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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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홀로섬은 필리핀 술루 군도에 위치한 섬으로, "바다의 흐름"을 의미하는 타우수그어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1876년 스페인군은 홀로섬을 점령하고 요새를 건설했으며, 이후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면서 베이츠 조약을 체결했으나 번역상의 문제로 논란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군에 점령되었다가 미군에 의해 탈환되었으며, 2005년 필리핀군과 아부 사야프 간의 충돌, 2019년 대성당 폭탄 테러 등 사건이 발생했다. 2015년에는 아부 사야프에 의한 납치 사건이 있었으며, 2023년 개봉한 영화 플레인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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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섬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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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섬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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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Sūg / 루파 수그(Lupah Sug) |
위치 | 셀레베스해 술루해 |
군도 | 술루 제도 |
주요 섬 | 바실란 홀로섬 타위타위섬 |
면적 | 869km2 |
최고점 | 투마탕기스산(803m) |
인구 (2015년) | 약 530,000명 |
인구 밀도 | 515.6명/km2 |
민족 | 방잉기 사람 바자우족 술루크/타우수그 참보앙게뇨 |
행정 구역 | |
국가 | 필리핀 |
지역 | 삼보앙가 반도 |
주 | 술루주 |
지방 자치 단체 | 인다난 홀로 칼링갈란 칼루앙 루크 마임붕 올드 파나오 팡리마 에스티노 파랑 파티쿨 탈리파오 |
가장 큰 도시 | 홀로 |
가장 큰 도시 인구 | 87,998명 |
2. 어원
'홀로'라는 이름은 타우수그족이 이 섬을 '술루'(Sulu)라고 부르는 것을 스페인인들이 잘못 들은 것에서 유래했다.[1] '술루'라는 이름은 타우수그어로 '바다의 흐름'을 의미하는 '술로그'(Sūlog) 또는 '술루크'(Sūluk)에서 유래했다.[1]
필리핀에서 스페인 제국의 통치 시대, 스페인군은 여러 차례 실패 끝에 1876년 술루 술탄국의 수도인 졸로시를 점령했다. 스페인군은 노예 약탈 근절과 남부 지역 서구 열강의 존재에 대한 우려로 이 지역 지배력 강화를 위한 마지막 시도를 했다.
3. 역사
1878년 7월 22일, 스페인과 술루 술탄국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1] 그러나 홀로 섬과 타위타위는 군사 기지, 주둔지, 민간인 정착지에만 주권이 제한되어 부분적으로 스페인 통치를 받았다.
1899년 미국은 필리핀에 도착했고, 루손에서 필리핀-미국 전쟁이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미국은 병력 분산을 막기 위해 분할 통치 전술을 사용했다.[2] 키람 술탄은 스페인 패배 후 술루 군도 주권 회복을 기대했으나, 미국으로 통제권이 이양되자 실망했다. 존 C. 베이츠 준장은 필리핀-미국 전쟁에서 술탄국의 중립을 보장하고 민다나오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베이츠 조약을 체결했다.[3]
이 조약은 이전 스페인 조약을 기반으로 했지만, 번역상 불일치가 있었다. 영어 버전은 완전한 종속, 타우수그어 버전은 보호령을 설명했다. 베이츠 조약은 미국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지만, 술탄에게 과도한 자율성을 부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노예 제도 인정 조항은 워싱턴 D.C.에서 논란이 되었다. 베이츠는 이 조약이 북부 전쟁이 끝나고 더 많은 병력을 남부에 투입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임시 조치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03년부터 1914년까지 이슬람교도들은 모로 지방을 거부하고 모로 반란을 일으켰다. 모로 지방 창설 직전, 미국 식민 정부는 점유되지 않은 모든 토지를 공공 토지로 선언했다. 이후 미국 투자가 민다나오에 유입되었고, 기독교인의 대량 이주가 장려되었다.[4] 세베리나 루나 데 오로사와 시스토 오로사는 서양 의학을 이 지역에 도입한 최초의 기독교인 의사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졸로는 일본 제국군에 점령되었다. 1945년, 미국은 졸로 탈환 전투를 벌였다. 술루 술탄국 술탄 무하마드 자나일 아비린 2세는 미군을 지원하여 일본군 격퇴에 기여했다.[5]
2005년 2월, 필리핀군과 아부 사야프 그룹, 누르 미수아리 추종자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최대 12,000명의 피난민이 발생했다. 전투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2019년 1월 27일, 졸로의 카르멜 산의 성모 대성당이 폭탄 테러를 당했다.[6]
3. 1. 스페인 식민지 시대
필리핀에서 스페인 제국의 통치 시대에, 스페인군은 여러 차례 실패한 시도 끝에 1876년 술루 술탄국의 수도인 홀로시를 점령했다.[1]
그 해에 스페인군은 홀로를 점령하기 위한 대규모 작전을 시작했다. 노예 약탈을 근절해야 할 필요성과 남부 지역에 다른 서구 열강이 존재한다는 우려에 자극받아, 스페인군은 이 남부 변경 지역에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했다. 1876년 2월 21일, 호세 말캄포 제독이 이끄는 9,000명의 병력, 11척의 수송선, 11척의 포격선, 11척의 증기선으로 구성된 스페인군 파견대가 홀로를 점령하고 스페인 정착지를 건설했다. 파스쿠알 세르베라 대위는 주둔지를 설치하고 군정 장관을 맡도록 임명되었으며, 1876년 3월부터 12월까지 복무했다. 이후 군정 장관은 다음과 같이 교체되었다.
기간 | 군정 장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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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12월 – 1877년 4월 | 브리지어 장군 호세 폴린 |
1877년 9월 – 1880년 2월 | 카를로스 마르티네스 대령 |
1880년–1881년 | 라파엘 데 리베라 대령 |
1881년–1882년 | 이시드로 G. 소토 대령 |
1882년 | 에두아르도 브레몬 대령 |
1882년–1884년 | 줄리안 파라도 대령 |
1884년–1886년 | 프란시스코 카스티야 대령 |
1886년–1893년 | 후안 아롤라스 대령 |
1893년 | 카이사르 마토스 대령 |
1893년–1896년 | 베난시오 에르난데스 장군 |
1896년–1899년 | 루이스 후에르타 대령 |
1878년까지 스페인군은 홀로에 방어벽과 탑 문을 설치하고 푸에르타 블로카우스, 푸에르타 에스파냐, 푸에르타 알폰소 XII와 같은 내부 요새를 건설했으며, 프린세사 데 아스투리아스 및 토레 데 라 레이나라는 두 개의 외부 요새를 건설했다. 기병대를 포함한 병력이 벽의 보호 구역 안에 주둔했다. 1880년 임명된 라파엘 곤잘레스 데 리베라 총독은 제6연대를 홀로에서 시아시와 봉가오 섬으로 파견했다. 스페인군은 요새에서 안전하지 않았으며, 요새는 산발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1883년 7월 22일, 이름 없는 주라멘타도 세 명이 홀로 타운 광장에 침투하여 스페인인 세 명을 살해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아주라멘타도"라는 단어는 홀로 주둔지에서 복무하면서 이러한 행위를 여러 차례 목격한 스페인군 후안 아롤라스 대령에 의해 만들어졌다.
스페인과 술루 술탄국은 1878년 7월 22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1] 그러나 홀로 섬과 타위타위는 스페인의 군사 기지와 주둔지, 민간인 정착지에만 주권이 제한되어 부분적으로 스페인 통치를 받았다.
3. 2. 미국 통치 시대
필리핀-미국 전쟁 당시, 미국은 루손 지역에서 병력을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 분할 통치 전술을 사용했다.[2] 키람 술탄은 미국의 통치에 반발하며 스페인 패배 이후 술루 군도에 대한 주권 회복을 기대했다. 존 C. 베이츠 준장은 필리핀-미국 전쟁에서 술탄국의 중립을 확보하고 민다나오 지역의 질서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여러 차례 협상을 거쳐 베이츠 조약이 체결되었다.[3]이 조약은 이전 스페인과의 조약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번역 상의 불일치가 존재했다. 영어 버전은 완전한 종속을, 타우수그어 버전은 보호령을 의미했다. 베이츠 조약은 미국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지만, 술탄에게 지나친 자율성을 부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조항은 워싱턴 D.C.에서 반발을 샀다. 베이츠는 훗날 이 조약이 북부 지역 전쟁이 끝나고 더 많은 병력을 남부에 투입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임시 조치였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베이츠 조약으로 인한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03년부터 1914년까지 모로 반란이 발발하면서 이슬람교도들은 민다나오의 정치-군사 정부인 모로 지방에 반발했다. 모로 지방 창설 불과 두 달 전, 미국 식민 정부는 점유되지 않은 모든 토지를 공공 토지로 선언했다. 이 선언 직후, 미국 자본이 민다나오에 유입되었고 기독교인의 대량 이주가 장려되었다.[4] 세베리나 루나 데 오로사와 그녀의 남편 시스토 오로사는 서양 의학을 이 지역에 도입한 최초의 기독교인 의사였다.
3. 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제국군은 졸로를 점령했다. 1945년 4월 2일, 미국 제163연대 제2대대, 제41사단(구 몬타나 주 방위군)이 보르네오섬과 필리핀 사이의 술루 군도에 있는 상가 상가와 봉가오에 상륙했다. 일주일 후, 연대의 다른 두 대대가 민다나오를 떠나 졸로에 상륙하여 섬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다호 산을 격렬하게 방어하며 진격하기 시작했다.[5]술루 술탄국 술탄이자 술루 군도 300,000명의 이슬람교도 지도자인 무하마드 자나일 아비린 2세는 제163연대 사령관인 윌리엄 J. 모로니 대령을 환영하고 일본군을 섬에서 몰아내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163연대는 3주간의 전투에서 37명이 사망하고 191명이 부상당했다. 약 2,600명의 일본군이 사망했고, 87명의 일본군 병사만이 졸로에서 체포되거나 항복했다. 1945년 8월 일본 제국군이 항복한 후, 정글에 숨어 있던 많은 일본군 잔당을 현지 전투원들이 소탕했다.[5]
3. 4. 현대
1899년 미국은 필리핀에 도착했고, 루손에서 필리핀-미국 전쟁이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미국은 병력 분산을 막기 위해 고전적인 분할 통치 전술을 사용했다.[2]키람 술탄은 스페인 패배 후 술루 군도에 대한 주권을 되찾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미국으로 통제권이 이양되자 실망했다. 존 C. 베이츠 준장의 주요 목표는 필리핀-미국 전쟁에서 술탄국의 중립을 보장하고 민다나오에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협상 끝에 베이츠 조약이 체결되었다.[3]
이 조약은 이전 스페인 조약을 기반으로 했지만, 번역상의 불일치가 있었다. 영어 버전은 완전한 종속을, 타우수그어 버전은 보호령을 설명했다. 베이츠 조약은 미국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지만, 술탄에게 과도한 자율성을 부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조항은 워싱턴 D.C.에서 논란이 되었다. 베이츠는 이 조약이 북부 전쟁이 끝나고 더 많은 병력을 남부에 투입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임시 조치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03년부터 1914년까지 이슬람교도들은 모로 지방을 거부하고 모로 반란을 일으켰다. 모로 지방 창설 직전, 미국 식민 정부는 점유되지 않은 모든 토지를 공공 토지로 선언했다. 이후 미국 투자가 민다나오에 유입되었고, 기독교인의 대량 이주가 장려되었다.[4] 세베리나 루나 데 오로사와 시스토 오로사는 서양 의학을 이 지역에 도입한 최초의 기독교인 의사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졸로는 일본군에 점령되었다. 1945년 4월 2일, 미국 제163연대 제2대대, 제41사단(구 몬타나 주 방위군)이 상가 상가와 봉가오에 상륙했다. 일주일 후, 연대의 다른 두 대대가 민다나오에서 졸로로 이동하여 섬 최고 지점인 다호 산을 공격했다. 술루 술탄국 술탄 무하마드 자나일 아비린 2세는 제163연대 사령관 윌리엄 J. 모로니 대령을 환영하고 일본군 격퇴를 약속했다. 3주간의 전투에서 163연대는 37명이 사망하고 191명이 부상당했다. 약 2,600명의 일본군이 사망했고, 87명만이 생포되거나 항복했다. 1945년 8월 일본 항복 후, 정글에 숨어 있던 일본군 잔당은 현지 전투원들에게 살해되었다.[5]
2005년 2월, 필리핀군 4,000~5,000명은 아부 사야프 그룹 800여 명, 누르 미수아리 추종자들과 충돌했다. 최대 12,000명이 전투를 피해 도망쳤다.
2019년 1월 27일, 졸로의 카르멜 산의 성모 대성당이 폭탄 테러를 당했다.[6]
4. 납치 문제
2015년 9월 22일, 노르웨이 소트라 출신의 56세 크야르탄 세킹스타드는 아부 사야프 이슬람 무장 단체에 의해 사말 섬의 고급 관광 리조트에서 납치되었다. 당시 68세의 캐나다인 존 리즈델과 67세의 로버트 홀, 그리고 홀의 여자친구인 필리핀 여성 마리테스 플로르도 함께 납치되었다. 2016년 4월과 6월에 캐나다인들은 몸값을 지불하지 못해 참수되었고, 2016년 6월에 플로르는 풀려났다.[7]
2016년 9월 17일, 세킹스타드는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약 약 965.60km 떨어진 홀로 섬에서 풀려났다. 아부 사야프는 그의 석방을 위해 638000USD의 몸값을 받았다.[8] 그는 반군 단체인 모로 민족 해방 전선(MNLF)에 넘겨졌다. MNLF는 필리핀 정부와 평화 회담을 진행 중이며 그의 석방을 위해 당국과 협력해 왔다. 누가 몸값을 지불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노르웨이 당국은 아니었다.
5. 대중문화
미국 영화 ''플레인''(2023)에서 여객기가 이 섬에 비상 착륙하고, 생존자들은 현지 테러리스트들과 대처해야 한다.
참조
[1]
간행물
Coleccion de los tratados, convenios y documentos internationales
https://books.google[...]
[1]
간행물
Gaceta de Manila, Año XVlll, Tomo II, numero 0052
http://digitallibrar[...]
1878-08-21
[2]
서적
The War of 1898, and U.S. Interventions, 1898–1934: 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13-03-08
[3]
웹사이트
The Bates Treaty
http://www.philippin[...]
2015-06-26
[4]
문서
Rodil 1985:4
[5]
서적
Montana's Home Front During World War II
Big Elk Books
2012
[6]
뉴스
Jolo church attack: Many killed in Philippines
https://www.bbc.com/[...]
BBC
2019-01-27
[7]
웹사이트
Abu Sayyaf has released Sekkingstad
http://norwaytoday.i[...]
2019-01-27
[8]
웹사이트
Abu Sayyaf frees Norwegian hostage Kjartan Sekkingstad
https://www.aljazeer[...]
2023-11-23
[9]
뉴스
比イスラム過激派、カナダ人の人質殺害 トルドー首相発表
https://www.afpbb.co[...]
201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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