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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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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요는 1216년 거란족 야율사불이 건국한 단명한 왕조이다. 1211년 몽골의 지원을 받아 금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야율유가의 동요에서 분열되어 나왔다. 야율사불은 황제를 칭하고 '요'를 국호로 사용했지만, 야율유가의 동요와 구별하기 위해 후요로 불렸다. 이후 후요는 내분과 금나라, 고려와의 전투, 몽골의 침략을 겪으며 1219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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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요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국호 (정식 명칭)후요 (後遼)
통칭후요 (後遼)
역사
성립야율시불이 황제를 자칭 (1216년)
멸망동요에 의해 패망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역대 지도자야율시불 (耶律斯不, 1216년)
야율걸노 (乞奴, 1216년)
야율금산 (金山王子, 1216년 ~ 1217년)
야율통고여 (統古與, 1217년 ~ 1218년)
야율함사 (喊舍, 1218년 ~ 1219년)
지도자 직함황제, 왕
수도
수도청저우해성은 후요국의 수도였다
통용 언어 및 민족
공용어거란어
민족거란족
경제
통화중국 화폐, 중국 주화, 구리 동전 등
지도 및 국기
기타 정보
건국 이전동요 (1213년)
주요 사건야율시불이 황제를 자칭
멸망 원인동요에 의해 패망
계승 국가동요
현재 국가중국

2. 역사

1211년 금나라 장수였던 야율유가몽골의 후원 아래 요동 지방에서 금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성공했지만, 야율유가의 친 몽골 정책은 동요 조정 내에서 분열을 일으켰다. 1216년 야율유가의 동생 야율시불은 칭기즈 칸에게 복종하지 않은 거란인들을 규합하여 요나라 부흥을 목적으로 대요수국을 건국하고 황제를 칭하며 '''후요'''(後遼|후요중국어)라 칭했다. 그러나 야율시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당했고, 재상 야율기누가 섭정이 되었다.[3]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야율기누는 도주하다 야율금산에게 살해당했다. 야율금산은 고려에서 후요의 황위에 올랐으나, 1217년 고려군은 야율금산을 격파하고 도주하게 만들었다.

야율금산의 후계자 야율통고유는 후요의 통치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야율한사에게 살해당했다. 후요 내에서 내분이 계속되자, 1219년 동요, 몽골 제국, 고려의 연합군이 후요를 포위했다. 야율한사는 후요의 패배 직후 자결했고, 이는 단명한 왕조의 종말을 알렸다.[2] 한때 후요가 차지했던 영토는 다시 동요에 병합되었다.

2. 1. 건국 배경

1211년 금나라 장수였던 야율유가몽골의 후원 아래 요동 지방에서 금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1213년 3월, 야율유가는 "요왕"을 칭하고, 동생 야율사불을 "군왕"으로 임명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4][5]

1215년, 동요는 금나라의 동경(요양부)을 함락시켜 세력을 확대했지만, 야율유가는 몽골군에서 파견된 야율가특가가 포선만노의 아내 이선아를 취한 것을 비난했기 때문에, 양자 간의 사이는 악화되었다.[6] 또한, 야율사불은 야율유가에게 황제를 칭할 것을 여러 번 권했지만, 야율유가는 몽골 제국을 자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거절하고, 병을 핑계로 칭기즈 칸을 찾아가 다시 충성을 맹세했다.[7]

칭기즈 칸의 신뢰를 얻은 야율유가는 다시 사자를 파견하여 야율가특가를 포선만노의 아내를 취한 것을 이유로 구금하려 했지만, 이를 알게 된 야율가특가는 야율사불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야율유가는 이미 죽었다"고 속여 자립했다.[8] 1216년, 야율사불은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천위(天威)로 정했다.[9] 야율사불은 야율유가와 마찬가지로 "요"를 국호로 삼았지만, 이 정권은 야율유가의 요(동요) 등과 구별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후요'''"라고 불린다.[2]

2. 2. 후요의 성립과 발전

1211년 금나라 장수였던 야율유가는 몽골의 후원 아래 요동 지방에서 금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성공했고 야율유가는 칭기즈 칸에 복종했지만, 야율유가를 따라 칭기즈 칸에게 복종하지 않은 거란인들도 있었다. 야율시불은 이들을 규합하여 요나라 부흥운동을 목적으로 1216년 대요수국을 건국했다.[2]

1213년 금나라에 반기를 든 야율유가는 동요를 선포했다. 그의 친 몽골 정책은 동요 조정 내에서 분열을 일으켰고, 결국 야율사불(야율유가의 동생)이 '''후요'''(後遼|중국어)'로 알려진 독립 정권의 황제를 자칭하며 공식 왕조 명칭을 "'''요'''(遼|중국어)"로 선포했다.[2] 황제를 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야율사불은 살해당했다. 재상 야율기누가 섭정이 되었다.[3]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야율기누는 도주하다 야율금산에게 살해당했다. 야율금산은 고려에서 후요의 황위에 올랐다. 1217년 고려군은 야율금산을 격파하고 그를 도주하게 만들었다.

야율금산의 후계자 야율통고유는 후요의 통치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야율한사에게 살해당했다. 후요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동요, 몽골 제국, 고려의 연합군이 후요를 포위했다. 1219년 야율한사는 후요의 패배 직후 자결했고, 이는 단명한 왕조의 종말을 알렸다.[2] 한때 후요가 차지했던 영토는 다시 동요에 병합되었다.

1211년 몽골군의 침공을 받은 금나라는 내몽골의 거란족의 배반, 야호령 전투에서의 참패로 인해 장성 이북의 통제를 잃었다. 이 이상의 거란족의 배반을 두려워한 금나라 조정은 요서·요동 방면의 거란족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지만, 오히려 이 대응에 불만을 품은 야율유가가 금군을 격파하고, 몽골군의 도움을 받아 자립했다. 1213년 3월 야율유가는 "요왕"을 칭하고, 동생 야율사불을 "군왕"으로, 야율파사·야율승가노·야율야적·야율이가노 등을 승상·원수·상서로, 야율통고여를 행원수부사로 임명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4][5]

1215년 동요는 금나라의 동경(요양부)을 함락시켜 세력을 확대했지만, 야율유가는 몽골군에서 파견된 야율가특가가 포선만노의 아내 이선아를 취한 것을 비난했기 때문에, 양자 간의 사이는 악화되어 갔다.[6] 또한 야율사불은 야율유가에게 황제를 칭할 것을 여러 번 권했지만, 야율유가는 몽골 제국을 자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거절하고, 병을 핑계로 칭기즈 칸을 찾아가 다시 충성을 맹세했다.[7]

칭기즈 칸의 신뢰를 얻은 야율유가는 다시 사자를 파견하여 야율가특가를 포선만노의 아내를 취한 것을 이유로 구금하려 했지만, 이를 알게 된 야율가특가는 야율사불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야율유가는 이미 죽었다"고 속여 자립했다.[8] 1216년 야율걸노·야율금산·야율청구·야율통고여 등에 의해 추대된 야율사불은 황제를 칭하고, 천위로 개원했다.[9] 야율사불은 야율유가와 마찬가지로 "요"를 국호로 삼았지만, 이 정권은 야율유가의 요(동요) 등과 구별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후요"라고 불린다.

2. 3. 고려 침공

1213년, 금에 반기를 든 야율유가는 동요를 선포했다. 그의 친 몽골 정책은 동요 조정 내에서 분열을 일으켰고, 결국 야율사불(야율유가의 동생)이 ''''후요'''(後遼|c=後遼중국어)'''로 알려진 독립 정권의 황제를 자칭하며 공식 왕조 명칭을 "'''요'''(遼|c=遼중국어)"로 선포했다.[2] 황제를 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야율사불은 살해당했고, 재상 야율기누가 섭정이 되었다.[3]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야율기누는 도주하다 야율금산에게 살해당했다. 야율금산은 고려에서 후요의 황위에 올랐다. 1217년, 고려군은 야율금산을 격파하고 그를 도주하게 만들었다.

야율금산의 후계자 야율통고유는 후요의 통치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야율한사에게 살해당했다. 후요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동요, 몽골 제국, 고려의 연합군이 후요를 포위했다. 1219년, 야율한사는 후요의 패배 직후 자결했고, 이는 단명한 왕조의 종말을 알렸다.[2]

야율사불은 백관을 두고 야율걸노를 승상으로, 야율류고의 형 야율독랄을 평장으로 임명하는 등 국가 제도를 정비했다. 그러나 야율사불은 즉위 후 70여 일 만에 야율청구에게 살해당했다. 승상 야율걸노가 감국으로서 국정을 맡았고, 원수 어아와 함께 병민을 좌익·우익으로 나누어 고려와 국경이 가까운 开州 (辽朝)|개주중국어(현재 펑청 시)·保州 (辽代)|보주중국어(현재 의주군)에 주둔했다.[10][11]

금나라는 개주의 수장 중가노를 파견하여 후요 정권을 공격했고, 야율류고 또한 몽골군 수천 명을 빌려 후요군을 격파했다.[12] 겹겹이 포위된 후요 정권은 동남쪽으로 도망쳐 고려에 침입했지만, 후요 정권이 고려에 이르게 된 경위는 《원사》와 《고려사》에서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원사》는 야율사불 사후 야율걸노가 감국으로 국정을 맡아 고려에 침입한 후 야율금산이 야율걸노를 죽이고 국왕을 칭하며 "천덕"으로 개원했다고 한다.[13] 반면 《고려사》에 따르면 "거란인 왕자" 야율금산은 고려에 들어가기 전부터 "대요수국왕"을 칭하고 "천성"으로 개원했으며, 금나라 군대와의 전투를 위해 고려에 병량 보급을 요구했고, 고려 측이 응하지 않자 "그 장수 어아·걸노"를 파견하여 고려 영토에 침공했다고 한다.[14] 이후 묘향산 전투에서 야율걸노가 전사했을 때 휘하 군단을 접수했다.[15][16] 《고려사》 "고종세가"에 따르면 야율걸노 등 거란군(후요군)이 고려에 침공한 것은 1216년 8월 14일이었다.[17][18]

후요의 국왕이 된 야율금산 또한 내부 갈등 끝에 야율통고여에게 살해당했고, 야율통고여도 야율함사(耶律喊舎)에게 살해당하면서 후요의 지배권은 야율함사가 쥐게 되었다.[13]

2. 4. 멸망

1213년, 금에 반기를 든 야율유가동요를 선포했다. 그의 친 몽골 정책은 동요 조정 내에서 분열을 일으켰고, 결국 야율유가의 동생인 야율시불이 ''''후요'''(後遼|후요중국어)'''로 알려진 독립 정권의 황제를 자칭하며 공식 왕조 명칭을 "'''요'''(遼|요중국어)"로 선포했다.[2] 황제를 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야율시불은 살해당했고, 재상 야율기누가 섭정이 되었다.[3]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야율기누는 도주하다 야율금산에게 살해당했다. 야율금산은 고려에서 후요의 황위에 올랐으나, 1217년 고려군은 야율금산을 격파하고 그를 도주하게 만들었다.

야율금산의 후계자 야율통고유는 후요의 통치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야율한사에게 살해당했다. 후요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동요, 몽골 제국, 고려의 연합군이 후요를 포위했다. 1219년, 야율한사는 후요의 패배 직후 자결했고, 이는 단명한 왕조의 종말을 알렸다.[2] 한때 후요가 차지했던 영토는 다시 동요에 병합되었다.

1218년 4월, 거란군은 청천강·대동강 유역으로 남하하였고, 고려는 조충 대신 김군수를 서북면 병마사로 임명했다.[19][20] 같은 해, 거란군은 양주(운산군·박천군 사이)를 침략하고, 곡주(황해도의 동단)에서 고려군과 싸웠다.[21][22] 조충은 여러 도의 군사를 모아 장군 이돈수·김계봉 등과 함께 거란군을 토벌하여, "적의 수괴(=함사)"는 강동성으로 퇴각했다.[23]

같은 해 12월, 고려 동북 국경에 "몽골 원수" 하진과 찰랄이 이끄는 몽골 제국군 1만 명과, 포선만노가 파견한 완안자연이 이끄는 대진국 군 2만의 연합군이 나타나 고려에 협력하여 "단적(=후요 정권)" 토벌을 제안했다.[24][25] 폭설로 인해 몽골·대진국 연합군은 병참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고, 강동성 공격이 어려웠다.[26] 하진은 통역 조중상과 진사 임경화를 조충에게 파견하여, "황제는 거란군이 너희 나라로 도망쳐 3년이 되었으나, 아직 소멸시키지 못하고 있어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하려 한다. 너희 나라가 군량을 지원해주면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황제는 '적(후요)을 무찌른 후, 형제의 관계를 맺자'고 명했다"라고 전했다.[27] 조충은 상서성의 허가를 얻은 후 김량경에게 쌀 1천 석을 수송하게 했고, 몽골·대진국 양 원수는 연회를 베푼 후 "양국이 형제의 관계를 맺은 것을 국왕에게 보고하고 문서를 받으면, 우리는 그것을 황제에게 보고하겠다"라고 말했다.[28][29]

고려군과 몽골·대진 연합군은 협력하여 강동성을 공격하기로 약속했고,[30] 남문-동남문은 하진의 몽골군, 서문-북쪽은 완안자연의 대진국군, 동문-북쪽은 김취려의 고려군이 담당하기로 결정되었다.[31] 연합군의 위용에 후요군은 전의를 상실했고, 40여 명이 몽골군에 항복했다. "적의 수괴인 함사 왕자"는 스스로 목을 매어 1219년 1월 14일에 강동성이 함락되었다.[32] 후요 관인·군졸·부녀 5만여 명은 항복했고, 하진 등은 함사의 처자 및 고관 100여 명을 처형한 외에는 포로로 삼았다.[33][34]

야율함사의 죽음과 강동성 함락으로 후요 정권은 붕괴되었고, 잔존 세력은 동요 정권에 재흡수된 것으로 보인다.[35]

3. 역대 황제

이름연호재위 기간비고
야율시불천위1216년 (70일 남짓)[2]
야율걸노천우1216년
야율금산천덕1216년 ~ 1217년 (약 2년)
야율통고여1217년 ~ 1218년
(야율함사와 합쳐서 약 2년)
야율함사1218년 ~ 1219년
(야율통고여와 합쳐서 약 2년)



후요에서 황제 칭호를 사용한 유일한 군주는 황제인 야율시불이었다. 그 이후의 모든 통치자들은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참조

[1] 웹사이트 海城曾是后辽国的都城 http://www.cssn.cn/l[...]
[2] 서적 契丹钱树鉴赏与投资 https://books.google[...] Beijing Book Co.
[3] 서적 少数民族入主中国史略 https://books.google[...] Lulu.com
[4] 문서 『元史』巻149列伝36耶律留哥伝,「癸酉三月、推留哥為王、立妻姚里氏為妃、以其属耶廝不為郡王、坡沙・僧家奴・耶的・李家奴等為丞相・元帥・尚書、統古与・著撥行元帥府事、国号遼」
[5] 문서 池内1943,568頁
[6] 문서 池内1943,567頁
[7] 문서 『元史』巻149列伝36耶律留哥伝,「乙亥、留哥破東京、可特哥娶万奴之妻李僊娥、留哥不直之、有隙。既而耶廝不等勧留哥称帝、留哥曰『向者吾与按陳那衍盟、願附大蒙古国、削平疆宇。倘食其言而自為東帝、是逆天也、逆天者必有大咎』。衆請愈力、不獲已、称疾不出。潜与其子薛闍奉金幣九十車・金銀牌五百、至按坦孛都罕入覲」
[8] 문서 『元史』巻149列伝36耶律留哥伝,「留哥遣大夫乞奴・安撫禿哥与倶、且命詰可特哥曰『爾妻万奴之妻、悖法尤甚。其拘縶以来』。可特哥懼、与耶廝不等紿其衆曰『留哥已死』。遂以其衆叛、殺所遣三百人、惟三人逃帰。事聞、帝諭留哥曰『爾毋以失衆為憂、朕倍此数封汝無吝也。草青馬肥、資爾甲兵、往取家孥』」
[9] 문서 『元史』巻149列伝36耶律留哥伝,「丙子、乞奴・金山・青狗・統古与等推耶廝不僭帝号於澄州、国号遼、改元天威、以留哥兄独剌為平章、置百官」
[10] 문서 『元史』巻149列伝36耶律留哥伝,「方閲月、其元帥青狗叛帰于金、耶廝不為其下所殺、推其丞相乞奴監国、与其行元帥鵝児、分兵民為左右翼、屯開・保州関」
[11] 문서 池内1943,569頁
[12] 문서 『金史』巻14宣宗本紀上に「[貞祐四年三月]丙子、曲赦遼東路」とあるのは、この時の戦いで金朝が遼東路を回復したことを反映していると考えられる(池内1943,569-570頁)。
[13] 문서 『元史』巻149列伝36耶律留哥伝,「乞奴走高麗、為金山所殺、金山又自称国王、改元天徳。統古与復殺金山而自立、喊舎又殺之、亦自立」
[14] 문서 『高麗史』巻103列伝16金就礪伝,「金就礪、彦陽人。……高宗三年、契丹遺種金山王子・金始王子、脅河朔民、自称大遼収国王、建元天成。蒙古大挙伐之、二王子席巻而東、与金兵三万、戦于開州館。金兵不克、退守大夫営、二王子進攻之、遣人告北界兵馬使云『爾不送粮助我、我必侵奪汝疆。我於後日樹黄旗、汝来聴皇帝詔。若不来、将加兵于汝』。至其日、果樹黄旗、兵馬使不往。明日、使其将鵝児・乞奴、引兵数万、渡鴨緑江、攻寧朔等鎮、掠城外財穀畜産而去」
[15] 문서 『高麗史』巻103列伝16金就礪伝,「平虜鎮都領禄進、亦撃殺七十餘級、賊遂踰清塞鎮遁去。或云『香山之戦、賊将只奴中箭死、金山摠領其衆』」
[16] 문서 池内1943,602頁
[17] 문서 『高麗史』巻22高宗世家一,「[高宗三年八月]乙丑、契丹遺種金山・金始二王子、遣其将鵝児・乞奴二人、引兵数万、渡鴨緑江、侵寧朔・定戎之境」
[18] 문서 池内1943,573頁
[19] 문서 『高麗史』巻22高宗世家一,「[高宗五年夏四月]丙寅、中軍兵馬使報丹兵大至。丁卯、以左諫議大夫金君綏、代趙沖為西北面兵馬使」
[20] 문서 池内1943,600頁
[21] 문서 『高麗史』巻22高宗世家一,「[高宗五年八月]癸亥、丹兵寇楊州。己巳、西海道防守軍与丹兵、戦于谷州、斬首三百餘級」
[22] 문서 池内1943,601頁
[23] 문서 『高麗史』巻103列伝16趙沖伝,「沖等道長湍至洞州、遇賊東谷、擒其謀克高延・千戸阿老、次成州、以待諸道兵。慶尚道按察使李勣引兵来、遇賊不得前、遣将軍李敦守・金季鳳、撃之以迎勣。既而、賊従二道、倶指中軍、我張左右翼、鼓而前、賊軍望風而潰。敦守等与勣来会、録事申仲諧分其兵輸軍食、賊又要之。将軍朴義隣敗之于禿山。賊散而復集、騎数万尽鋭来攻。我又敗之。亜将脱剌逃帰。賊魁又欲引還、慮我要其帰路、入保江東城」
[24] 문서 『高麗史』巻22高宗世家一,「[高宗五年]十二月己亥朔、蒙古元帥哈真及札剌、率兵一万、与東真万奴所遣完顔子淵兵二万、声言討丹賊、攻和・猛・順・徳四城、破之、直指江東城」
[25] 문서 この時、モンゴル軍が落とした和州([[金野郡]])・猛州(金野郡と[[孟山郡]]の境界)・順州([[徳川市]]と[[成川郡]]の中間)・徳州(徳川市)の諸城は現在の咸鏡南道から平安南道に属しており、モンゴル軍は東方から回り込むようにして後遼政権の拠点である江東方面(現在の平安北道)に進んだと見られるため(池内1943,603-604頁)。
[26] 문서 池内1943,604頁
[27] 문서 『高麗史』巻103列伝16趙沖伝,「蒙古太祖、遣元帥哈真及札剌、率兵一万、与東真万奴所遣完顔子淵兵二万、声言討契丹賊、攻和・孟・順・徳四城破之、直指江東。会天大雪、餉道不継、賊堅壁以疲之。哈真患之、遣通事趙仲祥、与我徳州進士任慶和、来牒元帥府曰『皇帝以契丹兵逃在爾国、于今三年、未能掃滅故、遣兵討之。爾国惟資糧是助、無致欠闕』。仍請兵、其辞甚厳。且言『帝命、破賊後、約為兄弟』」
[28] 문서 『高麗史』巻103列伝16趙沖伝,「於是、以尚書省牒答曰『大国興兵、救患弊封、凡所指揮、悉皆応副』。沖即輸米一千石、遣中軍判官金良鏡、率精兵一千護送。及良鏡至、蒙古・東真両元帥、邀置上坐、宴慰曰『両国結為兄弟、当白国王、受文牒来則、我且還奏皇帝』」
[29] 문서 元帥の哈真らは両国が同盟関係を結んだ証として、尚書省の牒だけでは不十分で、国王自らの文牒が必要であると判断したとみられる(池内1943,605頁)。なお、高麗側の記録にこの国王自らの文牒が欲しいという要求にどう対応したかは記載されていないが、『元史』巻208列伝95高麗伝に「[太祖]十四年正月、高麗は権知閤門祗候の尹公就・中書注書の崔逸を派遣して和を結び牒文を札剌の行営に送った」とあるのが、この要求に対する高麗側の返答であったとみられる(池内1943,605頁)。
[30] 문서 『高麗史』巻103列伝16金就礪伝,「明年、就礪乃与知兵馬事韓光衍、領十将軍兵及神騎・大角・内廂精卒、往焉。……約詰朝会江東城下」
[31] 문서 『高麗史』巻103列伝16金就礪伝,「去城三百歩而止、哈真自城南門至東南門鑿池、広深十尺。西門以北、委之完顔子淵、東門以北、委之就礪、皆令鑿隍、以防逃逸」
[32] 문서 『高麗史』巻22高宗世家一,「[高宗]六年春正月辛巳、趙沖・金就礪、与哈真・子淵等、合兵、囲江東城、賊開門出降」
[33] 문서 『高麗史』巻103列伝16金就礪伝,「賊勢窘、四十餘人踰城、降於蒙古軍前、賊魁喊舎王子自縊死。其官人・軍卒・婦女五万餘人、開城門出降、哈真与沖等、行視投降之状。王子妻息、及偽丞相・平章以下百餘人、皆斬於馬前、其餘悉寛其死、使諸軍守之」
[34] 문서 『元史』巻208列伝95高麗伝,「太祖十一年、契丹人金山・元帥六哥等領衆九万餘竄入其国。十二年九月、攻抜江東城拠之。十三年、帝遣哈只吉・札剌等領兵征之。国人洪大宣詣軍中降、与哈只吉等同攻囲之。高麗王奉牛酒出迎王師、且遣其枢密院使・吏部尚書・上将軍・翰林学士承旨趙沖共討滅六哥。札剌与沖約為兄弟。沖請歳輸貢賦」
[35] 문서 池内1943,612-613頁
[36] 서적 『元史』巻149列伝36耶律留哥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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