본격화했다. 1912년에는 나라 잃은 슬픔과 개인적 번민으로 건강이 악화되기도 했다. 오산학교에서 국어문학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고, 톨스토이, 찰스 다윈, 토머스 헉슬리, 헤겔, 니체 등의 사상을 소개했다. 특히 진화론, 변증법, 유물론, 무신론 등을 가르친 것이 기독교계의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이승훈의 비호로 해임은 면했다.

1913년 미국 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원제: Uncle Tom's Cabin)을 《검둥이의 설움》이라는 제목으로 한글로 번역하여 신문관에서 출간했고, 시 〈말 듣거라〉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진화론과 니체, 헤겔 등의 사상을 가르친 것에 대한 기독교계 학부모들의 항의와 임시 교장 로버트 목사와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결국 그해 11월 오산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오산학교를 떠난 후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만주와 상하이 등지를 방랑했다.[29] 상하이에서는 홍명희, 문일평, 조소앙 등과 교류하다 1914년 6월 귀국하여 8월에 다시 오산학교에 잠시 복직했다. 같은 해 10월부터는 최남선이 창간한 잡지 《청춘》의 주요 필진으로 참여하여 소설과 평론 등을 활발히 발표했으나, 《청춘》은 1918년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었다.

1915년 9월, 김성수의 후원으로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했다.[3] 1916년에는 한국 근대 문예 이론의 효시로 평가받는 평론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1917년에는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진학했으며,[3] 같은 해 《매일신보》에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로 평가받는 《무정》을 연재하기 시작했다.[7] 《무정》은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그를 당대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렸으나, 새로운 사상과 자유 연애 등을 다룬 내용으로 인해 유교적 가치관을 중시하는 보수 유림층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18년 폐병으로 투병하던 중 자신을 간호하던 신여성 허영숙과 사랑에 빠져 베이징으로 함께 떠났다.[3] 같은 해 11월 귀국하여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으며, 12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3] 1919년 1월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단에 가입하여 2·8 독립 선언의 선언서를 기초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3][4] 이 선언은 국내 3·1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5][4] 선언 발표 직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921년 3월 귀국하여 잠시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고, 이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면담하기도 했다. 1923년 5월부터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3]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며 문학 작품 발표와 언론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그는 여전히 민족의 앞날을 고민하는 계몽주의적, 민족주의적 논조의 글을 발표했으나, 점차 현실 타협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후 《조선일보》로 옮겨 부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2. 5. 귀국과 망명

1915년 김성수의 후원으로 다시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했다.[3] 1915년 11월 10일에는 신익희, 김양수, 장덕수, 최두선 등과 함께 조선학회를 조직했다.

일본 유학 중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여성 허영숙과 연애하게 되었다. 동시에 미술학교 유학생이던 나혜석과도 연애 관계였으나,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의 반대로 나혜석과의 결혼은 무산되었다. 나경석은 이광수가 이미 고향에 부인 백혜순이 있는 유부남인 데다 허영숙과도 교제 중이라는 사실 때문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광수는 이전부터 애정 없는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끼며 결혼과 이혼의 자유를 주장해왔다. 그는 개인의 행복 추구를 위해 애정 없는 결혼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1916년에는 평론 〈문학이란 하오〉를 발표했으며, 1917년 1월 1일부터 매일신보에 장편 소설 《무정》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 같은 해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진학했다.[3]

그러나 1918년 격심한 과로 등으로 인해 폐병(결핵)이 악화되어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3] 이 시기 간호를 맡았던 허영숙과 더욱 깊은 관계로 발전했고, 결국 그해 10월 본부인 백혜순을 두고 허영숙과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애정 도피를 떠났다.[3]

1918년 11월 중순 한국으로 잠시 돌아온 그는 천도교 지도자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논의하기도 했다.[3] 이후 12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3] 1919년 1월,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단에 가입하여 2·8 독립선언의 선언서 초안을 작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3][4] 이 선언은 이후 3·1 운동의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5][4] 선언 발표 직전, 이광수는 고베를 통해 일본을 탈출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는 프랑스 조계에 머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편집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2. 6. 독립 운동과 사회계몽 활동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작가이다. 그는 초기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이후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며 계몽주의 활동에 힘썼고, 말년에는 친일 행적으로 돌아섰다.

1919년 3·1 운동 직전, 도쿄 유학생들과 함께 2·8 독립선언의 기초 작성에 참여했으며,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독립신문 편집장을 지냈다.[10] 이는 그의 초기 민족주의적 면모를 보여주는 활동이었다.

그러나 1921년 조선으로 귀국한 후 그의 노선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에서 활동하며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유교 사상과 관습을 비판하는 계몽주의적인 글을 발표했다. 특히 동아일보에 실은 "민족적 경륜"과 1922년 발표한 『민족개조론』에서는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지적하며 민족의 실력 양성을 통한 개량을 주장했다.[10] 그는 조선이 대일본제국에 병합된 원인을 조선 민족 스스로의 부족함에서 찾기도 했다.[10] 이러한 민족개량주의는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일각에서는 그의 주장이 민족의 열등성을 전제로 하고 대일본제국의 통치와 타협하는 논리이며 친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14]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후, 이광수는 식민 당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친일 노선으로 완전히 전환했다.[10] 그는 창씨개명을 적극 권장하고 자신도 '향산광랑'(香山光郎)으로 개명했으며, 일본어로 작품 활동을 하고 조선예술상을 수상했다.[10]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조선인들에게 전쟁 협력을 호소하는 등[10] 전시체제에 적극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광수의 사상과 행적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김무관은 이광수가 조선 민족의 역량 강화를 위해 근대화된 대일본제국의 뜻을 받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친일 노선으로 전환했다고 분석한다.[13] 반면, 그의 민족 개량주의 자체가 대일본제국의 지배를 용인하는 논리를 내포했다는 비판도 있다.[14] 한편, 이영훈 등은 이광수가 민족이라는 개념을 대중에게 알리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15] 광복회 회장을 지낸 김우전 역시 젊은 시절 이광수의 작품을 통해 민족주의와 근대적 자아에 눈떴다고 회고한 바 있다.[15]

2. 6. 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

어린 시절 고아가 된 후 동학 지도자 박찬명에게 거두어져 교육받았다.[3] 1910년 메이지가쿠인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교사 및 교장으로 재직하며 경술국치를 겪었다.[3]

1918년 11월 귀국 후,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독립운동을 주장했다.[3] 그해 12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19년 1월 조선청년독립단에 가입하여 2·8 독립선언의 선언서를 기초했다.[3][4] 이 선언은 공개적으로 발표되어 한국 전역에서 3·1 운동 시위가 일어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5][4]

선언 발표 직전 고베를 통해 일본을 떠나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3] 일본에서는 동지들이 체포되었고, 이광수는 결석재판에서 9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3] 상하이에서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정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편집장이 되어 활동했다.[3]

1921년 3월 조선으로 돌아왔다. 1919년 선고받은 죄로 국경에서 잠시 체포되었지만 얼마 후 석방되었다. 얼마 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만났다.[3] 11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다시 체포되었지만 곧 석방되었다.[3] 1923년 5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3]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초기에는 독립운동에 충실한 인물로 여겨졌으나, 점차 식민 통치 당국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그의 행보에 대한 의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3]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년 후 병으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은 그가 독립운동 노선을 버리고 친일로 전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2. 6. 2. 불운한 개인사

1902년, 열 살의 나이에 부모가 모두 콜레라로 사망하면서 고아가 되었다.[3]

1910년 본부인 백혜순과 결혼하였으나[3], 이후 일본 유학 중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허영숙과 만나 연애하였다. 이 시기 미술학교 유학생이던 나혜석과도 동시에 교제하며 결혼을 희망했지만,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는 이광수가 이미 고향에 본부인 백혜순을 둔 유부남이었고, 다른 여성인 허영숙과도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7년 와세다 대학교 철학과 재학 중 결핵을 앓기 시작했고, 과로로 인해 폐질환까지 심해졌다.[3] 1918년에는 폐병이 더욱 악화되었으며, 그해 10월 본부인을 남겨두고 자신을 간호해 준 허영숙과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도피하였다.[3]

말년에도 건강 문제는 계속되었다.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에게 납치되어 만포로 이송되었고, 1950년 10월 25일 그곳에서 결핵 악화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6]

2. 6. 3. 귀국과 방황



1919년 2·8 독립 선언의 기초 작성에 참여한 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편집장으로 활동했다.[3][10]

그러나 독립운동의 현실과 임시정부 내부의 상황 등을 겪으며 점차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1921년 3월, 이광수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의해 국경에서 잠시 체포되었으나, 1919년 2·8 독립 선언 관련 혐의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받고 곧 석방되었다.[3][10] 석방 직후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만난 사실이 알려지면서[3] 그의 갑작스러운 귀국과 석방 배경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고, 일부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변절했다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다시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나기도 했다.[3]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광수는 민족의 현실에 대한 새로운 진단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22년 조선어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조선 민족의 실력 양성을 통한 점진적인 개량을 주장했다.[10] 이는 당시 민족주의 진영 내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23년 5월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3] 이후 편집국장까지 역임하며[10] 활발한 문필 활동을 재개했다. 초기에는 그의 글이 여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면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노선은 점차 식민 통치 현실과의 타협으로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친일 논란이 커져갔다.

2. 6. 4. 언론, 사회 활동

1914년 초 상하이로 건너가 신규식의 추천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기로 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을 듣고 미국행을 단념하고 귀국했다. 1917년에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특파원 자격으로 한반도 남부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을 다녔다.

1919년 도쿄 유학생들과 함께 2·8 독립선언의 기초 작성에 참여한 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편집장을 맡았다. 1921년 조선으로 귀국한 후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22년 잡지 개벽에 「민족개량론」을 발표하여 민족의 실력 양성을 주장했다. 이는 민족개량주의라 불리며, 조선 민족의 역량 강화를 위해 교육과 산업 발전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 주장이 조선 민족의 열등성을 전제로 하고 대일본제국의 통치와 타협하는 논리이며, 친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14]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언론 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동아일보에 「재생」(1924년), 「마의태자」(1926년), 「단종애사」(1928년), 「이순신」(1931년), 「」(1932년) 등 다수의 소설을 연재하며 활발한 집필 활동을 이어갔다. 1926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취임했다. 1933년 동아일보를 떠나 조선일보로 이직하여 부사장을 지냈으며, 조선일보에 소설 「유정」을 연재했다. 1934년 조선일보를 사직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6개월간 투옥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은 1941년 최종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이광수는 친일 노선으로 기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40년에는 '향산광랑'(香山光郎)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조선 문인들에게 수여된 조선예술상을 수상하는 등 일제에 협력하는 행보를 보였다.[10] 1942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했으며, 1945년 6월에는 친일 인사 박춘금이 결성한 대의당(大義黨)에도 참여했다.[10]

해방 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친일 행위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이후 병보석으로 풀려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법정에서는 자신의 친일 행위가 조국과 민족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진다.[10]

2. 6. 5. 동성애 허용론 논란

2. 6. 6. 계몽 운동과 문필 활동

1909년 말, 메이지 가쿠인 재학 중 일본어로 쓴 단편 소설 「愛か?」(아이카?)를 학교 학보 『시로가네 가쿠호』에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3] 이 시기 알렉산드르 푸슈킨, 막심 고리키, 레프 톨스토이 등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으며, 특히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조선의 톨스토이"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시마자키 도시손, 도쿠토미 겐지로, 기노시타 나오에, 나쓰메 소세키 등 일본 작가들의 작품도 폭넓게 읽었다.

1916년 11월에는 『매일신보』에 한국 최초의 근대 문예 이론서로 평가받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발표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 소설로 꼽히는 『무정』은 한국 근대화 과정의 복잡한 시대상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7]

이광수는 작품과 강연 등을 통해 계몽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그는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유교적 인습과 봉건적 도덕 관념을 비판하고, 개인의 자유와 해방, 특히 여성 해방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근대주의적 가치관을 역설했다.

1920년대 초부터는 본격적인 민족 운동에 뛰어들었다.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 등의 논설을 발표하며 민족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자 했으며, 1922년에는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실력 양성론에 기반한 민족 개량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이 글에서 당시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민족의 자각과 실력 향상을 촉구했다. 또한 수필 「국민정신의 개조에 대하여」에서는 패배주의를 비판하고 도덕적 쇄신을 주장했다.[6]

그의 사상적 편력은 문단 내 관계에서도 나타나, 동료 작가 김명순과 친분을 맺었다가 자신의 근대주의에 대한 관점이 변했다는 이유로 관계를 끊기도 했다.[8] 한편, 1909년 발표한 초기작 「愛か」는 내용상 동성애적 코드를 담고 있어, 한국 초기 퀴어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이광수의 이러한 계몽 운동과 문필 활동은 당대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영훈은 이광수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개념을 일깨우고 보급한 대표적 지식인이었으며,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민족의 재생 가능성을 믿고 문명인으로 거듭날 것을 촉구했다고 평가한다.[15] 광복회 회장을 지낸 김우전 역시 젊은 시절 이광수의 소설을 읽고 민족주의 의식과 근대적 자아에 눈떴다고 회고한 바 있다.[15] 이처럼 그의 작품은 식민지 시기 청년들에게 근대적 사상을 전파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다만 그의 민족개조론은 민족의 '열등성'을 전제하고 실력 양성을 통해 일본 제국과 타협하려는 논리로 이어져, 이후 친일 행적으로 나아가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4]

2. 6. 7. 수양동우회 사건 전후

1937년 흥사단 계열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6개월 후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재판은 계속되었다.[10] 1939년 1심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검찰이 항소하였고, 1940년 2심에서는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광수 측이 상고하여 1941년 최종심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10]

그러나 이광수는 수감과 재판 과정을 거치면서 식민지 당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두 번째 전향을 하고 대일 협력 노선으로 돌아섰다.[10] 1940년에는 '향산광랑'(香山光郎)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극 권장했으며, 일본어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10] 같은 해 3월에는 일본어 소설 『무명(無明)』으로 조선예술상(朝鮮藝術賞)을 수상하기도 했다.[10]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조선인들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호소하는 등[10] 전시체제에 협력하는 행보를 보였다. 1945년 6월 24일에는 당시 조선인 유일의 중의원 의원이었던 박춘금(朴春琴)이 경성부민관에서 결성한 친일단체 "대의당(大義黨)"에도 참여하였다.[10]

2. 6. 8. 재판과 좌절, 전향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두 번째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10] 그는 6개월간 투옥 생활을 하다가 병으로 보석 석방되었다.[10] 이 사건의 재판은 길게 이어졌는데, 1939년 1심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검찰이 당일 항소했고, 1940년 2심에서는 유죄 판결을 받아 피고 측이 상고했으며, 최종적으로 1941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10]

그러나 이광수는 수감 생활과 재판 과정에서 식민지 당국의 압력에 굴복하여[10] 병보석 상태에서 친일 노선으로 전환했다. 이는 그의 두 번째 전향으로 평가된다.[10] 전향 이후 그는 적극적인 친일 활동에 나섰다. 창씨개명 정책을 적극 권장하며 자신도 향산광랑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10] 또한, 일본어로 창작 활동을 시작하여 1940년 3월에는 일본어 소설 《무명》으로 조선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10]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조선인 청년들에게 학도병 지원 등 전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글을 여러 차례 발표했다.[10] 1942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했으며,[10] 1945년 6월 24일 박춘금이 경성부민관에서 결성한 친일단체 ‘대의당’에도 참여했다.[10]

2. 7. 변절과 친일 행적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년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난 것을 계기로 친일 노선으로 기울었다. 1939년에는 친일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고, 한국의 황민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창씨개명 정책이 시행되자 스스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郎|가야마 미쓰로일본어)'라는 일본식 이름을 만들어 사용했으며, 다른 이들에게도 창씨개명을 권유했다.

또한, 일본어로 창작 활동을 하여 1940년 3월에는 『무명(無明)』으로 조선예술상을 수상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강연과 기고 등을 통해 조선인 청년들에게 징병과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며 일제침략 전쟁에 적극 참여하도록 호소했다.[10] 1945년 6월에는 박춘금이 조직한 친일 단체 대의당 결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광복 후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친일 행위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조선인민군에게 체포되어 북한으로 납북되었으며, 그해 10월 25일 만포에서 결핵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6]

2. 8. 총독부 정책에 협력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6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이광수는 식민지 당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대일본제국에 협력하는 노선으로 전향했다.[10] 이는 이전의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난 두 번째 전향으로 평가된다.

그는 창씨개명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자신도 '향산광랑'(香山光郎)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였고,[10] 일본어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 1940년 3월에는 소설 『무명(無明)』으로 조선예술상(朝鮮藝術賞)을 수상하기도 했다.[10]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에는 조선인 청년들에게 일본 제국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글을 발표하며[10]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인력 동원에 협력하였다. 1945년 6월 24일에는 친일파 박춘금이 경성부민관에서 결성한 어용 정치 단체 “대의당(大義黨)”에도 참여하였다.[10]

광복 이후 이광수는 친일파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으며, '이광수(李狂洙)'[11]와 같은 멸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 시기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법정에서는 “나의 친일은 조국을 위한 것이었다!” 또는 “비록 정도가 아니더라도 邪道였다 하더라도, 내가 걸어온 길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것이며, 그것 또한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항변한 것으로 전해진다.[10] 이후 병보석으로 풀려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광수의 친일 행적에 대해, 일각에서는 조선 민족의 실력 양성을 위해 당시 더 발전했다고 여겨진 일본을 이용하려 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13] 그러나 그의 '민족 개량주의' 자체가 조선 민족의 열등성을 강조하며 일본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 타협하는 논리였으며, 결국 친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는 비판이 보다 설득력을 얻고 있다.[14] 이영훈과 같은 일부 학자는 이광수를 민족주의 의식을 일깨운 지식인이었으나 결국 '친일 민족주의자'가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15] 학도병 출신 김우전 전 광복회 회장이 젊은 시절 이광수의 소설을 읽고 민족 의식에 눈떴다고 회고한 사례[15]도 있지만, 이는 그의 영향력이 양면적이었음을 보여줄 뿐 친일 행위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2009년 대한민국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광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 705인 명단에 포함시켰다.

2. 9. 창씨개명 전후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6개월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후, 이광수는 식민지 당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친일 협력 노선으로 돌아섰다.[10] 그는 창씨개명을 조선인들에게 적극적으로 권장했으며, 스스로도 1940년 '향산광랑(香山光郎|가야마 미쓰로일본어)'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했다.[10]

이 시기부터 일본어로 창작 활동을 시작하여, 1940년 3월에는 일본어 소설 無明|무묘일본어로 조선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10] 한편, 수양동우회 사건 재판은 계속되어 1939년 1심 무죄, 1940년 2심 유죄 판결을 거쳐 1941년 최종심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조선인들에게 일제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호소했으며,[10] 1942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다.[10] 1945년 6월 24일에는 박춘금이 결성한 친일단체 대의당에도 참여하는 등[10] 해방 직전까지 친일 행적을 이어갔다.

2. 10. 창씨개명 이후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두 번째 체포되어 6개월간 수감되었다가 석방(1941년 무죄 확정)된 후, 식민지 당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대일 협력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그는 창씨개명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으며, 자신도 향산광랑(香山光郎|가야마 미쓰로일본어)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10]

창씨개명 이후에도 일본어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1940년에는 『세조대왕(世祖大王)』을 출판하였고, 같은 해 3월에는 일본어로 쓴 소설 『무명(無明)』으로 조선예술상(朝鮮藝術賞)을 수상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조선인들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호소하는 등 친일 행위를 이어갔다.[10] 1940년 수양동우회 사건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1941년 최종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42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大東亜文学者大会)에 참가하였다.

1945년 6월 24일, 조선인 출신 일본 중의원 의원이었던 박춘금(朴春琴)이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결성한 친일단체 "대의당(大義黨)"에도 참여하였다.

2. 11. 일제강점기 후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6개월간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1941년 최종 무죄 확정), 이광수는 식민지 당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친일 노선으로 전환했다. 이는 그의 두 번째 전향으로 평가된다.

그는 창씨개명을 적극적으로 권장했으며, 자신도 '향산광랑(香山光郎)'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1940년에는 일본어로 창작 활동을 시작하여 소설 『무명(無明)』으로 조선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천황제와 황국신민화 정책을 찬양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며 조선인들에게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10] 이러한 활동은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정책에 동조하며 전시 동원을 독려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1945년 6월에는 조선인 유일의 중의원 의원이었던 박춘금이 결성한 친일 단체 "대의당(大義黨)"에도 참여했다.

해방 후, 그의 친일 행적은 큰 비판에 직면했다. '이광수(李狂洙)'[11]라는 멸칭까지 붙으며 작품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기 어려웠다. 이승만 정부 시기인 1949년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법정에서는 태연자약한 태도로 "나의 친일은 조국의 위한 것이었다!"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또한, "비록 정도가 아니더라도 邪道였다 하더라도, 내가 걸어온 길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것이며, 그것 또한 이해해주길 바란다”라고 호소했다고도 한다.[10]

이광수의 친일 행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기무라 간은 이광수가 조선 민족의 실력 양성을 위해 당시 근대화에서 앞서 있던 일본 제국의 힘을 이용하려 했다고 분석한다.[13] 즉, 열강에 맞서기 위해 일본을 이용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반면, 그의 민족개조론 자체가 조선 민족의 열등성을 전제로 일본 제국의 통치에 타협하는 논리였으며, 결국 친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14] 이영훈은 이광수가 민족주의 의식을 일깨운 인물임은 인정하면서도, 그가 제시한 민족 재생의 길이 결국 일본인처럼 되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15] 조관자는 이러한 이광수의 사상적 특징을 "친일 민족주의자"라고 명명했다.[15]

2. 12. 광복 이후

광복 이후 이광수는 친일파라는 비판과 함께 "이광수(李狂洙)"[11] 등의 멸칭까지 붙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이후 병보석으로 풀려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10]

한국 전쟁 중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고, 1950년 10월 25일 중증의 동상과 폐결핵 악화로 인민군 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10] 북한 평양 근교에 세워진 그의 묘비에는 이날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다른 사망설도 존재한다. 1991년 미국에 거주하던 그의 아들이 북한을 방문하여 1950년 10월 25일 동상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사망 20년 후인 1970년에는 노벨 문학상 후보였음이 노벨상 위원회가 공표한 후보자 명단을 통해 확인되었다.[12] 1962년에는 전 부인 허영숙의 노력으로 한국 최초의 개인 전집인 《이광수 전집》 전 20권이 발간되기 시작했다. 2009년 대한민국 정부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 301인 중 한 명으로 공식 지정했다.[10]

2. 12. 1. 해방 정국에서의 활동

8월 15일 광복 후 이광수는 봉선사로 돌아와 다경향실(茶經香室)에 머물렀다.[106] 1921년에 결혼했던 아내 허영숙과는 1946년 5월 21일에 합의 이혼하였다. 서울신문은 이 소식을 전하며 “장차 이광수가 전범으로 걸려들 때를 걱정하여, 자식과 재산의 보호를 위해서 취하는 잇속 빠른 길이 아닌가 보고 있다.”(1946년 6월 13일자)라고 비판적으로 보도했다.[107]

해방 직후에도 일제 강점기에 출간되었던 심훈의 《상록수》와 함께 이광수의 《무정》 등은 재출간되어 여전히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나,[108] 1945년 9월부터 그는 일제 말기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파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의 작품들 역시 남녀 간의 연애를 다루었다는 이유 등으로 유림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서울 시내의 허름한 쪽방을 전전하며 생활하였으며, 동아일보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칼럼과 기사 외에는 송진우와 김성수가 보내주는 생활비에 의존하였다. 이광수를 향해 야유와 함께 돌이나 휴지를 던지는 사람도 있었으며, 그의 가족들 역시 비난과 멸시를 받았다.

어려운 생활 중에도 윤치호의 병문안을 다녔고, 병원에 입원과 통원을 반복하던 나혜석을 찾아 위문하기도 했다. 그 해 12월 윤치호가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1947년 서재필 귀국 직후 기념촬영 사진
(앞줄 왼쪽 두 번째는 춘원 이광수, 세 번째는 딸 뮤리엘, 가운데는 서재필, 뒷줄 가운데는 주요한(뮤리엘 뒷편에 선 남자)


1946년 9월 2일, 이광수는 6촌 동생이자 승려였던 이학수(당시 조선불교 경기교무원장 겸 봉선사 주지)의 도움으로 봉선사로 숨었고, 광동중학교에서 영어, 국어, 작문을 가르치며 다시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현제명이 작곡한 광동중학교 교가의 가사를 짓기도 했다. 1976년 5월 29일에는 봉선사와 광동중학교 입구에 이광수 기념비가 세워졌다.

1947년 1월,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로부터 안창호의 평전 집필을 의뢰받아 같은 해 5월 《도산 안창호》를 기념사업회 이름으로 출간했다. 당시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 여론 때문에 그의 이름을 내세우기 어려웠으며, '춘원'이라는 이름이 책에 명시된 것은 1950년에 간행된 제3판부터였다. 이때부터 다시 글쓰기에 몰두하여 1947년 6월에는 소설 《꿈》을 면학서포에서 간행했고, 같은 해 김구의 자서전인 《백범일지》가 출간될 때 윤문 작업에 참여하였다.[109]

1949년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이후 병보석으로 풀려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10]

2. 12. 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반민특위 구속까지

1948년 1월 이후 한반도 정세가 남북협상론과 단독정부 수립론으로 나뉘었을 때, 이광수는 정부 수립론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 같은 해 6월에는 1946년 10월부터 1947년 2월까지 자신의 생활과 내면세계를 기록한 글에 당시 좌익을 '상쟁(相爭)의 논리'라며 비판하는 《내 나라》 등 3편의 논문을 추가하여 《돌베개》를 출간했다. 또한, 1948년부터 장덕수를 추모하는 전기문 '설산과 나'를 저술하며 장덕수를 “설산은 호 그대로 개방적이요, 결백하고 어린애와 같이 표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광수와 같은 친일 협력자들은 배제되었고, 정부 수립 이후에도 그의 친일 행적은 계속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광수는 1948년 12월,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한 경위와 역사철학적 맥락을 설명하려는 자서전 《나의 고백》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 행위가 '민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하며, 특히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애국자로서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민족 보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고 강변했다. 책의 부록인 〈친일파의 변〉에서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끌려갔던 여성들을 사회적으로 포용한 사례(〈홍제원 목욕〉)를 들며 친일 경력자들에 대한 포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반민특위 수형 시절의 이광수 (1949년 2월 초)


1949년 반민특위 재판 공판 모습


1949년 1월부터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게 된 이광수는[50] 2월 7일 반민특위의 2차 검거 대상에 포함되어 전격 구속되었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차 심문 후 조사관에게 약속한 대로 친일에 대한 고백서를 작성했다. 같은 날 검거된 최남선이 《자열서》를 통해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에 씻기 어려운 대치욕"이라며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 것과 달리, 이광수는 《나의 고백》에서 보인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태평양 전쟁 시기 일제에 협력한 이유에 대해 "일제에 협력하면서 참정권과 평등권을 얻어 민족을 보존하면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98]"고 주장했다. 또한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 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이라거나 "창씨개명 안한 사람, 신사참배 안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우리 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正經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고 변명했다[110][111]. 그는 일제가 작성했다는 '3만 8천 명의 조선 지식인 살생부'와 자신을 맞바꾸려 했다고 항변하기도 했으나[97], 해당 살생부의 존재를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이광수의 셋째 아들 이영근(당시 중앙중학 6학년)은 반민특위 위원장에게 아버지가 폐병 3기와 신장결핵 등으로 건강이 위중함을 호소하며 자신을 대신 수감시켜 달라는 내용의 혈서를 보내기도 했다.[112] 결국 이광수는 1949년 3월 4일 '고혈압증' 등의 건강 악화를 사유로 병보석이 허가되어 출감했다.[112] 석방된 후에는 봉선사로 돌아가 머물며 글쓰기를 계속했다.[106]

2. 13. 납북되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폐렴과 결핵이 악화되어 양주군 진건면에서 요양하였다. 이후 '민족진영강화위원회' 결성준비위원회에 참석했고, 8월 20일 위원으로 선출되어 김규식을 지지하였다.

1950년 1월에는 태양신문에 장편소설 《서울》을 연재했으나, 좌익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문제가 되어 연재를 중단했다. 같은 해 3월 유작 《운명》을 집필했고, 5월에는 《사랑의 동명왕》이 한성도서에서 간행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사흘 전인 6월 22일, 자택에서 고혈압과 폐렴으로 쓰러졌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7월 5일 그의 효자동 자택을 차압했고, 다음 날인 6일 이광수를 내무서로 연행했다. 7월 12일, 이광수는 김규식, 김동원, 안재홍, 방응모, 정인보 등 다른 주요 인사들과 함께 납북되었다.

평양에서 강계로 이송되던 중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고 동상까지 겹쳐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당시 친구였던 홍명희김일성의 허가를 받아 이광수를 강계 인근 자신의 숙소로 옮겼고, 이후 인민군 병원과 강계군 만포면 고개동의 병원으로 다시 옮겨 치료를 시도했다. 그러나 결국 1950년 10월 25일, 폐결핵 악화로 승용차 안에서 향년 59세[113][114]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사후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납북되었고, 그 과정에서 중증의 동상에 걸려 1950년 10월 25일 인민군 병원에서 폐결핵 악화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10][113] 평양 근교에 세워진 묘비에는 이날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다른 설도 존재한다.[10]

그의 시신은 오랜 친구인 홍명희, 안재홍과 평소 그의 작품을 애독하던 김원봉 등에 의해 장례식이 치러졌고, 자강도 강계군 만포면의 야산에 안장되었다. 6․25 전쟁 후 부인 허영숙은 식솔들을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하였다.

해방 후 친일파로 낙인찍혀 “이광수(李狂洙)[11]” 등의 멸칭으로 불리며 작품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 시책에 협력하는 글을 쓴 점, 유교 사상과 관습을 비판하고 여성 해방을 주장한 점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정치적으로 안창호, 김구, 김규식 등을 지지했던 점도 오랫동안 재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작용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체포·투옥되었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10]

1950년대 후반부터 동료 문인들인 박종화, 이희승, 최현배, 최남선 등이 복권을 시도했다. 1957년 11월 23일 사상계사 주최로 '육당, 춘원의 밤'이 개최되었고, 1959년 12월에는 '춘원선집'(광영사)이 발간되었다. 1963년 11월 '이광수전집'(삼중당)이 완간되어 13일에는 흥사단, 삼중당 주최로 '이광수전집 완간기념강연회'가 열렸다. 1970년대에 이르러 이광수의 작품과 활동에 대한 조명과 함께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971년 10월 신선 '이광수 전집'이 간행되었다. 그의 사망 소식도 이 무렵 소련미국 등의 교포를 통해 한국 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1970년에는 노벨 문학상 후보였던 사실이 노벨상 위원회의 후보자 명단 공표를 통해 확인되기도 했다.[12]

북한에서도 1980년대 이후 그에 대한 조명과 평가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의 이름이 붙은 '평양 리광수고등중학교[115]'가 개교하기도 했다. 만포면 야산에 있던 이광수의 묘는 홍명희, 안재홍 등의 사후 관리되지 못하다가, 1980년대 중반 주택 개발 문제로 그의 시신을 찾으라는 북한 당국의 지시가 내려왔다. 인민군 병사들이 주택 지반을 파헤친 끝에 시신을 찾아내 평양 신미리 특설묘지로 이장하였고, 이후 평양특별시 룡성구역 룡궁1동 산기슭의 특설묘역으로 다시 개장되었다. 1991년 그의 셋째 아들 이영근이 북한 측 초청으로 방북하여 이광수가 1950년에 사망했음을 최종 확인하였다.[113]

그가 머무르던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에는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에는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에 있는 그의 자택은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제87호 '홍지동 이광수 가옥'으로 지정되었다.

2005년 이광수의 대표작 《무정》 영문판이 그의 손녀 이성희에 의해 미국에서 출간되었다.[116]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4. 대표작

이광수는 소설, 시, 수필,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서예에도 능하여 여러 서예 작품을 남겼다.

1916년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 문예 이론서로 평가받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 소설로 평가받는 《무정》(1917)이다.[7] 이 작품은 한국 근대화 과정의 복잡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7] 《무정》을 비롯한 다수의 소설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초기 계몽주의적 민족주의에서 출발하여, 1930년대 이후 불교 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말년에는 일제강점기 말 친일적인 색채를 띠는 등 시대 상황과 개인적 사상 변화에 따라 변모하는 모습을 보였다. 1920년대 초에는 민족의 도덕적 쇄신을 주장하는 논쟁적인 수필 「민족개조론」을 발표하기도 했다.[6]

또한 1909년 17세에 발표한 초기 단편 「愛か?|아이카?일본어」는 한국 초기 퀴어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이광수는 소설 외에도 전기, 시, 수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4. 1. 소설

이광수, 1940년대 초반


1909년 말, 이광수는 메이지 가쿠인(明治学院) 재학 중 일본어로 쓴 단편 소설 「愛か?|아이카?일본어」를 학교 학보 『白金学報|시로가네 가쿠호일본어』에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3] 이 시기 그는 톨스토이, 푸슈킨, 고리키 등 러시아 작가와 시마자키 도시손, 도쿠토미 겐지로, 기노시타 나오에, 나쓰메 소세키 등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다. 특히 톨스토이는 이광수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의 톨스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한국 최초의 근대 소설로 평가받는 《무정》(無情)이다.[7]

이광수의 주요 소설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작품명발표 연도비고
《어린 희생》
무정1917년매일신보 연재[7]
《재생》1924년동아일보 연재
《소년의 비애》
《개척자》
《무명》
《꿈》
《나》
《윤광호》
1932년동아일보 연재
마의태자1926년동아일보 연재, 불교 소설[117]
《원효대사》불교 소설[117]
《춘향》
단종애사1928년동아일보 연재
《유정》1933년조선일보 연재
《사랑》1938년1987년 KBS 드라마화
《세조대왕》1940년단행본 출판
《혁명가의 아내》
《애욕의 피안》
《할멈》
《가실 (嘉實)》
《이차돈의 사》불교 소설[117]
《나의 고백》자서전


4. 2. 전기

연도내용
1892년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남.
1902년부모가 콜레라로 사망하고, 여동생과 헤어짐.
1905년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감.
1910년메이지가쿠인 졸업. 정주에서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 첫 번째 결혼.
1915년와세다대학교 입학.
1917년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무정」을 연재.
1919년2·8독립선언서 기초에 참여하고,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편집에 참여.
1921년두 번째 결혼. 상대는 도쿄여자의과대학 졸업생 허영숙.
1922년조선어 잡지 「개벽」에 「민족개량론」 발표.
1923년동아일보 입사.
1924년동아일보에 「재생」 연재.
1926년동아일보에 「마의태자」 연재. 동아일보 편집국장 취임.
1928년동아일보에 「단종애사」 연재.
1931년동아일보에 「이순신」 연재.
1932년동아일보에 「흙」 연재.
1933년동아일보에서 조선일보로 이직. 조선일보에서 「유정」 연재.
1934년장남 사망. 조선일보 사직.
1937년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6개월 후 병으로 보석됨.
1939년수양동우회 사건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검찰 측이 당일 항소함.
1940년창씨개명하여 향산광랑(香山光郎)으로 개명. 「세조대왕」 출판. 친일 성격의 조선예술상 수상. 수양동우회 사건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피고 측이 상고함.
1941년수양동우회 사건 최종심에서 무죄 판결.
1942년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여 일제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활동에 동참함.
1946년광복 후 조선으로 귀국. 허영숙과 이혼.
1949년반민족행위처벌법 위반 혐의로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이후 병보석으로 풀려나 불기소 처분을 받음.
1950년한국 전쟁 발발 후 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됨. 자강도 만포에서 동상과 폐결핵 악화로 10월 25일 사망한 것으로 추정됨.
1962년전 부인 허영숙의 노력으로 한국 최초의 개인 전집인 「이광수 전집」 전 20권 발간 시작.
1975년허영숙이 이광수 기념비 건립 준비 중에 사망.
1991년미국에 거주하던 아들이 북한을 방문하여 이광수가 1950년 10월 25일 동상으로 사망했음을 확인함.
2009년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301인 명단에 포함됨.


4. 3. 시집


  • 춘원시가집 (春園詩歌集)

4. 4. 기행문

이광수의 저작 중에는 기행문인 《금강산유기》가 있다.

4. 5. 수필


  • 오동 (1936)
  • 우덕송(牛德頌)
  • 돌베개

4. 6. 번역서

4. 7. 논문


  • 《정육론 情育論》
  • 《신생활론》
  • 《공화국의 멸망》
  • 《자녀중심론》
  • 논설 《어린 벗에게》
  • 논설 《민족개조론 (民族改造論)》
  • 《민족적 경륜》
  • 《사료취선 史要聚選》 4권

5. 문학세계

1909년 말, 메이지 가쿠인(明治学院) 재학 중 일본어로 쓴 단편 소설 愛か?|아이카?jpn를 학교 학보 『시로가네 가쿠호』(白金學報)에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3] 이 시기 그는 알렉산드르 푸시킨, 막심 고리키, 레프 톨스토이 등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탐독했는데, 특히 톨스토이에게 큰 영향을 받아 "조선의 톨스토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한 시마자키 도손, 도쿠토미 겐지로, 기노시타 나오에, 나쓰메 소세키 등 일본 작가들의 작품도 폭넓게 읽었다.

1916년 11월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 문예 이론서로 평가받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로 평가받는 『무정』(1917)으로[7], 한국 근대화 과정의 복잡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7]

이광수는 기독교 사상을 접하고 마태오 복음서를 읽으며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레프 톨스토이의 기독교 사상이 담긴 예술론에 심취하여 이를 자신의 작품에 구현하고자 했다.[118] 그의 작품에는 기독교 사상이 녹아있다는 평가가 있는데, 송영옥은 이광수가 교리 전달보다는 독자의 정서에 호소하여 감동을 통해 깨달음을 주려 했다고 분석했다.[119] 한편, 1920년에는 《금일 조선 야소교회의 문젯점》을 발표하여 당시 조선 교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가 지적한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 조선 교회는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계층적이다.

# 세상과 교회를 분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다.

# 일부 목사들의 자질이 부족하고 비합리적이며 미신적인 신앙 행태가 만연하다.

# 오랜 선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조선 기독교만의 정체성(자주성)이 부족하다.

# 선교사와 일부 목사들이 성경 해석을 독점하고 다양한 연구 모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 감정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신비적인 체험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까지는 민족주의자로 변모하여 한국인의 패배주의를 비판하며 도덕적 쇄신을 주장하는 논쟁적인 수필 "민족개조론"을 발표하기도 했다.[6] 상하이에서 귀국한 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내며 신문에 장편소설 『』 등을 연재했다. 『흙』에는 브나로드 운동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주인공 허숭 등이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스타일로 아침 식사를 하는 등 서구식 생활을 소개하기도 했다.

작품 「만주에서」에서는 한강,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을 차례로 언급하는데, 이는 자연 풍경 자체보다는 경의선 철도를 따라 기차를 타고 이동하며 바라보는 근대인의 시점을 보여준다.[120] 이는 자연이 인간에 의해 재구성되고 정복된 대상으로 인식되는 근대적 자연관을 반영한다.[120]

1930년대 이후에는 불교로 개종하면서 작품에 불교적 색채가 강해졌다. 낙산사에서 겪은 한 스님의 사랑 이야기를 관음상과의 교감을 통해 그린 작품 『꿈』은 삼국유사의 '조신의 꿈' 설화에서도 영감을 얻었다.[121] 이 작품은 후대 무용가 김복희의 '꿈 탐욕이 그리는 그림' 등에 영향을 주었으며[122], 1990년에는 영화감독 배창호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이광수의 문학적 입장은 그의 정치적 행보처럼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동료 작가 김명순과 친분을 맺었다가 자신의 근대주의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관계를 끊은 일화가 전해진다.[8]

5. 1. 이순신관

후대의 작가 김탁환은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1931년 동아일보 연재)이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123] 김탁환에 따르면, 이광수는 소설에서 조선 조정의 당파 싸움이나 수군 내부의 공 다툼과 반목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정작 주된 적이었던 왜군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123]

이는 이순신과 그를 모함하고 핍박한 다른 장수 및 대신들 간의 대립 구도를 설정함으로써, 조선 수군과 왜 수군의 대결이라는 전쟁의 본질 대신 조선인 내부의 갈등을 전면에 내세운 결과이다.[123] 김탁환은 이러한 구도가 조선과 왜군의 대립을 조선인 내부의 대립으로 치환시키려는 민족개조론적 발상에 기반한다고 비판했다.[123] 즉, 이광수는 이순신을 당파 싸움과 내부 반목의 희생자로 그림으로써, 외부의 적과의 싸움보다는 민족 내부의 문제를 더 부각하려 했다는 것이다.

5. 2. 로맨스 작품의 시조

이광수는 작품에서 남녀 간의 사랑과 낭만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특히 그의 대표작 무정에서는 '정(情)'을 강조했는데, 이는 김동리박완서 같은 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의 젊은 작가들에게까지 이어져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있다.[124]

20세기 한국의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많은 대중문화 작품에서는 남녀 주인공이 서로를 그리워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재회하여, 애틋함 속에서 손만 잡고 잠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125] 이러한 묘사는 20세기 초 이광수의 소설들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125]

6. 사상 및 신념

이광수는 일제강점기 식민 통치의 억압과 현실의 부조리, 유교적 가치관과 기독교 사상 또는 서구식 시민 민주주의 간의 갈등을 자신의 작품에 투영하였다. 그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폭력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등 주변인에 의한 정신적, 육체적 폭력까지 고발하며, 권위와 관습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폭력을 비판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방대한 양의 소설, 논설, 시, 수필, 기행문 등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초기 이광수는 서구의 '근대' 사상에 기반한 실력 양성론을 주장했으나, 이후 친일 노선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변화와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존재한다. 김무관(木村幹)은 이광수가 조선 민족의 역량 강화를 위해 당시 근대화에서 앞서 있던 대일본제국의 힘을 빌리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고 분석한다. 즉,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열강에 맞서기 어렵다고 보고, 근대화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13] 그러나 이광수의 민족 개량주의 자체가 조선 민족의 열등성을 전제하고 대일본제국의 통치를 용인하는 논리이며, 처음부터 친일로 이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14]

한편, 경제사학자 이영훈민족 개념이 20세기 일제강점기 이후 형성된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이며, 이광수가 이러한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보급한 대표적인 지식인이라고 평가한다.[15] 이광수는 조선 사회의 문제점에 절망하면서도 민족의 재생 가능성을 믿었고, 일본인처럼 문명화되는 것을 민족 재생의 길로 보았다.[15] 서울대학교의 조관자는 이러한 이광수를 “친일 민족주의자”라고 명명하기도 했다.[15] 실제로 학도 지원병 출신인 김우전 전 광복회 회장은 이광수의 소설을 통해 민족 의식과 근대적 자아를 깨달았다고 회고하는 등[15], 그의 작품이 당대 청년들에게 근대인으로서의 자각과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15]

6. 1. 민족개조론

이광수는 조선 민족의 민족성을 개량하고 내실을 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126] 그는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원인을 조선인의 게으름, 나태함, 안일함, 위선, 허례허식 등에서 찾았다. 서구와 일본처럼 근면함, 성실성, 진솔함, 자유주의적인 가치관을 익히고 생각을 바꾸는 것이 독립의 첫걸음이라고 보았다. 특히 한국인들 사이에 만연한 요령, 술수, 시기심, 거짓말 등의 습성을 버리지 않으면 독립을 이루거나 유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127]

이광수는 이러한 민족성을 가진 조선인이 당장 독립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민족성 개조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27] 신돌석을 밀고한 조선인이나 한일 합방 이후 다수의 조선인이 일제 체제에 협력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모습 등은 그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환멸감을 주었다. 그는 시기심, 술수, 요령, 거짓말을 조선인의 가장 열등한 습성으로 지적하며 이를 고치고 진실되고 참될 것을 호소했다.

1922년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자, 그의 집에는 칼을 든 청년들이 난입했고 개벽사의 기물이 파괴되었으며, 이광수를 강사로 초빙했던 사람까지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54] 이광수는 이러한 감정적인 대응을 비판하며 손해를 보는 지름길이라고 한탄했다.

언론인 김대중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에 대해 "우리 민족이 그렇게 비참하고 천박했었는가 하는 점이 슬프고, 그래서 나라를 빼앗긴 것이 슬프고, 옳은 소리를 옳지 못한 시기에 내놓은 작가의 시대착오가 슬프다"고 하면서도, "그 글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가리고, 또 그 글을 쓴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다시 읽어보면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도 있다. 민족을 '개조'하기보다 민족을 '개선'하는 길을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라고 평했다.[128] 작가 이인화는 "그 논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수의 세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 사회가 가질 수 있는 극한의 비전을 제시했던 작가 이광수의 용기에 진정한 외경의 마음을 갖게 된다"고 평가했다.[54] 김대중은 또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읽어보면 우리는 그의 글에서 오늘의 고민을 발견할 수 있다"며, "그가 그 글을 쓴 시점과 상황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어도 그의 민족개조론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고 덧붙였다.[129]

이광수는 정신적으로 진실되고 참될 때만이 조선이 진정으로 독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 독립운동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1930년대에는 독립무용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그는 3·1 운동을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지각없이 따라 한 것'으로 폄하하고, 식민지 하에서의 모든 활동은 비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27] '민족개조론' 발표 이후 한국 사회와 한국인에 대한 평가는 계속해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130] 또한 그는 주정(술주정)이 심한 민족으로 러시아, 일본에 이어 조선을 꼽기도 했다.[131]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서구의 '근대' 사상에 기반한 실력 양성론에서 출발했지만, 그가 친일 노선으로 전환한 후에도 이를 계속 주장한 것은 민족 역량 양성을 위해 당시 조선보다 근대화에서 앞선 일본 제국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즉,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열강에 대항하기 어렵다고 보고, 근대화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기무라 간(木村幹)은 한반도 내 세력의 노력이 실제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외부 요인에 의해 독립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구 근대를 모델로 일본을 이용하려 했던 이들이 비판받는다고 주장하고 있다.[13]

그러나 이광수의 민족 개량주의 자체가 조선 민족의 열등성을 강조하며 일본 제국의 통치를 용인하는 논리였고, 처음부터 친일로 이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4]

이영훈은 민족이란 20세기에 조선인이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 이후에 발견된,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이며, 그러한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보급시킨 대표적인 지식인이 이광수라고 한다.[15] 이광수는 조선의 무지, 불결, 무질서, 무기력에 절망하면서도, 민족이란 영원한 바다와 같은 존재이며, 조선 민족은 재생할 것이고, 일본인처럼 서로 협동하는 깨끗하고 용감문명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만이 민족 재생의 길이라고 사람들에게 설파했다.[15] 서울대학교의 조관자는 이러한 이광수를 “친일 민족주의자”라고 명명했다.[15] 예를 들어, 학도 지원병 출신으로 광복회 제16대 회장을 지낸 김우전은 “이광수의 소설을 읽고 민족 의식과 근대적인 자아에 눈떴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그 시대 조선의 청년들은 이광수의 작품을 읽고 근대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식민지 민중으로서의 좌절감을 극복하고, 조선의 밝은 미래를 개척하는 민족 의식을 고양시켰다.[15]

6. 2. 실력양성론

이광수는 민족의 정신 개조와 함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민족 독립의 기틀이라고 보았다.

1924년 동아일보에 5회에 걸쳐 발표한 ‘민족적 경륜’은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132] 이 글에서 그는 조선에 정치, 산업, 문화의 근대화라는 새로운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산업적, 교육적 운동이 함께 전개되어야 하며, 그중에서도 교육 운동이 가장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132]

그는 독립을 이루기 전에 실력 양성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력 없이 의지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이광수는 본래 서구의 ‘근대’ 사상에 기반한 실력 양성론자였으나, 이후 친일 노선으로 돌아선 뒤에도 실력 양성을 계속 주장했다. 이는 조선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당시 근대화에서 앞서 있던 대일본제국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즉, 일본을 이용해 조선의 급속한 근대화를 이루려 했다는 것이다. 기무라 간은 당시 조선의 독자적 힘만으로는 열강에 맞설 수 없었기에, 이광수와 같이 일본을 '이용'하려 했던 이들이 있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실제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외부 요인에 의해 독립이 이루어지면서, 일본을 이용한 근대화 노선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13]

한편, 이광수의 실력 양성론 자체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그의 주장이 조선 민족의 열등성을 전제하고 대일본제국의 통치를 용인하는 논리로 이어져, 결국 친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다는 지적이다.[14]

이영훈민족 개념이 20세기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상상의 공동체이며, 이광수가 이러한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보급한 대표적 지식인이라고 평가한다.[15] 이광수는 조선의 무지, 불결함, 무질서, 무기력에 절망하면서도, 민족은 영원하며 조선 민족은 재생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조선인이 일본인처럼 협동하고 깨끗하며 용감문명인으로 거듭나는 것이 민족 재생의 길이라고 설파했다.[15] 이러한 이광수의 사상적 특징 때문에 조관자는 그를 “친일 민족주의자”라고 명명하기도 했다.[15] 실제로 학도 지원병 출신으로 제16대 광복회 회장을 지낸 김우전은 “이광수의 소설을 읽고 민족 의식과 근대적인 자아에 눈떴다”고 회고했다. 당시 많은 조선 청년들이 이광수의 작품을 통해 근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식민지 현실의 좌절감을 극복하며 민족의 미래를 향한 의지를 다졌다는 평가도 있다.[15]

6. 3. 여성해방론

그는 여자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봉건적인 유교 사회가 여성의 권리와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하며, 여성 역시 인간이므로 해방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광수는 여성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먼저 가정에서의 역할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자유로운 연애와 성관계를 포함하는 자유 연애가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이루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이광수가 고아라는 점을 들어 비난하고, 그의 사상을 '못된 사상'이라며 폄하했다. 또한, 언론사에 압력을 넣어 그의 글이 실리지 못하게 방해하기도 했다.

이광수의 대표작 중 하나인 무정은 이러한 그의 여성 해방 사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당시 이광수는 조선 청년들의 지적 우상이었으며, '전 조선 여성의 연인'으로 불릴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127]

6. 4. 자유주의론

그는 자유주의를 제창하였다. 일본 유학 중 접한 미국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이를 조선 사회에 알리려 노력하였다. 어린 시절 고아로서 겪었던 냉대와 멸시, 그리고 어머니가 세 번째 부인이었던 탓에 사실상 서자 취급을 받았던 개인적 경험은 그가 조선 사회의 인습에 저항하고 기존 가치관에서 벗어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여성이 가정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연애하며 해방되어야 하고, 조선 사회에 남아있는 양반과 상민 간의 신분 차별이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봉건적 사회의 문제로부터 민족을 구하려는 열의가 지나치게 강하여 분별력을 잃었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124] 또한, 이광수가 내세운 '근대 서구' 사상에 기반한 민족 개량주의나 실력 양성론 자체가 조선 민족의 열등성을 인정하고 대일본제국의 통치와 타협하며 이를 용인하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으며, 결국 친일로 나아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14] 이는 그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당시 상대적으로 앞서 있다고 판단한 일본 제국의 힘을 이용하려 했다는 해석과도 연결된다.[13]

6. 5. 소 예찬론

이광수는 젊은이들에게 늘 소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성실성을 인간의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그는 수필 '우덕송(牛德頌)'을 쓸 정도로 소를 좋아했으며, 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133]

: 그의 느리고 부지런함, 그의 유순함. 그러면서도 일생에 한두 번 노할 때에는 그 우렁찬 영각, 횃불 같은 눈으로 뿔이 꺾이도록 맥진(驀進)함, 그의 침묵함….

이를 통해 소의 정직함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아이들에게 순순히 끌려가는 소의 모습에서 예수와 닮은 거룩함을 발견하고 그 우직함을 칭찬하기도 했다.[134] 이처럼 그는 소의 성실성과 우직함을 예찬하고 강조하였다.

6. 6. 탈권위주의적 인간관

소파 방정환에게서 어린이도 인격체라는 가르침을 받고 감화된 이광수는 평생 어린이나 청소년은 물론, 자신보다 10세, 20세 이상 연하인 사람들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며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연하의 사람들과도 격의 없이 형님, 아우님이라 부르며 친하게 지냈다. 나혜석의 조카인 나영균은 해방 직후 이광수를 만났을 때, 어린 자신에게도 정중하게 대했던 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135]

: "춘원은 내가 인사하면 어린 나에게도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어요. 말소리와 표정이 언제나 부드러웠고 눈동자 빛깔이 엷어 꼭 서양사람 같았죠."[135]

또한 그는 젊은이들의 의견이라 하여 무조건 반박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탈권위적인 모습 때문에 당시 일각에서는 '줏대없다', '체신없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광수는 조선 사회의 지나친 엄숙주의를 비판하며, 이를 가식적인 모습으로 규정했다.

6. 7. 자유연애론

그는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며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소설과 작품을 통해 남녀간의 평등,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점, 여자에게도 욕망과 애정, 성욕 등이 존재한다는 점을 설파하며 당시 사회의 비난과 동시에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많은 여성 독자들의 인기와 지지를 얻는 배경이 되었다.

이광수는 연애를 남녀 본연의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보았으며, 자유로운 연애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인생의 연애는 예술이요, 남녀간의 예술은 연애'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그는 조선 사회가 비인간적으로 여성을 억압하고 학대해왔다고 전제하며, 봉건 제도의 압제와 유교 이념 하에서 고통받아 온 여성의 해방은 자유로운 연애를 통해 완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실제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나혜석, 김일엽과 연인 관계였으며, 김명순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1917년-1918년 무렵에는 잠시 나혜석과 연인 관계였고, 1930년에는 김일엽과도 잠시 교제했다.

그는 나혜석이 정조 취미론과 이혼 고백장 등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을 때 그를 도왔으며, 김일엽의 자유 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또한 김명순을 문단에 등단시키고 이병도의 집에 머무르도록 주선하거나 일본 유학을 돕는 등 후견인 역할을 했다. 당시 사회가 이들의 자유로운 연애를 비난할 때마다, 이광수는 그것이 인간 본연의 감정이며 솔직한 자기 표현이라고 옹호하며 그들의 편에 섰다.

6. 8. 문인 발굴, 육성

이광수는 일본 유학 시절 자신이 김성수, 송진우, 윤치호 등의 후원으로 공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문인들을 발굴하고 지도하며 후원하는 데 힘썼다.

시인 박태원은 이광수의 도움으로 여러 지면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알려졌다.[136] 또한 소학교에 다니던 피천득의 재능을 일찍 알아보고 발굴하였다. 이광수는 피천득의 어머니가 가야금을 잘 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금아(琴兒)', 즉 '거문고 소년'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으며,[137][138] 피천득은 이 아호를 평생 사용했다.

1930년대에는 한 시 창작 대회에서 김영랑이 자신이 쓴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리려 하자, 이광수가 이를 발견하고 직접 낭송하여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게 한 일화도 있다.[139] 이 외에도 여러 신진 작가와 시인들을 발굴했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문인들의 작품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독려했다.

6. 9. 청년들에 대한 영향

이광수의 작품과 사상은 당대 청년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많은 청년들이 그의 글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에 눈뜨고 민족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으며, 실제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1936년 연희전문을 수석으로 졸업한 송방용은 이광수의 소설 ''을 읽고 감명을 받아 고향으로 내려가 농촌 계몽 운동에 헌신하고자 했다.[140] 이는 그의 문학이 청년들에게 현실 참여의 동기를 부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려대학교 교수를 지낸 김용준은 중학교 3학년 때 읽은 이광수의 소설 '그의 자서전'을 통해 당시 황국신민 교육과는 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소설을 계기로 이광수의 작품, 특히 역사소설을 탐독하며 일본어 일기 외에 한글로 된 일기장을 따로 쓰기 시작했다고 밝혔다.[141] 이러한 경험은 비단 김용준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영훈은 이광수가 20세기 일제강점기 하에서 조선인들에게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보급한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고 평가한다.[15] 학도 지원병 출신으로 광복회 회장을 지낸 김우전 역시 "이광수의 소설을 읽고 민족 의식과 근대적인 자아에 눈떴다"고 고백한 바 있다.[15] 이처럼 이광수의 작품은 많은 청년들에게 근대인으로서의 자각을 촉진하고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북돋았다.[15]

이광수는 문학적 재능을 가진 청년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데에도 힘썼다.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을 중퇴하고 실의에 빠져 있던 채만식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단편 '세길로'를 1924년 조선문단에 추천하여 소설가로 데뷔시켰다.[142] 이후에도 채만식의 사람됨을 높이 평가하며 동료 문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또한 자신의 작품 '애욕의 피안'에 대한 신인 박태원의 비평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그를 문단에 추천하기도 했다. 3·1 운동에 참가했던 추계 최은희를 조선일보에 추천하여 한국 최초의 여기자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운 것도 이광수였다.[143]

이광수의 영향력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안창호의 측근이었던 구익균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이광수의 문학을 좋아하고 숭배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증언했다.[144] 이는 그의 문학이 가진 보편적인 호소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광수의 민족주의는 친일 행적으로 이어졌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의 '민족 개량주의'나 '실력 양성론'이 결과적으로 대일본제국의 통치를 용인하는 논리로 귀결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14] 조관자는 이러한 이광수의 양면성을 "친일 민족주의자"라는 용어로 설명하기도 했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 많은 청년들이 그의 작품을 통해 민족적 각성을 경험하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6. 9. 1. 사후 영향력

이광수는 사후에도 여러 인물에게 영향을 미쳤다.

승려 법정은 사촌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광수의 책을 추천하며 "춘원(이광수)님 지은 것은 대개가 믿고 읽을 만하다"라고 언급했다.(1958년 5월 13일[145])

대학 시절 이광수의 집에 드나들었던 법철학자 이항녕은 이후 소설 '교육가족', '청산곡'과 수필 '객설록' 등의 작품을 남겼다.[146]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은 젊은 시절 이광수의 소설 을 읽고 감명받아 변호사가 되기를 꿈꾸기도 했다.[69]

소설가 양귀자는 어린 시절 이광수의 소설 유정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아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유정'을 읽고 "이런 세계도 있구나, 소설만 있다면 이 괴로운 세상(학교 가기가 끔찍히 싫었단다)도 얼마든지 살아나갈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147]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낸 김흥호(金興浩)는 1948년 이광수의 소개로 사상가 다석 유영모(柳永模)를 만나 6년간 가르침을 받았다.[148]

6. 10. 국민성 비판과 자치론

1922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논문 민족개조론과 1924년에 발표한 같은 신문의 사설 '민족적 경륜'을 통해, 이광수는 당시 한국인의 여러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한국인이 가진 위선, 편협함, 정직성의 부족, 무질서함, 잔꾀를 부리는 성향, 요행을 바라는 마음, 음험한 술수 등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13]

이러한 주장들은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민족개조론'과 '민족적 경륜'은 많은 사람의 감정을 자극했으며, 종교계까지 나서서 그를 비난했다. 이 논란으로 인해 이광수는 결국 동아일보를 잠시 떠나게 되었다. 그는 나라를 잃은 근본적인 원인이 당파 싸움과 같은 역사적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의 국민성에 있다고 보았다. 즉, 위에서 언급된 여러 부정적인 특성들이 민족의 치명적인 약점이며,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독립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교육을 통한 국민 계몽과 민족 운동의 문화 운동으로의 전환을 주장했으며, 당장의 완전한 독립이 어렵다면 우선 자치권이라도 확보해야 한다는 자치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13]

이광수는 당시 조선 사회가 사기, 협잡, 위선이 만연한 곳이라고 진단했다. 사람들 사이에 신의가 부족하며, 조선 시대 당쟁의 나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파벌을 만들어 다툰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국민성을 개선하지 않으면 독립을 이루기 어렵고, 설령 독립하더라도 끊임없는 내부 갈등과 유혈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따라서 정치적 독립에 앞서 국민 개개인의 수준을 높이고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고 역설했다.[13]

원래 이광수는 서구의 '근대' 사상에 영향을 받은 실력 양성론자였다. 그가 이후 친일 노선으로 방향을 바꾸었음에도 계속해서 글을 쓴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김무관은 이광수가 조선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보다 근대화에서 앞서고 국력도 강했던 대일본제국의 힘을 빌리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고 본다. 즉, 조선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열강에 맞서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급속한 근대화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일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김무관은 이러한 시도가 결과적으로 조선의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외부 요인에 의해 독립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구식 근대화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했던 인물들이 비판받게 되었다고 주장한다.[13]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이광수의 민족 개량주의와 실력 양성론 자체가 조선 민족의 열등함을 인정하고 일본 제국주의 통치에 타협하며 이를 받아들이는 논리이며, 결국 친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다는 비판이다.[14]

한편, 이영훈은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20세기 일제강점기 이후에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이며, 이러한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확산시킨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광수라고 평가한다.[15] 이광수는 조선 사회의 무지, 불결함, 무질서, 무기력함에 절망하면서도, 민족은 영원하며 재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조선 민족이 일본인처럼 서로 협동하고 깨끗하며 용기 있는 문명인으로 거듭나는 것이 민족 재생의 길이라고 설파했다.[15] 이러한 이광수의 사상을 두고 조관자 (서울대학교)는 그를 '친일 민족주의자'라고 명명하기도 했다.[15] 실제로 학도 지원병 출신으로 제16대 광복회 회장을 지낸 김우전은 젊은 시절 이광수의 소설을 읽고 민족 의식과 근대적인 자아를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당시 많은 조선 청년들은 이광수의 작품을 통해 식민지 현실의 좌절감을 극복하고, 근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민족의 밝은 미래를 꿈꾸는 의식을 키워나갔다.[15]

6. 11. 한국인 단일민족설

1930년대 초, 이광수는 한국인이 단일 민족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1933년에 발표한 '조선민족론'에서 "조선 민족이 혈통적으로, 문화적으로 대단히 단일한 민족이라는 것은 우리 조선인 된 이는 누구나 분명히 의식하여 일점의 의심도 없는 바다."라고 명시하며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했다.[149]

당시에는 "2천만 민족은 동일한 단군의 자손"이라는 표현이 간혹 사용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한국인이 여러 종족으로 구성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될 정도로 단일민족설은 보편적인 견해는 아니었다.[149] 예를 들어, 단재 신채호는 1908년 '독사신론'에서 한국인이 부여족을 중심으로 한 6개 종족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했으며, 박은식은 '몽배금태조'에서 조선족과 만주족이 모두 같은 단군의 자손이라고 보았다.[149] 이광수는 이러한 신채호의 6종족론을 비판하며, 조선인은 모두 단군이라는 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단일 민족이자 단일 인종이라고 규정했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한국학 교수 신기욱은 이광수의 이러한 주장이 한국형 파시즘권위주의의 뿌리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신기욱은 "1930년대 이광수의 ‘조선민족론’에는 전체주의를 강조하는 파시즘적 요소가 있다. 이광수식의 민족주의는 해방 이후 이승만, 박정희로 연결되면서 한국적 권위주의의 뿌리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하였다.[150]

이광수가 주장한 단일민족론은 그의 실력 양성론과 연결지어 해석되기도 한다. 초기 서구 근대 사상에 기반한 실력 양성론자였던 이광수가 친일 노선으로 전환한 후에도 민족 담론을 이어간 것은, 조선 민족의 역량 강화를 위해서는 당시 근대화에서 앞서 있던 대일본제국의 힘을 빌리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즉,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열강에 대항하기 어렵다고 보고, 근대화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13] 김무관은 한반도에 남아 있던 세력의 행위가 자립이나 독립의 전 단계 행위로서 실제 독립으로 이어지지 않고 외부 요인에 의해 독립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구 근대를 모델로 한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을 이용했던 사람들이 비판받고 있다고 주장한다.[13] 그러나 이러한 실력 양성의 논리 자체가 조선 민족의 열등성을 전제하고 대일본제국의 통치를 용인하는 것이며, 결국 친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4]

한편, 이영훈은 민족 개념 자체가 20세기 일제 통치 하에서 형성된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이며, 이광수가 이러한 민족 의식을 형성하고 확산시킨 핵심 인물이라고 평가한다.[15] 이광수는 당시 조선 사회의 무지, 불결, 무질서, 무기력에 절망하면서도, 민족의 영원성을 강조하며 일본인처럼 서로 협동하는 깨끗하고 용감문명인으로 거듭나는 것이 민족 재생의 길이라고 역설했다.[15] 이러한 이광수의 사상을 조관자 (서울대학교)는 “친일 민족주의자”라고 명명했다.[15] 실제로 학도 지원병 출신인 김우전 전 광복회 회장은 이광수의 소설을 통해 민족 의식과 근대적 자아를 깨달았다고 회고하는 등, 당시 청년들에게 이광수의 작품이 식민지 현실 속에서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15]

6. 12. 문학계몽론

1910년대 이광수는 이해조 등과 함께 계몽주의 문학을 이끌었다.[151] 그는 소설과 시 등 문학 작품이 시대의 정신이자 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 대중을 계몽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그의 작품에는 자유연애론, 자유주의, 개화 사상 등 계몽주의적 가치관이 반영되었다. 그는 문학 작품의 대중화를 통해 계몽을 실현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1919년 김동인은 이광수의 이러한 계몽주의 문학관에 반기를 들고 순수문학 운동을 시작했다.[152] 김동인은 문학이 정치적 색채를 띠어서는 안 되며 순수한 예술 작품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광수는 문학 작품 역시 그 시대 문화의 일부이므로 사회적 분위기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김동인은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에 맞서 사실주의 기법을 사용했으며, 신경향파와 프로문학에 대해서는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순수문학 운동을 이어나갔다.[153] 극작가 김우진 또한 이광수의 문학 계몽론을 비판하며 자연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61]

6. 13. 시대상의 반영

이광수는 자신의 소설, 칼럼, 시 등을 통해 당대의 사회 문제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거나 언급하고자 했다. 그는 "세말이 되면 진고개와 종로에서 장, 단스 같은 것을 일등상으로 걸어놓고 경품부 대매출을 한다. 그때마다 안해는 장이 당첨되기를 바라고 물건을 샀다. 그러나 뽑는 것마다 타울수건, 화저까락 따위요, 바라는 장은 당첨되지 않았다.(동광 1932년 1월 25일자)[154]" 와 같이 자개장 당첨을 꿈꾸며 물건을 사는 아내의 모습을 묘사하며 당시의 세태를 그리기도 했다.[154]

이광수는 이상을 좇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대의 시대상, 현실 문제, 현실의 모순 등을 다루지 않는다면 참된 작가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이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음을 직접 밝혔다. 예를 들어, 한국 최초의 근대 소설로 평가받는[7]무정』은 '노일전쟁과 새로운 사회상에 눈뜬 조선'의 시대상을, 『개척자』는 '한일합방으로부터 대전(大戰) 전까지의 조선'을, 『재생』은 '만세운동 이후 1925년경의 조선'을, 그리고 『군상』(群像)은 '1930년대의 조선의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그는 작품을 통해 한국 근대화 과정의 복잡한 모습과 당대의 사회상을 담아내려 노력했다.[7]

1916년 11월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 문예 이론서로 평가받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매일신보』에 발표하며 자신의 문학관을 드러냈다. 또한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까지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한국인의 패배주의를 비판하고 도덕적 쇄신을 주장하는 수필 "민족개조론"을 발표하기도 했다.[6] 이러한 활동들은 그가 문학을 통해 시대적 과제에 응답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6. 14. 현대미에 대한 관점

춘원 이광수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밝힌 바 있다. 그는 "체격이 팔다리나 몸통이 자로 잰 듯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게 바로 맞고, 몸 쓰는 것, 걷는 것 등 모든 동작이 날씬하여 남의 눈에 조금도 거슬리게 보이지 않"으며, "취미와 그 정신이 아울러 고상하다면 그야말로 내가 찾는 미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155] 또한 얼굴에 대해서는 "둥글둥글한 타원형의 윤곽에다가 눈은 어디까지든지 크고 처진 듯하며 코나 귀가 복스럽게 예쁘고 살결이 하얀 분"이어야 한다는 세부적인 기준도 제시했다.[155]

하지만 이광수의 이러한 공개적인 발언은 당시 사회에 파장을 일으켰고, 일부에서는 남사스럽고 음란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중추원의 귀족들과 일부 유학자들은 그가 상스럽고 음란한 사상을 부추긴다며 강하게 비난했다.[155]

반면, 이광수의 발언 이후 다른 작가, 문인, 예술가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거나 발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소설가 현진건은 "첫째로 키가 조금 큰 듯하고 목선이 긴 여자가 좋다. 제아무리 얼굴이 예쁘장하고 몸맵시가 어울려도 키가 땅에 기는 듯하고 목덜미가 달라붙은 여자는 보기만 해도 화증이 난다"고 노골적으로 밝히기도 했다.[155] 이처럼 이광수의 발언은 이상적인 이성상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촉발하는 결과를 낳았다.

6. 15. 근대화에 대한 관점

그는 조선 사회를 개선하려면 문명화, 근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조선 사회의 새로운 문화의 하나로 철도열차를 지목했다. 그의 소설 무정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 "'도회의 소리?' 그러나 그것이 '문명의 소리'다. 그 소리가 요란할수록 그 나라는 잘 된다. 수레바퀴소리, 증기와 전기기관소리, 쇠마차소리… 이러한 모든 소리가 합하여서 비로소 찬란한 문명을 낳는다."[156]

이광수는 인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장점을 취하고 사회를 개선시키는 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 소설로 평가받는 『무정』에서 기차역은 주인공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중요한 무대로 설정되었으며[156], 작품 속 기차는 근대성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56] 또한, 소설 『』에서는 주인공들이 서양식 아침 식사를 하는 모습을 묘사하여 서구 문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광수는 원래 서구에서 유래한 ‘근대’ 사상에 기반한 실력 양성론자였으나, 친일 노선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집필을 계속했다. 이에 대해 기무라 간은 이광수가 조선 민족의 역량 양성을 위해서는 당시 조선보다 근대화에서 앞서 있던 대일본제국의 뜻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13] 즉, 이광수를 포함한 일부 인물들이 실력 양성이라는 목적을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했으며, 당시 조선의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열강에 대항하기 어렵다고 보고 급속한 근대화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열강’으로 일본을 선택했다는 분석이다.[13]

그러나 이러한 이광수의 ‘근대 서구’ 사상에 기반한 민족 개량주의와 실력 양성론은 조선 민족의 열등성을 전제하고 일제강점기의 통치 지배와 타협하여 이를 용인하는 논리이며, 결국 친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4]

한편, 이영훈민족 개념이 20세기에 조선인이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 이후에 발견된 상상의 공동체이며, 이광수가 이러한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보급시킨 대표적인 지식인이라고 평가했다.[15] 이광수는 조선의 무지, 불결, 무질서, 무기력에 절망하면서도, 민족은 영원하며 조선 민족은 재생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조선인이 일본인처럼 서로 협동하는 깨끗하고 용감문명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민족 재생의 길이라고 사람들에게 설파했다.[15] 서울대학교의 조관자는 이러한 이광수를 “친일 민족주의자”라고 명명했다.[15] 실제로 학도병 출신으로 제16대 광복회 회장을 지낸 김우전은 “이광수의 소설을 읽고 민족 의식과 근대적인 자아에 눈떴다”고 고백했으며, 당시 많은 조선 청년들은 이광수의 작품을 읽고 근대인으로 거듭나고 식민지 민중으로서의 좌절감을 극복하며 조선의 밝은 미래를 개척하는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15]

6. 16. 등산 활동

이광수는 산을 좋아하여 전국 각지의 명산을 찾아 등산하고 답사하였다. 특히 백두산금강산 등반 경험에 대한 글을 남겼다.

1936년 잡지 '계명'에 기고한 글에서 백두산 등반 소감을 밝혔는데,[157] "세상에 백두산만한 명산도 없지만, 백두산만큼 매몰된 명산도 없"으며, 특히 "그 주인인 조선인에게 가장 심하게 백두산이 대접받지 못함이 가장 애닯다"고 토로했다. 그는 백두산의 이름이나 민족적 중요성은 알지만, 그 구체적인 국토적 성질, 민족적 관계, 자연 및 인문적 사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너무 부족하고, 심지어 알아야 할 이유나 노력조차 없어진 현실을 지적하며 백두산에 대한 깊은 이해를 촉구했다.[157]

또한 금강산을 오른 뒤에는 "나는 천지창조를 목격하였다 / 신천지의 제막식을 보았다."[158]라고 표현하며 그 절경에 감탄했다. 그는 '금강산유기'라는 글을 통해 내금강의 빼어난 경관을 자세히 묘사하기도 했다.[158]

7. 논란 및 의혹

이광수의 행적과 사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와 논란이 존재한다. 그는 본래 서구의 근대 사상에 영향을 받아 민족의 실력 양성을 주장했으나, 점차 친일 노선으로 기울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당시 조선의 역량으로는 독자적인 근대화나 열강 대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근대화에서 앞서 있던 대일본제국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는 해석이 있다.[13] 즉, 민족의 실력 양성이라는 목적을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했다는 시각이다. 김무관은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 내부의 노력이 실제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외부 요인에 의해 독립이 이루어진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근대화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했던 인물들이 비판받게 되었다고 분석한다.[13]

그러나 이광수의 민족 개량주의 자체가 조선 민족의 부족함을 강조하며 대일본제국의 통치를 용인하는 논리였고, 결국 친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다는 비판 역시 제기된다.[14]

한편, 이영훈은 이광수가 20세기 일본 통치 하에서 형성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고 보급한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고 평가한다.[15] 이광수는 조선의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민족의 재생을 믿었으며, 일본인처럼 문명화되는 것이 민족이 나아갈 길이라고 주장했다.[15] 서울대학교의 조관자는 이러한 이광수를 "친일 민족주의자"라고 명명하기도 했다.[15] 실제로 학도 지원병 출신인 김우전 전 광복회장은 이광수의 작품을 통해 민족 의식과 근대적 자아를 깨달았다고 회고하며,[15] 그의 문학이 당시 청년들에게 미친 긍정적 영향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7. 1. 소설 원효대사의 작품성 논란

2006년 소설가 한승원은 이광수가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한 소설 '원효대사'가 전쟁 독려를 목적으로 쓰였다고 비판했다. 한승원은 이광수가 작품 속 원효의 입을 빌려 신라 젊은이들에게 "성스러운 전쟁에 기꺼이 몸을 던져라"라고 외치게 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려 했다고 지적했다. 이는 원효의 삶과 사상을 잘못 해석한 결과라는 것이다.[159]

이에 대해 '원효대사'의 작품 해설을 쓴 국문학자이자 동국대학교 명예교수인 이병주는 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그는 일제가 이광수에게 집필을 허락한 것은 원효가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충성한 정신을 한인(韓人)에게 알려 '국가총동원'을 선전하려는 의도였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광수는 오히려 이를 역이용하여 한민족의 민족정기를 일깨우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고 반박했다.[159]

같은 해 4월, '원효대사'의 재출간 문제를 두고 화남출판사 편집주간인 이승철 시인과 한승원 작가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승원 작가가 이광수의 소설이 "원효의 사상을 오독한 것[159]"이라고 거듭 비판하자, 이승철 주간은 "어떤 이유로도 출판의 자유는 침해될 수 없으며, 원효의 사상은 여러 작가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고 맞섰다.[159]

한편,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인 김준태 시인은 이 소설이 이광수가 문학적으로 원숙기에 접어들어 쓴 작품으로, 작가로서의 야심과 창작 열정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소설 '원효대사'가 지닌 한계는 주인공 '원효의 한계'가 아니라,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살아간 작가 이광수 개인의 한계였다고 분석했다.[159]

7. 2. 적극적 친일 문제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포함되었으며, 당시 총 103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어[160] 친일 문학인 42인 중 가장 많은 작품 수를 기록했다.

그의 친일 행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 《새해》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씩씩한 우리 아들들은 총을 매고

전장으로 나가고, 어여쁜 우리 딸들은 몸뻬를 입고 공장으로 농장으로 나서네.

말 모르는 미소까지도 나랏일 위해 나서지 않는가. 천년화평, 도의 세계를 세우랍신 우리 임금님의 명을 받자와 예, 예하고 집에서 뛰쳐나오는 무리. 이날 설날에 반도 삼천 리도 '''기쁨의 일장기 바다'''. 무한한 영광과 희망의 위대한 새해여.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광수의 친일 활동 기간이 전체 활동 기간에 비해 짧고(47세경부터 약 6년간),[161] 이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동료 지식인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고, 실제로는 독립을 염원한 '거짓 친일'이었다고 주장하며 그를 '민족의 양심수'라고 평가하기도 한다.[162] 소설가 복거일 역시 이광수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친일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164]

반면, 1909년 초기 작품부터 친일적 사상이 보였다는 비판도 있다. 1948년 김승학은 '친일파 군상' 보고서에서 이광수를 '광병적(狂炳的) 친일 급 열렬 협력자'로 명시했다.[163] 그의 민족 개량주의 자체가 조선 민족의 열등성을 설파하고 대일본제국의 통치 지배와 타협하여 이를 용인하는 논리이며, 친일로 전락할 가능성을 내포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4] 이영훈은 이러한 이광수를 "친일 민족주의자"라고 명명하기도 했다.[15]

해방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체포·투옥되었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이후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법정에서는 "나의 친일은 조국을 위한 것이었다" 또는 "비록 정도가 아니더라도 邪道였다 하더라도, 내가 걸어온 길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것이며, 그것 또한 이해해주길 바란다"라고 항변했다고 전해진다.[10]

7. 3. 친일 의혹에 대한 반론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다양한 반론과 재평가 시도가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그가 항일 민족주의자로 활동한 기간(약 35~36년)이 친일 행위를 한 기간(약 6년)보다 훨씬 길다는 점을 들어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61] 또한 그의 친일이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했으며, 동료 지식인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고 실제로는 독립을 염원한 '거짓 친일'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광수를 '민족의 양심수'로 보기도 한다.[162] 소설가 복거일 역시 이광수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친일한 것은 아니라고 평가했다.[164]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행적을 '실력 양성론'의 연장선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즉, 조선 민족의 역량 강화를 위해 당시 근대화에서 앞서 있던 일본 제국의 힘을 이용하려 했다는 분석이다.[13] 김무관 등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광수의 행위를 분석하기도 한다.[13]

또한, 이영훈과 같은 학자는 이광수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고 보급한 대표적 지식인이었다고 평가하며,[15] 조관자는 그를 "친일 민족주의자"로 명명하기도 했다.[15] 실제로 학도 지원병 출신인 김우전 전 광복회장은 이광수의 소설을 통해 민족 의식과 근대적 자아를 깨달았다고 회고한 바 있어,[15] 그의 문학이 당시 청년들에게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처벌법 관련 재판 과정에서 이광수는 "나의 친일은 조국을 위한 것이었다!"라고 외치거나, 자신의 길이 정도(正道)는 아니었을지라도 조국과 민족을 위한 것이었음을 이해해달라고 호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0]

7. 3. 1. 적극적 친일론에 대한 반론

이광수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이광수가 항일 민족주의자로 35년 이상 활동하다가 일제강점기 말기 약 6년간 친일로 전향한 점을 들어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61] 이들은 이광수의 친일이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동료 지식인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고 실제로는 독립을 염원한 '거짓 친일'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광수를 '민족의 양심수'라고 부르기도 한다.[162] 소설가 복거일 역시 이광수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친일한 것은 아니라고 평가했다.[164]

다른 한편에서는 이광수의 행적을 '실력 양성론'의 연장선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이광수는 서구 근대 사상에 기반한 실력 양성론자였으며, 조선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당시 근대화에서 앞서 있던 대일본제국의 힘을 빌리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열강에 맞서기 어렵다고 보고, 민족의 실력 양성이라는 목적을 위해 일본과의 협력을 선택했다는 해석이다.[13] 김무관은 한반도 내 세력의 노력이 실제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외부 요인에 의해 독립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구식 근대화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했던 인물들이 비판받게 되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13]

이영훈은 민족 개념이 20세기 일본 통치 하에서 형성된 상상의 정치 공동체이며, 이광수가 이러한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보급한 대표적 지식인이었다고 평가한다.[15] 이광수는 조선 민족의 낙후성을 비판하면서도 민족의 재생 가능성을 믿었고, 일본인처럼 문명화되는 것이 민족 재생의 길이라고 설파했다는 것이다.[15] 서울대학교의 조관자는 이러한 이광수를 "친일 민족주의자"라고 명명했다.[15] 실제로 학도 지원병 출신이자 광복회 회장을 지낸 김우전은 이광수의 소설을 읽고 민족 의식과 근대적 자아에 눈떴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는 당시 많은 조선 청년들이 이광수의 작품을 통해 식민지 현실 속 좌절감을 극복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된다.[15]

7. 3. 2. 독립운동 연장선론과 그 반론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또한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이름이 올랐으며, 당시 공개된 친일 작품 103편은 42명의 문학인 중 가장 많은 수였다.[160]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이광수가 항일 민족주의자로 활동한 기간(약 35~36년)에 비해 친일 행위를 한 기간(약 6년)이 짧다는 점을 들어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61] 이들은 이광수의 친일이 불가피했으며, 동료 지식인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고 내심으로는 독립을 염원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62] 소설가 복거일 역시 이광수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친일한 것은 아니라고 평가했다.[164] 김무관은 이광수가 조선 민족의 실력 양성을 위해, 당시 근대화에서 앞서 있던 대일본제국의 힘을 이용하려 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즉,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열강에 대항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일본을 이용하려 했다는 분석이다.[13] 이영훈은 이광수가 민족이라는 상상의 정치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고 보급한 대표적 지식인이었다고 평가했다.[15] 조관자 (서울대학교)는 그를 “친일 민족주의자”라고 명명하기도 했다.[15] 실제로 학도 지원병 출신인 김우전 제16대 광복회장은 “이광수의 소설을 읽고 민족 의식과 근대적인 자아에 눈떴다”고 고백한 바 있다.[15]

반면,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그가 1909년 〈사랑인가〉를 집필할 때부터 이미 친일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1948년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 보고서에서는 이광수를 '광병적(狂炳的) 친일 급 열렬 협력자'로 강하게 비판했다.[163] 또한 이광수가 내세운 민족 개량주의와 실력 양성론 자체가 조선 민족의 열등성을 전제하고 대일본제국의 통치를 용인하는 논리였기에, 친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다는 비판도 있다.[14] 해방 후 반민족행위처벌법 법정에서는 "나의 친일은 조국을 위한 것이었다!"라고 외치거나, "비록 정도(正道)가 아니더라도 내가 걸어온 길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것이며, 그것 또한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호소한 것으로 전해진다.[10]

7. 4. 허영숙에 의한 매수론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내용을 뒷받침할 정보가 없습니다.)

7. 5. 위장 이혼 논란

(작성할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관련 정보가 부재함)

8. 가족 관계

이광수에게는 이애경(李愛慶)과 이애란(李愛蘭)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1910년 7월, 18세의 나이에 백혜순(白惠順)과 결혼했는데, 이는 중매결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3] 1915년 일본 유학 중 1918년 병을 앓게 되었는데, 이때 자신을 간호해 준 허영숙(許永淑)과 사랑에 빠졌다. 같은 해 첫 부인 백혜순과 이혼하고, 1921년 허영숙과 결혼했다. 허영숙은 도쿄 여자의과대학(구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생이었다.

슬하에 아들 이진근(李震根), 이봉근(李鳳根), 이영근(李永根)과 딸 이정란(李貞蘭), 이정화(李貞華)를 두었다. 1934년 장남이 사망하였다.

9. 평가와 비판

한국 '현대소설의 아버지[166]'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후반 총독부 시책에 협력하는 글을 쓰는 등 친일 행적으로 인해 많은 비판과 논란이 존재한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한편, 유교적인 가치관을 비판하고 여성 해방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당대에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정치적으로 안창호, 김구, 김규식을 지지했던 점도 오랫동안 그에 대한 재평가를 어렵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9. 1. 당대의 평가

일제강점기 말기 미군은 이광수에 대해 교육을 잘 받은 인물이며,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언론인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또한 안창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조선문인협회 회장이자 소년회 활동에 적극적이라고 보았다. 1930년대 투옥되어 고문을 당한 경험이 있으나, 석방 후 일제에 협력하면서 이전의 영향력을 잃었다고 분석했다.[167]

그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 시책에 협조하는 글을 쓴 점은 지속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한편, 유교적 가치관을 비판하고 여성 해방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안창호, 김구, 김규식을 지지했던 점도 오랫동안 그에 대한 재평가를 어렵게 만든 요인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박종화, 이희승, 최현배, 최남선 등 동료 문인들을 중심으로 복권 시도가 이루어졌다. 1957년 11월에는 사상계사 주최로 '육당, 춘원의 밤' 행사가 열렸고, 1963년에는 흥사단과 삼중당 주최로 '이광수전집 완간기념강연회'가 개최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광수의 작품과 활동에 대한 재조명과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도 1980년 이후 그에 대한 조명과 평가가 이루어졌으며, 그의 이름을 딴 '평양 리광수고등중학교[115]'가 개교하기도 했다.

이광수의 친일 행적과 사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술적 평가가 존재한다. 김무관은 이광수가 조선 민족의 역량 강화를 위해 근대화된 대일본제국을 이용하려 했으나, 독립이 외부 요인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시도가 비판받게 되었다고 분석한다.[13] 반면, 그의 민족 개량주의 자체가 조선 민족의 열등성을 전제로 하므로 결국 일제 통치에 타협하고 친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14] 이영훈은 이광수가 20세기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고 보급한 대표적 지식인이라고 평가하며,[15] 조관자는 그를 “친일 민족주의자”로 명명했다.[15] 실제로 학도병 출신인 김우전 광복회장처럼 당시 많은 청년이 이광수의 작품을 통해 민족 의식과 근대적 자아를 형성하고 식민지 현실 극복 의지를 다졌다는 평가도 있다.[15]

9. 2. 긍정적 평가

이광수는 최남선과 함께 언문일치의 신문학 운동을 전개하여 한국 현대 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헌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근대 문학과 현대 문학을 잇는 역할을 했으며, 역사 소설의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한국 근대 문학사의 선구자로서 계몽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현실주의, 인도주의적인 작가로 평가된다. 대중 영합보다는 애국적인 작품, 역사 소설을 썼으며, 가부장제나 조혼 풍습을 비판하고 사회 계몽, 신교육, 과학 기술 문명 수용, 자유 연애 등을 주장하는 다양한 사상과 신념을 작품에 담았다.

또한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이자 계몽주의·민족주의 문학가 및 사상가로서 한국 근대 정신사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168]

숭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한승옥은 이광수의 글이 매우 읽기 쉽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광수가 문장을 쉽게 쓰는 탁월한 재능을 가졌으며, 시장 상인이나 초등학교 졸업자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역사 소설에서 정사와 야사, 민담까지 아우르고 어려운 불교 용어도 쉽게 풀어쓰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깊은 공부 덕분이라고 덧붙였다. 한승옥은 이광수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세계적인 문호가 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친일 문제와 별개로 문학 자체를 평가해야 하며, 이광수의 복합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을 조명하고 그의 시대로 돌아가 장단점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정'이 현대 소설의 효시라는 점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이제 이광수 문학상이 제정될 때도 되었다고 언급했다.[169]

작가 이인화는 이광수를 '근대의 재평가'가 시대정신으로 부상할 때마다 재론될 전형적인 근대인으로 보았다.[54] 이인화는 이광수가 밑바닥에서부터 노력하여 성취를 이룬 과정이 자신에게는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여 자아를 완성할 수 있는 '근대의 자유'를 보여주었으며, 그의 불행한 말년은 '근대가 부여한 자유의 공포'를 가르쳐 주었다고 평가했다.[54]

국민대학교 교수 방민호는 이광수의 산문이 종교적인 깊이를 지니고 있다고 언급했다.[170]

기독교 사상가 함석헌은 이광수와 최남선을 "나라가 기울고 민중이 고난에 빠지려 할 때, 그 아픔을 표현하라고 하늘이 세운 인물들"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광수의 작품들(소년 잡지, 역사, 단군론, 백두산 참관기, 백팔번뇌, 무정, 개척자, 단종애사, 이순신, 원효, 이차돈 등)이 모두 민족과 나라를 위해 슬프고도 힘차게 운 것이라고 보았다. 다만, 함석헌은 그 울음소리가 중도에 막혀버린 점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171]

작가 겸 시인 피천득은 자신을 문학의 길로 이끈 이광수에 대해 재주가 많고 착했지만, 바보 같은 면도 있었다고 술회했다.[72]

고려대학교 교수 김용준은 이광수가 자신을 "충직한 황국신민으로부터 한국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하며[172], 이 때문에 그를 친일 문인으로만 매도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김용준은 이광수의 친일 행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광수가 자신을 한국인으로 만들어 준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141]

미국의 한국학 연구자 가브리엘 실비안(Gabriel Sylvian)은 이광수가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 담론이 보편화되기 전에 동성애를 반감 없이 다룬 작가라고 높이 평가했다.[53]

고려대학교 교수 한승조최남선과 이광수처럼 민족 문화를 위해 노력한 인물들을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73]

이영훈은 이광수를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보급한 대표적 지식인으로 평가했다.[15] 실제로 학도병 출신이자 제16대 광복회 회장을 지낸 김우전은 이광수의 소설을 읽고 민족 의식과 근대적 자아에 눈떴다고 고백했으며, 당시 많은 조선 청년들이 그의 작품을 통해 근대인으로 거듭나고 민족 의식을 키웠다고 평가된다.[15]

9. 3. 부정적 평가

유교적인 가치관을 비판하고 여성 해방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박노자는 이광수를 양면적인 인물로 평가했다. 박노자에 따르면 이광수는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평화와 비폭력을 옹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힘이 있는 자만이 자유와 개성을 논할 수 있다'는 사회진화론적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신조로 삼았다.[24] 박노자는 이러한 이중성이 이광수가 민족을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근본단체'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즉, 이광수가 근대를 배우는 과정에서 개인의 존엄성, 권리, 생명, 자존과 같은 가치를 간과하고, 개인을 민족이라는 거대 담론의 부속품으로만 여겼다는 것이다.[24]

작가 김현주는 이광수의 문학이 보여주는 미적 세계를 "전체주의 정치학의 표현[177]"이라고 평가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또한, 이광수의 '근대 서구' 사상에 기반한 민족 개량주의와 실력 양성론 자체가 조선 민족의 열등성을 전제하고, 일제의 통치와 타협하며 이를 용인하는 논리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러한 사상이 결국 친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14] 이영훈은 이광수가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보급한 대표적 지식인이지만, 그가 추구한 민족주의는 식민 통치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한다. 조관자 (서울대학교)는 이러한 이광수의 특성을 "친일 민족주의자"라고 명명하기도 했다.[15]

9. 4. 기타 시각

소설가 박종화 등을 통해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이 조선총독부가 매수한 밀정이며 이광수를 포섭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허영숙의 밀정 여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이광수의 갑작스러운 귀국에 대해 인간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광수는 일제 총독부의 밀사로 의심받던 아내 허영숙을 만난 뒤 돌연 귀국하여 변절자로 의심받았다.[126] 김우종은 이광수가 일본 유학 시절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맬 때 의사였던 허영숙의 간호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당시 집필 중이던 소설 '무정'도 완성할 수 있었다며, 허영숙은 이광수에게 아내 이상의 존재였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그의 개인적인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비난만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126] 또한, 조선문인협회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 만들어지고 일본인까지 회원으로 참여하여 그들의 지휘 감독 하에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이광수의 친일 행위가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126]

이광수는 본래 서구의 '근대' 사상에 기반한 실력 양성론자였으나, 친일 노선으로 전환한 후에도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이는 조선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당시 근대화에서 앞서 있던 대일본제국의 힘을 빌리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즉, '실력 양성'이라는 목적을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했다는 시각이다. 당시 조선의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열강에 맞서기 어렵다고 보고, 급속한 근대화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열강'으로 일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김무관은 한반도에 남아 있던 세력의 활동이 자립이나 독립으로 직접 이어지지 못하고 외부 요인에 의해 독립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양 근대를 모델로 삼아 한반도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을 이용했던 인물들이 비판받게 되었다고 주장한다.[13]

반면, 이광수의 '근대 서구' 사상에 기반한 민족 개량주의 자체가 조선 민족의 열등성을 강조하고, 대일본제국의 통치와 타협하며 이를 용인하는 논리이며, 결국 친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다는 비판도 제기된다.[14]

이영훈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20세기 일본 통치 이후에 발견된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이며, 이광수가 이러한 민족 의식을 일깨우고 확산시킨 대표적인 지식인이라고 평가했다.[15] 이광수는 당시 조선 사회의 무지, 불결, 무질서, 무기력 등에 절망하면서도, 민족은 영원하며 조선 민족은 반드시 재생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일본인처럼 서로 협동하고 깨끗하며 용감문명인으로 거듭나는 것이 민족 재생의 길이라고 설파했다.[15] 이러한 이광수의 면모에 대해 서울대학교의 조관자는 그를 “친일 민족주의자”라고 명명했다.[15]

실제로 학도 지원병 출신으로 제16대 광복회 회장을 지낸 김우전은 “이광수의 소설을 읽고 민족 의식과 근대적인 자아에 눈떴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처럼 당시 조선의 청년 중 일부는 이광수의 작품을 통해 근대인으로 성장하고 식민지 현실의 좌절감을 극복하며, 조선의 밝은 미래를 개척하려는 민족 의식을 키웠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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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뉴스 【その時の今日】侵略戦争参加督励した李光洙「民族のため親日」弁解 https://japanese.joi[...] 中央日報 2009-08-21
[11] 기타 # 언어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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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논문 朝鮮/韓国における近代と民族の相克:「親日派」を通して https://hdl.handle.n[...] 政治経済史学会
[14] 서적 親日派―李朝末から今日に至る売国売族者たちの正体 御茶の水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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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백과사전 이광수 http://preview.brita[...] 2008-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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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뉴스 아우 優性論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2-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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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뉴스 만물상 五山학교 100년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7-05-07
[26] 서적 송건호전집 12 한길사
[27] 뉴스 일사일언 슬프다, 光文會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4-09-05
[28] 뉴스 국방장관의 악수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7-10-05
[29] 서적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 동아시아 출판사
[30] 웹인용 안중근 동생 안정근, 청산리전투서 맹활약 http://weekly1.chosu[...] 2012-11-05
[31] 기타 # 일반 텍스트
[32] 뉴스 유홍준의 국보순례 145 김관호의 해질녘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1-01-08
[33] 뉴스 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 소설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0-02-05
[34] 뉴스 만물상 신문 연재소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5-11-08
[35] 뉴스 푸른사상, '오늘의 한국문학' 전집 출간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11-08-01
[36] 뉴스 근대식 최초의 서점 회동서관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10-08
[37] 서적 송건호전집 12 한길사 2002
[38] 뉴스 최태영 전학장의 "내가 살아온 20세기"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8-12-31
[39] 뉴스 [만물상] 김규식의 프랑스어 편지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1-12-11
[40] 뉴스 2ㆍ8 독립선언(1919.2.8) http://kid.chosun.co[...] 조선일보 2007-02-07
[41] 뉴스 [케이블TV] Q채널,특집다큐서 이광수 등 학적부 공개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42] 뉴스 Q채널,특집다큐 이광수 등 학적부 공개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8-06-01
[43] 간행물 '한일관계사료집' 편찬
[44] 서적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 한길사 2004
[45] 서적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 동아시아 출판사 2006
[46] 뉴스 <35 > 상하이에서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47] 서적 송건호전집 12 한길사 2002
[48] 서적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 동아시아 출판사 2006
[49] 뉴스 거짓말들아, '안창호'를 읽어라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4-10-27
[50] 뉴스 [만물상] 춘원의 손녀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5-06-17
[51] 뉴스 어려울때 살아갈 힘 줘… 어머니 품 같은 분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52] 서적 무명 : 다시 읽는 이광수 11 맑은소리(동반인) 1999
[53] 뉴스 '문학사상' 2월호 출간 외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07-01-21
[54] 뉴스 [젊은날의 우상] 춘원 이광수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7-09-04
[55] 뉴스 日帝치하 조선일보는 한국文壇의 산실이었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4-12-22
[56]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02-01
[57] 뉴스 날카로운 필봉으로 일제-독재 이겨내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0-02-17
[58] 뉴스 조선일보 사람들(3) 추계 최은희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5-01-16
[59] 뉴스 [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부] <6> 시대를 앞서간 이들의 둥지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0-08-09
[60]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02-01
[61] 뉴스 시대를 잘못 만난 건 사랑만이 아니었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12-29
[62] 뉴스 [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 <32> 신춘문예-현상공모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9-11-18
[63] 뉴스 서울대 전신 경성제대 '1번 학생' 누군가 보니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15-08-11
[64] 뉴스 PC통신 원로방 /구수한 정담가득/"노인이면 다 컴맹 인가요"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4-04-21
[65] 뉴스 [언중언] 단종애사 http://www.kwnews.co[...] 강원일보 2008-03-14
[66] 뉴스 [만물상] 야사(野史)와 정사(正史)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2-07-25
[67] 뉴스 오늘의 소사-6월 26일 http://www.daejonilb[...] 대전일보 2008-06-26
[68] 뉴스 [김윤덕의 사람人] 이기옥 할머니의 '꿈꾸는 인생'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1-09-03
[69] 뉴스 '한국 경제의 거인' 기업인 故 정주영의 뜨거웠던 삶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2-01-07
[70] 뉴스 글을 거의 발표하지 않았던 홍명희 '임꺽정' 연재하며 조선일보에 합류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0-01-12
[71] 뉴스 21세기 한반도의 미래를 논하라, 그들처럼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1-10-22
[72] 뉴스 합계 190세 '추억의 情談'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6-02-22
[73] 뉴스 채만식의 20년대 단편소설 4편 찾았다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02-05-21
[74] 뉴스 ‘수필문학의 거목’ 피천득씨 별세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7-05-26
[75] 뉴스 민족을 깨운 신문… 미래를 여는 언론…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0-04-01
[76] 뉴스 [이영아의 여론女論] 사진 심사로 뽑힌 한국 최초의 ‘미스 코리아’ 최정원사진 심사로 뽑힌 한국 최초의 ‘미스 코리아’ 최정원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2010-11-11
[77] 뉴스 ‘이순신 장군, 스스로 목숨 버렸나’ 400년 논란 추적한다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2-04-28
[78] 뉴스 [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부] <3>민족혼을 고취시키다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0-07-19
[79] 뉴스 출판가, 이순신 관련서 봇물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4-09-01
[80] 뉴스 금광왕, 조선일보를 인수하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4-08-09
[81] 뉴스 계초(방응모) 인수후 지면 혁신·문화사업… "조선일보는 文化신문"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0-01-21
[82] 뉴스 [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조선일보 90년] [4] 이광수·현진건·염상섭·심훈… 조선일보서 '문인(文人) 기자'로 맹활약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0-01-15
[83] 뉴스 뜨끈한 온돌서 조선문화가 태어났다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0-12-04
[84] 뉴스 '에로·그로·넌센스'의 1930년대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2-09-04
[85] 뉴스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10] 축음기와 레코드가 몰고 온 '유행가 범람시대'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2-02-06
[86] 뉴스 抗癌 할미꽃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2-08-25
[87] 뉴스 총독부 요인 송별식 열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1-03-26
[88] 뉴스 명월관 20년대 日서도 문열어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1-03-26
[89] 뉴스 민족운동단체 '흥사단' 창립(1913.5.13) http://kid.chosun.co[...] 조선일보 2003-05-12
[90] 뉴스 상투 튼 ‘잉글리시 티처’를 아십니까?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7-05-11
[91] 뉴스 [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 <19>청담 스님…“난 파계승이다. 정화 끝나면 처사로 살겠다”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1-11-28
[92] 뉴스 일제때 산 사람은 다 친일파이고 '척결' 주장에 정치적 고려 있다고?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2-05-30
[93]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94]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95] 뉴스 만해(萬海)와 벽초(碧初)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4-07-22
[96]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97] 뉴스 친일과 애국 사이… 춘원의 두얼굴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0-01-10
[98] 뉴스 “춘원 창씨개명 ‘香山’은 묘향산 의미”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9-05-11
[99] 뉴스 [최보식이 만난 사람] "획일적인 '친일파' 기준… 역사 해석의 독점권을 가진 당신들은 누구냐?"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11-23
[100] 뉴스 시인 황금찬, '나는 어느 호수…' 문단 이면사 엮어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4-05-31
[101] 서적 이이화와 함께 한국사를 횡단하라 한길사 2004
[102] 뉴스 “화랑 사상 지금 부활해도 좋을듯…”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7-03-03
[103] 웹인용 광복 1년 전 미군(美軍) 정보당국이 작성한 '조선 지도자 5인(人)' 평가표 http://news.chosun.c[...] 2012-11-05
[104] 뉴스 [다이제스트] 동포에 고함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7-05-15
[105] 뉴스 '칼의 노래' 김훈씨에게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1-11-07
[106] 뉴스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경기 남양주 http://san.chosun.co[...] 조선일보
[107]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2004
[108] 뉴스 책, 그 시대의 거울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06-03-31
[109] 뉴스 [책과 길] 출간 60년된 백범일지 감춰진 얼굴 http://www.kukinews.[...] 쿠키뉴스 2008-07-25
[110] 뉴스 그때 오늘 침략전쟁 참여 독려한 이광수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 변명 https://archive.toda[...] 중앙일보
[111] 뉴스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황국신민 대우를... https://news.naver.c[...]
[112]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
[113] 서적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 동아시아 출판사 2006
[114] 뉴스 北, 납북-월북 62人 평양묘역 공개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5-07-27
[115] 뉴스 북,청년들에 군입대 강력 호소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8-04-22
[116] 뉴스 춘원 이광수의 '무정' 영문판 출판 https://archive.toda[...] 조선일보 2005-10-23
[117] 뉴스 '울진원전에서 불교와 문학 학술심포지엄'이 열리다 http://app.yonhapnew[...] 연합뉴스 2008-06-26
[118] 뉴스 [송영옥박사 기독문학세계] 이광수·김동인의 기독교 문학 http://www.christian[...] 크리스천투데이 2008-07-16
[119] 뉴스 [송영옥박사 기독문학세계] 춘원 작품의 기독성 : 독자의 감동을 통해 기독교적 사상을 깨닫게 했던 춘원 http://www.christian[...] 크리스천투데이 2008-07-24
[120] 뉴스 새책 “일제강점기, 그 때를 아십니까?” http://weekly1.chosu[...] 조선일보 2006-05-17
[121] 뉴스 낙산사의 파랑새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5-04-07
[122] 뉴스 무용가 김복희 "40년 춤세계 보여드려요" http://art.chosun.co[...] 조선일보 2011-01-31
[123] 뉴스 ''거창한 찬사''를 벗겨낸 이순신의 인간적 ''맨얼굴''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04-07-09
[124] 뉴스 문화유산 디지털화, 국가가 나서야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1-09-15
[125] 뉴스 [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 <13>멜로의 함정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2-04-05
[126] 뉴스 끝나지 않은 이광수의 친일행적 논란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7-10-02
[127] 서적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28] 뉴스 [김대중 칼럼] 해남·완도의 斷想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2-01-09
[129] 뉴스 누구도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06-21
[130] 뉴스 “문화중심 사회운동이 한국사회 바꿀 것”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31] 뉴스 [만물상]주사(酒邪)파 척결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4-10-27
[132] 뉴스 “문화가 21세기 경쟁력… 90년간 문화주의 제창한 東亞정신 이어야”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0-10-13
[133] 뉴스 새해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8-12-31
[134] 뉴스 암소 꼬리 뻗쳐지면 '우박' 날씨 아는 소처럼 우리도…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35] 뉴스 김서령이 만난 명문가 사람들 {{!}} 영문학자 나영균 고모 나혜석의 추억… 그 쓸쓸한 DNA 스민 듯 https://jmagazine.jo[...] 중앙일보 2005-12-01
[136] 뉴스 소설가 이전에 시인이었던 구보 박태원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11-11-02
[137] 뉴스 아십니까? 詩人 피천득을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0-04-02
[138] 뉴스 작가탐험/피천득 아이눈으로 찾는 생의 '작은 기쁨들' http://weekly1.chosu[...] 조선일보 1999-05-21
[139] 뉴스 모란의 시인 영랑을 추억하며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10-04-09
[140] 뉴스 [사람과 이야기] "아내 사진 볼 때마다 말 걸지요"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0-01-09
[141] 뉴스 김용준 명예교수의 '나의 젊은 시절' 전문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5-09-10
[142] 뉴스 일제의 수탈과 해방의 감격을 지켜본 산 증인 - 군산역 http://travel.chosun[...] 조선일보 2007-11-16
[143] 웹인용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 http://books.chosun.[...] 2012-11-08
[144] 웹인용 최고령 독립유공자 구익균 옹의 ‘103년 나의 삶’ http://weekly1.chosu[...] 2012-11-05
[145] 뉴스 청년 법정 스님을 만나다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11-04-21
[146] 뉴스 원로 법학자 이항녕 전(前) 홍익대 총장 별세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8-09-17
[147] 뉴스 [작가탐험/양귀자] `지금,이곳' 사람들 관심사에 촉각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9-04-20
[148] 뉴스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4-09-13
[149] 뉴스 '한국인 단일민족설'의 기원은?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0-05-26
[150] 뉴스 “일제시대는 ‘식민지적 근대화‘ 시기”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02-09-17
[151] 뉴스 [책마을] ‘20세기 한국문학’ 개인사적 재구성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1-09-14
[152] 뉴스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02-18
[153] 뉴스 중고등학생이 꼭 알아야 할 교과서 단편소설 읽기 (상) http://edu.chosun.co[...] 조선일보 2011-02-09
[154] 뉴스 "금시계·자개장 뽑자" 경품 행사장에 사람들 몰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1-10-03
[155] 뉴스 ‘미인 권하는 사회’… 몸에 집착하는 한국인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1-03-05
[156] 뉴스 <10·끝>철도의 길 근대기 영욕의 흔적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0-03-03
[157] 뉴스 1935년, 동계 백두산에 처음 오른 일본인들 이야기 http://san.chosun.co[...] 조선일보 2010-03-19
[158] 뉴스 내금강, 천하절경 짙고 푸르른 '천년의 숲' 비경 http://travel.chosun[...] 조선일보 2008-05-20
[159] 뉴스 이광수ㆍ한승원 '원효'로 격돌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6-04-26
[160] 저널 친일문학 작품목록 http://www.artnstudy[...] 2007-09-03
[161] 뉴스 끝나지 않은 이광수의 친일행적 논란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연합뉴스) 2007-10-02
[162] 뉴스 춘원은 거짓 친일, 실제는 독립 염원 https://news.naver.c[...]
[163] 웹사이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164] 뉴스 소설가 복거일씨 ‘친일개념’ 논란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2-06-02
[165] 비디오 NHK 다큐멘터리 http://tvpot.daum.ne[...]
[166] 뉴스 문학 인물사 엮은 장석주 시인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09-09-08
[167] 뉴스 광복 1년 전 미군(美軍) 정보당국이 작성한 '조선 지도자 5인(人)' 평가표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8-08-08
[168] 서적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신원문화사 2006
[169] 뉴스 ‘이광수 문학 사전’ 낸 한승옥 교수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02-06-25
[170] 뉴스 근대 명문 모은 '모던 수필' 나와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3-07-15
[171] 뉴스 비판적 지식인 김용준 교수 '춘원·육당·인촌' 회고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5-09-05
[172] 뉴스 춘원·육당·인촌을 위한 '옹호론(論)' 화제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5-09-09
[173] 뉴스 한승조 "소신에 의해 쓴 글…공론화 바란다" http://news.chosun.c[...] 동아일보 2005-03-04
[174] 뉴스 위기마다 부활하는 역사인물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05-03-04
[175] 저널 인물과 사상, 2004년 11월호. 2004-11
[176] 뉴스 역사세우기가 역사 망칠 수도 있어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6-08-23
[177] 뉴스 우리 삶에 뿌리내린 파시즘을 찾아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1-05-27
[178] 뉴스 '염상섭 학술대회' 22일 열린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7-08-19
[179] 뉴스 [다이제스트] 동양정신과의 감각적 만남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7-07-03
[180] 뉴스 아들에게 전하는 `인생의 가치`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1998-12-09
[181] 뉴스 '백년손님' 고구마꽃을 보셨나요?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2-08-09
[182] 뉴스 국악인 얼짱가수 정수빈 신곡 '날 사랑해줘'로 본격 활동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03-31
[183] 뉴스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8) 김구 그는 누구인가 http://weekly1.chosu[...] 조선일보 200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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